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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5:12∼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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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임영수 목사 |
참고 : | 주님의교회 주일낮 예배//1998. 10. 4 |
신구약 성서에는 인류를 대신하는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구약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과 다른 한 사람은 신약 성서에 등장하는 예수입니다. 바울은 구약의 아담을 첫째 아담으로 예수를 제이 아담으로 부릅니다. 아담이라는 말의 뜻이 한 개인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이기 보다 인류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담은 인류를 대신하고 예수 역시 인류를 대신합니다. 그러나 아담과 예수가 대신하는 인류는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첫째 아담이 대신하는 인류는 죄와 죽음 지배 아래에 있는 인류이며, 예수는 그것을 극복한 새로운 인간입니다. 아담은 옛 시대의 인류를 대신하고, 예수는 새시대의 인간을 대신합니다.근세에 서구 사회에서 예수를 등장 인물로 하는 영화, 뮤지컬, 소설들이 심심치 않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중문화 속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예수는 대부분이 첫째 아담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를 주인공으로 한 대표적 소설 하나를 꼽는다면 희랍의 작가 카잔차키스의 "최대의 유혹을" 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작가는 예수를 한 구도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는 십자가상에서 잠시 정신을 잃고 꿈을 꾸게 됩니다. 예수는 꿈속에서 그가 지나온 날들을 회상하는 가운데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로서가 아니라 한 평범한 인간으로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살아간 인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드디어 예수는 꿈에서 깨어나 그것을 부인합니다.
교회가 예수를 주인공으로 한 대중문화의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예수의 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그러한 예수상을 받아 드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사탄적이거나, 그렇지 않다를 떠나서 오늘의 세속 문화의 관점에서 그려낸 예수상은 우리가 희망하는 참 인간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것이 그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첫째 아담으로 대신하고 있는 인류는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에 있는 희망이 없는 인간상입니다. 그러한 인간상은 그의 부정적인 내면의 의식들인 미움, 시기, 질투, 허무, 무의미, 적대감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그들이 연출하는 부정적인 인간 행위들은 살인·폭력·강도·성적 방종·마약 중독·알코올 중독·거짓·불의 등입니다. 물론 도덕적인 양심이나, 법의 통제 아래서 인간적인 양식을 지켜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 역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죽어 갑니다. 이러한 인간을 대신하는 인간상으로서 성서에서는 첫째 아담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편 제이 아담으로 예수가 대신하는 새 시대의 인간상은 이러한 어둡고 절망적인 삶을 극복한 새 인간을 대신하는 참 인간상으로 나타납니다. 새 시대 새 인간을 대신하는 예수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완전히 극복하고 새로운 도전적 삶의 모형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첫째 아담의 삶의 자리를 도피해 깊은 산 속에서 도를 닦아 해탈한 인간이 아닙니다. 제이의 아담인 예수는 첫째 아담의 낡은 인간 형태의 삶을 완전히 십자가에서 종결짓고 부활의 새로운 인간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에게서 나타난 새 인간상은 첫째 아담이 하나님께 복종해 가는 삶의 실패로 도달하지 못했던 것을 예수는 하나님께 온전한 복종의 삶을 통해 실현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첫째 아담이 대신하는 인간의 어둡고 절망적인 삶의 양태들은 하나님께 복종해 가기를 포기한 인간상입니다.
