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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성화와 견인

수도관상피정 최용우............... 조회 수 2602 추천 수 0 2009.07.06 13:20:53
.........
출처 :  

관상기도를 하다보니 사람들이 듣고 보고 체험하는 일에 많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을 보게된다.
그래서 관상기도는 체험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해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내 안에 그리고 내 위에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눈동자 같이 감찰하시고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식한다면 사람의 삶이 얼마나 달라질까?

삶이 없는 관상은 자기 만족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기 만족 만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산으로 들로 혹은 영화관으로 가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믿는 자들은 자기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한다는 생각을 금할 길 없다.
물론 잘 되지 않으니 하는 말이다.

가톨릭에서는 수덕생활이라고 한다. 그리고 완전한 수덕 생활(완덕)을 목표로 하고 수련한다.
하지만 우리 개신교에는 그런것이 없다.
어쩌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놀라울 것이 없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구원론이 상당부분 차이가 있다.
개신교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주장하지만
가톨릭은 그 위에 인간의 공로를 인정하고 주장한다.
이러한 교리의 차이로 인하여 생기는 문제로 결국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하면 개신교에 그런 교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사람을 통하여 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을 통하여 하라.
더 좋고 간단하고, 더 확실한 교리가 그 어디에 있으며 성경적일까?

주님의 강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
삶의 행동지표가 질서 정연하게 정리되어 교육되지 않고 잇는 것이 사실 아니겠는가?
신학은 발달했지만 삶은.......

간단하게 비교해 본다면
.

1. 대신덕
가톨릭의 주장은 : 대신덕이다. 즉 믿음, 희망,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큰 덕이다.     
                            그래서 그 덕을 행함에 필요한 많은 규범들을 정해놓고 가르치고 있다.
개신교의 주장은  : 하나님 사랑은 바로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2. 윤리덕
가톨릭의 주장 : 윤리덕(현명. 정의. 순명. 용기. .절제)이 있다. 여기에서 파생되어 
                             정의는 정의, 경신덕, 순명으로. 
용기와 관계되는 덕들은 아량, 관대함, 인내, 항구심을 들고 있으며
                             절제는 정결, 겸손, 온유로 파생되어 분리된다.
개신교 주장 : 거덥난 성도들의 이웃 사랑은  하나님을 통한 즉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이다.

3. 신비신학
1). 정화의 길
    :  정화에는 회개와 고행, 칠죄종과의 투쟁, 유혹에 대한 투쟁을 통하여 정화하고자 한다.
     * 개신교는 회개이다. 온전한 회개와 하나님의 은총으로 씻음 받는다.

2). 빛의 길    :  회개한 영혼들이 더 진보하면 빛의 길에 이른다.
                   
       이들은 대신덕과 윤리덕을 실천한다. 물론 기도를 통하여....
                           이들은 일곱가지의 죄(칠죄종)에 대한 각성과 영적 미지근 함에 대한 투쟁을 한다.

3). 일치의 길   : 성령의 은사와 간단한 묵상기도로 일치에 나아가는 길과 
                             주입적 관상으로 일치에 나아간다.(우리가 말하는 관상기도라 하는 침묵기도)

  * 참고로 관상의 여러단계를 말하고 있다
        (고요의 일치기도. 충만한 일치기도. 황홀한 일치기도. 변모의 일치기도)

  * 일치는 하나님께서 하나되어 주시는 은총으로 기도하는 누구에게나 베푸신다.
      오직 관상기도 만이 하나님과 일치(연합, 하나됨)하는 것은 아니다. 
       통성으로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이다.

 * 통성기도하다 기절하여 헛소리하는 것 같은(외관 상) 그런 모습으로 은총을 받아 입신 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4. 거짓된 신비주의 
: 정적주의를 말한다.
  * 거짓이란 개혁주의 안에도 있다. 어디든 있는 것이니 잘 구별해야 한다.
    그래서 관상하는 사람은 신비한 일을 더욱 체험 할 수 있으므로 더욱더 영분별을 해야 한다.
    영분별과 영적지도는 필수적이다. 물론 모든 성도가 그리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살펴보면 신학의 차이가 얼마나 골이 깊은가를 알게된다.
오직 하나님 제일주의 인가?
그외 사람의 공로가 개입되는가?
이 두 문제는 어느 한족으로 크게 진행되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개신교도 오직 하나님 제일주의 이지만, 여기에서 사람의 역활도 있다.
사람이 하나님께 협력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하지 않으시는 일이 많다.
그러나 이 협력은 결코 인간의 공로가 될 수는 없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 은총 가운데서 행랄 수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은 사람의 협력을 공로로 보기 때문에 그기서 파생하는 많은 문제가 개신교와 부딪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쪽도 사람을 로보트로 생각지는 않는다.

이런 일들을 고려한다면
개신교 성도님들은 특히 조직신학 중에서도 구원론을,
구원론 중에서도 성화와 성도의 견인에 대해서 깊이 통찰할 필요가 있다.

관상기도를 하는 분들은 더 더욱 관상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삶은 바로 성화와 견인의 교리를 망각 혹은 벗어나서는 안된다.

그 어떤 것도 신학을 벗어나거나 무시해서는 안된다.
신학의 범위 안에서 더 발전하고 진보해야 한다.

올바른 신학과 신앙의 바탕 아래 관상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여기 뻘코프의 조직신학 구원론 중에서 성화와 견인을 올린다.

읽으시고 유념하시어 오늘보다 더 나은 삶의 변화 하나님과 일치하는 삶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려길 바랍니다.

전체 조직 신학을 다시 한번 쯤 살펴보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되리라 여겨집니다.

하나님과 하나됨을 사모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관상의 은총을 얻으소서!감사합니다.
2008.  8.  2.       고려수도원   박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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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성화

A. 성화와 거룩함에 대한 성경적 용어

1. 구약 성경
.

'거룩하게 하다'라는 구약 성경적 용어는 카다쉬로 니팔, 피엘, 히필, 힛파엘의 형태로 사용된 동사이다. 명사형은 코데쉬며 형용사형은 카도쉬이다. 동사 형태는 명사형과 형용사형에서 유래한다. 이 단어들의 원래 의미는 확실하지 않다. 어떤 학자들은 '카다쉬'는 '비춘다'는 의미 의 '차다쉬'와 관련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성경적인 거룩함의 개념의 특질, 즉 순결의 개념과 조화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단어가 '자르다'란 의미의 '카드'란 어근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더 높은 개연성이 있다. 이는 분리의 개념이 원래의 의미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초연, 분리, 장엄을 나타낸다. '성화' '거룩함'이라는 단어들의 이러한 의미는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지만, 이것이 근본적인 개념이었음에 틀림없다. 거들스톤(Gir질estone)은 "'성화' '거룩함'이라는 용어는 지금은 도덕적 · 영적 특성을 나타내는 말로 빈번히 사용되어, 하나님과 그에게 봉헌된 어떤 사람이나 사물과의 '위치 혹은 관계'라는 개념을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이 단어의 실제의 의미이다. "이와 유사하게 크레머-쾨겔은 거룩함의 개념에는 분리의 개념이 가장 근본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거룩함은 관계적 개념이다. "동시에 거룩함과 분리의 두 개념은 혼합되지도 않고 어느 하나에 흡수되는 개념도 아니며, 거룩함은 분리의 개념을 어느 정도 제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 인정되고 있다

2. 신약 성경

(1) 동사 하기아조와 다양한 의미들.

'하기아조'라는 동사는 히브리쓱 '카도쉬'와 같이 먼저 분리의 개념을 표현하는 '하기오스'의 파생어이다. 하지만 신약 성경에서 이는 몇 가지 상이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①이는 인간이나 사물의 정신적 의미로 사용된다(마 6:9; 눅 11:2; 벧전 3:15). 이러한 경우 이는 "어떤 대상을 거룩하게 여기다", "그것에 거룩함을 귀속시키다", "말이나 행동으로 거룩함을 인정하다"라는 의미이다. ②종종 이 단어는 예식적인 의미로, 즉 "신성한 목적을 위해 일반적인 것들과 구별된다" 혹은 "일정한 직책을 위해 따로 구별하다"는 의미로 사용된다(마 23:17,19; 요 10:36; 딤후 2:21). ③또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인간 안에 거룩함의 주관적 속성을 야기시키는 사역을 나타내실 때 사용된다(요 17:17; 행 20:32; 26: 18; 고전 1:2; 살전 5:23). ④마지막으로, 히브리서에서는 속죄적 의미로 사용되었고, 바울의 디카이오오와 연관된 의미로 사용된다(히 9:13; 10:10,29; 13:12).

