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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잠4:20~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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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6년 1월 1일 주일 |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 이니라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궤휼을 네 입에서 버리며 사곡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네 발의 행할 첩경을 평탄케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새해를 시작하면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세계 각처에 여행을 많이 하고 살아왔습니다. 언제나 여행을 떠나기 전 마음을 다잡고 짐을 정성 드려 꾸립니다. 그래야 여행 중 어려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저는 성격상 여행 간다면 한 달 전에 짐을 꾸리기 시작합니다. 항상 제 주변에서 저에게 꾸중을 합니다. “뭘 여행가는 당일 날 꾸리면 되지 한 달 전 부터 짐을 꾸리느냐?” 그것은 짐을 일찍 꾸려 놓아야 자꾸 생각하면서 모지란 것을 추가하고 추가해서 여행지에 가서 물건이 모자라서 당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새해를 향해 벌써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이젠 우리 마음을 가다듬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피터 모페스라는 사람은 ‘우물을 청소하는데 주의를 기울이기 보다는 차라리 그대 마음을 청소하는데 주의를 기울이라. 그대의 양떼보다는 그대의 마음을 살찌게 하라. 그대의 집을 방어하기 보다는 그대의 마음을 지키기를 더욱 힘쓰라. 그대의 돈을 지키기 보다는 그대의 마음을 지키기에 더욱 힘쓰라’고 했으며, 청교도 존 훼볼은 ‘어떠한 조건하에서도 마음을 지키고 바르게 관리하는 일은 기독교인의 생활에 있어서 위대한 사명에 속 한다’고 말합니다. 새해에는 우리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다시 한 번 그런 마음으로 우리의 삶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본론]
1. 정의롭고 정직하고 거룩하게 살자
첫째로, 새해에는 더 정의롭고 정직하고 거룩하게 살기로 마음에 결정을 해야 합니다.
왜 조금 더 정의롭고 정직하고 거룩하게 살자고 말을 하냐면 완전히 정의롭고 완전히 정직하고 완전히 거룩한 사람은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밖에 태어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다 불안전합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완전을 향해서 노력해 가는 것이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006년 새해에는 우리가 마음에 결심을 하고 “전에 보다 조금 더 정의롭고 좀 더 정직하고 조금 더 거룩하게 살겠다고 각오를 하고 노력을 하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33에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우리 마음속에 항상 먼저 정의롭고 정직하고 거룩하게 살자는 생각이 가득해야 합니다. 정의는 소금과 같습니다. 성경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정의는 소금과 같으냐. 이 세상에 우리가 돈을 다 좋아하는데 돈에 정의가 없으면 부정, 부패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돈 플러스 정의가 있어야 올바르게 벌고 올바르게 사용하지 정의를 제켜놓고 돈을 벌면 부정, 부패하게 돈을 벌고 정권과 유착해서 돈을 벌고 돈을 부정과 부패에 사용하게 되고 방탕과 타락에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치, 사회의 검은돈이 정의를 던져 버리고 정의를 짓밟은 것을 우리가 잘 보는 것입니다.
잠언 10: 2에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불의하게 재물을 아무리 얻어 놓아도 나중에 다 독수리가 날개 치며 날아가 버리듯이 날아가 버리고 많은 상처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에 정의가 없으면 부정, 부패와 많은 고통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권력에도 정의가 없으면 독재와 폭정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당하게 권력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권력을 정의롭게 사용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으로 사용하면 권리가 부패해지고 독재와 폭정이 되는 것입니다. 항상 권리는 정의를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잠언 29: 2에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 하느니라”고 말하며, 아모스 5:10~11에는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 도다 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권력을 가지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호화찬란하게 살려고 한다 할지라도 정의가 없는 권력은 독재와 폭정이 되고 결국 하나님은 그들을 추방해 낼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942년 세계 2차 대전 중 독일의 히틀러는 추운 겨울에도 불구하고 30만 명의 독일군에게 소련 모스크바를 점령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참모들이 불가능하다고 아무리 말려도 막무가내로 그는 자신의 명령을 절대 취소할 수 없다고 고집 부렸습니다. 그의 권력에는 정의는 없고 독재와 폭력만 있었을 뿐입니다. 어쩔 수 없이 독일군은 넉넉하지 못한 식량과 매서운 추위 속에서 제대로 쓰지 못하는 무기를 가지고 진격을 감행했습니다. 결국 독일군은 소련군에게 패배하고 20만 명이 전사하고 9만 명이 포로가 되는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살아 돌아온 병사는 겨우 6천명에 불과했고, 히틀러 한 사람의 불의한 욕망과 고집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권력에 정의가 빠지면 독재와 폭정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우리는 북한을 보아도 마찬가지로 잘 알 수 있습니다. 김정일의 권력은 정의를 잃어버린 권력입니다. 독재와 폭력이 가득 찬 권력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은 국민들이 권력을 감시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인 것입니다. 언제나 국민들이 권력이 정의롭게 행해지는지 안 행해지는지를 감시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력이 정의를 잃어버리고 폭정이 되고 독재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항상 지켜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회생활에 정의가 없으면 폭력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주의, 주장을 폭력 시위로 표시하는 것은 범죄인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우리가 종종 보는 것은 자기의 주장과 주의를 관철하기 위해서 쇠파이프를 들고 몽둥이를 들고 휘두르는 장면을 많이 봅니다. 이것이 무슨 자기주의와 주장을 합니까? 사회생활에 정의가 없으면 폭력사회가 됩니다. 쇠파이프는 쇠파이프를 만나게 되고 주먹은 주먹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날 사회에 정의가 서야 폭력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어떠한 이권단체의 주장만 가지고 나가서 폭력을 휘두른다면 이 사회는 무정부주의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크게 회개해야 될 것은 우리 사회생활에 정의가 사라져가고 사회가 집단이기주의와 폭력사회로 변화되어 가는 것을 보고 탄식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아모스 5: 7에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너희가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거움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라고 하나님께서 탄식하셨습니다. 또한 24절에는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리게 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는 사회질서’라고 말했습니다. 정의가 있는 곳에는 질서와 평화, 발전과 번영이 있다는 것입니다. 디디필드는 ‘정의는 모든 것의 위에 있다. 성공도 좋고 부도 좋고 명예도 좋지만 정의는 그들 모두를 능가 한다’라고 말하므로 어떤 힘이나 권력도 정의를 넘어설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속담은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지키라’고 하였으며 신성 로마 황제인 페르난디 1세도 역시 ‘세계가 소멸할지라도 정의를 이루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이처럼 정의는 이처럼 소금과 같아서 정의가 없으면 부정, 부패와 독재, 폭력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더 내 자신으로부터 정의로워 지려고 노력하고 애를 쓰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 정의가 없으면 불행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부부가 남남끼리 모여서 자식 놓고 사는데 정의를 던져버리고 정의를 없애고 폭력과 완력으로 나가면 그 가정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잠언 13:23에는 “가난한 자는 밭을 경작하므로 양식이 많아지거늘 혹 불의로 인하여 가산을 탕패하는 자가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의가 들어오면 가산을 탕진하고 술 마시고 방탕하고 오락으로 모든 것을 다 날려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잠언 17: 1에서는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 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으며, 시편 112: 2~ 3에는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가정에 정의가 있으면 부와 귀도 함께 따른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970년 엘빈 토플러는 그가 쓴 ‘미래의 충격’이라는 책에서 가족의 파괴와 해체를 예언했습니다. 이 책에서는 앞으로 사회는 시험관 아기가 출산되고 실혼결혼, 계약결혼, 독신주의, 동성연애, 일부다처제 등이 법적으로 공인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한 일간지의 발표에 따르면 자녀들이 가출하는 이유 중에서 부모와의 갈등이 47.9%, 친구를 따라 가출한 경우가 20.4%, 개인적 요인이 19%, 돈을 벌기 위해 가출한 경우가 8%, 기타의 이유가 4.7%였습니다. 청소년이 가출의 절반이 부모와의 갈등 속에서 가정의 정의가 무너져서 일어난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혼한 사람들의 비율을 보면 결혼 1년 만에 이혼한 경우가 1위, 50대 부부의 이혼율이 두 번째였습니다. 그러나 요사이는 30대 이혼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30대 이혼이 늘면서 많은 아이들이 고아원으로 내몰립니다. 부모가 버젓이 살아있는데도 고아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서울시내 복지시설에 수용된 고아들의 50% 이상이 이혼 고아라고 합니다. 가정의 정의가 무너지면 이와 같은 가정적인 비극이 만무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정에 정의가 없으면 불행은 언제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불의 때문에 십자가에 처형당한 것입니다. 우리가 정의를 버리고 불의를 따라 행하므로 이 불의의 세력을 멸하고 우리에게 정의를 갖다 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의 일생에 지은 모든 불의를 당신이 책임지고 십자가에 올라가서 그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몸이 찢어지고 피를 흘리며 한없는 고통을 당하면서 우리의 심판을 받고 다 청산해 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3:18에도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말하십니다. 