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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후4: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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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5년 10월 30일 주일 2부 설교 |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서론]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나?” 이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우리가 심한 고난을 당할 때 헤쳐 나갈 방도가 없을 때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고 말합니다. 또 그럴 때 격려하는 말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고 우리가 말을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이러할 때 무엇이라고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는 우리는 질그릇 같은 인생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질그릇이지만 우리 속에 보배로운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보통 질그릇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보통 질그릇입니다. 아무렇게나 취급당할 수도 있고 깨어질 수도 있습니다만 믿는 자들은 질그릇은 질그릇이되 그 속에 보배로운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것입니다.
[본론]
1.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첫째로, 예수님이 속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 질그릇 같은 인생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사면초가고 완전히 우겨 싸여도 실제는 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적군이 사방으로 포위할 때 이제 피할 길이 없다고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을 때도 실상은 우리는 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때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을 봐서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던커크는 도버해협에서 영국을 바라보는 프랑스 항구로 오늘날에는 인구 7만이 거주하며 전자 및 조선과 각종 제조업이 발전한 도시입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0년 5월 하순 영국군을 비롯한 연합군 30만 명이 바로 이곳 던커크에서 독일의 기계화 부대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 30만 명이 전멸하면 구라파는 독일의 손에 떨어지고 영국까지도 독일의 손에 떨어지게 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의 처칠 수상은 전 국민에게 기도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자신도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성가대 앞에 엎드려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했습니다. 사람이 절망에 처하고 인간의 수단과 방법이 다 끝나면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처럼 전 영국 국민이 모두다 교회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엎드려 기도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 결과 갑자기 던커크만 일대에 큰 폭풍우가 다가와서 비바람이 치고 파도가 높았기 때문에 영국의 30만 군대가 포위된 그 하늘에 독일 비행기가 뜰 수가 없어서 폭격을 못했습니다. 그리고 던커크만에 진치고 있던 독일 잠수함이 다 철수를 해버렸습니다. 그리고 5월 24일 영국의 모든 작은 배들이 연합군 구조의 임무를 띠고 순식간에 던커크만으로 들어갔습니다. 때를 같이하여 독일의 기계화 부대인 구데리안 장군의 지휘 아래 던커크 마지막 방어선인 운하를 깨치고 쳐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히틀러가 구데리안 장군에게 즉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역사가들에게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사건들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이것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국 국민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폭풍우를 보내셔서 독일의 비행기가 뜨지 못하게 하고 던커크만에 있는 모든 잠수함이 철수하게 하고 난 다음 기계화 부대가 진격해 들어오니 히틀러의 마음을 움직여서 공격을 준비하고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포위되었던 연합군은 6월 4일까지 11일간의 철수작전으로 영국군 19만 8천명, 프랑스군 1만 4천명, 벨기에군 등 33만 8천명, 총 693척의 작은 배들에 의해서 구조되었습니다. 이처럼 작은 배들의 힘을 모아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영국의 던커크 철수작전은 역사상 명예의 작전으로 불립니다. 그때에 철수한 30만 명이 영국에서 재정비하고 애굽으로 진출해서 결국엔 독일멸망의 시초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적군이 사방으로 포위하여 이제 피할 길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적군이 스스로 포위를 풀게 하는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하나님의 자녀를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계신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기 때문인 것입니다. 죄와 마귀, 병과 가난, 죽음이 포위한 인생입니다. 우리가 어느 곳을 보아도 죄와 마귀와 병과 가난과 죽음이 우리를 겹겹이 포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을 떠날 수가 없고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을 칩니다. 과연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우리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저주를 다 짊어지시고 힘껏 싸워서 그 몸을 찢고 피를 흘려 다 이기시고 내가 다 이루었다고 외치신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죄를 멸하시고 세상과 마귀를 이기시고 질병을 속하시고 저주와 가난을 짓밟으시고 죽음을 폐하시고 다 승리를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포위망은 무너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실제로 현재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2천년 전에 포위망은 이미 무너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도 죄의 포위망은 무너지고 질병의 포위망도 이미 무너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성령이 오셔서 죄와 사망이 우리를 둘러 진 쳐도 그 포위망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버리고 말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주님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저주가 