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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Abba) 체험: 브로커(broker) 없는 사랑나라(love-dom)
누가복음 한완상 형제............... 조회 수 1998 추천 수 0 2009.08.06 23:27:53| 성경본문 : | 눅1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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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한완상 형제 |
| 참고 : | 2009.03.08 새길교회 주일설교 |
갈릴리 예수님 보다 두 배 이상 오래 살았다는 것이 항상 저에게는 부끄럽습니다. 부끄러울수록 역사의 예수를 더욱 간절히 바라보게 됩니다. 새길공동체도 벌써 스물두 살의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간 <열린 신학과 깊은 신앙>을 실천하려고 공동체가 그 나름대로 애써왔지요. 허나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오늘의 우리 모습을 겸손하게 찬찬히 살펴보면, 아직도 우리는 멀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만큼 부끄럽습니다. 그동안 우리의 신학은 어느 정도 열려있게 되었지요. 신학적 사고의 지평은 더 넓어지고, 그 포용성도 더 커진 듯하지만, 우리의 신앙과 그것에 기초한 삶에서는 깊음과 뜨거움이 아주 부족한 듯합니다. 그래서 보다 아픈 자기성찰과 자기반성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뼈아픈 자성(自省)을 위한 마땅한 기준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부끄러운 낮은 수준의 신앙을 반성할 때, 다른 종교를 보고 참고는 할 수 있겠지만, 타종교, 그것이 무슨 종교든 그것을 기준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인간 역사에서 명멸했던, 그리고 한 때는 신나게 펄럭 거렸던 혁명과 변화의 깃발도 참고는 되겠지만, 우리의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신비한 수도원의 그 조용한 삶도 매력은 있지만 우리의 절실한 표준은 되기 힘들겠지요. 우리가 우리의 부족하고 삐뚤어진 모습을 바로 잡기 위해 마땅히 쳐다보아야 할 기준의 거울은 역시 예수님이십니다. 갈릴리의 어두운 골목거리에서, 그 낮은 언덕에서 사랑과 희망, 공의와 용서의 가치를 설파하시고 실천하셨던 예수님을 새삼 다시 쳐다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견디기 힘들었던 골고다의 고난과 죽음을 거쳐 부활의 실체로 나타나시어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셨던 그리스도 예수를 저희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바로 그분을 반성의 기준으로 새삼 쳐다보고 따라야 합니다.
왜 역사의 예수님을 삶의 기준으로 쳐다봐야 합니까? 지난 한 세기의 신학 흐름을 살펴보면 역사의 예수님에 대해 무관심했던 20세기 전반부 기간에, 주류 신학자들은 인류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다 주었던 두 괴물 짐승의 횡포에 대해 지극히 소극적으로 대응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20세기 전반에 가장 영향을 크게 끼쳤던 신학자로서 우리는 불트만(Bultmann), 바르트(Barth), 슈바이처(Schweitzer)를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슈바이처의 역사 예수 탐구는 획기적 업적이었습니다만, 그 연구 결과 몸의 예수 찾기, 갈릴리의 예수 찾기는 허망한 노력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슈바이처에 의하면 묵시종말론적 사상과 신앙에 빠져 있는 “역사적 예수”는 오늘 우리에게는 이상한 이방인처럼 여겨진다고 했습니다. 그런 인물에 대한 신학적 탐구보다는 그의 산상보훈의 가르침, 특히 사랑실천이 훨씬 의미가 크다고 믿었지요. 그래서 그는 의료선교에로 삶의 방향을 확 바꿨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실존적 결단이라 하겠습니다. 그 결단을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특히 그는 서구의 기독교가 제국주의 열풍을 타고, 아프리카 등 식민지로 나아가면서 예수의 사랑실천은 제쳐두고 자기들 나라의 제국주의적 확장에 협조하거나 방조하는 것을 보고 분개했습니다. 그가 의과대학 지망하기 전에 한 설교를 보면 31세 때 그의 정의감은 대단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프리카 선교활동을 하던 시기에, 자기 조국에서는 인류역사상 가장 흉측한 짐승권력 곧 나치가 등장했습니다.
