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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과학

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1566 추천 수 0 2009.07.02 15: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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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17:22-31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95 / 1990.02.11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 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사도행전 17:22-31

사도 바울은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를 거쳐 이제 아테네에 이르렀습니다. 아테네에 이르자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서양사상의 발원지가 됐던 이곳에 많은 사상과 철학,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한 많은 우상이 있는 것을 보게 되고 이 일을 보자 바울은 참지 못하고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해당됩니다.

23절에 보시면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17:23). 이렇게 논쟁을 시작해 나갑니다.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우리가 믿는 이 신앙과 저들의 신앙의 가장 큰 차이를 24, 25절 있는 바와 같이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행 17:24,25상)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아테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와 참 종교의 가장 큰 차이는 신이 신다우냐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그리스 사람들이 만든 이방 우상들은 결국 신인 것이 아니고 사람이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사도 바울이 이 논쟁을 펼쳐 나가는데 우리로서는 이 우상숭배가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을 따질 수준은 이미 지나 있는 것입니다.

단지 이것이 우리 모두 믿는 사람에게 어떤 효과가 있느냐? 말하자면 우리의 신앙 속에서 이것이 어떻게 우리를 혼돈시키고 우리를 얽어매느냐 하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을 뿐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기독교 신앙의 최대의 적은 철학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사는 어디서나 철학은 발생합니다마는 특별히 온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철학의 발원지가 아테네입니다. 철학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진리에 도달하고 진리를 이해하고 진리를 포용하는 데 있어서 인간의 이성과 인간의 지적인 능력과 그 인간의 능력에 최종적인 확신을 두는 사상을 말합니다. 인간 자신의 능력을 믿고 그 가능성을 인정하여 그 생각과 모든 것을 동원하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사상입니다. 여기서 최종적인 확신을 인간의 이성과 능력에 둔다는 얘기는 다른 말로 해서 인간을 최종적인 권위를 갖는 자로 취급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 싸움은 오늘 본문에도 있는 바와 같이 권위의 문제라는 것을 아시게 됩니다. 지난 주에도 이 권위 문제 때문에 제가 말씀을 드린 기억이 납니다.

