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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기술의 발달과 기독교 신앙

사회역사경제 에수사랑실천............... 조회 수 3121 추천 수 0 2009.09.11 11:5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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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과학 기술의 발달과 기독교 신앙

1. 서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를 특징짓는 말이 있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대체로 많은 계층의 사람들이 공감을 느끼는 표현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한다. 그 시대를 표현하는 말은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공유했던 가치관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 시대의 정신을 분석,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그러면 이 시대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표현하는 말들 중에는 과학 기술 시대란 말이 대중들이나 역사가들에게 가장 넓은 공감을 얻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는 나라가 없고 경제 사정이 허락하는 한 해마다 이를 위한 투자를 늘려가고 있다. 나라마다 국내외적으로 해야할 일들이 산적해 있음에도 과학기술 개발을 위해 정부 차원에서 GNP의 수 %에 달하는 막대한 투자를 하는 것은 과학기술의 개발이 곧,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안보 등 국가의 제분야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투자의 결과로 인해 지난 반세기 동안에 개발된 과학기술, 그 중에서도 지난 사반 세기 동안의 과학기술 발전은 가히 눈부실 정도였다고 할 수 있다. 발명된 지(1947) 겨우 반세기를 넘긴 컴퓨터는 이제 그것이 없는 현대 문명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우리 문화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으며 10년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32비트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이 보편화 되었다. 불과 40여년 전(1960)에 발명된 레이저는 각종 산업 및 통신 분야의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불과 반세기 전(1946)에 발명된 트랜지스터는 거의 모든 전자기기에서 진공관을 밀어냈으며, 1963년에 시작된 집적회로 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64 메가비트 CMOS(complementary metal oxide semiconductor)를 시판할 만큼 고밀도로 집적되어 컴퓨터를 비롯하여 각종 사무 기기, 가정용 전자기기를 소형 경량화, 고성능화, 자동화하고 있다.

기술의 발달은 비단 전자기기 분야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인류 최초의 스푸트닉(Sputnik) 인공 위성이 쏘련에서 발사된 지(1957) 불과 40여년 동안 사람들은 달은 물론 화성, 목성, 토성에까지 우주선을 쏘아 보내고 지금은 4000개가 넘는 각종 인공위성이 지구 궤도를 선회하기에 이르렀다. DNA의 이중나선구조가 알려진 후(1953) 50여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생명과 유전의 생화학적 측면들은 대부분 이해하게 되었고 나아가 유전자의 인공적 조작에 의해 이제까지 신의 영역이라고 알려져 온 생명 자체를 조절하기에 이르렀다. 수정(受精)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체세포 핵으로 생명을 복제하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기도 한다. 그 외에도 자동제어, 신소재, 농업, 제약 및 의료, 운송 기기, 해양개발 등에서의 눈부신 발전은 대부분 불과 지난 수십년 동안에 일어난 것들이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달과 보급으로 인해 사람들은 이 시대를 가리켜 서슴지 않고 과학기술 시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흔히 과학기술 시대라는 말은 은연 중에 과학기술의 밝고 유익한 측면만 가정하고 있다. 과학기술은 당연히 발전해야 하고 발전된 과학기술은 인류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라도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제기된 문제는 과학기술을 더 발전시킴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 과학문명의 어두운 면을 살펴본다면 발전을 무조건 선하게 보는 자세는 신중히 재고해야 한다. 사실 오늘날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세계적 석학들의 모임인 <로마클럽>이 내놓은 보고서 <인류의 위기>라는 책에서는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문제로 다음 다섯 가지를 지적한다. 즉 공해, 식량부족, 인구과잉, 무기경쟁, 자원고갈이다. 이들 중 한 가지라도 해결되지 못하는 게 있다면 인류에게는 소망이 없다고 한다. 이들 다섯 가지 중에서 공해, 무기경쟁, 자원 고갈은 직접적으로 과학 기술의 발달로 야기된 것이며, 식량 부족이나 인구 과잉 역시 현대 과학 문명의 구조적 모순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특히 공해 문제는 과학기술의 직접적인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해 전부터 이미 유럽에서는 산성비로 인해 광대한 산림이 고사하고 있고 한국도 서울, 부산을 포함하여 포항, 울산 등지의 비의 산성도가 pH 5.0 이하로 떨어져 마음놓고 비를 맞을 수도 없는 형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도시의 스모그 현상은 전세계적 현상이며 산업폐기물, 핵폐기물, 연성세제 등으로 인한 수질 오염은 수많은 강과 바다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수자원의 죽음은 곧 인류의 멸망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는 전세계를 서른 번 이상 파멸로 이끌기에 충분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이런 무서운 파괴력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러시아는 매일 세 개에서 여섯 개, 연평균 일천 개 이상의 신형 핵폭탄을 제조하고 있다. 아무리 힘의 균형과 견제를 위해 필요하다고 해도 일단 제조된 무기는 반드시 실전에서 사용되었다는 역사적 교훈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현재와 같은 추세로 천연자원 사용이 증가해 갈 경우 50년 이내에 에너지 자원을 포함한 주요 자원이 거의 고갈될 것이라는 학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세계 각국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마구 자원을 소비하고 있다. 현재의 자원을 다 소비한 뒤엔 어떻게 후손들이 살아갈 것인가는 안중에 별로 없다. 또한 전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사막의 확대, 농토의 도로 및 공장부지화, 공해와 금비로 인한 농토의 황폐 및 소출의 격감, 게다가 부의 편중 등이 세계적으로 심각한 식량문제 및 인구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2. 과학기술에 대한 성경적 견해

