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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결심

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2005 추천 수 0 2009.07.02 15:3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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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20:28-32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105/ 1990.05.13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느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우너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사도행전 20 : 28-32

오늘 우리가 본 말씀은 그 앞에 사도행전 20 : 17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바울이 사람을 미레도에서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여 자기가 떠난 이후에 이 교회들을 잘 양육하고 지킬 것을 부탁하는 장면입니다.

이 내용 속에서 우리는 교회가 본질적으로 어떤 목적과 어던 내용으로 의도되어 있고 사용되어야 되느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뜻밖에 신앙인들 중에 많은 분들이 교회를 잘못 이해하는 분들이 많고 한걸음 더 나아가 오해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무교회주의자들이 생겼습니다. 무교회주의자들의 신앙이 어떤 의미에서 더 좋은 것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마는 진정한 의미에서는 무교회주의자들의 신앙이 더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를 오늘 우릭 이 내용 중에서 살펴보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28절에서 바울이 장로들에게 이제 부탁을 합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누가 감독자를 삼느냐 하면 성령이 삼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언급할 때도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 합니다. 교회라는 것은 신앙의 유익을 위하여 인간들이 만든 방법과 수단이 아닙니다. 이런 모임을 하나님 쪽에서 요구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허게 요구하신 그 뜻 속에는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이루어질 수 있는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고 더 깊은 지혜가 감추어져 있는 줄로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왜 이런 일들에 대해서 우리가 부정적이 되고 무교회적인 성격까지 가지게 되느냐 하면 본문처럼 성령이 감독자를 삼은 것 같지 않은 데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목사 같지 않은 목사, 장로 같지 않은 장로가 실제로 여러 교회에 있습니다. 목사나 장로가 상식 이하의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에 이런 의심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도대체 하나님이 하신 일일 수가 없다. 성령이 세운 자일 수가 없다. 이것은 인간들이 자기네의 어떤 명예와 자랑을 위하여 일종의 church play를 하는 것이다’ 이러허게 생각합니다. ‘사회에서 거드럭거리지 못하는 것을 교회 지어놓고 교회 와서 거드럭거리는 유희에 불과하다’. 교회에는 그 조직과 기관과 이런 모임을 통해서 오히려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방해한느 것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모임과 조직을 거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무교회주의자들 중에 특히 퀘이커 교도들이라든가 brethren church라 하는 형제회 같은 데는 목사나 장로 등의 교회 조직을 인정치 않습니다.

이런식의 사고 방식은 성경이 얘기하는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입니다. 제가 교회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를 어떤 의도와 뜻을 가지고 만들었는가를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밝히고 싶어서 이 말씀을 미리 해두는 것입니다.

그 뒤에도 보시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고 합니다. 물론 구원은 개인적입니다. 그리스도를 자기 입으로 시인하고 자기 마음으로 믿어야 됩니다. 대신 믿고 대신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자를 설명할 때 성경은 어너제나 그 호칭을 전체적으로 한다는 것을 잊지 않으셔야 됩니다.

마치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이라고 호칭한 것과 방불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민족적인 구별로서의 호칭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 이라는 말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백성을 총칭하는 뜻이었습니다.

똑같이 신약시대에서 교회라고 할 때도 어떤 기관이나 이런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말할 때 사용했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참 이스라엘 이라고 하는 때도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얘기할 때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주의 깊게 음미할 필요가 있습니다. 피로 사셨다는 말씀 속에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가지신 목표와 뜻이 얼마나 굉장한 것이면 그 시작을 위하여 자기 피를 흘리시도록 대가를 지불할 마음이 있으셨겠는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 그가 부르시는 자녀들을 위하여 도대체 얼마나 큰 목적과 뜻과 계획을 갖고 계시는가 하는 것이 그 말 속에 포함됩니다.

게다가 피로 산 백성, 피로 산 자녀가 아니라 피로 산 교회라는 말 속에 그 하나님께서 가지신 영광스럽과 무한하고 지극한 어떤 자리로의 목표와 계획이 단체라는 말로만 이행될 수 있다는 힌트가 숨어져 있다는 거도 발견해야 됩니다. 에베소서 2장으로 갑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 : 20-22)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하여, 그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는 그 자리까지 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는 데 꼭 필요한 것, 그것은 함께 지어져 가는 겁니다. 혼자서는 이 훈련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성전이 되어 가는 것을 위하여 하나님은 교회를 요구하시는 것이입니다. 우리가 보통 신앙이 좋다 그럴 때 서두에서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그 신앙이 개인적이고 하나님과 나와의 문제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자기 신앙의 완성을 위하여 함께 지어져 가는 훈련 과정이 필요합니다.

