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한일서 조용기 목사............... 조회 수 2692 추천 수 0 2009.09.13 16:45:04
.........
성경본문 : 요일4:7-12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6년 1월 29일 주일2부 설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서론>
저는 오늘 여러분과 더불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를 불문하고 다 하나님을 뵙기를 원합니다. 참 하나님을 환상으로나 꿈으로 보았으면 좋겠다. 그러한 생각이 모든 사람에게 다 있습니다. 제게도 그런 생각이 있어요. 하나님을 꿈에라도 환상에라도 한번 봤으면 좋겠다. 예수님의 제자 빌립도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원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물체의 형상으로는 볼 수 없으되 하나님의 실상인 사랑을 통해서 배울 수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곳에는 하나님이 그 사랑 안에서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번역가였던 위클리 도우거 멜란드 부부가 브라질의 인디안 마을로 이주했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원주민들은 순순히 그를 백인이라고 불렀지만 말투가 거칠고 공격적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알아보니 이들 부부가 오기 전에 다른 백인들이 와서 마을 사람들을 핍박하고 약탈하고 집에 불을 놓고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멜란드 부부는 더욱 열심히 인디안들의 말을 익히며 의술과 다른 여러 가지 수단으로 원주민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원주민들이 그를 가장 존경하는 백인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부르고 그들의 언어심사가 부드럽고 온순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도우거 부부가 그들의 풍습에 익숙해졌을 무렵에는 아예 인디안 백인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불러 주었습니다. 그러던 하루는 도우거가 상처가 나서 피가 엉켜 붙은 한 원주민 소년의 발을 씻겨 주다가 자신을 보고 원주민들끼리 주고받는 말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디안의 발의 씻어준 백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분명히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일꺼야.” 그날부터 도우거가 인디안 집에 갈 때면 인디안들은 그가 온다는 말 대신에 “우리에게 보낸 하나님의 사람이 오신다. 저분은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의 사랑 안에서 인디안들은 비로소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다 같은 백인이지만 약탈하고 방화하고 억압하는 백인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해주는 백인, 그들 속에 하나님을 찾아볼 수 있는 백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 사랑 속에 인디안들은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큰 변화의 체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곳에 하나님이 와 계십니다.

<본론>
1. 하나님의 모습은 사랑

첫째로, 하나님의 모습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마귀가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형상이요, 미움은 마귀의 형상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 7~ 8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신 사람마다 사랑을 하게 되고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사람은 사랑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샘물이 있으면 바깥으로 그 샘이 흘러 넘쳐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사랑이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며, 바로 그 사랑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빈자들의 어머니로 불리던 테레사 수녀는 1910년 건축업자이며 시의원인 아버지 슬하에서 태어나 18세에 수녀가 되었습니다. 이듬해 캘커타로 건너가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고등학교 교사 노릇을 하다가 나중에 그 고등학교 교장 선생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몸이 허약했던 그녀는 결핵에 걸려 히말리야산에서 요양을 한 후에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았습니다. 가난한 사람 중 가장 가난한 사람을 섬기며 일생을 보내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도 돈으로 5루피, 약 120원을 들고 인도 캘커타의 빈민굴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테레사 수녀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데려다가 돌보았습니다. 1950년에는 사랑의 선교회를 창설해서 산파들이 데려오는 어린아이, 쓰레기통에 내버린 핏덩이 어린 아기들을 받아서 생명을 구원하는 역사를 베풀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로부터 시작된 사랑의 선교회는 현재 119개국에 557개에 이릅니다. 그러다가 1996년 여름에는 본인이 말라리아와 고열, 심장병과 폐질환으로 사경을 헤매기도 했는데 당시 담당 의사가 진단하기를 하도 오랜 시간 환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본다고 허리를 굽혀서 일을 했기 때문에 폐와 심장이 압박을 받아서 폐도 나빠지고 심장병에도 걸렸다고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공로를 인정받아 1979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때 그녀는 수상축하연을 열지 않고 대신 그 비용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쓴다는 조건으로 수상식에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생전에 그녀는 “우리가 하는 말 자체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1974년 인터뷰에서는 “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봅니다. 내가 나환자의 상처를 씻어줄 때 나는 하나님 바로 그분을 돌보아 드리는 것 같은 느낌을 갖습니다.”라고 했습니다. 1997년 9월 5일 세상을 떠나면서 “가난한 이들이 절실히 바라는 것은 의식주가 아니라 따뜻한 사랑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녀가 실천한 사랑의 삶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그가 죽었을 때 그 장례식에는 가톨릭교인도, 기독교인도, 불교도들도, 이슬람교도들도, 힌두교도들도, 모두 모여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들은 그의 생애 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또한 밀림의 성자라고 불리는 알버츠 슈바이처 박사는 1875년 목사님 가정에서 태어나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한 후 목사로 대학교수로 활동했습니다. 