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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않음

고린도후 조용기 목사............... 조회 수 1946 추천 수 0 2009.09.13 16:4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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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후5:7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6년 1월 8일 주일3부설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서론>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않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믿음이란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감각으로 느끼는 것을 초월한 제육감에 속하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수단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오감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려고 하면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아담이 믿음으로 행하고 눈으로 선악과를 보는 것에 현혹되지 않았더라면 마귀의 손에 놀아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했습니다. 그 말씀을 믿었으면 되었는데 선악과를 바라보고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를 얻기에 탐스럽기도 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귀의 올무에 빠진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보는 것으로 행했기 때문에 낭패를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신 후 마귀에 시험을 당하실 때 주님은 철저히 하나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 즉, 감각으로 느끼는 것을 따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귀를 이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람의 항상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본론>
1.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첫째로 아브람은 왜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가 입니다. 그것은 아브람이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아브람의 생애 속에 대개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해서 시험도 좀 들었지만은 결국 믿음으로 극복한 것입니다. 그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믿음으로 갈 바를 모르고 나갔습니다. 하나님이 다 지도를 펼쳐놓고 이곳에 네가 갈 곳이다. 이렇게 하지 않고 그냥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12: 1~ 4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 였더라
75세의 나이에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니 갈 바를 모르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서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까지 들어왔는데 반드시 믿음은 시험을 당합니다. 진짜로 믿느냐, 가짜로 믿느냐는 시험을 통해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쇠붙이가 진짜냐는 불에 놓여야 진짜, 가짜가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불같은 시험이 반드시 다가와서 믿음을 증명해 보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 믿고 가나안 땅에 들어왔는데 가나안땅에 큰 기근이 다가왔습니다. 모든 나무와 풀들이 다 마르고 우물물이 말라 버렸습니다. 짐승들이 다 굶어죽고 종들도 뿔뿔이 도망치고 따라온 일가친척들도 다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브람은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가나안땅에 남아 있었는데 굉장한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보는 것이 다 가뭄에 시들어지고 불타버렸습니다. 어느 곳을 보아도 희망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나안에 가라고 말합니다. 가나안 이상 다른데 가란 말씀 안했습니다. 아브람은 “말씀을 믿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이냐?, 보는 환경을 보니 황폐해졌는데 살길을 찾을 것이냐?”의 시험에 들었고, 그만 믿음을 놓아 버렸습니다. 그는 보는 것에 영향을 받아서 “여기 있다가는 다 굶어죽겠다. 우리가 비가 내리고 물이 많고 살기가 좋은 애굽으로 가자!” 믿음을 놓아 버리고 보는 것을 따라 출발했습니다. 그 결과 그가 애굽에 내려가서 얼마나 큰 수치와 곤욕을 당한 것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아내를 바로에게 뺏기고 수치와 곤욕을 한없이 당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말아야 되는데 믿음을 저버리고 보는 것으로 행하면 환경과 운명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자비와 긍휼이 아니었으면 아브람은 애굽에 내려가서 망했을 것입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광산에 등불을 들고 땅속깊이 들어가서 시찰을 하다가 그만 등불이 꺼졌습니다. 광산의 갱도에 깊이 들어가서 등불이 꺼졌으니 어디로 나갈지를 모르고 당황을 했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마음속에 지혜가 생겨났습니다. ‘아! 도에는 반드시 화차가 들락날락하는 철길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발을 맨발로 하고 더듬어 보니까 갱도에 철길이 발에 닿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래서 발로써 그 철길을 더듬어서 철길을 밟고 따라 나오고 따라 나오니 눈에는 안보였어도 철길만 따라 나오니까 결국에 그는 갱도 입구에 나와서 환한 천지를 바라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무리 캄캄한 동굴 속에 들어갔을지라도 우리가 인도하는 철길인 말씀을 따라서 믿고 나가면 문제가 해결되고 우리가 승리의 길로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철길을 저버리고 환경을 바라보면 길을 잃어버리고 낭패에 빠져 버립니다.