(2) 거룩함을 나타태는 형용사들

히에로스: 가장 적게 사용되고 가장 희미한 의미를 전달하는 단어가 히에로스이다. 이는 고전 9:13, 딤후 3:15에서만 발견되고, 사람이 아니라 사물에게 사용된다. 이는 도덕적 우월성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연유된 사물의 신성 불가침적인 성격을 표현하고있다. 이는 영어 단어로는 sacred (신성한)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다.

호시오스: 호시오스라는 단어는 자주 사용된다. 이는 행 2:27; 13:34,35; 딤전 2:8; 딛 1:8; 히 7:26; 계 15:4; 16:5에서 나타나고, 사물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 이는 인격이나 사물이 불결이나 사악이 없고, 보다 능동적으로는 종교적으로 모든 도덕적 의미를 성취함을 서술한다.

하그노스: 하그노스라는 단어는 고후 7:11; 11:2; 빌 4:8; 딤전 5:22; 약 3:17; 벧전 3:2; 요일 3:3에 나온다. 이 단어의 근본적인 개념은, 윤리적 의미에서 불순과 불결이 없는 것이다.

하기오스: 하지만 신약 성경에서 가장 특유한 단어는 하기오스이다. 본래의 의미는, 성별되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봉헌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하나님을 위해 세상에서 파로 구별된 것은 세상의 오욕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해야 하며 하나님의 순수함에 참여해야 된다는 개념이 나타난다. 이는 하기오스가 윤리적인 의미를 신속하게 획득하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항상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a)이 단어는 외부적인 공적 관계, 즉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일반적인 목적과는 구별된 존재를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예를 들면, "거룩한 선지자들"(눅 1:70), "거룩한 사도들"(엡 3:5),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벧후 1:21). (b) 하지만 이 단어는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하나님을 기꺼이 섬기기 위한 특질을 나타내는 윤리적 의미로 더 빈번하게 사용된다(엡 1:4; 5:27; 골 1:22; 벧전 1:15,16). 성화의 가르침에 있어서 우리는 이 단어를 우선 후자의 의미로 사용하고자 한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성화와 관련해서 거룩함을 언급할 때 우리는 외부적 관계와 주관적인 내적 특질 양자를 고려한다. 

(3) 성화와 거룩함을 나타태는 명사들.

성화에 대한 신약 성경적 용어는 하기아스모스이다. 이는 10번 출현한다(롬 6:19,22; 고전 1:30; 살전 4:3,4,7; 살후 2:13; 딤전 2:15; 히 12:14; 벧전 1:2). 이 단어가 윤리적 순결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분리의 개념 즉 "모든 불순하고 타락된 것으로부터의 영의 분리와, 육신과 마음의 욕망이 우리에게 초래하는 모든 죄를 포기함"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하기아스모스가 성화의 사역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이 과정의 결과를 나타내는 두 가지 다른 단어, 즉 '하기오테스'와 '하기오수네'가 있다. 전자는 고전 1:30, 히 12:10에서 발견되며, 후자는 롬 1:4; 고후 7:1; 살전 3:13에서 발견된다. 이 구절들은 거룩함의 특질 즉 오염과 불순의 전무함이 하나님에게 본질적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제시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분여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B. 성화론의 역사

1. 종교개혁 이전
.

성화론의 역사적 전개에 있어서 교회는 우선 다음 세 가지 문제들에 관심을 둔다: (1) 성화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칭의와의 관계 (2) 성화와 칭의의 관계 (3) 현세에서의 성화의 정도. 초대 교부들의 문헌들은 성화론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인간이 구원을 위해 신앙과 선행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도덕주의의 경향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세례 전에 지은 죄는 세례시 씻겨지지만 세례 이후에 지은 죄는 속죄와 선행이 필요하다. 그는 미덕의 삶을 영위해서 주님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스코트는「니케아 신학」(The Nicene Thelogy)에서, "이러한 이원론은 성화의 영역을 그리스도의 구속과 간접적으로만 연결시키게 했다. 이는 본래 죄에 대한 불완전한 개념, 율법주의, 성례주의, 사제적 정략(priestcraft), 과도한 수도사적 헌신 등이 성장하는 온상이 된다"고 말한다. 금욕주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었다.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는 경향도 있다. 어거스틴은 성화에 대한 다소 명확한 개념을 발전시킨 최초의 인물로, 그의 견해는 중세 교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는 칭의와 성화를 명확히 추분하지는 않았지만 성화가 칭의 안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는 타락에 의한 인간 본성의 전적 부패를 신봉하므로, 성화를 신적 생명의 새로운 초자연적 분여 즉 교회의 영역 안에서 성례를 통해 역사하는 새로운 에너지의 주입이라고 이해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사랑이 성화의 구성적 요소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화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형이상학적으로 이해했다. 즉 그는 성화를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예치물(deposit)로 이해했다. 그는 구속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지속적으로 몰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변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충분히 강조하지 못했다.

어거스틴의 가르침에서 나타나는 경향들은 중세시대의 신학에서 결실되어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작에서 가장 발전된 형태로 나타난다. 칭의와 성화는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고, 칭의는 인간 영혼에 있어 본질적인 신적 은혜의 주입을 포함하게 된다. 이 은혜는 일종의 부가적 선물(donum superadditum)로, 인간이 새로운 수준 즉 보다 고차적인 존재의 질서로 상승하여 하나님을 인식하고 소유하고 향유하는 천상적 목표를 성취할 수 있게 한다. 은혜는 영원히 소진되지 않는 그리스도의 공로의 보고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성례에 의해 신자들에게 분여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영혼 안의 이 성화적 은혜는 원죄의 용서를 보증하며, 본래적 의의 영원한 성향을 분여하고, 발전과 완성을 위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새로운 생활이 모든 미덕과 함께 전개된다. 선행은 중죄에 의해 무효화되거나 파괴될 수 있다. 하지만 세례 이후 범한 허물은 가벼운 죄일 경우는 성체성사(성찬)에 의해 제거되며, 중죄의 경우에는 고해성사에 의해 제거될 수 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신앙의 초자연적 행위들은 하나님 앞에서 공로가 되어 은혜의 증대를 보증한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지속적 역사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모든 과정의 결과는 성화보다는 칭의로 이해된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의롭게 만든 것이다. 이 러한 사상들은 트렌트 공의회의 신조와 교칙에 구체화되어 있다. 

2. 종교 개혁 이후.

중교 개혁자들은 성화를 언급함에 있어서 자연과 초자연의 대립보다는 죄와 구속의 대립을 강조한다. 이들은 칭의와 성화를 명확히 구분하고, 칭의는 신적은혜의 법적 행위로서 인간의 법적 지위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이해하며, 성화는 도덕적 재창조적 사역으로서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이들은 양자를 조심스럽게 구분하면서도 양자의 불가분의 성격을 강조한다. 인간이 신앙으로만 칭의 받는다고 깊이 확신하면서도 이들은 칭의 받는 신앙이 홀로 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해한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칭의 받는 순간 이들의 심령에 아들의 영, 즉 성화의 영을 보내주시므로 즉시 성화를 수반하게 된다. 이들은 성화의 은혜를 성례를 통해 인간 안에 주입되는 초자연적 본질이 아니라 먼저는 말씀, 그 후에는 성례를 통한 성령의 초자연적이며 자비로운 사역으로 이해했다. 말씀과 성례로 인해 성령은 우리를 죄의 세력에서 점진적으로 해방시키며 우리가 선행을 행할 수 있도록 한다. 종교 개혁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칭의와 성화를 혼동시키지 않으면서도, 행위의 의의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값없고 용서하는 은혜가 강하게 강조되는 칭의와 인간의 협력을 요청하는 성화간에 가능한 한 밀접한 관련을 유지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경건주의와 감리교에서는 그리스도와의 지속적 교제가 성화의 중요한 수단으로 크게 강조된다. 칭의를 희생시킬 정도로 성화를 고양시킴으로써 이들은 자기 의의 위험을 완전히 회피하지는 못한다. 웨슬리는 칭의와 성화를 구분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를 분리시키고, 성화 전체를 첫번째 은혜인 이신칭의 이후 조만간 오게 되는 두번째 은혜라고 언급했다. 합리주의와 칸트의 도덕주의적 영향으로 인하여 성화는 죄인을 갱신하는 성령의 초자연적 사역으로 간주되지 않게 되었으며, 인간의 자연적 능력에 의한 도덕적 개선 수준으로 격하되었다. 슐라이에르마허에 있어서 성화는, 우리 안에 단순히 감각적이고 도덕적으로 결여된 세계의 의식에 대한 신(神)의식의 점진적인 지배에 불과하다. 그리고 리츨에게 있어서 성화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우리의 소명을 성취할 때 획득되는 기독교적 삶의 도덕적 완성이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서 성화란 일반적으로 고차적 자아의 지배에 의한 인간의 하위적 자아의 점진적인 구속에 불과하다. 성품에 의한 회복이 오늘날의 표어이며, '성화'라는 용어는 단순한 도덕적 개선을 의미하게 되었다.