그와 거의 같은 시기에 세계 신학계, 특히 성서신학계의 태두로 활약했던 불트만은 복음서가 예수부활을 체험했던 초대교회의 신앙고백문서임을 강조했습니다. 탄탄한 역사비평방법론에 근거한 그의 주장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지요. 그는 역사의 예수 탐구란 불가할 뿐 아니라 의미도 없고 부적절한 노력이라고 폄하했지요. 슈바이처의 역사 예수 탐구가 주는 일종의 허무감에 더하여 불트만의 실존주의 신학은 역사 예수 탐구의 부적절함을 강조한 셈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50년간 갈릴리 예수에 대한 역사적 탐구는 중단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같은 중단 시기에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 괴물이, 자기들의 조국 독일에서는 나치의 괴물이 등장하여 엄청난 반인륜적 행패와 횡포를 저질렀습니다. 이런 아픈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불트만의 제자들 중에 자기 스승에게 일종의 반기를 들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자가 바로 케세만(Kasemann)이었으며, 그는 스승과 달리 땅의 예수, 역사의 예수 탐구가 절실하게 요청된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때가 1953년이었지요. 왜 절실한고 하니, 땅의 예수를 모르게 되면, 괴물 같은 제국의 권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멋대로 왜곡하여 자기들의 짐승 같은 권력을 정당화하는 데 악용하기 때문이지요. 히틀러가 유대인 학살을 합리화하기 위해,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의 잘못을 짐짓 부각시켰습니다. 그리고 反유대적 정치이데올로기로 예수를 악용했기 때문이지요. 정말 끔찍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같은 세속권력의 예수악용은 세상의 모든 “제국적” 권력이 즐겨 저지르게 되는 일 같습니다. 또 종교권력이 이 같은 세속권력을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해주기도 했습니다. 또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썩고 어두운 세속 권력 구조 안에서 교회가 참 소망과 참 진리의 빛이 되려면, 원래의 예수를 되찾고, 되모셔야 합니다. 갈릴리 예수를 우리 삶의 중심에 새롭게 뜨겁게 모셔야 합니다. 그래야 폭력과 독선에 기초한 제도 권력에 대해 올곧은 예수 대안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괴수들의 이념 도구로 오용되고 악용되는 것을 방관할 수 없기에 오늘 저는 갈릴리 예수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그분의 화두(話頭) 하나를 집중해명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아바(Abba) 체험입니다. 아바 표현입니다. 아바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표현 중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친히 쓰셨던 당시 일상어 몇 가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은 죽어버리다 싶이한 언어지만, 예수님의 구어는 아람어였습니다. 그분께서 친히 쓰셨던 언어들 가운데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 아바(Abba)라는 아람어입니다. 이 표현은 갈릴리 예수의 흔적을 찾기 가장 쉽지 않은 요한복음서에도 나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의 서신에도 나옵니다. 초대교회가 헬라문화에 편입되면서도 유대 땅의 일상어 표현이었던 아람어가 예수의 말씀으로 기억되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서의 말씀 중 진정 역사적 예수의 말씀이라고 판단하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오래된 말씀전승층에서도 여러 독립된 전승들에서 그 말씀이 반복적으로 언급되면, 그것은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곧 다중 증언(multiple attestation)의 기준입니다. 여하튼 성서에 예수님 말씀으로 남아 있는 이런 아람어들은 하나같이 갈릴리 예수의 인간적 숨결과 인간적 향기를 물씬 발하는 표현이요 그분의 체취를 진솔하게, 진하게 풍겨주는 언어입니다.
이를테면, <달리다쿰>은 이미 자기 딸이 죽었다고 절망했던 부모들 앞에서 죽었다고 생각되는 소녀의 손을 잡고 일으키면서 예수께서 친히 외친 말씀이십니다. 비웃던 사람들 앞에서 소녀를 일으켜 살리시기 위해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거라”라는 사랑의 외침, 곧 예수님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활화산처럼 솟구쳐 올라온 사랑의 외침이요 표현입니다(마가 5:41).