아브람은 말씀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고 보는 것을 따라 갔다가 큰 낭패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이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올라오게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올라와서 아브람도 은과 금이 풍부하고 종들도 많고 짐승도 많았는데 조카 롯도 일가를 이루어서 은과 금도 많고 종도 많고 짐승 떼도 많아서 조그만 땅에 두 가족이 함께 살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람의 종과 롯의 종들이 우물물 때문에 싸우고 풀 때문에 싸웠습니다. 어린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되어서 아브람과 조카 롯이 다투게 되니 기가 막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있는데 덕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믿음으로 선언합니다. “조카야 네가 동이라면 내가 서로 가고 네가 남이라면 내가 북으로 갈 것이다.” 그때 조카 롯이 믿음으로 행하였다면, 하나님이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했지 가나안 땅으로 밖으로 가란 말 안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카 롯은 요단지역을 바라보니 온 땅에 물이 넉넉하고 굉장히 좋은 땅이었습니다. 조카 롯은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보는 것으로 행했습니다. 눈으로 보니까 가나안 땅보다는 저 요단강 건너편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훨씬 더 좋거든. 그래서 그리로 옮겨가고 메마른 땅에 아브람은 혼자 남았습니다. 그는 믿음을 택했습니다.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아저씨가 되니까 조카보다도 선취권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먼저 택하겠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좋은 땅으로 갈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믿음으로 조카에게 선취권을 주고 조카가 떠나고 난 다음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믿음으로 머물러 있으니까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3:14~15에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믿음으로 행하면 하나님이 대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네 믿음대로 될 찌어다. 보는 것으로 행하면 세상과 마귀의 올무에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조카 롯은 보는 것으로 행했다가 나중에 소돔 고모라 성에서 전쟁이 일어나서 가산 다 잃어버리고 포로로 잡혀가는 비극적인 신세까지 되었으나 아브람이 구해주신 것을 여러분 잘 알고 계신 것입니다. 아브람은 믿음으로 행했다가 보는 것으로 시험에 떨어지고 또 믿음으로 행했다가 또 보는 것으로 시험에 떨어져서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했다가 보는 것으로 떨어지고 믿음으로 행했다가 시험으로 떨어질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래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이 다시 복구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10년이 지나서 85세 때 하나님께 아들을 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루 아브람을 밤중에 불러내서 하늘을 쳐다보고 별들을 헤아리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15: 5~ 6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야! 아브람이 굉장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자기 나이 85세이고 아내 나이 75세인데도 불과하고 하나님이 네 자손을 저 하늘에 별들같이 많게 하실 것이라. 믿음이 가슴에 가득해서 흐뭇하게 들어오는데 당장 보는 것으로 시험을 받습니다. 사래가 뭐라고 한줄 아십니까? “여보, 여보 이리 좀 오세요. 내가 당신에게 시집온 지 지금까지 춘풍추월을 같이 나누면서 살았는데 자식을 못 낳아서 얼마나 미안한지 몰라요. 이제 나는 경수가 떨어졌습니다. 이제는 자식 낳을 수 없어요. 얘야, 이리 오너라.”하니 하갈이 왔습니다. “보세요. 젊고 아름답지 않아요? 하갈에게 들어가서 자식을 낳으세요.” 말은 그렇게 하여도 사래는 속으로 “아니야”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어느 여자가 자기 남편을 첩에게 기쁘게 줄 여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 여성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없어요! 자식을 자기가 못 낳을지라도 남편에게 첩 구해주는 여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기쁘게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유대 나라에서는 대를 이어주지 못하면 너무나 큰 악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종 여종을 불러서 아브람에게 소개를 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었으니까 “여보! 무슨 그런 노망 끼 들린 소리를 하느냐? 하나님이 아들 주겠다고 약속했느냐! 나는 끝까지 믿는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 들려도 나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다. 여보, 그런 소리 말아! 하갈아 나가!” 그랬으면 하나님도 좋아서 박수를 쳤을 것이고 사래도 “과연 우리 남편이야! 할렐루야! 원더풀!”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랬는데, “어디 하갈 한 번 보자. 와! 과연 점고 젊고 이쁘구나! 여보 고마워.” 그만 그날 저녁에 하갈에게 들어갔습니다. 믿음이 어디가 버렸습니까?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말아야 되는데 그만 믿음을 놓쳐 버리고 보는 것에 끌려가서 하갈하고 동침하고 하갈이 잉태하여 이스마엘을 낳으니 온 집안이 풍비박산입니다. 하갈이 어깨에 힘주고 사래에게 큰소리 하므로 사래가 가슴을 치고 아브람의 멱살을 잡고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야단법석을 하고 그리고 아브람은 아브람대로 하갈과 사래 가운데 서서 이리 꼬집히고 저리 꼬집히고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고 이스마엘 때문에 고통이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왜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봄으로 행했습니까? 만일 그때 아브람이 믿음으로 행했으면 오늘날 이스라엘과 저 아랍이 처참한 전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전쟁도 본처와 첩의 자식들이 끝까지 물고 찢고 싸우지 않습니까? 아브람이 믿음으로 행했으면 세계 평화를 가져왔을 것인데 아브람이 보는 것으로 행했기 때문에 얼마나 큰 마귀의 시험과 고통에 떨어지고 말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아브람은 85세에 보는 것으로 행했다가 시험에 빠져서 99살이 될 때까지 고통을 당했는데 99세에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 오셨습니다. “아브람아 네 이름을 이제는 아브람이라고 하지 말고 아브라함으로 해라.