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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2339 추천 수 0 2009.07.02 07:2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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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17:16-21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94 / 1990.02.04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사도행전 17:16-21

사도행전 17:16 이하에서는 바울이 아테네에 도착해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테네는 세계 문명을 주도하고 있는 양대 산맥의 한 본거지입니다. 이스라엘을 근거로 한 헤브라이즘과 그리스 아테네를 근거로 한 헬레니즘, 이 두 사상이야말로 오늘날 세계의 사상을 압도하고 있는 양대 산맥입니다.

여기 와서 사도 바울이 아테네 사람과 만나서 복음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기 앞서 아테네 사람들을 지적하고 있는 이 한마디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저들이 지식과 철학적으로 아무리 오묘한 것들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영원한 것을 갖고 있고 진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 눈으로 볼 때는 저들의 생애가 이것 하나로 표현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21절에 있는 것과 같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에 모든 시간을 쓴다는 것입니다. 새 것과 재미,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인을 제외한 모든 자연인들이 그들 생애의 목표요, 원리요, 추구하는 모든 것을 한마디로 설명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새 것과 재미, 이 둘은 표현이 다르지만 그 내용상 공통되는 점을 여러 가지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둘다 권위를 무시하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새 것이라는 말이나 재미라는 말은 아주 일치합니다.

새 것이라는 말은 헌 것의 반대말입니다. 그 말 속에는 지나간 것과 연속성을 가진다는 것을 거부한다는 뜻이 포함됩니다. 새 것이라는 것은 전통을 이을 마음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거기에는 절대적인 목표와 절대적인 가치 추구가 없다는 것이 됩니다. 늘 그때마다 새 것으로 갈아 끼울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추구하여 온 것과 앞으로 추구하여 나갈 것에 연속성이 없으며, 연속성이 없다는 것은 절대 진리를 향한 일관된 목표도 추적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자기를 모든 가치 척도의 주인으로 놓았을 때 일어나는 필수 불가결한 결론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모든 가치를 판단하고 모든 것의 주인이 될 때 자기가 원치 않으면 갈아 치울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그 당시 가치의 최고 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므로 일관성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하는 모든 가치가 진리와 절대적인 것이 아닌 한 결국 재미라는 것으로 흘러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누구에게는 명예일 수 있고 누구에게는 부일 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자존심일 수도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 가면 바로 이런 사람들의 삶의 형태에 대하여 성경의 지적이 나옵니다.

디모데후서 3:1입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1-5)