이처럼 우리의 불의를 헐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도록 길을 내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희생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1: 9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좀 더 정의로워 지기 위해서 우리의 불의를 매일같이 회개하고 자복하고 주의 보혈로 씻고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가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정의롭게 살고 정의를 가져오는 사람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우리는 새해에는 정직하게 살기로 마음에 결심을 하고 노력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삶의 환경이 거짓이 판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온 세상이 악한 마귀 아래 있고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에 거짓은 결국 파국인 것입니다. 요한일서 5:19에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라고 했으며, 요한복음 8:44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애비가 되었으므로 항상 사람들에게 거짓을 말하고 거짓을 가르치고 거짓으로 살게 만들어 갑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 세상에 살면서 거짓말 안하고는 정치인도 되지 못하고 경제인도 되지 못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조차도 마귀의 거짓말입니다. 작년 우리나라 기독실업인으로서 정직으로 승리한 분들의 이야기가 담긴 ‘나는 정직한 자의 형통을 믿는다’라는 책이 출간 되었습니다. 여자로써 성공한 김성주씨는 사업을 막 시작할 때 한 선배로부터 한국에서 성공하는 법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첫째, 술을 잘 마셔야 성공한다. 둘째, 거짓말을 잘해야 한국에서는 성공한다. 셋째, 흰 봉투를 잘 바쳐야 성공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김성주 사장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한국에서 사업을 성공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하나도 자기는 할수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나는 크리스챤이라 내가 회사 매출을 조금 더 올리겠다고 부패관행과 타협해야 하는가. 비록 나는 여자지만 비록 경험과 능력이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면 분명히 정직한 손으로 사업을 일으키는 사례를 만들 수 있을 거야.” 이렇게 결단하고 마음에 도와 달라고 기도 했습니다.
우리 마음에 결단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유부단해서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흔들리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나는 비록 사업이 망할지라도 정직하게 사업을 해보겠다고 결단을 내리면 그 결심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와 다짐에도 불구하고 초기 사업현장에서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몰아쳤습니다. 뇌물을 바치지 않자 멀쩡하게 잘 팔리던 브랜드가 면세점에서 퇴출을 당하는가 하면 함께 술을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떤 바이어는 3시간이나 서있게 하고서 채 3분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김성주 사장은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기도하며 정직하게 사업을 이끌어 나가기로 결정하고 그대로 시행했습니다. 그러자 1997년 그의 회사는 전체 한국 면세점의 5분의 1을 대행하면서 당당히 한국 최고의 면세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면세점 업계에서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놀라워했습니다. 이것은 기적이 아니라 성령께서 도와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살기로 결심을 하면 성령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인간적인 기적을 통해서 축복을 내려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말 하지 않고 술 먹지 않고 흰 봉투 건 내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는 관례는 마귀의 거짓말이었습니다.
거짓에 속은 아담을 보십시오. 마귀가 아담에게 와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된다.”고 하는 소리가 얼마나 번쩍 거리고 찬란한 거짓말입니까? 아담은 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먹고 거짓에 속은 그 인생의 결과는 처참한 파탄이요, 재앙밖에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마귀는 똑같은 수단으로 예수님을 속여 보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 배가 고파도 밥 안주니까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하려고 거짓말을 꾸몄습니다만 예수님은 속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유명하게 안 만들어 주니까 높은 뾰족한 탑에서 뛰어내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도록 해서 유명하게 되라. 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네게 부귀, 영화, 권세를 안주니 내게 절하라. 그리하면 내가 천하영광과 부귀영화를 주겠다고 속였으나 예수님은 거기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거짓에 속아 넘어가면 그 뒤에는 파탄이 다가오고 재앙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꿈에도 거짓말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16에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찌니라”고 했으며, 잠언 19: 5에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치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거짓은 처음은 달콤하고 좋은 것 같으나 훗날에 큰 형벌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3:16에도 “내가 해 아래서 또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도다”라고 탄식을 했습니다.
어느 법정소송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증인으로 채택된 12살의 소년이 있었습니다. 큰돈을 받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 편에 서서 변호사는 철저하게 반대신문을 펼쳤지만 소년의 증언에서 잘못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 신문기간이 되자 변호사는 엄숙하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희 아버지가 법원에서 증언할 때 어떻게 하라고 너에게 부탁하더냐?” 이 말에 소년은 “아버지가 내게 부탁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대편 변호사가 귀가 번쩍해서 “그래! 아버지가 어떻게 하라고 말하더냐?” 그때 소년은 담담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변호사님이 저를 곤란에 빠뜨리기 위해 이것저것 물어볼 것이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제가 정직하게 사실만을 말한다면 언제나 똑같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어떠한 유능한 변호사도 너를 올무에 넣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아라. 꿈에서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결국 정직이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사람만이 거짓이 판치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거짓은 일시적으로 형통한 것 같으나 뒤는 아담이 체험한 것처럼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쓰디쓴 재앙이 다가오게 됩니다. 거짓은 남을 속일뿐 아니라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자기 양심을 속입니다. 그러므로 서로의 신뢰를 일을 뿐 아니라 자기도 자기를 믿을 수 없는 인격적인 파탄을 가져오고 분열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잠언 12:22에는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갈라디아서 6장 7절에도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던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으로 심으면 파탄으로 거둡니다. 참으로 심으면 칭찬과 축복으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에 거짓이 달콤해 보여도 나중에는 쓰디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1?4후퇴 때 은행에서 대출 받았던 한 기업인이 피난을 가기 전에 은행을 찾아가 돈을 갚으려고 했습니다. 창고 직원은 “이 난리 통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돈을 뭐하려고 갚아요? 돈 가지고 피난가세요.” 그러나 그는 “아니야, 내가 기어코 돈은 갚고 피난을 가야지 빚을 떼먹고 피난갈수 없다.”고 고집을 해서 돈을 다 갚았습니다. 그 후에 그는 제주도에서 군부대 생선을 납품하는 원양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수중에 돈도, 담보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업자금 융자를 신청하기 위해 은행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은행장이 누구냐면 바로 1?4후퇴 때 창고에서 “돈을 갚지 말고 그냥 가세요.”하던 바로 그 당사자였습니다. 그분이 반색을 하고 반기면서 “당신 같은 사람에게는 담보도 보증인도 소용없어요. 그대로 공짜로 돈을 주어도 괜찮아요.” 2억을 담보해 주어서 그 돈으로 원양사업을 해서 크게 돈을 벌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사랑에 빚진 자’라는 책을 지은 한국유리회장 최태섭 장로의 이야기입니다. 누가 보든 말든 정직하게 사니까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갚아주신 것입니다. 정직은 더디 가는 것 같아 보이나 가장 빠른 성공의 지름길인 것입니다. 영국 격언에 ‘하루 행복하기를 원하면 이발소에 가라. 일주일만 행복해지기를 원하면 결혼을 해라. 한 달 정도 행복해지기 원하면 말을 사라. 1년쯤 행복해지기를 원하면 집을 사라. 그러나 평생에 행복하게 되기를 원한다면 정직한 인간이 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정직하려고 노력하고 애를 써도 안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영,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거짓의 영이 아니고 진리의 영입니다. 마귀는 거짓의 영이지만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 우리에게 보혜사가 되어 오셔서 진리를 믿고 진실을 말하고 진실하게 살 수 있도록 성령이 도와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위기에 처할 때 보혜사 성령이여 참말을 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진실하게 살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성령의 도우심을 우리가 간절히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13에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라고 말씀하셨으며, 에베소서 4:25에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 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새해에 우리는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세속의 홍수 속에 우리는 빠져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어디를 봐도 하나님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곳이 없습니다. 세상은 온전히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을 따라서 탐욕으로 넘실거리는 홍수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세상과 간격을 두고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 우주 가운데 거룩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 거룩하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살면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이 홍수 속에 빠져 허우적이는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살면 어떤 곳에 가서도 거룩하게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15~16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중심으로 사는 생활이 거룩한 생활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생활에 물들어 빠지지 말고 거룩하게 살아야 됩니다. 