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다. 너희 아내는 이제 사래가 아니고 사라다. 많은 자식의 여주인이 되었다.” 혼이 났기 때문에 이제 자기 나이가 99살이 되고 아내가 89살이 되어도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기도 작정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4: 18~22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한번 크게 혼이 나아 보는 것으로 행했다가 당한 고통을 그는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믿음으로 돌아서서 99살에 89살 된 자기 아내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정통 자녀를 낳을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도저히 눈으로 보아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상상해서도 불가능합니다. 경험을 통해서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 우리의 오감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믿음으로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었을 때 90살이 된 자기 아내를 통해서 자식을 낳았으니 그가 오늘 유대민족의 조상인 이삭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었다가 보는 것으로 타락했다가 믿었다가 보는 것으로 타락했다가 했지만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마지막 장엄한 믿음을 보여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의 아들 이삭이 10대가 되어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습니다. 아버지께 세숫물 떠다주고 잠자리 깔아주고 아버지와 같이 친구가 되고 수족 주물러 주고 얼마나 좋습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말씀하기를 “아브라함아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려가서 내게 번제로 드려라. 잡아서 각을 떠서 장작위에 올려 불로 태워서 재물로 드려라.”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립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눈으로 보는 내 아들, 내 눈에 보니까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고 좋은 아들이 아닙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는 그 아들을 위해서 내가 하나님 명령을 거역할 것이냐, 하나님 말씀을 믿고 따를 것이냐?”의 갈등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장엄한 믿음을 실천합니다. 앞으로 다시는 실수 안하기로 결심하고 과거의 모든 실수를 능히 커버하고도 남음이 있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자기 아내하고 의논도 하지 않고 자기 아들과 “얘야! 하나님께 제사 드리러 가자.”라고 하며 아들에게 장작 짊어지게 하고 칼을 손에 들리고 불을 손에 들려서 사흘 길을 걸어가서 모리아 산에 갑니다. 아들이 “아버지, 여기에 장작도 있고 불도 들고 칼도 가져가는데 재물로 드릴 양은 어디 있습니까?” 물을 때, 아버지는 “아들아! 양은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며 눈도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올라가서 재단 만들고 장작 펴놓고 아들을 묶어서 장작위에 얹어놓고 목을 발로 밟고 칼로써 목을 베려고 할 때, 창세기 22:12에 보면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시험을 해보고 난 다음에 이제야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줄 내가 알았다.”라는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장엄한 믿음입니다. 자기의 외독자 100세에 놓은 아들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타협하지 아니하고 말씀을 의지하여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제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하는 최종의 피날레를 이룩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믿음으로 행하기 위하여
둘째로,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믿음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냥 무조건하고 “믿습니다!”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아버지와 자녀관계가 확실히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내 아버지고 내가 그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져야 믿을 수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아무나 믿을 수 있어요? 길에 걸어가는 사람 잡고 “여보, 나 당신 믿어요.” 그것은 미친 사람이나 그런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 내 아들 서로 사랑하니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져야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모셔야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한복음 1: 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니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니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집에서 우리 부모님을 믿습니다. 왜, 부모님과 자식 사이는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형제간도 서로 한 부모 밑에 태어났기 때문에 우애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 믿을 수 있지요. 우리의 사회도 서로 사랑하게 되면 서로 믿을 수가 있습니다. 국가도 한 가지에요. 우리를 늘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하는 국가를 우리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지 않고 우리를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는 국가는 우리가 역사적으로 비춰볼 때 그 사랑이 있으므로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외교 관계에도 우리는 긴밀히 살펴봐야 될 것은 역사적으로 우리를 침략하고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하는 사람은 조심해야 됩니다.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은 관계 속에서 우리는 절대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관계를 가진 나라가 우리에게 아무리 눈웃음을 치고 애교를 떨어도 그것은 양의 털을 쓰고 온 이리와 같습니다. 