<에바다>의 외침도 예수님의 깊은 동고애(同苦愛)의 신음소리면서 외침소리였습니다. 귀먹고 말더듬어 오랫동안 소통장애로 고생했던 사람과 함께 아파하시면서 하늘을 우러러 외친 사랑의 절규였습니다. “열려라”라는 소통명령이었습니다. 이것도 갈릴리 예수의 몸 냄새가 물씬 풍기는 표현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외침은 어떠합니까? 이 외침이 갖는 그 깊은 절망의 심연을 우리가 느낄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간 건조한 교리의 예수만 너무 익숙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신다는 그 처절한 외로운 아픔과 그 절망의 아픔을 십자가의 예수, 곧 역사의 예수는 피토해내듯 토해낸 말씀이지요. 인간 예수의 그 아픔, 그것은 인간으로 오시어 잠시 쇼하는 신의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철저하게 인간으로 오시어 그 인간의 아픔을 각혈하듯 토해내는 절박한 외침이기에, 거기서 우리는 갈릴리의 예수를 뜨겁게 공감하며 만나게 됩니다.
이런 아람어 중에 가장 소중한 예수님의 언표(言表)가 저는 바로 이 <아바>라는 아람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말의 아빠와 같은 표현이기도 합니다. 왜 그것이 유독 그렇게 중요한 예수 존재 증명이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마음구조(mindset), 그의 비전, 그의 기도와 소망, 그의 운동, 그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이 모든 예수의 실제행적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게 하는 열쇠가 바로 이 아바라는 언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예수님의 <아바> 하나님이 당시 유대인들의 신과 어떻게 다른지를 잠시 알아보는 것이 퍽 흥미롭고 도움 됩니다. 구약의 주요 인물들의 하나님은 대체로 무서운 절대자였습니다. 모세의 하나님은 절대로 그 얼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출애굽 33:21-23). 다만 그 뒷모습만 바람처럼 지나가면서 느끼게 합니다. 멀리 계시고 숨어 있지만 절대적 힘을 지니신 절대자시지요. 이사야의 하나님은 보기만 해도 보는 자가 죽게 되는 공포의 신이었습니다(이사야 6:5). 에스겔 선지자의 신은 엄숙하고 위엄 있게 옥좌에 높이 앉아계신 지존의 신이지요(에스겔 1:26).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보다는 갈릴리 예수의 아바는 훨씬 더 우리 인간에게 친근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의 <아바> 하나님과 그 아바 나라의 특징을 좀 더 뚜렷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예수의 당대 인물이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 인정받는 세례 요한과 예수를 비교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는 한 때 세례 요한의 문하생이기도 했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와 요한의 하나님 나라 간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예수운동의 독특함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첫째, 요한의 신은 심판의 신입니다. 날카로운 도끼가 나무를 찍어내듯 죄인을 찍어 지옥으로 보내는 무서운 신입니다. 좋게 말해서 정의의 신이지만, 그것은 복수의 신입니다. 부시 대통령의 신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견주어, 예수의 아바 하나님은 용서와 관용의 하나님이시오, 사랑의 하나님이지요. 그러기에 예수의 아바 지배질서는 사랑의 힘이 지배하는 새 질서, 곧 love-dom입니다. 세상 왕의 지배인 kingdom이 아니라 lovedom입니다.
둘째, 요한의 운동은 일인 주도의 세례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의 권위는 전적으로 한 사람, 요한이 독점했습니다. 아무도, 아무 제자도 세례를 베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회개운동은 독점식 운영 방식을 택했지요. 그리고 그것은 철저한 top-down 식이었습니다. 이에 견주어 예수의 운동은 지점식 운영입니다. 크로산에 의하면 그것은 프렌차이스식 운영이지요. 그리고 bottom up 식 관리였습니다. 갈릴리 예수는 그의 지도력 또는 카리스마를 제자들과 나누고 그들에게 위임하려고 했습니다.
