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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대신덕이라 하는 믿음, 소망, 사랑

수도관상피정 최용우............... 조회 수 2681 추천 수 0 2009.07.06 13: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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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본 글은 가톨릭 신학의 일부로 개신교에는 이런 명칭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 부언하면 대신덕은 하나님에 대한 덕으로 신덕(믿음), 망덕(희망), 애덕(사랑)을 말한다. 그러나 개신교에는 이런 교리가 없으며. 성경에 의하여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인줄 알아 실천하려 한다.  그러기에 재가수사님들의 신앙생활에 비교 혹은 참고가 될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개신교 교리가 아님을 먼저 아시고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외에도 가톨릭은 윤리덕이란 것이 있으며, 죄에는 칠죄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수덕, 신비신학에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인본주의 경향이 짙기 때문에 대신덕만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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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부 대신덕

1167 (1)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생명의 중요한 요소들을 말하면서, 대신덕(對神德) 세 가지(신덕 · 망덕 · 애덕)를 윤리덕 보다 더 높은 곳에 둔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믿음과 사랑으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구원의 희망으로 투구를 쓰라."고(살전 5:8) 권고하였다. 그리고 사도는 "여러분의 믿음의 활동과 사랑의 수고와‥‥ 꾸준한 희망을(살전 1:3) 칭찬하였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은총의 선물은 다 사라지지만,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이라고(고전 13:13) 말한다.

l168 (2) 영혼에게 있어서 대신덕의 역할은, 영혼으로 하여금 신적 생명에 참여토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일치시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대신덕은 영혼을 변화시키는 동시에 하나님과 일치하게 한다.

ㄱ) 믿음(神德)은 영혼을 영원한 진리이신 하나님과 일치하게 한다.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를 드러내신 것처럼, 우리를 신적 생명에 참여토록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믿음은 영혼에게 참된 행복을 준비시킨다.

ㄴ) 희망(希望)은 최상의 행복인 하나님과 우리를 일치시키며,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한다. 그래서 영혼은 천상행복(天上幸福)에 대한 보장(保障)을 확신하면서 희망 속에서 행복을 기다린다. 이러한 이유로 희망은 영혼이 하늘나라에 가기위해 필요한 방법이 된다. 희망은 영혼에게 영원한 행복을 완전히 소유하도록 준비시켜 준다.

ㄷ) 사랑(愛德)은 무한히 선(善)하신 하나님께 우리를 일치시킨다. 무한한 사랑은 선 그 자체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게 한다. 그리고 사랑은 하나님과 영혼 사이에 거룩한 우정(友情)을 통해 우리를 그분의 생명으로 살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랑 그 자체이듯이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의 덕인 애덕은 지상(地上)에서 항상 다른 두 대신덕(믿음 희망)을 포함한다. 사랑이 덕행(德行)으로 승화되지 못할 때 믿음과 희망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완성되지 못한 형태로 영혼에게 다가갈 것이다. 사도 바울의 증언에 따르면, "오직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갈 5:6))라고 말한다. 즉 희망은 성화 은총(聖化恩寵)과 사랑을 소유함으로써 하늘의 참된 행복을 미리 맛보게 해 줄 때 완전해진다.

제1장 신 덕(神德)

I. 신덕의 본질

여기서 우리는 이미 신덕에서 다루었던 교의(敎義)와 윤리신학을 간단하게 다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1169 (1) 성서에서 말하는 믿음의 뜻

믿음이란 단어는 대부분 신뢰에 기초를 둔, 진리에 대한 지혜(知慧)의 동의(同意)를 뜻한다. 이 말은 한 영혼이 다른 사람을 믿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믿음은 민족의 사활(死活)이 걸려있는 중요한 덕목(德目)으로 소개된다.

"야훼께서 너희 하나님이시다. 그분을 믿어라. 그리하면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대하 20:20)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굳건히 서지 못하리라."(사 7:9) 이와 같이 구약에서 말하는 믿음은 신뢰와 포기, 그리고 사랑이 동반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동의이다.

(나) 신약에서 말하는 믿음의 중요성은 영혼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며, 믿지 않는다는 것은 신앙인이 아님을 뜻한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막 16:16). 믿음이란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에 의해 선포되는 복음(福音)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언제나 선교(宣敎)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믿을 수 있다"‥‥‥ 또 믿음은 마음의 어떤 직감(直感)이나 직접적인 환시(幻視)도 아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고전 13:12)

믿음은 영혼이 자유롭게 신적 증언에 대한 분명한 동의를 뜻한다. 믿음은 인간 편에서 믿기를 거부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이 영혼 안에 밝히신 확신 없이는 믿지 않기 때문이다.(빌 3:8~10, 벧전 3:15) 이처럼 믿음은 희망을 동반하면서 사랑에 의해 완전해진다. "오직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갈 5:6)

1170 (2) 믿음에 대한 정의(定義)

믿음은, 하나님의 권위로써 계시(啓示)된 진리를 굳게 받아들이고, 그분의 은총과 뜻에 따라 우리의 지성(知性)을 굴복시키는, 대신덕 가운데 하나이다.

(가) 믿음은 영혼이 진리를 인식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먼저 지성(知性)적 행위가 된다. 그러나 영혼 스스로 진리를 본질적으로 확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지성에 의해 명령된 의지(意志)의 작용 없이는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영혼은 믿음에 대한 그 이유가 설득력을 가질 때, 의지는 지성에 동의하라고 명한다.

그리고 믿음은 초자연적 행위의 문제이므로, 하나님의 은총은 지성을 밝혀 주고 의지를 도와 주기 위해 영혼 안에 개입한다. 그리하여 믿음은 초자연적인 공로(功勞)로써 영혼으로 하여금 자유로운 행위를 실천하게 한다.

(나) 믿음의 구체적인 대상(對象)은 이성(理性)이 발견할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런가 하면 믿음으로 알 수 있는 계시(啓示)된 진리도 있다.

믿음 안에 계시된 모든 진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한다. 즉 계시된 진리는 영혼의 시작이고 마지막 목적인, 삼위일체의 위격(位格)과 본성(本性) 안에 현존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외 아드님이시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다. 예수님은 인간 구원과 관계되는 모든 것을 실행하신 영혼의 구원자이시며 중개자(仲介者)이시다. 달리 표현한다면, 믿음은 언젠가 영혼이 하늘에서 보게 될 것임을 알게 한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고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

1171 (다) 믿음의 동기(動機)와 대상(對象)이라 부르는 것들은 계시에 의해 나타난 신적 권위를 우리에게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일치하게 한다. 이와 같은 믿음의 동기와 그 대상은 모두 그 자체로써 초자연적 덕이 된다.

(라) 믿음 안에 계시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교회를 통해 그분의 교의(敎義)에 공식적인 중개자로 제시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진리를 가톨릭 신앙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만일 교회가 계시된 진리를 올바르게 정립(定立)하지 못한다면, 믿음은 한갓 신적(神的) 신앙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마) 영혼에게 있어서 참된 믿음에 동의(同意)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믿음은 자신의 빛에 대한 신뢰보다, 신적 권위를 더욱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영혼은 온 힘을 다해 계시된 진리를 믿게 된다. 그리고 영혼은 믿음에 대한 자신의 동의를 강화시키는 반면, 신적 은총에 더욱 확고히 동의한다. 이와 같이 믿음에 대한 영혼의 동의는 이성적(理性的)으로 갖는 진리의 동의보다 훨씬 더 확고하고 생기(生氣)가 있다.

II. 신덕의 성화적(聖化的) 역할

1172 위에서 말한 것처럼, 믿음은 우리의 영적 성화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믿음은 신적 사고(神的思考)와 일치하게 한다. 그리하여 믿음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매우 긴밀하게 일치하도록 도와 준다.

1173 (1) 믿음은 초자연적 생명의 기초이다. 우리는 이미 제1138항에서 겸손의 덕이 믿음을 더 명확하게 해 준다는 사실을 고찰하였다. 그래서 믿음은 그 자체로써, 이방인들이 알지 못했던 겸손의 근거가 되었다. 이와 같은 결과로 인해, 믿음은 영혼에게 모든 덕의 근거가 된다.

이러한 사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말을 깊이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즉 트리엔트공의회에서 믿음은 성인(聖人)과 의로운 사람의 근본이고 시작이라고 주장하였다. "믿음은 인간 구원의 시작이고, 모든 의화(義化)의 기초이고 뿌리이다".

(가) 믿음은 의로운 영혼이 갖는 첫 걸음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깨우치기 위해 사용된 신비스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편에서 볼 때 영혼이 갖는 초자연적 첫 자세이며, 믿음 없이는 희망과 사랑도 없다. 다시 말해서, 믿음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신적인 것들을 소유하게 한다.

영혼이 초자연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믿음은 "미리 인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원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성으로 곁들여진 새로운 빛으로 믿음을 인식하게 된다. 물론이 믿음은 우리의 영혼을 초자연적이며 새로운 세상으로 스며들게 해 준다. 그리고 이 믿음은 마치 망원경처럼 눈으로 볼 수 없이 멀리 있는 것들을 발견하게 해 준다.

그러나 믿음에 대한 이 비유는 매우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망원경은 외적인 도구인 데 비하여, 믿음은 지성의 내면으로 스며들어 활동 영역인 시력(視力)을 높여 주기 때문이다.

1174 (나) 믿음은 영적 삶의 뿌리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성성(聖性)을 보다 넓고 높은 건물에 비유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건물이 높이 올라가더라도 그 견고함을 잃지 않도록 믿음의 기초는 매우 넓고 깊어야 한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열심한 영혼들에게 자기 자신의 믿음을 튼튼하게 다지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신학생들과 사제는 견고한 믿음의 기초 위에 완덕의 성전(聖殿)이 세워질 수 있도록 그 믿음을 다져야 한다.

(다) 믿음은 성성(聖性)의 뿌리이다. 이 성성에서 믿음은 마치 나무의 성장을 위해 영양 섭취에 필요한 액(液)을 땅에서 찾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린 믿음은, 신적 진리를 영혼이 섭취하고 풍부한 영양분을 얻게된다. 그래서 믿음의 뿌리가 깊을수록, 그 나무는 세찬 풍파를 더 잘 견디어 낸다. 이와 같은 모습은 영혼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믿음이 확고할 때, 그 영혼은 거센 풍랑(風浪)을 잘 이길 수 있다. 그러므로 영혼이 완덕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믿음이 깊고 확고해야 한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1175 (2) 믿음은 영혼을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한다. 그리고 믿음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도와준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믿음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과 같다. 이 점에 대하여 게이(Gay) 주교는,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빛은 우리의 빛이 되고, 그분의 지성은 우리의 지혜가 됩니다. 그리고 믿음에 의해 하나님의 영(靈)은 우리의 영이 되고, 그분의 생명은 우리의 생명이 됩니다."하였다.

믿음은 직접적으로 우리의 지성(知性)을 신적 지혜(知慧)와 일치시킨다. 그러나 믿음의 행위가 의지의 도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의지는 믿음을 통해 영혼 안에 훌륭한 결과를 낳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지성을 위한 빛이 되고, 의지를 위한 위로와 힘의 원천이 된다. 더 나아가 믿음은 모든 영혼을 위해 중요한 공로자(功勞者)가 된다.

1176 (가) 믿음은 영혼의 지성을 밝혀 주는 빛이며, 또 그리스도인을 철학자와 구별하게 한다. 우리 영혼 안에는 믿음에 대한 세 가지 인식(認識)이 있다. 첫째, 감각적인 인식으로 이것은 감각을 통해 일어난다. 둘째, 이성적인 인식은 지성을 통해 얻어진다. 세째는 영적이며 초자연적 인식이다. 이 마지막 인식은 먼저 다른 두 개의 인식보다 훨씬 탁월한 것이다.