그러나 과거 역사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고 희생을 한 이웃이 있으면 그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어도 우리가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서로 믿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하여 사랑의 관계가 맺어질 때에 하나님도 우리를 믿으시고 우리도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고 아들이 없으면 아버지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아버지와 우리 가운데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우리가 서로 믿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어도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해야 합니다. 좋은 관계가 성립되어야 되지요. 부모와 자식이 아무리 사랑해도 자식이 자꾸 부모를 거역하고 부모가 원치 않은 일을 하고 불순종하면은 사랑을 하고 믿어도 자식의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이 아버지를 믿을 수가 없고 아버지도 자식을 믿을 수가 없지요. 원수는 아니지만 믿음의 관계가 소월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사랑의 관계 속에는 섬김과 순종이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순종하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순종하고 서로서로 이웃과 서로 믿으면 서로 말을 들어주고 순종하는 관계가 이루어져야 믿음이 역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울은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이스라엘에 초대 왕으로 세웠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사랑했었어요.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을 순종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임금이 되자 제일먼저 아말렉을 징벌하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느비딤에서 아말렉이 공격하여 이스라엘이 전멸당할 뻔 당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아멜렉을 쳐서 짐승과 사람을 다 멸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나갔지만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아멜렉을 쳐서 아말렉 백성들을 진멸했으나 왕은 살려서 끌고 오고 살찐 짐승들을 모조리 다 끌고 왔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그는 변명을 했습니다. 그것은 아각 왕을 끌고 온 것은 자기가 얼마나 전승을 했다는 자랑을 하기 위한 것이고 살찐 짐승들을 끌고 온 것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서 끌고 왔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사무엘이 와서 말합니다. 사무엘상 15:22에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버렸으므로 하나님 당신을 버렸다.
불순종하면 사랑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버림을 당했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왕인 다윗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으나 다윗은 순종하므로 말미암아 극히 사랑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목회자요, 교수인 심클레어 피거슨은 말하기를 “우리는 오직 순종 가운데서만 하나님 뜻의 가장 위대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고 독일의 본 훼퍼 목사님은 “믿는 자들만이 순종할 것이며 순종하는 자들만이 믿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영국의 시인이었던 지 맥도날드는 “순종은 모든 문의 열쇠”라고 말했습니다. 순종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고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치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맺어질 뿐 아니라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야 돼요. 그런데 이 순종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유명한 성 프란시스의 일화인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가 수도원을 설립하고 세계적으로 이름을 내었을 때 두 젊은이가 수도사가 되기 위해서 성 프란시스에게 찾아왔습니다. “우리도 이 수도원에서 제자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마침 그때 성 프란시스가 밭에서 채소를 옮기고 있었습니다. 손을 털털 털면서 “두 사람 내 대신 채소를 좀 옮겨줘.” 한사람뿐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와 있으니까. “너희 채소를 심되 뿌리를 전부 하늘로 보고 심어라. 뿌리를 하늘로 보고 잎을 땅으로 채소를 심어라. 내가 저녁에 와서 볼 것이다.”하고 손을 털털 털고 갔습니다. 그 중 한 제자가 가만히 생각하니 “선생님이 우리를 시험하나 보다. 세상에 채소 뿌리를 하늘로 두면 말라 죽을 것 아니야. 그러므로 나는 사리에 합당하게 생각하고 뿌리를 땅으로 심자. 상식적인 것이 아닌가!” 그래서 땅으로 한 제자는 심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선생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에 우스워도 내 생각으로 하지 않고 선생님 뜻대로 하자.” 전부 뿌리를 하늘을 보고 심었습니다. 한쪽에는 정상적으로 상식적으로 뿌리를 땅으로 다 심어 놓았고 한쪽에는 완전히 뿌리를 하늘로 보도록 거꾸로 심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성 프란시스가 저녁 늦게 찾아와서 두 제자 중에 뿌리를 땅으로 심은 제자를 불러서 “너는 참 지혜롭고 총명하다. 상식적으로 봐서 채소는 뿌리를 땅으로 심어야 채소가 자라지 뿌리를 하늘로 하면 죽지 않느냐. 너 꾀가 많고 지혜가 있고 상식적인 사람이니까 네 밑에 있지 말고 따로 가서 살아라.” 그리고 뿌리를 하늘로 심은 제자는 “너는 우직스럽고 바보같이 보이지만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이니까 너는 내 제자가 되어라.” 그렇게 말했다는 우화가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입니다. 우리 상식으로 하나님 말씀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높기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며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아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생각은 높고 내 길은 높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우리의 상식으로 우리 생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 무슨 잔소리를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순종하더라도 하나님 말씀을 잘 알고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하시면 하나님 말씀을 받아서 그 말씀대로 믿고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 없이 내 생각대로 해서는 안 되지요.