또한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로 바하 음악에 심취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29살 때 그는 우연히 기숙사 책상위에 놓인 잡지를 통해 아프리카인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보고 마음이 극히 아팠습니다. “우리는 구라파에서 이렇게 문명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아프리카 사람들은 저렇게 비참한 삶을 살고 있으니 불공평하기 짝이 없다. 내가 가서 도와주겠다.”는 사명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슈바이처는 의학을 공부하고 1913년에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덥고 독사와 악어가 들끓기로 유명한 랑바레네라는 곳에 병원을 설립하여 주민들을 치료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했습니다. 하루는 한 부인이 그를 찾아와서 “저는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훌륭한 의사요, 위대한 학자인 당신 같은 사람이 왜 여기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슈바이처 박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저는 말로써 감동시킬 만한 말재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아무리 열심히 설교를 해도 소용이 없어요. 그러나 사랑을 베푸는 동안 저는 하나님을 바로 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곳에 와서 의술을 통해서 환자를 치료해 주므로 사랑을 베풀고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도록 전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1924년 그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을 때 많은 기자들이 그를 취재하기 위하여 그가 탄 기차에 올랐습니다. 특등실에 가서 보니 슈바이처가 없었습니다. 1등 칸, 2등 칸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해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탄다는 3등 칸에 갔더니 슈바이처 박사가 그곳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청진기를 대고 이렇게 진찰을 하고 치료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기자들이 놀라서 “박사님! 상을 받으러 가는 이때에 가시면서까지 왜 이런 고생을 하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슈바이처는 “나는 내가 즐길 곳을 찾아서 살아온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찾아다니며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이 사람들은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나는 이 천민들이 타는 기차에서 저들을 돕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은 그의 삶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에서 가서 일하는 것을 다 잊어 버렸지만은 슈바이처 박사가 한일은 지금도 기억되고 저도 그분의 공로에 대해서 오늘 아침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페스탈로치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가까이 오신다.”고 말했으며 톨스토이는 “이 세상에 하나님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가슴속에 머무실 것이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물체적인 하나님을 보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물체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적 실체는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통해서 천지와 만물을 지으셨고 우리 인생들을 돌보시고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부부간 서로 뜨겁게 사랑할 때 그 가정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부모자식 간에도 뜨겁게 사랑할 때 그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아 줄 때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사랑이 역사하는 그곳에 언제나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2. 십자가의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참모습
둘째로, 십자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참모습을 우리는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지만 사람으로 오셔서 사랑을 실천하므로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일서 4: 9~10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사 그가 우리의 죄와 더러움, 병, 저주, 죽음을 다 몸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시는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죽을 수 없는 사람이요, 병들 이유도 없고 가난과 저주에 몸부림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통해 나타나서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더러움을 몸소 짊어지시고 병을 감당하시고 저주를 당하시고 죽음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한없는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데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냥 예수 그리스도의 매달린 형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그곳에서 강물처럼 넘치는 것을 우리가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에 있는 말씀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죽음에 처한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의 모든 죄의 부채를 청산하시고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의 역사를 볼 수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 8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라는 의문에 하나님은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지금도 사랑하고 계십니까?’라고 묻는다면, 하나님은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대답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하나님은 나를 버렸나요?’, ‘왜 병들고 슬프고 고통을 당하고 괴롭게 하나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부정적인 질문들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한 대답은 “십자가를 바라보라.”입니다.