셋째, 세례 요한의 신국(神國)은 미래의 질서였습니다. 아직도 <여기> <지금>에서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임박한 미래에 온다고 했습니다. 그날을 맞이하기 위해 지금은 세례 받고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바>의 새 질서가 이미 왔다고 선포했습니다. 어디에? 가장 서럽게 고통당하고, 차별당하고, 억압받는 지극히 작은 사람들, 그 씨알들 속에 아주 작은 겨자씨처럼 심어져 이미 자라기 시작하며, 누룩처럼 보이지 않지만 조용히 그들 속에 이미 번지고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어떻게? 예수께서 가난한 병자들, 나을 소망을 접을 수밖에 없는 절망상황에서 심하게 앓고 있는 중환자들을 무상으로 치유하시면서, 바로 그때에 바로 그 치유되는 현장 속에 <아바>의 나라가 번지고 있다고 증언하셨지요. 이런 치유사건 속에서 환자들이 절망에서 희망으로, 좌절에서 생기 얻음으로 나아가게 되면서 그들은 예수님의 <아바> 세상을 뜨겁게 직접 체험하게 되었지요. 그들이 새 사람으로 벌떡 일어서는 순간, 아바 사랑의 힘이 힘 있게 작동한 것이지요.
또한 열린 밥상공동체 잔치에, 예수께서는 뿌리 뽑힌 자들, 천대받던 자들, 변두리 인간들을 손님으로서 아니라 주빈으로 초대하셨는데, 바로 이 열린 잔치마당이 아바의 새 질서가 현실화되는 바로 그 시간이요 바로 그 마당이었습니다. 이미 이렇게 하나님나라는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지요. 물론 그 완벽한 모습은 미래에 나타날 것이지만, 그 미래의 기쁨이 갈릴리 예수의 열린 밥상둘레에서 이미 흐르고 있었지요. 이른 바 하늘 잔치의 일단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아바 나라는 <오늘>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재화된 사건이지요.
예수의 이 같은 운동과 활동 소식을 감옥에 갇혀있던 세례 요한이 듣고, 그는 예수의 정체에 대해, 그의 하나님나라 운동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면회 온 자기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정말 예수가 바로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인지를 알아보게 했습니다(마태 11:2-6). 그때 예수께서는 당당하게, 투명하게 그의 다름을 알려주었습니다. 소경, 절름발이, 나병환자, 귀머거리가 온전케 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새 질서가 이미 펼쳐지고 있음을 그들 스승에게 알려주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의 아바 나라는 미래의 숙제가 아니라 오늘 바로 여기서 작동되는 새 질서, 새 관계입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운동과는 다른 점이지요. 세례 요한은 결코 치유와 열린 잔치의 기쁨을 씨알들과 베풀지도 나누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운동은 종교적 세례의식에 머물고 있었지요.