로마서 10:17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보아야 하나님 뜻을 알고 믿을수 있잖아요. 나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나를 알려면 십자가를 바라봐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버린 것 아닙니까? 예수님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죽으셔 장사되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는데 예수님을 통하여 내가 누군지를 알고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나를 보면 어떻게 봅니까? 예수님을 날 위하여 대신하여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 죽으므로 나의 죄를 갚아 주었으므로 예수를 통해서 난 용서받은 의인이 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나는 세상과 마귀에서 해방되고 거룩하고 성령충만한 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나는 치료받고 건강한 사람이 된 것을 압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또 예수를 통해서 보면 예수님이 날 대신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서 고난당했으므로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아브라함의 복을 주셨으니 예수를 통해서 나를 볼 때 나는 복 받은 사람인줄 압니다. 예수님이 날 대신 죽었다가 부활하셨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도 부활하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앉아 있는 나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앎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만날 때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비로소 영원히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사람이 된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누굽니까? 자연적인 나는 이 세상에서 낭패와 실망당하고 죄짓고 저주받고 버림받고 희망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내가 누군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자기를 모르고 예수를 믿는 사람 많아요. 자기 신분이 어떤 사람인지. 자기 정체성이 무엇인지 모르고 정체불명의 사람이 되어서 믿는다고 왔다 갔다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어떤 새것이 되었느냐.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만나보고 내가 새것이 된 것을 알고 그것으로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신분과 자화상과 직분을 알고 살 수 있습니다. 위대한 부흥사였던 무디목사는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믿음이 하늘로부터 뚝! 뚝! 떨어질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믿음은 오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서 10:17절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는 말씀을 읽는 순간 지금까지 성경은 덮어 놓고 믿음을 위해 기도했던 나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이제 나는 성경을 공부하는 동안 성경 말씀이 마음속에 들어오자 믿음이 부쩍 자라나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하였습니다. 말씀을 알아야 믿을 수가 있습니다.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말씀 없이는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이런 농담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목욕하러 갔는데 아버지가 먼저 욕탕에 들어가더니 “어! 시원하다. 너도 들어오너라. 어, 시원하다.” 아들이 따라 들어갔다가 “아이 뜨거워! 앗! 뜨거워! 믿을 놈 한 놈 없네.” 아버지가 그만 “놈”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시원하다 하니까 시원한줄 알았는데 들어가 보니까 뜨겁습니다. 그러니까 믿을 놈 한 놈도 없다. 세상 말은 믿을 수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일점일획도 변화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믿고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만세반석이 되십니다.
그리고 난 다음 우리가 믿음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요사이 여러분 많은 자동차에 네이게이션 시설을 하지 않습니까? 미국이나 일본은 오래전부터 벌써 네비게이션을 달아 놓아 인공위성을 통해 위치을 알려 줍니다. 딱딱 위치를 누르면 지도가 싹 나오지 않습니까? 차를 운전하면 이런 화살표가 지도에 인도하면서 앞으로 200미터를 가서 오른쪽으로 도세요. 오른쪽으로 돌면 이제는 300미터를 가서는 왼쪽으로 도세요. 또 왼쪽으로 돌면 이제 직진하세요. 직진하면 이제 목적에 도달했습니다. 네비게이션이 요사이 그렇게 하기 때문에 아무리 낯선 도시에 가더라도 차에 네비게이션만 달아 놓으면 그 도시의 번지수만 찍으면 도시 지도가 나와서 화살표가 다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네비게이션이 참 재미있습니다. 앞으로 300미터를 가서 왼쪽으로 도세요. 그런데 오른쪽으로 싹 돌면 이제부터 안내를 중지합니다. 화가 났어요. 내 인도를 안 받을 바에야 내가 뭐 하러 인도하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님도 한 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성령님이 인도하는 데로 따라가면 성령님 인도하는데 성령님이 인도하는데 안 따라가면 이제부터 인도를 그치노라.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보고 육신의 귀로 듣고 육신의 마음으로 깨닫지만 하늘나라는 성령을 통해서 보고 성령을 통해서 듣고 성령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성령이 여러분의 눈이요. 성령이 여러분의 귀요. 