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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죄인과 더러운 죄인

누가복음 조용기 목사............... 조회 수 2493 추천 수 0 2009.07.11 17: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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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8:9~14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5년 7월 10일 주일 3부 설교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서론]

“의로운 죄인과 더러운 죄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18장 8절로 14절에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갔었습니다. 기도하러 갔으니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을 믿고 예배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은 바리새교인이고 또 다른 사람은 세리입니다. 그런데 바리새교인은 철저히 율법을 준수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고 자기 공적을 자랑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2절에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한다는 것 굉장한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일년에 몇 번 금식할까 말까하는데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소득의 모든 것을 다가지고 십일조를 반드시 드렸다. 그 행위에 흠잡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랑을 했어요.
누가복음 18장 11절에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흠잡을 데가 없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나는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저 함께 와서 뒤에 서서 예배드리는 저 세리하고도 같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만과 자기 우상화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죄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행위의 죄만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교만한 죄를 특히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이 바리새인은 자기의 공적을 자랑하고 자기 행위를 자랑했습니다. 교만과 자기 우상화를 했습니다. 이것은 정신적인 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위 의로운 죄인입니다. 성경에는 “무릇 마음이 교만하는 자를 야웨께서 미워하시나니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야웨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같이 성전에 예배 드리러온 세리는 자기가 죄인임을 실제 고백했습니다. 세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당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세금을 착취해서 자기도 부자가 되고 그중에 많은 세금을 로마 사람에게 바치기 때문에 민족 반역자로 생각했습니다. 죄인의 대표적인 대명사로써 세리를 취급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3절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이 세리는 자기가 공적 없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아무런 선한 행위를 한 것이 없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자기 행위는 죄뿐임을 자백했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깨뜨리고 하나님의 긍휼만을 바라는 더러운 죄인입니다. 바리새교인은 의로운 죄인이고 이 세리는 더러운 죄인입니다. 자기 교만, 자기 우상화하는 의로운 죄인보다 낮아지고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깨어져 하나님의 용서를 구한 더러운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입고 나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드렸는데 자기 자랑하는 바리새교인은 하나님께서 외면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죄를 고백하고 더러운 죄인인 것을 자백한 세리는 용서하시고 의롭다하시고 축복해서 내보내주신 것입니다. 성경에 주님께서 바리새교인을 보고 말씀하시기를 “너희보다도 세리나 창녀들이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정신적인 교만을 가지고 자기를 의롭다하고 남을 멸시하는 의로운 죄인들을 하나님은 굉장히 미워하십니다. 솔직히 깨놓고 더러운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자복하고 두 손 들고 나오는 이러한 사람은 주님이 용서하고 씻어주시고 의롭다하고 구원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대표적인 예로써 탕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한사람이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둘째 아들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인 것입니다.

[본론]

1. 둘째 아들 (더러운 죄인)

첫째로, 이 둘째 아들은 대표적인 더러운 죄인입니다.
