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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8: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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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6년 2월 12일 주일2부 설교 |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라”는 주님의 부탁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 한국 속담에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절대 절망에 처한 상황을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바위가 깨어질 리가 있겠습니까? 계란이 박살이 나지.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데 바위가 깨어지는 법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이 세상 사람들과 사물을 볼 때 달리 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볼 때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계란이 박살이 나지요. 그러나 신앙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볼 때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바위가 박살이 나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 있고 그 재판관에게 자기의 소원을 간청하는 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이 재판관은 교만하고 안하무인의 불의한 재판관이고 과부는 치명적인 고통과 파탄을 가져온 강한 원수로 말미암아 원한에 사무친 여자였습니다. 그는 원한을 품고 가슴에 사무치는 한을 가지고 이 재판관에게 나와서 늘 번거롭고 괴롭게 할 정도로 원수를 갚아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누가복음 18: 6~ 8에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바로 이 여인의 끊임없는 간청과 부르짖음에 재판관도 할 수 없어서 그 원한을 풀어주었다 하는 내용을 말씀하시면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기도할 때도 하나님 앞에 이와 같이 기도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이와 같이 기도하라는 그 내용을 분석해서 우리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론]
1. 목표가 분명한 기도
첫째로, 우리는 기도할 때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산만한 목표는 방향을 잃게 할 따름인 것입니다. 과부처럼 분명한 원수에 대한 한풀이를 목표로 한 것처럼 우리도 목표가 분명해야 됩니다. 이 여인이 재판관에게 나와서 여러 가지일을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원수에 대한 한을 풀어 달라고 간청을 한 것입니다. 그 목표는 명명백백하고 뚜렷한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질 리가 없었습니다. 완전히 원수에 대한 원한을 갚아달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간청이었습니다.
마태복음 6: 7~ 8에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 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막대한 돈과 무기, 철저한 군사조직을 가졌던 영국정부와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보였던 간디가 승리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가 이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간디에게는 국가를 구원하기 위해 반드시 영국을 이겨야 한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간디는 승리를 거둔 후에 “목표의 힘은 군사력을 힘보다 강합니다. 조직적인 정신력은 조직적인 군사력보다 위대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황제 나폴레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전투를 앞두고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의 승리는 이미 우리가 장악했다. 치밀한 목표달성 계획을 이미 텐트 안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텐트 안에서 이미 승리를 맛보았다. 이제 나는 목표만을 바라볼 뿐이다. 만일 전진하다가 장애물이 생기면 생기는 데로 제거하면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했습니다. 바라는 그 목표가 분명해야 믿음이 역사하지 바라는 목표가 희미하면 믿음도 희미하고 바라는 목표가 산만하면 믿음도 산만해져서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확대경으로 우리가 구멍을 뚫으려면 한곳에 집중해서 비추고 있어야 연기가 모락모락 나고 불이타기 시작하지 확대경으로 자꾸 옮겨 다니면 아무 종이도 타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기도는 분명한 목표를 보고서 기도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에 바라는 것이 분명히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너무 산만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표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종이에다가 목표를 적는 것이 굉장히 좋습니다. 해마다 그 해에 나아갈 것을 종이에다가 목표에 분명히 적어 놓으면 그 목표를 이탈하지 않는 것입니다. 적는다는 것은 굉장한 힘이 있습니다. 저는 많은 병든 자들에게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는 나음을 입었다는 것을 말로만 할뿐 아니라 자꾸 적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적는다는 것은 말하는 것과 더불어 굉장한 힘이 있기 때문에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나니 그리고 병든 자가 기도하는데 뭘 복잡한 기도를 합니까?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나니 나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고쳐 주시옵소서. 이 기도를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반복하는 것입니다.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습니다. 목표가 분명하면 그 목표를 향하여 계속 공격하는 것입니다. 매를 들고 바위를 깨뜨릴 때 여기도 때렸다가 저기도 때렸다가 여기도 때렸다가 저기도 때렸다 하면 바위는 깨어지지 않습니다. 한곳만 향해서 계속 매질을 하면은 그 바위가 깨어지는 것처럼 병든 자가 고침을 받기를 원하면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느니라. 그러므로 이 병은 나았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고쳐 주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고쳐 주옵소서. 목표를 두고 공격을 해야지 목표 없이 방만하게 공격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표를 여러분께서 적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많은 목표를 적으면 안돼요.