C. 거룩함과 성화에 대한 성경적 개념

1. 구약 성경.

성경에서는 거룩함의 특질이 우선 하나님에게 적용되며,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 그 기본적인 개념은 '접근할 수 없음'이다. 이러한 접근할 수 없다는 개념은 하나님이 신적이며 따라서 피조물과는 절대적으로 구분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이런 의미에서 거룩함이란 하나님 안에 있는 다른 속성들과 연관된 속성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의 속성으로 단정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에 있어서도 의에 있어서도, 진노뿐만 아니라 사랑에 있어서도, 거룩하시다. 엄격히 말해서 거룩함은 윤리적 의미에 있어서만 하나의 속성이다. 이 단어의 윤리적 의미는 위엄이라는 의미에서 도출되었다. 이러한 발전은, 죄악된 존재는 무죄한 존재보다 하나님의 위엄을 보다 더 명확히 의식한다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죄인은 자신의 불결이 하나님의 순결한 위엄과는 배치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사 6장 참조).

오토(Otto)는 원래 의미의 거룩함이란 물(物)자체(the numenous)라고 언급하고, 여기에 대한 특유한 반응을 "피조 감정, 피조 의식", 자아를 무가치하다고 평가함이라고 명명할 것을 제안한다. 또 그는 여기서 파생된 윤리적 의미에서의 거룩함에 대한 반응을 '절대적 신성 모독 감정'이라고 언급한다. 따라서 순결한 위 엄, 윤리적 지고성이라는 거룩함의 개념이 발전된다. 이러한 순수성은 그 자체를 입증하며 그 영광을 유지해야 하는 하나님 안에서의 능동적 원리이다. 이는 성경에서 거룩함이, 삼킬 것 같은 불로 변환되는 신적 영광의 빛으로 제시되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사 5:24; 10:17; 33:14,15).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 인간은 자신이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불결하고 죄 많으며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임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은 구약 성경에서 자신의 거룩함을 다양한 방식으로 계시하셨다. 그는 이스라엘의 적들에 대해 무서운 심판으로 거룩함을 계시하신다(출 15:11,12). 또 세상에서 한 백성들을 하나님을 위해 구분함으로써 이를 계시하신다(출 19:4-6; 겔 20:39-44). 불결하고 무신적 세계에서 백성을 선택함으로써 하나님은 세상과 세상의 죄에 대해 대항하셨다. 더욱이 그는 불충성한 백성들을 용서하심으로써, 속화된 제상이 하나님의 사역의 실패를 보고 기뻐하지 못하게 하셔서 자신의 거룩함을 나타내셨다(호 11:9).

파생적 의미에서의 거룩함의 개념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사물과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가나안 땅, 예루살렘 도성, 성전의 언덕, 성막과 성전, 안식일, 절기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 성별된 것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의 광채 안에 위치하므로 거룩하다고 일컬어졌다. 마찬가지로 선지자들, 레위인들, 제사장들은 주님을 특별하게 섬기도록 구분되었으므로 거룩하다고 일컬어진다. 이스라엘은 신성한 장소, 신성한 절기, 신성한 예식, 신성한 사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아직 윤리적 개념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신성한(sacred) 사람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결여할 수 있다. 새 세대뿐만 아니라 옛 세대에서도 윤리적 거룩함은 성령의 갱신하고 성화시키는 사역에 의해 일어난다. 하지만 거룩함의 개념이 철저히 영성화된 곳에서도 이는 관계를 표현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거룩함의 개념은 그 자체로 고려된 도덕적 선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여진 윤리적 선의 개념을 지닌다.

2. 신약 성경.

구약 성경에서 신약 성경으로 넘어갈 때 우리는 현저한 차이를 인식하게 된다.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비견될 수 있는 어떠한 속성도 존재하지 않지만 신약 성경에서는 거룩함이라는 단어가 하나님에게는 거의 적용되지 않는다. 구약 성경을 인용한 몇몇 구절을 제외하면 이는 오직 요한의 문서들에서만 나타난다(요 17:11; 요일 2:20; 계 6:10). 신약 성경에서는 거룩함이 하나님의 영의 독특한 특징을 나타낸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설명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 신자들은 성화되고, 봉사할 권능을 받고, 영원한 목표로 인도된다(살후 2:13; 딛 3:5). '하기오스'라는 말은 하나님의 영과 연관되어 거의 100번 정도 사용된다. 하지만 신약 성경에 있어서의 거룩함과 성화의 개념은 구약 성경적 개념과 동일하다. 구약 성경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에서도 거룩함은 파생적 의미로서 인간에게 적용된다. 구약 성경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에서도 윤리적 거룩함은 도덕적 정직 이상이며, 성화는 단순한 도덕적 개선 이상을 의미 한다. 성품에 의한 구원을 언급하고 있는 오늘날에는 양자가 자주 혼동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도덕적 개선을 자랑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는 성화에는 전혀 문외한일 수 있다. 성경은 순수하고 단순한 도덕적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되고 하나님을 위하며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도덕적 개선을 요구한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오늘날의 윤리적 설교들은 전적으로 잘못되어 있으며, 이를 시정하려면 진정한 성화론이 제시될 필요가 있다. 성화는 '칭의받은 죄인을 죄의 부패로부터 해방하고 그의 본성 전체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며 그가 선행을 할 수 있게 하는 성령의 자비롭고 지속적인 사역'이라고 정의필 수 있다. 

D. 성화의 본질

1.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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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성화를, 의지에게 동기를 설득력 있게 부여함으로써 중생에 의해 영혼 안에 주입된 새로운 생명이 도출되는 것이라는 잘못된 개념을 지니고 있다. 성화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우선적으로 중생시 출생한 거룩한 성향이 강화되고 그 거룩한 수행이 증대되게 하는 영혼 안에서의 신적 작용이다. 하나님이 수단을 사용하는 한 인간이 이 수단을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협력할 수 있고 또 협력할 것이 기대되지만, 성화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성경은 성화의 초자연적 성격을 몇 가지 방식으로 제시한다. 성경은 성화가 하나님의 사역 (살전 5:23; 히 13:20,21),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연합의 열매(요 15:4; 갈 2:20; 4:19), 안으로부터 인간에게 역사되며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해 인간의 사역으로 여겨질 수 없는 사역(엡 3:16; 골 1:11)이라고 서술한다. 또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미덕의 발현이 성령의 역사라고 언급한다(갈 5:22). 성화는 결코 인간의 영적 발전에 있어서 자연적 과정으로 제시되거나,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서 행해지듯 인간의 업적으로 격하되어서는 안 된다. 

2.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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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는 성화의 두 부분이 다음과 같이 제시되고 있다.

(1) 옛사람, 죄의 몸의 극복.

이러한 성경 용어는 죄로 인한 인간 본성의 부패와 타락이 점진적으로 제거되게 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낸다. 이는 종종 성경에서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으로 표현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연관된다. 옛사람은 죄로 인해 죄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본성이다(롬 6:6; 갈 5:24) 갈라디아서의 문맥에서 바울은 육신의 행위와 성령의 행위를 대조시키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라고 말한다. 이는 그들의 경우 성령이 지배력을 행사하신다는 것을 의미 한다.

(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을 위재 창조된 새사람의 소생.

성화의 전반부가 소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이 부분은 적극적이다. 이는 영혼의 거룩한 성향이 강화되고 거룩한 실천들이 증대되고 새로운 생의 과정이 창출되고 촉진되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죄의 옛 구조가 점진적으로 파괴되고, 그 대신 하나님의 새로운 구조가 건조된다. 성화의 이 두 부분은 연속적이라기보다는 동시적이다.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새로운 건물의 점진적인 건축 과정이 옛 건물이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 지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지연되어야 한다면 이는 결코 이생에서 시작될 수 없을 것이다. 옛 것이 점진적으로 해체됨에 따라 새 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유독한 냄새로 가득 채워진 집을 환기시키는 것과 같다. 옛 공기가 빠져 나가게 됨에 따라 새로운 공기가 들어온다. 이러한 성화의 적극적인 측면은 종종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입음"이라고 불린다(롬 6:4,5; 골 2:12; 3:1,2). 이것이 인도하는 새로운 생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라고 불린다(롬 6:11; 갈 2:19).