그는 아버지 밑에서 일하기가 싫었습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귀찮았습니다. 아버지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미웠습니다. 아버지가 주인 노릇하는 밑에 종노릇하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독립하여서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내가 스스로 내 마음대로 선악을 분별하고 사는 주인이 되어야지 왜 아버지 밑에서 내가 종살이 해야 되느냐. 그래서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자기의 속한 분깃을 나누어 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1절로 12절에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아버지께 간청해서 자기 몫을 받고 난 다음에는 그는 그 돈을 다 정리해 가지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아버지의 그림자가 비취지 아니하는 아버지가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 하지 않는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했습니다. 돈도 있겠다. 그러니 친구들이 모여오고 아름다운 여인들이 전부 우상화 하여 주니까 그 속에서 그는 방탕하게 주지육림 속에서 살았습니다. 언제나 허랑방탕하면 기근이 다가옵니다. 사람이 허랑방탕하고 기근이 안다가오는 사람 보았습니까? 이 세상에서도 주지육림 속에 사는 사람치고 가난해지지 않는 사람 없습니다. 오늘 지구도 한가지입니다. 아담의 후예들이 지구의 자산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허랑방탕하게 지구자산을 낭비하고 있기 때문에 공기가 오염되고 물이 오염되고 산림이 훼파되고 자원이 고갈되고 온 세상이 점점 기근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요사이 석유자원 고갈로 말미암아 석유가 점점 값이 오르고 산업화에 크나큰 충격이 다가오고 있지 않습니까? 방탕하면 가난하게 됩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국제사회가 똑같습니다. 허랑방탕한 결과로 이 아들은 큰 기근에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나라에 기근이 다가오고 자기 개인적으로 기근에 처해서 호구지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따르던 친구들은 다 떠나가고 자기를 우상화하던 여자들도 다 떠나가고 자기는 먹고 입고 마시고 살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직장을 구하나 좋은데 구할 수가 없고 도시 사람이 농촌에 돼지 농장을 하는데 거기 돼지 치는 사람으로 고용이 되어서 갔습니다. 유대인은 가장 천한 직업이 돼지 치는 것입니다. 그는 돼지를 치면서 너무 배가고파 돼지 먹는 쥐엄열매라도 얻어먹으려고 하다가 돼지에게 물리고 발길로 채이고 짓밟히고 말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고달프고 괴로워질 때야 비로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부귀, 영화, 공명이 다 있을 때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허랑방탕하고 정욕과 탐욕을 쫓아 살았습니다만 헐벗고 굶주리고 가난하고 고통스러우니까 제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 우리 아버지 집에는 먹을 양식이 풍족한 품꾼들이 얼마나 많은 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되겠다.” 그래서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으니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품꾼으로라도 고용되어서 호구지책이라도 세워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깨어지고 항복하고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받들면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더러운 죄인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 둘째 아들은 더러운 죄인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창기들하고 다 먹어치운 죄인도 추악하고 더러운 죄인입니다. 깨어지고 회개하고 두 손 들고 아버지께로 돌아옵니다.
누가복음 15장 18절로 19절에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고달프고 괴로워지면 정신이 듭니다.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 때는 교만하고 오만해져서 자기의 진정한 상황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괴로워지면 자기의 본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70년대의 한 인기가수가 대마초를 피우다가 걸려서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3개월 동안 복역했는데 그곳에서 한 사형수에게 전도를 받았습니다. 이 사형수가 어찌나 진지하게 복음을 전하든지 그 태도에 감동을 받아 이 복음가수도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된 것입니다. 얼마 후 그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게 되자 사형수는 그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밖에 나가면 내가 세상에서 예수님을 위해 못한 몫까지 일해 주세요” 이 가수는 대마초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스스로 자기가 착하다고 생각하고 자기만큼 의로운 사람 나와 보라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사형수를 만나 전도를 받고 복음을 들으면서 점차 자신이 추악한 죄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에 대해 절망한 후에야 비로서 하나님께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후 그는 신학을 공부해서 현재 미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사형수가 구원받기 쉬운지 압니까? 사형수는 자신에 대해 절망했기 때문에 구원을 해주시는 예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절망하지 아니하면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의지하고 교만하고 자신만만해서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절망한 사람이 비로소 자기를 도와주고 건져 줄자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왜 감옥에 들어가면 밖에 있을 때보다 예수 믿기가 쉬운지 아십니까? 감방에 갇혀 있다가 보면 자신에 대해 절망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신의 처지가 고달프고 비참해지면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가수도 한창 인기를 얻고 활동할 때는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겼다가 감옥에 갇혀 절망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자 깨어지고 항복해서 주님을 구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비참한 상황에 처해서 깨어지고 항복해야 비로소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 둘째 더러운 죄인인 아들은 돼지농장에 가서 돼지를 치는 비참한 자리까지 낮아지고 난 다음에야 재정신이 들어서 자기에 대한 실망이 아버지께로 돌아오겠다는 회개의 마음을 일으켜 준 것입니다.
