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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인간관

사도행전 최용우............... 조회 수 2400 추천 수 0 2009.07.04 17: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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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21:37-22:1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114 / 1990.08.12 

“바울을 데리고 영문으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더러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뇨 가로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그러면 네가 이전에 난을 일으켜 사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바울이 가로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성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크게 종용히 한 후에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여 가로되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사도행전 21:37-22:1

21:37로부터 22:1에 걸쳐서 바울이 잡혀간 후 첫 번째 변명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여기 22장의 유대인들을 향한 바울의 변호로부터 28장이 끝나는 데까지 사도 바울의 5번에 걸친 변명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여기 잡히던 당시에 있었던 군중들 앞에서 한 것, 두 번째는 잡혀가서 이스라엘 최고의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하고 세 번째는 당시 총독이었던 휄릭스 앞에서 하고 네 번째는 그 휄릭스 후임으로 온 베스도 총독 앞에서 변명을 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당시 유대인의 왕으로 있던 헤롯 아그립바 2세 앞에서 하는 것까지 모두 다섯 번에 걸친 자기 변호가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변호 속에는 물론 복음과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를 그 초점으로 한 그 복음을 위한 변명이 있습니다만, 그 변명의 실질적인 초점은 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의 관심대로 본다면 복음을 설명하는 것에 있지 않고 그 복음을 설명하는 바울의 신앙 인격의 어느 부분을 강조하고 있는 것에 모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 자체에 대한 설명은 이미 앞에 너무나 많이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이미 복음 자체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다섯 번에 걸친 변명 속에서는 누가가 복음이 무엇인가 설명하고 있기보다는 그 복음을 변명하고 복음의 일꾼 된 자기를 변호하는 사도 바울의 변명하는 자세 속에서 신자가 가져야 할 신앙인의 어떤 특징들을 부각시키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걸 우리는 어느 곳에서 찾아볼 수 있냐 하면 바울은 지금 이 시점까지 유대인들에게 사실은 원한과 증오를 갖고 있어야 할 그런 경로를 걸어왔습니다. 그가 사도행전 13장에서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제1차 선교 여행을 시작해서부터 여기 잡히는 이 순간까지 유대인들이 쫓아다니며 그를 방해했고 그를 핍박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바와 같이 여러 번 매도 맞고 잡혀서 문초를 받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돌에 맞아 죽을 뻔도 했습니다. 동족의 위험까지도 당했다라고 고린도 후서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2:1에 나오는 이 일에 사도 바울의 태도는 자기를 그렇게 괴롭히고 방해한 자에 대하여 전혀 원한과 증오를 갖고 있지 않음에 우리는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이 문장은 우리말 표현의 뉘앙스가 조금 오해될 소지가 있습니다. “부형들아” 이렇게 반말같이 되어 버렸는데 원래 표현의 분위기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억세지 않고 “나의 부모님 여러분, 나의 형제 여러분” 이런 표현입니다. “~아”라고 하는 호칭 때문에 반말같은 느낌이 들지만 실상은 굉장히 따뜻한 마음과 열심과 진심을 가진 호의적인 표현이 담겨 있다는 걸 잊지 않아야 됩니다.

23:1에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공회 앞에 섰을 때도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역시 “~들아” 이렇게 되어서 반말 같습니다만 그렇지 않고 “나의 형제 여러분들이여” 라는 가장 친밀한 호칭을 써서 바울이 자신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훨씬 따뜻하고 지극한 정성을 가진 마음으로 저들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이 다섯 번의 변명 속에 사도 바울이 가졌던 대(對)인간관이 뭐냐 이겁니다. 그가 인간을 어떻게 보는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을 오늘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 주에 여러분과 함께 신자가 가지는 역사관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 기독교적 신앙의 안목을 좀 정립하려고 합니다.