넷째로, 정말 중요한 예수운동의 특징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그 어떤 매개인도 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에게 아바의 사랑은 직통체험의 사랑입니다. 원래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중개역이 필요 없습니다. 사랑하게 될 때까지는 간혹 중매자나 중개자가 필요할지 몰라도 서로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은 직통사랑으로 체험됩니다. 세상에서 중개역이 필요한 곳과 때는 싸우고 다투고 죽이고 할 때입니다. 싸우는 계급들 사이에, 다투는 인종과 국가들 사이에, 아군과 적군 사이에는 중개역, 중재자가 필요합니다. 허나 사랑의 공동체에서는 중재자가 필요 없습니다. 모자모녀간, 부자부녀간에 중개인이 필요 없듯이 말입니다. 만일 한 가정 안에서 중개인이 필요하다면, 그 가정은 온전한 가정일 수 없습니다. 콩가루 집안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아바는 무엇보다 종교적 매개인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제나, 제사장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거간 노릇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예수께서 중환자를 치유하실 때, 치유 받은 그 환자는 너무 기쁘고 황송해서 예수님을 신의 대행자로 또는 신 자신으로 우러러 보고 우러러 모시고, 우러러 따르고 싶어 했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때 요즘 한국교회 목회자들처럼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교회 열심히 다니고, 기도와 헌금 열심히 하고, 목회자를 우러러 따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환자들의 충성과 의존심을 강조하거나 강요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환자 자신들의 믿음이 그들을 낫게 한 힘이라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를 테면, 가나안 여성의 딸을 최초로 원격치료해주시면서, “자매여, 참으로 자매의 믿음이 크십니다”라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밑바닥 씨알에게 이미 하나님 사랑을 직통으로 체험할 수 있는 신앙의 저력이 있음을 깨닫게 하신 것이지요. 사랑은 항상 직통체험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직접터치, 직접소통, 직접나눔, 바로 그 체험을 예수의 아바는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예수 당시, 중병일수록 중죄로 인한 것이라는 소문이 깊이 그리고 널리 퍼져 있었지요. 모두들 그렇게 믿도록 종교지도세력이 짐짓 가르쳤지요. 그러기에 중병의 치유는 바로 죄사함과 같은 것으로 받아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면서 때로 환자의 죄가 용서 받았다는 선포를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병=죄>라는 당시 사회 종교적 등식을 거부하신 것과 같습니다. 종교적 병 진단, 곧 죄가 병의 원인이라는 종교적 진단, 아니 종교적 저주를 거부하시고, 그 저주의 사슬에서 환자들을 해방시켜 주셨지요. 이 같은 예수의 치유행적은 바로 하나님 사랑의 작동인데, 당시 성전 세력은 예수의 이 같은 하나님 사랑 실천을 역설적으로, 또 익살스럽게도 신성모독행위로 몰아붙였지요. 당시 신대행자(神代行者) 노릇했던 종교적 중개인들은 예수의 이 같은 사랑 실천 운동을 불온한 신성모독 행위일 뿐 아니라, 신정정치(神政政治) 체제를 거부하는 反체제운동으로 정죄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제사장들의 전매특권, 곧 죄규정과 죄사함에 있어 그들의 독점적 권한을 해체시킨 셈이지요. 그러기에 예수님의 아바 호칭은 단순한 언어의 표현이 아니라, 당시 권력 주체(헤롯세력, 성전세력, 로마세력)에 대한 근원적 도전, 곧 그 뿌리를 흔드는 라디컬한 대응이라 하겠습니다. 그만큼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위험한 운동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운동이 갖는 이 같은 위험성을 잘 아셨기에, 아바 나라를 설파하실 때 짐짓 비유라는 형식을 빌려 말씀하셨습니다.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은 알아들으라는 식이었지요. 예수님의 이 같은 지혜로운 언어 사용기법은 정말 탁월합니다. 예수님의 지혜말씀(비유를 포함하여)들 속에 담겨 있는 새 질서의 과격성이 본질적인 것일수록, 그 비유말씀의 깊은 뜻은 간단히 쉽게 이해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비유말씀뿐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고 했던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실 때도, 정말 놀라운 예수의 기지와 지혜가 번뜩임을 우리는 확인하게 됩니다. 