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갔을 때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한다고 분만하고 마리아는 예수님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을 때 마르다가 시험이 들어서 구정물을 뚝뚝 흘리면서 뛰어 들어와서 문을 열고 주님께 고함을 쳤습니다. “주여, 나는 부엌에서 음식 준비한다고 이렇게 고생을 하는데 동생 마리아는 주님 발밑에 앉아서 말씀만 듣고 있으니 이렇게 불공평할 수가 있습니까? 마리아를 명령해서 부엌에 와서 밥 짓는데 나를 좀 돕게 하소서.” 예수님이 가만히 쳐다보시고 난 다음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고생하고 번민하고 있구나. 한두 가지만 하든지 한 가지만 하라.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으니 잃어버리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한, 두 가지만 하든지 한 가지만 해서 집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많은 일은 과연 번민만 많아지고 아무것도 올바르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성공한 잡지 'success'는 오래전에 예일대 학생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 가운데 목표에 관한 내용도 있었습니다. “세워둔 목표가 있는가?, 목표를 기록해 두었는가?, 목표 달성을 위해 계획을 세웠는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질문에 당시 응답자의 3%만이 목표를 세워 기록하고 있으며 그에 따른 실천계획도 가지고 있다고 대답 했습니다.나머지 학생들은 목표가 있지만 기록을 하지 않는다든지 별다른 목표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 응답자의 수입을 조사해봤더니 놀라운 사실이 나왔습니다. 당시 목표를 세우고 기록해 두었다고 응답한 3%의 사람들의 수입이 나머지 97%의 수입보다 평균 10배나 높았다는 것입니다.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는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0:42에서 예수님께서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분명한 목표를 적고 늘 바라보며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포켓수첩이 필요하고 연필이 필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내 수첩에 적어 놓고 그리고 늘 그것을 펼쳐서 목표를 하루에도 수십 번 바라보는 것 이것이 우리가 기도응답에 절실한 요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G. 지글러는 그의 책 “목표를 알면 성공이 보인다.”에서 목표가 없는 사람은 방향키가 없는 배와 마찬가지다. 각자 표류하거나 그냥 멈추어 떠있거나 절망과 패배와 낙담의 해변에 도착하거나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펠프스는 “삶을 지배하는 거대한 힘 가운데 하나는 뚜렷한 목적을 갖는 것이다.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삶을 살아가기 시작할 때 목소리와 옷차림, 외모와 동작 하나까지 변화하기 마련”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보홀러 박사가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 200명을 조사한 결과 그들이 성공한 것은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인생의 목표가 분명했고 그 목표를 향해 매일 매일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밝혀낸 것입니다. 머리가 좋다고 인생을 성공하는 것 아닙니다. 인류 대학을 나왔다고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목표가 분명해서 그 목표를 향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기도하고 내려 달려가는 그 사람이 성공을 하는 것입니다. 목표가 있어야 믿을 수 있습니다. 목표를 세우고 나가는 사람은 구체적인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인생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아는 기도
둘째로,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약속을 모르고 기도하는 것은 허공을 치는 주먹과 한 가지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이 마음속에 확 들어와 있으면 그 약속에서 서서 강력한 저항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낙심이 다가와도 실망이 다가와도 역경이 다가와도 그것을 헤치고 나갈수 있는 마음속에 저항력이 생기는 것은 말씀을 마음속에 끊임없이 보고 그 말씀을 의지하고 말씀을 고백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 7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하나님의 말씀이 바깥에 떠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내 마음속에 꽉 박혀야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안주해야 되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앉아도 서도 말씀을 생각하고 되씹고 되씹어서 그 말씀이 내 영혼의 거울 속에 꽉 박혀야만 되는 것입니다. 의심의 파도가 아무리 다가와도 말씀의 반석이 있으면 그 말씀을 자꾸 주장하고 말씀을 통해서 의심의 파도를 산산조각으로 내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여러 번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그가 생애 실패를 거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연에는 어떠한 환경에도 하나님 말씀위에 서기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그의 나이 100세가 되고 아내의 나이 90이 되어도 아들을 주실 것을 믿는데 그는 추호도 움직이지 않은 것은 약속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말씀 없이 100세 된 노인이 90살 된 아내를 데리고 자식 낳겠다고 하면 그는 미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있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 아니고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4:18~22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여기에 말씀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자기의 나이가 100세가 되고 아내의 나이 90세가 되어도 그를 통해서 다가오는 여러 가지 감각과 환경과 경험상 의심이 파도쳐 와도 그를 이길 수 있는 것은 그는 말씀에 섰기 때문에 저항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주 예수님의 피로써 값 주고 사주신 은혜는 더없이 확실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값을 주고 사준 것이 뭡니까? 저가 십자가에 보혈로 우리 죄를 용서하고 의롭게 하고 영광을 주신 것 믿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마귀와 세상을 이기고 거룩함과 성령충만을 주셨다는 말씀을 우리는 믿을수 있습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는 것은 약속의 말씀인 것입니다. 저가 우리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사망과 음부에서 부활시켜 천국 보좌 우편에 함께 앉게 해주셨던 그 약속을 말씀은 변함이 없는 약속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몸을 찢고 피를 흘려 대속으로 주신 약속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흔들릴 수 없기 때문에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말씀위에 서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말씀 이외에는 절대로 귀를 기울이지 말고 보지도 말고 느끼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만세 반석이요, 말씀이 우리 믿음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에 서서 나아가면 하나님 앞에 기도를 응답 받을 수 있습니다. 말씀에 기록되지 아니하고 약속이 없으면 우리가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한 맺힌 마음과 열정적 소원의 기도