성령이 여러분의 깨닫는 마음인 것입니다. 성령 없이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예비해 놓은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깨닫지 못하였다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성령이 이것을 다 우리에게 보이셨다. 성령이 여러분의 눈이요, 귀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해야 됩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놓지 않고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는 너와 함께 거하시며 너희 속에 계시겠다고 했었습니다. 성령은 이 자리에 계십니다. 우리 속에 와 계십니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하면 성령은 우리 눈이 되어 주시고 귀가 되어 주시고 깨닫는 마음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13에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또한 고린도전서 2:10에는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위에 섰으면 그 다음 성령님의 인도를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갈 길을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3. 믿음과 감각의 대결
셋째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믿음과 감각과의 대결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은 엄청나게 감각이 대결해 옵니다. 마귀가 감각을 통해서 자꾸 ‘야! 환경을 보라. 환경을 보라. 너 이제 물에 빠진다. 야! 느껴보라. 어림도 없는 소리하지 마라. 이성적으로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 너 잘못되었다.’ 마귀는 엄청나게 보는 것으로 우리를 공격해 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믿음과 감각의 대결이 있습니다. 마귀는 감각의 세계를 통하여 엄청난 공격을 퍼붓습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삶에는 의심과 불신앙의 적과 엄청난 마음의 투쟁을 해야 됩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조차도 믿음으로 섰다가 감각에 넘어지고 믿음으로 섰다가 감각에 넘어지는 업치락 뒤치락의 싸움을 여러 번 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깨닫고 그 위에 서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진리는 말씀인데 말씀에 꽉 서서 동남풍이 불고 서북풍이 불고 온갖 힘이 들어와서 나를 흔들어도 말씀에 서서 움직이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예 말씀에 딱 서서 여러분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말씀 밖으로 안 나가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 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 3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계가 다 말씀으로 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말씀에 굳세게 서야 돼요. 그리고 이 말씀 속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가슴속에 깊숙이 받아 들여야 됩니다. 말씀을 그냥 눈으로 보고 머릿속에 생각하지 말고 마음속에 끌어안고 어머니가 어린 아기를 품듯이 가슴속에 받아 들어야 돼요. 성경에 요한복음 15: 7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말씀을 사람들은 깊이 마음속에 받아들이지 않고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돌리다가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말씀이 깊이 마음속에 받아들여서 말씀이 내속에 들어와서 내가 말씀 안에 말씀이 내 안에 일치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우리가 깊이 묵상하고 말씀이 내속에 들어와서 나와 일심동체가 되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저는 매일같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이 대속해 주신 그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이 날 위하여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서 나에게 값없이 선물로 용서와 의로움을 주셨다.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값없이 거룩함과 성령충만을 주셨다. 깊이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난 나음을 입었다. 나는 2천 년 전에 이미 고침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건강한 사람이다. 예수님이 나에게 저주를 제하시고 아브라함의 복을 주셨다. 나는 복을 받은 사람이다.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부활하여 보좌 우편에 앉아 있다. 죽음이 겁나지 않다. 육신의 장막 집 벗어 버리면 보좌로 직행한다. 이것을 깊이 묵상합니다. 매일 묵상합니다. 매일 깊이깊이 생각하고 마음속에 받아들입니다. 묵상하지 않고는 마음속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냥 눈으로 보고 지나치고 귀로 듣고 지나치면 안 됩니다. 말씀을 씹고 씹어서 내 마음속에 깊이 묵상을 통해서 속에 받아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속에 깊이 받아들이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아요. 말씀에 설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음에 결단을 내립니다. 타협 없이 믿을 것이 엄히 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결단을 내려야 돼요. 사람이 결단내리지 못하고 우유부단하면 안돼요. 나는 연초에 담배 끊겠다. 그리고도 담배 값을 포켓에 탁 넣고 돌아다닙니다. 아, 담배 피울 생각이 나면 손을 넣어서 ‘오늘 한 대만 피자. 까짓 것…’ 한 대피면 두 대되고 세 대되고 “에라! 올해도 끝장났다. 명년에 결심해야지!” 하고 우유부단해집니다.