이를 테면, 로마에 세금을 내야 하느냐의 질문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로” 그리고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로” 바치라는 지혜로운 말씀은 결코 예수님께서 진리의 전복성을 은폐하거나 왜곡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지혜를 당시 젤롯당들은 “보수적” 대응이라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로마에 세금을 절대로 내서는 안 된다는 단호하고 명료한 대답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세계적 성서신학자 N. T. Wright는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그의 아바 나라 운동이 갖는 곱빼기 위험(로마권력과 예루살렘 성정권력에 대한 도전)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만일 당시 청중들이 그 비유의 깊은 뜻을 쉽게, 대번에 알아차렸더라면 예수는 5분도 못 견디셨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기야 그래서 예수께서는 서른 중턱까지 밖에 못 사셨지만.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 사랑실천 운동이 갖는 본질적 과격성은 결코 폭력을 용인하지 않는 그의 단호한 말씀과 행동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갈릴리 예수 복음의 핵심입니다. 산 위의 설교 말씀 중, 원수 사랑의 강조는 참으로 따르기 힘듭니다. 그러기에 그만큼 감동적입니다. 그 가르침이 원수 사랑하기가 가장 어려운 사회·정치·경제 상황에서 초대교회가 갈릴리 예수를 회상하며 기록한 메시지였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 처형이후 한 세대가 지났던 때에 예루살렘은 로마군에 의해 초토화되었습니다. 유대전쟁 패전 후에 열혈민족주의 세력은 사라지지 않고 남았습니다. 그 웅장했던 예루살렘 성전, 영원히 무너질 수 없다고 믿었던 그 성전도 처참하게 초토화 되었지요. 유대인들은 절망과 좌절의 밑바닥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예수 사랑 가르침을 실천했던 초대교회는 강경 유대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핍박받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3장의 예수님의 격렬한 분노의 말씀이 바로 이들 강경 율법주의자들을 향한 말씀이지요. 산위의 말씀도 같은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원수사랑의 가르침은 원수였던 로마권력을 가장 극렬하게 미워해야 할 상황에서 초대교인들에 의해 기록되고 전승되었습니다. 가장 복수하고 싶을 때, 또 복수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상황에서 원수사랑의 아바 뜻을 예수님이 설파하신 것으로 이해되었지요. 이 같은 예수 말씀은 당시 초대교회의 그 절박한 상황에서는 “보수반동”의 언술로 이해될 수도 있지요. 허나 세속권력의 악한 방법, 곧 폭력을 끝까지 철저하게 거부하시고, 대신 <비움>, <채움>, <채워짐>의 사랑 과정을 작동시켜, 이 같은 선순환을 통해 새 질서를 세우려 했던 운동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올곧은 뜻에서 가장 아름다운 진보적인 운동임을 우리는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랑 보다 더 강력하게 개인과 역사를 진보시키는 힘이 없다는 깨달음에 이르러야 합니다. 제도화된 폭력과 독선을 앞세워 지배했던 모든 권력은 인류 역사에서 오래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 권력이 막강했을수록, 인간의 고통은 막심했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청년 예수의 사랑 선포와 그 실천은 비록 그 권력의 막강한 힘 앞에 한낱 힘없는 자들의 운동으로 무시될 뿐 아니라, 처참하게 좌절되고 실패한 운동처럼 보이지만, 그의 운동은 영원한 감동의 울림으로 지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입니다. 비록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그 감동적 울림은 개인과 구조와 역사를 보다 새롭게 항상 진보시키는 힘으로 계속 작동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의 힘, 그것도 원수까지 사랑하는 힘이야 말로 가장 올곧은 뜻에서 인간과 역사와 구조를 온전케 하는 진보의 힘이라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아바 하나님의 사랑을 기독론의 입장에서 설득력 있게 개진한 독일 신학자 몰트만(Moltmann)의 탁월한 견해를 간단히 언급하고 싶습니다. 그는 1970년대 한국이 군사 권위주의 체제 아래서 신음하고 있을 때 한국을 여러 번 방문했습니다. 그때는 민중신학이 태동되던 때였습니다. 한국 민중과 민중신학자들과 동고(同苦)하기 위해서 한국에 왔지요. 