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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심의 대가

요한복음 조용기 목사............... 조회 수 1858 추천 수 0 2009.08.03 17: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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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3:16~17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5년 11월 6일 주일 3부 설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서론]

오늘 저는 “죽으심의 대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6.25 피난 시절에 부산은 발 디딜 틈이 없이 사람들로 와글거렸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그때는 범일동 매축지 근처에 살았는데 부산항구에서 화차가 석탄을 잔뜩 싣고 바로 매축지 앞 철도까지 와서는 그곳에서 기관차를 바꿉니다. 그 시간이 10분내지 한 15분쯤 걸립니다. 그동안에 개미떼같이 피난민들이 그 화차위에 올라가서 석탄을 끌어 내립니다. 얼굴 전체가 석탄 투성이가 됩니다. 그래서 그 석탄을 각각 그릇에 담고 혹은 보퉁이에 담아서 연료로 쓰기도 하고 팔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일용할 양식을 얻는 길이기 때문에 생사를 걸고 서부활극처럼 차위에 올라가서 석탄을 끌어내리는데 군인들은 연방 그들을 밀어냅니다. 그 석탄은 훔쳐 갈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그 옆에 서있었는데 한 40대 남자와 한 10살쯤 되는 아들이 그 석탄을 모으기 위해서 왔습니다. 아들은 올라가서 석탄을 퍼내고 아버지는 밑에서 받고 그러는데 군인들이 오니까 다 뛰어 내렸습니다. 그 아들도 뛰어 내렸습니다. 그런데 큰 석탄덩어리 하나가 열차 밑으로 굴러들어가니까 아들이 기어서 그 열차 밑에 들어가서 그 석탄 덩어리를 꺼내려고 하는 찰나에 철커덕하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눈앞에 죽음이 다가왔습니다. 모든 사람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어찌할 도리가 없지요. 그런데 쏜살같이 40대의 아버지가 뛰어 들더니만 그 아들을 있는 힘껏 밀어내니까 아들은 저쪽 편에 내동댕이쳐서 밖으로 나가고 그 아버지 허리위로 열차 바퀴가 지나가는 것입니다. 뚝뚝 소리가 나면서 허리뼈가 부러지고 창자가 터져 나오고 그 아버지는 콧물을 쫘르륵 흘리면서 죽어가면서 아들보고 빨리 피하라고 손을 저으면서 허리가 두 동강이 나서 죽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때 그 처참한 모습이 마음속에 아로 새겨져서 항상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본론]

1. 원수들의 조소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 볼 때마다 저는 그 장면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원수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쳐다보고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네가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조소를 했습니다. 대제사장, 서기관들, 장로들이 그렇게 희롱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장면을 볼 때 이 아버지와 아들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살고, 아버지가 살면 아들이 죽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면 우리는 다 죽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면 우리가 다 삽니다. 대신 죽음만이 죽음에 처한 자를 살릴 수 있습니다. 다 살수는 없습니다. 나는 그 열차 사고에서 볼 때 아들도 살고 아버지도 살 수 있는 도리가 없습니다. 누구 한사람은 죽어야 다른 사람이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아버지도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 아들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살고 주님도 살수는 없습니다. 우리 죄 때문에 누구 한분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 쫓겨나서 이 세상에 내동댕이쳤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자손들은 태어날 때부터 죄 중에 잉태되고 죄 중에서 태어납니다. 아담 안에서 다 버림받은 죄인으로 영적으로 죽어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담이 죄를 가지고 왔으니 그 죄가 자자손손 미쳐서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하나님의 심판은 사정없이 ‘죄를 지은 영혼은 죽으리라’ 하셨으니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죄 없는 자가 대신 죽어줘야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제사제도가 있습니다. 속죄제, 속건제, 번제, 화목제등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려 제사를 드립니다. 그 피흘림은 바로 예수님이 우리 인생을 위해서 죽으신 것을 상징하는 피인 것입니다.