우리를 겹겹이 둘러싸도 저주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버리고 마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우리를 포위해도 주님은 사망을 멸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으로 채워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물질적인 세계가 영적인 세계를 포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손을 내밀어서 공기를 포위해도 공기가 포위되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와서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과 더불어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마음속에 세상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하늘이 들어와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와서 계신 것입니다. 성경 누가복음 17장 21절에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영적 천국이 임하여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4절에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하늘이 임하여 계시고 우리는 하늘을 품고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하늘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와서 계시고 천군 천사들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안에 계신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으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우리가 싸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2.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둘째로,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므로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다. 답답한 일이야 얼마나 많이 당합니까? 부부간에 갈등, 자식을 기르는데 어려움, 이웃 간의 갈등, 사회생활에 갈등, 우리 생활은 일평생을 통하여 갈등천지입니다. 그러나 갈등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우리가 낙심해서 거꾸러질 줄 알아도 7전 8기하여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폐아를 길러내 세계장애인선수권대회에서 수영 금메달리스트를 만든 김진호 선수 어머니의 간증을 몇 주 전에 제가 들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 아들이 자폐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너무나 절망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녀이면 답답한 일을 당하면 가출을 할 수도 있고, 가정이면 남편하고 갈등에 처하면 이혼을 할 수도 있지만 자식이 자폐아니 탈출구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식과 운명을 같이하여 동반자살 할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함께 믿을 것이냐 그 갈림길에서 동반자살 대신에 믿음의 길을 택하고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같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4년간 하나님께 주야로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여, 자폐아 된 진호를 고쳐 주옵소서.’ 4년 동안 기도해도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4년 만에 기어코 답답하여 좌절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 자녀를 사랑하라. 내가 진호를 사랑하니까 내게 맡겨버리고 내가 기르는 데로 너도 진호를 사랑하고 따라가라!’ 그 순간 회개기도가 쏟아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아~ 내가 진호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주님이 더 사랑하시고 주님이 이 아들을 책임지겠다고 하시니 나는 주님을 의지하고 진호를 사랑할 수밖에 없겠구나!’ 그는 하나님께 회개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고통스러워 몸부림쳐 봤을 뿐 단 한번도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참된 사랑과 용기와 지혜를 주옵소서.’ 그때부터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기 시작해서 수원에 있는 김장환 목사님이 경영하는 지체아 학교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지체아 학교에 입학을 시키려니까 T/O가 다 차서 입학을 못시킨다고 해서 “나는 여의도순복음교회 나가는데요.” 하니까 김장환 목사님 아드님이 “그러면 조용기 목사님 싸인만 받아오면 넣어 주겠다.” 그래서 제게 왔어요. 그래서 제가 넣어달라고 싸인을 해줬더니 특별히 지체장애자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를 하고 그 기능을 발전시켜서 수영을 하고 오늘날 세계장애인올림픽에 가서 수영 1등을 하고 금메달을 타게 된 것입니다. 비록 자폐아로써 그 어머니가 그를 데리고 좌절했지만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너는 사랑을 같이하라. 내가 그 아이를 위해서 예비한 길로 이끌터이니 너는 사랑하고 따라가라’고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듣고 마음에 낙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이가 하늘에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내가 낙심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하면 그러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이 내 속에 계시고 하나님이 처음과 나중이 되셔서 나의 일생을 다 알고 계시고 예비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낙심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 되시고 처음과 나중이 되시고 시작과 끝이 되셔서 우리의 일생을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안보이고 귀에는 안 들리고 마음으로 알 수 없습니다. 도대체 이러한 어둡고 캄캄한 길에 무엇을 예비해 놓았을까 의심하겠지만 우리보다 지혜와 총명이 뛰어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을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비한 것을 믿고 따라가면 우리가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우리에게 선의를 가지고 선으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다는 것은 말뿐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증명된 사랑인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죄인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고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절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하나님은 우리 속에 와서 계시고 우리와 인생을 함께 살아주십니다.