셋째로, 우리가 기도할 때 한 맺힌 마음, 정열적 소원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냥 미지근한 기도는 안 됩니다. 뜨겁던지 차든지 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한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때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나가야 됩니다. 이 과부가 재판장에 나가서 그 원한을 갚아 달라고 부르짖을 때 밤낮으로 부르짖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부르짖는다는 것은 마음에 뜨거운 열정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집중적인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사실에 집중해서 그것을 주야로 생각하고 그곳에 푹 빠져서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보면 한나가 아기를 못 낳아서 그의 첩되는 브닌나에 의해서 원한에 사무쳤습니다. 멸시당하고 무시당하고 천대를 당하니까 너무 한이 서려서 그가 매년 제를 드릴 때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사무엘상 1:11~13에 보면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얼마나 기도가 간절했든지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말이 안 나왔습니다. 그는 입술만 들썩거리며 한없는 눈물을 흘리고 간청으로 기도하니까 제사장 엘리는 그가 술이 취한 줄 알았습니다. 완전히 기도삼매경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엘리가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그럴 때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것 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그 다음에 한나는 바로 아기가 잉태되어서 그 낳은 아기가 사무엘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 교회를 세계에서 제일가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저는 신학생 시절에 전차표를 살 돈이 없어서 걸어 다녔습니다. 서대문에서 불광동까지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며 걸어 다녔습니다. 다니면서 보면 큰 극장들이 즐비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속으로 “우리나라에 큰 극장들이 이렇게 많은데 왜 큰 교회는 없는가?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극장으로 모여 가는데 왜 교회에 구름떼 같이 사람들이 모여가지 않는가? 나는 세계에서 제일가는 큰 교회의 담임자가 될 것이다.”라고 마음에 뜨거운 소원을 갖고 그 모습을 그리며 늘 걸어 다녔습니다. 가장 큰 교회를 마음속에 그려보고 뜨거운 마음에 소원을 가지고서 기도하면서 늘 서대문에서 불광동까지 걸어서 왔다갔다 출퇴근을 했습니다. 교회 성장에 대해 연구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의견은 성장하기를 원하는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옛 말같이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한 것은 뜨거운 마음으로 입을 넓게 열고 집중적으로 간구하는 그러한 기도가 응답받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모친 한나도 아들을 낳고자 하는 한 맺힌 마음으로 열정적인 소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해서 응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뜨거운 소원이 있어 집중적으로 마음이 혼란하지 않고 그 중심에 서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세계적인 교회가 된 것은 제가 47년간 마음에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뜨거운 소원으로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부르짖은 그 결과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했으니 하나님이 채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전심전력으로 기도해야 됩니다. 어린 아기를 낳는 어머니들을 보면 의사들이 옆에서 “힘을 더 들이세요. 힘들 더 넣으세요.” 자꾸 그럽니다. 어린 아기가 안 나와서 기진맥진해서 괴로운데 자꾸 “힘을 좀 더! 힘을 좀 더!” 기진맥진 합니다. 저는 서대문에 있을 때 최자실 목사님하고 아현동, 현주동 가난한 곳에 심방을 갔는데 폐병에 걸려서 피를 많이 토하는 산모가 해산을 하는데 의사도 없고 아무도 없어요. 우리 최자실 목사님은 국제산파면허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최자실 목사님하고 제가 가서 아기를 받아야 되었습니다. 몸이 너무 약해요. 자기혼자 숨도 잘 못 쉬어요. 그러한 산모가 어린 아기를 낳는데 저는 그 위해서 기도해주고 손을 붙잡고 있고 최자실 목사님이 어린 아기를 받으면서 늘 하는 말이 “힘을 좀 더 써! 더 힘을 써!”산모는 “아이고 죽겠어요. 힘을 못 쓰겠어요.” 그러면 최목사님은 “예수 이름으로 힘을써. 힘을써!” 그 소리가 귀에 지금도 쟁쟁합니다. 최목사님이 얼굴이 새빨개져 가지고서 “더 힘을 써라! 전심전력을 들여라!” 그러니까 나중에 어린 아이가 응아하고 태어나는 것을 보고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릅니다. 어른도 안 죽고 어린아이도 안 죽고 살았어요. 기도도 여러분 어린 아기를 낳는 심정으로 전심전력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전심전력을 기울이지 않은 기도는 그냥 오다가다 한 마디씩 하는 기도는 큰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갈멜산에서 비오기를 기도한 엘리야를 보십시오. 3년 6개월 동안 비가오지 않은 이스라엘에 비가 오게 하기 위해서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기도할 때 얼마나 전심전력으로 기도했던지 그의 머리가 다리 사이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압니까? 기도를 애쓰고 힘쓰고 하면 창자가 땅겨 가지고서 허리가 고부라져서 새우등처럼 고부라져서 머리가 나중에는 다리 사이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엘리야가 간절히 기도하면서 자기 사환을 보고 산꼭대기에 일곱 번이라도 올라가 보라. 일곱 번째 내려와서 손바닥만한 구름이 보입니다. 이제 큰 비의 소리가 들리니 왕에게 올라가서 빨리 식사하고 마차를 정비해서 일심으로 이스라엘로 들어가라고 말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대로 하늘에서 청천벽력이 나오면서 큰 비가 쏟아졌던 것입니다.