그러면 성경은 야누스와 같이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과학기술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성경은 기술적 진보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진 않는다. 오히려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문화적 명령(창1:28)의 일부로서 생각한다. 자연을 신성시하여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터부시 한 고대 동양이나 희랍 사상에 비하여 성경은 자연을 피조 세계의 일부로, 인간을 그 피조 세계를 다스리고 가꾸는 정치가로서 본다. 물론 여기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다.

미국의 과학사가 화이트(Lynn White, Jr.)는 현대 기술의 발달로 인한 자연의 황폐를 기교의 잘못된 자연관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는 <생태계 위기의 역사적 뿌리>(the historic roots of our ecologic crisis) 라는 논문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위를 주장하는 유대-기독교적 정신 때문에 자연을 착취하지 못하게 하는 마지막 보루가 무너져 버렸다고 주장한다. 흔히 이를 Lynn White Syndrome이라 부른다. 자연이 신성시되었을 때는 자연이 보호되었으나 이 신성함이 제거되자 지구에 대한 인간의 약탈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물론 신자들이 신앙생활의 일부로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연을 잘 관리하지 못하므로 기술적 진보에 따른 자연의 황폐가 일어났다는 비난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의 근본 정신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오늘날의 기술개발의 부정적 요소는 이미 르네상스 때부터 싹트기 시작하여 계몽시대를 지나면서 성숙된 이기적인 자본주의 자연관 때문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은 자연에 대한 이해 증진과 보존 및 건설적인 조절(harnessing)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인류에게 봉사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성경적 견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사실은 근대 과학의 발흥이라고 할 수 있는 16·17세기의 과학 혁명의 기본정신이 성경정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머튼(Robert k. Merton)의 이름을 따라 '머튼 명제'(Merton Thesis)라고 부르는 주장에 의하면 청교도의 윤리관이 과학혁명기에 있어서 영국의 실험위주 과학이 발전하는데 기여했다고 한다. 네덜란드의 과학사가 호이카스(R. Hooykaas)는 신(神)은 무슨 일이나 마음대로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 주의론적(主意論的)(voluntaristic) 신학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적 사고 능력에 의해서만 자연세계를 이해하려는 합리주의적 자연관에 반대하므로 자연세계에 일어나는 현상은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경험주의적 자연관을 낳게 했다고 주장한다.

전능하신 신은 인간의 합리적 사고의 수준을 넘는 일도 얼마든지 일으킬 수가 있으므로 비합리적인 듯이 보이는 것조차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경험주의적 사고는 과학혁명의 직접적인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에게 합리적으로 보인 것들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본 것들을 주장하였다(요일 1:1). 기독교는 신자들에게 목격되었거나 믿을 만한 사람들로부터 알게 된 역사적 사실이나 실제적 현상에 바탕을 둔 것이므로 자연에 나타난 객관적 현상에 바탕을 둔 과학과 같은 경험주의적 색채가 짙다.