그는 그때 그의 희망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이 갖는 적합성(relevance)을 한국 민중의 고난과 투쟁의 현장에서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기독론은 실제로 민중신학, 여성신학, 해방신학에 힘을 보태준 것 같습니다. 그에게 삼위일체론은 단순한 교리적 신학적 인식틀이 아니었습니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조직신학의 개념 이상이었습니다. 그는 삼위일체를 하나의 사건으로 봅니다. 아바가 그 아들 예수를 골고다에서 버린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아들과 동고한 사건입니다. 아들과 아바 간에 사랑의 동고는 성령을 통해 강하게 이루어집니다. 이 동고의 상호작용은 마침내 부활사건을 통해 그 수치스러운 십자가 처형자를 명예롭게 일으켜 세워주고 옹호하는 힘이지요. 성전 세력과 로마권력이 버렸던 아들을 아바는 변호해주셨고 옹호해주셨습니다. 정말 몰트만의 기독론이 탁월한 것은 십자가 사건에서 부자간 서로 동고사랑을 확인하면서, 그것을 부자간의 항복하기 사건으로 해석한다는 점입니다. 성부 아바와 성자 예수는 서로 지기, 서로 비우기 한다고 보았지요.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적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결코 추상적인 신조나 교리 아닙니다. 부자간의 서로 우아하게 지기는 역사 속에서 이미 져버린, 버려진 약자들을 주인으로 높여주는 새 사랑 운동에서 이미 구체화 되었습니다. 그래서 몰트만은 승리주의적 기독론을 거부하고, 역사의 기독론, 갈릴리 예수가 살아 움직이는 기독론을 펼쳤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신학, 그의 기독론은 예수부활을 통해 희망의 문, 미래의 문을 활짝 열어준다 하겠습니다.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데 다시 한 번 한국에 오고 싶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때 우리 공동체에 와서 말씀증거해주면 큰 기쁨이 되겠습니다. 하나님나라 잔치 맛을 볼 수 있게 되길 희망합니다.
이제 맺으며 교회가 갖는 의미를 하나님나라와 연관하여 되새겨 보고 싶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이미 와있는 하나님나라, 곧 <already>의 아바 나라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그 완벽한 아바 나라, 곧 <not yet>의 질서 사이에서 이 둘을 잇는 일을 하는 역사 공동체입니다. 이미 우리 속에서 느리나마 자라고 있는 겨자씨 공동체와, 느리지만 확실하게 번지고 있는 누룩공동체를 더욱 질적으로 성숙시키는 공동체입니다. 그러기에 이 공동체 안에서는 세상의 이기기 경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서로 우아하게 지려는 경쟁, 그래서 함께 이기는 기쁨을 서로 나누고 심화시켜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골고다에서 우아하게 패배하셨던 갈릴리 예수의 삶을 항상 거울로 삼아 우리의 부족한 점, 특별히 이기려는 부끄러운 내 눈 속의 대들보 같이 큰 결점을 먼저 똑똑히 보아야 합니다.
유대 묵시문학적 전승에서는 인간이 신을 마냥 기다리기만 했으나, 이미 우리 속에 번지고 있는 아바 나라에서는 아바 하나님이 우리를 지금 기다리고 계심을 새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의 나라, 곧 lovedom을 세우려고 노력할 때, 아바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그 큰 사랑의 팔을 펼쳐주십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우아하게 지려고 노력할 때, 예수님의 아바는 중개인 없이 직접 우리 손을 맞잡아 주십니다. 그리하여 독선과 폭력, 교만과 억압의 구조를 끝장내는 일에 힘을 보태주십니다. 이 같은 신인합동(神人合同)의 운동이 펼쳐지면서 <already>는 꾸준히 <not yet>을 향해 진보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십자군의 깃발이나, 혁명의 깃발은 필요 없습니다. 다만 누룩처럼 소리 없이 그러나 확실하고 착실하게 번지는 겸손한 힘이 필요합니다. 겨자씨처럼 적고 작은 힘이지만, 땅 속에서 썩어 자기는 없어지면서 새로운 형태로 성숙하는 겸손한 저력이 필요합니다. 승리주의의 깃발은 예수운동과 예수 몸의 공동체의 상징도, 실제도 아닙니다. 깃발 없이 조용히, 우아하게 지면서 마침내 서로 이기는 예수의 삶, 그 삶의 방식인 예수 문화, 브로커 없이 직접 아바 사랑을 체험하고 나누는 공동체, 그것이 바로 아바의 lovedom입니다. 교회는 그 지부일 따름이지요. 그러나 현실은 그러합니까? 바로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갈릴리 예수와 그의 아바를 다시 새롭게 찾아보고, 쳐다보고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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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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