성경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말했으며

마태복음 26장 28절에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사야 53장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와 불의, 추억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담당하시고 그는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우리를 죽음의 벼랑에서 건져 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지 않고는 우리가 살아갈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고 했는데 주님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혹독한 조소나 비난과 정죄와 극한적인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고통을 극복하시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원수들은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참말입니다. 남을 구원하자니까 자기는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극한의 고통을 참고도 십자가에서 안 내려 오셨습니다. 안 내려와야 그가 받은 형벌을 통해서 우리가 속죄를 이루고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보고 하신 말씀이 뭔지 압니까? “내가 죽고 너는 살아야 한다.” 나는 열차에 치어 죽어가는 그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 “내가 죽고 너는 살아야 한다.” 마지막 허리가 두 동강이 나면서도 콧물을 흘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 아들을 “피하라. 나는 죽고 너는 살아야 한다.” 예수님 십자가에 축 늘어져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열두 영 되는 천사를 불러서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진 그분입니다. 그러나 인생들이 죄를 짓고 죄 값으로 죽어가니까 이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대신 못 박혀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나는 죽고 너는 살아야 되겠다.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지.” 내가 살고 너를 죽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주님의 목숨을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대속물로 내놓으신 것입니다. 고든 맥도날드는 그의 책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에서 현대인의 삶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습니다. 하나는 충동에 이끌리는 삶이고 또 다른 하나는 소명에 이끌리는 삶입니다. 충동에 이끌리는 삶은 하루하루 충동적이고 본능적으로 감정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일을 그르치고 상처받고 상처를 주면서 인생을 상처투성이로 전쟁터로 만들어놓고 갑니다. 그러나 소명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전혀 다릅니다. 그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우선순위가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한다.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고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이 인생에 가장 먼저 순위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으니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옛사람의 습관인 충동에 이끌려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부르심의 소명을 쫓아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날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이제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며 예수님을 섬기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소명입니다. 이제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을 따라서 자랑을 따라 충동적으로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고 가시밭길을 걸어도 험한 삶을 살아도 우리는 한길 소명을 따라서 사는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2. 죽으심의 대가

예수님의 죽으심의 대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의 대가는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에 우리가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건을 살 때 대가를 지불하고 난 다음에 물건을 안취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돈 주었으면 물건을 취해야지요. 주님이 대신 죽으셨으니 왜 죽으셨습니까? 우리를 살리려고 죽으셨기 때문에 확실히 우리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너는 살아라.” 죽었으니 대가를 지불했으니 우리는 그 값으로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용서와 의와 영광으로 살아야 됩니다. 우리는 용서받아야만 합니다. 의롭게 되어야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 때문에 죽었기 때문에 주님의 피값으로 우리는 용서와 의와 영광을 누리며 살아야 되고 이것을 하나님께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행동으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게 되고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확실하게 용서와 의와 영광으로 살아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대가를 지불했으므로 확실하게 거룩함과 성령충만으로 살아나야 됩니다. 거룩해져야 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성령충만한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일인 것입니다. 주님이 그 때문에 죽으셨고 피를 흘려서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함과 성령충만을 구하고 이것을 받고 이대로 확실히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디도서 3장 6절로 7절에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했고 고린도전서 6장 11절에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성령충만을 구하고 거룩함을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얻어야 합니다. 주님이 지불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거룩함은 우리의 것이고 성령충만도 우리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함과 성령충만을 받고 이 세상을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치료와 건강으로 확실히 살아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등이 갈기갈기 찢어지도록 매를 맞으시고 또 우리의 병과 연약함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므로 그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우리는 확실히 치료받고 건강으로 살아나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3절로 5절에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확실하게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너는 살고 나는 죽어야 된다. 