야고보서 5:17~18에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기도는 간절해야 됩니다. 왜 사람들이 우리를 비난해서 통성기도 하냐고 말합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지 왜 통성으로 기도하느냐. 성경을 알고나 해야 되는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것은 다른 사람 들으라고 미사여구를 사용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들으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부르짖어 기도하되 남이야 듣든지 말든지 상관할 것이 없이 외마디 소리로 부르짖더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할 때 불퇴전의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과부가 재판관에게 늘 와서 번거롭게 하고 괴롭게 했던 것입니다. 늘 와서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일주일, 이주일이 아닙니다.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늘 와서 번거롭게 하고 그것도 밤낮으로 와서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불퇴전의 기도인 것입니다. 한번 기도를 출발했으면 환경을 바라보고 뒤로 물러가고 상황이 좋지 않다고 기도를 포기하고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예 한번 기도했으면 죽자 살자 달라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좋은 사냥개는 짐승을 공격할 때 목을 한번 물으면 짐승이 죽든지 자기가 죽든지 안 놓습니다. 제가 자랄 때 우리 밑에 신손이라는 농군이 있었는데 그 집에서 똥개 한 마리를 키웠어요. 아주 밥도 못 얻어먹고 비실비실한 것인데 이 개를 데리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이 개가 누워있는 노루목을 물었습니다. 눈에 불을 켜고 밥도 못 먹고 비실비실한 강아지 같은 개가 노루목을 물고 매달리니까 노루가 달리고 뛰지 못해서 서 있으니까 이 농부가 가서 지팡이를 때려 가지고 노루를 잡았습니다. “신손집 개가 노루를 잡았다.”고 소문이 온 동리에 났어요. 그 개 값이 천정부지로 뛰었어요. 아예 개를 사겠다고 줄을 서서 오고 그 개 값이 올라가서 개 팔자가 상팔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 개가 노루목을 물고서 안 매달리고 놓아 버렸더라면 자기 팔자 고약하게 되고 말았겠지. 그런데 끝까지 매달리니까 노루를 잡아서 그렇게 몸값이 부풀어 오른 것을 본 적 있습니다.
누가복음18: 7에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밤낮 부르짖고 매달려서 하나님이 “번거러워서 견딜 수 없다. 아이구! 시끄러워 못살겠다. 아이 번거로워!” 그렇게 할 정도로 집요하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1: 8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찌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친구가 밤중에 왔는데 먹을 것이 없어 이웃집 부잣집에 가서 떡 세 덩어리만 달라고 밤중에 구하니까 “우리 다 잠자리에 들어왔으니 일어나서 줄 수가 없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아이, 떡 좀 주세요.”, “아이, 못주니까 다음날 오라”고. 이 사람이 대문을 두드리면서 막 부르짖습니다. “떡 좀 주세요. 떡! 떡! 떡! 떡!” 다른 무슨 복잡한 말 안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이웃의 친구여 옛정을 생각해서 밤중에 온 친구를 대접하기 위해서 구하오니 자비를 베푸사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셔서 나에게 떡 세 덩어리를 주시옵소서.” 그런 소리 안했습니다. 그냥 “떡, 떡, 떡, 떡…” 귀를 막고 있어도 자꾸 “떡! 떡!” 하니까 “내가 친구 때문에 주는 것이 아니라 시끄러워서 내가 떡을 주겠다.”고 하면서 일어나 떡 세 덩어리를 주었다는 말을 하시면서 주님께서 너희도 그렇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부탁할 정도니까 여러분 보통 부탁이 아니지요. 집요하게 불퇴전의 기도를 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최근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화제가 되고 있는 한국 축구선수 박지성의 발을 한번 보세요. 세계 속의 한국인 박지성은 평발의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무대에 도전해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는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 피나는 훈련과 연습이 있었다는 것을 상처투성이인 발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박지성의 발 보았지요? 발이 걸레에요. 얼마나 공을 집요하게 찼던지 그럴 정도로 연습벌레를 했기 때문에 오늘 박지성이 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루 19시간의 연습과 1년에 1,000여 켤레의 토스슈즈가 달아 지도록 발레 연습을 한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된 강수진의 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발 한번 보세요. 발레리나. 저게 발입니까? 약대발이지. 그가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발가락을 들고 춤을 추더니 발이 저모양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1986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최초 동양인 단원으로 입단하였고 1997년부터 수석 발레리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1998년에는 문화관광부에서 선정하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는가 하면, 1999년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인 ‘브누아 드 라 당스’의 최고 여성무용수로 선정되었고, 그해 대한민국 국보관광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또한 세계적인 우리 한국의 바이올리니스트 유시연씨의 손가락을 한번 보십시오. 수많은 연습으로 인해 손가락 끝에 아예 바이올린 줄이 손에 났습니다. 손보세요. 손에 이미 바이올린 줄이 났어요. 이들은 한국의 이름을 빛낸 세계적인 스포츠 문화 예술인들은 무엇보다 자신의 분야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한 맺힌 마음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전심전력으로 일했던 것입니다. 낙심될 때 많았겠지요. 좌절될 때 많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퇴전의 결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열정적으로 노력해서 세계적인 스포츠맨도 되고 예술가도 되고 음악가도 된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일도 그런데 하나님께 나가서 기도하는 사람이 집중적이고 열정적이고 불퇴전의 마음을 가지고 저들처럼 밀고 나가면 응답 못 받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얼마나 우리들이 기도를 희미하게 하고 맥 빠진 기도를 하고 정열이 없는 집중하지 않은 낙심천만한 기도를 하기 때문에 응답을 못 받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생활도 기도를 하더라도 한 맺힌 마음으로 열정적인 소원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전심전력을 다해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결단적인 믿음의 기도