기독교가 갖는 모든 관의 근거는 신관에 의거합니다. 일반적인 종교라 하는 것은 신관이 없습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일반 종교는 신관이 없습니다. 꼭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 신은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어떤 개념일 뿐입니다. 일반 모든 종교는 인간이 어떤 경지로 가기 위하여 깨우쳐야 되는 도(道)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고귀한 이상이기도 하고 숭고한 어떤 정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대상이 있는 건 아닙니다. 경배하고 그의 말을 듣고 따라야 할 어떤 인격적인 존재자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불교만 해도 석가모니가 신이지만, 경배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 인류 중에 맨 먼저 득도하여 열반의 세계에 간 선각자에 불과합니다. 그가 누구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에게 가서 경배하도록 되어있지 않습니다. 사실은 우리 나라에 와서는 불교가 많이 변형되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선행 또는 의로운 삶 이런 것들이 많이 강조되서 얼핏 보면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와 다른 종교를 가진 자가 제삼자의 눈으로 볼 때는 기독교인이 훨씬 못해 보이는 것 같은 현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이 훨씬 이상과 어떤 고귀한 삶을 추구하고 있는 것에 반해서 기독교라는 것은 목표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행과 윤리, 도덕같은 것이 약한 건 아닙니다만은 상대적으로 약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는 신관이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못박혀 있는데 비하여 일반 종교는 선행, 자기의 어떤 깨우침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 종교인들이 오히려 사람 사이에 선행을 더 많이 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 사이의 계급과 우열에 차별을 갖는 데 대하여 기독교인은 하나님이라는 엄위로우신 유일한 존재 앞에 대등하게 못난 인간이라는 평등성을 가집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우월감을 가질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나도 죄인, 너도 죄인, 우리 모두 다 죄인입니다. 기독교가 강조하는 것은 선, 의, 능력이기보다는 일차적으로 은혜입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지 않는 한 우리는 희망이 없고 의미가 없는 존재다.’ 이게 기독교 신앙의 근거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가 갖는 대인간관은 평등입니다. ‘내가 못난 것같이 저 사람도 못났고 내가 은혜를 입어 이 자리에 온 것같이 저 사람도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다’ 라는 생각을 갖는 것이 기독교의 대인간관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울의 정신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일 크게 오해되는 것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신앙 행위라는 것이 종교적 실천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기독교인이 굉장히 많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열심을 내는 것, 전도를 한다든가, 기도를 한다든가, 성경을 본다든가, 헌금을 내는 것이 기독교인이 해야 되는 신앙의 최고의 것으로 생각하는 이가 많은데 이건 조금 잘못입니다.

그것이 자칫 잘못하면 일반 종교인들이 갖는 것같이 하나의 선행이고 하나의 어떤 고귀한 이상을 추구하는 자기 노력이 되어서 나는 잘났고 너는 못났다 식으로 갈 위험성이 많다는 것을 꼭 기억하고 있어야 됩니다.

내가 오늘 예배를 보고 기도를 하고 전도를 할 수 있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고 새사람이 되고 그걸 나누어 줄 수 있는 일에 부름을 받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기독교적 신앙입니다. ‘나는 지금 착한 일 하는데 넌 안 한다’ 라는 구별이 없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자기를 괴롭히고 자기를 핍박하고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원수들 앞에서 억울함과 증오심 없이 “여러분 부형들이여 내 말을 들으십시오” 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근거인 것입니다.

그는 사랑을 가졌다. 복음을 위한 열심을 가졌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으로는 실제적으로 바울이 가졌던 신앙의 핵심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여러분이 기억해야 됩니다.

게다가 한걸음 더 나아가서 기독교인이 대인간관을 신관에 의거해서 이렇게 평등하게 가진 것같이 이제 눈을 더 떠서 하나님이 하시려는 구원의 폭(scale)이 전우주적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으로 우리의 신앙을 넓혀야 됩니다.

그리고 좀더 현실적으로 만들어야 됩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을 구속사역의 그 중심 인물로 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구원은 우주적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재통일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스케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너무 괄시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특별히 자연계나 물질계를 멸시해서 거룩한 것은 영적이고, 천상적이고 물질적인 것, 이 땅에 속한 것은 악한 것이다라는 식의 이상한 이분법을 갖고 있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너무 금욕적으로 가거나 세상 도피주의로 가는 습성이 있는데 잘못입니다. 성경은 세상을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얘기하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이런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에서 세상 속은 물론 일차적으로 인류를 얘기하는 세상입니다만은 이걸 인간을 사랑했다 사람을 사랑했다가 아니라 세상이라고 표현한 것에는 그만큼의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타락한 인간으로 말미암아 온 우주를 저주하셨습니다만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중생케 하고 새사람되게 하고 우리를 통하여 이 저주받은 모든 자연계를 회복시키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책임은 내가 구원 얻고 또 다른 사람을 구원 얻게 하는 정도의 스케일이 아니고 내가 구원 얻은 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 즉 자연계를 새 생명과 접촉케 하여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셨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자연계로의 회복을 우리에게 맡기고 계시다는 걸 깨우쳐야 되는 겁니다. 내가 구원 얻은 것으로 말미암아 내 옆 사람을 구원 얻게 할 뿐만 아니라 내가 구원 얻은 것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속에서 내가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내가 접촉하는 자연계를, 우주를 하나님의 것으로 바꿔야 된다는 스케일입니다.