배가 물위에 떠있지 물이 배안에 들어오면 배는 침몰하고 맙니다. 세상에 살아도 세상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탐심과 우상숭배가 우리 속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지 않으면 세상을 떠나야 되는데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 세속이 꽉 들어찬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 속에 세상이 들어오면 안 됩니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굳게 중심을 붙잡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거룩한 생각, 거룩한 말, 거룩한 행동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3: 5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19에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요즘에 많은 사람들이 알콜 중독으로 고생합니다. 알콜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호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상담가들도 그들에게 음주량을 줄이거나 저녁에만 조금씩 마시라고 조언하지 않습니다. 알콜 중독자가 끊기 위해서는 단호하게 끊으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조금이라도 술을 입에 대면 절대로 끊을 수가 없습니다. 담배 끊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한 갑을 피우던 사람보고 “이제 반으로 줄이세요. 이제 하루에 두 개 피만 피세요.” 이런 말은 절대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번 피웠다하면 연속적으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단호하게 끊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우유부단하면 마귀가 언제나 우리를 붙잡고 놓지 않습니다. 단호해야 되는 것입니다. 병든 자도 병자 위해서 기도를 받고 난 다음에는 “나는 오늘부터 예수 이름으로 병에서 완전히 고침 받았다. 병하고 관계를 끊는다.” 단호하게 마음에서 끊어 버려야지 또 증상이 들어오면 “아이고 아직 아프구나. 아직 안 나았구나. 아직 마귀가 나를 지배하고 있구나.” 그렇게 자꾸 인정하면 그 사람은 병 낫지 않습니다. 단호하게 끊어 버려야 됩니다! “내가 성수주일 하겠다.” 어떠한 일에 있어서도 단호하게 교회 주일날 나가겠다고 결심을 하면 친구들이 “등산가자. 놀러가자.” 유혹을 해도 그것을 뿌리칠 수 있지만, 적당하게 상황을 봐서 “놀러 가기도 하고 교회도 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으면 그 사람은 언제나 타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단호한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우유부단하게 늘 선악과 밑을 처다 보고 마귀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타락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말씀으로 단호하게 마귀의 청구를 거부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는 매몰찬 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칼날같이 단호하게 끊을 것은 끊을 수 있어야 신앙생활이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신앙은 절대로 세상으로부터 자유 할 수가 없습니다. 거룩한 삶은 세상과 분명하게 구별된 삶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킨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령은 세속에 사는 우리들에게 세속을 이길 수 있고 죄와 사망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 2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6:22에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 세속에 물들어 사는 우리가 세상 줄 끊지 못할 때 성령께 부탁하면 성령이 그 날선 검으로 와서 세속 줄을 끊어 주시고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고 거룩하게 살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게 살기로 결심을 하고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2. 이웃을 섬기며 살자
둘째로, 우리는 2006년에는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항상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웃 사람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예수님이 짊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호남에 눈 폭탄이 떨어져서 호남의 농부들이 얼마나 고통을 당합니까? 그러나 온 전국에서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와서 혹은 부상을 당하고 지붕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면서도 열심히 눈을 치우고 비닐하우스를 정리해 주는 것을 보고 감동했습니다. 많은 군인들과 경찰들이 있는 힘을 다해서 협조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느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에게 가서 그 짐을 함께 짊어지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새해에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서 이웃을 섬기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함께 짊어져 주는 우리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짐 위에 자꾸 올라 갖다 주는 이런 얄미운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시편 68:19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 찌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매일같이 우리 주님은 우리의 짐을 짊어져 주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인간을 섬기려고 성육신하여 죽기까지 우리를 섬겨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 죄지은 것 네 탓 아니야 네 탓으로 죄를 지었으니 네가 책임져라.”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너 죄를 지었냐? 다 내가 너를 만들어서 세상에 보낸 것이 내 탓이다. 내가 짊어지마.” 주님은 우리 탓으로 돌리지 않고 우리의 모든 죄를 당신 탓으로 돌려서 책임지고 십자가에 대신 올라가서 몸 찢고 피 흘린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가정생활하면서 일이 생기면 남편 탓이라고 남편은 아내 탓이고 부모는 자식 탓이고 자식은 부모 탓이고 형제 탓으로 돌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무엇이 내가 책임질 줄 알아야 되고 내가 남의 짐을 지어줄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 6~8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제자들의 발을 씻겼습니다. 유대 나라에서는 샌들을 신고 길을 걷기 때문에 발이 더러워집니다. 귀한 손님으로 집에 가면 종들이 물을 떠와서 그 발을 씻어서 수건으로 닦아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떠나시기 전에 대야에 물을 떠와서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고 타올로 닦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너무나 감동하고 놀랐습니다. 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겼던 것입니까? 요한복음 13:14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이처럼 발을 씻어 준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 남의 종이 되어서 섬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 2~ 3에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윌리암 부스가 구세군을 창설한 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구세군에 지원했습니다. 그중에는 성공회 감독을 꿈꾸었던 사무엘 브랭클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부유한 생활을 뒤로 한 채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왔습니다. 부스 장군은 그의 지원을 마지못해 허락했지만 그의 교만한 태도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브랭클에게 다른 훈련생들의 군화를 닦으라고 지시했습니다. 무언가 대단 일을 기대했던 브랭클은 “내가 군화나 닦기 위해서 그 먼 대서양을 건너왔단 말인가”라는 생각으로 마음에 화가 잔뜩 났습니다. 그러던 하루는 환상 중에 예수님께서 비천한 제자들의 발위로 허리를 굽히시고 발을 씻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브랭클은 자신이 얼마나 교만했는가를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주님은 그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저는 그들의 구두를 닦겠습니다.’ 브랭클은 그들의 군화를 닦으며 섬김의 도리와 성공을 체험했었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구세군 최초의 미국인 감독관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섬기는 삶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군림하는 자세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허리를 굽히고 낮아지는 자세인 것입니다. 하늘나라에는 더구나 더 직위가 높아질수록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조지 스위팅은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베푸는 자의 가장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남에게 대접받으려면, 먼저 남을 대접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내가 존경받고 싶으면 남을 먼저 존경하고 사랑받고 싶으면 내가 먼저 사랑하고 내가 도움을 받고 싶으면 남을 먼저 도와줘야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12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하며, 갈라디아서 5:14에는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미국의 강철 왕 앤드류 카네기는 훌륭한 사업가이면서 동시에 자선 사업가였습니다. 그는 재산을 가지고 죽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써 부끄러운 일이라고 명언을 남기기로 유명합니다. 카네기는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경제 불황으로 13살 때 미국으로 건너왔기 때문에 초등학교 4학년 밖에 학교를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최선을 다해 돈을 벌고 사회에서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러자 카네기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철 왕이 되고 재벌이 되었습니다. 평소 생각대로 문화, 예술, 구제, 평화를 위해 여러 연구소를 설립하고 자선사업을 벌였습니다. 1892년에는 뉴욕에 카네기홀을 만들어 예술진흥에 주력하고 1902년 카네기 연구소를 창설했고 1904년에 카네기 기금을 1905년에는 카네기교육진흥재단을 1910년에는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을 설립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그는 각 지방의 교회에 약 7천대의 파이프 오르간을 기증하고 2천8백 곳의 도서관에 자금을 제공했습니다. 앤드류 카네기 한 사람이 일생동안 사회에 기증한 돈만 지금의 화폐가치로 몇 조원이 넘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꾸준히 나누어 주니까 하나님께서 자꾸 채워 주셔서 엄청난 업적을 남기게 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면 하나님께서 그를 더욱더 큰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남을 먼저 대접하면 내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남에게 친절을 베풀면 내가 친절을 받게 되고 사랑을 베풀면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 사랑을 실천하며 살자
셋째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2006년도에는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십시다.