첫째 아담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제이 아담인 예수가 이 세상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인간이 죄를 지으면서도 죄 인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인간이란 그저 한평생 그렇게 살다 죽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조금 안목이 트인 사람은 영혼이 불멸하다 믿고, 죽을 때 생전에 사용하던 집기들을 무덤 속으로 가지고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이 아담인 예수가 오심으로 인간이 살아야 할 본래의 삶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본래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하나님, 이웃, 자연과 함께 특유한 존재 양식을 가진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의 동역자로 부름 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자신이 그러한 새 인간상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유명한 전기 작가 로망 롤랑은 유럽에 만연했던 비루한 물질주의와 회의주의 사조의 타락하고 썩은 분위기 속에서 마비되고 있는 유럽을 바라보면서, 영웅적 이상주의에 사로잡혀 한 위대한 영웅을 그 시대에 내놓습니다. 로망롤랑에 의해 그 시대 정신적으로 위대한 사람으로 제시된 인물이 악성 베토벤입니다. 로망롤랑이 제시한 영웅 베토벤은 억압된 정신의 해방을 기다리는 모든 불행한 사람들의 반려자로, 인간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사람이 되고자 전력을 다하며, 성실성과 위대성을 통해 인생이란 고뇌 속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아가는 인간을 대신하는 영웅적 인간상으로 베토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로망롤랑은 베토벤을 통해서 불행 가운데서 고통 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줄려고 했습니다. 실제로 베토벤 자신이 그에게 찾아온 불행을 극복하고 승화시켜 나아가는 그의 투쟁의 모습이 그의 교항곡 운명·영웅·환희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가 만약 예수의 전기를 쓴다면 그 전기에 등장하는 인간 예수를 억압된 정신의 해방을 기다리는 모든 불행한 사람의 반려자인 동시에 해방된 자로, 인간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삶의 길을 걸어간 참 인간의 모형으로서, 인생이란 고뇌 속에서 그것을 걸머지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한 어린양으로 묘사할 것입니다.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그는 깊은 명상 가운데서 도를 깨친 도인도 아닙니다. 예수는 믿음의 창시자시며, 믿음의 완성자이십니다. 예수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복종해 가는 인간상에 대한 가능성과 희망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키신 분이며, 그러한 믿음의 완성자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통해서 갖게 된 새 인간의 길은 율법이나, 도덕주의적인 인간 실현의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치유되어 가고 온전케 되어 가고, 자신을 부인하며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해 가는 인간상입니다. 예수는 그러한 인간의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대중문화 속에 등장하는 첫째 아담으로서 예수상을 거부하게 됩니다. 만약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그들이 희망하는 인간상이 대중문화 속에 등장하는 예수와 같은 유형의 인간이라면 그것은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죽음 가운데서 다른 사람들 보다 좀더 편하게 살려고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새로운 존재 양식을 가진 새로운 희망의 인간상으로 형성되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새 인간상의 완성자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그러한 삶의 완성자이 실 뿐 아니라, 그러한 인간상으로 되어 가는 길을 열어 놓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가 인류의 해답이며 희망이라는 것은 바로 그러한 뜻입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희망적인 현실을 경험해 가고 있습니다. 이 세속 사회에서 교회는 그러한 새 인간상을 보여주는 공동체입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 상업에 크게 실패, 좌절한 사람이 목사와 상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받는 고통에 대해 말하면서 "이제 제 인생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저를 이런 인생으로 만드셨나요?"라고 절규했습니다.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님, 하나님께서 형제님의 인생을 다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형제님의 인생은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무조건 하나님의 일에 불평하지 말고 고난에 나타난 뜻을 헤아리십시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회개하며 인생을 재출발했고, 얼마 안 있어 청중 앞에서 다음과 같이 간증했습니다.
"고난은 끊임없이 인생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죄나 실패로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인간으로 부름 받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고 부활의 능력 가운데서 살아가는 새 인간으로 부름을 받고 있으며, 그러한 인간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 때문에 낙심하거나, 고난 때문에 좌절하거나, 죄 때문에 우리의 생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안에서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이러한 희망과 믿음은 우리 자신의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의 능력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희망하는 그 희망의 내용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불의·거짓·권모술수·폭력·생태계의 파괴·자기 학대와 같은 낡은 존재 양식을 거부하는 것은, 우리는 그러한 존재 양식으로 부름 받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모형으로 바라보고 나아가는 인간상은 제이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가 신학교 졸업반 때 `내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된다면 어떤 목사상으로 되어 갈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마음에 작정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시간까지 하나님의 손안에서 되어 가는 목사가 되겠다는 것으로 결론을 얻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진정 희망을 가질 수 있는 현실이 아닙니다. 자연 환경은 모두 파괴되어 가고 있고 인간의 존재 양식들은 진정 비관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희망은 첫째 아담에게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죄와 죽음이 어떻게 그 종말을 맞았는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부활에서 하나님의 새 창조가 무엇인가를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첫째 아담의 운명으로 내버려두시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새 사람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응답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권면 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 : 1∼2 개역 개정)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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