하나님이 사랑 안했으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몸 찢고 피를 흘려 생명을 붇도록 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의 증거와 확증은 갈보리 십자가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이 세상에 어떠한 우리가 환난과 고통과 슬픔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갈보리 십자가에 위에서 증명된 사랑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도, 철학도, 문학적인 작품도 아닙니다. 이는 친히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퍼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현실적이고 증명된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담대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확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고개를 흔들며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한다.”고 조롱을 했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못 박아 죽이는 원수까지 용서하신 사랑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불러서 주님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었고,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한순간에 멸망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조롱을 받고도 묵묵히 끝까지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주님이 능력이 없어서, 권세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의 죄 가를 청산해야 되었기 때문에 사랑이 그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끝까지 매달리게 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3: 1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 이니라”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인 아키발드 디 하트는 “용서란 나를 헤친 사람에게 내가 원수 갚을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원수를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그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23:34에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 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능히 그를 못 박고 조롱하는 사람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수 갚는 것을 포기하고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주님의 그 끝없는 사랑에 우리는 감격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가끔가다가 원수를 미워하고 싶은 충동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원수가 잘못 되었으면 좋겠다. 원수가 심판을 받았으면 좋겠다. 원수가 불행을 당하면 좋겠다. 그러한 생각을 하는 유혹이 다가옵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내가 얼마나 죄를 짓고 죄 덩어리인 나를 주님은 용서하시고 나에게 심판으로 보답하지 아니하신 것을 생각할 때 ‘아! 나는 용서로 빚진 자구나. 예수님 앞에 어마어마하게 용서의 빚을 짊어진 사람이 누구에게 빚을 갚을 수 있느냐.’ 나에게 해코지한 이웃사람을 용서해 주므로 예수님에게 용서의 빚을 청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곧장 이웃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용서할 수 있는 아량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용서 안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죄 덩어리인 나를 용서해 주셨는데 나는 용서받고 남을 용서 안한다면 주님의 용서가 어떻게 내 생애 속에 효과를 발생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용서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울면서 용서를 하고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라도 용서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의 운명입니다. 그렇게 해야 됩니다. 왜, 내가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용서해야 되는 것입니다. 거울이 햇빛을 받으면 반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반사 안하는 거울은 거울이 아닙니다. 그처럼 예수 믿는 사람은 주님께 용서를 받았으므로 용서를 베풀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용서하라. 아내들아 남편을 용서하라. 자녀들아 부모를 용서하라. 부모들아 자녀를 용서하라고 오늘날도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용서하므로 그리스도의 용서를 마음속에 받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
셋째로,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우리가 보아야 됩니다.
사랑은 어떠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가? 요한일서 4:11~12에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오시면 사랑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은 속성이 있습니다. 사람도 속성이 있잖아요. 성격이 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느릿느릿하는 사람도 있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게으른 사람도 있습니다.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공부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속성이 다 있어요. 사랑도 속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냥 와서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속에 와서 그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허물을 덮어주고 사하여 주시는 속성이 있습니다. 부모와 원수가 무엇이 다릅니까? 저는 사형을 언도받은 자식을 변명하는 부모의 이야기를 텔레비전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외국 TV인데 흉악범이 살인을 하고 사형선고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TV앞에 나와서 “우리 애는 그렇게 할 애가 절대로 아니요. 자랄 때도 착하고 온순하고 좋은 성격을 가졌다. 우리 애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사회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으니 사회적 책임이 있다. 우리 애는 사형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렇게 끝까지 자식을 변호하는데 옆에서는 데모하는 자들이 “저놈을 죽여라. 저놈을 사형시키라. 당장 전기의자에 앉혀라”고 플랜카드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모와 원수들의 다른 점이 뭡니까? 부모는 끝까지 자식을 변명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의 눈으로 봄으로 자꾸 허물을 덮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원수는 어떻습니까? 어찌하든지 허물을 벗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덮어주고 원수는 벗겨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와 원수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와 같습니까? 하나님은 부모와 같습니다.