ㄱ) 믿음은 영혼으로 하여금 신적인 것과 하나님께 대한 인식의 범위를 넓혀 준다. 영혼은 이성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과 내적 생명에 대하여 아주 작은 부분만을 알뿐이지만, 믿음을 통해 영혼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게 된다. 믿음은 영원에서 독생자를 잉태하시고, 아버지와 독생자의 상호적 사랑에서 세 번째 인격인 성령(聖靈)께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믿음은 성자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고,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믿음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칭찬 받을 만한 신적(神的) 행위를 할 수 있는 초자연적 조직체를 주고 성화(聖化)시키기 위해 영혼 안에 거처하러 오신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이러한 믿음은 영혼에게 하나님의 계시(啓示)에 대한 일부일 뿐이다.

ㄴ) 믿음은 영혼이 이미 이성으로 알고 있는 진리들을 심화(深化)하도록 도와 준다. 그러기에 믿음은 영혼에게 자연적 교훈보다 복음적 교훈이 얼마나 완전하고 갚진 것인지!

산상 설교(山上說敎)에서, 예수님은 첫 부분부터 가난한 사람들과, 박해받는 이들과, 온유한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선포하신다. 또 주님은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며, 오히려 원수에게 선을 실천하라고 명하신다.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성성(聖性)은 외적이거나 법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기초를 둔 내적 성성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에 대한 열정을 위해, 가장 완전한 이상(理想)으로 하나님의 완덕(完德)을 제시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가 육화(肉化)되시어, 우리의 삶을 사시면서,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완전한 삶의 구체적인 본 보기를 보여 주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삶을 계속하는 데 필요한 용기와 항구함을 주시기 위해, 당신 스스로 우리 안에서 덕성과 은총으로 살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용기와 빛이시기에,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받게 된다.

1177 (나) 용기(勇氣)의 뿌리가 믿음이라는 사실을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에게 매우 훌륭하게 보여 주고 있다.(히 11장)

믿음은 영혼에게 특별히 의지(意志)를 강하게 하는 깊은 확신을 가져다 준다. ㄱ) 믿음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영혼을 위해 끊임없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믿음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성화시키기 위해 작용하고 생활하시는지, 또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 안에서 육화(肉化)시키고, 우리를 성부의 생명에 참여케 하는지를 보여 준다(제188항-제)89항).

그리고 믿음은 굴욕과 십자가를 선택하신 예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게 한다. "예수님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고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셨다"(히 12:2). 그로 인하여 믿음은 영혼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라 용감하게 십자가를 질 힘을 갖게 한다.

ㄴ) 믿음은 영혼에게 고통의 열매인 영원한 상급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우리는 지금 잠시 동안 가벼운 고난을 겪고 있지만 그것은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고후 4:17).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보면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롬 8:18))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해야 한다.(롬 5:3~5) 인내를 통해 견디어 낸 고통은 영혼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더 높은 차원의 가치를 갖게 하기 때문이다.

ㄷ) 그리고 우리가 나약함을 느낄 때마다, 믿음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고 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한다. 또 믿음은 세속과 악마가 우리를 반대하더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음을 영혼에게 상기시켜 준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요일 5:4)

이와 같은 믿음은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의 제자들 안에 놀라운 변화의 모습으로 분명하게 나타난다. 겁 많고 비겁하던 제자들이 하나님으로 인해 굳센 믿음으로 무장한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 고통 당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온갖 종류의 시련 · 태형(笞刑) · 투옥, 끝으로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하게 된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면서 의회를 물러 나왔다"(행 5:41).

1178 (다) 믿음은 영혼에게 굴욕(屈辱)과 고난(苦難)뿐 아니라, 부모님과 친구를 잃었을 때 위로에 큰 힘이 된다. 그래서 믿음은 영혼으로 하여금 아무런 희망 없이 죽음만을 마냥 슬퍼하게하지 않는다. 우리의 믿음은 죽음이 한낱 수면(睡眠)일 뿐, 오히려 부활(復活)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그리고 믿음으로 우리는 영원한 나라를 위해 잠시 지나가는 장소를 택할 뿐이다.

특히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믿음은 성인들의 통공(通功)이라는 교의(敎義)이다. 즉 믿음은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과 다시 만나기를 기다리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과 매우 친숙한 방법으로 일치하게 한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죽은 영혼들의 시련의 시간을 줄이고 빨리 하늘나라에 들어가도록 기도하게 한다.

1179 (라) 끝으로 믿음은 영혼에게 수많은 공로(功勞)의 원천이 된다.

ㄱ) 믿음의 실천은 그 자체로써 하나의 공로가 된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의 지성과 의지를 신적 권위(權威)에 순종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때로는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많은 조소(嘲笑)와 박해(迫害)를 받는 데, 그 공격은 그만큼 믿음에 더 큰 공로가 될 것이다.

ㄴ) 그리고 믿음은 영혼에게 공로가 되는 다른 여러 가지를 실천하도록 도와 준다. 왜냐하면 영혼은 초자연적 목적과 은총(恩寵)의 도움 없이는 믿음을 고백할 수 없기 때문이다(제126항, 제239항).

또 믿음은 영혼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부(聖父)께 향하도록 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초자연적 관점에서 모든 것을 실천하게 한다. 그런가 하면 믿음은 신적 모든 권능(權能)과 영혼의 무능력(無能力)함을 발견하게 하면서, 그분의 은총을 얻기 위해 열렬한 기도를 하게 한다.

III. 신덕의 실천

1180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인 동시에 영혼이 그분께 드리는 자유로운 동의(同意)이다. 그러기 때문에 영혼이 믿음에 진보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노력과 기도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이와같은 영혼의 자세는 믿음을 굳건하고 단순하게 하며 더욱 실천적이 되게 한다.

1181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은 원리를 영성생활의 여러 단계에 적용시켜 보자.

(1) 완덕으로 나아가는 초보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믿음을 확고하게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가) 초보자들은 모든 것의 기초인 믿음의 선물에 대해 온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을 되풀이해야 한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고후 9:15)

초보자들은 주위의 수많은 무신론자(無神論者)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더욱 믿음에 대한 감사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초보자들은 신앙생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믿음의 선물을 잘 간직하도록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초보자들은 믿지 않는 사람과 이단자(異端者) 또는 배교자(背敎者)들의 회개(悔改)를 위해 하나님께 구원을 탄원(歎願)해야 한다.

1182 (나) 초보자들은 사도들과 함께 신앙 고백(信仰告白)을 하면서, "저희의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눅 17:5) 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확고한 결심과 겸손한 순종으로 이 기도를 암송(暗誦)해야 할 것이다. 또 믿음을 밝혀 주고 견고하게 해주는 독서를 병행하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신심 서적이나 종교에 관한 책을 외면하고 있는가?

1183 (다) 초보자들은 믿음을 약하게 하는 불필요한 모든 것을 피해야 한다.

ㄱ) 특히 믿음의 진리를 의심하게 하고 빈정거리면서, 그 믿음을 공격하는 경솔한 책들은 피해야 한다.

오늘날 간행되고 있는 많은 책들은 믿음에 반대되는 책들이 대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반대하면서 공공연하게 공격하는 것들이 많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영혼은 조금씩 무신론(無神論)의 독(毒)에 중독되어, 믿음의 순수성을 잃게 되고, 의심과 망설임으로 뒤흔들리게 되는 순간이 오게 되며, 결과적으로 신앙을 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기 스스로 충분히 믿음의 위험에 대항할 면역(免役)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위험한 책으로 목록을 규정한 교회의 현명한 가르침을 소홀히 하지 말고 존중해야 할 것이다. 사실 누구도 사상의 면역(免役)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균형(均衡) 있고 열성적인 정신으로 교회를 보호했던 발메스(Balmas)는, 이단(異端)을 공격하기 위해 이단적인 책들을 읽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후 발메스는 그의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안에 동방 정교회의 교리와 감정들이 얼마나 뿌리 깊게 내렸는지 너희들은 모를 것이다. 물론, 나는 이제 그르나다의 루도비코(Louis do Grenade)의 준주성범이나, 성서를 읽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금지된 책을 이용하는 일도 없어졌다. 아무런 예방과 경험도 없이 모든 책을 마구잡이로 읽으려 하는 이 무분별한 나에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겠는가? 이와 같은 생각은 나로 하여금 참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올바른 믿음을 위해 무신론자들의 강의나 그들과의 대화를 매우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ㄴ) 또 믿음을 자기 수준에 맞추고, 자기가 이해하는 것만을 받아들이려는 지적(知的) 교만도 피해야 한다. 그러기에 초보자들은 자신의 나약한 이성(理性)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당신의 뜻을 통하여 우리에게 크나 큰 영예(榮譽)를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이 성령의 뜻을 확인했을 때 가져야 할 이성적인 태도는, 그 성령의 빛을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1184 (라) 믿음에 반대되는 유혹(誘惑)에 관해서는, 명백한 것과 애매모호(曖昧模糊)한 대상을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ㄱ) 먼저 믿음에 대한 유혹이 모호할 때

이 때는 이 유혹을 성가신 파리처럼 쫓아버려야 한다.

① 우리는 믿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기에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② 그런가 하면 우리의 믿음이 굳건히 영혼 안에 자리 잡고 있기에 그것으로 충분하다. 믿음이 영혼 안에 한 번 입증된 것들을 매번 다시 의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일상적인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의심 때문에 신앙생활을 멈추지 말아야한다 그 대신 믿음의 길을 바르게 걸을 때 영혼에게는 바른 확신이 올 것이다.
③ 끝으로 나보다 더 현명한 사람들이 믿음에 대한 진리를 실천하고 있다면, 우리도 이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믿음에 의한 확신은, 근본적인 믿음의 모든 기초를 무너뜨리면서 재미있어 하는 괴짜들보다는 훨씬 더 현명하다.

이제 우리는 좋은 뜻으로 갖는 이성에 다음과 같은 기도를 덧붙여야 할 것이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다면 도와주십시오"(막 9:23)

1185 ㄴ) 만일, 믿음과 관계되는 특별한 유혹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진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계속 이 진리를 굳게 믿어야 한다. 그러나 스스로 믿음에 대한 노력과, 아니면 의혹의 문제를 좀 더 쉽게 해결하기 위해 신앙이 깊은 영혼의 도움을 청하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기도를 통해 믿음을 온유하고 성실하게 추구한다면, 대개 믿음에 대한 의심스러운 해결점은 은총의 도움으로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믿음의 유혹에 대한 결론이 항상 모든 어려움을 없애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가끔 우리의 믿음에 대한 오랜 연구로도 해결하기 힘드는 주석, 비평, 역사적인 이론들이 있다. 이 때는 진리가 훌륭하게 논의되고 증명되거나, 지혜의 빛이 어두움을 모두 사라지게 할 때까지, 믿음은 진리에 계속 동의하기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음에 대한 어려움은 삶에서 오는 모든 증거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다만, 이 때 믿음에 대한 어려움은 우리 정신의 연약함만을 보여줄 뿐이다.

1186 (2) 완덕으로 나아가는 진보한 영혼들은 믿음의 정신으로 바른 삶을 실천한다. 즉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롬 1:17)

(가) 진보자들은 성서를 읽고, 한 발걸음씩 주님을 따르는 것을 행복해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 그분의 본보기를 감탄하면서, 그분이 주신 격언(格言)들을 맛보는 것을 행복해 한다. 그래서 진보자들의 마음에 조금씩 예수님이 그 중심이 되기 시작한다. 진보자들은 예수님을 독서와 주어진 임무에서 찾으며, 그분을 더욱 사랑하고 더 잘 이해하기를 열망한다.

1181 (나) 진보자들은 믿음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고려(考慮)하는 자세에 익숙하다. 즉 사람들이나 사건들과 사물들 속에서 믿음을 바라본다.
① 진보자들은 하나님의 작품들 속에서 창조주의 손길을 느끼고 다음과 같은 소리를 듣는다. "우리를 내셨으니 우리는 당신의 것"(시 99:3) 그러므로 진보자들은 하나님을 모든 것에 앞서 찬미한다.
② 진보자들에게 이웃은 바로 하나님의 모상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들이다.
③ 하나님의 뜻으로 일어난 사건들은 가끔 무신론자(無神論者)들을 매우 당황스럽게 한다. 그러나 완덕으로 나아가는 진보자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사람들을 위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선악(善惡)을 통해 우리의 완덕과 마지막 영혼의 구원을 그 목적으로 삼으신다고 믿는다.