시편 34편 18절에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이사야 55장 6절로 7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죄를 자꾸 덮으면 언제고 그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죄를 주님 앞에 회개하고 자복하면 예수님 보혈로 씻어 버리면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십시오. 이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와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누가복음 15장 20절에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그는 아버지께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이제 아들이라 칭함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그런 고백을 해도 아버지는 거기에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식은 아버지가 과거를 문책하지 아니하시고 꼬치꼬치 캐어서 책망하지 아니하시고 무조건 받아들이고 품에 품고 사랑하여서 종들에게 말하기를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혀라. 반지를 끼워라. 신발을 신겨라.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얻었으니 우리 즐거워하자.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라”고 말한 것입니다. 과거를 묻지도 꾸짖지도 아니하시는 절대 무조건 사랑을 가진 아버지. 이가 바로 하나님 우리 하나님 아버지인 것입니다. 여러분과 내가 더러운 죄인이 회개하고 자백하고 깨어져서 돌아오면 하나님이 과거를 꼬치꼬치 캐묻지 않습니다. 과거는 하나님이 다 청산해 버리고 잊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현재 들어온 여러분을 끌어안고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으시고 의로운 옷을 입히시고 성령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시편 103편 12절로 13절에 보면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나이가 먹어도 늘 불쌍해요. 어제 우리 아버님 93세 생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 생신잔치를 제가 베푸는데 어머님은 또 92살입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님이 늘 저만 만나면 저의 건강 걱정을 하세요. 92살 먹으신 어머님이 70살 먹은 자식을 늘 어린아이같이 “야~ 너 건강해야지. 밥 잘 먹냐? 아휴, 밥을 잘 안 먹어서 내가 걱정이 되어 못살겠다. 밥을 좀 많이 먹어라” 그러더니만 “네가 심장이 튼튼해야 하나님 사업을 열심히 할 것이니 내 심장 확 뽑아서 너에게 줄까?” 그래서 내가 “어머니 늙은 심장 뽑아서 줘도 효과가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항상 불쌍히 봅니다. 90이 된 어머님이 70이 된 아들보고서 왜 불쌍히 여깁니까? 그래도 부모는 그런 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그와 같은 심정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보실 때 늘 불쌍히 여기신다. 그러므로 꼬치꼬치 과거를 캐서 꾸짖고 정죄하지 아니하신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만 너무나 고마워서 끌어 안아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사야 49장 15절에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여인이 젖 먹는 자식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늘 불쌍히 여기고 품에 안습니다. 여인이 자기가 낳은 적자를 잊어버릴지라도 나는 너를 잊어버리지 않겠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이 없으신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중에 나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405장 있잖아요. 이 찬송은 존 뉴턴이 작사했는데 그는 원래 노예상인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신앙이 좋아서 하나님을 잘 섬기며 아들을 위해서 늘 기도했지만 정작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프리카 노예를 잡아서 유럽에 와서 팔아먹는 극악무도한 노예상인이었습니다. 노예들을 상어떼에게 던져주고 상어떼가 노예를 깨무는 것을 보고 그 비명소리를 듣고 희희낙낙한 아주 흉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배가 거대한 풍랑을 만나서 파선지경이 되었습니다. 살 가망이 없었습니다. 사람은 위기에 처하면 본심으로 돌아온다고 이 사람도 그렇게 흉악한 사람이 배가 바다에서 파선지경에 이르니까 본심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어머니가 섬기던 하나님이여 내 어머니가 진실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했지 않습니까? 내 어머니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를 살려 주십시오. 내가 이 위기에서 벗어나면 이제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러자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파도를 멈춰 주셔서 배가 파선을 면하고 블란서의 한 해안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 길로 그는 전도자로 변해 있었습니다. 맨발벗고 걸식하면서 전국을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증거인이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가장 무지하고 가장 비천하고 가장 무참히 버려진 노예 중에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과거를 묻지도 꾸짖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에 감사하며 감격해서 살았습니다. 존 뉴턴같은 사람의 과거를 하나님이 묻고 꼬치꼬치 정죄한다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겠습니까? 노예상인인 그 흉악한 죄인의 그 과거를 물었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설수 없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온 그에게 하나님은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다 과거는 청산하고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죄를 옮기시고 품어 주셨습니다. 그 사랑에 존 뉴턴은 너무나 감동해서 이 찬송을 지은 것입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하나님의 사랑은 그 어떤 사람도 용서하고 품으십니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주님은 과거를 묻지 아니하시고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첫째 아들 (의로운 죄인)

둘째로, 이 농부가 기른 첫째 아들을 보십시다.