3. 인간 전체 즉 몸과 영혼, 지성과 감성과 의지 전체에 영향을 준다.

이는 성화의 본질에서 유래한다. 왜냐하면 성화는 인간의 내면적인 삶에서, 심령에서 일어나는데, 인간의 내면적인 삶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인간 전체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내면적 인간이 변화된다면 주변부에서도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더욱이 성경은 성화가 몸과 영혼 전체에 영향을 준다고 명백하고 분명하게 가르친다(살전 5:23; 고후 5:17; 롬 6:12; 고전 6:15,20). 여기서 몸은 죄악된 경향과 습관과 감정이 표현되는 죄악된 영혼의 기관 혹은 도구로 고려되고 있다. 몸의 성화는 특별히 죽음의 위기와 죽은 자의 부활에서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성경에서는 성화가 영혼의 모든 능력 혹은 모든 기능오성(렘 31:24; 요 6:45), 의지(겔 36:25-27; 빌 2:13), 감정 (갈 5:24), 양심(딛 1:15; 히 9:14)에 영향을 준다가르친다.


4. 신자가 협력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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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성화의 사역에 참여한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성화의 사역에 있어서 독립적인 행위자가 되어 성화를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사역이고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사역으로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성령에 기도와 지성으로 협력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이성적 존재로서 인간이라는 도구를 통해 부분적으로 성화의 사역을 수행한다는 의미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과 협력해야 된다는 것은 (1) 인간이 인생의 함정을 회피하는 데 있어서 능동적 이어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암시하고 있는 유혹과 사악한 행동에 대한 반복된 경고(롬 12:9,16,17; 고전 6:9,10; 갈 5:16-23), (2) 거룩한 삶에 대한 계속적인 권면에 잘 나타나 있다. 이들은 신자가 그의 생에 있어서 도덕적이고 영적인 개선을 위한 수단들을 강구하는 데 있어서 근면해야 한다는 것을 내포한다(미 6:8; 요 15:2,8,16; 롬 8:12,13; 12:1,2,17, 갈 6:7,8,15).

E. 성화의 특성

1. 위에서 진술한 바와 같이, 성화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이신 하나님의 사역이다.

소위 자유 의지의 대변자만이 성화가 인간의 사역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나님이 그의 통제하에 두신 수단들을 사용함으로써 성화를 증대시키도록 노력할 수 있고 또 노력해야 한다는 점에서 성화는 중생과 구분된다. 이는 성경에서 명확히 가르치고 있다(고후 7:1; 골 3:5-14; 벧전 1:22). 철저한 율법폐기론자(Anti-nomian)들은 이 중요한 진리를 망각하고, 조심스럽게 죄를 회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는 사형 선고를 받은 옛사람에게만 영향을 줄 수 있고 그리스도의 거룩함으로 거룩하게 된 새사람에게는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2. 성화는 부분적으로는 잠재 의식에서 일어나고 이러한 점에서 성령의 직접적 사역이다.

뿐만 아니라 성화는 부분적으로는 의식 영역에서 일어나고 신앙의 지속적 실천, 하나님의 말씀의 연구, 기도, 다른 신자들과의 연합 등과 같은 일정한 수단의 활용에 의존한다.


3. 성화는 통상적으로 장구한 과정이며 이생에서는 결코 완성에 도달할 수 없다. 동시에 매우 짧은 순간 혹은 순간적으로 완성되는 사례들, 예를 들면 일시적인 죽음 이후 곧 중생과 회심이 일어나는 사례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신자의 성화가 사망 직후 완성된다는 가정을 발전시킨다면 (성경은 영혼에 관련되는 한 이를 가르치고 있는 듯하다) 그러한 사례들에 있어서는 영혼의 성화가 거의 즉시 완성된다. 

4. 신자의 성화는 영혼에 있어서는 사망 바로 그 순간에 혹은 사망 직후에 완성되며, 몸에 있어서는 부활시에 완성된다.

이는 한편으로는 성경이 이생에서는 아무도 무죄를 주장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왕상 8:46; 잠 20:9; 롬 3:10,12; 약 3:2; 요일 1:8), 또 한편으로는 오래 전에 죽은 자가 전적으로 성화되었다고 가르치는 사실에 기인한다. 성경은 이들을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히 12:23), "흠이 없는 자들"(계 14:5)라고 밀한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의 천성에는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계 21:27)는 말씀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1)는 말씀을 발견한다. 

F. 성화의 조성자와 수단

성화는 삼위 일체 하나님의 사역이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성령의 사역이라고 볼 수 있다(롬 8:11; 15:16; 벧전 1:2). 신학 연구를 인간학적으로 접근할 필요성을 강조하며 하나님 나라의 봉사로의 부르심만을 편협하게 강조하는 우리 시대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화의 주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각별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특별히 미국 종교 생활을 특징짓고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인간의 사역에 영광을 돌리는 행동주의(Activism)에 대해서, 성화는 칭의의 열매요 성화는 칭의 없이는 불가능하며 양자는 죄인의 구속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열매들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과 협력하는 특권을 소유했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날마다 그에게 분여하는 힘에 의존해서 이 일을 행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영적인 성장은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다. 인간은 그가 영적인 성장에 도구적으로 기여한다는 것에 대해 어떠한 칭찬도 받을 수 없다. 성화가 잠재 의식에서 일어나는 한 이는 성령의 직접적인 사역에 의해 일어난다. 하지만 신자의 의식 영역에서 역사할 때 성화는 성령이 사용하는 몇 가지 수단에 의해 일어난다. 

1. 하나님의 말씀.

로마 교회에 반대하여, 성령이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 진리 그 자체는 신자를 성화시킬 적절한 효과를 야기시킬 수 없다. 하지만 이는 성령에 의해 사용될 때 성화의 수단이 된다. 성경은 거룩한 실천과 행위들에 대한 모든 객관적 조건들을 제시한다. 성경은 동기와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영적인 활동을 자극하고, 금지와 권면과 사례들을 통해 영적인 생활을 지도한다(벧전 1:22; 2:2; 벧후 1:4).

2. 성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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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로마 교회에 의하면 최고의 수단이다. 개신교인들은 이를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된 것으로 이해하며, 때로 이들을 '보이는 말씀'이라고 언급하기조차 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언어로 표현된 동일한 진리를 상징하며, 이를 우리에게 보증한다. 또 이는 진리를 생동적으로 제시하고 성령께서 거룩한 활동을 위한 기회를 만드시는 행동화된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항상 말씀이 수반된다(롬 6:3; 고전 12:13; 딛 3:5; 벧전 3:21),

3. 섭리적 인도.

호의적이든 적대적이든 하나님의 섭리는 종종 성화의 강력한 수단이 된다. 말씀을 통한 성령의 사역과 연관되어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자연적 감정에서 역사하며, 따라서 종교적 진리에 대한 인상을 심화시키고 감화시킨다. 그의 섭리적인 인도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시 119:71; 롬 2:4; 히 12:10).

G. 성화와, 구원의 순서의 다른 단계들과의 관계

성화와, 구속 사역의 다른 단계들과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1. 성화와 중생의 관계.

여기에는 차이점도 있고 유사성도 있다. 중생은 단번에 완성된다. 이는 인간은 일부만 중생할 수 없고, 영적으로 죽은 자거나 산 자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성화는 과정으로서 점진적인 변화를 창출하며, 그 거룩함의 결과에 있어서 많은 단계들이 구분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완전한 거룩함에 이르도록 권면 받는다(고후 7:1).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은 "가장 거룩한 사람도 이생에서는 이러한 순종의 미미한 시작만을 가질 수 있다"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거룩함의 정도가 있다는 것을 전재하고 있다. 동시에 중생은 성화의 시작이다. 중생에서 시작된 갱신의 사역은 성화에서 지속된다(빌 1:6). 스트롱은 "마치 성장이 출생과 구분되고, 거룩한 성향의 강화가 이의 본래적인 부여와 구분되듯이, 성화는 중생과 구분된다"라고 말한다.

2. 성화와 칭의의 관계.