성경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사시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을 베풀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것이고 구원은 우리가 어려운 고난에 처했을 때 건져주는 것입니다. 값없이 하나님은 그 권세와 능력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건져 주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정말 답답한 일을 당해도 실상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셔서 은혜를 베푸시고 건져주시므로 마음속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9절로 10절의 간증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와 같은 역설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 속에 예수님이 들어와 계시고 하늘이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예수님, 성령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고 은혜 베푸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므로 답답한 일 당할 때 주님 앞에 나가서 기도하면 진호엄마가 하나님께로부터 음성을 듣고 용기를 얻은 것처럼 여러분 우리도 마음속에 성령의 음성을 듣고 용기를 얻고 낙심하지 않고 긍정적인 마음의 자세로써 인생을 살아갈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3.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셋째로, 핍박을 당해도 버린바 되지 아니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은 우리를 버리려고 핍박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혹은 세계에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해서 버리려고 하지만 우리 속에 예수님이 들어와서 우리와 같이 계시고 주님이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핍박을 당해도 버린바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핍박당한 유대민족의 역사를 보십시오. 유대민족은 어떻게 되었든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이삭과 야곱을 택하시고 그 후손들은 비록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겼으나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시면 후회함이 없다고 하나님이 징계를 하셔도 택한 자식은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자식을 낳으면 부모의 마음에 고통을 주어서 부모가 나중에는 탄식하고 자식 낳은 것을 후회하고 채찍으로 때리고 혹은 쫓아내더라도 그가 우리의 자식인 것은 부인할 수 없고 거기에 대한 사랑과 긍휼을 부모가 늘 가지고 있는 것은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우상숭배로 심판을 받아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당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남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멸망당했습니다. 그 이후 70년 만에 다시 해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주후 70년 로마에 박멸을 당하고 온 천하에 풍비박산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나라 없는 민족으로 2천년 동안 방랑하며 엄청난 핍박을 받았어도 유대인들은 버린바 되지 않고 지금도 살아남았습니다.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았던 바벨론은 온데간데없고 앗수르도 사라진지 오래고 메데 파사도 없어지고 로마도 없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을 짓밟던 구소련 공산주의자들도 없어졌고 6백만 유대인들을 학살한 독일 나치도 사라졌습니다만 유대인들은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끈질긴 민족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들과 같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지요. 엄청난 핍박을 당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9절의 말씀대로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온 세상이 악한 마귀 안에 있기 때문에 마귀는 어찌하든지 천국 가는 주막인 교회가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교회가 없어야 구원받는 사람이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북한 땅에 교회가 없는 것은 교회가 있으면 천당이 임하기 때문에 마귀가 점령하고 있는 곳에 천국이 임하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파괴하고 교회의 존재를 무시해 버리고 말지요.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유대와 사마리아를 석권하고 나가서 구라파에 복음이 전파되고 로마에 복음이 전파되자 마귀는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로마의 10대 황제가 결심하고 연속적으로 핍박을 했습니다. 국력을 기울여 처참하게 예수교인들을 잡아서 원형극장에서 짐승들과 싸워서 죽게 하고 나무에 달아 기름을 붓고 횃불로써 태우기도 한 것입니다. 네로황제로부터 시작해서 디오클레시안 황제까지 3백년간 어마어마하게 교회를 핍박하고 교인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3백 년 동안 국력을 기울여서 교회를 훼파하고 기독교인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인 주후 313년 밀라노칙령을 내려서 기독교를 공인하고 392년 데오도시우스 황제 때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해서 온 로마제국 치하에 있는 나라들이 국가의 명령에 따라 예수를 믿도록 변화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두들겨서 잿더미를 만들어 불씨가 다 꺼졌다 했는데도 불구하고 또 확 불이 타오르는 것이 기독교 복음인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 우리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아무리 우리를 핍박해도 속에 있는 예수님의 불길을 끌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국의 기독교 역사와 그 핍박을 보아도 알 수 있지요. 