시편 103:13에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야훼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하나님은 부모와 같으시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자꾸 허물을 덮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어찌하든지 우리에게 와서 까발리려고 합니다. 발가벗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서 죄를 짓고 제일먼저 당한 수치와 모욕은 발가벗은 것입니다. 누가 벗겼습니까?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발가벗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짐승을 잡아 가죽을 벗겨 피를 흘리고 옷을 지어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 주었습니다. 마귀는 벗기고 하나님은 입히시는 것입니다. 인생이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벌거벗어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없도록 마귀가 만들어 놓고 박수를 치고 이제는 인류를 다 멸망시켰다. 이제는 저들이 영원히 지옥에 가서 죽을 수밖에 없다고 발을 동동 굴렀는데 하나님은 인생들을 입하시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사람으로 보내셔서 인류공동체의 머리가 되어서 대신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서 인류의 죄를 씻고 그 의로운 옷을 벗겨서 우리에게 입혀 주신 것입니다. 마귀는 벗기고 예수님은 입히신 것입니다.
잠언 10:12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미워하는 사람은 자꾸 발가벗기고 다투고 논쟁을 겁니다. 그러나 사랑은 허물을 다 덮어 버리는 것입니다. 허물을 덮고 나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 8에도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교회 와서 예수 믿는 다고 하면서 자꾸 이웃을 못살게 굴고 이웃의 약점을 들춰내고 허물을 들춰내고 “나는 잘 믿는 사람이다. 내가 제일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대단히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로 미움의 사자요, 마귀의 촉수요, 마귀의 종인 것입니다. 그러나 큰 온유한 마음으로 이웃을 감싸고 사랑하고 덮어주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자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확대경을 하나 들고 계세요. 그 확대경으로 우리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어떻게 서야 할지 알게 되므로 그것이 오면 우리는 움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확대경은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 확대경을 보면 어떻습니까? 한쪽은 보면 멀리 적게 보이는 것이 있고 한쪽은 하면 아주 가까이 보이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을 멀리멀리 보시고, 장점은 확대경으로 크게 보시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나같이 못난 인생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가?,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나같이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사람을 하나님은 사랑하셔서 기도 응답을 해주시고 은혜를 주시느냐?, 왜 날 사랑하나?”의 답은 확대경을 들고서 내 장점만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장점을 보시고 사랑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단점은 하나님은 안 보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마귀는 확대경을 들고 있습니다. 마귀는 내 장점은 안보고 약점을 꽉 크게 해가지고서 “야 이 병신아, 이 도둑놈아, 이 음난한 자야, 이 강도야, 이 나쁜 놈아! 네가 무슨 자격이 있어 하나님께 나가냐!” 우리를 좌절시키고 절망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든 확대경하고 마귀가 든 확대경이 다릅니다. 바로 여러분이 그 확대경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해서 이웃의 장점을 다 보고 장점을 긍정적으로 보아 주면 하나님의 확대경이 여러분을 통해서 자꾸 이웃의 단점을 바라보고 그를 과대평가하고 과소평가하지 않고 침소봉대하고 이웃을 짓밟으면 마귀의 확대경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잘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 1에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묶여 사는 것 원치 않습니다. 죄의 종이 되지 않기를 원하고 세상과 마귀의 종이 되지 않기를 원하고 병에 묶여서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가난과 저주에 묶여서 콧물을 줄줄 흘리며 주접을 떨고 살기를 원치 아니하며 사망과 음부에 묶여서 영원히 종살이하기를 원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3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8:32에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자유, 얼마나 좋습니까? 새를 아무리 잘 먹이고 보호를 한다 해도 새장에 감춰 놓은 새는 불행합니다. 새장에 갇혀 있어서 푸른 하늘을 날지 못하는 새는 잘 먹여주고 보호해 주어도 그것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푸른 하늘에 날 수 있도록 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개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개목에 쇳줄을 묶어 가지고서 조그만 말뚝에 묶어 놓고 하루 종일 개가 말뚝에 빙글빙글 돌면서 고통을 당하게 하고 삼시 세 때 밥을 주므로 잘한 줄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동물학대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유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에 속박되어 살면 자유가 없지 않습니까? 도박에 속박이 되어서 강원 랜드에 가서 도박을 하다가 나중에는 탕진가산하고 뛰어 내려서 자살하는 사람,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인 것입니다. 세속과 마귀의 종이 되어가지고서 어찌하든지 세상에 도박하고 세상 쾌락을 쫓아서 정신없이 내달리는 사람 자유가 없지 않습니까? 병들어서 하루 종일 문밖에 나가지 못하고 쿨럭 거리고 고통 속에 있는 사람 자유가 없잖아요. 돈이 없어도 굉장히 부자유스럽습니다. 돈이 없으면 좋은 집에 살수도 없고 마음대로 이곳저곳 갈수도 없고 자식들이나 이웃을 돌볼 수도 없고 여행도 할 수 없고 생활이 부자유하게 짝이 없습니다. 