그 첫째 아들은 외면적으로 볼 때 정말 의로운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5장 25절에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왔다 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창기와 함께 아버지 재산을 다 허랑방탕하게 쓰고 있을 동안에도 맏아들은 집에서 밭에 나가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29절에 보면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지도 아니하고 아버지 명령을 충실히 순종하고 방탕하지도 아니하고 바르게 사는 의로운 아들입니다. 누가 봐도 맏아들은 착하고 충성스럽고 의롭고 훌륭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그는 의로운 죄인입니까? 육신적인 더러운 죄는 안 지었어도 정신적인 고상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공적에 잡혔습니다. “날 좀 보소. 나는 아버지를 떠나지 아니하고 밭에서 열심히 일한 사람입니다. 나같이 착한 사람 있어요?” 자기 공적에 잡히고 자기 자랑에 자기 스스로를 높였습니다. 나만한 의인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돌아온 동생에 대한 비평과 적개심을 가졌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온 동생을 미워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28절에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서 잔치상을 베풀었는데 노해서 분기충천해서 들어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30절에 보면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는 적개심으로 꽉 들어찼습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아무리 내가 의롭다고 해도 하나님의 법 앞에 세워 놓으면 죄인이 안 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내가 의롭다고 주장하면 하나님은 법으로써 다스립니다. 율법앞에서 의롭다할 육체가 없지요.
이사야 64장 6절에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 앞에 “내가 의로운 사람이요, 날 좀 보소. 내 의로운 삶을 인정해 주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말합니다. “야~ 내가 내 눈으로 볼 때 너의 의로움은 더러운 옷 같고 썩은 쇠폐한 나뭇잎사귀 같다.” 하나님의 눈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맏아들은 외면적으로 볼 때는 충성스럽고 헌신적이고 착한 아들 같지만 그는 마음, 정신 속에서는 탕자였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공적으로 나타내고 자기 자랑하고 돌아온 동생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지고 반발했으며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반항이 꽉 들어찼습니다.
누가복음 15장 29절에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아버지가 언제 나에게 잘해 주었습니까?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꽉 들어찼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아들을 위해서는 살찐 송아지를 잡았으니 이런 불공평함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아버지에 대해서 원망과 반항심이 꽉 들어차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적으로 방탕은 안했지만 정신적인 탕자였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했는데 동생이 회개하고 돌아왔으면 기뻐해야 될 것인데 미워하고 어마어마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섬겼으면서도 늘 마음속에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반항심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눈에 안 보이는 의로운 죄인인 것입니다. 결국 아버지는 깨어져 회개하고 아버지 뜻대로 살겠다고 돌아온 더러운 죄인을 자기 자랑과 공적에 자부심을 갖고 동생에 대한 비평과 적개심을 가지며 아버지를 원망하고 반항한 첫째 아들보다 사랑했습니다. 이것을 단단히 우리가 조심해서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둘 다 아버지 아들입니다. 둘째 아들은 더러운 죄인입니다. 허랑방탕한 세상이 다 아는 더러운 죄인이지만은 회개하고 깨어져서 두 손 들고 항복하고 나와서 아버지가 사랑해서 그를 위해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첫째 아들은 열심히 일하고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도 아니하고 방탕도 하지 아니하고 집도 안 떠났지만 그는 그 마음속에 돌아온 동생에 대한 원망과 적개심을 가지고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반항의 마음이 마음에 꽉 들어차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의로우나 속으로는 정신적으로 탕자였었습니다. 의로운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죄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결국 동생은 잔치에 참여했지만 의로운 죄인의 형은 스스로 그 잔치에 참여하지 않고 즐거움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그 맏아들은 외면해 버렸습니다. 둘째 아들은 품에 품고 즐거워하고 기뻐하였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자기 자랑과 자기 공적과 자부심을 갖고 이웃을 비평하고 이웃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며 하나님에 대해서 속으로 은근히 원망하고 반항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이 외면해 버리는 것입니다. ‘아~ 나는 의로운 사람이다. 다같이 교회 나와도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 나는 의로운 사람이다. 나는 깨끗한 사람이다’ 그리고 율법주의에 서서 남을 벗기고 남을 할퀴고 남에게 흙칠하고 남을 짓밟는 그러한 생각과 말을 하는 사람 하나님이 좋아할 줄 알지만 의로운 죄인을 하나님은 물리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죄를 자백하고 깨어지고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은 과거를 묻지 아니하시고 품어 주시는 것입니다.