가정을, 직장을 꼭 예수 믿게 하는 것 즉 거기에 속한 사람만을 뽑아 오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기업이면 기업 경영 자체를, 가족이면 가족 식구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가정이라는 그런 한 모습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웃들과 무슨 물놀이를 갔다 그러면 물놀이라는 놀이 그 자체를 문학이면 문학을, 음악이면 음악을 말입니다. 그걸 꼭 종교화하라는 게 아닙니다. 음악을 하면 꼭 종교적인 노래만 부른다든가 혹은 물놀이를 가서 꼭 물 속에 무릎꿇고 앉아서 기도만 하라는 게 아니라 그것 자체를 하나님께서 처음에 만드셨던 아름다운 자연으로의 변화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전부가 욕심의 대상입니다. 물이 좋으면 거기 사 가지고 투기할 목적, 사람도 이해 타산으로만 만나 가까이 하고, 직장에서도 승진할 욕심, 기업을 통하여 부를 축적할 욕심, 납들 앞에 자기를 증명하는 발판으로만 쓰지 마시고 회사면 회사, 가정이면 가정, 또 놀이면 놀이 자체, 문학 전반에 걸쳐서 여러분이 이제 이 타락한 세상을 타락한 사람에 의해서 더 이지러지게 방치해 두지 말고 변화된 사람의 손에 의하여 본화된 아름다운 모습으로의 회복을 책임지고 있다는 걸 잊지 않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요구하신 명령입니다. 창세기 1장으로 갑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7,28)

하나님께서 온 천하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보기에 좋다 하셨습니다. 그의 능력과 지혜대로 아름답게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 주인공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에게 온 땅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름답게 창조하신 것에 영광스러운 모든 것을 발휘하도록 인간에게 그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 왜 필요하냐 하면 오늘날 기독교는 너무 편협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내세주의적입니다. 내세주의적이란 것이 틀린 것도 아니고 성경에서 가장 굵은 소망 중에 하나입니다만은 그것이 현실도피적 내세주의라는 것은 나쁩니다. 우리는 지금 사는 것이 죽지 못해 사는 것, 천국 가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의미에서는 천국을 여기에다 건설하고 누릴 줄 알아야 됩니다. 신자가 있는 곳이야말로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주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얼마든지 허락하시는 모든 것으로 영광된 삶을 누리도록 지금 약속하고 있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것들을 너무 누리지 못합니다. 모이면 그저 기도하고 찬송부른 것 외에는 신앙적인 어떤 행위도 할 줄 모르며 신앙적인 어떤 것도 누릴 줄 모릅니다. 기껏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 접해서야만 기도할 줄 아는 그런 식으로 밖에는 우리의 신앙이 발휘되지 않는 가난하기 짝이 없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세상 안에서 사는 우리의 입장도 신자가 세상의 모든 공격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회피하고 잘 도망다니다가 잡히지 않고 천국에 가는 것 이런 식으로 밖에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신자는 그의 신앙을 훨씬 넓혀서 현대 문명이 사회 전 분야를 망라한 거대한 삶의 체계로 공격하는 데 대하여 삶의 전 체계에 대한 신앙적인 체계로 답할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세상이 공격하는 데 대해서 문화에 대한 공격을 문화로 맞공격하지 못하고 답하지 못하고 이걸로 공격해도 우리는 기도, 뭘로 공격해도 기도, 뭘로 공격해도 신앙이라는 어떤 최소한의 우리의 우리 된 것으로 밖에는 답할 수 없다는 것은 비극 중에 비극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그렇게 가난하고 편협하지 않습니다. 온 우주적 스케일이라는 걸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그래서 바로 이 요구들이 성경에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를 우리가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2장 같은 데 나오는 이런 약속들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12:1,2)