스코필드라는 성경 주해를 달은 유명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술주정뱅이였습니다. 그가 술을 끊겠다고 결심을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난 다음에 직장에서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술집 앞을 지나가면서 술집 앞에 딱 섰어요. “들어가서 한잔만, 아니야, 아니야 한잔만, 에라 오늘 하루만 마시고 내일은 안마시지.”하다가 그만 곤드레만드레가 됐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직장에서 돌아올 때 술집 앞을 지나오다가는 들어가서 마시고 또 나오고 그런데 하루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제는 돌아가더라도 술집 앞을 지나가지 말아야 되겠다. 보이는 것으로 유혹을 받으니까 내가 이제는 술집 앞을 지나가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고 직장에서 퇴근하고 난 다음 마음에 단호한 결심으로 술집이 없는 곳으로 돌아서 술을 피할 수 있고 그는 새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간증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김유신도 한 가지 아닙니까?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이 기생의 무릎에 푹 빠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그 어머님의 어마어마한 교훈을 듣고 난 다음 하루도 말을 타고 술이 취해서 거드렁 거드렁하고 돌아오다가 말이 항상 가는 기생집 앞에 왔습니다.
기생이 반기면서 말에서 김유신을 모셔 내리니까 김유신이 말에서 내리더니만 칼을 뽑아 가지고서 그 자리에서 말의 목을 쳤습니다. 피가 튕기고 말의 눈이 부릅떠서 뒹굴었습니다. 기생이 혼비백산했습니다. 그는 하는 말이 “나는 다시는 너에게 오지 않는다.” 그 길로 돌아서서 집으로 돌아가는 김유신이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명장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결단을 해야 됩니다. 믿음도 나는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믿겠다. 믿다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의 결단 보십시오.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아들을 모리아 산에 죽여서 각을 떠서 태워 재물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렇게 하겠다고 결단을 내리고 좌우로 살피지 아니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알고 가슴속에 깊이 받아 들였으면 그 다음부터 믿기로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믿음으로 행하겠다. 이런 마음의 결단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합니다.
누가복음 9:62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히브리서 10:38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타협하면 안 되고 단호해야 되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다. 에스더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죽으면 죽으리다. 내가 믿었다가 하나님이 안도와 주면 죽어도 좋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느브갓네살 앞에서 뭐라고 했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일곱 배나 뜨거운 불 풀무에 던지면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 주시겠거니와 안 건져 주실지라도 우상에 절하지 않겠다.” 단호한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은 보는 것의 공격이 다가와도 결단을 내린 사람들인 것입니다. 아예 죽기를 각오하고 믿는 사람을 하나님은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과 같이 하시고 네 믿음대로 될 찌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믿은 사람은 믿음의 선언을 해야 합니다. 믿음의 선언은 마귀의 염통을 찌르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해야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시인하고 선언할 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11에도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믿어도 입으로 시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입으로 선언해야 돼요. 예수님의 사역을 보십시오. 모두다 입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침상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라. 파도야 잠잠 하라! 바다야 잠잠 하라! 네 믿음대로 될 찌어다. 주님의 사역은 입으로 모두다 선언으로 역사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우리가 믿었으면 선언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알고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믿기로 결단 내렸으면 우리는 늘 선언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병이 들었으나 말씀을 보니까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고 했으므로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고 말씀을 깊이 받아 들여서 ‘나는 이미 나은 사람이다. 2천 년 전에 이미 예수께서 나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으므로 내 병은 법적으로 2천 년 전에 나음을 입었다. 그러면 지금 병든 것은 마귀의 헛된 수작이다. 허상이다. 거짓되고 헛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를 받아들이는데 예수 이름으로 물러갈 찌어다. 나는 나은 것을 깊이 믿었으면 내가 요동치 않고 믿었으면 입술로 선언해야 됩니다. 나는 나았다. 나는 나은 사람이다. 나는 건강한 사람이다. 나는 채찍에 맞음으로 해방을 얻었다.’ 담대하게 선언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시드니 올림픽 여자 다이빙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던 미국의 로라 윌킨스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열리는 그해 3월에 연습하다가 떨어져서 오른쪽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습니다. 다이빙하는 사람이 오른쪽 허벅다리가 부러졌으니 어떻게 합니까? 코치는 그녀의 부상을 보고 올림픽에 출전할 수 없다면 출전불가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윌킨스는 하루에 수 십 번씩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을 읽고 또 읽고 묵상하고 묵상했습니다. 그 말씀을 보고 그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받아들였습니다. 깊이 받아들이고 난 다음에 그는 그 말씀을 믿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의사들은 다이빙을 못한다. 코치도 이미 불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이 해줄 것을 믿고 입술로 시인했습니다. 