과학기술의 개발에 대한 또 하나의 기독교적 기초는 자연을 연구할 수 있는 인간의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진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이 갖는 여러 의미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적인 능력을 인간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비록 인간이 타락함으로 인해 원래의 모습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자연을 더듬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찾아 낼 수 있는 능력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인간의 창조적인 활동력은 자신이 그것을 감지하든지, 못하든지, 인정하든지 하지 않든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과학을 연구하고 기술을 개발하는 인간의 활동은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과학기술과 이를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분이 선하신 하나님이신데 어찌하여 오늘날에는 과학 기술이 인류의 존망을 위협하는 폭군으로 인간 위에 군림하고 있는가?

3. 과학기술의 이데올로기화

오늘날 인류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개발한 과학기술로 인해 더 큰 문제에 봉착하고 있는 이유를 분석한다면 한 마디로 과학 기술의 이데올로기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이데올로기는 무엇이며, 어떻게 생겨나며, 어떤 능력을 갖는가? 네덜란드의 하웃츠바르트(B. Coudzwaard)가 쓴 <현대 우상 이데올로기>(Idols of our time) 라는 책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란 말은 1789년 프랑스 혁명직전 계몽주의 시대에 생겨난 말로서 혁명이론가들이 사상의 혁명적 세계상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뜨라시(A. L. C. Tracy)가 처음 사용한 이 말의 본래적 의미는 특정한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도구로 사용되는 가치, 개념, 신념 및 규범의 체계를 말한다.

그러면 이데올로기는 어떤 특성을 갖는가? 이데올로기는 자기목적에 봉사하는 것이 선이요, 진리이며 정의요, 사랑이라고 규정하므로 본래적으로 종교적 특성을 갖고 있다. 이것은 처음부터의 목표가 잘못되어 생겨나는 게 아니라 너무나 정당한 목표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쉽게 사람들이 받아들인다. 그러면 정당한 목표의 추구가 언제 이데올로기화되는가? 하웃츠바르트는 정당한 목표의 추구의 근저에 우상숭배가 있을 때 이데올로기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즉, 우상숭배의 출현은 이데올로기의 출현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상이란 나무나 돌, 강이나 산이나 천체 등과 같이 가시적인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하나님 이외에 자신의 궁극적인 운명에 대한 신뢰감을 갖게 해주는 모든 것이 우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현대 과학 기술은 다분히 우상으로서의 모든 특성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오늘날 과학기술에 대한 현대인의 우상 숭배는 자연계의 가시적 대상에 대한 원시적 우상숭배와 여러 면에서 점점 일치해 가고 있다. 우상숭배에서는 공포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공포란 우상과 숭배자의 역할이 점차로 바뀌면서 발생한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우상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의지하여 점점 우상에게 생명력을 부여하기 시작한다. 일단 우상이 생명력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는 우상이 주인을 속박하므로 주객의 역할이 바뀐다. 주객전도가 완전히 일어나면 공포감을 통해 우상은 완전히 주인을 지배한다.

오늘날 과학기술은 많은 부분에서 인간과 주객전도가 되었다. 처음에는 주인된 인간에게 편익과 안전을 약속해 주는 듯 했으나 인간의 과도한 기대에 힘입어 생명력을 부여받으면서부터 인간을 협박하고 속박하기 시작했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로 핵무기나 컴퓨터 등을 들 수 있다. 처음에는 가장 확실한 평화의 보증으로 생각되어 온 핵무기가 이제는 전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으며 인류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군비경쟁에 휘말려 들고 있다.

컴퓨터는 어떠한가? 인간의 골치 아픈 문제들의 가장 확실한 해결사로 갈채를 받으며 등장한 컴퓨터가 이제는 인간이 컴퓨터에 맞추어지기를 강요하고 있다. 컴퓨터가 동원된 생산과정의 자동화로 수많은 근로자들은 실직 공포에 전전하고 있다.

인간의 과도한 기대 외에 과학기술의 이데올로기화를 촉진시킨 또 하나의 요인으로는 지나치게 파편화된(fragmented) 과학기술과 다원화된 사회구조를 들 수 있다. 과학기술의 분화와 사회구조의 다원화로 인해 현대인들은 자기가 종사하는 지극히 좁은 영역만을 알 뿐 자기 분야에서 한 발자국만 밖으로 나가도 거의 상식 정도의 지식만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실제로 우리가 매일 같이 사용하는 수많은 전자 기기나 생활용품들조차 그들의 원리나 구조를 알고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우리는 대부분 기기에 넣어 주는 input과 기기에서 나오는 output에 대한 지식만을 가지고 있을 뿐 사용 기기는 속을 모르는 일종의 검은 상자(black box)일 뿐이다.