사랑을 해야 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 생각하지만은 우리가 실천을 하지 않고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적은 것으로부터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을 가장 행복하게 하고 보람되게 하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본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이 실천되는 곳에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적은 사랑은 적은 하나님이 모습이 큰 사랑은 큰 하나님이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왔다갔다하면 좋은 종교인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교인을 하나님은 존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실천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강도만난 이야기를 여러분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한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있는 것 다 빼앗기고 옷도 벗기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던져 놓았는데 종교인 두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유대인입니다 모두다. 한사람은 제사장이요, 율법을 주장하는 사람으로서 비평하고 판단하고 지나갔습니다. 다른 사람은 레위인으로서 종교의식을 집행하는 사람으로 종교의식만 집행하면 되었지 내가 무슨 상관이냐. 무관심 했습니다. 오늘날 교인도 한가지입니다. 율법주의자는 남을 자꾸 비판하고 손가락질하고 판단하고 심판만 하고 도와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 의식주의자는 내가 주일날 교회 나오고 십일조 내고 기도하면 되었지 뭐 가난하고 병들고 헐벗고 굶주리고 고통당하는 사람 관심 가질게 뭐냐? 나만 잘 믿으면 되었지. 이러한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신앙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종교를 가진 사람이지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유대 종교주의자들에게 수치와 곤욕을 주기 위해서 일부러 이 말을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 앞에서 “자, 유대인은 율법주의자고 의식 주의자로써 남 비평하고 판단만 하고 무관심하지만 여기에 유대인도 아닌 이방 개 같은 사마리아인이지만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그는 기름을 붓고 포도주를 붓고 옷을 찢어 붕대로 만들어 감싸주고 싸매어 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집에 데려가서 돌보아 주었다. 누가 참된 이웃이냐?” 유대인도 별 도리 없이 “선을 베푼 사람입니다.”, “너도 그렇게 해라. 율법주의자가 되지 말고 의식주의자가 되지 말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존귀하게 여기고 귀하게 여기고 칭찬하고 상급을 주는 사람은 더 많은 율법을 행한 사람이 아니고 의식을 집행하는 사람이 아니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을 주님께서 귀하게 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초기 한국교회 역사에 헤론이라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테네시 의과대학이 생긴 이래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수재로써 그 대학의 교수회로 수련 후 교수로 남아 달라는 요청을 받을 정도로 공부를 잘하고 졸업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거부하고 한국에 선교사로 나왔습니다. 그는 언더우드보다 두 달 늦은 1885년 6월에 내한하여 알렌의 재중원에서 일을 했습니다. 알렌이 선교사직을 그만 둔 후에도 재중원장으로 일하면서 밤낮없이 한국 사람들을 치료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한국에 온지 5년이 되는 1890년 여름이 각종 전염병이 창궐했습니다. 다른 선교사들은 남한산성의 휴양지에서 피해서 쉬고 있었지만 헤론은 폭염 속에서도 서울까지 먼 거리를 드나들며 환자들을 치료했습니다. 그러다가 더위와 과로에 지쳐 이질에 걸려 3주간 앓다 7월 176일 이억만 리 낯선 땅에서 젊은 아내와 두 딸을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를 모르는 조선에 대한 사랑 때문에 교수요, 저명한 의사로써의 길을 버리고 낯선 땅에 와서 생명을 걸고 병들어 죽어가는 조선인들을 섬겨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분들 때문에 오늘 기독교가 한국에 뿌리를 내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이 한국사회에 창열하게 될 수 있는 것이 그들의 사랑의 헌신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백 마디의 말보다도 하나의 사랑의 행동이 더 많은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옛 속담에 한말의 쓸개 보다 한 방울의 꿀이 더 많은 파리를 잡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무리 거창한 율법행위와 의식을 집행한다 해도 사랑의 조그마한 행위위에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006년에 우리는 우리 가정에서 우리 바로 이웃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사랑은 허물을 사하고 정죄하고 심판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내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제사라는 것은 율법의 심판으로 짐승을 잡아 죽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심판하고 죽이는 것을 원하지 않고 용서해 주는 자비를 원한다고 주님은 말한 것입니다.
호세아 6: 6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했으며, 베드로전서 4: 8에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면 상대편의 죄를 자꾸 벗기는 것이 아니라 허물을 덮어주고 그들을 살려주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처를 치료해 줍니다. 미워하는 사람은 남의 상처를 자꾸 할퀴고 소금을 탁 칠하고 확확 비벼 버리는 것인데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을 어찌하든지 치료해 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로마서 15: 2에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고 말씀하셨으며, 데살로니가전서 5:14에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말했었습니다. 또한 야고보서 3:18에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짐을 나누어집니다. 남에게 짐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남의 짐을 같이 어깨를 밀어 넣고 짊어져 주어서 가볍게 만들어 주는 것이 사랑의 실천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 2에도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했으며, 로마서 12: 15~16에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체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빌립보서 2: 4에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남이 못되는 것을 좋아하고 남을 할퀴지 않습니다. 중상모략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남이 성공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언제나 뒤에서 수근 거리고 참소하고 남을 중상하고 모략하는 것은 사탄을 미워하는 것이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누가복음 6: 38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사랑은 성공을 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이 성공하도록 해주면 남은 나를 성공하도록 도와주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새해에 지극히 평범한 삶 속에서 정의와 정직과 거룩함을 추구하고 이웃을 섬기며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하여 노력을 하십시다. 이렇게 할 때 천국의 영광은 우리들을 통해 삶의 현장에 나타나게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새해에 여러분과 함께 하여 주셔서 여러분이 정의를 위해서 노력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애를 쓰고 결단을 내리고 거룩하게 살려고 성령의 도움을 늘 구하고 살며 여러분께서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 나를 희생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 때 하늘나라가 여러분을 통해서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에 넘쳐나게 되실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새해를 맞은 우리들이 우리 마음에 다짐을 하고 출발을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새해에는 우리가 다 평범한 사람이지만 좀 더 정의롭게 살도록 노력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정의롭게 살겠다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게 도와주시옵시고 어찌하든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정직하게 살고 거짓을 버리며 살게 도와주시고 세속에 물들지 말고 거룩하게 살도록 하나님의 성령의 도움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여 새해에는 이웃을 섬기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가족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며 나라를 섬기고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적은 일에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도와주시옵시고 큰일을 못한다고 해서 사랑실천을 포기하지 말고 지극히 적은 일에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래서 천국의 영광이 우리를 통해서 온 땅에 넘쳐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새해를 시작하면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세계 각처에 여행을 많이 하고 살아왔습니다. 언제나 여행을 떠나기 전 마음을 다잡고 짐을 정성 드려 꾸립니다. 그래야 여행 중 어려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저는 성격상 여행 간다면 한 달 전에 짐을 꾸리기 시작합니다. 항상 제 주변에서 저에게 꾸중을 합니다. “뭘 여행가는 당일 날 꾸리면 되지 한 달 전 부터 짐을 꾸리느냐?” 그것은 짐을 일찍 꾸려 놓아야 자꾸 생각하면서 모지란 것을 추가하고 추가해서 여행지에 가서 물건이 모자라서 당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새해를 향해 벌써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이젠 우리 마음을 가다듬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피터 모페스라는 사람은 ‘우물을 청소하는데 주의를 기울이기 보다는 차라리 그대 마음을 청소하는데 주의를 기울이라. 그대의 양떼보다는 그대의 마음을 살찌게 하라. 그대의 집을 방어하기 보다는 그대의 마음을 지키기를 더욱 힘쓰라. 그대의 돈을 지키기 보다는 그대의 마음을 지키기에 더욱 힘쓰라’고 했으며, 청교도 존 훼볼은 ‘어떠한 조건하에서도 마음을 지키고 바르게 관리하는 일은 기독교인의 생활에 있어서 위대한 사명에 속 한다’고 말합니다. 새해에는 우리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다시 한 번 그런 마음으로 우리의 삶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본론]
1. 정의롭고 정직하고 거룩하게 살자
첫째로, 새해에는 더 정의롭고 정직하고 거룩하게 살기로 마음에 결정을 해야 합니다.
