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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2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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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영선 목사 |
참고 : | 사도행전 115 / 1990.08.19 |
“저희가 그 히브리 방언으로 말함을 듣고 더욱 종용한지라 이어 가로되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내가 이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 22:2-5
바울이 예루살렘에 잡혀와 첫 번째 자기의 신앙과 자기 자신을 변명하는 대목입니다. 자신을 극도로 미워하고 증오해서 어떻게든지 붙잡아서 죽이려고 하는 유대 부형들 앞에서 하는 변호입니다. 앞으로 이것까지 포함해서 다섯 번에 걸친 자기 변호가 나옵니다만 그때마다 조금씩 그 양상이 또 그 초점이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그 바울의 변명에서 하나 특이한 것, 우리가 확인해야 되는 것은 이 변호 속에 어떤 철학적인 논증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이고 너희들이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가? 하는 데 대한 논리적이고 사상적이고 철학적인 설명을 의도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보신 본문과 같이 바울이 자신을 변명하는 것은 그에게 일어났던 어떤 한 사건을 설명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바울의 이 잡힘과 변명 속에서 복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라고 한 번 내용을 검토한 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이미 그 앞의 누가복음에서 더 잘 설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전체에서 나타나는 내용들은 그 복음이 개인에게 있어서 한 사회, 혹은 한 역사에 어떤 파급 효과를 내는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취급되는가? 그리고 그 복음의 일차적인 주인공이 된 신자들이 그 모든 거부와 반대와 오해와 증오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변명하는가? 하는 것이 사실은 더 큰 초점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보는 이 바울의 변명에서도 최고의 관심이 자신을 어떻게 변명하는가 이지만 그 변명의 내용이 자기가 믿는 바의 내용, 자기가 믿는 것이 어떻게 더 옳은 것인가? 하는 데는 전혀 의도가 없고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 상당히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바울은 이 얘기만 합니다. 자신도 지금 자기를 잡아죽이려고 하는 사람들과 원래는 똑같은 입장에 있었다. 나도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율법에 열심이었고 이 도를 믿는 자들을 잡아죽이고 옥에 가두고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에게 커다란 일이 일어났고 그 일로 인하여 나는 변했다 하는 것이 초점입니다.
여기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대, 그 얘기에 대한 유대인들의 부정적인 반응 이것과 결부해서 오늘 우리의 신앙을 아주 중요한 부분에서 한 번 점검해 보려고 합니다.
결국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다른 모든 종교와 어디에서 다르냐 그럴 때 믿음의 대상이 인격자요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이라는 데서 다릅니다.
다른 모든 종교가 어떤 득도하는 것, 하나의 개념과 사상에 불과하다면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온 천하 만물을 지으시고 우리를 만드시고 역사와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이가 있으며 그가 지금 일하고 계신다는 것에 모든 신앙이 모아집니다. 그래서 바울의 변명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뭐냐 하면 내가 지금 이 꼴로 이 자리에 서 있고 여러분들의 반대를 받고 있는 이 일을 하게 된 이유는 내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시켰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일입니다 하는데 대해서는 반대를 할 수 없는 법입니다. 바울의 전(全) 변명은 그것에 불과합니다. 나는 원래 당신들과 똑같은 생각으로 이 일을 반대해야 될 줄로 알았고 율법의 수호자로 자처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메섹을 향해서 가는 도중에 내가 주를 만났고 주께서 나의 눈을 뜨게 했고 주께서 나에게 이방인을 전도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게는 전(全) 답입니다. 그리고 그게 답으로서 충분한 이유는 조금 전에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하나님의 명령만이 유일한 권위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 이상 아무런 다른 식의 변명이나 무슨 증거를 제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 일에 반대했고 그리고 같은 식의 오해는 오늘날 우리 신자들에게도 늘 일어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대표적인 일을 이런 데서 봅시다. 사도행전 17:22에 이방인들의 신앙관과 오늘 일어난 사건을 비교하면서 우리의 신앙도 점검해 봅시다. 바울이 아데네에 도착해서 복음을 증거하는 장면입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행 17:22-29)
바울이 아데네에 가서 그리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가장 중요하게 무엇을 지적하는 것으로 기독교를 설명하느냐 하면 그들의 종교관과 기독교 종교관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인 신관을 가지고 비교합니다. 신이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신이란 것이 참으로 있다면 우리가 상상하고 기대하는 상식적 기준에서 얘기를 한다 할지라도 창조하는 능력이 있어야 할 것이요, 스스로 부족한 것이 없는 분이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 사람들에게 하는 바울의 지적은 이겁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신이라 그러면서 그 신을 너희 손으로 먹이고 입히느냐” 이겁니다. 참으로 신이 있다면 신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이여야지 어떻게 인간이 신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역행을 하고 있느냐? 그렇다면 그것이 참 신이겠느냐? 이것이 지적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신을 장식하며 신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고 너희가 신을 공양해야 되느냐?” 안 그렇습니까?