넷째로, 결단적인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흔들리거나 우유부단한 믿음은 힘이 없습니다. 야고보서 1: 6~ 8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1997년 12월 미국 라이프지에는 세계 역사에 공헌한 100명을 선정하는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로 토마스 에디슨을 꼽았습니다. 그는 전구를 발명할 때 1년 넘게 하루에 4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수천 번의 실험 끝에 전구발명에 성공했던 것입니다. 그는 발명한 축전기 역시 5만 번 이상의 실험 끝에 만들어낸 것입니다. 에디슨은 한번 발명하기로 작심한 것은 수없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꼭 이루었던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믿기로 결단했으면 번복하거나 뒤돌아보지 말고 끝까지 밀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실패하면 또 일어나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고 괴로움을 당해도 또 일어나고 계속해서 목표를 향하여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밀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토마스 카알라일은 말하기를 “결정하지 아니한 사람은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다닌다. 그는 가장 편한 길에서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이와 반대로 결정한 사람은 가장 험한 길도 뚫고 나간다. 그리고 자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한번 결심하고 번복하거나 뒤돌아보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9:62의 말씀을 통해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고, 히브리서 10:38에도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번 출발했으면 끝장을 보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그 길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응답을 뚜렷이 바라보고 믿음의 선언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응답이 온다. 바라봄의 법칙으로 내가 구하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하나님 뜻에서는 이미 이루어졌다!” 그래서 늘 기도할 때 응답이 이미 온 것을 바라보고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은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이미 나음을 얻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미 나은 사람이다. 성경에 나음을 얻었다고 하니까 나는 이미 나음을 입은 사람이라고 자꾸 선언하는 것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는 나음을 얻었다. 저는 제게 몸에 병이 와서 괴로울 때 하루에 천 번 이상씩 계속해서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는 나음을 입었다. 저는 채찍에 맞음으로 너는 나음을 입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는 나음을 입었다.” 계속해서 입으로 시인한 적이 있고 그 시인한 결과로 병을 이기고 승리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한두 번 선언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혀가 닳도록 계속해서 믿음의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선언이 위대한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태산을 옮기라고 말하고도 의심하지 않고 그 믿음의 선언을 계속할 수 있으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결론]
응답받기 위한 기도는 전쟁입니다. 기도를 방해하는 마귀를 이겨야 하고 우리의 믿음의 진실성을 시험해 보시는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해야만 합니다. 일반적인 교제의 기도나 감사와 찬미의 기도나 중보의 기도보다 문제해결의 기도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것입니다. 응답받는 기도에는 우연이나 설마가 없습니다. 오직 이기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과 도전이 필요할 따름인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지만 그 기도는 목표가 분명해야 되고 마음속에 확실한 응답에 대한 꿈이 있어야 되고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되고 집요한 간청이 있어야 되고 불퇴전의 결심이 있어야 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하늘나라를 향해서 폭풍우처럼 돌진해 들어가면 모든 안개구름 걷어지고 하나님의 광명한 응답이 해와 달과 별처럼 여러분 생활 속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은 이미 하늘에서 우리가 기도할 것을 알고 계시고 응답해 주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입을 넓게 열고 나가면 하나님이 채워 주시기로 약속하셨으니 아버지 하나님 그러므로 우리가 목표 없는 기도하지 말게 도와주시옵소서. 모두다 목표를 분명히 가지고 꿈을 분명히 가지고 확실한 믿음으로 열정으로 집중적으로 지구적으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기도를 통해서 위대한 역사들이 일어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라”는 주님의 부탁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 한국 속담에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절대 절망에 처한 상황을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바위가 깨어질 리가 있겠습니까? 계란이 박살이 나지.