왜 조금 더 정의롭고 정직하고 거룩하게 살자고 말을 하냐면 완전히 정의롭고 완전히 정직하고 완전히 거룩한 사람은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밖에 태어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다 불안전합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완전을 향해서 노력해 가는 것이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006년 새해에는 우리가 마음에 결심을 하고 “전에 보다 조금 더 정의롭고 좀 더 정직하고 조금 더 거룩하게 살겠다고 각오를 하고 노력을 하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33에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우리 마음속에 항상 먼저 정의롭고 정직하고 거룩하게 살자는 생각이 가득해야 합니다. 정의는 소금과 같습니다. 성경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정의는 소금과 같으냐. 이 세상에 우리가 돈을 다 좋아하는데 돈에 정의가 없으면 부정, 부패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돈 플러스 정의가 있어야 올바르게 벌고 올바르게 사용하지 정의를 제켜놓고 돈을 벌면 부정, 부패하게 돈을 벌고 정권과 유착해서 돈을 벌고 돈을 부정과 부패에 사용하게 되고 방탕과 타락에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치, 사회의 검은돈이 정의를 던져 버리고 정의를 짓밟은 것을 우리가 잘 보는 것입니다.
잠언 10: 2에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불의하게 재물을 아무리 얻어 놓아도 나중에 다 독수리가 날개 치며 날아가 버리듯이 날아가 버리고 많은 상처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에 정의가 없으면 부정, 부패와 많은 고통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권력에도 정의가 없으면 독재와 폭정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당하게 권력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권력을 정의롭게 사용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으로 사용하면 권리가 부패해지고 독재와 폭정이 되는 것입니다. 항상 권리는 정의를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잠언 29: 2에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 하느니라”고 말하며, 아모스 5:10~11에는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 도다 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권력을 가지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호화찬란하게 살려고 한다 할지라도 정의가 없는 권력은 독재와 폭정이 되고 결국 하나님은 그들을 추방해 낼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942년 세계 2차 대전 중 독일의 히틀러는 추운 겨울에도 불구하고 30만 명의 독일군에게 소련 모스크바를 점령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참모들이 불가능하다고 아무리 말려도 막무가내로 그는 자신의 명령을 절대 취소할 수 없다고 고집 부렸습니다. 그의 권력에는 정의는 없고 독재와 폭력만 있었을 뿐입니다. 어쩔 수 없이 독일군은 넉넉하지 못한 식량과 매서운 추위 속에서 제대로 쓰지 못하는 무기를 가지고 진격을 감행했습니다. 결국 독일군은 소련군에게 패배하고 20만 명이 전사하고 9만 명이 포로가 되는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살아 돌아온 병사는 겨우 6천명에 불과했고, 히틀러 한 사람의 불의한 욕망과 고집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권력에 정의가 빠지면 독재와 폭정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우리는 북한을 보아도 마찬가지로 잘 알 수 있습니다. 김정일의 권력은 정의를 잃어버린 권력입니다. 독재와 폭력이 가득 찬 권력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은 국민들이 권력을 감시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인 것입니다. 언제나 국민들이 권력이 정의롭게 행해지는지 안 행해지는지를 감시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력이 정의를 잃어버리고 폭정이 되고 독재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항상 지켜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회생활에 정의가 없으면 폭력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주의, 주장을 폭력 시위로 표시하는 것은 범죄인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우리가 종종 보는 것은 자기의 주장과 주의를 관철하기 위해서 쇠파이프를 들고 몽둥이를 들고 휘두르는 장면을 많이 봅니다. 이것이 무슨 자기주의와 주장을 합니까? 사회생활에 정의가 없으면 폭력사회가 됩니다. 쇠파이프는 쇠파이프를 만나게 되고 주먹은 주먹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날 사회에 정의가 서야 폭력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어떠한 이권단체의 주장만 가지고 나가서 폭력을 휘두른다면 이 사회는 무정부주의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크게 회개해야 될 것은 우리 사회생활에 정의가 사라져가고 사회가 집단이기주의와 폭력사회로 변화되어 가는 것을 보고 탄식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아모스 5: 7에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너희가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거움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라고 하나님께서 탄식하셨습니다. 또한 24절에는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리게 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는 사회질서’라고 말했습니다. 정의가 있는 곳에는 질서와 평화, 발전과 번영이 있다는 것입니다. 디디필드는 ‘정의는 모든 것의 위에 있다. 성공도 좋고 부도 좋고 명예도 좋지만 정의는 그들 모두를 능가 한다’라고 말하므로 어떤 힘이나 권력도 정의를 넘어설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속담은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지키라’고 하였으며 신성 로마 황제인 페르난디 1세도 역시 ‘세계가 소멸할지라도 정의를 이루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이처럼 정의는 이처럼 소금과 같아서 정의가 없으면 부정, 부패와 독재, 폭력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더 내 자신으로부터 정의로워 지려고 노력하고 애를 쓰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 정의가 없으면 불행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부부가 남남끼리 모여서 자식 놓고 사는데 정의를 던져버리고 정의를 없애고 폭력과 완력으로 나가면 그 가정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잠언 13:23에는 “가난한 자는 밭을 경작하므로 양식이 많아지거늘 혹 불의로 인하여 가산을 탕패하는 자가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의가 들어오면 가산을 탕진하고 술 마시고 방탕하고 오락으로 모든 것을 다 날려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잠언 17: 1에서는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 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으며, 시편 112: 2~ 3에는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가정에 정의가 있으면 부와 귀도 함께 따른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970년 엘빈 토플러는 그가 쓴 ‘미래의 충격’이라는 책에서 가족의 파괴와 해체를 예언했습니다. 이 책에서는 앞으로 사회는 시험관 아기가 출산되고 실혼결혼, 계약결혼, 독신주의, 동성연애, 일부다처제 등이 법적으로 공인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한 일간지의 발표에 따르면 자녀들이 가출하는 이유 중에서 부모와의 갈등이 47.9%, 친구를 따라 가출한 경우가 20.4%, 개인적 요인이 19%, 돈을 벌기 위해 가출한 경우가 8%, 기타의 이유가 4.7%였습니다. 청소년이 가출의 절반이 부모와의 갈등 속에서 가정의 정의가 무너져서 일어난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혼한 사람들의 비율을 보면 결혼 1년 만에 이혼한 경우가 1위, 50대 부부의 이혼율이 두 번째였습니다. 그러나 요사이는 30대 이혼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30대 이혼이 늘면서 많은 아이들이 고아원으로 내몰립니다. 부모가 버젓이 살아있는데도 고아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서울시내 복지시설에 수용된 고아들의 50% 이상이 이혼 고아라고 합니다. 가정의 정의가 무너지면 이와 같은 가정적인 비극이 만무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정에 정의가 없으면 불행은 언제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불의 때문에 십자가에 처형당한 것입니다. 우리가 정의를 버리고 불의를 따라 행하므로 이 불의의 세력을 멸하고 우리에게 정의를 갖다 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의 일생에 지은 모든 불의를 당신이 책임지고 십자가에 올라가서 그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몸이 찢어지고 피를 흘리며 한없는 고통을 당하면서 우리의 심판을 받고 다 청산해 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3:18에도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말하십니다. 이처럼 우리의 불의를 헐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도록 길을 내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희생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1: 9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좀 더 정의로워 지기 위해서 우리의 불의를 매일같이 회개하고 자복하고 주의 보혈로 씻고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가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정의롭게 살고 정의를 가져오는 사람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우리는 새해에는 정직하게 살기로 마음에 결심을 하고 노력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삶의 환경이 거짓이 판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온 세상이 악한 마귀 아래 있고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에 거짓은 결국 파국인 것입니다. 요한일서 5:19에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라고 했으며, 요한복음 8:44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애비가 되었으므로 항상 사람들에게 거짓을 말하고 거짓을 가르치고 거짓으로 살게 만들어 갑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 세상에 살면서 거짓말 안하고는 정치인도 되지 못하고 경제인도 되지 못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조차도 마귀의 거짓말입니다. 작년 우리나라 기독실업인으로서 정직으로 승리한 분들의 이야기가 담긴 ‘나는 정직한 자의 형통을 믿는다’라는 책이 출간 되었습니다. 여자로써 성공한 김성주씨는 사업을 막 시작할 때 한 선배로부터 한국에서 성공하는 법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첫째, 술을 잘 마셔야 성공한다. 둘째, 거짓말을 잘해야 한국에서는 성공한다. 셋째, 흰 봉투를 잘 바쳐야 성공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김성주 사장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한국에서 사업을 성공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하나도 자기는 할수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나는 크리스챤이라 내가 회사 매출을 조금 더 올리겠다고 부패관행과 타협해야 하는가. 비록 나는 여자지만 비록 경험과 능력이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면 분명히 정직한 손으로 사업을 일으키는 사례를 만들 수 있을 거야.” 이렇게 결단하고 마음에 도와 달라고 기도 했습니다.