대원군 시대에 프랑스 선교사 12명중에 6명이 순교를 당하고 예수 믿는 사람은 6촌까지 처형을 해서 대원군이 8천명의 기독교 신자들을 가톨릭신자들을 처형했습니다. 참 우리 조상도 어마어마하게 나쁜 짓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6촌까지 다 죽였어요. 그래서 한국의 기독교의 불씨를 완전히 꺼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불씨가 꺼졌나요? 일정 30년 동안에 일본 사람들이 2백 교회를 폐쇄하고 2천여 명의 성도들을 투옥시키고 죽이고 고통을 가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와서 아마테라스 오미가미 신을 섬기라고 하고 교회당 십자가 위에 일본 신단을 설치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게 했습니다만 교회가 망했나요? 일본제국주의는 망해도 교회는 안 망하고 살아있는 것입니다. 북한의 공산당이 들어오고 난 다음 그때 북한의 교회가 2천개 있고 성도들이 30만이 있었는데 1948년 교회 모든 재산을 국유화해서 교회를 강제적으로 국가가 접수하고 교인들을 풍비박산 흩어 버리고 6.25전쟁 때 교회는 다 불태우고 수많은 교역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죽이고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했지만 전쟁은 끝나도 우리 한국에 지금 5만 교회, 10만 주의 종, 1,200만 성도가 있고 미국 다음으로 두 번째 선교사를 많이 파견한 나라가 되고 만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로 18절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은 우리에게 계급장을 달아주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것이 장차 우리 하나님께 나아갈 때 영광의 상을 받는 증거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핍박을 당해도 버린바 되지 않습니다. 핍박을 당할수록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가까이 계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0절로 12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왜냐, 하늘에 상급이 크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상급이 순교의 상급입니다. 순교에 버금가는 핍박은 똑같이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크게 상급을 받을 것이니 주님께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그는 말한 것입니다.
저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책을 원문으로 읽었습니다. 이 책은 복음을 위해 중국에서 사도바울과 같이 고난을 받았던 윈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단지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서른 번 이상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한번은 감옥에서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74일을 금식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지속적으로 전기고문을 당하고 뼈가 부스러질 정도로 매를 맞았습니다. 사람이 74일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완전히 피부가 뼈에 들러붙어 미라같이 되어 그렇게 금식을 해도 안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 아니고는 74일 동안 금식하고 살아난 기록이 없습니다. 윈 형제는 출옥하면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다가 잡히면 감옥에 갇혔다가 다시 나가면 복음을 전하는 삶을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적적으로 중국 공안의 감시를 벗어나 독일로 탈출해서 독일 시민권을 얻어 가지고서 지금은 전 세계로 다니면서 ‘백투 예루살렘’이라는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위해 그가 당했던 고난을 알게 되면 “감옥에 계시면서 끔찍한 세월을 보내셨군요.”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윈 형제는 오히려 놀라면서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저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의 친밀한 임재 가운데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누렸습니다.” 그렇게 대답을 합니다. 세상에 30번 이상 감옥에 들어가서 말할 수 없는 전기고문과 몽둥이로 얻어맞고 얻어터졌는데도 불구하고 감옥에 있을 때 그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평안과 기쁨을 누렸다고 말했습니다. 윈 형제는 자신의 고난은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니라면서 책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정말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전혀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고난과 역경을 몸소 통과하므로 써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십자가의 길이다. 감옥에 처음 갔을 때 나는 왜 하나님이 그것을 허용하였는지 의아해하며 몸부림쳤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분이 나에 대해 보다 심오한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분께서 나를 속속들이 친밀하게 알기 원하셨고 나도 그분을 그렇게 알기 원했다. 하나님은 내가 당신께 집중하도록 이끄시기 위해 최선을 방법으로 감옥에 나를 가두시고 철창안에 휴식을 취하게 했다. 그동안 하나님과 기도하고 회개하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고 그 큰 기쁨과 평안을 체험할 수 있었다.“ 고난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전보다 더 가까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핍박을 당해도 버린바 되지 않는 것은 핍박을 당할수록 주님의 품속에 더 깊이 안기게 되고 살아계신 주의 평안과 기쁨을 더 뼈 속까지 체험 할 수 있기 때문에 버린바 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4.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음