칭의는 은혜의 언약에서 성화에 선행하며 성화의 기초가 된다. 행위의 언약에서 의와 거룩함의 순서는 정 반대이다. 아담은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성향과 기질로 창조되었지만, 이 거룩함을 기초로 영생을 획득할 수 있는 의를 성취해야만 했다. 또 칭의는 성화의 법적인 기초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삶을 요구할 권리를 지닌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이 거룩함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우리 안에 칭의시 우리에게 전가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기초로 성령을 통해 값없이 거룩함을 일으키신다. 성화가 칭의, 즉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가 가장 현저하게 나타나 있는 칭의에 기초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성화에서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개념을 배제한다. 칭의가 인간으로 하여금 공로적인 행위를 수행할 수 있게 한다는 로마 가톨릭적 견해는 성경과 모순되는 것이다. 칭의 자체는 우리의 내면적 존재에 변화를 야기시킬 수 없으며, 따라서 그 보완으로서 성화를 필요로 한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는 일생 동안 거룩해야 한다.

바르트는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매우 독특하게 제시하고 있다. 모든 자기 의를 경계하기 위해 바르트는 양자가 항상 결합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자는 동행하며, 성화가 칭의를 뒤따른다는 식으로 수량적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 칭의는 통과하는 정류장도, 성화라는 고속도로에 나아가기 위한 성취된 사실도 아니다. 칭의는 인간이 확신을 가지고 회상할 수 있는 기정사실이 아니라, 인간이 완전한 절망의 시점에 도달할 때마다 새롭게 일어나며, 따라서 성화와 항상 동행한다. 인간이 칭의 이후에도 죄인으로 남아 있듯이 성화에 있어서도 죄인으로 남아 있으며 가장 최선의 행위도 죄에 머무르게 된다. 성화는 거룩한 성향을 창출하지도, 점진적으로 인간을 정화시키지도 않는다. 성화는 인간이 어떤 개인적 거룩함을 소유하도록 하지 않으며 인간을 성인으로 만들지도 않고 죄인으로 방치한다. 성화는 칭의처럼 선언적 행동이다. 바르트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맥코나치(Mcconnachie)는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칭의와 성화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한 행위의 두 측면이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죄인의 용서이다. 성화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거룩하다고 선언하시는 죄인의 성화이다." 하지만 모든 행위의 의의 흔적을 파기시키려는 바르트의 의도가 칭찬할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는 실제로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부정하며 확고한 신뢰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또 다른 극단으로 나아간다. 

3. 성화와 신앙의 관계.

신앙은 칭의뿐만 아니라 성화에 있어서도 매개적 혹은 도구적 원인이다. 신앙이 성화를 위한 공로가 되지 않는 것은 신앙이 칭의를 위한 공로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신앙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고 새 인간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항상 접촉하게 한다. 그리스도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새 생명과 점진적 성화의 근원이다. 성화가 칭의에 기초하며 어떠한 다른 기초도 불가능하며 거룩한 방식에 있어서 진보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신앙 활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닮고 거룩한 생활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노력에 있어서 모든 자기 의를 경계하게 된다. 가장 약한 신앙도 완전한 칭의를 중개할 수 있지만, 성화의 정도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강도와 그가 그리스도를 붙잡는 인내의 정도에 비례한다는 것을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H. 이생에 있어서 불완전한 성화

1. 정도에서 불완전한 성화.

우리가 성화가 이생에서는 불완전하다고 언급할 때 우리는 성화가 마치 중생에서 발원된 거룩한 사람의 일부분만이 영향을 받는 것처럼 부분적이라는 의미에서 불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완전히 성장해야 하는 것은 새사람 전체이지만, 아직 그는 완전히 계발의 의지가 있다. 새사람이 부분적으로만 완전하듯이 이생에서는 영적인 발전의 정도가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신자들은 일생 동안 죄와 싸워야한다(왕상 8:46; 잠 20:9; 전 7:20; 약 3:2; 요일 1:8).


2. 불완전한 성화에 대한 완전주의자들의 반론

(1) 완전주의의 교리.

일반적으로 말해 이 교리의 요지는 종교적 완전이 이생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펠라기우스, 로마 교회, 반(半)펠라기우스주의자, 알미니우스주의자, 웨슬리주의자, 그리고 라바디에주의자, 정적주의자, 켸이커 교도 등과 같은 신비주의자들, 또 마한, 피니 등과 같은 오벌린 신학자들, 리출 등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주장되었다. 이들은 모두 신자들이 이생에서 그들을 관할하는 모든 율법, 혹은 이들의 현재의 능력과 요구에 맞게 조정된 율법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죄 없이 생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일치된다. 하지만 이들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①죄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다른 모든 자들과는 달리 인간 본성의 타락을 부인한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죄를 구체화하는 데 일치한다. ②신자들이 성취해야 하는 율법 개념에 있어서, 웨슬리주의 자들을 포함하는 알미 니우스주의자들은 이는 원래의 도덕법이 아니라 복음적 요구 혹은 새로운 신앙의 율법과 복음적 순종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구분된다. 로마 가톨릭과 오벌린 신학자들은 이는 원래의 율법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율법의 요구가 인간의 타락된 능력과 현재의 능력에 맞게 조정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리출은 인간이 외부적으로 부여된 율법에 복속한다는 개념 자체를 거부한다. 그는 도덕적 행위의 자율성을 옹호하고, 우리의 소명을 성취하기 위한 활동들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도덕적 성향에서 도출되는 율법 이외에 어떤 다른 율법하에도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③죄인이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의 갱신적 은혜에 어느 정도 의존하느냐에 있어서도 상이하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죄인은 어떤 의미로든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한다는 것을 인정 한다.

인간의 본성적 타락을 부인하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을 제외하면 모든 지도적 완전주의자들의 이론이 완성의 기준을 격하시키며, 원래의 도덕법이 요구하는 많은 것들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둔화시키고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하다. 또한 이들이 죄 개념을 구체화할 당위성을 느끼게 되어 의식적인 악행만이 죄로 간주될 수 있으며, 성경이 제시한 대로 죄를 인정하기를 거부한다는 점도 역시 의미 심장하다.

(2) 완전주의의 교리를 위쟤 인용된 성경적 근거들

①성경은 신자들에게 거룩하게 심지어 완전할 것을 명령한다(벧전 1:16; 마 5:48; 약 1:4). 또 죄를 범치 않으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라고 권고한다(벧전 2:21). 그러한 명령은 죄 없는 완전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비합리적인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거룩하고 완전하라는 성경적 요구는 중생한 자뿐만 아니라 중생하지 못한 자에게도 적용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은 처음부터 거룩함을 요구하며, 이것은 결코 취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명령이 그 명령을 들은 사람들이 요구 수준까지 도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펠라기우스적인 의미에서 완전주의를 가르치는 사람들만이 이러한 견해를 주장할 수 있다. 우리의 능력의 정도가 성경의 계명으로부터 도출될 수는 없다.

②거룩함과 완전은 종종 성경에서 신자들에게 적용된다(아 4:7; 고전 2:6; 고후 5:17; 엡 5:27; 히 5:14; 빌 4:13; 골 2:10) 하지만 성경이 신자들을 거룩하고 완전한 자라고 언급할 때 이는 그들이 죄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두 단어들은 종종 일상적 대화나 성경에서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 도덕적 조건이나 생활과는 무관하게, 하나님의 특별한 일을 위해 따로 구별된 사람들은 성경에서 거룩하다고 불려진다. 신자들은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거룩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에 의해 원리상 주관적으로 성화된다는 점에서 거룩하다고 불려질 수 있다. 바울은 그의 서신들에서 그의 독자들을 항상 성도들 즉 거룩한 자들로 언급하며, 몇몇 사례들에서는 이들의 죄에 대해 비난하고 있다. 그리고 신자들이 완전하다고 서술되었을 때 이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그들이 완전히 성장했다(고전 2:6; 히 5:14)는 의미로, 또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이들이 자신의 임무를 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딤후 3: 17). 이 모든 것은 분명 무죄적 완전주의의 이론을 지지해 주지 않는다.

③ 완전한 삶을 영위한 성경적 사례들, 즉 노아, 욥, 아사(창 6:9; 욥 1:1; 왕상 15:14)가 언급될 때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례들은 정곡을 찌르지는 못하고 있는데, 이는 이들이 죄 없는 완전의 사례들이 아니라는 단순한 이유에 기인한다. 성경의 가장 유명한 성도들도 실패를 가진 자들로,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매우 중한 죄를 범한 자로 묘사된다. 이는 노아, 모세, 욥, 아브라함, 다른 모든 자들에 있어서도 타당하다. 하지만 이는 이들의 생활이 지상에서 사는 동안 죄악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성경에서 전혀 무죄한 자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은 매우 놀랄 만한 사실이다. 솔로몬의 질문은 아직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내가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잠 20:9). 더욱이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라고 말한다.