우리 마음에 결단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유부단해서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흔들리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나는 비록 사업이 망할지라도 정직하게 사업을 해보겠다고 결단을 내리면 그 결심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와 다짐에도 불구하고 초기 사업현장에서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몰아쳤습니다. 뇌물을 바치지 않자 멀쩡하게 잘 팔리던 브랜드가 면세점에서 퇴출을 당하는가 하면 함께 술을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떤 바이어는 3시간이나 서있게 하고서 채 3분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김성주 사장은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기도하며 정직하게 사업을 이끌어 나가기로 결정하고 그대로 시행했습니다. 그러자 1997년 그의 회사는 전체 한국 면세점의 5분의 1을 대행하면서 당당히 한국 최고의 면세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면세점 업계에서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놀라워했습니다. 이것은 기적이 아니라 성령께서 도와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살기로 결심을 하면 성령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인간적인 기적을 통해서 축복을 내려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말 하지 않고 술 먹지 않고 흰 봉투 건 내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는 관례는 마귀의 거짓말이었습니다.
거짓에 속은 아담을 보십시오. 마귀가 아담에게 와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된다.”고 하는 소리가 얼마나 번쩍 거리고 찬란한 거짓말입니까? 아담은 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먹고 거짓에 속은 그 인생의 결과는 처참한 파탄이요, 재앙밖에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마귀는 똑같은 수단으로 예수님을 속여 보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 배가 고파도 밥 안주니까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하려고 거짓말을 꾸몄습니다만 예수님은 속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유명하게 안 만들어 주니까 높은 뾰족한 탑에서 뛰어내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도록 해서 유명하게 되라. 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네게 부귀, 영화, 권세를 안주니 내게 절하라. 그리하면 내가 천하영광과 부귀영화를 주겠다고 속였으나 예수님은 거기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거짓에 속아 넘어가면 그 뒤에는 파탄이 다가오고 재앙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꿈에도 거짓말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16에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찌니라”고 했으며, 잠언 19: 5에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치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거짓은 처음은 달콤하고 좋은 것 같으나 훗날에 큰 형벌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3:16에도 “내가 해 아래서 또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도다”라고 탄식을 했습니다.
어느 법정소송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증인으로 채택된 12살의 소년이 있었습니다. 큰돈을 받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 편에 서서 변호사는 철저하게 반대신문을 펼쳤지만 소년의 증언에서 잘못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 신문기간이 되자 변호사는 엄숙하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희 아버지가 법원에서 증언할 때 어떻게 하라고 너에게 부탁하더냐?” 이 말에 소년은 “아버지가 내게 부탁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대편 변호사가 귀가 번쩍해서 “그래! 아버지가 어떻게 하라고 말하더냐?” 그때 소년은 담담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변호사님이 저를 곤란에 빠뜨리기 위해 이것저것 물어볼 것이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제가 정직하게 사실만을 말한다면 언제나 똑같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어떠한 유능한 변호사도 너를 올무에 넣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아라. 꿈에서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결국 정직이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사람만이 거짓이 판치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거짓은 일시적으로 형통한 것 같으나 뒤는 아담이 체험한 것처럼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쓰디쓴 재앙이 다가오게 됩니다. 거짓은 남을 속일뿐 아니라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자기 양심을 속입니다. 그러므로 서로의 신뢰를 일을 뿐 아니라 자기도 자기를 믿을 수 없는 인격적인 파탄을 가져오고 분열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잠언 12:22에는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갈라디아서 6장 7절에도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던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으로 심으면 파탄으로 거둡니다. 참으로 심으면 칭찬과 축복으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에 거짓이 달콤해 보여도 나중에는 쓰디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1?4후퇴 때 은행에서 대출 받았던 한 기업인이 피난을 가기 전에 은행을 찾아가 돈을 갚으려고 했습니다. 창고 직원은 “이 난리 통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돈을 뭐하려고 갚아요? 돈 가지고 피난가세요.” 그러나 그는 “아니야, 내가 기어코 돈은 갚고 피난을 가야지 빚을 떼먹고 피난갈수 없다.”고 고집을 해서 돈을 다 갚았습니다. 그 후에 그는 제주도에서 군부대 생선을 납품하는 원양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수중에 돈도, 담보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업자금 융자를 신청하기 위해 은행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은행장이 누구냐면 바로 1?4후퇴 때 창고에서 “돈을 갚지 말고 그냥 가세요.”하던 바로 그 당사자였습니다. 그분이 반색을 하고 반기면서 “당신 같은 사람에게는 담보도 보증인도 소용없어요. 그대로 공짜로 돈을 주어도 괜찮아요.” 2억을 담보해 주어서 그 돈으로 원양사업을 해서 크게 돈을 벌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사랑에 빚진 자’라는 책을 지은 한국유리회장 최태섭 장로의 이야기입니다. 누가 보든 말든 정직하게 사니까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갚아주신 것입니다. 정직은 더디 가는 것 같아 보이나 가장 빠른 성공의 지름길인 것입니다. 영국 격언에 ‘하루 행복하기를 원하면 이발소에 가라. 일주일만 행복해지기를 원하면 결혼을 해라. 한 달 정도 행복해지기 원하면 말을 사라. 1년쯤 행복해지기를 원하면 집을 사라. 그러나 평생에 행복하게 되기를 원한다면 정직한 인간이 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정직하려고 노력하고 애를 써도 안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영,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거짓의 영이 아니고 진리의 영입니다. 마귀는 거짓의 영이지만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 우리에게 보혜사가 되어 오셔서 진리를 믿고 진실을 말하고 진실하게 살 수 있도록 성령이 도와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위기에 처할 때 보혜사 성령이여 참말을 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진실하게 살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성령의 도우심을 우리가 간절히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13에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라고 말씀하셨으며, 에베소서 4:25에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 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새해에 우리는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세속의 홍수 속에 우리는 빠져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어디를 봐도 하나님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곳이 없습니다. 세상은 온전히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을 따라서 탐욕으로 넘실거리는 홍수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세상과 간격을 두고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 우주 가운데 거룩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 거룩하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살면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이 홍수 속에 빠져 허우적이는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살면 어떤 곳에 가서도 거룩하게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15~16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중심으로 사는 생활이 거룩한 생활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생활에 물들어 빠지지 말고 거룩하게 살아야 됩니다. 배가 물위에 떠있지 물이 배안에 들어오면 배는 침몰하고 맙니다. 세상에 살아도 세상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탐심과 우상숭배가 우리 속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지 않으면 세상을 떠나야 되는데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 세속이 꽉 들어찬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 속에 세상이 들어오면 안 됩니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굳게 중심을 붙잡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거룩한 생각, 거룩한 말, 거룩한 행동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3: 5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19에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요즘에 많은 사람들이 알콜 중독으로 고생합니다. 