신앙에서의 실력은 혼자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혼자 가지는 결심과 열심도 아닙니다. 함께 어느만큼 신앙을 발휘할 수 있느냐가 그의 실력입니다. 그 훈련을 해야 됩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태권도 하는 사람이 시범하는 것만 열심히 보고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잘하는 사람을 많이 본 것이 그의 실력이 아니고 보고 배운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든 그것이 자기 실력입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을 쳐다 본 것으로 자기가 공부 잘하게 돠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열심히 공부해서 그것이 자기 것이 되어야 자기 실력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마치 그것과 같습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신앙은 결국 그 신앙이 마음속에 갖고 있는 개념과 이상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이 자기 습관이 되고 자기 실력이 되는 것을 요구합니다.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함께’라는 요구를 하십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말쟁이가 되고 맙니다. 성경은 언제나 신앙을 요구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빛이고 소금이다.’ 이때 너희는 그냥 빛이고 소금이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음식에 들어가지 않는 소금은 필요없고 어두운 곳에 비취지 않는 등불은 필요없습니다. 혼자 서 있는 것으로 자기 확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빛은 어두운 곳에 비쳐야 되고 소금은 썩는 곳에, 맛을 내야 되는 곳에 가야 됩니다. 우리의 사랑은 사랑하자라고 카드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해야 되고 내 모맡이 원수를 사랑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사랑으로 제대로 영글기 위해서는 원수가 있는 곳에 가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 안에 원수를 모아 놓습니다.

교회는 좀 나을 줄 알았더니 교회 가도 맨 원수뿐이더라고 불평합니다. 그것은 넌센스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려면 원수를 만나야 합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땁니다. 여러분이 교회는 아무것도 안하고 쉬는 장소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요구하는 교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교회라고 해서 목사님도 훌륭하고 장로님도 훌륭하고 성가대도 훌륭하고 의자도 훌륭하고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 오면 맨 각색 병든 자와 각색 악당이 다 모입니다.

이런 부정적인 개념이 많은 것은 여러분이 성경이 얘기하는 교회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 갔더니 꼴같지 않은 사람이 설교를 하더라. 꼴같지 않은 사람이 장로 노릇을 하고 큰소리 치더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는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미리 직분을 주고 나중에 직분에 맞는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다 완성된 후인데도 직분을 잘 안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영어르 배운다 그러면 문법을 먼저 완성하고 회화에 들어가는게 낫습니까? 사는데 뛰어 들어가서 배우는게 낫습니까? 어느 쪽이 낫습니까? 그것은 그때 자기에게 주어지는 형편대로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여러분이 해야 할 일과 여러분이 져야 될 짐을 대산 져 주고 대신 해주는 곳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심부름 센터가 아니고, 여러분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 만든 장소가 아닙니다. 훈련시키기 위하여 만든 장소입니다. 여기 오면 여러분들이 싫은 꼴을 가장 많이 봐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 다행인 것은 여러분이 교회가 아니었다면 못 참았을 꼴을 참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이기 때문에 악소리 치지 못하는 것, 바로 그것이 교회의 가치입니다. 그것이 여러분 회사거나 여러분 집이거나 여러분 친구의 문제라면 가만두지 않고 가만있지 않았을 일을 교회이기 때문에 참았던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훈련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가치입니다. 그래서 교회란 어떤 곳이냐 그럴 때 바로 이 일들을 시행하고 훈련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어너제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기준과 관점에서 훈련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감독자들의 최고의 직책은 교회를 치는 것입니다. 이 교회를 친다고 할 때 친다는 말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만 그 다스림은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도직을 회복시키실 때 하셨던 말씀, “내 양을 치라” 하는 뜻입니다. 그 다음 구절에서는 “내 양을 먹이라” 이렇게 나타납니다. 신령한 양식을 먹이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그 훈련과 그 목적으로 가게 하기 위해서 신령한 것이 늘 공급돼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 진리되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선포되고 그것이 시행되고 우리의 피와 살이 되도록 만들어야 되는 것, 그것이 교회의 사활이 걸린 근본적이고 우선적인 사명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전도나 선교나 구제나 봉사도 이것에 견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이 부분에 있어서 주객이 전도된 것 같습니다. 봉사와 구제를 하기 위하여 교회들이 자꾸 큰 단체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300명을 요구하는 것은 구제를 해도 전도를 해도 선교사를 보내도 최소한의 어떤일을 할 수 있는 규모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선교사를 보내거나 전도를 하기 위해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일차적으로 신령해지기 위해서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가가 교회에서는 분명히 선포되어야 됩니다.