지난 주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현대화되고 지식과 문명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에게 자신도 모르게 제일 크게 나타난 피해는 권위의 부재입니다. 여러분 자식들이 여러분이 여러분의 부모 말을 안 들은 것보다 더 많이 안 듣고 그리고 학교라든가 교수, 목사, 판사 이런 권위의 상징적인 개인과 장소들이 많이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을 여러분이 보실 겁니다. 이 절대권위가 자꾸 없어지고 개인에게로 돌아오는 것, 각자 자신이 최고의 척도가 되고 표준이 되며 명령권자가 되는 것, 이것이 좋은 탈을 쓰고 나타날 때 철학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나쁜 탈을 쓰고 나타날 때는 방종이 되고 여러 죄와 방탕한 일들을 일으키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 아테네 사람들, 아니 그리스 전체가 우리가 잘 아는 헬레니즘이라 명명되고 있는 이성과 사상과 사회를 통하여 신을 찾으려고 했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철학적인 방법론이고 사상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인간을 죄인이라고 명명하는 데는 이 부분에 관한 답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죄인이라 그럴 때는 그들이 도덕과 윤리적으로만 타락하고 부패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치 않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도망간 자들이다’하는 뜻이 포함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고 그 권위 아래 복종할 자리로부터 도망가서 스스로 독립하려고 했던 것이 인류 최초의 범죄에서 드러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단이 와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에 뭐라고 꼬였는가를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저 선악과를 못 먹게 한 이유는 그것을 먹으면 너희가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못 먹게 하는거다.” “먹으면 어떻게 되는거예요?” 동등하게 될거라는 유혹을 받아 먹었는데 동등하게 되지는 않고 창피해지기만 한 것이 인류 최초의 타락과 거기에 일어난 사건 속에 가장 중심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리와 생명에 이르는 일에 무지하며 미련하며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고린도전서 1장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스스로 출발하고 스스로 쌓아서 하나님을 발견하거나 하나님께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씁니다. 이 전도가 미련하다 하는 표현을 쓰는 이유를 잘보십시오. 이 말은 상당한 야유입니다. 사람이 능력이 있고 지식이 있으면 스스로 어떤 것들을 찾아가고 발견해 내고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마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지식과 생명에 이르는 일에는 전도라는 방법을 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전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어야만 닿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도라는 것은 언제나 먼저 믿은 자가 그렇지 않은 자를 향하여 손을 내미는 행위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모든 방법은 언제나 전도라는 방법으로만 된다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 출발해서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도달돼야 하는 목적지, 결과 쪽에서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지 않는 한 그 자리에 올 수 없다는 뜻에서 전도라는 방법이 쓰이고 그것이 우리가 스스로 그 자리에 갈 수 없다는 의미에서 미련한 방법이라 그렇게 우리를 야유하는 것을 소개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언제나 철학적이지 않아야 될 것을 요구합니다. 옆에 있는 고린도전서 3:18로 가 보십시다.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18-20)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라고 합니다. 이것을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성경의 표현은 그때 그 말이 무슨 의미로 쓰였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철학적 사고방식과 철학적 능력을 가진 것으로 지혜 있다 생각하지 마라. 미련한 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말은 네가 알고 있다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않는 한, 네 사고방식과 네가 알고 있는 능력의 한계에 내 모든 진리를 구속하고 그것으로만 판단하려고 하는 한 너는 초월자를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지적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어떤 사람이 소유할 것이냐 그럴 대 성경은 어린 아이와 같아야 된다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어린 아이와 같다는 것은 종종 오해되는 표현 중의 하나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아야 된다. 그러면 순박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애들은 순박하지 않습니다. 애들도 여러분과 똑같이 악질입니다. 여러분과 막상막하로 악질입니다. 그런데 애들이 저지르는 죄악은 아직 규모가 작기 때문에 그 피해가 치명적이지 않아서 웃어 넘기는 겁니다. 훔쳐도 기껏 만원을 훔쳐간다든가 유리를 깨 놓고 쩔쩔 맨다든가 그럽니다. 크면 이것이 몇 십억이 되고 누구를 죽이고 하는 식으로 나타날 겁니다. 애가 순박하고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들이 역사이래로 속은 실수입니다. 애들도 악질입니다. 그래서 애들은 때려서 키워야 되고 이빨을 뽑아서 버릇을 고쳐야 됩니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무섭게 키우셔야 됩니다. 물론 무서운 것이 최선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냐오냐로 키워서는 절대 못 고칩니다. 요즈음 애들이 막돼먹은 이유 중의 하나는 여러분의 탓입니다. 하나님의 탓이 아닙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애들이 깨끗하다고 얘기한 적이 없습니다. 모두 순악질로 태어나고 그대로 죽으면 지옥에 갑니다.

그러면 여기서 어린아이란 언제나 권위 아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아이일 때는 자기 주장으로 자기를 결정하지 못합니다. 부모의 결정에 따라야 된다든가, 학교 선생님의 결정에 따른다든가 하는 어떤 권위 아래에 있고 복종의 대상이요 남의 손에 의해서 그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결정과 하나님의 요구 아래 복종된 상태, 그 최종 권위를 하나님께 바쳐서 순종하고 있는 상태여야 천국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은 금방 이런 반문도 하실 수 있습니다. “맹신자가 되라는 말이냐?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저 예, 예, 아멘, 아멘, 그래야만 되는 것이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훨씬 생각할 것을 많이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논하려고 하는 철학적이 된다는 말은 우리의 사고와 생각이 절대적인 권위가 되어서 진위를 판별하는 최종적인 기준이 되거나 권위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이성과 사고가 어떤 권위 아래서 수단과 방법으로 쓰이는 것과 그것이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는 것과는 얘기가 다릅니다.