④ 사도 요한은 명백하게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요일 3:6,8,9; 5:18). 하지만 요한이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고 말할 때 그는 옛사람과 새사람을 그 본질과 원리에 있어서 대비시키고 있다. 새사람의 본질적 특징 중 하나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한이 항상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개념을 표현 하면서 현재 시제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가 사단처럼 습관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범하지 않는다(요일 3:8)는 사상을 표현하기를 원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더욱이 완전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입장을 논증하기 위해 이러한 구절들을 충분하게 사용할 수 없다. 이는 이 구절들이 자신들의 목적에 비해 너무 많은 것을 논증하는 데 기인한다. 그들은 모든 신자들이 무죄하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다만 신자들이 죄 없는 완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들의 해석에 따르면, 요한의 구절들은 신자들이 결코 은혜의 신분에서 타락할 수 없다고 논증하게 된다(바로 이것이 죄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전주의자들은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신봉하는 사람들이다.

(3) 완전주의에 대한 반론들

①성경에 비추어 볼 때 완전주의는 절대적으로 지지될 수 없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지상에는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분명하고 명백한 확신을 지니도록 한다(왕상 8:46; 잠 20:9; 전 7:20; 롬 3:10; 약 3:2; 요일 1:8), 성경의 명백한 진술에 비추어 볼 때,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신자들이 무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거나 어떤 사람들이 모든 죄를 회피하는 데 성공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②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활에서는 육신과 성령간에 계속적인 전투가 있을 것이며, 최고의 자녀들도 아직 완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바울은 필히 중생한 신분에서의 자신을 언급하고 있다고 간주되는 롬 7:7-26에서 이러한 투쟁에 대한 매우 놀랄 만한 진술을 하친 있다. 갈 5:16-24에서 바울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를 특징짓는 동일한 투쟁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빌 3:10-14에서 그는 실제로 자신의 인생 마지막에 이르러, 아직 완전에 도달하지 못하고 목표를 향해 전진하고 있는 자로 자신을 언급한다.

③죄의 고백과 용서를 위한 기도가 계속적으로 요구된다.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에게 예외 없이 죄의 용서를 위해 기도하고 시험과 악으로부터의 구원을 간구하도록 가르치셨다(마 6:12,13), 그리고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한다(요일 1:9). 더욱이 성경의 성도들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자로 계속 제시되고 있다(욥 9:3,20; 시 32:5; 130:3; 143:2; 잠 20:9; 사 64:6; 단 9:16; 롬 7:14).

④완전주의자들 자신도 자신들의 이론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율법의 기준을 저하시키고 죄 개념을 구체화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일부는 자신의 평가에 따라, 신자들이 도달할 수 있는 이상을 반복적으로 수정했다. 처음에 그 이상은 "모든 죄로부터의 자유"였지만 그 후에는 "모든 의식적 죄로부터의 자유", 그 다음은 "하나님에게로의 전적인 성별", 결국 마지막에는 "그리스도인의 확신"이 이상이 되었다. 이는 그 자체로 자신들의 이론에 대한 충분한 정죄가 된다. 우리는 물론 그리스도인이 신앙의 확신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I. 성화와 선행

성화와 선행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옛 생활이 사악한 행위들에서 자신을 나타내듯, 중생 안에 발원하고 성화에서 촉진되고 강화되는 새 생명은 선행에서 나타난다. 선행은 성화의 열매라고 부를 수 있으며 따라서 여기서 다루고자 한다.

1. 선행의 본질

(1) 특별히 신학적 의미에서의 선행.

우리가 성화와 관련해서 선행에 대해 언급할 때 우리는 신적인 도덕법의 요구에 완전하게 부응하며 행위 언약의 상태에서도 영생의 보답을 획득할 수 있는 본래적인 가치를 지닌 완전한 행위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우리가 언급하는 행위란 중생하지 않은 자들의 행동과는 도덕적인 성격상 본질적으로 다르며, 이 행위가 발원하는 원리처럼 새롭고 거룩한 본성의 표현들로서의 행위들이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용인하실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보상해 주시는 행위들이다. 영적으로 선한 행위들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①이들은 중생한 심령의 열매들이다. 중생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순종할 성향을 가질 수 없고, 요구되는 동기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동기를 가질 수 없다(마 12:33; 7:17,18). ②이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외적으로 일치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의지에 대한 자각적인 순종 안에서, 즉 이들을 하나님께서 요구한다는 이유로 행해진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원리 ,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발원한다(신 6:2; 삼상 15:22; 사 1:12; 29:13; 마 15:9). ③이들의 목적이 무엇이든 최종적인 목표는 인간의 복락이 아니라, 인생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목표인 하나님의 영광이다(고전 10:31; 롬 12:1; 골 3:17,23).

(2)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선행.

선행이라는 용어는 위와 같이 엄격한 의미로 신학에서 사용되지만,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도 피상적인 의미로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행위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종종 하나님의 율법에 외면적으로 일치되며, 율법의 악명 높은 범죄와는 구분되는, 객관적으로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행위를 수행한다. 그러한 행위들은 하나님의 용인을 얻을 수 있는 근접한 목표에는 부응한다. 더욱이 자연인에 잔존한 하나님의 형상과 자연의 빛으로 인해 인간은 타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칭송할만한 동기에 의해 인도될 수도 있고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승인의 도장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선행들을 타락한 인간의 심령의 열매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오직 하나님의 보통은혜로 설명될 수 있다. 더욱이 우리는 이러한 행위들이 어떤 의미에서 선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성경에서 그렇게 일컬어진다고 하더라도(눅 6:33), 이들이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중생하지 못한 자의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영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내적인 순종과 하늘과 땅의 주권자의 의지에 대한 복속을 보여 주지 못한다. 이들은 영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목적을 위해 수행되지 않고 자연적 생활의 관계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행위의 진정한 본질은 최종적인 목표의 특질에 의해 결정된다. 중생하지 못한 자가 어떤 의미에서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종종 부인되어 왔다. 바르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신자들도 선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신자들의 모든 행위가 죄라고 주장한다.

2. 선행의 공로적 성격.

초대 교회에서도 선행에 일정한 공로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공로의 교리는 중세 시대에 실질적으로 전개되었다. 종교 개혁 시대에는 이 교리가 로마 가톨릭 신학에 있어서 매우 현저하였으며, 실제적인 생활에 있어서는 우스꽝스러운 극단에까지 추진되었다. 중교 개혁자들은 즉시 이 점에 있어서 로마 교회와 논쟁을 개시했다. 

(1) 이 점에 대한 로마 교회의 입.

로마 교회는 지당한 공로(meritum de condigno)와 적합한 공로(merituu de cougruo)로 구분하는데, 전자는 본래적인 존귀와 가치를 지니는 반면, 후자는 일종의 유사 공로로서 보상받기에 적합한 것을 나타낸다. 전자는 중생 이후에 신적 은혜의 조력에 의해 행해진 행위들에만 적용되며, 하나님께 보상받기에 본질적으로 합당한 공로이다. 후자는 중생 이전에 선행적 은혜만으로도 인간이 발전시키거나 행할 수 있는 성향들이나 행위들에 적용되며, 하나님께서 은혜를 그의 심령에 주입함으로써 행위자에게 보상하는 것을 적합하게 하는 공로이다. 하지만 트렌트 공의회의 결정이 이 점에 있어서는 다소 불분명하므로 로마 교회의 정확한 입장을 추론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선행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그리스도로 인해 죄인의 심령에 주입되는 은총으로부터 발원하고, 그리고 그 후에 이러한 선행들이 구원과 영광에 합당한 공로를 세운다는 것, 즉 이를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인간에게 부여하게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다. 로마 교회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신자들은 공덕의 행위를 수행할 수 있고 자신의 구원에 필요한 공덕 이상을 행할 수 있으며, 따라서 선행을 축적해서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2) 이 점에 관한 성경적 입장.