20세기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 칼 바르트는 이제까지 깨달은 가장 위대한 신학의 진수가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것이 신학의 가장 큰 진수라고 말했습니다. 바르트는 그 어떠한 위대한 지식보다도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깨달은 것이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고 그는 말했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큰 지식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살 길

셋째로, 우리의 살길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의롭고 업적과 공적이 있다고 자기를 내세우면 절대로 안 됩니다. 만 가지 공을 세워도 자기 자랑 한마디 하면 그 공은 하나님 앞에서 다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첫째 아들처럼 의로운 죄인이 되어 하나님께 외면을 당합니다. 우리 자신이 더러운 죄인임을 고백하고 자기를 완전히 깨뜨리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항복하고 나올 때 하나님은 두말하지 않고 과거를 묻지 않고 용서하시고 우리를 품어 주시고 의로운 옷을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우화를 읽고 속으로 웃었습니다. 연못에 개구리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은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황새가 부러워서 못 견디겠습니다. “야~ 우리도 좀 날아봤으면 좋겠다.” 그런데 하루는 그중에 똑똑한 개구리 한 마리가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었습니다. 황새를 이용해서 하늘을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황새를 찾아가서 부탁했습니다. “황새님! 황새님! 나도 좀 공중을 날고 싶으니 나뭇가지 하나를 당신 입에 물고 다른 끝은 내가 물터이니 날라가면 황새님 덕분에 나도 공중에 좀 날아보고 싶습니다.” “아~ 그렇게 하자.” 나뭇가지 하나 가져서 한쪽은 황새가 물고 한쪽은 개구리가 물고 황새가 쏵 날라오르니까 하늘로 휘~익 날아오르니 기분이 보통 좋지 않습니다. 온천하가 눈 안에 다 들어옵니다. 동료 개구리들이 그 모습을 쳐다보니 기가막히거든요. 우물에 헤엄치던 자기 동료가 하늘을 난다 말입니다. “야~ 굉장하다. 얼마나 멋있느냐. 이렇게 좋은 아이디어를 누가 내었느냐?” 그 말을 듣자 내가 그 아이디어를 냈다고 자랑하고 싶어서 못견뎌가지고서 그만 “내가 내가~” 그러다가 가지를 놓아 버려서 그만 땅에 떨어져서 박살이 나서 죽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자기 자랑만 안했으면 끝까지 공중여행을 하고 무사히 내려왔을 것인데 동료들이 이 좋은 아이디어를 누가 내었냐니까 자기 자랑하고 싶어서 못 견뎌 가지고서 기어코 나무가지를 물고 있지 아니하고 “내가~ 그 아이디어를 발견했다”고 하다가 떨어져 죽었습니다. 굉장히 의미심장한 우화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 주셔서 하늘 높에 난다고 하여도 내가~ 하고 자랑하고 교만하면 그대로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내가 내가 하는 것은 의로운 죄인입니다. 자기는 의롭지만 속이 썩어 문드러진 죄인입니다. 의로운 죄인은 하나님이 물리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러운 죄인 아에 자기를 깨뜨리고 완전히 하나님께 항복하고 주님만 바라보는 그 죄인은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품에 품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8절로 9절에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로 6절에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조건이 없습니다. 