실제로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성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이성의 최고의 성취다.” 이성의 최고의 성취가 이성에게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겁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란 책도 이성에 어떤 한계가 있는가를 논리적으로 파헤친 책입니다. 그래서 칸트로 인하여 사실은 그전에 있었던 절대적 진리와 절대 권위를 추적하던 것을 철학이 놓게 됩니다. 칸트가 그것을 다 깨부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는 변증법이 나오고 진화론의 영향을 받고 그리고 결국은 실존주의로 무너져서 모든 철학은 철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반철학이 되어버렸습니다. 철학이란 원래는 진리와 절대를 찾자는 학문이었는데 이제는 상대적인 것을 다 인정해 버렸습니다. 모든 철학은 이제는 실존주의로 다 함몰되었습니다. 실존주의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절대적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이 얼마나 우스워졌냐면 모든 학문이 다 이렇습니다. 교육철학, 법철학 말은 이렇게 합니다만 그것은 철학이라는 말로 모든 것을 한꺼번에 포용할 절대가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철학이라는 학문 스스로가, 철학을 어느 한계상황, 상대적인 어떤 부분으로 스스로 축소시키기로 합의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교육철학에 법철학이 통용되지 않고 역사철학이 다른 과학철학에 통용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고를 하지 않는 것을 신앙적이라 그러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하되 그 이성과 사유능력을 어떻게 써야 되느냐 하는 것으로 이제 시선을 모으라는 것입니다. 맹신자가 되거나 무지몽매 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이 얼마나 많이 생각할 것을 요구하느냐 하면 이런 부분을 생각해보십시오.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울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이 모든 말투 자체와 내용이 얼마나 생각을 촉발하고 있습니까? 가만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네, 믿습니다, 믿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아니고, 아무려면 어떠냐” 이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공중 나는 새를 봐라. 농사를 하냐, 보험을 들었냐? 친척이 있냐, 빽이 있냐? 그래도 잘 먹고 잘 살지 않냐?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들에 핀 백합화를 봐라. 솔로몬이 인류 역사이래 최고의 영화와 최고의 사치의 극에서 해 입은 곳이 이 꽃 하나만 못했느니라. 하물며 너희이겠느냐?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지 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울 들풀도 살아 있는 동안 얼마나 완전무쌍하게 입히고 철저하게 보호하시는 줄 아느냐?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생각좀 해 봐라.”

그러나 물론 이 얘기는 곧 다시 이런 것에 제한을 받아야 됩니다.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확인하는 것이 전부라는 뜻은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가 분명히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영향을 끼치고 있는 과학에 대하여 우리가 조금 확인을 하고 지나가야 됩니다. 과학의 위치를 분명히 합시다.