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데 바위가 깨어지는 법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이 세상 사람들과 사물을 볼 때 달리 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볼 때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계란이 박살이 나지요. 그러나 신앙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볼 때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바위가 박살이 나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 있고 그 재판관에게 자기의 소원을 간청하는 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이 재판관은 교만하고 안하무인의 불의한 재판관이고 과부는 치명적인 고통과 파탄을 가져온 강한 원수로 말미암아 원한에 사무친 여자였습니다. 그는 원한을 품고 가슴에 사무치는 한을 가지고 이 재판관에게 나와서 늘 번거롭고 괴롭게 할 정도로 원수를 갚아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누가복음 18: 6~ 8에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바로 이 여인의 끊임없는 간청과 부르짖음에 재판관도 할 수 없어서 그 원한을 풀어주었다 하는 내용을 말씀하시면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기도할 때도 하나님 앞에 이와 같이 기도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이와 같이 기도하라는 그 내용을 분석해서 우리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론]
1. 목표가 분명한 기도
첫째로, 우리는 기도할 때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산만한 목표는 방향을 잃게 할 따름인 것입니다. 과부처럼 분명한 원수에 대한 한풀이를 목표로 한 것처럼 우리도 목표가 분명해야 됩니다. 이 여인이 재판관에게 나와서 여러 가지일을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원수에 대한 한을 풀어 달라고 간청을 한 것입니다. 그 목표는 명명백백하고 뚜렷한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질 리가 없었습니다. 완전히 원수에 대한 원한을 갚아달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간청이었습니다.
마태복음 6: 7~ 8에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 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막대한 돈과 무기, 철저한 군사조직을 가졌던 영국정부와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보였던 간디가 승리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가 이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간디에게는 국가를 구원하기 위해 반드시 영국을 이겨야 한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간디는 승리를 거둔 후에 “목표의 힘은 군사력을 힘보다 강합니다. 조직적인 정신력은 조직적인 군사력보다 위대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황제 나폴레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전투를 앞두고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의 승리는 이미 우리가 장악했다. 치밀한 목표달성 계획을 이미 텐트 안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텐트 안에서 이미 승리를 맛보았다. 이제 나는 목표만을 바라볼 뿐이다. 만일 전진하다가 장애물이 생기면 생기는 데로 제거하면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했습니다. 바라는 그 목표가 분명해야 믿음이 역사하지 바라는 목표가 희미하면 믿음도 희미하고 바라는 목표가 산만하면 믿음도 산만해져서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확대경으로 우리가 구멍을 뚫으려면 한곳에 집중해서 비추고 있어야 연기가 모락모락 나고 불이타기 시작하지 확대경으로 자꾸 옮겨 다니면 아무 종이도 타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기도는 분명한 목표를 보고서 기도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에 바라는 것이 분명히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너무 산만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표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종이에다가 목표를 적는 것이 굉장히 좋습니다. 해마다 그 해에 나아갈 것을 종이에다가 목표에 분명히 적어 놓으면 그 목표를 이탈하지 않는 것입니다. 적는다는 것은 굉장한 힘이 있습니다. 저는 많은 병든 자들에게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는 나음을 입었다는 것을 말로만 할뿐 아니라 자꾸 적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적는다는 것은 말하는 것과 더불어 굉장한 힘이 있기 때문에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나니 그리고 병든 자가 기도하는데 뭘 복잡한 기도를 합니까?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나니 나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고쳐 주시옵소서. 이 기도를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반복하는 것입니다.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습니다. 목표가 분명하면 그 목표를 향하여 계속 공격하는 것입니다. 매를 들고 바위를 깨뜨릴 때 여기도 때렸다가 저기도 때렸다가 여기도 때렸다가 저기도 때렸다 하면 바위는 깨어지지 않습니다. 한곳만 향해서 계속 매질을 하면은 그 바위가 깨어지는 것처럼 병든 자가 고침을 받기를 원하면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느니라. 그러므로 이 병은 나았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고쳐 주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고쳐 주옵소서. 목표를 두고 공격을 해야지 목표 없이 방만하게 공격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표를 여러분께서 적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많은 목표를 적으면 안돼요.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갔을 때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한다고 분만하고 마리아는 예수님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을 때 마르다가 시험이 들어서 구정물을 뚝뚝 흘리면서 뛰어 들어와서 문을 열고 주님께 고함을 쳤습니다. “주여, 나는 부엌에서 음식 준비한다고 이렇게 고생을 하는데 동생 마리아는 주님 발밑에 앉아서 말씀만 듣고 있으니 이렇게 불공평할 수가 있습니까? 마리아를 명령해서 부엌에 와서 밥 짓는데 나를 좀 돕게 하소서.” 