아브람의 이민-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새로운 약속의 땅으로 가는 이 일은 신학적으로 굉장히 많은 뜻을 가지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 중에 중요한 하나의 내용을 뭘로 삼느냐 하면 그에게 약속된 땅을 아주 중요한 신학의 주제로 삼습니다. 왜 땅이냐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그의 백성으로 자녀로 부른 수직적 신앙의 행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왜 그에게 새로운 땅을 요구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건 창세기 28장에 가면 야곱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약속이기도 하며 명령이기도 합니다. 벧엘에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희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 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3-15)

이것도 땅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고 너를 복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땅, 땅 하는 게 왜 중요하냐 하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 입국을 눈앞에 두고 모세의 유언을 듣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명하게 경계합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순종하면 너희가 복을 받을 것이요, 내 말을 듣지 않고 외면하면 너희가 저주를 받을 것이다 하는 축복과 저주의 약속을 하는 장면입니다. 우선 축복의 약속을 봅시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으로 많게 하시며”(신28:9-11).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15절 이하에 저주의 약속이 나오는데 36절부터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신28:36)

이스라엘 백성에게 떨어지는 저주 중에서 최고의 저주가 뭐냐 하면 너희에게 허락했던 땅에서 너희를 뽑아서 다른 땅에 던진다가 최고의 저주입니다. 그 땅에서 뽑히는 것 그래 갖고 딴 나라에 가서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것을 최고의 저주로 삼습니다. 64절도 역시 저주의 약속 중에 하나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 네가 그 곳에서 너와 네 열조의 알지 못하던 목석 우상을 섬길 것이라.”(신28:64)

그래서 땅, 땅, 땅 하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지냐 하면 신앙 행위라는  것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수직적인 그리고 개념적인 어떤 내용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속사역을 전우주적 스케일로 가지셔서 우리를 불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인하여 저주했던 땅을 회복시키는 데까지 우리를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얻은 새 생명과 새로운 질서를 내가 소속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펼쳐 내어 나와 만나는 영혼과 인격에게뿐 아니라 내가 소속하고 거처를 정하고 생활을 영위하는 자연계, 우주 안에 있는 어떤 존재들에게든 영향을 미쳐 하나님께서 처음에 그의 지혜와 능력으로 선하게 창조하셨던 온 우주의 회복에 기여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허락하고 복 주신 땅에 사는 동안은 하나님을 섬김으로 인하여 복을 누립니다. 그렇지 못할 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뽑아서 하나님이 허락지 않은 어떤 땅에 버립니다. 그러면 그 땅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냐 하면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섬기는 신을 섬겨야 하는데 그건 우상입니다.

우상을 섬긴다는건 여기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너희가 우상을 섬기는 땅은 너희가 너희 종교 행위를 할 수 없는 곳 너희를 붙잡아 간 자들이 섬기는 신 아래 있게 되는데 그대의 처지는 남의 수하에 있는 때라서 그 목숨이 늘 위태로운 경지에 달해 있는 곳입니다. 즉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안에서 신자되고 신자되어서 누리는 새 생명들을 발휘하는 일을 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곳에 내버려둘 수밖에 없느냐 하면 이 세상 원리가 주관하는 그 속에 내버려 둘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 자체가 저주입니다.

그럼 이제 여러분을 보십시오. 신자라는 것이 그의 신앙 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천국의 소망을 갖고 있는 정도로 자기를 분별하지 마시고 내 신앙 생활을 영위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내 입장이 세상의 권세와 세상의 흔드는 것 아래 들어가 있기에 불안함 속에 처해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기에 담대하고 자랑하고 아무도 나를 흔들 수 없는 입장으로서 세상 속에 존재하는가를 분석 검토해 보셔야 되는 겁니다. 이 후자쪽 입장까지 와 있지 않으면 여러분의 신앙 행위가 그리고 여러분의 신앙적인 모든 입장이 지금 사도 바울이 오늘 보여 준 것 같은 입장까지 미치지 못한 가난한 수준의 신앙이라고밖에는 얘기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사도 바울이 잡혀서 그를 괴롭게 한 원흉들을 만나 자기를 변명하는 입장에서 “너희가 나한테 나쁘게 했지만 나는 그래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너한테 그 복수심을 갖고 있지는 않다”라는 정도로 저들에게 “부형들이여”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입장이 아니라 훨씬 큰 신앙관을 가지고 인간이 뭐냐? 세상이 뭐냐를 깨우친 시점에서 내가 포로되어 있고 너희가 나를 때리는 입장에 있지만 내가 가난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가난한 입장에 있다는 그 신앙관으로 “여러분 부형들이여” 라고 이야기할 수 있고 그래서 오히려 그가 저들을 초대하는 형식으로 변호를 하고 있는 겁니다.