그는 이 빌립보서 4:13을 계속해서 매일같이 묵상하며 입으로 시인했습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다시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해서 선수로써 다이빙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연습장에 나가면 다른 사람들은 다 높은데 올라가서 다이빙을 하는데 자기는 못하니까 수영 못하고 앉아서 꿈을 꾸는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입니다. 자기가 다이빙을 기가 막히게 해서 모든 만중에 박수갈채를 받고 1등의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것을 늘 상상했습니다. 친구들은 지금 연습하는데 자기는 연습 못하고 수영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서 그런 바라봄의 법칙을 써서 꿈을 꾸는 것입니다. ‘내가 바로 저 친구다. 내가 바로 저 사람이다. 내가 다이빙을 멋있게 해서 만중에 박수갈채를 받고 멋지게 일등상을 얻는다. 금메달을 목에 달았다.’ 그것을 상상하고 또 성경을 외웠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믿고 선언했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올림픽에 기어코 나가게 되어서 10미터 다이빙 경기에서 당당히 1등해서 금메달을 목에 달았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 찌어다. 아테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받았어요. 이 미국의 선수가 성경말씀대로 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것을 깊이 받아들이고 믿기로 결단을 내리고 입으로 시인했습니다. 그리고 바라봄의 법칙으로 늘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다 안 된다는데 출전 해가지고서 그는 1등상을 타고 금메달을 목에 달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말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믿음은 상식을 초월하고 세상의 법칙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기적으로 사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다 할 수 있을 바에야 믿을 필요가 없지요. 우리가 못하는 것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기적으로 사는 것이 크리스챤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 것이 크리스챤인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다 보는 것으로 행하지요. 그러나 믿는 사람이 안믿는 사람이 무엇이 다릅니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믿고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하게 선언하고 보는 것의 시험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이 새해에는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해서 여러분의 삶속에 기사와 이적이 넘쳐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서 영원히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어 선한 일을 넘치도록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착한 일을 넘치게 안하면 누가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가난하고 병들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도와주고 붙들어 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입니까? 온 천하만국에 나가서 그리스도 영광을 나타내는 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리가 복을 받지 않고 누구에게 복을 나눠줄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성공하지 않고 누구에게 성공을 나눠줄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승리하지 않고 누구에게 승리에 동참하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까? 나를 믿는 백성은 머리가 되고 꼬리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겠다고 했으니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서 이 은총을 가지고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대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으로 행하면 낭패와 실망을 당할 때가 너무나 많고 마귀의 올무와 시험에 빠져 들어갑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 말씀을 선언하고 말씀을 더불어 살므로 아버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성도 모두가 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를 통해서 승리하고 성공적인 이 한해를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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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 사도행전 내일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행1:15-16  이한규 목사  2009-09-15 1768
1923 사도행전 간절한 기도의 능력 행1:12-14  이한규 목사  2009-09-15 2427
1922 사도행전 주님의 리듬을 따라 춤추십시오 행1:9-11  이한규 목사  2009-09-15 1825
1921 신명기 축복의 통로-(2)겸손 file 신8:16-19  강종수 목사  2009-09-13 1998
1920 열왕기하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죄 왕하2:23~25  조용기 목사  2009-09-13 1854
1919 누가복음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라 눅18:1~18  조용기 목사  2009-09-13 2314
1918 잠언 내적 저항력 잠4:23  조용기 목사  2009-09-13 1502
1917 요한일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일4:7-12  조용기 목사  2009-09-13 2692
1916 예레미야 하나님, 우리 하나님 렘33:1-3  조용기 목사  2009-09-13 1866
1915 요한일서 자유와 해방 공간 요일5:19  조용기 목사  2009-09-13 1752
» 고린도후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않음 고후5:7  조용기 목사  2009-09-13 1946
1913 잠언 새해를 시작하면서 잠4:20~27  조용기 목사  2009-09-13 1713
1912 이사야 크리스마스 때 오신 그 사람 사32:1-4  조용기 목사  2009-09-13 1479
1911 고린도전 예정과 예비 고전2:9  조용기 목사  2009-09-13 2273
1910 사도행전 성령이 주는 4대 마음 행1:6-8  이한규 목사  2009-09-12 2110
1909 사도행전 어둠의 세력을 이기는 길 행1:4-5  이한규 목사  2009-09-12 1862
1908 사도행전 가장 의미 있게 사는 길 행1:1-3  이한규 목사  2009-09-12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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