넷째로,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거꾸러뜨린다는 것은 죽인다는 것입니다. 망한다는 것은 파멸당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거꾸러뜨리고 죽여도 파멸당하지 않는다. 지옥에 떨어지거나 버림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거꾸러뜨렸으나 망하지 않았고 부활하시지 않습니까? 로마사람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거꾸러뜨리면 그곳에서 끝이 나고 사태가 종말 될 줄 알았습니다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1장 4절에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23절로 24절에도 베드로가 말하기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4절에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꾸러뜨려서 멸망시키려고 했으나 그는 오히려 부활하셔서 사망과 음부를 철폐하시고 영원히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다tm리며 오늘날 교회의 몸이 되시고 머리가 되어 주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모신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서 주와 함께 죽고 장사지내고 함께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속에 계시므로 우리들은 죽음과 부활을 함께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강림하시기 전에는 누구를 불문하고 죽습니다. 사람이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을 살다가 죽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겁나지 않는 것은 죽기는 죽되 속에 부활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부활이 없이 죽지만은 부활을 끌어안고 죽기 때문에 죽었다 하자마자 우리는 나비가 고치에서 나와서 훨훨 공중을 날듯이 부활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의 품에 안기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는 어떻게 죽어도 생명은 부활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스데반 보십시오. 그가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서 돌로 얻어맞아 돌무더기 속에 들어갈 때 그는 하늘을 쳐다보고 말하기를 “보라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인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는 도다.” 방금 돌이 비 오듯이 쏟아져서 돌에 맞아 죽으면서 그 영혼이 떠날 쯤에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 보좌 앞에 예수님이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을 스데반이 보았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옴과 동시에 부활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속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사망을 당해도 거꾸러짐을 당해도 망하지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4절에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바울선생은 말한 것입니다.
홀로센버그 수용소를 담당했던 독일의 늙은 군의관 베스게씨는 1945년 4월 9일의 일기를 이렇게 썼습니다. ‘그때는 히틀러에 의해서 많은 독일의 장성들도 사형을 당하고 외국인들이 사형을 당했었습니다. 오늘 새벽 5시와 6시 사이에 카나리 제독과 오스트 장군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다. 그중에 나의 영혼을 사로잡은 것은 본 회퍼 목사였다. 본 회퍼 목사도 히틀러 제거 운동에 관여했다가 잡혀서 사형선고를 받고 그날 처형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처형장으로 끌려가기 전에 오랫동안 기도하고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교수대에 올라가서도 잠시 기도했다. 그는 평화롭게 보였다. 그 얼굴에 너무나 평안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는 모습을 보고 내가 오랫동안 사형수를 돌보는 의사를 했지만 그런 사람을 그런 기도를 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나는 50년 동안 의사 일을 했지만 저런 죽음을 본적이 없다. 저렇게 평안하고 저렇게 기쁘고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본 회퍼 목사는 그 속에 부활의 예수님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나치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만 실상은 승리자였던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치가 그에게 목을 매달아 사형을 취했지만 즉시로 그는 그리스도의 품에 안긴 것입니다. 그는 부활을 품안에 품고 있기 때문에 사망 속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활의 생명 싹에 쌓여서 예수님의 품에 안길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사형수들은 처절한 절망과 공포와 불안 속에서 사형을 당했지만 본 회퍼 목사의 얼굴은 한없는 기쁨과 평안과 담대함이 있었다고 그 의사선생은 일기에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사람은 죽음과 부활을 함께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로는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앉아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여의도순복음교회 와서 계시지만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지내고 함께 부활하사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앉히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육신이 죽는 그 순간에 우리는 속사람이 하늘에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사람은 망해도 믿는 자는 이미 부활 승천하여 그리스도 안에 앉아 있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2장 6절에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오늘 우리는 예수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습니다. 육신으로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영으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순식간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두려움이 없지 않습니까?