1188 (다) 특히 완덕에 진보한 영혼들은 모든 것을 믿음의 원칙에 따라 행동하도록 노력한다.
① 진보자들의 판단은 세상의 준칙에 따르지 않고, 언제나 성서의 규범아 기초를 둔다.
② 진보자들의 언행(言行)들은 세속적이 아닌, 그리스도인의 정신에서 영감(靈感)을 받는다. 왜냐하면 진보자들은 인간적인 것들에서 이탈하여, 자신의 언행들을 그리스도인의 판단과 일치시키기 때문이다.
③ 진보자들은 주님의 모범을 따라 가능한 한 그분과 가까워지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진보자들은 자신을 세속(世俗)의 모습으로 이끌려 다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한마디로 진보자들은 진정으로 믿음의 삶을 산다.

1189 (라) 끝으로, 완덕으로 나아가는 진보자들은 그들이 믿는 신앙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노력한다.
① 기도로써, 진보자들은 불신자(不信者)와 이단자(異端者)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일할 사도들을 보내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청한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마 9:38).
②모범으로써, 진보자들은 자신들의 삶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본받고 싶도록 모든 직무를 충실하게 실천한다
③ 말로써, 진보자들은 고통 중에 위로를 받고, 선을 실천할 수 있는 힘과 믿음을 대화를 통해 찾는다. 그리고 세상의 일들에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고백을 한다.
④ 업적으로써, 진보자들은 이웃의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교육과 지도에 개인적 활동과 희생을 통해 관대하게 참여한다.

(3) 끝으로, 완덕으로 나아가는 완전자들은, 일치의 길에서 언급하면서 설명할 것이겠지만, 학문과 지식의 은사를 개발하면서, 그들의 믿음을 완전하게 할 것이다.

제2장 망 덕(望德)

우리는 여기서 희망의 덕을 다음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I. 망덕의 본질.

II. 망덕의 역할.

III. 망덕의 실천 등이다.

1. 망덕의 본질(本質)

1190 (1) 희망에 대한 여러 의미

(가) 자연적 질서에서, 우리는 희망에 대하여 다음 두 가지 의미를 말할 수 있다. 즉 감정과 격정(激情)이다.

ㄱ) 희망은 격정의 열한 가지 가운 데 그 하나이다(제787항 참조). 희망은 존재하지 않은 감각적인 행복을 지향하는 움직임이지만, 그 행복에 도달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ㄴ) 희망은 행복을 획득하는 데 반대되는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부재(不在)하는 올바른 선을 향하는 마음의 가장 고귀한 감정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희망에 대한 감정은 인간의 삶에서 매우 큰 역할을 한다. 곧 희망은 인간의 어려운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을 가져다준다.

(나) 희망은 그리스도인을 완덕과 구원의 삶에서 오는 어려움을 지탱해 주는 초자연적 힘이다. 그리고 이 희망은 영원한 삶과 거기에 도달할 방법에 관계되는 모든 계시(啓示)된 진리들을 그 대상으로 한다. 더 나아가 희망은 신적 선(善)과 권능(權能)에 기초를 두고 있기에 매우 견고하고 굳건함을 가진다.

1191 (2) 희망의 주요한 기본 요소들

우리가 희망의 덕을 분석해 보면, 다음 세 가지 주요한 요소들이 희망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ㄱ) 희망은 초자연적 선(善)에 대한 열망과 사랑이다. 곧 희망은 우리의 최고선이신 하나님을 원하게 한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희망에 대한 감정의 기원이 있다. 희망을 통한 인간의 행복에 대한 열망은 매우 보편적이다. 그리고 믿음은 우리에게 하나님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실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희망은 우리의 참된 행복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한다. 이와 같은 희망은 그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 하지만 어디까지나 초자연적이다. 왜냐하면 희망은 믿음으로 인식하게 되는 하나님을 그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복의 접근이 매우 어렵게 생각되고 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낀다. 이와 같은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 두 번째 요소로써 근거 있는 희망의 개입이 필요하다.

ㄴ) 행복에 대한 우리의 희망은 거기에 이르기 위해 부족한 자신의 힘에 기초를 두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권능(權能)에 뿌리를 두게 한다. 희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생명의 완성과 다른 생명들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필요한 은총을 기대한다.

ㄷ) 희망은 은총을 통해 우리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바로 희망의 세 번째 요소이다. 희망은 우리에게 맡겨진 구원의 방법들을 선용(善用)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실천하게 한다. 이와 같은 노력들은 우리 희망의 대상이 더 높은 그만큼 더욱 항구하고 힘있어야 한다.

1192 (3) 희망에 대한 정의(定義)

우리는 지금까지 말한 것들을 기초로 다음과 같이 희망을 정의할 수 있다. 희망의 덕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적 권능으로 인해, 영원한 행복에 도달할 방법들을 확고한 신뢰로 참고 기다리게 한다. 이것을 두고 희망은 우리의 최고선이신 하나님을 열망하게 하는 대신덕의 하나라고 말한다.

(가) 희망의 첫째 대상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참된 행복이신 하나님이시다. 이 희망은 나눔 없는 전적인 사랑과 분명한 묵시(?示)를 통해 소유된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영원한 생명은 당신을 보내신 분인 성부(聖父)님을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 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

그러나 우리는 은총의 도움 없이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으므로, 희망은 유혹을 이기고 죄를 피하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덕목을 획득하게 한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의 완덕과 구원에 필요한 일반적 규범의 범위에서 필요한 초자연적 모든 도움에 영향을 미친다.

1193 (나) 우리가 희망에 의지하는 동기는, 바로 이 덕을 통하여 영혼이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데 있다.

ㄱ) 만일 우리가 스꼬트(Scot) 신부와 함께, 희망을 갖는 것이 하나님 사랑에 대한 열망이라고 한다면, 우리 행복의 동기는 하나님의 선성(善性)이 될 것이다. ㄴ) 만일 우리가 성 토마스와 함께, 이루기 힘든 희망으로 하나님을 소유하는 행복을 기대한다면, 그 동기는 우리 영혼을 땅의 재물에서 Ep어 하늘로 데려가는 하나님의 구원적 권능이 될 것이다. 이 때 희망에 대한 약속은 구원의 확신을 견고하게 하는 데서 온다. 그러므로 우리의 희망이 갖는 적절한 동기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권능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II. 망덕의 역할

희망은 세 가지 주요한 방법을 통해, 다음과 같이 영혼에게 성화(聖化)의 길을 걷는 데 공헌한다.
(1) 희망은 우리를 하나님과 일치시킨다.
(2) 희망은 우리의 기도에 큰 효과를 가져다 준다.
(3) 희망은 우리의 풍요로운 삶의 근원이다

1194 (1) 희망은 세속(世俗)의 재물(財物)에서 우리를 떼어놓으면서, 하나님과 일치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감각적 쾌락과 교만에 만족한다. 그리고 부유함의 황홀감으로 자연적 기쁨에 마음과 정신이 더 이끌리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희망은 믿음에 의지하여, 세속적인 모든 기쁨에는 완덕과 지속적인 두 가지 중요한 행복의 조건들이 빠져 있음을 상기하게 한다.

(가) 어떤 희망도 지상의 행복들 가운 데 우리를 만족시키기 위해 충분히 완전한 것은 없다. 즉 쾌락의 한 순간을 지나고나면, 우리의 쾌락들은 재빨리 지루함과 싫증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지상의 만족에 대한 행복은 한낱 어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일 뿐, 언제나 우리의 마음은 만족 없는 갈망을 갖는다. 그로 인하여 희망은 우리의 자연적인 마음과 정신의 선물로도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로 인하여 우리의 지성(知性)은 인식(認識)으로 만족할 뿐이지만, 진정한 기쁨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당신의 권능과 선하심, 아름다움과 존재의 충만함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희망은 오직 하나님만으로 행복이 충만하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희망은 먼저 우리 스스로 자신을 내어놓으면서 겸손하게 인내하는 기다림을 요구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희망의 뜻을 잘 이해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자석에 이끌려 가듯이 지상의 행복에서 벗어나 진정한 희망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1195 (나) 희망은 우리에게 세속적 행복에 대한 만족이 한 순간일 뿐, 그 만족은 기약 없이 우리를 떠나가 버린다는 사실을 바르게 인식시켜 준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행복의 만족을 잘 알고 있기에, 이 행복을 소유하고 있을 때에도 우리의 기쁨은 완전하게 충만하지 못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우리 안에 머무시며, 우리를 모든 것에서 떼어놓는 죽음마저도, 우리를 당신께 더욱 완전하게 일치시키는 도구(道具)로 사용하실 뿐이다. 그래서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자연적인 공포(恐怖)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참된 행복을 주시는 하나님과 영원히 일치된다는 희망을 신뢰하면서 죽음을 맞게 된다.

ll96 (2) 희망은 겸손을 통해 우리의 기도에 힘을 넣어 주고, 필요한 모든 은총을 얻게 해 준다.

(가) 그래서 희망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전적으로 신뢰하라는 성서의 절박한 권고의 감동적인 말을 상기하게 한다.

여기에 대하여 집회서에서는 구약의 교의(敎義)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말한다. "주님을 믿어 망신을 당한 사람이 있으며, 꾸준히 주님을 두려워하고도 버림을 받은 사람이 있으며, 주님께 호소하였다가 거절당한 사람이 있느냐? 주님은 동정심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시므로 죄를 용서해 주신다"(집회 2:10-11).

(나) 그러나 특히 희망에 대한 신약의 모습은 전적인 신뢰(信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기적(奇蹟)을 행하신다. 백부장과(마 8:10,13)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어서 지붕을 뚫고 내려온 중풍병 환자(마 9:2), 예리고의 소경(마 9:29), 세 번이나 거절했지만 간청을 계속했던 가나안 여인(마 15:28), 죄 많은 여인(눅 7:50), 자신을 고쳐 준분께 감사하러 돌아온 나병환자에(눅 17:19) 대한 예수님의 행적을 다시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다.

게다가 주님 자신이 우리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모두 들어줄 것이라고 권위 있게 말씀하실 때, 어떻게 그분께 신뢰를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멘, 아멘, 잘 들어 두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다"(요 16:23). 우리는 이와 같은 주님의 말씀에 희망을 갖는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다) 한편 희망은 믿음만큼 하나님을 흠숭(欽崇)하는 일이 없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통해 예수님의 권능과 선하심을 선포하고, 항상 너그러우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당신의 풍성한 은총을 구한다.

그러므로 희망은 끊임 없이 우리가 하나님께 신뢰를 드려야한다는, 트리엔트 공의회와 함께 결론을 내린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굳건한 희망을 두고 그 희망 안에 정착해야한다".

1197 (3) 끝으로, 희망은 우리의 풍요로운 삶의 근원이다.

ㄱ) 희망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열망, 특히 천상과 하나님을 소유하려는 열망을 갖게 한다. 그런데, 이 열망은 행복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열정과 충동 및 활기를 영혼이 느끼게 한다. 그래서 희망은 우리가 열망한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우리의 모든 노력을 지탱해 준다.

ㄴ) 더 나아가 희망은 우리의 노력을 훨씬 능가하는 보상(報償)에 대한 예견(豫見)으로 인해 우리의 힘을 증가시킨다. 만일 세상 사람들이 부귀(富貴)를 얻기 위해 열정으로 일하고, 무신론자들이 썩어 없어질 왕관을 얻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과 고된 훈련을 감수한다면, 영원한 왕관을 얻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더 열심해야 하겠는가?

"경기에 나서는 사람들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애쓰지만 우리는 불멸의 월계관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고전 9:25).

1198 ㄷ) 희망은 우리가 확실하게 성공하도록 많은 용기와 인내를 준다. 만일 월계관을 얻을 승리에 대한 아무런 희망 없이 싸운다면 그 이상 더 실망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와 반대로, 희망은 승리에 대한 보장처럼 우리에게 큰 힘과 확신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희망은 나약한 우리에게 참된 벗으로,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 · 동정 성모 · 성인들이 있음을 일깨워 준다(제188항-제 189항).