물질적으로 크게 부요하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인생을 그래도 최소한 자유롭게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돈이 없는 것도 굉장히 부자유스럽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물며 지옥에 떨어져서 영원히 버림받는 다는 것은 영원한 부자유가 아닌 것입니까?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와서 모든 묶인 줄을 끊고 사슬을 끊어 버리고 멍에를 제켜 버리고 자유와 해방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도록 자유를 주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속성은 심신을 치료하십니다. 병든 것 원치 않아요. 어느 부모가 자식이 병들기를 원합니까? 하나님이 우리 마음이나 육체가 병들어 있기를 원하는 하나님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이름은 야훼 라파, “나는 치료하는 하나님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일은 그의 사역의 3분의 2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12제자에게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반드시 병을 고치라고 말씀하십니다. 70인의 제자를 두 사람 두 사람 보내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어느 곳에 들어가든지 주는 것을 먹고 그곳에 있는 병자를 고치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주님이 유언으로 남긴 말씀을 보면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치료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병들어서 고생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입니다.
시편 103: 3~ 5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억을 새롭게 하고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말찌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신 역사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뭘 잊지 말라는 것입니까?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병든 병아리같이 만든다고 말하지 않았었습니다. 독수리같이 날개 치며 올라가게 만들어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편 147: 3에도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페인 바로셀로나 출신의 호세 까레라스는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전 세계가 알아주는 삼대 성악가 중에 한사람입니다. 그런데 은빛 테너라고 불리 우는 그는 한때 불치의 병을 앓았던 적이 있습니다. 성악가로써 명성이 최고조에 달했던 1987년 그의 나이 41살 되던 해에 오페라 라보엠의 주인공을 맡아서 한참 연습하다가 쓰러졌는데 병원에 실려 가서 조사해 보니까 치명적인 백혈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의사는 고개를 흔들면서 살 가능성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꼼짝없이 끝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자 그는 성경을 기억했습니다. 그동안에 성경은 읽지도 아니하고 그저 귀뜸으로 하나님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고통에 처하게 되니까 구약의 하나님이 나는 너희 치료하는 야훼시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세상 의사들이 다 끝장이 났다. 이제는 치료함을 받지 못한다고 할 때 하나님이 나는 너의 의사라고 말하니 능치 못함이 없는 하나님께 소망이 있다고 그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제 생명을 조금만 더 연장시켜 주시면 남은 생애는 이제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을 의지하여 투병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머리끝, 손톱과 발톱이 떨어져 나가는 와중에서도 그는 찬송과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찬송 부르고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골수이식 수술과 힘든 화학치료도 믿음으로 잘 견뎌내어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백혈병에서 나음을 입었습니다. 까레라스는 자신이 다시 살게 된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이 새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감사하고 전 재산을 팔아 바로셀로나에 호세 까레라스 백혈병 재단을 세워서 미국과 독일 스위스 등지에도 지사를 두어 백혈병 환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고 그들에게 치료의 은총을 베푸는 역사를 했습니다. 비로소 까레라스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때로는 질병도 은혜가 될 때가 있습니다. 나는 백혈병과의 싸움을 통해 나보다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단순히 노래만 부르지 않습니다. 나의 생명을 연정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있을 동안에 하나님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축하하고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가지고서 이웃을 사랑하는데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심신을 치료하실 뿐 아니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은 또한 용기와 희망과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낙심하는 자에게 용기를 주고 절망한 자에게 희망을 주고 그리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은 화를 당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공이시오, 하나님은 복이시오, 하나님은 은혜이신데 하나님께 나가서 복을 안 받으면 누구에게 복을 받겠습니까? 교회에서 하나님을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한다고 기복신앙이라고 꾸짖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속으로 웃습니다. 하나님께 복을 안 받으면 누구에게 복을 받을 수가 있는가? 자식들이 부모에게 복을 안 받고 누구에게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 복달라고 안하고 누구에게 복달라고 하겠습니까? 우리가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살면 당당히 하나님께 복을 구하고 복을 받을 수가 있게 되어 있습니다.