오늘날 우리가 부딪히고 있는 것은 어쩌면 철학이기보다 과학일 것입니다. 그리고 과학도 일종의 철학이라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언젠가도 한번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이 과학이라는 것은 그 기초 사상을 헬레니즘으로 깔고 있습니다. 이 헬라 철학이라는 것은 모든 사실은 객관적 논증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과학이 사실을 취급하는 것과 학설을 취급하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과학이 사실을 취급할 때는 맞지만 학설을 취급할 때는 맞지 않습니다. 사실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물은 4℃일 때 비중이 제일 크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물을 끓이면 수증기가 돼서 기화된다. 이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실과 사실 사이를 무엇과 무엇으로 연결해야 되느냐는 학설에는 아무런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학설로, 가설로 만든 것들을 과학이라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진화론입니다. 진화론은 진화론보다 창조론이 논리적으로 훨씬 가능하다고 얘기를 할 만큼 과학자들 자신에게도 외면을 당하고 있는 학설인데 묘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진화론은 인간을 하나님 아래 무릎 꿇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쪽을 훨씬 많이 좋아합니다. 그러나 진화론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잘 아는 식으로 운동량 보존의 법칙에 어긋나 있습니다. 질량불변의 법칙에도 틀립니다. 없던 데서 무엇이 혼자서 만들어진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과학의 제일원칙에서 어긋납니다. 어떤 힘이 주어지지 않고 운동이라는 것이 일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이라는 것은 안 움직이던 것이 시간이 흐르자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창조론과 같은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없던 것이 만들어졌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단지 창조론에서는 그것을 어떤 신이 그렇게 힘을 가하고 생명을 출발시켰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가만 있던 것이 저절로 움직였다는 것은 마치 집에 들어가니까 TV가 깨졌어요. “야, 어떻게 된거냐?” “몰라, 내가 집에 들어왔더니 저게 이렇게 깨져 있던데요. 혼자서요.” 그거 그냥 볼기 3대만 때리면 이실직고 할 걸 뭘 싸워요? 볼기 3대만 때려봐요. 으앙 울면서 나는 저게 깨지나 안 깨지나 한번만 야구방망이로 쳐봤는데 그게 그렇게 쉽게 깨질 줄은 몰랐다고 금방 실토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가설입니다. 과학이 입증해 낸 어떤 사실에 관한 신용도를 가지고 자기가 다룰 수 없는 주제까지 다루어내는 어떤 월권을 행사한 것이며 그렇게 한 배후에는 인간이 자기가 신이 되려는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한 죄 된 성품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진화론에서 여러분에게 가장 골치를 아프게 하는 부분으로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과학적으로는 이 지구가 한 30억년쯤 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이 말하는 바로는 어쨌든 만년도 안된 것 같습니다. 성경에 나온 족보만 따져 보면 B.C.4000년 내지 B.C.6000년쯤 전에 아담이 출생했다고 보는 것이 맞는 얘기는 아닙니다마는 어쨌든 최소한 20~30억년이 됐다는 것을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적으로 여기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담을 하나님이 만들었을 때 몇 살짜리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담이 지음을 받고서 곧 모든 동물들의 이름을 짓고 또 부인도 얻었어요. 그러니까 몇 살쯤 되었을까요? 열여덟살? 최소한 그쯤 되었겠죠. 하여튼 쉽게 20~30세는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날 태어났기 때문에 나이로는 한 살입니다. 크든 말았든 우리 식으로 하면 그날 만들었기에 한 살입니다. 그런데 과학자가 와서 얘는 30년 전에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지금 막 구워낸 빵인데 30년 됐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날 성숙한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동일하게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게 이 지구를 성숙한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30억년 전에 생긴 것이 아니고 30억년짜리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때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게 이미 열매가 달리는 나무를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무슨 해변가에서 융기가 일어나고 골짜기가 생기고 유년기 산맥이 나타나는 식의 과정이 발생했다면 다 굶어서 돌아가시게요? 처음부터 그런 것을 다 줬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과학적으로 따지면 30억년 전 것입니다. 물론 이것으로 성경이 다 설명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과학이 다 밝힐 수 없는 것이 있고 이성으로 확인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이 신앙에 있어서는 제일 중요한 생각의 방법임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신자들이 성경을 보면서 실제적으로 어떤 싸움에 말려드느냐 하면 성경이 선언하는 것과 내가 알고 있는 과학적 사고방식의 불일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가르고 건넜다, 여리고성을 나팔만 불자 무너졌다,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 했을 때 내가 확인하고 내가 인정할 수 있는 부분만으로 사실과 진리를 도장 찍을 것이냐? 내 생각과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보다 사실과 진리가 더 크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냐의 싸움에 관한 겁니다. 이럴 때 이것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권위의 문제로 돌아간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이해력을 최종권위로 가질 것이냐 성경이 얘기하는 것, 하나님이란 분에게 최종권위를 줄 것이냐? 하나님께서 권위를 주었을 때는 내가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기다리며 납득시켜 달라고 구해야 되고 그것을 납득하는 방법을 성경적으로 배워야 되는 것이고 내가 권위를 가지는 날에는 내 마음에 안 들면 안 믿는 것입니다. “난 못 믿어요” 그것을 누가 말리겠습니까?

신자들이 종종 바로 이 사선을 넘나든다는 말입니다. 스스로가 그것을 구별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진리와 사실된 것, 절대 되는 것들을 내가 판단하고 내가 취사선택을 하겠다고 할 때는 어느 틈에 진리와 절대에 대한 기준과 판단의 권위를 내가 가졌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그것을 이성이 자율성을 가진다 그럽니다. 이러면 신앙은 없고 과학만 남는데 실제로는 과학이 아니라 처음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철학입니다. 철학은 인간의 가능성과 인간의 이해력을 절대라고 믿는 사고방식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으로 갑시다. 1절 이하에 바로 이 싸움때문에 사도 바울이 그가 복음을 전할 때마다 얼마나 심각했는가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1-5).