무지는 경외심을 일으키고 공포는 경외심으로부터 나오며 우상숭배는 공포감에서 시작된다. 과학기술에 대한 일반인들의 무지는 그것에 대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과학 기술을 조종할 수 있는 과학자들은(물론 한 과학자는 지극히 좁은 자기 분야 밖에 모르지만) 이 시대에 새로운 제사장으로 등장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말의 진위에 관계없이 성직자들보다 과학자들의 말이 더 권위를 가지는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다.

4.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날 인류는 공산주의 보다 더 강한 과학기술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데올로기에 의한 지배가 곧 우상숭배 때문이라면 우상숭배를 가장 싫어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은 이 시대를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가? 프랑스 과학 기술 비평가인 엘룰(Jacques Ellul)처럼 기술 자체가 악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아니다! 천연 자원이나 과학 기술, 이를 연구할 수 있는 능력 등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이게 맡기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선한 청지기로서 이들을 잘 관리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이 선한 청지기인가?

먼저 선한 청지기는 과학기술을 우상화하여 섬기는 이 시대의 죄악에 자신도 공범자임을 양심적으로 고백한다. 사실 과학 기술 이데올로기는 세속화된 진보주의가 만들어낸 당연한 결과이다.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이와 같은 진보주의적 사관은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고대 중국의 회귀적 사관, 고대 희랍의 순환적 사관, 인도의 윤회적 사관 등은 진보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인본주의적 진보주의는 기독교의 진보적 사관이 세속화되어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 이데올로기의 형성 모판이며 이 시대에 지배적 세계관인 자연주의, 실존주의도 결국 기독교적 세계관이 세속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선한 청지기는 이 시대의 반역에 대한 공범자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솔직히 고백하여야 한다.

둘째, 선한 청지기는 과학 기술과 인간의 이성을 섬기는 이 시대를 향하여 담대히 말한다. 학문과 과학기술의 가치 중립 주장은 인간의 본질상 거짓임을 말해야 한다. '학문은 인격지식이다.'라고 말한 헝가리 태생의 영국철학자 폴라니(Michael Polanyi, 1891-1976)나 '학문은 세계관적이다.'라고 말한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는 이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또한 계몽시대의 우상이었던 이성은 자율적이 아니며 더 근본적인 세계관에 의해 지배됨을 말해야 한다. 그리고 군비 경쟁, 환경오염, 자원이용 등에 관하여도 청지기로서 할 말을 담대히 해야 한다.

셋째, 선한 청지기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과학기술이나 자연관리를 위해 작은 일일지라도 성실하게 노력한다. 과학 기술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만든 것이며(human contruction) 인간의 활동임을 선포하고 이데올로기로서 군림하는 현대 과학기술을 인간의 전적 통제를 받는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필요하다면 학교도 세워야 할 것이고 글도 쓰고 헌금도 해야할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은 단지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재림하실 우리 주님께 부끄럽지 않도록 불의가 하수(河水)처럼 흐르는 이 세상에서, 때로는 우리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것조차 포기하면서 재림을 적극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5.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속 사상을 겁없이 수용하는 자유주의도 문제지만 세상이 무서워 방공호(shelter)속에 숨어 있는 보수주의도 문제이다. 이제는 방공호에서 나와야 한다. 이 시대는 방공호가 무너질 위기에 있다. 그렇게 되면 방공호는 더 이상 총알을 피하는 피난처가 아니라 도리어 무덤이 된다.

허만(Kenneth Hermann)이 지적한 바와 같이 기독교인이란 말은 우리에게 주어진 다른 여러 신분들(예를 들면, 아버지, 학생, 탁구 치는 사람 등과 같은)에 추가되는 또 하나의 신분이 아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말은 마치 내가 인간이 된다는 말과 같이 우리의 전 인격과 존재를 포함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독교인 됨은 과학기술 이데올로기를 포함하는 전 생활영역에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감(identity)을 갖고 살 것을 요구한다. 현대는 싸르트르(Jean P. Sartre, 1905-1980)가 말한 것처럼 '휴머니즘의 스트립 쇼'(strip show)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어리석은 부자처럼 창고나 짓고 배나 두드리는 무의미한 삶이 아니라 착하고 충성되다는 칭찬을 듣는 선한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마25:21,23). 카이퍼(Abraham Kuyper)의 말처럼 '이 세상에서 그것은 내게 속하지 않았다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영역이 없게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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