시편 16: 8~ 9에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29:11에 “나 야훼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재앙을 주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주고 평안을 주는 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930년대 초 미국은 심각한 대공황을 겪었습니다. 당시 클레어린스 목사는 공장이 밀집된 지역의 한 흑인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 교회의 신자들은 대부분 극빈자들이었으며 60% 이상이 실직하여 생활이 극도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부르는 찬송에 힘과 희망이 넘쳤고 그들의 표정에서 절망의 빛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클레어린스 목사는 설교를 중단하고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미국은 대공황입니다. 도무지 희망이 없어 보이고 실업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뭐가 그렇게 즐거워서 박수를 치고 얼굴에 환한 빛을 발하면서 찬송을 부릅니까?” 그때 한 교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곁에 계신다는 사실이 최고의 희망입니다.” 놀라운 말이 아닙니까? 비록 돈이 없고 직장이 없고 생활이 엉망이고 고통스러워도 예수님이 버리지 않고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면 장차 희망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흑암을 광명으로 무질서는 질서로 죽음은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역사를 할수있기 때문에 그 대공황에도 예수님이 함께 계시므로 희망을 가지고 찬송을 부를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용기요, 희망이요, 복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으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을지라도 용기와 희망을 주시고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속성은 영생천국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우리가 시간 저 건너편 영혼으로 이 제한된 공간 저 건너편 무한으로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살다가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루는 개구리가 하루살이하고 놀다가 하루살이를 보고 “자 이제 날이 어두웠으니 내일 만나자.” 하루살이가 “내일이 뭐냐?” 하루밖에 못사니까 내일이 없잖아요. 오늘날 하루살이처럼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시간에서 영원으로 유한에서 무한으로 살자고 그러면 영원히 뭐냐, 무한이 뭐냐고 그럽니다. 물질적인 세계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천당에 가서 영원히 살수도 있고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통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육신의 천막집에 살 따름입니다. 천막을 치고 사는 사람이 천막을 거둬 치웠다고 사람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천막집은 낡아서 없어져도 천막 안에 있던 사람은 영원히 천국에 가든지 지옥으로 떨어지든지 할 따름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5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 3에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 1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바울선생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결코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처럼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이 우리 속에 들어와야 우리가 비로소 삶을 행복하게 누릴 수 있고 평안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미움은 우리하고 다릅니다. 미움은 마귀의 속성이기 때문에 미움이 들어오면 우리 마음에 불안과 공포, 좌절과 절망이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최근에 어떤 사람이 자기 내연의 처가 자기를 배반했다고 그가 살던 집에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사를 가버리고 없는데 이사 온 사람 문 열고 “그분들은 이사 가고 없어요. 우리는 여기에 이사 새로운 사람입니다.”라고 하는데 칼로 그분을 찔러 죽여 버렸습니다.
그 마음속에 있는 미움이 얼마나 악마하고 불행과 고통을 가져왔습니까? 그리고 또 찾아가서 내연의 처의 집에 가서 그 애인도 찔러 죽이고 그 자식들도 찔러 죽였습니다.