내가 죽었으니 너는 살아라.” 확실하게 치료받고 건강을 얻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콩고선교사로 갔다가 암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고향에 돌아와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의 이야기를 읽어보고 큰 감동을 느꼈습니다. 이 사람은 간암에 걸려서 썩어가는 간을 안고 죽음에 처해 있었습니다.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누구도 치료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아내에게 바깥 양지쪽으로 침대를 내어 달라고 부탁해서 햇볕이 따뜻하게 비취는 양지에 앉아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날 마침 그가 읽은 성경 말씀이 베드로전서 2장 24절이었습니다. 그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그는 무언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동안 성경을 수없이 읽었지만 그때처럼 그 말씀이 심령을 파고든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성령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병은 축복이 아니라 형벌이다. 내가 인간의 질병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그 무서운 형벌을 대신 감당하기 위해서 빌라도의 뜰에서 로마의 무자비한 군인들에게 등허리가 갈기갈기 찢어지도록 채찍으로 맞았다. 그리고 내 등의 찢어진 곳마다 선지피가 흘렀다. 내가 너의 연약함을 대신해서 채찍에 맞아 형벌을 청산했다. 그러니 너는 이 형벌을 받을 필요가 없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는 나음을 입었다. 이 사실을 믿느냐?’ 그 말을 듣자 선교사님의 영혼 깊은 곳에 믿음이 흘러 넘쳤습니다. 즉시로 “나는 병자가 아니라 나았습니다.” 그 믿음이 생겨서 당장 아내를 불러서 평상복을 가져오라고 그랬습니다. “이 성경말씀을 보세요. 이 성경이 말하기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아니 그 말씀 당신이 늘 읽었던 말씀이 아닙니까? 오늘 왜 그렇게 새삼스러우세요?” “아니요. 전에는 제가 읽긴 읽었어도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냥 지나쳐 읽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내가 오늘 이 말씀에 집중할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내 영혼에게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나는 이 말씀을 받았고 그리고 믿었습니다. 나는 이제 간암환자가 아닙니다. 주님이 채찍에 맞으셨으므로 나는 나음을 입은 사람입니다. 주께서 고통 당하셨고 나는 나아야 됩니다. 나은 사람이 왜 누워 있어요? 나는 병상에서 일어나야 되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부인이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옷을 입고 비틀거리면서 병원을 나와 정상인의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얼마 있지 않아서 간암에서 완전히 고침 받고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가 믿음에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기 위해서는 말씀을 믿고 굳세게 서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가 아무리 부정적인 상황으로 우리를 공격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말씀에 굳게 설 때 마귀의 공격에 단호하게 대항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가 채찍에 맞고 내가 연약을 담당하고 병을 짊어지고 죽었으니 너는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채찍에 맞음으로 네가 나음을 입었느니라. 우리는 그 말씀대로 확실하게 치료받고 살아나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아브라함의 복으로 확실히 살아야만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축 늘어져 있는 것 보십시오. 주님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성경에는 저주받은 자는 나무에 메달라고 했는데 복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 왜 저주를 받아 나무에 매달렸습니까? 여러분과 나를 저주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죽고 너는 살아야 되겠다. 내가 저주를 받았으니 너는 복을 받아야 된다.” 복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을 확실하게 그리스도의 저주에서 해방시켰으니 이것을 이뤄야 예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아담은 타락하므로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우리를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해방된 사람입니다. 자유를 얻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저주에서 해방을 얻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네가 살아라. 살아야 합니다. 확실하게 저주에서 해방을 받고 아브라함의 축복으로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2005년 10월 26일 연합뉴스에 보니까 신앙 활동은 영혼을 살찌게 할뿐만 아니라 부요하게 만들어 준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미국 메사추세츠 공과대학 경제학과에 존너선 구르버박사는 10월 25일 전미경제연구소가 발행한 논문에서 신앙이 있는 사람은 노동시장에서 성공을 방해하는 일상적인 문제들에 대한 정신적 중압감이 덜하기 때문에 더 성공할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예배출석률이 두 배가 되면 가게 소득이 9.1% 증가한다. 그리고 복지지원금 수혜요청이 16% 감소하고 이혼확률은 4% 줄어든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통계를 내어서 증거를 낸 것입니다. 교회 출석률이 두 배가 되면 소득이 9.1%가 늘어나고 정부에 원조를 청하는 구제요청이 16% 감소하고 이혼률도 4% 줄어든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한 것을 통계학적으로 증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은혜 그대로인 것입니다. “내가 죽고 너는 살아야 된다. 내가 저주받고 너는 복을 받아야 된다.” 확실하게 복을 받고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부활과 영생천국으로 살아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 때문에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을 수 없는 분입니다. 우리의 죽음을 짊어지고 음부에 내려갔다가 사흘만에 사망과 음부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고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고 음부에 내려가서 고난을 당하시고 사망과 음부를 이기시고 부활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천국 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된다. 