성경은 신자의 선행은 엄밀한 의미에서 공로적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가르친다. 하지만 우리는 공로라는 단어가 이중의 의미로, 즉 엄밀하고 본래적 의미와 보다 자유로운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엄밀히 말해서 공로적 행위는 그 고유한 가치와 존귀로 인해 교환적인 의로 보상이 정당하게 주어지는 행위이다. 하지만 보다 자유롭게 말한다면 승인받을 만하고 어떤 방식으로든지 (약속, 계약, 혹은 다른 방법에 의해서) 보상될 수 있는 행위가 때때로 공로적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러한 행위는 칭찬받을 만하며 하나님에 의해 보상받는다. 하지만 아무리 그러하다 할지라도 이들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공로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들은 자체의 도덕적 가치로써 하나님을 선행자에게 빛진 자로 만들지는 않는다. 엄정한 공의에 의하면, 신자들의 선행은 어떠한 공로도 세울 수 없다. 지금 고려되고 있는 점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성경구절들 중 일부를 나열한다면 눅 17:9,10; 롬 5:15-18; 6:23; 엡 2:8-10: 딤후 1:9; 딛 3:5 등이 있다. 이 구절들은 신자들이 선행으로 인해 구원의 기업에 합당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오로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로서 이를 받는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 준다. 그러한 행위가 공로적이 될 수 없다는 근거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①신자들은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에게 의존하며, 따라서 마땅히 하나님에게 드려야할 것을 드린다고 해서 어떠한 공로를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눅 17:9,10). ②이들은 자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날마다 부여하는 힘으로써만 선행을 할 수 있으며, 바로 그러한 사실로 인해 이러한 행위에 대한 어떠한 칭찬도 기대할 수 없다(고전 15:10; 빌 2:13). ③신자들의 최선의 행위조차도 이생에서는 불완전하며, 모든 선행을 합하더라도 단지 부분적인 순종만을 나타내는 반면 율법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고 이에 미치지 못하는 어떤 것으로도 율법의 요구는 만족될 수 없다(사 64:6; 약 3:2). ④더욱이 신자의 선행은 영광의 영원한 보상과는 전혀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순종은 영원하고 완전한 보상을 얻을 만한 공로를 세울 수 없다. 

3. 선행의 필요성.

적절하게 이해된 선행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선행은 구원의 공로를 세우기 위해 필수적이거나 구원을 붙잡는 수단으로 혹은 영원한 영광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수단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유아들은 어떠한 선행도 행하지 않고 구원에 진입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선행이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동시에 선행은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원하게 되는 것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선행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으로서(롬 7:4; 8:12,13; 갈 6:2), 신앙의 열매로서(약 2:14,17,20-22), 감사의 표현으로서(고전 6:20), 신앙의 확신을 위해서(벧후 1:5-10), 하나님의 영 광을 위하여 (요 15:8; 고전 10:31) 필요하다. 선행의 필요성은, 그리스도께서 죄의 형벌을 감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율법의 적극적 요구를 성취하셨으므로 신자는 율법을 준수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하는 율법폐기론자들이나, 오늘날에도 세대주의의 형태로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오류에 대항하기 위해 고수되어야 한다. 율법폐기론자나 세대주의의 견해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망으로 파기된 것은 형벌의 체계로서 그리고 구원의 방법으로서의 율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율법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변화했지만 율법은 신자에게 항구적인 정당성을 지닌다. 신자는 순종의 영인 성령을 받아 아무런 규제 없이도 율법에 기꺼이 순종한다.

스트롱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1)저주와 형벌의 체계로서의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셨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저주와 모든 형벌을 담당함으로써 이를 성취했다. (2)구원의 방법으로서의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셨다. 그리스도는 순종과 자신의 공로를 통해 이를 성취했다. (3)외면적이고 이질적인 강재로서의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셨다. 우리에게 순종의 영과 아들의 영을 주심으로 율법이 점진적으로 내면에서 실현되게 함으로써 이를 성취하셨다."

< 보다 깊은 연구를 위한 질문 >

이스라엘 가운데서 신정적(神政的) 거룩함은 윤리적 거룩함과 어떻게 관계되는가? 예식적인 정결은 성화와 어떻게 연관되는가? 성화의 주체는 누구인가? 옛사람인가 혹은 새사람인가, 혹은 둘 중의 어느 누구도 아닌가? 이생에서 성화는 인간의 모든 부분에 동등하게 영향을 주는가? 성화의 과정이 시작되는 장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에 있어서 점진적 진보를 경험하는가? 성화와 도덕적 개선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성화가 이생에서 결코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은 필연적으로 연옥론 혹은 사망 이후 성화가 지속된다는 가르침으로 인도하는가? 웨슬리는 '전적 성화'를 어떻게 인식했는가? 바르트는 윤리적 특질로서 거룩함을 신자에게 귀속시켰는가? 그리스도인은 생활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에서는 해방되지 않는다는 성경적 증거는 무엇인가? 개신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선행은 불필요하다곤 가르치는가? 로마 가톨릭 교인과 개신교인들은 선행의 필요성에 대해 어떻게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선행은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아무 제한 없이 말하는 것이 합당한가? 만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영생을 상속한다면 그들의 선행이 보상의 기준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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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 성도의 견인

A. 성도지 견인론의 역사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께서 중생시키며 은혜의 신분으로 효과적으로 부르신 사람들이 그 신분에서 완전히 혹은 궁극적으로 타락하지 않고 은혜의 신분에서 끝까지 견디어 내어 영원히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교리이다. 이 교리는 어거스틴에 의해 최초로 설파되었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엄격한 예정론자에게 기대된 만큼은 이 점에 대한 철저한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거스틴에게서는 이 교리가 위에서 서술된 것과 같은 형태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는 선택된 자가 결국 궁극적으로 타락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동시에 새생명과 진정한 신앙을 부여받은 자들 중 일부가 은혜로부터 완전히 타락하여 궁극적으로 영원한 저주를 받는 것을 가능한 일이라고 보았다. 로마 교회는 자유 의지론을 포함하는 반(半)펠라기우스주의적 견해로 인해 성도의 견인론을 부인하며, 자신들의 견인을 인간의 불확실한 순종에 의존하게 했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 교리의 정당한 위치를 회복시켰다. 하지만 루터 교회는 성도의 견인을 인간의 신앙의 지속적 활동에 의존하게 하고, 진정한 신자들도 완전히 은혜로부터 타락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를 불확실하게 만들고 있다.

칼빈주의적 교회만이 이 교리를 절대적인 확신을 부여할 수 있는 형태로 주장한다. 도르트 신조는 하나님의 자녀의 약점과 실패를 다수 열거한 후 "하지만 풍성한 자비를 지닌 하나님은 선택이라는 불변의 목적에 따라 중죄에 있어서도 자신의 백성에게서 성령을 거두시지 않으며, 양자됨의 은혜를 상실하고 칭의의 신분을 상실하며 죽음에 이르는 죄 혹은 성령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도록 방임하시지 않는다. 또 하나님은 이들이 완전히 유기되거나 영원한 파멸에 빠지도록 허용하시지 않는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거부하고, 신자의 견인을 신앙하고자 하는 의지와 선행에 의존하도록 했다. 알미니우스 자신은 이러한 극단을 회피했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신인 협동설을 그 모든 결과들과 함께 주장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웨슬리적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많은 소종파들이 그렇듯이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추종한다. 개혁파 칼빈주의 교회만이,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은혜의 신분에서 완전히 타락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버림을 받게 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부정적인 답변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교회이다.

B. 견인의 교리의 진술

견인의 교리는 '성도의 견인'이라는 용어가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있으므로 조심스럽게 진술되어야 한다. 이 교리는 어거스틴의 견해처럼 우선 선택된 자가 궁극적으로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교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교리는, 하나님에 의해 중생하고 은혜의 신분으로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비록 때때로 악에 정복당하기도 하고 죄에 빠지기도 하지만 결코 그 신분에서 완전히 타락하여 영원한 구원을 획득하지 못하게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중생의 생명과, 성화 과정에 있어서 중생에서 발현된 성향들은 결코 전적으로 폐기될 수 없다. 더욱이 우리는 이러한 견인이 신자의 본래적인 자산 혹은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의 길에서 견인할 수 있게 하는 인간의 지속적인 활동이라는 오해를 불식시켜야 한다. 스트롱은 견인을 "그리스도인 편에서의 신앙과 선행의 자발적인 지속", "신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우리가 성화라고 부르는 영적인 진보의 인간적 측면"으로 언급하는데, 이는 견인이 인간에게 의존한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하지만, 개혁파는 성화에서와 같이 성도의 견인에 있어서도 인간이 협력한다고 믿고 있지만, 성도의 견인을 우선적으로 신자의 활동이나 성향이라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신자가 홀로 남아 있다면 타락해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엄격히 말해 견인하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견인은 "심령 안에 시작된 신적 은혜의 사역이 지속되고 완성에 이르게 하는 신자 안에서의 성령의 지속적 사역"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포기하시지 않기 때문에 신자들은 끝까지 견딜 수 있게 된다.