남녀, 노유, 빈부, 귀천 할 것 없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 과거를 묻지 아니하시고 무조건 구원해 주시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무조건 사랑인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아무런 의로운 행위도 보지 아니하시고 무조건 예수믿고 나오는 사람마다 용서하고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의지할 것은 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느 부흥집회에서 흑인이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은총에 대해서 간증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죄의 굴레와 죄책감에서 해방시켰는가에 대해서 간증을 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한 행동과 노력에 대해서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사회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간증해 주신 형제님께서는 자신이 받은 구원에서 하나님이 맡으신 역할만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 경험에 비춰보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 전에 인간이 해야 할 노력이 있습니다. 형제님 당신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셨습니까?” 그러자 간증을 했던 사람이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참! 내가 한일에 대해 말씀을 드리는 것을 깜박 잊어 버렸습니다. 나는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내가 한일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반항하고 죄를 짓는 일만 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한일은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일만 하고 죄짓고 반항한 일만 했고 이런 죄인이 예수님이 오셔서 무조건하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 흑인의 간증은 참말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잘해서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습니까? 한번 내놓아 보세요. 여러분이 자랑 안겠지만 내놓아 보세요. 하나님은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 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주셨습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무슨 의로운 행위로 값 주고 사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의 부모님이 여러분에게 10억짜리 집을 주셨는데 여러분에게 ”아이고 아버지 어머니! 이것 공짜로 받기가 미안하니까 내가 사겠습니까!“ ”얼마 줄래?“ ”1원 드리겠습니다.“ 10억짜리 집을 1원주고 사겠다면 얼마나 모욕스러운 일인 것입니까? 그보다 모욕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데 여러분의 더러운 행위 몇푼 내가지고서 그 값을 지불하려면 하나님에 대한 모욕도 이만저만 모욕이 아닙니다. 우리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은 은혜로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습니다. 햇빛을 돈으로 계산하지 못합니다. 너무나 값이 비싸기 때문에 공짜로 받는 것입니다. 공기도 돈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짜로 받아 쉬는 거에요. 부모님의 사랑을 돈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그냥 공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그 사랑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행위로써 계산할 수 없어요. 대가를 지불할 수 없어요. 은혜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도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한 것은 죄지은 것 빼놓고는 아무것도 없지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한없는 은혜를 우리는 잊으면 안됩니다.