요한계시록 3장 21절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주님께서 말씀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5절로 39절 우리 다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할렐루야~
예수 내 구주께서 내 안에 계신 사람은 그 끈끈한 사랑의 줄이 하나님의 손에 잡혀 있어 어떠한 능력과 힘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있기 때문에 죽음조차도 우리를 거꾸러뜨릴 수가 없는 것은 죽음이 다가오면 부활이 함께 다가오기 때문인 것입니다.
로마시대의 명설교가였던 크리소스톰이 예수를 증거 하다가 체포되어 황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때 황제가 그를 위협하며 준엄하게 그를 심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만약 예수믿는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저 먼 나라로 추방해 버리겠다.” 그러자 크리소스톰이 “황제께서 나를 그리스도에게서 떼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황제께서 나를 먼 나라로 추방한다 할지라도 주님은 거기서도 나와 함께 계실 것이기 때문에 이곳에 있으나 먼 나라에 가서나 한가지입니다.” “좋다! 그러면 너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겠다.” 크리소스톰은 말했습니다. “그것도 안 될 일입니다. 나의 모든 재산은 이미 하늘에 쌓아 두었기 때문에 황제께서 빼앗으려야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이 땅에 가진 것 없고 나의 재산은 다 하늘에 이미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듣자 황제는 더욱 화가 났습니다. 그는 노기가 등등한 목소리로 크리소스톰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네 이놈! 네가 나를 놀리느냐? 너를 당장 죽여 버리겠다.” 그러자 크리소스톰은 태연한 얼굴로 “폐하, 나는 이미 40년 전에 죽었습니다. 40년 전에 예수를 구주로 모셨을 때 세상에 대하여 죽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살게 되어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아무리 내 목숨을 끊는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을 가진 자인데 폐하가 무슨 수로 나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황제는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크리소스톰을 성밖으로 내어 쫓아 버리고 만 것입니다. 자 이것은 해외로 추방해도 안 되고 재산을 몰수해도 안 되고 죽여도 안 되고 처치 곤란한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므로 보배로운 예수님이 우리 속에 계시는데 이 예수님은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요, 우리를 사랑하사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 위하여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 우리를 죄와 세상과 마귀와 질병과 저주와 죽음에서 건지신 분이신 것인데 그분하고 같이 계신 사람을 어떻게 거꾸러뜨려 멸망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모신 사람은 죽음과 부활을 함께 가진 사람입니다. 육체가 죽어도 영원한 생명인 부활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리 거꾸러뜨려도 망하지가 않습니다.
[결론]
십자가는 죽음과 부활의 징검다리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질수록 부활의 생명은 항상 심신에 넘쳐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죽이겠다고 십자가에 못 박지만 십자가 다음에는 부활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못 박으면 못 박을수록 더 부활하고 핍박을 할수록 더 주님께 가까워지고 우겨 싸이면 싸일수록 해방되고 답답한 일을 당할수록 예수님의 사랑을 더 체험하게 되는 정말 역설적이고 놀라운 기적적인 은혜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밖에서는 이런 일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우리가 마음속에 구주로 모시면 이 보배를 질그릇에 모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보배로운 빛을 우리를 통해서 발하시는 것입니다. 우겨 싸일 때 주님께서 빛을 발하여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고 답답한 일을 당할 때 사랑의 광체를 나타내셔서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핍박을 당할 때 더욱 품어 주시므로 버린바 되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면 부활하여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그리스도 안에서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는 어떠한 시련과 환난과 고난이 다가와도 이 질그릇 속에 예수님을 섬기고 모시고 있으므로 예수님 안에서 이미 승리한 결과를 가지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죽음조차도 우리를 멸할 수 없는 것은 이미 우리는 부활의 품속에 안겨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여 그러므로 예수 믿는 신앙이 얼마나 큰 특권이라는 것을 알게 도와 주시옵시고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모시고 주님을 찬미하고 의지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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