사도행전 24:10로 가 봅시다. 바로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그런 입장을 우리가 바울의 변호 속에서 발견을 합니다. 총독 밸리스에게 하는 말입니다.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이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행24:10) 바울은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원칙적인 입장은 총독인 벨릭스가 사도 바울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입장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실제의 상황은 어떻게 되어 있냐 하면 ‘당신이 내 목숨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 목숨을 좌우할 수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를 바울이 강하게 말하고 있는 상황으로 변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적 권세 질서 체계 속에서는 벨릭스가 칼자루를 쥐고 사도 바울이 도마 위에 올라가 있는 입장일 것 같지만 바울이 보는 입장에서는 이쪽이 칼자루를 쥐고 저쪽이 도마 위에 있는 것이기에 그래서 “잘됐습니다. 나는 기쁘게 말합니다. 당신 내 말 듣게 된 게 얼마나 다행인지 아시오.” 라고 합니다. 교만한 입장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나를 통하여 당신에게 이 말을 하게 한거요.” 라는 그런 입장에 서 있는 겁니다.

이번에는 좀더 세월이 흘러서 벨릭스의 후임인 총독 베스도와 헤롯 아그립바 2세 왕 앞에서 변명하는 장면입니다. 바울의 변명을 듣고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행26:28,29)

즉, 바울은 그들에게 “당신들도 나와 같이 돼야 됩니다. 이렇게 묶일 필요는 없으나 그러나 당신들은 나와 같아야 됩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그립바 왕 쪽에서 본다면 기가 막히는 장면입니다. 그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권세가 이쪽에 있는데 말을 해 보니까 누가 도대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겁니까? 바울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같이 말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그립바 왕이 뿔이 나서 “네가 적은 말로 나를 예수 믿게 하려느냐? 나를 현혹하느냐?” 그러자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아니요, 그런 자존심 싸움은 하지 맙시다. 내가 당신을 겁 주려는 것도 아니요, 당신을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라, 사실인걸 어떻게 합니까?” 이겁니다. 이게 바울의 입장인 겁니다.

그것이 세상과 인간을 보는 신앙관인 겁니다. 이 관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오늘날 신자들은 그의 체계 전체에서 어느 부분은 세상 속에 들어가 있고 어느 부분만 교회에 와 있게 되며 그래서 그의 신앙이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뜻밖에 어떤 것들을 하느냐 하면 본인의 신앙이 어느 날 모자란다고 생각하면 와 가지고 신앙 쪽에 속한 어느 부분만을 할당을 시킵니다. 그러니까 어느 날 갑자기 와서 철야를 한다든가, 여태껏 밀렸던 헌금을 한다든가, 와서 갑자기 울면서 기도를 한 걸로 굉장히 많이 만회했다고 생각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은 여러분의 삶의 전체가 세상을 보는 눈과 여러분의 삶 자체에 모든 영역에 확대된 전체적인 일관성을 가지고 동시적으로 수준이 높아져야 되는 문제입니다.

이게 없어서 오늘날 기독교가 욕을 먹고 여러분의 신앙이 발전이 되질 않습니다. 교회 안에 종교적 행사는 있습니다. 종교적 열심도 있고 교회들이 하는 종교적 사업도 있는데 신앙이 커가는 시각과 인격이 커가는 일들은 교회안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목전에 두고 그 일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는 거이 대부분의 신자들의 약점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왜 일을 이루어 주시지 않는가? 하나님이 가능한 한 기적을 사용하시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적은 일은 이루는데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상받을 인간이 없게 만듭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일은 일어나는데 그 일이 일어난 것이 세상 자체가 새 생명과 만나고 그리고 그 새 생명이 자연계에 퍼지도록 한 어떤 잘난 인물이 없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언제든지 악당들을 죽이실 수 있고 벼락을 내리실 수도 있고 지진이 나게도 하실 수 있고 이 지구를 두동강이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안 하십니까? 그렇게 하는 것에는 하나님께서 하시려고 하는 자연계의 아름다운 완성을 향한 선한 방법이 꽃필 여지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십시다. 여러분의 자녀가 용돈을 만들어 여름방학에 놀러 가려고 구멍가게에서 강도 짓을 하다 잡혔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그 자녀를 버리겠습니까? 경찰서에 찾아가고 아시는 분들을 다 동원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빼낼 것입니다. 우린 거기서도 부모의 사랑과 부모의 자비와 긍휼을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적입니다. 그건 부모의 은혜와 사랑은 나타나도 그 은혜와 사랑이 꽃핀 것으로 나타나지는 않게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입니다.