에베소서 2장 8절로 9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가 잘 아는 성자 프랑시스코의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제자 한 사람이 기도하는 중에 환상으로 천국을 구경했습니다. 그곳에 크고 작은 보좌들이 쭉 늘어 있는데 그중에서 유달리 크고 화려한 한 보좌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는 천사에게 이 보좌가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천사는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프란시스코의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제자는 프란시스코의 자기 선생이라는 것을 알지만 너무나 보좌가 아름답기 때문에 시샘이 났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프란시스코가 얼마나 겸손한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선생님! 선생님은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뜻밖에도 프란시스코가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일세. 가장 큰 죄인이야” 그러고 대답했습니다. 그 제자가 “뭐라구요? 선생님 그것은 위선이요, 거짓입니다. 세상에 얼마나 나쁜 사람이 많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 비교해서 어떻게 선생님이 가장 큰 죄인이라고 말씀합니까? 그런 위선적이고 거짓말 하지 마세요.” 그러자 프란시스코는 정색을 하고 다시 이 제자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습니다. “자네가 나를 잘 몰라서 그러네. 나는 참으로 큰 죄인이야. 만일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그 큰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푸셨다면 그들은 모두 나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걸세. 오늘 내가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내가 된 것일세.” 놀라운 말씀입니다. 성 프란시스코는 가장 악한자요, 가장 큰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로 변화를 받아서 현재 내가 되었다고 그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습니다. 자랑하지 마세요. 여러분과 제가 오늘 구원받아 하나님 앞에 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이 무조건 사랑과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자기를 완전히 깨뜨리고 하나님께 항복하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합니까? 우리 힘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았어도 이 땅에서 우리 힘으로 신앙생활 못해요.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사 우리를 도와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또 다른 보혜사를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보혜사란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항상 우리 곁에 계신 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아버지가 서재를 1층에서 2층으로 옮기는데 책을 잔뜩 들고 2층에 가있는데 아래층에서 어린아이가 죽는 소리를 합니다. 놀래서 계단을 뛰어 내려가 보니까 막내 어린아이가 아버지가 책을 들고 가니까 자기도 아버지를 도와서 책을 2층으로 나르겠다고 자기 몸집만한 사전을 안고서 못 일어나고 사전에 깔려 가지고서 고함을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너무 귀여워서 어린아이가 사전을 함께 안고서 2층을 올라갔습니다. 어린아이는 사전이 무거워서 거기에 깔리지만 아버지는 어른이기 때문에 사전과 어린아이도 함께 안고 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우리는 힘이 약해서 짊어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깔려서 이 세상 죄악에 깔려서 비명을 지르지만 성령은 우리를 함께 안고서 천국으로 데려가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못가도 성령님은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못 메어도 성령님은 짊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우리의 힘으로 살지 않습니다. 성령이 와서 우리 연약함을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생활, 심적인 생활, 육체적 건강, 사회, 생활을 돕는 자 보혜사 성령께서 항상 같이 해주셔서 붙들어 주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믿고 천국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교회 나오신 것도 성령이 도와 주셔서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마귀의 유혹과 시련을 이길 수 있는 것도 성령이 도와주시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통해서 끊임없이 은혜를 베푸시고 능력으로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디도서 3장 5절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하나님의 성령께서 매일같이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해서 구원받은 것이지 여기에 우리 자랑 절대로 하면 안 됩니다. 이 바리새교인처럼 나는 한 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를 다 드리고 나는 저 사람처럼 토색하거나 방탕하거나 음란하지 아니하고 저 세리 같지 않습니다. 그런 자랑하다가는 자기는 의롭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엄청난 죄인으로 생각합니다. 의로운 죄인은 하나님께 버림을 당합니다. 그러나 세리같이 가슴을 치고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공적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고 나는 죽을 죄인이요. 용서해 주십시오.” 회개하고 돌아온 그 사람은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우리 옛사람 즉, 거짓 하나님으로 행세하고 자기를 우상화하여 자랑하고 주께 세우는 의로운 죄인으로 교회만 왔다 갔다 하면서 하나님께 외면당하고 버림받지 말고 자기의 죄인 됨과 절대적인 무능력자임을 고백하고 옛사람의 십자가에서 심판하고 폐기처분하고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오직 믿음, 오직 순종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에 감격하여 뜨거운 감사로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자랑할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사랑밖에 자랑할 것이 없고 예수님의 은혜밖에 자랑할 것이 없고 성령의 감화, 감동밖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행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행하게 해주셨지 여러분이 잘나서 행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랑 경자 한마디에 만사가다 폐기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17장 7절에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의로운 죄인 되지 말고 더러운 죄인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정신적으로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한 사람 하나님은 무서운 죄인으로 취급하십니다.
의로운 죄인이 되지 말고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참으로 잘못된 더러운 죄인인 것을 고백하는 우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맏아들처럼 겉으로 의로운체하나 속으로 탕자가 되지 말고 둘째 아들처럼 탕자였으나 진실로 깨어지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더러운 죄인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여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변화되고 구원받는 것을 알고 항상 삼위일체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미하며 믿고 영광을 돌리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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