여기서 나온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권위 부재하에서 일어나는 당연한 현상들인 것입니다. 권위가 없다는 것은 말 그대로 권위가 없다는 듯이 아니라 그 권위가 주어져야 할 절대자에게 그 권위가 있지 않고 상대적으로 유한한 우리가 그 권위를 붙잡고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절대 진리, 절대 권위가 없고 상대적 권위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에게 부딪히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내가 기준이 되어 판단하는 실력밖에 가지고 있지 못할 때 우리는 권위의 부재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2절을 다시 봅시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기가 주인이 된 것입니다. 권위자에 대한 순종과 감사가 없습니다. 쉽게는 부모를 거역하고 교만하여 남을 훼방합니다. 다 자기를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이 존재해야 합니다. 돈을 사랑합니다. 돈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정하고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고 사나우며 배반하며 조급합니다. 절대 권위가 없으면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를 절제할 수 없습니다. 순종할 권위가 없는 한 사람은 그때그때의 기분에 의해 살 수밖에 없습니다. 조급하고 변덕스럽고 쾌락을 좇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얼마나 일치합니까?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오늘날 그렇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과거나 현재나 늘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이 생명된 진리를 알지 못하면 인간은 언제나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늘날 한국에도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게 번져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권위가 얼마나 망가져 있는가를 말씀드리려고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나온 것이 5-10년 정도 되었습니다. 젊은 사람들 사이에 이런 농담이 나왔습니다. 권위를 부정하는 우스개 소리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길을 가다가 빵을 1000원 어치 샀습니다. 빵을 5개 사서 하나는 아들을 주고 나머지 네 개는 아버지가 먹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들아 배부르지” 그러자 아들이 말하기를 “내 배가 부르면 4개 먹은 사람 배는 터졌겠네”하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농담이 우습지 않습니다. 이 농담이 갖는 깊은 반발을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어렸을 때는 이런 농담 안 했습니다. 우리 때에는 더 나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문명이 발달하고 교육을 더 많이 받았다고 하여서 나아지지 않습니다 .절대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자식들은 우리가 먹을 것 먹지 않고 입을 것 입지 않고 잘 먹이고 잘 입힌 자식들입니다. 이런 자식들이 이런 농담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식에게 잘 해준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또 하나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목욕탕에 갔습니다. 아버지가 탕 안에 들어가서 시원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이 얼른 탕안으로 뛰어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물이 무척 뜨거웠습니다. 그때 아들이 나와서 무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진심을 꿰뚫어 볼 줄 아셔야 됩니다. 인간이 어떤 짐승이냐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두 눈을 멀겋게 뜨고 있다고 다 인간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도 신앙인답게 살고 있지 않고 여러분 자녀들도 제대로 올바르게 키우고 있지 않습니다. 불신자가 그렇게 사는 것, 자녀를 그렇게 키우는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지만 신자인 여러분이 신자답게 살지 못하고 여러분 자녀들을 제대로 올바르게 키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 아파 하셔야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은 자녀를 그렇게 키우는 것에 대해 가슴 아파하지 않습니다. 극장 관람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돈 내고 들어와서 한 시간 예배 봐 주고 돌아가서 자기 마음 편한대로 살아가는, 자기의 삶을 자기 스스로 편한대로 모여사는 사람들이 모인 사기꾼들의 집단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아테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주의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것과 재미를 위주로 살기 때문에, 즉 절대 권위가 없고 복종할 것이 없기에 책임을 가진 인생이 아닙니다. 제가 보는 신문에 작년에 이런 연재 소설이 실렸습니다. ‘우리는 중산층’이란 소설입니다. 여기서 기가막힌 대목을 맞닥뜨려서 몇번 주의깊게 보았습니다. 서울 변두리의 조그만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즉 중산층에 끼려고 하는, 조금더 잘 살려고 하는 사람들 여러 명을 배경으로 하여 그들의 사는 모습들을 그리고 있는 소설입니다. 거기에 세라 엄마라는 여자가 등장합니다. 공부를 잘 했고 똑똑하며 세라라는 딸 하나는 두고 있는 여자입니다. 이 여자의 사는 모습을 그린 것이 아주 괴이합니다. 젊은 대학생을 애인으로 두고 있습니다. 같이 만나서 술도 먹고 춤도 추고 누가 입이 큰지도 대 보곤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학생과 헤어져 밤늦게 집에 오다 서울에서 자기 집까지 오는데 택시 합승을 하려고 하나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개인 승용차를 어떻게 해서 타게 됩니다. 그 안에서 어떤 중늙은이를 만나 어떻게 이야기가 되어서 하루 밤을 같이 지내는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잠시 어떻게 되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의도해서 썼다면 이것은 오늘날 우리 삶의 현실이라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보고 놀랐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어디를 가나 성적인 부패와 외도가 한집 걸러 하나쯤은 있을 만큼 일반화된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의 세라엄마도 남편이 남편 노릇을 안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가정을 최고의 책임지로 여기지도 않고 틈만 있으면 자기 좋은 일만 하고 엉뚱한 일만 하는 것입니다. 부인한테 잘하는 것은 처가가 잘 살기 때문에 돈을 가져 가려고 할 때나 잘하지, 그렇지 않을 때는 집은 밥먹고 잠만 자는 그런 곳입니다. 그러자 부인도 자기의 책임을 지킬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남편이 책임을 지켜야 나도 책임을 지키고 남이 거룩해야 나도 거룩하고 남이 정직해야 나도 정직하게 행동하는 이런 상대적인 기준하에 있는가를 보아 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회에 나가서 신앙생활을 영위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이런 상대성에 있지 않습니까? 내가 정직하게 살아서 밑지는데 내가 왜 합니까? 이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도 아테네 사람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21장으로 가 보십시다. 성경상의 유명한 사람도 그런 오류에 빠졌던 것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런 예언을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것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요 21:18-21)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요구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그 가는 길은 괴롭고 어렵고 힘들고 결국은 순교하는 길일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저사람은요?” 여기서 저 사람이란 사도 요한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사도 요한을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놔둔다 한들 내가 너에게 요구하는 일을 네가 하고 안하는 것에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하시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취급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신앙을 할까 말까를 정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만큼 격이 낮은 분이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것이 내용상으로 뿐만 아니라 권위적 차원에서도 여러분이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좋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대자의 명령을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나의 생명이요 나의 복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안해도 좋을 만큼 왈가왈부 할 위치에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불의한 자가 잘 사는 것을 보면 우리는 정직하게 살고 싶지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 세상이 이런데 나보고만 정직하게 살라고 하십니까?” 이것이 여러분이 늘 하셨던 말 아닙니까? 여러분 자신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여태껏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신자라는 이름을 감추고 있는 것은 다 이것입니다. 정직하고 거룩하고 양보하는 삶을 살기 싫은 것입니다. “저 사람들은 사기치고 거짓말하고 다 잘 사는데 왜 나만 밑집니까?” 여러분이 신자라는 이름 때문에 밑지고 살면 여러분이 당장 하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 누구를 바보로 알아?” 이것이 여러분 마음속에서 튀어나오는 제일크고 먼저 나오는 반응 아닙니까? 우리는 훨씬 상대적입니다. 우리는 권위 아래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 가 봅시다. 사도 바울은 그가 하는 일에 대하여 그 일을 왜 하는가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9:16)