부모의 사랑과 은혜가 아름답게 나타나는 건 어떤 모습일까요? 자녀가 자녀의 순조과 책임을 이루어 아름다운 모습으로 된 것, 그렇게 하기 위하여 부모가 우리 옛날에 많이 들은 대로 입고 싶은거 안 입고 먹고 싶은거 안 먹고 해서 자녀에게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맹모삼천을 하고, 밤에 같이 앉아 있어 주고, 시간되면 깨워주고 따뜻한 밥 먹이고 한 일들이 보람으로 결실 맺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와 사랑이 아름답게 꽃피는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걸 요구하시는 겁니다. 물론 여러분이 지금이라도 딴 짓하고 위기에 처하면 천군 천사를 보내서라도 여러분을 보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에 적극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은 만들어질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아시겠습니까?

여러분 이렇게 대답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기에는 세상은 너무 험합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으로 우리뿐 아니라 또한 우리를 만나는 영혼에게까지도 우리와 접하는 자연계, 세상이라는 자체를 고쳐낼 책임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해서 세상의 주도권을 잡게 되리라는 약속은 받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소수고 우리는 늘 공격을 받은 입장일 수 있고 우리가 한 일들이 저들에 의해서 한 순간에 파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도록 요구받습니다. 우리가 한 일이 순교로 풍지박산 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우리의 일입니다. 그리고 세상과 인간에 대한 희망은 그렇게 실천하는 신자에 의해서만 지속됩니다. 신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땅을 약속받은 신자에게 하나님이 신앙에 무엇을 요구하느냐 하면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 5장 식으로 한다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온유하셔야 됩니다. 온유하다는건 뭐냐하면 성경적으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며 남을 나보다 낳게 여기는 것, 자기를 비우는 것, 이것이 온유입니다. 신자는 온유해야 됩니다. 온유한 자만이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평생 여러분은 모함과 오해와 핍박과 공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우리가 많은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으로 인류와 세상을 구원하시고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삼고 계십니다.

신자가 해야 될 일입니다. 이 시각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의 신앙 생활에 억울함이 다시는 없게 하십시오. “왜 내가 정직하게 사는데 보상이 이거냐” 라고 얘기하는 건 성경의 약속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욕심입니다 온유하시기로 하십시오.

성경을 볼때마다 언제나 많이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출애굽 사건은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또 그의 능력이 가장 아름답게 나타나는데 그것이 우리의 신앙에 어떻게 힘을 주는 사건으로 작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신약 사건, 십자가 사건은 이래서 가능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그 온유한 모습을 보십시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비참한 최후를 당하시기까지 복종하신 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어째서 가능해졌느냐? 민수기 12:1을 보십시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민12:1,2)

모세의 지도권에 대하여 그의 누이였던 미리암과 형이었던 아론이 모세를 시기합니다. 그래서 마침 모세가 구스 여자로 첩을 삼은 것을 기회로 모세를 공격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사민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삼인이 나아가매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서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 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민12:4-8)

그래서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립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상으로도 꿈으로도 말씀하시지 않고 대면해서 말씀하실 만큼 충성되이 여겼고 충성된 자질을 갖은 자로 인정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그만큼 괜찮은 하나님의 일꾼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12:3). 모세의 강점은 능력이 아닙니다. 모세의 강점은 온유함이었다 그럽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통하여 일을 많이 하신다구요? 온유한 자를 통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건 긴 싸움을 의미한다는 걸 기억하셔야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중요성을 기억하시고 신앙적 싸움이 교회 안에서 혹은 종교적 형태를 뛰어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여러분 존재 자체가, 인생 자체가 전무 종교적 싸움이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존재하는 것임을 잊지 마셔서 여러분의 신앙 실력을 좀 더 깊이시고 넓히시고 많이 승리하셔서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 앞에 쓰여지는 기쁨을 누리시는 그런 자리까지 꼭 도달하도록 하나님 앞에 메달리셔서 기쁨을 맛보는 신앙 생활을 하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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