여기서 사람의 지혜가 뭡니까? 철학적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해, 우리가 확인한 것, 그 범주내에 속한 것이 되지 않게, 그것으로 오해되지 않게, 그것을 훨씬 능가하고 초월하는 하나님이 부각되기 위하여, 그가 성령의 능력 아래 있으려고 자신을 치고 자신의 말재주나 자신의 어떤 배운 지식 같은 것으로 자기가 전하려는 복음이 방해받지 않으려고 그렇게 긴장하고 두려워했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경에 나타나는 서신서는 모두 바로 이런 것 때문에 기록된 것이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의 주장과 거기에 만족치 못하는 이성적 반론들에 대한 싸움, 그 상충되어 보이고, 모순된 것 사이에서 일어나는 신자들의 동요 때문에 실제로 서신서가 기록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고린도전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는 고린도전서를 쓴 이유가 나옵니다. 그것은 분파 때문입니다. 좀더 대표적인 것으로 갈라디아서 1장에는 갈라디아서를 쓴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6-8)

왜 다른 복음이 생기고 왜 분파가 생겼겠습니까? 거기에는 우리의 인간 이성이 다 납득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그가 성경이 얘기하는 대로 내가 이해가 아직 다 안 가고 납득이 잘 안 가지만 성경을 따라 그 권위에 복종하여 그 진리된 것을 알려는 차원으로 가지 않고 지금 내 요구와 이해력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내 권위 아래로 믿음을 변조시키는 날에는 금방 신앙상의 부작용이 따르고 어디선가 파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골로새서 2:8에서는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경계하라고 나옵니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 헛된 속임수라는 말과 철학을 같은 레벨에 놓고 있는 것을 주의깊게 보십시오.

그러나 사람은 본능적으로 모든 이해를 요구하는 법입니다. 사람은 철학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 신이 되려고 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다 자기가 납득해야 되고 자기 손으로 해 봐야 되고 자기가 당해 보지 않고서는 항복을 안하는 족속입니다. 늘 동일한 실수를 했으되 또 하고 또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역사의 가장 귀중한 교훈이 인간은 역사를 통하여 배우지 않는다는 교훈입니다. 그 실패한 것을 다음 세대가 또 하고 그 실패를 그 다음 세대가 또 합니다. 이렇게 싸우고 미친 짓을 해 오고도 역사가 변하지 않고 인간이 변하지 않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되느냐 하면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부단히 철학적이려고 하는 욕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고 성경은 여러분의 철학적 욕심을 만족시키는 답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신명기 29장으로 갑니다. 신명기 29:10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언하는 장면인데 아주 중요한 내용이 나옵니다. “오늘날 너희 곧 너희 두령과 너희 지파와 너희 장로들과 너희 유사와 이스라엘 모든 남자와 너희 유아들과 너희 아내와 및 네 진중에 있는 객과 무릇 너를 위하여 나무를 패는 자로부터 물 긷는 자까지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선 것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에 참여하며 또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향하여 하시는 맹세에 참여하여 여호와께서 이왕에 내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자기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 내가 이 언약과 맹세를 너희에게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선 자와 오늘날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까지니(우리가 애굽 땅에 어떻게 거하였었는지 너희가 여러 나라를 어떻게 통과하여 왔었는지 너희가 알며 너희가 또 그들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날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 평안하리라 할까 염려함이라 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로 그의 위에 붓게 하시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로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필경은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시되 여호와께서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구별하시고 이 율법 책에 기록된 언약의 모든 저주대로 그에게 화를 더하시리라 너희 뒤에 일어나는 너희 자손과 원방에서 오는 객이 그 땅의 재앙과 여호와께서 그 땅에 유행시키는 질병을 보며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옛적에 여호와께서 진노와 분한으로 훼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음을 보고 말할 것이요 열방 사람들도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땅에 이같이 행하셨느뇨 이같이 크고 열렬하게 노하심은 무슨 뜻이뇨 하면 그 때에 사람이 대답하기를 그 무리가 자기의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버리고 가서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지도 아니한 다른 신들을 섬겨 그에게 절한 까닭이라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땅을 향하여 진노하사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재앙을 내리시고 여호와께서 또 진노와 분한과 크게 통한하심으로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내사 다른 나라에 던져보내심이 오늘날과 같다 하리라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29:10-29)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모세가 분명하게 경고를 합니다. “너희 하나님을 버리고 딴짓 하면 너희는 하나님 앞에 벌을 받는다. 하나님만 섬기고 영원한 복을 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일에 있어서 갖는 어려움은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면서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납득시켜 주지 않고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시지 않는 부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직히 살고 희생하고 사는 것을 이 땅에서는 별로 보상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배반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훼방하고 못되게 사는 사람들이 벌을 받지 않고 사는 꼴도 봅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되어가는지, 교회들이 왜 그 모양인지, 누구는 이렇게 저기는 왜 저런지 우리의 의문과 간절함과 그리고 억울함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실제로 답을 안해주실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대하여 모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오묘한 일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다. 그러니 너희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라” 즉 율법을 지키기에 필요할 만큼은 다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현대식으로 얘기해서 예수를 믿어야 될 이유, 하나님이 누구신가? 예수를 안 믿으면 어떻게 되는가? 세상이 어떤가? 하는 데 대하여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필요한 만큼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외면하고 예수를 믿고 정당하게 살아야 될 것이 우리에게 확증될 만큼은 다 주어졌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외의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시기 이전에 뭐하셨어요? 요새 무슨 옷을 입고 다니세요? 답 안해 주시면 저는 하나님이 없는 걸로 간주하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애초부터 신앙 생활 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지구가 몇 억년 전에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몇년 몇월 며칠에 오시느냐에 대한 답도 없습니다. 오실 날이 언제든지 간에 오시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날수를 꼽아야 될 이유가 없다고 얘기를 합니다. 왜 몇날 며칠 오는 것을 꼽습니까? 그때까지 있는 돈 다 털어 먹고 억울하지 않게 가려고 그러죠? 신앙생활을 정당하게 하려고 한다면 그런 것은 필요없는 질문입니다.