그렇기에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누가 감히 우리를 대항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롬 8:31).

악마와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생활하시고, 우리에게 신적 힘을 주신다면, 우리가 그분과 함께 승리한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은가? 사악한 뱀의 머리를 쳐부순, 동정녀가 우리를 도와준다면, 얻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또 만일 하나님의 벗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한다면, 어떤 탄원(歎願)들이라도 이루어지지 못하겠는가? 그리고 만일 우리가 승리를 보장받았다면, 하나님을 영원히 소유하는 데 필요한 노력들 앞에서 어떻게 뒷걸음칠 수 있겠는가?

 II. 망덕의 실천

1199 (1) 희망의 덕에 대한 일반적 원칙

우리가 희망의 덕으로 진보하기 위해서는, 그 결과를 위해 실천은 더욱 적극적이고 굳건해야 한다.

(가) 희망을 굳건하도록 하기 위해, 그 기초가 되는 동기를 자주 묵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서는 이미 제1193항에서 다루었던 것처럼, 우리의 희망은 그분의 약속과 선하심에 일치하도록 한다.

이제 우리의 희망에 대한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상기(想起)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신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그들에게 무죄를 선언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데 누가 감히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청해주시는 분이십니다!"(롬 8:32~34)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사도의 말처럼, 우리의 희망에 대한 대상은 하나님이 확실하다. 그림에도 불구하고 우리 편에서는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완전하게 하나님의 은총에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모든 노력은 희망을 더욱 튼튼하게 하여 열매를 맺도록 지향해야 한다.

1200 (나) 희망의 목적인 영혼의 성화(聖化)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과 긴밀(緊密)하게 일치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 일꾼입니다"(고전 3:9).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면서, 희망 안에서 우리의 불완전함을 보충하도록 원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존재의 첫 원인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망은 은총을 통해서 우리 덕의 실천을 없애기 보다, 오히려 덕의 실천을 불러일으키고 충동하면서 더욱 능률적이 되게 한다.

이 점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바르게 표현하고 있다. "내가 오늘의 내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덕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과연 나는 어느 사도보다도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된 것입니다"(고전 15:10).

이어서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하나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고후 6:1).

특히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매우 절박한 권고를 보낸다. "그대는 그리스도 예수의 충성스러운 군인답게 그대가 받을 고난을 달게 받으시오"(딤후 2:3).하였다. 바울은 자신의 구원만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도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사도 베드로도 다른 말을 쓰지 않고, 구원으로 불림을 받았지만 선한 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제자들의 소명을 되새겨 주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주시고 뽑아 주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더욱 확실히 깨닫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절대로 빗나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벧후 1:10).

희망은 우리의 성화를 통해, 모든 것이 하나님께 종속(從屬)되어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이 그분에게만 속한 듯이 행동해야 한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은총을 거절하지 않으시므로, 우리는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 주어지는 그 결과를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1201 (2) 영성생활에서 희망의 덕이 갖는 여러 단계

그리스도적 삶의 여러 단계에서 희망의 덕이 갖는 원칙을 어떻게 적용시키는지를 보는 것은 매우 쉽다.

(가) 완덕으로 나아가는 초보자들은, 먼저 희망에 반대되는 다음 두 가지 극단적인 생각을 피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만(自慢)과 절망(絶望)이다.

ㄱ) 자만은, 하나님께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은총을 구하기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방법을 따라 하나님께 도달하려는 데 있다. 그래서 자만은 하나님의 선함을 자기 안에서 과신(過信)한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죄(斷罪)하시기에는 너무 선하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無視)한다. 이러한 사상은 하나님은 선하시지만, 동시에 정의롭고 거룩하시며 죄를 미워하신다는 것을 잊은 것이다. "죄악을 미워하고 지겨워한다"(시 118:163),

또 한편으로 교만(驕慢)은 자신의 힘을 너무 과신하여, 죄의 기회와 영혼의 위험에 자신을 내어 맡긴다. 이것은 영혼을 위험 속에 내버려둘 때, 그가 죄에 굴복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로부터 승리를 약속했지만, 우리가 깨어 기도하는 조건에서이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막 14:38).

희망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에 신뢰를 두었던 사도 바울도, 영혼의 구원을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빌 2:12).

ㄴ) 이와 반대로, 희망 없는 사람들은 절망과 낙심(落心)에 잠겨 있다. 그리고 자주 유혹 당하고 가끔 죄에 대한 가책(呵責)으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면서 실망한다. 나아가 자기의 결점을 고치지 못할 것이라고 미리 짐작하면서, 자신의 구원에 대해 절망(切望)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희망 없는 생각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위험한 자세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자신이 유혹 당했을 때, 스스로 방어(防禦)할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의 은총에 신뢰하면서 모든 것을 그분께 맡겼던 것을 기억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롬 7:24~25),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희망을 갖고, 사도 바울의 모범을 따라 기도할 때 반드시 구원을 받을 것이다.

1202 (나) 희망에 대한 장애물인 절망과 낙심을 피한 후에는 하나님 나라를 열망(熱望)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재물(財物)에 대한 포기를 실천한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계십니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골 3:1~2).

이제 우리의 희망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기에 더 이상 세상 것만을 맛보고 추구하려 하지말고, 천상(天上)의 것을 추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참된 고향은 천상이며, 이 지상의 땅은 귀향지(歸鄕地)일 뿐이기 때문이다. 곧 하늘나라는 우리가 추구하는 영원한 행복의 목적지인 반면에, 이 땅은 지나가는 일시적인 행복만을 우리에게 줄뿐이다.

1203 (3) 완덕으로 나아가는 진보자는 예수님께만 희망을 둔다. 진보자는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하면서 그분께 드리는 자녀적인 신뢰가 그들 삶의 중심이 된다.

(가) 이와 같이 예수님과 합체(合體, 함몸)된 진보자들은 그분이 준비한 자리인 천국을 깊은 신뢰로 기다린다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그래서 진보자들은 구원자인 예수님 안에서 이미 희망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요 14:2).

ㄱ) 진보자들은 이 세상의 시련(試鍊)과 역경(逆境)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구원을 기다린다. 그리고 진보자들은 시편저자와 함께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시 22:4).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은 옛날 사도들에게 하시던 말씀처럼 진보자들에게 용기를 주러 오신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틀림없이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눅 24:36).

만일 음모(陰謀)와 박해(迫害)가 진보자를 괴롭힌다면, 그들은 성 바울의 빈첸시오가 제자들에게 말했던 것을 상기할 것이다. "우리를 해치기 위해 온 세상이 들고 일어난다 하더라도, 우리가 희망을 두고 있는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일시적인 패배가 진보자들에게 오더라도, 그들은 성 바울의 빈첸시오와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안에서 영적으로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 패배를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패배가 우리에게 유익하게 되도록 희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패배는 하나님의 허락으로 오기 때문입니다."

만일 진보자들에게 온 패배가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고통들이라면, 그들은 지나가는 몇 가지 고통의 값으로 하늘나라를 획득하기 위한 신적 축복처럼 바라볼 것이다.

1204 ㄴ) 진보자들의 희망은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로 인해 고통을 당했을 때보다도, 더 위험한 성취와 쾌락의 맛을 피할 줄 알게 한다. "삶이 세속적인 희망에 미소 짓는 것처럼 보일 때, 감각들은 우리를 사로잡는 환상(幻想)이 가져다 주는 약속들을 무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쾌락과 세속적 행복에서 벗어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그리고 쾌락이 내 영혼을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쉽게 말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세속적 기쁨이란 자신을 기만(欺瞞)하게 하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정을 멈추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의 속박(束縛)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행(苦行)을 실천한다. 특히 그들은 예수님과의 친밀한 우정 속에서 가장 순수하고 거룩한 기쁨을 추구한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감미로운 낙원(樂園)이여!"

ㄷ) 만일 진보자들 자신의 결함(缺陷)과 비참(悲慘)한 감정이 스스로를 괴롭힐 때, 그들은 성 바울의 빈첸시오 말을 묵상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신들은 자신의 비참함을 나에게 상기(想起)시켜 주는군요. 아! 어느 누가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비참한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들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께 굳건한 믿음에 기반을 두기 위해 비참함도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위 위에 집이 세워졌을 때, 폭풍이 닥쳐도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우리의 비참함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慈悲)를 부른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겸손보다 더 좋은 자세는 없다 성 빈첸시오는 덧붙이기를, 하나님께서 한 피조물에게 선을 베풀어 주실 때, 피조물이 이 선을 거부하거나 모독하지 않는 한 끝까지 계속 주신다. 이처럼 진보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자비는 앞으로 영혼에게 다가올 많은 자비의 보증(保證)이 된다.

1205 (나) 일반적으로 희망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늘나라에서 영적으로 살게 한다. 예수 승천 대 축일에 교회가 노래하는 아름다운 기도에 따르면, "우리의 마음은 이미 천상 것들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희망의 자세는 말과 행동뿐만 아니라, 특히 고통당할 때도 하늘나라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현세의 변화하는 사물 가운데서 우리 마음은 참된 기쁨이 있는 곳에 머물러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받아 모시는 영성체의 기쁨은 미리 하늘나라의 행복을 예상(豫想)하게 한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하늘나라를 기다리면서, 우리 마음에 필요한 진정한 위로를 찾는다.

1206 (다) 이와 같은 희망은 우리에게 가장 값진 인내의 은사(恩賜)를 신뢰를 통해 얻도록 자주 기도하게 한다. 물론 우리는 이 은사를 받을 공로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이 은사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거룩한 교회는 우리에게 죽을 때의 은총을 구하는 기도를 하도록 제시한다. 예를들어, 우리가 자주 드리는 성모송(聖母頌) 등의 기도들이다. 우리는 성모송의 기도에서 죽음의 순간에 마리아의 특별한 보호를 간청한다. "이제와 우리 죽을 때,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으소서"

(4) 완덕으로 나아가는 완전자들은 우리가 일치의 길에서 다시 묘사(妙思)할 포기(抛棄)를 통해 하나님께 신뢰를 드린다.

 제3장 애 덕(愛德)

1207 사랑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초자연화(超自然化) 시키고 성화(聖化)시킨다. 우리는 먼저 사랑에 대하여 잠시 살펴본 후, 다음 주제를 다루기로 한다.

(1) 하나님께 대한 사랑.
(2) 이웃에 대한 사랑.
(3) 사랑의 원천이신 예수 성심께 대한 사랑이다.

사랑에 대한 몇 가지 고찰(考察)

1208 (1) 일반적으로 사랑은 선(善)을 원하는 영혼의 성향(性向)인 강한 힘이다. 만일 우리의 영혼이 선에 대하여 감각적(感覺的)이라면, 그리고 선이 유쾌한 상상에 의해 비쳐진다면, 우리의 사랑은 그 자체가 감각적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선이 이성(理性)에 의해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면, 우리의 사랑은 이성적일 것이다. 끝으로 만일 선이 믿음으로 비쳐진 초자연적인 것이라면, 우리의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일 것이다

이와 같이 위에서 본 것처럼, 사랑은 인식(認識)을 전제로 하지만, 항상 이 인식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설명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랑은 다음 네 가지 주요한 요소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사랑하는 대상(對象)에 대한 호감(好感)은, 그 대상과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조화(調和)를 이루게 한다. 그리고 이 조화는 두 사람 사이에 완벽한 유사성(類似性)을 가져다주지는 못하지만 서로를 보충(補充)해 준다.
②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또 그의 현존(現存)을 즐기기 위해, 그 대상을 향한 충동(衝動)과 동요(動搖)이다.
③ 사랑은 우리가 갖고 있는 행복에 대한 마음과 정신의 공감(共感) 또는 일치이다.
④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소유할 때 느끼는 행복과 만족 또는 기쁨에 대한 느낌이다.

1209 (2)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그 동기와 대상과 근원에서 이미 초자연화된 사랑이다.