저들에게 많은 신이 있습니다. 제우스라든가, 바커스라든가, 아폴로라든가 많은 신이 있습니다. 그 신들은 인간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고 오히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늘 빼앗아 가고는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슨 신이냐 하는 겁니다.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스스로 결정권을 가질 것이요, 인간보다 지혜로운 판단을 할 것이요, 앞날을 준비할 것이요, 역사와 개인에게 그쪽에서 가지시는 뜻과 권위로서 인간을 인도하며 요구하며 명령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오늘 아데네에서 행한 식으로 얘기를 하자면 24절을 보십시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신이라면 천제의 주재이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할 것 아니냐? 신을 위하여 왜 인간이 집을 져 주어야 되느냐? 신을 위하여 왜 인간이 먹을걸 만들어 주어야 되느냐?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정말 신이 있고 그 신이 참신이라면 어찌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아야 되냐 이겁니다. 신이라면 오히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자여야 마땅하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걸 오늘 사도 바울이 유대인 앞에 서서 그가 자기를 변명하는 것과 연결해 봅시다.
유대인들의 반대에 대해서 바울의 얘기는 이겁니다. 신이 있다면 신이 온 천하 만물의 주인이요, 인간이 모두 그로부터 말미암아서만 선한 것과 생명과 모든 것을 받는다면 28절 식으로 하자면,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17:28). 그로 말미암아 호흡을 얻고 그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고 그로 말미암아 진리와 가치를 부여 받는다면 명령권자는 분명히 하나님이 유일한 분이어야 맞지 않느냐 이겁니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할 때 내 뜻대로 하던 데서부터 하나님이 나에게 너 그것 하지 말고 이거 해라 명했다면 내가 어떻게 반대하겠냐는 겁니다. 이것보다 더 논리적인 자기 변명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말을 듣고 22절에 가시면 “이 말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행22:22) 하며 달려들어서 죽이려고 합니다. 그럼 결국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지금 사도 바울을 반대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신앙관에 가장 큰 결점은 뭡니까? 하나님의 위치가 없어진 겁니다.
종교라는 건 참으로 무섭습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그 종교가 자신의 고매함을 증명하는 것이요, 자신의 욕심을 호도하는 포장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절대 권세자, 유일한 명령권자가 없어지고 자기가 행하는 종교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그 지위를 찬탈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주 대표적으로 이런 사건과 비교해도 재미있습니다.
이런 비슷한 사건이 베드로에 의해서도 한 번 시행된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하루는 기도를 하고 있는데 기도 중에 환상을 봅니다. 하늘로부터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보니까 보자기 안에 각종 더러운 짐승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소리 있어 말하기를 잡아 먹으라 그럽니다.