미움이 가져오는 파괴의 행동이란 얼마나 무섭습니까? 미움은 마귀의 형상이요, 사랑은 하나님의 형상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미움이 있으면 마귀가 왔다고 생각하십시오. 마귀를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마귀는 미움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하나님은 사랑가운데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이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은 반드시 그 속에 사랑이 넘쳐나고 사랑 안에 사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이상 미움은 물러가고 사랑이 들어온 것을 감사합니다. 미움의 어두운 밤이 사라지고 사랑의 태양이 떠오른 것을 감사합니다. 사랑의 생각을 하고 사랑의 말을 하고 사랑의 행동을 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시고 사랑 안에서 참 평안과 행복과 만족을 누리고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942 사도행전 축복이 늦어짐의 축복 행4:13-16  이한규 목사  2009-09-17 1657
1941 사도행전 건강을 주는 5대 요소 행4:10-12  이한규 목사  2009-09-17 1749
1940 사도행전 능력은 절대성에서 나옵니다 행4:5-12  이한규 목사  2009-09-17 1802
1939 사도행전 결코 흔들리지 마십시오 행4:1-4  이한규 목사  2009-09-17 1662
1938 사도행전 삶에서 2가지 중요한 것 행3:17-26  이한규 목사  2009-09-17 1832
1937 사도행전 자신을 자신하지 마십시오 행3:11-16  이한규 목사  2009-09-17 1762
1936 사도행전 은과 금보다 귀한 믿음 행3:5-10  이한규 목사  2009-09-17 2386
1935 사도행전 화합미인이 진짜 미인 행3:1-4  이한규 목사  2009-09-17 1849
1934 사도행전 놀라운 기적의 통로 행3:1  이한규 목사  2009-09-17 2413
1933 사도행전 새벽이슬과 같은 사람 행2:44-47  이한규 목사  2009-09-17 2170
1932 사도행전 삶의 위기의 실체 행2:42-43  이한규 목사  2009-09-17 1885
1931 사도행전 축복을 위한 7대 원리 행2:37-42  이한규 목사  2009-09-17 1667
1930 사도행전 믿음의 3대 핵심 주제 행2:22-36  이한규 목사  2009-09-17 1922
1929 사도행전 성령을 주시는 4대 목적 행2:14-21  이한규 목사  2009-09-17 2195
1928 사도행전 불 위에 놓인 진리 행2:5-13  이한규 목사  2009-09-16 1711
1927 사도행전 성령 체험의 패턴 행2:1-4  이한규 목사  2009-09-16 2463
1926 사도행전 성령의 임재가 뚜렷해질 때 행2:1-4  이한규 목사  2009-09-15 2324
1925 사도행전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행1:17-26  이한규 목사  2009-09-15 1765
1924 사도행전 내일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행1:15-16  이한규 목사  2009-09-15 1768
1923 사도행전 간절한 기도의 능력 행1:12-14  이한규 목사  2009-09-15 2427
1922 사도행전 주님의 리듬을 따라 춤추십시오 행1:9-11  이한규 목사  2009-09-15 1825
1921 신명기 축복의 통로-(2)겸손 file 신8:16-19  강종수 목사  2009-09-13 1998
1920 열왕기하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죄 왕하2:23~25  조용기 목사  2009-09-13 1854
1919 누가복음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라 눅18:1~18  조용기 목사  2009-09-13 2314
1918 잠언 내적 저항력 잠4:23  조용기 목사  2009-09-13 1502
» 요한일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일4:7-12  조용기 목사  2009-09-13 2692
1916 예레미야 하나님, 우리 하나님 렘33:1-3  조용기 목사  2009-09-13 1866
1915 요한일서 자유와 해방 공간 요일5:19  조용기 목사  2009-09-13 1752
1914 고린도후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않음 고후5:7  조용기 목사  2009-09-13 1946
1913 잠언 새해를 시작하면서 잠4:20~27  조용기 목사  2009-09-13 1713
1912 이사야 크리스마스 때 오신 그 사람 사32:1-4  조용기 목사  2009-09-13 1479
1911 고린도전 예정과 예비 고전2:9  조용기 목사  2009-09-13 2273
1910 사도행전 성령이 주는 4대 마음 행1:6-8  이한규 목사  2009-09-12 2110
1909 사도행전 어둠의 세력을 이기는 길 행1:4-5  이한규 목사  2009-09-12 1862
1908 사도행전 가장 의미 있게 사는 길 행1:1-3  이한규 목사  2009-09-12 2033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