ㄱ)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우리의 선천적인 의지를 통해 덕을 실천함으로써 그 근원에서부터 초자연화 된다. 그래서 도움의 은총(恩寵)으로 실천된 이 덕은 사랑을 한 단계 승화(昇華)시키고 올바른 사랑으로 변화시킨다.

ㄴ) 우리의 정감(情感)을 사랑 안에서 성화시키기 위해, 믿음은 초자연적 동기를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 그래서 사랑은 믿음을 통해 우리의 정감을 먼저 하나님께로 향하게 한다. 우리의 사랑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믿음은 우리에게 무한한 최상의선을 제시한다. 그 다음, 믿음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덕의 반영으로 피조물들을 소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피조물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ㄷ) 사랑의 대상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믿음을 통해 초자연적인 것으로 변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은 이성적(理性的)이고 추상적(抽象的)인 하나님이 아니라, 믿음 안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영원에서 독생자를 잉태하셨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맞아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성부와 똑 같은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육화(肉化)되심으로써 우리의 형제가 되신다. 그리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드님과의 일치된 사랑으로써, 우리 영혼에게 신적 사랑을 베풀어 준다. 그로 인하여 모든 피조물도 우리에게 자연적 존재로만 나타나지 않고, 우리에게 보여 주는 계시(啓示)의 사랑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아버지를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형제로써, 모두는 성령의 살아 있는 성전(聖殿)인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에서는 모든 것이 초자연화 된다.

성 토마스에 따르면, 애덕이란 사랑의 개념에서 볼 때, 그가 사랑하는 이웃에 대한 커다란 존경에서 오는 어떤 완전함을 곁들인 사랑을 말한다. 그래서 모든 애덕은 사랑이지만, 모든 사랑은 그 형태에 따라 애덕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1210 (3) 사랑에 대한 정의(定義)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자신을 위해 모든 것에 앞서, 하나님처럼 그분을 사랑하게 하는 대신덕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이중적(二重的)인 대상(對象)을 갖고 있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 이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사랑의 두 대상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피조물을 신적 완덕의 반영(反影)과 표현(表現)으로 생각하면서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피조물 안에서 사랑하는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성 토마스는 같은 뜻에서, 우리는 이웃 안에 하나님이 계시거나, 적어도 그들이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한다. 이것은 단 하나의 같은 사랑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제1절 하나님께 대한 사랑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다음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I.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본질.
II.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성화적 역할
III.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점진적 실천.

I.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본질

1211 사랑의 첫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존재 자체로 충만하시기에 그분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은 한없으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특별한 신적 속성 때문만이 아니라, 완덕의 모든 현실 안에서 고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비(慈悲)와 같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고찰은 우리로 하여금 완덕에 대한 존경으로 쉽게 이끈다. 그리고 단순한 영혼들은 하나님의 선성(善性)에 대한 그분의 속성을 분석하지도 않고, 믿음이 알려주는 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개념을 확실히 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동기와 순수한 사랑에 도달하려는 여러 단계 및 부과(賦課)되는 계명을 살펴보고자 한다.

1212 (1) 사랑의 계명

(가) 이미 구약(舊約)에 세워진 사랑의 계명은 예수님에 의해 갱신(更新)되고, 예언자와 율법의 요약을 통해 선포되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 이 말은 우리가 모든 능력과 또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어떤 사랑보다 우월해야하며, 또 열정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에게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자신을 온전히 당신께 봉헌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 영혼을 차지하는 정감과 너그러움, 또 우리의 온 힘과 열정을 쏟는 굳건한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성인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열정적인 사랑으로 끝을 맺는다. "주님, 저는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에게만 속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제 목숨은 당신 것이기에, 당신만을 위해 살 것입니다. 주님, 저의 의지는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을 위해서만 사랑할 것입니다. 저의 사랑은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 안에서만 사랑할 것입니다.

저는 존재의 첫 근원으로써 당신만을 사랑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최후의 안식 안에서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당신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신의 존재보다 훨씬 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저의 존재는 당신에 의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1213 (나) 위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사랑의 계명은 매우 범위가 넓기에 자신에게는 한계(限界)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척도(尺度)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353항-제361항에서 본 것처럼, 완덕을 향해 끊임없이 사랑을 추구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은 죽을 때까지 계속 커 나가야 한다.

성 토마스의 교의에 따르면, 애덕의 완성은 마지막에도 사랑을 요구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랑에 도달하기를 간절히 원해야 한다. 그리고 까줘땅(Cajetan)은 덧붙여 말하기를, "완덕에서 애덕이 마지막이므로 이 사랑의 계명을 놓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가장 비천한 사람들이라도, 사랑을 갖고 하늘나라를 향해 걸으면, 완전한 사랑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이 때부터 영혼은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을 거스르는 것을 피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덕을 지향하는 영혼들은 사랑의 첫 단계에서 만족하지 않는다. 오히려 목숨을 바쳐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려고 노력할 뿐 아니라, 온 힘을 다해 더 높이 사랑의 정상에 올라가려고 노력한다.

1214 (2) 사랑을 실천하는 동기(動機)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이나, 그분의 무한한 완성에 대한 우월한 동기이다. 그러므로 이 동기에는 감사와 희망과 구원에 대한 두려움의 동기들이 사랑의 동기에 첨가(添加)될 수 있다. 그 결과 자신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종속되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사랑과 화해한다. 그러므로 성인들이 자기 중심적 사랑이나 또는 이기적 사랑을 호되게 단죄할 때, 그 이유는 자신에 대한 방탕한 애정이 문제가 될 때이다.

1215 (가) 그러나 우리의 의무적이고 가능한 사랑은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 사랑에 그 동기가 되어야 한다. 물론 사랑은 그 자체로써 우리의 본성과 열망에 조화로운 대상을 전제로 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하여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다음과 같은 교의를 설명한다. "만일 우리가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면서, 우리 서로 어떤 공감(共感)도 할 수 없는 무한한 선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 선을 다만 존중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선을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서로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선에 대한 사랑도 아주 작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우정이며 우정은 서로 공감하면서 일치를 목적으로 하는 상호 관계를 가질 때 존재하기 때문이다.

1216 (나) 완전한 사랑은 그저 감사하는 동기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의 감사가 은인(恩人)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범주(範疇)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그 감사는 사랑의 동기로서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때의 감사는 이해 타산적(打算的)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혜에 대한 감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은인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昇華)된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 무한한 선 때문에 사랑한다면, 이 동기는 사랑의 동기가 될 수 있다.

사실 감사는 가장 고귀한 감정의 하나이므로, 순수한 사랑으로 우리를 쉽게 인도한다. 또 성서와 성인들은 우리를 자주 사랑으로 자극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제시해 주었다. 그래서 복음사가 요한은, 완전한 사랑은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 준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열렬히 사랑하도록 권고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요일 4:19)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수난(受難)과 성체(聖體)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였는가? 또 얼마나 영원으로부터 우리에게 증거된 사랑을 생각하면서, 가장 순수한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하도록 배웠는가?

만일 우리의 사랑이 이해 타산적인 것과 순수한 것을 구별하기 위한 기준이 있다면, 첫 째로 다름 아닌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분께서는 참된 선의(善意)가 있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 째는 우리를 위해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당신 선의를 주시는 그분을 사랑하는 데 있다.

1217 (3) 성 베르나르도는 사랑의 단계를 네 단계로 분류한다.

① 사람은 먼저 자신을 위해 자기만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는 육적(肉的)이기에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랑을 맛볼 수 없기 때문이다.
② 그 다음 단계의 사랑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느끼면서,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자신을 위해 필요한 도움을 주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③ 그러나 얼마 후에, 그는 필요한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을 자주 대하고 그분 안에서 사랑이 커 나간다. 그로 인하여 그는 조금씩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지를 알게 되고,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⑤ 마지막 사랑의 단계는 이 세상에서 도달하는 사람이 적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만 자신을 사랑한다. 그 결과 그 영혼은 오롯이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위에서 본 사랑의 단계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첫 째 단계를 제외하고, 나머지 사랑의 세 단계는 제340항, 제624항-제626항에서 이미 다루었던 완덕의 세 단계(정화 ? 빛 · 일치)와 일치한다.

II.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성화적 역할

1218 (1) 사랑은 그 자체로써 매우 탁월하기에 모든 덕들 가운데 가장 성화적(聖化的)이다. 우리는 이미 제310항-제319항에서, 사랑이 완덕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 위에 사랑하는 하나님을 향해 자신들의 행위를 집중시키면서, 특별히 완덕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 증명해보였다.

사도 바울은 시적(詩的)언어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해서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하지 않고 사욕을 품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고전 13:1~13)

1219 사랑은 우리 모두를 일치시키고 변화시킨다.

ㄱ) 사랑은 모든 능력(能力)을 통해 영혼을 하나님과 전적으로 일치시켜 준다. 곧 사랑은 하나님을 존경하고 자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게 하고, 그분의 사랑에 우리 의지를 굴복시킬 마음을 갖게 한다. 더 나아가 사랑은 하나님과 다른 영혼들에게 전적으로 봉사(奉仕)에 전념할 수 있는 힘을 준다.

ㄴ)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님과 일치시키면서 영혼을 변화시켜 준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은 나 자신에게서 이탈하게 하여, 하나님께로 높이고 따르도록 해 준다. 사랑은 하나님의 성덕(聖德)을 우리 안에서 재생시키도록 해 준다.

이러한 결과로 영혼들은 사랑하는 하나님을 닳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영혼들은 사랑하는 분을 한 모범으로 존중하며, 친밀하게 그분에게 스며들어 더욱 닮아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1220 (2) 결과적으로, 사랑은 우리의 성화에 매우 효과적으로 관여한다.

ㄱ) 사랑은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신적인 것들을 맛보고 그분을 더 잘 이해하게 하도록, 어떤 호감과 친숙함을 갖게 한다. 그래서 사랑은 서로가 갖는 호감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게 하고, 더욱 더 내밀하게 일치한다. 지식이 없는 영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열중하여, 교회의 위대한 학자들보다 더 열심히 사랑을 실천하고 맛보는 영혼들이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 갖는 효과들 가운 데 하나이다.

1221 ㄴ) 사랑은 가장 탁월한 모든 덕을 실천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사랑은 모든 어려움을 뛰어넘는 용기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선을 행할 힘을 준다. 왜냐하면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기 때문이다"(아 8:6).

아무도 준주성범의 저자만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탁월한 효과를 묘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은 부담 없이 자기 짐을 지고 가며, 쓴 것을 모두 달콤하고 맛좋은 것으로 바꾸어 준다."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났기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가 아니면 안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날고 뛰면서 기뻐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위해 모두를 내어 준다". 또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고귀하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좋은 일을 실천하게 하고 더 완전한 것을 열망하게 한다".

"사랑은 항상 깨어 있다. 사랑은 피곤하지만 지치지 않고, 겁에 질려도 당황하지 않으며 생동하는 불꽃과 같다. 사랑은 어려움 중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1222 ㄷ) 사랑은 영혼에게 커다란 기쁨과 해방을 가져다 준다. 곧 하나님은 최고의 선으로써 사랑 그 자체이시다. 이 뜻은 다음과 같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생명은 "우리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 준다".

이어서 「준주성범」에서는, "사랑보다 더 감미로운 것은 없다. 하늘과 땅에서 그 어떤 사랑보다 기쁘고 더 좋으며 달콤한 사랑은 없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참된 기쁨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現存)을 가장 생생하게 인식하기 시작할 때이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은 즐거운 낙원이다" "주님이 계시면 모든 것이 즐겁지만, 당신이 안 계시면 모든 것이 싫증이 난다".

1223 ㄹ) 이처럼 사랑의 기쁨에는 깊은 평화가 뒤따른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부성애적(父性愛的) 염려를 보여 주시는 확신을 가질 때,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면서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이해와 배려(配慮)를 믿게 되고,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마음의 평정(平靜)과 평화를 누릴 수 있다.