베드로가 대답을 이렇게 하죠? 주여, 제가 태어나서 여태까지 부정한 짐승을 먹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손도 댄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이런 답이 나옵니다. “내가 정케한 것을 테가 부정하다 하느냐?” 그리고 환상이 사라졌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생각하는데 어떤 사람이 옵니다. 고넬료라 하는 백부장이 보낸 사환이 와서 말하기를 “우리 주인이 저를 보내서 당신을 모셔 오라고 합니다. 우리 주인이 기도를 하고 있는데 천사가 나타나서 베드로를 모셔 오라는 환상을 보았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왔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깨우칩니다. ‘아! 이건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거구나.’ 그가 여태껏 믿고 있던 유대주의에 의하면 이방인과 사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들과 사귈 수 없으나 아까 본 환상같이 하나님을 정타했으니까 이제 하나님이 정케한 것을 내가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곳으로 갑니다.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설교를 하는 도중에 오순절 다락방에 내렸던 성령이 저들에게도 임합니다. 그래서 그걸 보고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을 합니까? “하나님이 저희에게 우리에게 주었던 것과 동등한 성령세례를 주셨으니 내가 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을 금하겠느냐?” 왜냐하면 물로 세례를 주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건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 훨씬 고급한 것이거든요. 그래서 물로 세례를 줍니다. 돌아오자 금방 예루살렘 교회에서 그를 종교 재판에 회부합니다. 어찌하여 이방인에게 갔으며 왜 이방인에게 우리들에게만 허락된 복음을 저들에게도 전했는가? 이에 베드로가 뭐라 합니까?
베드로가 두 가지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내가 갈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환상 속에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습니다. 내가 세례를 내 자의로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저들에게 성령을 베푸신 것을 보고 내가 물로 세례를 주는 걸 금할 수 없었습니다. 더한 것을 하나님이 주었는데 내가 어떻게 금합니까?
그래서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구원 얻는 복음을 허락하셨다. 이걸 납득하게 됐습니다. 저들의 생각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니까 군말할 수가 없고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동일한 논리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쓰셨습니다. 바울의 얘기는 이겁니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이것이 옳은 것 같아서 이렇게 했습니다.” 가 아니라 나는 그런 생각도 없었고 꿈도 꾸지 않았으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순종해서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이것이 답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이런 놈은 살려 둘 자가 아니다.” 자, 이건 아주 재미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 속에서도 가장 재미있는 것은 뭐냐 하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위치가 그의 삶 속에서 그의 존재와 인격 속에서 과연 얼마만한 위치를 장악하고 있는가가 그의 신앙의 깊이입니다. 우리가 대표적으로 실수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이런 것들입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가? 내가 신자가 됐다는 것이 불신자일 때와 대표적으로 무엇이 달라져야 되는가? 얼마나 더 겸손하냐 도덕적이냐? 깨끗하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의 전생애와 인격과 사고에 유일한 권위자인가 아닌가?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대표적으로 이런 사건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으로 가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1:4-9)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감사 속에 가장 굵은 감사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뭐냐 하면 저들이 가진 은사가 아닙니다. 능력이 아닙니다. 4절을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4) 라고 하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 자체를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저들이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이 감사의 전부입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전1:9). 이것이 감사의 대표적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가 뭐냐 하면 불신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 예수 믿는다 할 때 예수를 믿는 가장 큰 궁극적인 목표가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사랑하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봉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기뻐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크게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럽니다. 