예수님이 가만히 쳐다보시고 난 다음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고생하고 번민하고 있구나. 한두 가지만 하든지 한 가지만 하라.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으니 잃어버리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한, 두 가지만 하든지 한 가지만 해서 집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많은 일은 과연 번민만 많아지고 아무것도 올바르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성공한 잡지 'success'는 오래전에 예일대 학생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 가운데 목표에 관한 내용도 있었습니다. “세워둔 목표가 있는가?, 목표를 기록해 두었는가?, 목표 달성을 위해 계획을 세웠는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질문에 당시 응답자의 3%만이 목표를 세워 기록하고 있으며 그에 따른 실천계획도 가지고 있다고 대답 했습니다.나머지 학생들은 목표가 있지만 기록을 하지 않는다든지 별다른 목표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 응답자의 수입을 조사해봤더니 놀라운 사실이 나왔습니다. 당시 목표를 세우고 기록해 두었다고 응답한 3%의 사람들의 수입이 나머지 97%의 수입보다 평균 10배나 높았다는 것입니다.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는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0:42에서 예수님께서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분명한 목표를 적고 늘 바라보며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포켓수첩이 필요하고 연필이 필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내 수첩에 적어 놓고 그리고 늘 그것을 펼쳐서 목표를 하루에도 수십 번 바라보는 것 이것이 우리가 기도응답에 절실한 요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G. 지글러는 그의 책 “목표를 알면 성공이 보인다.”에서 목표가 없는 사람은 방향키가 없는 배와 마찬가지다. 각자 표류하거나 그냥 멈추어 떠있거나 절망과 패배와 낙담의 해변에 도착하거나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펠프스는 “삶을 지배하는 거대한 힘 가운데 하나는 뚜렷한 목적을 갖는 것이다.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삶을 살아가기 시작할 때 목소리와 옷차림, 외모와 동작 하나까지 변화하기 마련”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보홀러 박사가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 200명을 조사한 결과 그들이 성공한 것은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인생의 목표가 분명했고 그 목표를 향해 매일 매일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밝혀낸 것입니다. 머리가 좋다고 인생을 성공하는 것 아닙니다. 인류 대학을 나왔다고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목표가 분명해서 그 목표를 향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기도하고 내려 달려가는 그 사람이 성공을 하는 것입니다. 목표가 있어야 믿을 수 있습니다. 목표를 세우고 나가는 사람은 구체적인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인생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아는 기도
둘째로,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약속을 모르고 기도하는 것은 허공을 치는 주먹과 한 가지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이 마음속에 확 들어와 있으면 그 약속에서 서서 강력한 저항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낙심이 다가와도 실망이 다가와도 역경이 다가와도 그것을 헤치고 나갈수 있는 마음속에 저항력이 생기는 것은 말씀을 마음속에 끊임없이 보고 그 말씀을 의지하고 말씀을 고백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 7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하나님의 말씀이 바깥에 떠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내 마음속에 꽉 박혀야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안주해야 되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앉아도 서도 말씀을 생각하고 되씹고 되씹어서 그 말씀이 내 영혼의 거울 속에 꽉 박혀야만 되는 것입니다. 의심의 파도가 아무리 다가와도 말씀의 반석이 있으면 그 말씀을 자꾸 주장하고 말씀을 통해서 의심의 파도를 산산조각으로 내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여러 번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그가 생애 실패를 거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연에는 어떠한 환경에도 하나님 말씀위에 서기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그의 나이 100세가 되고 아내의 나이 90이 되어도 아들을 주실 것을 믿는데 그는 추호도 움직이지 않은 것은 약속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말씀 없이 100세 된 노인이 90살 된 아내를 데리고 자식 낳겠다고 하면 그는 미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있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 아니고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4:18~22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여기에 말씀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자기의 나이가 100세가 되고 아내의 나이 90세가 되어도 그를 통해서 다가오는 여러 가지 감각과 환경과 경험상 의심이 파도쳐 와도 그를 이길 수 있는 것은 그는 말씀에 섰기 때문에 저항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주 예수님의 피로써 값 주고 사주신 은혜는 더없이 확실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값을 주고 사준 것이 뭡니까? 저가 십자가에 보혈로 우리 죄를 용서하고 의롭게 하고 영광을 주신 것 믿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마귀와 세상을 이기고 거룩함과 성령충만을 주셨다는 말씀을 우리는 믿을수 있습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는 것은 약속의 말씀인 것입니다. 저가 우리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사망과 음부에서 부활시켜 천국 보좌 우편에 함께 앉게 해주셨던 그 약속을 말씀은 변함이 없는 약속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몸을 찢고 피를 흘려 대속으로 주신 약속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흔들릴 수 없기 때문에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말씀위에 서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말씀 이외에는 절대로 귀를 기울이지 말고 보지도 말고 느끼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만세 반석이요, 말씀이 우리 믿음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에 서서 나아가면 하나님 앞에 기도를 응답 받을 수 있습니다. 말씀에 기록되지 아니하고 약속이 없으면 우리가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한 맺힌 마음과 열정적 소원의 기도