"당신은 마음의 고요함과 평화의 큰 기쁨을 실천하라" 그런데 우리에게 내적 평화보다 더 좋은 영적 진보는 없다. 참으로 "신심 깊은 영혼은 침묵과 고요함 속에서 사랑에 진보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사랑 그 자체와 효과를 고려해 본 애덕의 모습에서, 사랑은 모든 덕 가운 데 영혼을 가장 거룩하게 하며 일치하게 한다. 그래서 사랑은 실제로 완덕과 뗄 수 없이 묶여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III.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점진적 실천

1224 사랑의 실천에 대한 일반 원칙 사랑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우리가 그분께 드리는 사랑은 보다 완전해야 한다. 곧 우리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막 12:30)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사랑은 희생(犧牲) 없이 자신을 줄 수 없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희생의 실천을 통해 더욱 사랑이 완전해지도록해야 한다(f1321항).

1225 (1) 완덕으로 나아가는 초보자들은 죄 가운데, 특히 대죄(大罪)와 그 원인을 피하려고 노력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ㄱ) 초보자들은 하나님께 속죄자(贖罪者)로써 사랑을 실천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훔치고, 그분을 거스른 것을 비통(悲痛)하게 뉘우쳐야 한다(제743항-제745항).

이와 같은 사랑은 다음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① 먼저, 사랑은 우리가 애착하는 모든 죄와 피조물에서 조금씩 우리를 eP어놓는다.
② 그리고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일치하게 하고 화해시켜 준다.

또 사랑은 하나님과 일치하는 데 큰 방해가 되는 죄로부터 우리를 eP어놓는다. 뿐만 아니라 사랑은 우리의 마음 안에 모욕(侮辱)과 회개(悔改)의 감정을 일으키게 한다. 그리고 은총을 통해 보다 완전한 사랑으로 변화시켜 놓는다.

이 점에 대하여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완전한 사랑은 하나님을 열망하고 찾아다니며, 회개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고 발견한다. 그래서 완전한 사랑은 하나님을 만나 포옹한다." 어쨌든 우리 죄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강렬하면 할수록 보다 완전하게 사(赦)함을 받는다.

1226 ㄴ) 초보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사랑의 첫 단계를 실천하도록 한다. 곧 하나님의 계명(誡命)과 교회에 순명하고, 그분의 섭리(攝理)에 따라 영혼의 정화(淨化)를 위해 보내는 시련(試鍊)들을 용감하게 참는다(제747항).

ㄷ) 이러한 인내는 오래지 않아 그들의 사랑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초보자들이 짓는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심을 통해 끊임없이 그들을 채워 주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초보자들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즉시, 매우 관대하게 그들을 용서해 주신다. 초보자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총에 진정으로 감사드리고, 그분의 선하심을 찬송(讚頌)하며, 그분의 은총을 보다 더 잘 선용(善用)하도록 노력해야한다.

바로 이러한 자세는 우리의 순수한 사랑에 대한 훌륭한 준비와 고결(高潔)한 감정을 낳는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은인(恩人)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초보자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온 땅에 알리고 찬양하려는 열망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은 사랑의 모습은 그 자체로써 이미 애덕이다.

1227 (2) 완덕으로 나아가는 진보자들은 친절하고 관대하게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형제적 사랑에까지 이른다.

(가) 친절한 사랑은 자기 반성과 믿음에서 나온다.

ㄱ) 진보자들은 하나님께서 완전 지혜 · 권능 · 선과, 존재 그 자체로써 충만한 분이심을 묵상(?想)하고 확신하면서 믿는다. 진보자들은 선하신 하나님의 풍요로우심을 보는 것을 기뻐한다. 그리고 진보자들은 자신의 기쁨보다는 하나님의 기쁨을 더 만족해 한다. 또 진보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경축의 행위로써 그 기쁨을 표현한다.

ㄴ) 이렇게 함으로써 진보자들은 신적 덕성(德性)을 자신들 안에 끌어들인다. 그래서 진보자들의 하나님은 자기 자신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덕성과 선하심, 온유와 신적 생명으로 자라난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은 우리가 만족하는 것들로부터 영양분을 섭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 안에 만족하면서, 그분의 덕성으로 풍요로워져야 한다.

1228 ㄷ)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덕성을 우리 안에 끌어들여야 한다. 이 점에 대하여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이미 우리에게 잘 설명했듯이, 우리는 하나님께 모두를 바쳐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으로 인해, 마치 그 사랑이 우리 것이기나된 듯 우리는 그분의 선을 소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덕성이 언제나 우리 정신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배려(配慮)로 인해, 당신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분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은 거룩한 침묵 속에서 응원을 외친다."하나님께서는 참된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선하심과 덕성이 무한한 것만으로 나에게는 충분합니다. 곧 내가 죽던살던 그것은 나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승리하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행복으로 충만하심은 그분을 사랑하는 영혼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자기에게 생명을 주고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1229 ㄹ) 진보자들의 사랑은 고통받으시는 예수님을 묵상할 때 비통(悲痛)함과 애도(哀悼)로 변한다. 신심 있는 영혼은 사랑하는 분의 슬픔과 근심을 보면서, 사랑으로 그분의 고통을 함께 나누지 않을 수 없다. 그 예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상흔(傷痕)을 받았다. 이처럼 참된 사랑은 연민(憐憫)을 낳고, 연민은 사랑하는 분과 같은 상처(傷處)를 갖게 한다.

1230 (나) 진보자들은 친절한 사랑에서 관대(寬大)한 사랑으로 진보한다. 즉 사랑하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강한 열정을 갖는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다음 두 형태로 실천될 수 있다.

ㄱ) 먼저 완덕에 대한 내적 방법으로, 가정적(假定的)인 실천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면서, 그 선을 실천할 수 있다면, 나는 내 생명을 바쳐서라도 끊임없이 그 선을 열망할 것이다 또 이러한 가정적 상태에도 불구하고, 선을 실천할 수 있다면,나는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열망할것이다.

1231 ㄴ) 그 다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속하는 외적인 것들이 우리 자신과 이웃 안에서 커 나가도록 절대적인 방법을 열망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영광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또 사랑하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랑이 사색(思索)으로만 끝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신적 덕성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도록 노력한다.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존경으로 가득 찬 우리는 온 땅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찬양받고, 높여지고, 찬미받으며 흠숭받기를 열망한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완전하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으므로,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를 찬양하도록 초대한다. "주님의 모든 업적들아 주님을 찬미하라"(단 3:57).

우리는 천사들과 성인들과 함께 노래하기 위해 하늘을 향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신 주님·..". 우리는 또 천사들 위에 올림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동정 성모님과 일치하면서, 성모님과 함께 노래한다.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

그러나 우리는 특히 육화(肉化)되신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신 예수님과 함께, 성부와 일치하면서 삼위일체(三位一體)에 무한한 존경과 찬양을 드린다.

끝으로 진보자의 사랑은 서로를 찬미하는 세 위격(位格)이신, 하나님과 일치한다. 이 점에 대하여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때 우리는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하고 외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께 기원하는 것은 창조에 대한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 안에, 하나님과 함께 있는 영원한 영광이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덧붙여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하고‥‥ 기도합니다. 곧 우리는 모든 피조물에 앞서 하나님께서 당신이 가지셨던 영광을 영원히 받으시기를 빕니다.

1232 (다) 관대한 사랑은 일치의 사랑으로 나타난다. 진보자로써 하늘나라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거룩한 뜻을 실천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사랑은 모든 것에 앞서 서로 일치하게 하며, 둘의 뜻을 하나로 묶어 준다. "좋아하는 것도 하나요, 싫어하는 것도 하나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좋고 지혜로우며 유일하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뜻을 일치시켜야한다.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눅 22:42)

이와 같은 사랑의 일치는, 이미 제480항-제492항에서 다룬 것처럼, 계명과 권고와 은총의 영감(靈感)에 대한 순명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다. 또 이 사랑은 우리의 성화를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온갖 종류의 시련 · 굴욕 · 실패 · 불행 또는 행복과 섭리적인 사건들 앞에서 겸손히 굴복하게 한다.

이처럼 사랑의 일치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모든 것에는 무관심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며, 피조물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존재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그분의 영광만을 원하고, 그 나머지는 우리에게 무관심으로 남는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무관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구원을 열렬히 희망하지만, 그 구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때 이루어진다.

이처럼 구원을 위한 우리의 포기(抛棄)는 마음 안에 깊은 평화를 가져다 준다. 곧 우리의 성화에 필요하지 않은 일은 우리 앞에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롬 8:28)

그러므로 우리는 기쁘게 주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와 그것이 주는 시련을 끌어 안아야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는 사랑에 대하여, 보슈에(Bossuet)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분께 기쁨을 드리는 것처럼, 사랑은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하나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사랑의 일치는 우리로 하여금 이기적인 만족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기쁨 안에서 쉬게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도록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1233 (라) 사랑의 일치는 우리를 하나님과 정다운 관계로 맺어 준다. 이 두 벗 사이에 상호간의 우정에 대한 배려와 교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이것을 두고 진정한 우정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참된 우정은 언제나 상호적입니다. 이 우정은 일시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우리 안에 사랑을 넣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모르는 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영원한 사랑의 나눔에 민감해야 할 것입니다. 이 사랑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 마음 안에 바른 성향(性向)과 신성한 충동, 그리고 계시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성인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하나님과의 이 우정은 단순한 우정이 아니라 숭고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사랑의 우정입니다.

234 그러므로 이 우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恩賜)와, 우리의 인격(人格)을 그분께 드리는 사랑의 선물과 깊이 관계된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 또 무엇이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사랑인가를 이해하기위해 살펴보기로 한다.

ㄱ)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① 영원하다. "나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였다"(렘 31:3)
② 사심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충만하시며, 그분은 우리가 좋은 일을 하도록 우리를 사랑하신다.
③ 너그럽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 안에 정답게 오셔서, 당신모두를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이다(제92항-제97항).
④ 선행(先行)한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필요하신 것처럼, 당신은 우리의 사랑을 구걸하고 청원하신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워"(잠 8:31; 23:26).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다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예민한 마음을, 과연 우리가 짐작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1235 ㄴ)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가능한 한, 보다 완전한 사랑으로 그분께 응답해야 한다. "우리를 이렇게 사랑해 주시는 분을 누가 사랑으로 갚지 않겠습니까?"

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항상 진보적이다.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가치만큼 사랑할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매 순간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해야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에 집착하지 말고, 언제나 우리에게 요구되는 어떤 희생도 거절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한다"(요 8:29).
②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면서 신심 깊은 사랑에는 언제나 너그러워야 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당신을 사랑합니다."(막 12:30)

하나님은 우리 존재의 중심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 지혜의 뿌리가 되신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을 겸손하게 예수님께 순종시킬 때, 그분은 우리 의지의 기초가 되신다. 더나아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그분은 우리의 감정을 조절하신다. 끝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 삶의 중추가 되신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개인적인 욕심을 배격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당신의 은총보다 더 진하게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위로가 필요한 만음, 마음이 무미건조(無味乾燥)할 때에도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무능력(無能力)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을 것이다.

제2절 이웃에 대한 사랑

여기서 우리는 형제적 사랑의 본질과 그 사랑의 성화를 살펴본 뒤, 그 형제적 사랑의 실천 방법을 소개할 것이다.

I. 형제적 사랑의 본질

1236 형제적 사랑은 이웃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말한다. 만일 우리의 형제적 사랑이 이웃을 사랑한다는 그 자체에만 목적이 있다면, 그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일수 없다. 더구나 형제적 사랑이 되돌려 받을 수 있는 봉사 때문에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결코 애덕이 될 수 없다.

(가)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형제들 사랑 안에서 보아야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당신의 존재와 속성과 자연적 은사들을 표현하신다(제445항).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본질과 생명 안에서 초자연적 은사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랑은 우리 사랑의 뿌리가 된다. 그러므로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품성은 은총으로 초자연화된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237 (나) 형제적 사랑의 진정한 뜻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형제들의 관계에서 이웃들을 고찰하면서 그 이유를 분석할 수 있다. 그 때 형제들은 모두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며, 하늘나라의 공동 상속자들로 나타날 것이다(제93항, 제142항-제149항).