그것이 타협되거나 그것이 감추어지지 않아야 되고 그것이 일차적으로 훈련되어야 됩니다. 그것이 교회가 할 일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에 가시면 교회의 교회 된 표를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렇게 가르치는 대목과 만납니다. 디모데전서 3 : 15입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나라.”

교회가 가장 먼저 해야 되느 것은 선행이 아니고 진리의 기둥과 터이어야 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가? 무엇이 진리인가? 무엇이 우리가 목슴을 걸어야 될 것인가가 늘 가르쳐져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시행되어야 됩니다. 그것이 실험실같이 여기서 맨 먼저 확인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선교사를 보내는 일이고 구제를 하는 일이고 봉ㅅ를 하는 일일 때라도, 선교사를 몇 명 보냈느냐? 구제를 얼마나 많이 했느냐 하는 결과보다는 구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얼마나 많이 할 것인가의 토론과 실천과정에서 진리가 진리된 힘을 발휘하도록 훈련되어야 됩니다.

우리가 쓰고 먹고 남은 것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절제하고 아끼고 희생해서 이웃을 사랑해야 된다는 것이 여기서 논의되고 요구되도록 훈련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 액수가 얼마냐는 사실은 무의미합니다. 일억을 도와 주었느냐? 천만원을 도와 주었느냐? 백원을 도와 주었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내가 남은 것으로 도와 주었느냐? 내가 할 것을 양보하고 희생을 하고 도와 주었느냐가 여기에서 훈련되고 싸움되고 그리고 그러허게 되기까지 요청받아서 항복하는 지점에 가야 되는 것, 그것이 교회의 임무인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여러분들보고 좋은 차좀 타고 다지니 말아 달라고 했는데 그 일에도 여러분의 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부(富)를 책임 맡은 사람들은 그 사람이 먼저 부를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십니다. 저에게는 좋은 차, 나쁜 차라는 개념의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는 것이 아니길 바랍니다. 높은 사라믄 높은 사람다워야 되고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 있는 사람다워야 됩니다. 단지 그것을 누리는 것과 누리는 데서 어느만큼 희생을 하느냐가 개인적인 싸움이 되어야 됩니다.

너문 많이 배웠는데 너무 많이 안 배운 겉같이 유난을 떤다든가 돈이 많은데 너무 기워 입고 밤낮 오들오들 떠는 것, 그것은 좀 별난 것입니다. 그러라는 뜻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 앞에 항복한 신자로서의 삶에 어떤 실제적인 희생과 열심히 드러나고 있느냐를 점검해 달라는 것입니다.

각자가 자신을 점검해 보셔야 되는 겁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진리와 생명과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느냐가 제대로 가르쳐지고 시행되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모야야 됩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좋다는 거슨 결국 서두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과 나와으 문제가 아니라 그런 의미에서 ‘함께’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보십시오.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그 죄악의 관영함과 패역함을 인하여 심판하러 갑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이 기도한 것의 답을 하십니다. 거기 마지막으로 의인 열 명만 있으면 멸하지 않겠다 하십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은 우리 혼자가 아닙니다. 이제 나 하나라는 것이 내 이웃과 어느만큼 결부되어 있는가? 그 결부되어 있는 것이 그들과 세상을 살기 위해서만 손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쪽에서 생명과 진리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서 내가 처한 사회와 인생에서의 몫을 하고 있는가라는 차원에서 의인10명을 묻는 겁니다. 그런 차원에서의 내 직분이 수행되고 있지 않으면 그는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죄 짓지만 나는 안 짓습니다’ 가 내가 의인이라는 것이 아니요, ‘저 사람은 주일날 놀러 갔지만 저는 주일날 교회 가서 봉사했습니다’가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나 하나 서 있어도 내 주변에 있는 훅암의 빛으로 썩어져가는 것의 소금으로서의 내 역할이 있지 않는 한 그는 신자의 신자 된 본분을 아직 시작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요구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결국 혼자의 싸움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 앞에 자녀 된 것, 받은 은혜, 내가 아는 진리, 생명, 그리스도를 아는 향기가 내 이웃들에게 영향을 미치느냐의 싸움으로 가야 됩니다.