저들은 저들이 가진 신앙이 자기네 안에 있었던 것의 극대화라고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면 십자가라 하는 복음의 핵심되는 단어도 사람들에 따라서는 그 이해하는 모양이 천태만상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도 이해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 “나는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주실 만하니까 주님께서 오셔서 돌아가셨다” 라고 이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저쪽의 안 믿는 사람들은 구원 얻을 가치가 있으니까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건 아주 큰 오해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한마디로 대표하는 단어가 뭐냐 그러면 언제나 은혜와 믿음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우리에게 조건이 없다는 얘기요 믿음도 우리에게 어떤 근거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대표적인 단어들입니다. “나도 죽어 마땅한 자요 나도 저 사람들과 방불한 자인데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서 구원을 얻게 하셨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골자입니다. 왜 십자가가 있어야 됐는가? 그 위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서 내가 구원 얻을 스스로의 어떤 조건과 능력이 없어서 십자가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라는 감사와 자기 비하로 가는 것이 십자가의 목표임에도 불구하고 남이 조금만 실수하면 “봐라, 너희들은 희망이 없으니까 십자가를 안 주었고 나는 희망이 있으니까 십자가를 주었다” 라고 이 은혜와 선물마저도 자기의 조건으로 삼는 이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지금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유대인들의 선민 의식과 저들의 율법 의식은 그들이 지킬 만하고 다른 민족보다 좀 낫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민족을 선택했다고 오해하고 있는 시점입니다. 저들은 은혜를 거부하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를 반대하고 있고 그것이 결국 하나님의 위치를 반대하고 있는 자리까지 간 줄을 저들이 스스로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도 어떤 식으로 나중에 오해를 하느냐 하면 고린도전서 4장을 보십시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고전4:7)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많은 은사를 갖고 있었습니다. 방언을 하는 이도 있고 예언을 하는 이도 있고 병을 고치는 은사를 가진 이도 있었고 큰 믿음을 가진 이도 있었다 그럽니다. 그래도 저들은 그 은사를 어떻게 해석을 했느냐 하면 나에게는 방언적 요소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걸 줬다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방언적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모두가 자기가 가진 은사로 말미암아 자기 안에 그런 소질이 있었다는 것으로 그걸 못 받은 이들 앞에서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가장 큰 문제점은 분파였습니다. 서로 당을 지어서 싸우기 시작을 했죠. 방언파라든가, 예언파라든가, 어떤 능력을 가진 이들끼리 패를 갈라서 그걸 갖지 못한 사람들을 괄시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까? 은사라는 것은 우리에게 소질이 있는 것을 확대 개발한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준 은사라 그럽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와 앉은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이들보다 더 종교심이 있거나 더 거룩하거나 도덕적으로 더 나아서 이 자리에 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히려 못난 사람이 더 많이 모이는 곳입니다. 종종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이 신앙 문제를 교회 때문에 방해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난 예수 믿는 사람은 좀 나은 줄 알고 갔더니 더 하더라.” 그렇습니다.
교회에는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양심적으로 더 나은 사람의 집단이 아닙니다. 똑같은 사람들 속에서 은혜를 입은 사람들,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서 부른 사람들이 모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세상적으로 다 쥐새끼 같고 뱀 같고 말미잘 같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지 여러분이 다른 이들보다 좀 낫기 때문에 먼저 선택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확대되면 바울을 죽이는 것과 같은 입장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섭습니다.여러분 신앙을 이제 점검해 모십시오. 여러분 신앙에 이런 것이 있는가 보십시오.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시고 내가 거기에 수종드는 순종하는 자세가 있는가 보십시오. 아니면 여러분이 생각하고 계획한 것을 추진하는 것뿐이고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만이 보조 수단으로 도입되고 있는가? 이렇게 여러분이 점검해 보셔야 됩니다. 바울이 자기를 변명한 것같이 자기의 뜻대로 살던 인생에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자 모든 것을 다 집어 던지고 여태껏 왔던 길과 전혀 다른 길에 오직 하나님의 명령 하나 때문에 순종할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 있는가 보십시오. 변화됐다는 것이 옛날에는 깡패요, 도둑놈이었는데 이제 거룩해졌다는 식의 변화가 아니라 자기 의도와 목표와 인생의 가치가 본인이 의도하지도 않았고 동의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이 하라 그래서 순종의 길을 가는 바람에 동족에게도 이방인에게도 괄시와 환난과 핍박을 받는 길을 걷게 된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인생이 없습니다. 뭐만 있냐 하면 자기의 욕심을 이루어 내려는 신앙적 잡념만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생애 속에 들어오셔서 무얼 요구하지 못합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건 이렇습니다. 가난한 자와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하여 성경은 굉장히 많이 강조합니다. 추수를 할 때도 절대 곡식을 다 추수하지 못하게 되어 있고 추수할 때 떨어진 이삭을 집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 두게 되어 있고 과실을 따도 꼭대기 것까지 다 따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다못해 새라도 먹게 놔 둬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 어떻게 사십니까?