그렇기에 형제들이 은총의 상태가 아니거나 믿음이 약하더라도, 그 형제들도 초자연적 은사를 받도록 불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뜻에서 서로 은사를 나누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며, 또 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인해 이웃을 형제로서 사랑하는 것은 매우 뜻 있는 이유가 된다. 다행스럽게도 서로가 보는 관점의 차이에 따라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것이, 우리를 일치시키는 것들에 비해 적다는 현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지 않는가!

II. 형제적 사랑의 성화

1238 (1) 형제에 대한 초자연적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한 방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감탄할 만한 효과들을 소개한 뒤, 그 모든 사랑을 간단하게 되짚어 보고자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복음사가 요한의 문헌 몇 가지를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며, 그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습니다."(요일 1:10~11)

그런데 복음사가 요한의 표현으로는, 빛 속에 산다는 것은 모든 빛의 원천인 하나님 안에 산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은 죄의 상태에 있다는 말이다. 뒤이어서,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 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자는 누구나 다 살인자입니다."(요일 3:14~15)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사랑하는 여러분께 당부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요일 4:7,8,12,16,20,21)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명백하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집중할 때 그 영혼은 자신에게 부여된 모든 특권을 향유하게 된다.

1239 (2) 한편 예수님은 우리가 가장 비천한 형제에게 한 사랑이 곧 하나님을 위해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 25:40).

예수님은 형제들에게 베푼 가장 작은 봉사라도 모든 종류의 은사를 통해 백 배로 갚아 주시고, 고귀한 마음 씀씀이를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예수님의 배려는 이웃에게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형제적 사랑을 실천하는 영혼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그리고 전 생애를 사도직 또는 애덕 사업에 헌신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 위로가 크지 않겠는가!

형제들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께 봉사하는 매 순간마다, 예수님은 그 영혼들을 성화시켜 주실 것이다.

III. 청제적 사랑의 실천

1240 우리를 형제적 사랑으로 이끌어 주는 한결같은 끈기는, 이웃 안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체험하게 한다. 이와 같이 "만사를 그리스도 안에서" 추구하는 우리 사랑은 그 실천과 방법에서 더욱 초자연화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범위에서 더욱 보편화 되고, 또 사랑의 실천은 더 활동적이고 너그럽게 된다.

1241 (1) 완덕으로 나아가는 초보자들은, 특히 사랑에 반대되는 죄를 피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가) 그러므로 초보자들은 예수님과 이웃을 슬프게 하는 일은세심하게 피한다.

1) 이미 제1043항에서 보았듯이, 사랑과 정의에 반대되는 중상(中傷)과 모략(謀略), 그리고 경솔한 판단은 피해야 한다.

ㄴ) 형제적 사랑에서 일어나는 자연적 반감(反感)은, 거의 대부분이 사랑의 결핍(缺乏)에 그 원인이 있다.

ㄷ)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와 빈정거림과 경멸은, 이웃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슬프게 할 뿐이다. 이웃을 희생시켜 가며하는 농담(弄談)도 쓰린 상처가 될 수 있다.

ㄹ) 이웃을 굴복시키고, 자기 자신의 의견만을 관철시키려는 교만과 격론(激論)들은 형제적 사랑을 갈라놓는다.

ㅁ) 초보자들은 교회와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분쟁(分爭)이 될 수 있는 모든 거짓들과 불화(不和)와 경쟁들을 피한다.

1242 형제적 사랑에 반대되는 모든 죄에서 벗어나려고 단단히 결심하기 위해, 사도 바울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한 감동적인 다음과 같은 말을 묵상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다.

"주님을 위해서 일하다가 감옥에 갇힌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주셨으니 그 불러 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여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셔서 안겨 주시는 희망도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며 만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진리대로 살면서 여러 면에서 자라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엡 4:1~16)

이어서 사도 바로로는 또,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서로 애정을 나누며 동정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십시오. 그렇게 해서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제 실속만 차리지 말고 남의 이익도 돌보십시오."(빌 2:14)

사도 바울의 이 호소를 들으면서 누가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도는 자신이 차고 있는 쇠사슬은 아랑곳하지 않고, 교회 공동체를 갈라놓는 서로의 불화를 없애도록 호소한다. 즉 공동체의 일치를 강조하면서 그들을 분열시키는 모든 것에서 이탈하도록 외친다.

1243 특히 초보자들은 형제적 사랑에 반대되는 악을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피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웃을 죄짓게 하는 모든 행위를 피해야 한다. 어떤 것은 자신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죄의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이라면 사랑으로 그것을 자제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에 대하여 차분하게 가르친다. 사도에게 우상들은 아무 존재도 아니므로, 고기 그 자체로는 금지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고기 자체를 금지된 것이라고 잘못 생각한다.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의 잘못된 양심의 가책은 고려되어야 한다고 권고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아직까지도 우상을 섬기던 관습에 젖어서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을 때는 그것이 참말로 우상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식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가게 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여러분의 지식 때문에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형제를 위해서 죽으시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이렇게 형제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결국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넘어뜨린다면, 나는 그를 넘어뜨리지 않기 위해서 절대로 고기를 다시 입에 대지 않겠습니다."(고전 8:13)

사도의 이 말은, 현대인에게도 좋은 묵상의 주제가 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손해도 끼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건전하지 못한 유흥으로 추문을 일으키고 영혼에게 해로운 독서를 한다. 이 사람들의 주장은 대부분 환상에 젖어 있는 경우이다.

1244 (나) 형제적 사랑에서 초보자들은 특히 자기를 모욕하는 이웃들을 용서하고 그의 잘못을 참아 주도록 노력한다.

ㄱ) 형제들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참아 준다. 우리는 형제들이 자신 때문에 감수해야 할 잘못을 갖고 있지 않은가? 그러는 한편, 우리는 형제의 잘못을 과장하고, 특히 우리에게 반감을 일으키는 사람의 잘못을 참아 주는가?

"너는 형제의 눈 속에 든 티는 보면서도 어째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더러 네 눈의 티를 빼내 주겠다고 하겠느냐?"(눅 6:41~42). 이처럼 우리는 언제나 형제적 사랑을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웃의 잘못을 단죄하기 전에, 우리 자신도 그들과 같은 잘못이 없는지를 반성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먼저 자신부터 형제적 사랑에 반대되는 잘못을 고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의사여, 네 자신을 고쳐라".

1245 ㄴ) 형제적 사랑은 모욕을 주는 이웃을 용서하고 원수와 화해하려 한다. 그리고 이 사랑은 우리가 고통을 주고 우리에게 고통을 준 형제들과 화해할 의무를 갖게한다. 예수님은 이 의무의 중요함을 주저 없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그 예물을 드려라."(마 5:23~24)

이 점에 대하여 보슈에(Bossuet)가 지적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가장 첫 번째 선물이, 형제와의 친밀하고 순수한 마음입니다. 그는 덧붙여, 성체를 배령(拜領)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사도 바울의 권고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화가 난 채로 밤을 지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적 사랑에서 화해의 기회가 왔을 때, 우리는 변명 없이 솔직한 대화를 통해 오해를 풀도록 한다. 그리고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 6:14~15)

1246 (2) 완덕으로 나아가는 진보자들은, 사랑 그윽한 예수님의 마음을 닮으려고 노력한다.

(가) 진보자들에게 사랑의 계명이란, 다름 아닌 형제적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의 특별한 징표가 된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 13:34).

이 계명에 대하여 보슈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중요한 사실을 덧붙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생각하지 않고 있을 때, 그분은 사랑을 통해 우리를 앞질렀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다가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불충실함과 배은망덕함에 대해 결코 불쾌해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거룩하고 행복하도록 하기 위해 아무런 사심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봉사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별한 징표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 13:35)

1247 (나) 또 진보자들은 구원자의 모범을 따르려 노력한다.

ㄱ) 구원자의 사랑은 언제나 친절하다. 우리가 그분의 뜻을 거슬렀을 때 그분은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롬 5:8)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임을 아시면서도 우리에게 오셔서, 환자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주님은 우리의 회개를 위해, 강도와 죄 많은 여자와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셨는데, 그것은 그분의 친절한 은총이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예고하고 낫게 하기 위해, 우리를 친절하게 초대하신다. "고생하혀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 11:28).

예수님은 우리의 불행을 아시고 도와 주시면서, 우리도 당신의 친절을 닮도록 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역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방문하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도와 주신다. 또 죄인들을 방문하여 그들이 조금씩 덕을 실천하면서 실망하지 않도록 도와 주신다.

1248 ㄴ) 구원자의 사랑은 동정적이다. 예수님을 따라 광야에 와서 배고픔으로 고통 당하는 군중들을 보신 주님은 그들을 먹이려고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행하신다. 그러나 특히 영적인 양식에 굶주리는 영혼들을 보았을 때, 주님은 그들을 동정하시고, 성부께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간청하신다.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마 9:38).

예수님은 충실한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을 놓아두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어깨에 메고 양 우리로 데려오신다. 주님은 죄인이 속죄할 표시만 해도, 즉시 당신은 죄인의 용서를 서두르신다. 또 예수님은 병자와 불구자들에 대한 동정으로, 많은 사람들을 낫게 하신다. 그와 동시에 주님은 영혼에게 건강을 돌려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다.

진보자는 주님을 모범으로 삼고, 모든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커다란 동정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진보자는 그들에게 우리의 경제가 허락하는 한 도움을 주어야 한다. 만일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는 다정한 말과 태도로 그들에게 용기를 주어야 한다.

진보자는 가난한 영혼들의 잘못에 대해 매정한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실천적인 봉사는 훗날 그들에게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다.

1249 ㄷ) 구원자의 사랑은 너그럽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당신은 그 아픔과 고통 그리고 죽음마저 승낙하셨다.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쳐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엡 5:2)

그러므로 진보자는 약간의 경제적인 손해를 감수하고, 또 병을 간호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아주 힘든 희생을 치르면서도, 형제에게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진보자의 사랑은 진심이고 호의적이여야 한다. 왜냐하면 불행을 도와 주는 마음은 어쩌면 주는 것보다 더 가치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에게 빵 한 조각을 주는 것보다 만일 가능하다면, 그들이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은 더욱 현명한 일이다. 선을 실천하면서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를 한다거나, 직접적인 방법으로 현명한 권고를 한다면, 이러한 사랑은 다분히 선교적이다.

이와 같은 열정적인 사도직의 의무는, 특히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모범적인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부과된다. 그러기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야고보의 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한 그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것이고 또 많은 죄를 용서받게 해 줄 것입니다."(약 5:20)

1250 (3) 완덕으로 나아가는 완전자는 자신을 제물로 바치면서까지 이웃을 사랑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ㄱ) 완전자들은 형제적 사랑을 위해 선교하는 일꾼들이다. 곧 그들은 형제를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지 않고도, 영혼들을 위해 끊임없이 일한다. 그리고 완전자들은 기도와 사도직과 휴식 속에서도 자신을 희생하면서, 그들에게 영적 생명을 준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말이다. "여러분을 위한 일이라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나 자신을 온통 희생하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이렇게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데 여러분은 나를 덜 사랑하려고 합니까?."(고후 12:15)

1251 ㄴ) 완전자들은 형제적 사랑과 사도직에 대한 봉사를, 때로는 서원이나 약속을 통해 의무화하기도 한다. 그리고 모든 형제들은 마치 봉사를 명령할 권리가 있는 장상으로 생각하게 한다.

ㄷ) 형제적 사랑은 거룩한 호의로써, 이웃의 작은 소망도 예견하고, 가능한 모든 봉사를 베푸는 것이다. 형제적 사랑은 때로 주어진 봉사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결과적으로 형제에게 기쁨을 주는 방법이다.

ㄹ) 끝으로 이 형제적 사랑은 원수들을 위한 특별한 사랑으로 나타난다. 이 사랑은 원수를 마치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실행하는 자로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형제적 사랑은 원수를 위해 특별히 기도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원수를 위해 선을 실천한다.