그 훈련을 바로 교회에서 합니다. 우리는 옳아야 됩니다. 무엇이 죄냐? 무엇이 옳은 것이냐? 판단하고 분별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신다, 저것은 죄라는 것울 알아야 됩니다. 그러나 옳다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의 옳다는 것은 언제나 상대방을 심판하는 것으로 가기 일쑤입니다. 당신은 죄 지었지만 난 안지었소, 당신은 사치하지마나 나는 검소하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런 식의 ‘의’가 아니라 내 옆에 있는 불우한 자를 의로운 자리로 오게 하는 의여야 합니다. ‘의’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난 옳다, 넌 틀렸다가 아니라 틀린 자를 내가 옳은 자리에 오게끔 하는 용서, 기다림, 영향력, 위에서 안타깝게 부르짓는 기도, 지혜, 분별, 절제로 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의 신앙은 아직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경 어디에서는 봅니다. 마태복음 5 : 43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ㅣ니 이는 하나님이 그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 : 43-48)

이 온전은 죄 짓지 않는 정도가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원수를 사랑해야 됩니다.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됩니다. 그렇게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됩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해를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틀린 자를 무조건 심판하는 자가 아니며, 불의한 자를 무조건 심판하는 자가 아니라 불의한 자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는 분입니다. 그들을 홰개케 하고 복 받게 하시려고 애쓰시는 분입니다. 은혜와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 참기를 요구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온전입니다.

그 일을 혼자서는 하지 못합니다. ‘나는 성경말씀을 보고 이것을 깨우쳤소.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야 되겠소?’ 이렇게 외치는 것으로 전부가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진 지식과 신앙을 감추고 있어야 될 때도 있습니다. 군함은 전쟁 중에 밑에 구멍이 나서 바닷물이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어뢰를 맞는다든가 하면 배가 기웁니다. 어느만큼 기우면 배가 전복합니다. 그래서 전복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성한 곳에 바닷물을 넣습니다. 기울지 않은 반대쪽에 넣어 균형을 잡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어 마땅한 우리들을 사랑하사 우리가 있는 자리까지 오셔서 우리와 함께 울고 고난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느느 것을 아십니까? 이것이 신앙의 높은 경지입니다. 그 싸움을 바로 여기서 배우는 겁니다. 교회에서 이 싸움을 하고 이 훈련을 하지 않고 어디가서 한다는 말입니까? 훈련장에서 땀 흘려 훈련한 것 없이 어떻게 전투장에 가서 총을 제대로 쏠 수 있습니까?

오늘날 교회들은 바로 이 싸움이 없어졌습니다. “아휴, 난 누구 꼴보기 싫어서 못 가.” 이러시면 안됩니다. 저런 사람이 목사를 할까? 저런 사람이 장로를 할까? 그러지 말고 왜 나는 아직도 원수를 사랑할 수 없을 까? 왜 난 아직도 아버지의 온전하심에 문턱은커녕 시작도 못할까? 하며 자신을 쳐야 합니다. 예수는 믿지만 교회 가면 꼴보기 싫은 것ㄷㄹ이 많아서 교회생활은 못하겠다 하는 것은 마치 학교는 가지만숙제는 못해 가겠노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숙제 해가는 것이 여러분을 위해서 필요한 줄 모르십니까? 여기가 교회입니다. 교회란 그런 곳입니다. 그렇게 의도되었습니다. 그 훈련 없이 여러분의 신앙이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제일 쉬운 신앙이 헌금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어렵습니다. 그러너데 그것이 신앙 중에서 제일 쉬운 겁니다. 왜냐하면 돈 낼 때는 자기하고만의 잠깐 갈등만 넘기면 되기 때문입니다. 돈 낸 것으로 남하고의 갈등은 없습니다.