이 일을 안하면 안되기 때문에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한 점은 이점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화나는 것을 무서워서 합니다. 예수믿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신앙생활 하면 기쁘고 평안하고 모든 것이 잘되기 때문에 하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안하실 것입니까? 재미없으면 안하실 것입니까? 재미가 무엇이죠?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것 아닙니까? 신앙이란 재미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운 권세 아래서 복종할 수 밖에 없어서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충성이라고 하고 순종이라고 합니다.

바로 16절을 쓸 때의 상황을 보려면 11절부터 보십시다. 이때 고린도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입장은 아주 미묘한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9:11-14)

사도 바울이 그의 사도직을 수행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이 일을 하느라고 자기 일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이 주는 돈으로 먹고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것을 가지고 놀리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사기를 치고 다닌다는 말입니다. 저도 이런 소리를 듣습니다. 지난 여름에 저의 딸이 당한 일입니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으니까 한 아이가 와서 그러더랍니다. “너 교인들이 낸 헌금을 가지고 아이스크림 사 먹을 수 있어!” 그래서 제 딸이 시퍼렇게 질려서 저에게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빠 우리는 교인들이 낸 헌금으로 먹고 사는거냐?” 그래서 제가 잘 설명한다고 했는데 더 못 알아 듣습니다. 그러더니 다음날 와서 해결이 되었다고 해서 어떻게 해결이 되었냐고 하니까 자기가 그 애한테 그랬답니다. “야 우리 아빠가 너의 엄마, 교회에 나오지 말래.” 가끔 속상하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15절에 사도 바울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얼마나 그 마음이 처참했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맡은 일을 한다 안한다 쪽으로는 절대 가지 않습니다. 그가 세상에서 당하는 일 그것으로 인하여 자존심이 상하거나 그것으로 무슨 육체적인 고통을 당한 것으로 그가 하나님 앞에서 받은 책임있는 그의 인생을 절대 포기하거나 흔들린 적이 없습니다. 다른 것이 와서 나를 괴롭히거나 나를 긁는 것과 하나님의 명령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두려움을 알며 또 그 복도 압니다. 그것이 그의 신앙의 근거입니다.