내가 음부에 내려갔더니 너는 음부에 내려오지 말고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 확실하게 예수 믿고 부활하고 영생 얻고 천국시민이 되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3.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을 다같이 한번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유를 주셨으니 이제 우리의 책임은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된다. 왜요? 우리를 흔드는 원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원수, 마귀가 우리를 흔들어서 넘어지게 하고 다시 종의 멍에를 갖다 씌우려고 하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가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굳세게 설 수 있는 것입니까? 진리를 깨달아 알아야 굳세게 설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에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면 그 다음에는 동남풍이 불고 서북풍이 불어도 폭풍우를 지나가도 광야를 지나가도 흔들리지 말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습니다. 말씀위에 서서 나가야 우리가 굳세게 설 수 있습니다. 환경을 바라보고 두려워하고, 감각을 의지하고 두려워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불안해하면 굳세게 서지 못하고 다시 종의 멍에를 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굳세게 서야 됩니다. 나치 독일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코리 텐 붐 여사는 자신의 수기에 이런 말을 썼습니다. ‘기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가 어두워 졌다고 해서 당신은 기차표를 찢어 버리거나 기차에서 뛰어 내리지는 않겠지요. 조용히 앉아서 기관사를 믿고 있는 것이 최선책일 것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언제나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섭리를 깨닫고 흔들리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굳세게 서기 위해서는 우리의 자화상을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고통과 저주 속에 몸부림치고 나는 못한다. 할 수 없다. 패배자라는 일그러진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바라보는 우리의 참 모습은 일그러진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내가 새로운 자화상을 굳세게 잡아야 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새로운 자화상을 붙잡아야 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는 자화상을 붙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새로운 모습을 굳세게 붙잡고 흔들리지 말아야 됩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다. 나는 거룩하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나는 치료받고 건강한 사람이다. 나는 저주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부활과 영생과 천국인이 되었다. 이것이 나의 새로운 신분이요, 자화상이다. 사탄아 물러가라! 자기의 새롭게 된 자화상, 새로운 신분을 굳세게 붙잡고 서서 종의 멍에를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미국 뉴욕의 어느 가정에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고 눈까지 쇠약해서 겨우 생명만 연장할 수 있는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가 11살 때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놓고 말했습니다. 휠체어에 앉아서 아버지를 쳐다보는 낙심하고 좌절된 아들보고 “아들아, 육신의 장애는 장애가 아니다. 네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하나님이 너를 도우시면 너는 모든 사람이 너를 주목하는 역사에 남는 삶을 살 것이다”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때까지 육체적 장애로 늘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아이는 아버지의 격려로 인해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자화상을 세웠습니다. “나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이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화상을 굳게 잡고 낙심하지 않고 뒤로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굳세게 서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자화상대로 살았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훗날 미국을 대 경제공황에서 구출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유명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음의 대가를 치루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고 새로운 신분과 자화상을 확립하여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고 절대로 흔들리지 마십시오.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을 읽고 주일, 수요일 설교말씀을 듣고 마음속에 묵상하고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터를 세워서 흔들리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에 신문이나 잡지나 이것은 죽은 말씀이요, 한번 왔다가 다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4천년 동안 변함없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쪼갭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천사들이 말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마귀의 공격에 우리는 말씀에 서서 단호하게 대적해야 됩니다. 마귀는 와서 항상 “환경을 바라보라. 비바람이 치지 않느냐? 환경을 바라보라. 네 감각을 의지해라. 기분이 어떠냐? 나쁘지? 기분 나쁘지? 너 이성적으로 생각해봐라. 어떻게 무식하게 말씀을 믿느냐?” 그렇게 조롱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단호하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죽음으로써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히 누려야 됩니다. 원수 마귀야 물러가라! 말씀에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마귀를 대적해야 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로 9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야고보서 4장 7절도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하나님이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 가슴 딱 내밀고 담대하게 마귀를 대적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마귀 앞에 떨면 안 되는 것입니다.