그러나교회와서 생활을 해 보십시오. 그래서 좋은 일하고 싫은 소리를 듣는 갈등을 겪으셔야 됩니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를 졌더니 “남의 생명은 구하고, 다른 사람 죽은 것은 구해 놓고는 왜 자기는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가”라는 소리를 듣는 겁니다. 그 꼴을 당하는 겁니다. “네가 만일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 와 보라”라는 꼴을 당하는 겁니다. 그 꼴을 당하기 싫다면 그저 그정도의 신앙으로 그렇게 살다 죽으시는 수빡에 없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허게 살다 죽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에 교회를 요구하시는 겁니다. 감독자를 세우시고 그 안에서 함께 신앙생화릉 ㄹ할 것을 요구하시는 겁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위해서 요구합니다. 이 교회가 남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그 겨ㅛ회가 구제도 많이 한다, 봉사도 많이 한다, 장학금도 많이 내놓는다, 그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인다 하는 소리 듣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들어오셔서 신앙생활을 하셔야 되고 훈련을 하셔야 되고 신자다워야 됩니다.

한국 국민 사천만 중에 예수 믿는 사람이 천만 명이나 된다는데도 세상이 이톩 엉망진창이 된 것은 우리나라 신자들이 몽땅 돈 내고 좋은 일 하는 것밖에는 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썩는 자리에 가는 소금이 아니고 흑암에 서 있는 등불은 아닌 겁니다. 끼리끼리 모여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는 여러분의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런 말 듣는 것이 싫으십니까? 좋은 말 해주는 교회로 가십시오. 많이 모이는 거샅이 교회가 낭패스러운 것도 없습니다. 많이 모이면 정당하게 훈련을 받아야 될 사람이 못 받습니다. 그러니 많아서 손해입니다.

훈련하고 또 하고 또 하십시오. 신자다워지십시오. 썩는 곳에 서 있는, 간을 맞추러 음식 속에 들어간 소금이 되시고 흑암에 서 있는 등불이 되십시오. 그리하여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온전해지십시오.

빌립보서 4 : 8, 9에서 바울은 우리에겍 그의 신앙을 이러허게 소개합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견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결과적으로 이렇게 살아야 됩니다. 종교적인 형태가 되었을 때만 기독교적인 냄새가 나서는 안됩니다. 무엇에든지 신앙적이어야 됩니다. 가장 사소한 것, 가장 평범한 것, 그리고 그것 자체로는 종교적인 형태가 아니고 종교적인 내용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도 여러분은 신앙적이어야 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형태를 가졌을 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우리나라 교인들은 식(食) 기도 할 때와 전도지 돌릴 때만 신자 같습니다. 통성기도 하고 헌금 낼 때만 괜찮은 신자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는 신앙이 얼마나 깊은지 분간할 수 없습니다. 가방 예쁜 것 들었다고 공부 잘 합니까? 그렇지 않죠? 미제 연필 들었다고 영어가 잘 되나요? 그러허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어두운 곳에서, 사망의 냄새가 진동하는 곳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은 지금 우리에게 권면하는 이 모든 얘기를 그가 시행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 20 :17-22)

이렇게 사셔야 됩니다. 세상의 위협과 유혹에 굴하지 않으며 그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으며 자기를 증명하기 위하여 싸우지 않습니다. 그의 삶은 오직 하나님과 주를 위하여만 있고 그것을 모르는 자들을 향한 불타는 사랑과 안타까움으로 연속됩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주어진 모든 환경에서입니다. 환경을 개선시켜 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더 큰 힘을 다라라고 한다든가 더 좋은 조건을 달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그것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목숨을 내어놓는 거솓 사양하지 않는 것입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 : 22-24)

이것을 너무 감상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삭발하고 혈서 쓰고 주먹 들고 있는 모습을 연상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모든 상황과 모든 조건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묵묵히 하는 것이지 고함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싸움을 싸워 주시겠습니까? 이것을 해야 됩니다. 이것이 저희 교회의 목표이고 책입니다. 저는 그 일을 포기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여러분들도 꼭 그렇게 사셔서 신자로서 사는 생애에 기적과 놀라운 기쁨을 체험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지지 않는 신자가 되기를 바라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생애를 기뻐 쓰시고 여러분을 통하여 마음껏 일하시는 생애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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