여러분 좀더 잘 사는 나라에 태어나지 못한 것이 억울하십니까? 잘 사란 나라 스웨덴이나 스위스에 태어났으면 뭘 하시려고 그럽니까? 교회 안 오고 스키 타고 있었을 것 아녜요? 그러면 여러분 틀림없이 꼬꾸라져서 갈비 부러지고 스키가 배를 관통해서 지금쯤 병원에서 스위스 간호원은 주사를 아프게 놓는다는 둥 못 생겼다는둥 이러고 있을 겁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에서 더 알려 달라고 요구하는 모든 것은 신앙적이려고 하고 하나님을 더 알려고 하고 여러분 자신을 거룩케 하려는 차원에서의 것들은 절대 없습니다. 그것 안하고 어떻게 천국도 가야겠고 세상도 재미있게 살아야 될텐데 그렇게 살자면 신자로서 켕기니까 자꾸 하나님 쪽을 밀어붙이려고 질문거리를 꺼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이제 여러분이 점검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 말씀을 읽고 그 안에서 답을 얻고 그것을 맛있어 하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단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 교회가 그런 추세입니다마는 교회의 제일 큰 문제가 갈등과 고통이 없는 신자를 양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살려고 하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저는 살찐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왜 이렇게 됐습니까? 신자를 신자답게 키우면 신자는 보통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언제나 목사가 같이 고통해야 됩니다. 그것을 안하기로 한 겁니다. 그래서 목사들도 다 편하게 가르치고 신자들도 다 편하게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천국 가면 전부 타잔일 것입니다. 제발 그러지 않기를 권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진리를 알고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영광스럽게 되어가는 일에 너무나 충분한 말씀과 너무나 충분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고 더 이상 필요치도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한테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데 하나님이 들 수 없을 만큼 무거운 것을 만들 수 있어요라는 질문을 하는 한 성경은 여러분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아테네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신자가 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거룩한 자로 부름을 받은 여러분의 특권과 영광을 여러분이 놓치고 살지 않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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