빌립보서 1장으로 가시면 또 이렇게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2-18)

바울이 잡히자 이런 나쁜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바울이 그동안 설치고 다니는 것에 질투를 한 사람들이 바울이 잡히자 공연히 설치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복음을 맡긴 것이라면 왜 그를 잡히게 두었겠는가? 그는 아니니까 하나님이 가둔 것이고 우리가 진짜다.” 이렇게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따르던 사람들이 그것이 너무 속상해서 이번에는 분발해서 그것이 아니라 그가 전했던 복음이 얼마나 진실되고 진짜였던가를 행동을 보여주는 일에 열심을 내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그 모든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아무러면 어떠하냐 그리스도가 전파되는데 그 전파되는 일에 내가 오해를 받았든 괄세를 받았든 그것이 무슨 소용이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아테네 시민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책임 있는 사람들인 줄 아십니까? 내가 동의한 것이 아니고 내가 결정하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쪽에서 요구한 절대자의 요구 아래서 우리가 좇아 가야 하는, 그래서 그 길이 재미있지않고 고통스럽고 속상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이 책임에 관한한 우리는 절대 권위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상대적이고 책임을 회피하고 자기 재미있는 데로 우리도 모르게 휩쓸려 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제가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요즈음 TV광고를 보면 날이 갈수록 더욱 더 대담해지고 사람들을 홀리는 것을 느낍니다. 약광고를 보면 멀쩡한 사람을 병자로 만들고 가전제품 선전을 보면 집에 있는 가전제품은 다 구식이라 못 쓸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어떤 가구나 어떤 차를 사면 그런 예쁜 여자도 함께 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선전을 합니다. 그러나 제가 광고를 본 중 가장 놀란 광고는 코카콜라 광고였습니다. 모든 면에서 기법이 뛰어나게 돋보이는 선전 광고입니다. 그런데 제 눈길을 끈 것은 이 광고가 아주 음흉하다는 점입니다. 원래 청량음료제의 선전 포인트는 시원하다는 점에 두어야 합니다. 요즈음 선전을 잘 보면 광고에 많은 남녀가 등장하는데 남자보다 여자들이 훨씬 발랄하다는 점입니다. 같이 있다가 여자가 남자를 팔로 툭 친다던가 남자를 거리낌 없이 업어친다던가 아주 호탕하게 웃는다던가 다소곳한 여자들의 모습이 아닌 아주 생기 발랄한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체의 발랄한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활발함을 보이는 것이 포인트이고 거기서 여자의 활발함이란 우리가 여태껏 알았던 성경적인 전통 속에서의 어떤 틀을 벗어나는 해방감에서 오는 시원함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언제나 여자를 보호의 대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남자가 여자를 보호할 책임이 있는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남자가 가지는 보호의 책임, 그리고 보호랄 책임으로 인하여 주어진 영적인 권위, 이런 모든 것들이 남자가 가지는 책임이었고 여자는 그 보호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기 위한 보호의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스스로 가꾸는 것으로 여태껏 전통적인 남녀상이 이어져 왔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광고에서는 여자가 더이상 보호를 받지 않아도 될 독립된 대상으로 그 상이 바뀌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남자가 드디어 그 짐을 하나 벗은 시원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을 음흉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자가 속박에서 벗어난 시원함도 있고 남자가 여자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그 책임을 져야 되는 짐을 벗은 시원함이 그 광고가 노리는 가장 깊은 의도인 것 같습니다. 그 광고를 만드는 사람이 그것을 알고 하였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것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렇게 느껴 보신 적 있습니까? 시원함을 느끼는데 마시는 것이 한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여자가 등장하여 왈가닥질을 하는데 거친 옷을 입고 있지 않습니다. 정장을 하고 왈가닥질을 하고 있습니다. 무섭죠? 저는 무섭습니다. 프라이드 광고에도 이런 내용이 반쯤 들어가 있었습니다. 잘 보십시오. 왜 이렇게 되고 있습니까? 모두가 자신을 책임에서 빼내고 있습니다. 오늘날 남자들이 신앙적 차원에서 가장 실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자를 보호의 영역에서부터 해방시켜 주고 자기가 져야 할 책임을 나누자고 한 것입니다. 경제적인 것을 나누는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적, 아니 영적인 문제에서도 남자가 여자들의 리더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남자가 져야 되는 책임을 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천만에 육박하는 신자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교회가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제로라는 사실입니다. 몽땅 신자가 여자이기 때문에 사회적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이었다면 사회적 영향력을 틀림없이 미쳤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아테네 시민하고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요, 하나님의 명령 앞에 목숨을 걸고 ‘예’라고 대답하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자랑이요, 기쁨이요, 소원이라고 선언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자기 가는 데로 갑니다. 거기는 권위도 없고 진리도 없고 절대도 없고 생명도 없습니다. 상대적이고 순간적입니다. 한평생 자기 멋대로 사는 인생들의 집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에게 지고 있습니다. 저들이 흘러 가는데 우리가 함께 떠내려 가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돌아서셔야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으로 가십시다. 오늘의 결론을 이렇게 내리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삶을 이 사도 바울의 고백과 일치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9-15)