나누어 사는 게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점점 더 많이 세상적인 욕심을 아뢰고 있을 뿐이지 않습니까? 지지 않으려는 싸움만 있지 여러분이 절제하고 양보하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큰 차를 탈 수 있지만 작은 차로 양보한 일이 있으며, 큰집에 살 수 있지만 작은 집에 사는 양보가 어디 있으며, 돈 많이 줘서 내 자식을 가르칠 수 있지만 “좋다. 30등, 40등 하고 그 대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남들과 화목하게 살아라” 라고 여러분의 자녀를 가르친 적이 언제 있습니까? 신자들이 안 하고 있는데 불신자한테 이런 얘기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권위가 우리 생애 속에 그 위치를 잃고 있는 이상한 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경을 보는 동안은 바울 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대인입니다. 여러분은 아무도 바울 편이 아닙니다. 말로만입니다. 이래서 훨씬 무섭습니다. 제가 더 무서운 것은 이런 설교를 들었다는 것 때문에 여러분이 실제로 살지 않고서도 여러분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까봐 또 겁이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제일 우선 순위로 갖다 놓고 그것을 목숨 걸고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 하지 않으셔야 되고 하나님이 하라 그러는 것은 해롭더라도 따르셔야 됩니다. 그것이 바울이 선 자리입니다. 바울의 자기 변명이요, 우리가 그 변명을 들으면서 깨우쳐야 되는 부분입니다.
마치 우리는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 주인공인 바울이 있고 여기 악당 유대인이 있습니다. 이걸 보고 우리는 “저 악당들” 이러고만 있으면 자기 역할이 다 끝나는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훨씬 교만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우린 예수를 믿는다는 그 대의명분 하나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방불한 욕심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악당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일마다 한 번씩 와서 이런 설교를 듣는 것으로 때울 위험성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나와 있는 것들, 우리가 확인해야 되는 게 뭡니까? 바울이 지금 얘기하는 것같이 내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를 만났고 주께서 내 인생을 명하셨다. 그것이 여러분 생애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꼭 선지자여야 된다든가 여러분이 꼭 선교사여야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생애가 내가 하고 싶었던 일로부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생애로는 분명히 바뀌어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자식이 40등 하는것보다 4등 하는게 누구나 좋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주일날 교회 보내지 않고 집에 붙잡아 매고 공부시켜야 됩니다. 한달에 과목당 10만원짜리 과외시키는 것보다 100만원짜리 과외시키는 것이 분명히 더 성적이 오릅니다. 그러나 왜 공부를 그렇게 지독스럽게 시킵니까? 애를 위하여 눈물 흘리며 기도하지는 않으면서 자녀에게 우리는 성경을 쥐어 주지 않고 돈을 쥐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 나와서는 십일조 내고 선교사를 위하여 기도하고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아멘하고 돌아가는 바람에 스스로는 바울 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여러분 이웃 앞에서 평가받아야 됩니다. 여러분을 아는 친척들 앞에서, 여러분의 시어머님이, 친정 어머님이, 여러분의 형제 자매가, 친구가 여러분을 신자답다고 인정하는 데까지 가야 됩니다. 잘 해주면 끝이 없다면서요? 그래서 안 하신다면서요. 그래서 전화가 오면 쌀쌀맞게 받아야 된다면서요. 좀 잘하면 언제 또 집으로 쳐들어올지 모르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신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과 세상에서의 편안을 위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귀를 막아 버린 자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자기 변명입니다. 우린 이 변명을 할 수 없는 입장까지 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스스로를 신자라고 그럽니다. 여기에 아주 큰 비극이 있는 겁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교회와 신자를 사회의 병적인 존재라고 얘기를 하는데 스스로들은 생각하기를 우리가 없으면 이 나라는 벌써 망했으리라고 얘기를 하고 이 나라가 잘사는 것은 우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예를 들 수 있습니다. 백담사에 들어가신 옛날 전전 대통령께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계시는데 그분들한테 이렇게 내놓고 얘기를 하시기 시작했다 그럽니다. “그래도 내가 할 때가 더 낳지?” 우리가 들으면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때가 더 나은 게 아닙니다. 우리 나라 경제나 발전상에 정치인들이 도와준 것이 없습니다.