알콜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호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상담가들도 그들에게 음주량을 줄이거나 저녁에만 조금씩 마시라고 조언하지 않습니다. 알콜 중독자가 끊기 위해서는 단호하게 끊으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조금이라도 술을 입에 대면 절대로 끊을 수가 없습니다. 담배 끊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한 갑을 피우던 사람보고 “이제 반으로 줄이세요. 이제 하루에 두 개 피만 피세요.” 이런 말은 절대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번 피웠다하면 연속적으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단호하게 끊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우유부단하면 마귀가 언제나 우리를 붙잡고 놓지 않습니다. 단호해야 되는 것입니다. 병든 자도 병자 위해서 기도를 받고 난 다음에는 “나는 오늘부터 예수 이름으로 병에서 완전히 고침 받았다. 병하고 관계를 끊는다.” 단호하게 마음에서 끊어 버려야지 또 증상이 들어오면 “아이고 아직 아프구나. 아직 안 나았구나. 아직 마귀가 나를 지배하고 있구나.” 그렇게 자꾸 인정하면 그 사람은 병 낫지 않습니다. 단호하게 끊어 버려야 됩니다! “내가 성수주일 하겠다.” 어떠한 일에 있어서도 단호하게 교회 주일날 나가겠다고 결심을 하면 친구들이 “등산가자. 놀러가자.” 유혹을 해도 그것을 뿌리칠 수 있지만, 적당하게 상황을 봐서 “놀러 가기도 하고 교회도 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으면 그 사람은 언제나 타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단호한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우유부단하게 늘 선악과 밑을 처다 보고 마귀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타락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말씀으로 단호하게 마귀의 청구를 거부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는 매몰찬 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칼날같이 단호하게 끊을 것은 끊을 수 있어야 신앙생활이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신앙은 절대로 세상으로부터 자유 할 수가 없습니다. 거룩한 삶은 세상과 분명하게 구별된 삶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킨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령은 세속에 사는 우리들에게 세속을 이길 수 있고 죄와 사망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 2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6:22에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 세속에 물들어 사는 우리가 세상 줄 끊지 못할 때 성령께 부탁하면 성령이 그 날선 검으로 와서 세속 줄을 끊어 주시고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고 거룩하게 살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게 살기로 결심을 하고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2. 이웃을 섬기며 살자
둘째로, 우리는 2006년에는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항상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웃 사람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예수님이 짊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호남에 눈 폭탄이 떨어져서 호남의 농부들이 얼마나 고통을 당합니까? 그러나 온 전국에서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와서 혹은 부상을 당하고 지붕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면서도 열심히 눈을 치우고 비닐하우스를 정리해 주는 것을 보고 감동했습니다. 많은 군인들과 경찰들이 있는 힘을 다해서 협조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느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에게 가서 그 짐을 함께 짊어지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새해에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서 이웃을 섬기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함께 짊어져 주는 우리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짐 위에 자꾸 올라 갖다 주는 이런 얄미운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시편 68:19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 찌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매일같이 우리 주님은 우리의 짐을 짊어져 주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인간을 섬기려고 성육신하여 죽기까지 우리를 섬겨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 죄지은 것 네 탓 아니야 네 탓으로 죄를 지었으니 네가 책임져라.”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너 죄를 지었냐? 다 내가 너를 만들어서 세상에 보낸 것이 내 탓이다. 내가 짊어지마.” 주님은 우리 탓으로 돌리지 않고 우리의 모든 죄를 당신 탓으로 돌려서 책임지고 십자가에 대신 올라가서 몸 찢고 피 흘린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가정생활하면서 일이 생기면 남편 탓이라고 남편은 아내 탓이고 부모는 자식 탓이고 자식은 부모 탓이고 형제 탓으로 돌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무엇이 내가 책임질 줄 알아야 되고 내가 남의 짐을 지어줄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 6~8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제자들의 발을 씻겼습니다. 유대 나라에서는 샌들을 신고 길을 걷기 때문에 발이 더러워집니다. 귀한 손님으로 집에 가면 종들이 물을 떠와서 그 발을 씻어서 수건으로 닦아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떠나시기 전에 대야에 물을 떠와서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고 타올로 닦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너무나 감동하고 놀랐습니다. 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겼던 것입니까? 요한복음 13:14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이처럼 발을 씻어 준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 남의 종이 되어서 섬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 2~ 3에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윌리암 부스가 구세군을 창설한 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구세군에 지원했습니다. 그중에는 성공회 감독을 꿈꾸었던 사무엘 브랭클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부유한 생활을 뒤로 한 채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왔습니다. 부스 장군은 그의 지원을 마지못해 허락했지만 그의 교만한 태도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브랭클에게 다른 훈련생들의 군화를 닦으라고 지시했습니다. 무언가 대단 일을 기대했던 브랭클은 “내가 군화나 닦기 위해서 그 먼 대서양을 건너왔단 말인가”라는 생각으로 마음에 화가 잔뜩 났습니다. 그러던 하루는 환상 중에 예수님께서 비천한 제자들의 발위로 허리를 굽히시고 발을 씻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브랭클은 자신이 얼마나 교만했는가를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주님은 그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저는 그들의 구두를 닦겠습니다.’ 브랭클은 그들의 군화를 닦으며 섬김의 도리와 성공을 체험했었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구세군 최초의 미국인 감독관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섬기는 삶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군림하는 자세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허리를 굽히고 낮아지는 자세인 것입니다. 하늘나라에는 더구나 더 직위가 높아질수록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조지 스위팅은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베푸는 자의 가장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남에게 대접받으려면, 먼저 남을 대접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내가 존경받고 싶으면 남을 먼저 존경하고 사랑받고 싶으면 내가 먼저 사랑하고 내가 도움을 받고 싶으면 남을 먼저 도와줘야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12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하며, 갈라디아서 5:14에는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미국의 강철 왕 앤드류 카네기는 훌륭한 사업가이면서 동시에 자선 사업가였습니다. 그는 재산을 가지고 죽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써 부끄러운 일이라고 명언을 남기기로 유명합니다. 카네기는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경제 불황으로 13살 때 미국으로 건너왔기 때문에 초등학교 4학년 밖에 학교를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최선을 다해 돈을 벌고 사회에서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러자 카네기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철 왕이 되고 재벌이 되었습니다. 평소 생각대로 문화, 예술, 구제, 평화를 위해 여러 연구소를 설립하고 자선사업을 벌였습니다. 1892년에는 뉴욕에 카네기홀을 만들어 예술진흥에 주력하고 1902년 카네기 연구소를 창설했고 1904년에 카네기 기금을 1905년에는 카네기교육진흥재단을 1910년에는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을 설립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그는 각 지방의 교회에 약 7천대의 파이프 오르간을 기증하고 2천8백 곳의 도서관에 자금을 제공했습니다. 앤드류 카네기 한 사람이 일생동안 사회에 기증한 돈만 지금의 화폐가치로 몇 조원이 넘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꾸준히 나누어 주니까 하나님께서 자꾸 채워 주셔서 엄청난 업적을 남기게 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면 하나님께서 그를 더욱더 큰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남을 먼저 대접하면 내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남에게 친절을 베풀면 내가 친절을 받게 되고 사랑을 베풀면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 사랑을 실천하며 살자
셋째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2006년도에는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십시다.