가끔 방송을 통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커스를 볼 때가 있는데 보다보면 빠지지 않는 순서가 바로 동물들이 불붙은 둥근 고리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대게 동물들은 불을 싫어합니다. 털이 긴 동물일수록 본능적으로 불을 두려워하고 꺼립니다. 그런데도 서커스단의 동물들은 주저하지 않고 펄쩍 뛰어서 불붙은 고리를 싹 뛰어넘어 가는 것입니다. 동물학자들은 이에 대해 말하기를 동물들이 불을 통과하는 이유는 불에 뛰어든 후에 주어지는 보상이나 가혹한 훈련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동물과 조련사 사이에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조련사에 대한 믿음만으로 본능을 거스르면서까지 불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조련사가 절대 나를 해롭게 하지 않는다. 조련사의 말대로 해도 괜찮다. 신뢰가 있기 때문에 그 무지막지한 동물들도 불이 활활 타는 고리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일개 미물도 조련사를 믿고 본능을 이기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그 아들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며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뜨겁게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통이며 호흡인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늘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뜻을 다 이뤄 놓았지만 땅과 내 생활 속에 이루어지는 것은 나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예비한 모든 것을 기도라는 밧줄을 던져서 거기에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예비한 모든 것이 하늘에 남아있고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뜨겁게 우리는 기도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2절로 3절에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도저히 상상을 초월한 비밀한 일을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하늘에 예비했다가 나타내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 예비해 놓았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깜짝 놀라는 일을 기도할 때 하나님은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자 존 녹스는 기도하기를 “오~ 주여 스코틀랜드를 내게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내 생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그러한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스코틀랜드가 변화 받아 주를 믿는 곳이 된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설자 요한 웨슬리는 밤새도록 기도하여 복음으로 영국을 살렸습니다. 루터역시 그의 친구 멜랑톤이 죽을병에 걸렸을 때 그를 붙잡고 1시간 동안 간절히 기도하여 병을 몰아내고 여러 해 동안 멜랑톤과 함께 종교개혁을 이루어 내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미국 땅에 처음 도착했을 때 미국 땅에 가뭄이 들어서 농작물이 다 죽었습니다. 비가 안 오면 그들이 모처럼 미국까지 건너왔으나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주민들이 모여 가지고 9시간 동안 손과 손을 잡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 간절히 기도하자 하늘에 구름이 떠오르고 번개에 벼락이 치고 비가 쏟아져서 농작물이 살아나고 추수를 할 수 있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믿는 자들은 뜨겁게 기도하며 마귀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나도록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입술의 고백은 마음속에 있는 믿음을 풀어놓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마음에 신앙이 가득한 사람은 입에서 신앙이 나오고 마음에 의심과 불안이 가득한 사람은 부정적인 말이 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잠언서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잠언서 6장 2절에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입술의 말이 우리 마음속에 믿음을 풀어 놓습니다. 입술로써 부정적인 말을 하면 마음속에 있는 믿음이 다 부정되고 마는 것입니다. 입술이 믿음의 말씀을 고백하면 마음속에 있는 믿음의 역사가 말로써 나타나서 창조적인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말씀으로 우주와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 하나님 말씀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강하고 담대하게 말씀을 고백하면 이 말씀이 나가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죄를 용서하시고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말씀으로 병을 고치시고 말씀으로 풍랑을 잠잠케 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강하고 담대하게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말씀이 나가서 역사하여 기적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앞에 말씀드린 열차사고에 아버지도 죽고 아들도 죽었다면 그 아버지의 죽음은 헛된 죽음이요 비극일 것입니다. 아들 살리겠다고 뛰어 들어갔는데 아들도 차에 치어 죽고 아버지도 열차에 치어 죽었으면 그것은 비극인 것입니다. 또 아들이 아버지가 나 때문에 죽었으니 나도 죽겠다고 하고 자살했다면 그것은 아버지의 죽음을 헛되고 하고 마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확실히 살아야 되고 잘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결론]

아버지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아버지의 피를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살아야 되고 아버지의 뜻대로 잘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죽었으니 나도 죽자.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이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날 위해 죽었으니 나는 빈손 들고 바랑 메고 맨발벗고 통곡하며 살자. 그것은 예수님의 고난을 헛되이 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나 죽고 너 살리자. 나 죽고 너 살리자. 내 영혼이 죽고 네 영혼 살리고 내가 저주를 받고 네가 범사에 복을 받고 내가 채찍에 맞고 너는 고침을 받게 해야 되겠다. 나 죽고 너 살리겠다.’ 이 예수님의 간절한 뜻을 우리가 헛되이 돌리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야 하고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고 살아서 주님의 죽으심의 대가를 값지게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살아서 여러분의 생애 속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영광스럽게 하고 헛되게 하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성찬을 통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말합니까? ‘너 위하여 내 몸 찢고 내가 피를 흘렸다. 나 죽고 너는 살아라. 내가 십자가에서 영원히 죽음의 고통을 당해서 네 영혼이 살라. 내가 저주를 받아 매어 달리므로 네가 복을 받고 내가 채찍에 맞아 찢어지므로 너는 치료함을 받으라. 나죽고 너 살리자. 나 죽었으니 너는 살아라. 너는 살아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요,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 그리스도의 뜻을 받아들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 죽으신 고난의 대가를 우리가 다 받고 누리게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의 깨어진 몸 흘리신 피를 먹고 마실 때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해 주신 것을 알고 그 사랑의 열매로써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어 주의 사업을 확장하고 이웃을 몸같이 사랑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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