"잘 들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

이렇게 함으로써, 완전자들의 형제적 사랑은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 같이 햇빛을 비춰 주시는 분께로 다가갈 수 있다.

제3절 사랑의 원천이신 예수 성심

1252 (1) 예수 성심에 대한 간단한 고찰

지금까지 우리가 말한 사랑을 결론짓기 위해, 우리는 가장 완전한 사랑의 모범이고 원천인 예수 성심 속에서 사랑을 찾도록 독자를 초대하는 것이 좋다. 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승인 받은 연속적 기도에서, 우리는 사랑에 불타는 화덕처럼, 사랑과 선의 충만함을 간청한다. "불타는 사랑의 용광로‥‥ 선과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은 두 가지 주요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먼저 감각적인 요소로써, 말씀인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이루어 육화되신 마음이다. 그 다음, 하나님과 인간을 위해 강생하신 예수님의 사랑인 실체적인 마음으로 상징된 영적인 요소이다. 이 두 요소는 결국 하나일 뿐, 상징된 징표도 하나이다.

그러나 예수 성심으로 표현된 사랑은 형제적 사랑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신적 사랑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서 이 사랑은 신적이고 인간적인 작용으로 나눌 수 없이 일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성심의 사랑은 바로 형제를 위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여기에 형제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서 흘러 나오기에, 우리는 진정한 사랑의 원천을 예수성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성심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모든 사랑의 완전한 모범으로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덕을 포함하고 모든 것을 완전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상에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사랑을 본 받고 공로를 세우는 은총을 얻게 하셨다. 예수 성심은 우리가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하고, 모든 덕을 실천하게 하는 은총의 원천이며 공로의 원인이시다.

1253 (2)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원천이고 모범인 예수 성심 사랑은 자기 존재를 몽땅 선물로 주는 행위이다. 만일 사랑이 이와 같은 것이라면, 성부께 드린 예수님의 사랑은 얼마나 완전하였을까! 육화되신 첫 순간부터, 예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해 손상된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다.

예수님은 탄생에서부터 성전에 봉헌되는 순간처럼, 당신은 이 봉헌을 새롭게 하셨다. 나사렛의 삶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명하시면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증명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신적 권위를 부모님들 안에서 보았다. 그러기에 나사렛의 작은 집에서 끊임없이 성 삼위께 드리는 예수님의 흠숭과 순수한 사랑을 과연 누가 말해 줄 것인가?

예수님의 공적 삶 가운 데, 당신은 오직 아버지의 영광과 그리고 기쁨을 드리는 것만을 찾았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 8:29). 그래서 "나는 내 아버지를 높이 찬양한다"(요 8:49). 최후의 만찬(晩餐) 때, 예수님은 온 생애를 통해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셨다 "나는 세상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요 17:4).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갈보리에서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빌 2:8).

누가 감히 예수님이 온 생애를 통해 보여 주신, 보다 완전하시고 영원하신 그분의 사랑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또 누가 예수 성심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내적 사랑의 행위를 헤아릴 수 있을까?

1254 더 나아가, 누가 예수님의 완전하신 사랑을 설명할 수 있을까?

위드(J. Rudes)는, 성부께 드리는 예수님의 사랑은, 아버지와 아드님에게 알 맞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분에게 드리는 예수님의 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가장 완전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무한하신 아버지를 사랑하는 아드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신성과 인성의 결합으로 인식되는 예수성심은 아버지를 위한 영원한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천사들과 온 성인들이 영원히 사랑해도 다 할 수 없는 예수 성심의 사랑은, 매 순간마다 아버지를 더욱 한없이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사랑이 예수 성심과 일치하지 않고, 또 아버지께 자신을 드리지 않는다면 참된 사랑일 수 없다고 위드(J. Eudes)는 계속 말한다. "오 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 저는 당신이 아버지께 가지고 계시는 영원하고 무한한 사랑에 일치하기 위해 저 자신을 당신께 드립니다. 오 흠숭하올 아버지, 저는 당신 아드님의 무한하고 영원한 사랑에 저의 모두를 바칩니다‥‥. 그리고 당신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처럼 저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1255 (3) 형제 사랑의 원천이신 예수 성심

우리는 제1247항에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를 지적하였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하늘에 계시면서 지상에 있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ㄱ) 예수 성심은 성사를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성화시켜 주신다. 위드(J. Eudes)에 따르면, 그것은 "구세주의 성심이란 우리에게 마치 성성과 은총이 마르지 않는 샘과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은총은 신적 불꽃들과 같았습니다.

1256 ㄴ) 특히 성체성사는 예수 성심을 통해 당신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사랑의 징표이다.

① 예수 성심은, 마치 자녀들을 떠나지 않으시는 아버지처럼, 친구들과 함께 나누는 기쁨이 되는 친구처럼, 병자를 지키는 의사처럼, 예수님은 밤낮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
② 예수 성심은 우리를 위해 아버지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고 흠숭하면서, 항상 성체 안에 현실적으로 존재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은총을 끊임없이 구하고, 우리가 속죄하기 위해 그분의 공로를 아버지께 봉헌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랑하도록, 우리를 돌보시는 예수 성심의 모든 은총에 감사한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중재자의 일을 하십니다"(히 7:25)

③ 예수 성심의 사랑은 갈보리의 희생을 제대 위에서 우리를 위해 항상 새롭게 바치신다. 이미 제271항-제273항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은 당신 희생의 열매들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희생 제물을 봉헌할 사제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실행하신다. 그리고 희생 제물이 되시는 것만으로 끝내지 않으신다.

이미 제277항-제281항에서 보았듯이, 예수 성심은, 성체를 받아 모시는 자와 상통하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모두 내어주신다.

그리고 예수 성심은 우리와 당신 사랑의 감정을 생생하게 상통하기를 바라신다. 성녀 말가릿다 마리아는 성심의 영적 체험에 대한 느낌을 이렇게 표현한다. "예수 성심의 사랑은 너무 강렬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 열렬한 사랑의 불꽃을 자신 안에만 붙들어둘 수 없기에, 이 사랑을 널리 퍼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성심은 당신의 값진 보석으로 우리를 부유하게 하기위해 나타나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 성심은 성녀에게 당신의 마음과 일치하기 위해 그의 마음 안에 사랑의 불꽃을 심어 놓으셨다. 예수 성심은 우리 마음 안에 거룩한 사랑의 불을 놓으려고 이 세상에 오셨기에, 우리가 그 불을 켜는 것만을 열망하신다."라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눅 12:49)

1257 (4) 모든 덕의 모범이고 뿌리인 예수 성심

성서에서는 가끔 내적 마음을 외적 행동에 반대되는 인간의 모든 감정을 지칭하는 말로 표현한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야훼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 (삼상 16:7).

그래서 예수 성심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영혼의 내적 모든 감정들을 지칭한다. 우리는 중세기의 위대한 신비가들이 증거하는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을 잘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위드(J. Eudes)와 성녀 말가릿다 마리아와 같은 영혼들이다.

특히 이 성녀는 예수 성심을 채우는 사랑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성녀는 여러 저서에서, 우리에게 예수 성심을 모든 덕의 모범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성녀의 영적 지도자인 꼴롬비에르(Colombi?re) 신부는 봉헌에 대한 성녀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하나님께 대한 봉헌은 모든 축복의 원천이며, 예수성심을 흠숭하고 사랑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예수 성심의 봉헌을 위한 사랑의 주요한 덕은 첫째,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대한 깊은 존경과 큰 겸손으로 그분을 열렬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불행에서의 인내, 죄의 결과인 극심한 고통 그리고 예수님께 대한 깊은 신뢰입니다. 세째, 자기 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공감과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는 봉헌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이미 모든 덕이 사랑에서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제318항-제319항에서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완덕을 예수 성심의 사랑에서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 성심의 사랑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모범이고 모든 덕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1258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은. 올리에(M. Olier) 신부에 의해 설명되었고, 그 다음 성 슬피스(Sulpice)에 의해 실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로 인하여, 예수 성심의 내적 생명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신심과 만난다.

올리에는 예수 성심의 이 내적 생명인, "예수 성심의 사랑은 우리의 모든 감정과 자세와 관계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마음, 이웃에 대한 사랑, 자신으로부터의 이탈, 죄에 대한 두려움 등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우리의 감정과 자세는 예수 성심 속에서, 또 그분 안에서 성심의 사랑을 키워야 한다. 또 예수 성심 속으로 피신하기를 좋아하는 신심 깊은 사람에게, 올리에 신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이 그처럼 강하게 이끌리는 예수 성심 안에 하루에도 수없이 빠져들도록 하십시오‥‥. 예수 성심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마음이 정선된 자리입니다. 예수 성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은총을 주시고 통교하는 보물 창고입니다. 이러한 예수 성심에서, 모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또 다른 책에서 올리에(olier) 신부는 다음과 같이 보충한다. "예수 성심은 어떤 마음이신가! 온 땅 위에 넘치는 그분의 사랑은 무엇인가! 오, 모든 사랑의 풍요로운 그 원천이여! 모든 경건한 마음의 샘이 마르지 않는 깊은 심연의 사랑이여! 오, 모든 마음의 중심인 예수 성심이여! 오, 고통 당하시는 예수님, 저는 당신의 마음을 흠숭합니다.

저는 당신의 마음을 닮으려고 하지만, 당신의 성심이 황홀한 그 만큼 더 당신을 묘사할 수 없습니다. 저는 빛과 사랑과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 차 있는 하늘처럼 성심을 봅니다. 예수 성심은 아버지를 찬양하고 그 위대하심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십니다."

1259 결 론

예수 성심의 신심이 영혼 안에서 행복하기 위해, 다음 두 가지 중요한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과 속죄이다.

(1) 첫 번째 행복을 위한 실천은 사랑이다.

성녀 말가릿다 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사랑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게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타락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구해 주고 용기를 줍니다. 또 이 사랑은 자신들의 능력 안에서 예수 성심의 모든 영예와 영광을 이웃에게 돌려줍니다. 더 나아가 이 사랑은 마음 안에 신적 보물을 풍요롭게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랑은 자비와 은총과 성화를 통한 구원의 계획을 갖게 하였습니다.

이어서 성녀는 바르줘(Barge) 수녀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일한 예수 성심의 이 사랑을 사랑합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고, 많은 열정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특히 성체 안에서 끊임없이 당신 사랑을 불태우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성인이 되기 위해, 성인들 가운 데 성인이신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통받고 사랑하기 위한 마음을 갖고 있는 데, 누가 감히 성인이 되려는 우리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 성심의 순수한 사랑만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그분의 완전한 사랑만이, 우리가 당신을 기쁘게 할 방법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

1260 (2) 두 번째 행복을 위한 실천은 속죄이다.

예수 성심은 많은 사람들의 배은망덕으로부터 상처를 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배은망덕을 증거하기 위해 그분 앞에서 속죄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의 성사 안에서 우리가 행한 모든 잘못의 용서를 구하면서, 예수 성심의 아픔을 위로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죄 뿐만 아니라, 예수 성심을 배반한 모든 사람들의 잘못을 위해서도 속죄해야 한다. 더 나아가 자신이 알게 모르게 행한 예수 성심께 대한 신성 모독에 대한 속죄가 성심에 큰 위로가 되고 사랑을 회복하는 행위가 되어야한다.

1261 예수 성심의 행복을 위한 이 두 실천인 사랑과 속죄는 분명 우리를 거룩하게 할 것이다. 먼저, 사랑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 안에 우리를 일치시키면서, 그분의 덕성을 공감하게 한다. 그리고 이 사랑은 모든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준다. 다음, 속죄는 우리를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게 한다. 그리고 이 속죄는 우리의 열성을 부추겨서, 모든 시련을 사랑으로 인내롭게 받도록 한다. 이렇게 다져진,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은, 결코 나약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대신덕과 윤리덕의 실천을 통해 보다 사랑과 보속을 조화롭게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4편에서 이야기한 빛의 길에 대한 총체적인 개념이며, 끝으로 제5편 일치의 길로 나아가는 입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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