사랑을 해야 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 생각하지만은 우리가 실천을 하지 않고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적은 것으로부터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을 가장 행복하게 하고 보람되게 하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본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이 실천되는 곳에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적은 사랑은 적은 하나님이 모습이 큰 사랑은 큰 하나님이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왔다갔다하면 좋은 종교인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교인을 하나님은 존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실천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강도만난 이야기를 여러분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한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있는 것 다 빼앗기고 옷도 벗기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던져 놓았는데 종교인 두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유대인입니다 모두다. 한사람은 제사장이요, 율법을 주장하는 사람으로서 비평하고 판단하고 지나갔습니다. 다른 사람은 레위인으로서 종교의식을 집행하는 사람으로 종교의식만 집행하면 되었지 내가 무슨 상관이냐. 무관심 했습니다. 오늘날 교인도 한가지입니다. 율법주의자는 남을 자꾸 비판하고 손가락질하고 판단하고 심판만 하고 도와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 의식주의자는 내가 주일날 교회 나오고 십일조 내고 기도하면 되었지 뭐 가난하고 병들고 헐벗고 굶주리고 고통당하는 사람 관심 가질게 뭐냐? 나만 잘 믿으면 되었지. 이러한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신앙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종교를 가진 사람이지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유대 종교주의자들에게 수치와 곤욕을 주기 위해서 일부러 이 말을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 앞에서 “자, 유대인은 율법주의자고 의식 주의자로써 남 비평하고 판단만 하고 무관심하지만 여기에 유대인도 아닌 이방 개 같은 사마리아인이지만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그는 기름을 붓고 포도주를 붓고 옷을 찢어 붕대로 만들어 감싸주고 싸매어 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집에 데려가서 돌보아 주었다. 누가 참된 이웃이냐?” 유대인도 별 도리 없이 “선을 베푼 사람입니다.”, “너도 그렇게 해라. 율법주의자가 되지 말고 의식주의자가 되지 말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존귀하게 여기고 귀하게 여기고 칭찬하고 상급을 주는 사람은 더 많은 율법을 행한 사람이 아니고 의식을 집행하는 사람이 아니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을 주님께서 귀하게 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초기 한국교회 역사에 헤론이라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테네시 의과대학이 생긴 이래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수재로써 그 대학의 교수회로 수련 후 교수로 남아 달라는 요청을 받을 정도로 공부를 잘하고 졸업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거부하고 한국에 선교사로 나왔습니다. 그는 언더우드보다 두 달 늦은 1885년 6월에 내한하여 알렌의 재중원에서 일을 했습니다. 알렌이 선교사직을 그만 둔 후에도 재중원장으로 일하면서 밤낮없이 한국 사람들을 치료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한국에 온지 5년이 되는 1890년 여름이 각종 전염병이 창궐했습니다. 다른 선교사들은 남한산성의 휴양지에서 피해서 쉬고 있었지만 헤론은 폭염 속에서도 서울까지 먼 거리를 드나들며 환자들을 치료했습니다. 그러다가 더위와 과로에 지쳐 이질에 걸려 3주간 앓다 7월 176일 이억만 리 낯선 땅에서 젊은 아내와 두 딸을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를 모르는 조선에 대한 사랑 때문에 교수요, 저명한 의사로써의 길을 버리고 낯선 땅에 와서 생명을 걸고 병들어 죽어가는 조선인들을 섬겨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분들 때문에 오늘 기독교가 한국에 뿌리를 내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이 한국사회에 창열하게 될 수 있는 것이 그들의 사랑의 헌신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백 마디의 말보다도 하나의 사랑의 행동이 더 많은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옛 속담에 한말의 쓸개 보다 한 방울의 꿀이 더 많은 파리를 잡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무리 거창한 율법행위와 의식을 집행한다 해도 사랑의 조그마한 행위위에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006년에 우리는 우리 가정에서 우리 바로 이웃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사랑은 허물을 사하고 정죄하고 심판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내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제사라는 것은 율법의 심판으로 짐승을 잡아 죽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심판하고 죽이는 것을 원하지 않고 용서해 주는 자비를 원한다고 주님은 말한 것입니다.
호세아 6: 6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했으며, 베드로전서 4: 8에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면 상대편의 죄를 자꾸 벗기는 것이 아니라 허물을 덮어주고 그들을 살려주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처를 치료해 줍니다. 미워하는 사람은 남의 상처를 자꾸 할퀴고 소금을 탁 칠하고 확확 비벼 버리는 것인데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을 어찌하든지 치료해 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로마서 15: 2에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고 말씀하셨으며, 데살로니가전서 5:14에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말했었습니다. 또한 야고보서 3:18에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짐을 나누어집니다. 남에게 짐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남의 짐을 같이 어깨를 밀어 넣고 짊어져 주어서 가볍게 만들어 주는 것이 사랑의 실천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 2에도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했으며, 로마서 12: 15~16에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체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빌립보서 2: 4에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남이 못되는 것을 좋아하고 남을 할퀴지 않습니다. 중상모략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남이 성공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언제나 뒤에서 수근 거리고 참소하고 남을 중상하고 모략하는 것은 사탄을 미워하는 것이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누가복음 6: 38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사랑은 성공을 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이 성공하도록 해주면 남은 나를 성공하도록 도와주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새해에 지극히 평범한 삶 속에서 정의와 정직과 거룩함을 추구하고 이웃을 섬기며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하여 노력을 하십시다. 이렇게 할 때 천국의 영광은 우리들을 통해 삶의 현장에 나타나게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새해에 여러분과 함께 하여 주셔서 여러분이 정의를 위해서 노력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애를 쓰고 결단을 내리고 거룩하게 살려고 성령의 도움을 늘 구하고 살며 여러분께서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 나를 희생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 때 하늘나라가 여러분을 통해서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에 넘쳐나게 되실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새해를 맞은 우리들이 우리 마음에 다짐을 하고 출발을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새해에는 우리가 다 평범한 사람이지만 좀 더 정의롭게 살도록 노력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정의롭게 살겠다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게 도와주시옵시고 어찌하든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정직하게 살고 거짓을 버리며 살게 도와주시고 세속에 물들지 말고 거룩하게 살도록 하나님의 성령의 도움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여 새해에는 이웃을 섬기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가족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며 나라를 섬기고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적은 일에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도와주시옵시고 큰일을 못한다고 해서 사랑실천을 포기하지 말고 지극히 적은 일에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래서 천국의 영광이 우리를 통해서 온 땅에 넘쳐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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