C. 견인의 교리에 대한 증명

견인의 교리는 성경적 진술과 다른 교리로부터의 추론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

1. 성경의 직접적 진술.

여기서 고려되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성경 구절이 있다. 요 10:27-29에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는 말씀이 있다. 그리고 롬 11:29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는 마치 하나님께서 이에 대해 후회하는 것처럼 결코 폐기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부르심과 관련되지만 일반적인 진술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신자들에게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위로한다(빌 1:6). 살후 3 :3에서 바울은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고 말하며, 딤후 1:12에서는 기쁨으로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말한다. 딤후 4:18에서 그는 주제서 자신을 모든 악한 일에서 건지시고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기뻐한다.

2. 추론적 증명.

견인의 교리는 다음의 교리로부터 추론적 방식으로 증명될 수 있다.

(1) 선택의 교리로부터.

선택은 어떤 사람들이 일정한 외적인 특권으로 호의를 입고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선택된 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구원될 것이며 필히 완전한 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의미이다. 선택은 궁극으로의, 즉 구원으로의 선택이다. 이를 전개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성령의 감화력을 주셔서 이들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할 뿐만 아니라 끝까지 견인하고 궁극적으로 구원되도록 인도한다.

(2) 구속 언약의 교리로부터.

구속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은 아들의 순종과 고난의 보상으로 자기 백성을 아들에게 주었다. 이 보상은 영원 전부터 결정된 것으로, 인간의 여하한 불확실한 충성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위반하시지 않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간주되고 하나님의 보상의 일부가 된 자들이 하나님에게서 분리되거나, 생명의 연합으로써 언약에 들어간 자들이 타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롬 8:38,39).

(3)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 기도의 효력으로부터.

그리스도는 자신의 속죄 사역에서 죄 인의 용서와 열납을 획득하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셨다. 그의 의는 죄인의 칭의를 위한 완전한 근거를 구성하며, 그렇게 완전하고 효과적인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칭의 받은 자들이 다시 정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그리스도는 아버지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자들을 위해 계속 중보 기도를 드리며, 백성을 위한 그의 중보 기도는 항상 효과적이다(요11:42; 히 7:25).

(4)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으로부터.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은 그의 영의 참여자가 되고 그와 한 몸이 되며 성령의 생명으로 약동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며, 그리스도가 살아 있듯이 그들도 살아 있다. 그들은 그 몸으로부터 다시 절단되어 신적 이상(ideal)을 무효케 할 수는 없다. 연합은 항구적이며 불변하는 원인, 즉 하나님의 영원하고 값없는 사랑에서 발원하므로 항구적이다.

(5) 마음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으로부터.

댑니(Dabney)는 "성령이 지금 역사하기 시작하지만 곧 그를 포기할 것이며, 천상적 출생의 생동적 불꽃이 일시적으로 불붙다가 완전한 흑암 속으로 스러지게 되며, 새로운 출생에서 중개된 영적인, 생명은 돌발적이며 발작적이어서 죽은 영혼에 외면적으로 생명이 발현하는 듯 하다가 결국 소멸하게 된다고 가정하는 것은, 성령의 지혜와 마음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과소 평가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성경에 의하면, 신자는 이미 이생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다(요 3:36; 5:24; 6:54). 우리가 영생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에 의해 행동할 이유는 무엇인가?

(6) 구원의 확신으로부터.

성경을 보면 신자들이 이생에서 구원의 확신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히 3:14; 6:11; 10:22; 벧후 1:10). 신자들이 어느 순간 은혜로부터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면 이런 확신은 전적으로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이미 시작하신 사역을 완성하실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에서 있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다.

D. 견인의 교리에 대한 반론들

1. 인간의 자유와 모순된다.

견인의 교리가 인간의 자유와 모순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반론은, 진정한 자유는 무관심의 자유나 혹은 도덕적이며 영적인 일들에서 잘못된 선택을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구성된다는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는 오류이다. 진정한 자유는 거룩함의 방향으로의 자기 결정이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방향으로 의식적으로 움직일 때보다 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그러한 자유를 누린다.

2. 태만과 부도덕으로 인도한다.

견인의 교리가 태만, 방종, 심지어 부도덕까지도 초래할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되고 있다. 그릇된 안정감이 이 견인의 교리로부터 유래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그릇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보호받는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이 교리는 우리가 우리 편에서의 지속적인 경계와 열심, 기도 없이 지내도록 방임한다는 사상을 전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신자에게 거룩함으로의 견인을 확신시키는 교리가 어떻게 죄의 동기가 될 수 있겠는가? 성화를 위한 능동적인 노력이 성공하리라는 확신은, 보다 더 성화를 위한 노력을 경주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자극이 될 것이다.

3. 성경에 위배된다.

이 교리는 성경에 위배된다고 종종 주장된다. 이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인용된 성경 구절을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배교에 대한 경고들이 있는데, 이는 신자가 타락하지 않는다면 전혀 불필요했을 것이다(마 24:12; 골 1:23; 히 2:1; 3:14; 6:11; 요일 2:6). 하지만 이러한 경고들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모든 문제를 고려한 것이요, 진지한 의도로 진술된 것이다. 이들은 자기 점검을 촉진시키며, 신자들이 견인의 길을 유지하는 도구가 된다. 이 구절들은 말한 대상 중 어느 누가 배교할 것이라는 것을 증명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이러한 죄를 범하지 않도록 수단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진술한다. 이러한 원리의 예시로서 행 27:22-25을 31절과 비교해 보라.

(2) 성경에는 신자들이 성화의 길에서 지속적으로 정진할 것을 권면하는 구절들이 있는데, 이는 신자들이 끝까지 이를 수행한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불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보통 (1)에서 언급된 경고들과 연관되어 발견되며 동일한 목적을 수행하고 있다. 이들은 신자들의 어느 누구도 견인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입증한다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도덕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도덕적 수단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3) 또 성경은 실제적인 배효의 사례들을 기록하고 있다고 말한다(딤전 1: 19,20; 딤후 2:17,18; 4:10; 벧후 2:1,2; 또 히 6:4-6도 참조할 것). 하지만 이러한 사례들은 진정한 구원적 신앙을 소유하고 있는 진정한 신자들이 은혜로부터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 구절들에서 언급된 사람들이 중생에 근거하지 않은 일시적 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신앙을 소유했다는 것을 먼저 증명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진정한 신앙을 고백하지만 이 신앙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롬 9:6; 요일 2:19; 계 3:1). 요한은 일부 신자들에 대해 "저희가‥‥‥‥우리에게서 나갔다"고 말하며 그 이유로서 "저희가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회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를 언급한다(요일 2: 19).

E. 이 교리를 부정한다면 구원은 인간 의지에 의존하게 된다.

견인의 교리를 부정한다면 실제로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인간의 의지에 의존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펠라기우스적 자력 구원관을 지닌 자들에게는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다. 하지만 이 생각은, 은혜로 인한 구원을 기뻐하는 자들에게 이 문제를 숙고하게 한다. 이러한 견해의 요점은, 인간이 성령만의 사역에 의해서든 혹은 성령과 인간의 의지와의 협력 사역에 의해서든 은혜의 상태로 옮겨진 이후에는, 신앙을 지속하느냐 신앙을 포기하느냐의 여부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결정되어 인간에게만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동기를 매우 불확실하게 하며, 인간이 신앙의 복된 확신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견인의 교리를 고수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호비(Hover)는 "이 교리는 큰 위로와 능력의 근원, 즉 감사에 대한 자극, 자기 헌신의 동기, 위험시에는 불기둥이 될 수 있다"고 발했다.

< 보다 깊은 연구를 위한 질문 >

견인에 대한 실제적 질문은 무엇인가? 즉 선택된 자가 견인하는가 아니면 중생한 자가 견인하는가? 어거스틴과 루터교인들은 선택된 자가 궁극적으로 버림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가? 자연의 생활에 대한 유추가 견인의 교리를 지지할 수 있는가? 히 6:4-6; 10:29; 벧후 2:1과 같은 구절들이 타락의 가능성을 입증하는가? 요 15:1-6은 어떠한가? 견인의 은혜는 새로운 본성과 함께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천성적인 것인가, 혹은 하나님의 특별하고 자비롭고 보존하시는 은혜의 열매인가? 이 교리는 인간이 습관적이고 의도적인 죄를 범하며 생활하면서도 칭의받은 신분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하는가? 이 교리는 죄로의 타락 개념을 배제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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