이렇게 사셔야 합니다. 주를 두려워하시고 주를 기쁘시게 하시고 주를 위하여 사십시오. 세상의 유혹과 저들의 쾌락과 시험에 지지 마십시오. 저들을 보고 우리의 선함과 진리 됨과 생명됨을 동요받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것이요,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우리의 기뻐함이 되어야 마땅한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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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4 요한계시 부활의 능력 계3:21  이천수 목사  2009-07-08 2740
1743 마태복음 뜻이 하늘에서 마6:10  이천수 목사  2009-07-07 2636
1742 에배소서 '우리 모두 한 지체다' 엡5:30  이천수 목사  2009-07-07 2292
1741 마태복음 사망의 포위망을 뚫자 마7:1-10  이천수 목사  2009-07-06 1993
1740 고린도후 삼층천의 축복 고후12:2-5  이천수 목사  2009-07-06 3406
1739 마태복음 사랑이 팔자다 마16:16-18  이천수 목사  2009-07-06 2116
1738 창세기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 창4:1-15  이천수 목사  2009-07-06 2722
1737 야고보서 나를 벗어나자 약1:12  이천수목사  2009-07-06 1952
1736 요한복음 물과 영생수 요4:9-14  강종수 목사  2009-07-06 2100
1735 창세기 돼지 저금통 file 창38:1-19  태승철 목사  2009-07-05 2812
1734 사도행전 바울의 자기 변호 행22:2-5  박영선 목사  2009-07-04 2179
1733 사도행전 기독교적 인간관 행21:37-22:1  박영선 목사  2009-07-04 2396
1732 사도행전 기독교적 역사관 행21:31-36  박영선 목사  2009-07-04 2103
1731 사도행전 흉악한 이리 행20:29-32  박영선 목사  2009-07-04 2182
1730 사도행전 교회의 결심 행20:28-32  박영선 목사  2009-07-02 2005
1729 사도행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근거 행20:6-12  박영선 목사  2009-07-02 2153
1728 사도행전 생명을 살리는 의와 사랑 행20:6-12  박영선 목사  2009-07-02 1978
1727 사도행전 유일한 기준 행19:23-32  박영선 목사  2009-07-02 1936
1726 사도행전 그늘 속의 아볼로 행18:24-28  박영선 목사  2009-07-02 3675
1725 사도행전 출발과 끝 행18:9-11  박영선 목사  2009-07-02 1614
1724 사도행전 의지적 예정 행18:5-11  박영선 목사  2009-07-02 1759
1723 사도행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행18:1-4  박영선 목사  2009-07-02 3042
1722 사도행전 철학과 과학 행17:22-31  박영선 목사  2009-07-02 1566
» 사도행전 코카콜라 행17:16-21  박영선 목사  2009-07-02 2339
1720 사도행전 성경을 상고함 행17:11-14  박영선 목사  2009-07-02 2434
1719 사도행전 주 예수를 믿으라 행16:26-34  박영선 목사  2009-07-02 3445
1718 사도행전 신앙의 구걸 행16:26-34  박영선 목사  2009-07-02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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