정치인들이 없었다면 지금보다 열 배는 더 발전했을 거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입니다. 저는 정치인들을 욕하기 위하여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그래서 그렇습니다. 아마 한국이란 나라는 기독교가 없었으면 지금보다 백배쯤 발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와 신자들이 이 사회에 미친 영향에 좋은 점이 있었습니다.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이 믿는다는 이름 하나를 가지고 이 사회에 암적 존재 노릇을 했습니다.
부정적인 얘기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아무래도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보다 낳습니다. 그러나 믿어서 마땅히 해야 될 적극적인 수준까지 그 앞선 지점까지 아무도 안 갔다는 차원에서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 쪽에서 보면 믿는다는 것이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믿는 것이 그저 안 믿는 것에 비해서 나을 수도 있고 안 나을 수도 있는 그런 정도로밖에 취급되지 않는 신자상이 이 사회에 너무나 많은 사람에게 인식되고 말았습니다.
믿는다는 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 혼자 우리를 책임지지 않고 온 천하 만물을 지으신 이가 우리 인생을 책임지고 명령하며 그래서 그 앞에 엎드린 자로서의 삶입니다. ‘내 생애 속에 하나님이 어느 날부터 내 인생을 장악하셨다. 그리고 내 생애 속에서 내 욕심과 뜻과 자존심을 뒤로 물러내고 그분의 뜻을 앞세워야 할 것이 이것이었고 그래서 난 이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하는 것이 없다면 이건 신자가 아닙니다. 그렇게 여러분 자신을 점검하셔야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유대인입니다. 신자들이 신자답지 못하다는 얘기는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닙니다. 한국이란 사회 속에 그렇게 수많은 신자가 있고 그렇게 수많은 교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신자가 신자답지 못한 탓입니다. 영적인 공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상식 선에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주차를 하나 제대로 못한다든가 하는 것 등입니다. 신자들이 놀고 간 자리가 더럽다든가, 교회에서 왔다 그래서 세지 않고 “몇 명 왔어요?” 그랬더니 숫자를 속입니다. 그걸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 그런다든가, 그걸 고치지 않는 한 여러분들은 신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걸 고치는 것은 윤리적 차원이 아니라 신앙의 근본적 시각과 원리의 문제다 이겁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생애를 어느 순간부터 장악한 순간이 있어야 되고 그 이후로부터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을 장악한 온 천하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불꽃 같으신 눈앞에서 늘 점검되어야 됩니다. 그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를 향한 안타까움과 일가친척과 사회와 이웃들 앞에서 여러분의 모든 삶의 모습이 원리와 자세와 그 모양이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앞에서 시험되고 결정된 겁니까? 아니라면 지금부터 고치셔야 됩니다. 여러분을 향한 모든 공격 앞에 혹은 모든 질문 앞에 여러분은 바울같은 답을 하셔야 됩니다. 나는 내 뜻대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하나님은 저에게 이런 인생을 맡기셨고, 지는 인생, 양보하는 인생, 사랑하는 인생, 기도하는 인생, 그 복음이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지 않기 위하여 내가 나를 부인하고 나를 치는 인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것이 내 자녀를 이렇게 가르치게 했고 내 이웃들 앞에 이런 모습을 가지게 했고 내가 이런 옷을 입으며 이런 집에 살며 이런 식으로 살게 했습니다. 그 할 말이 있어야 됩니다.
곰곰이 자신을 오늘 바울의 변명 앞에 비추어 보시고 제발 신자답게 살아 주십시오. 여러분 더 많이 검소해지시고 절제하셔야 되고 양보하셔야 됩니다. 하고 싶은 거 다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법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욕심과 여러분의 자존심을 증명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만 그 방법으로 하나님이 증명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증거되는 여러분 생애를 만들어 주십시오. 그리고 그런 교회로 이 교회를 만들어 주십시오.
여러분이 은혜를 입은 그 은혜를 더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걸 요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뜻을 위하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아매신 지극하신 사랑을 기억하셔야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여러분의 욕심대로 끝날 이유가 없다는 것을 하나님의 열심인 뜻에 비추어 보실 때 빨리 고치는 것이 여러분의 유익입니다. 그리고 조만간 여러분이 만날 주님 앞에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을 그 앞에서 평가받아야 된다는 것을 기억하셔서 신자다운 생애를 촉구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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