셋째로, 우리가 기도할 때 한 맺힌 마음, 정열적 소원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냥 미지근한 기도는 안 됩니다. 뜨겁던지 차든지 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한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때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나가야 됩니다. 이 과부가 재판장에 나가서 그 원한을 갚아 달라고 부르짖을 때 밤낮으로 부르짖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부르짖는다는 것은 마음에 뜨거운 열정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집중적인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사실에 집중해서 그것을 주야로 생각하고 그곳에 푹 빠져서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보면 한나가 아기를 못 낳아서 그의 첩되는 브닌나에 의해서 원한에 사무쳤습니다. 멸시당하고 무시당하고 천대를 당하니까 너무 한이 서려서 그가 매년 제를 드릴 때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사무엘상 1:11~13에 보면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얼마나 기도가 간절했든지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말이 안 나왔습니다. 그는 입술만 들썩거리며 한없는 눈물을 흘리고 간청으로 기도하니까 제사장 엘리는 그가 술이 취한 줄 알았습니다. 완전히 기도삼매경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엘리가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그럴 때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것 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그 다음에 한나는 바로 아기가 잉태되어서 그 낳은 아기가 사무엘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 교회를 세계에서 제일가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저는 신학생 시절에 전차표를 살 돈이 없어서 걸어 다녔습니다. 서대문에서 불광동까지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며 걸어 다녔습니다. 다니면서 보면 큰 극장들이 즐비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속으로 “우리나라에 큰 극장들이 이렇게 많은데 왜 큰 교회는 없는가?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극장으로 모여 가는데 왜 교회에 구름떼 같이 사람들이 모여가지 않는가? 나는 세계에서 제일가는 큰 교회의 담임자가 될 것이다.”라고 마음에 뜨거운 소원을 갖고 그 모습을 그리며 늘 걸어 다녔습니다. 가장 큰 교회를 마음속에 그려보고 뜨거운 마음에 소원을 가지고서 기도하면서 늘 서대문에서 불광동까지 걸어서 왔다갔다 출퇴근을 했습니다. 교회 성장에 대해 연구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의견은 성장하기를 원하는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옛 말같이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한 것은 뜨거운 마음으로 입을 넓게 열고 집중적으로 간구하는 그러한 기도가 응답받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모친 한나도 아들을 낳고자 하는 한 맺힌 마음으로 열정적인 소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해서 응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뜨거운 소원이 있어 집중적으로 마음이 혼란하지 않고 그 중심에 서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세계적인 교회가 된 것은 제가 47년간 마음에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뜨거운 소원으로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부르짖은 그 결과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했으니 하나님이 채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전심전력으로 기도해야 됩니다. 어린 아기를 낳는 어머니들을 보면 의사들이 옆에서 “힘을 더 들이세요. 힘들 더 넣으세요.” 자꾸 그럽니다. 어린 아기가 안 나와서 기진맥진해서 괴로운데 자꾸 “힘을 좀 더! 힘을 좀 더!” 기진맥진 합니다. 저는 서대문에 있을 때 최자실 목사님하고 아현동, 현주동 가난한 곳에 심방을 갔는데 폐병에 걸려서 피를 많이 토하는 산모가 해산을 하는데 의사도 없고 아무도 없어요. 우리 최자실 목사님은 국제산파면허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최자실 목사님하고 제가 가서 아기를 받아야 되었습니다. 몸이 너무 약해요. 자기혼자 숨도 잘 못 쉬어요. 그러한 산모가 어린 아기를 낳는데 저는 그 위해서 기도해주고 손을 붙잡고 있고 최자실 목사님이 어린 아기를 받으면서 늘 하는 말이 “힘을 좀 더 써! 더 힘을 써!”산모는 “아이고 죽겠어요. 힘을 못 쓰겠어요.” 그러면 최목사님은 “예수 이름으로 힘을써. 힘을써!” 그 소리가 귀에 지금도 쟁쟁합니다. 최목사님이 얼굴이 새빨개져 가지고서 “더 힘을 써라! 전심전력을 들여라!” 그러니까 나중에 어린 아이가 응아하고 태어나는 것을 보고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릅니다. 어른도 안 죽고 어린아이도 안 죽고 살았어요. 기도도 여러분 어린 아기를 낳는 심정으로 전심전력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전심전력을 기울이지 않은 기도는 그냥 오다가다 한 마디씩 하는 기도는 큰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갈멜산에서 비오기를 기도한 엘리야를 보십시오. 3년 6개월 동안 비가오지 않은 이스라엘에 비가 오게 하기 위해서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기도할 때 얼마나 전심전력으로 기도했던지 그의 머리가 다리 사이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압니까? 기도를 애쓰고 힘쓰고 하면 창자가 땅겨 가지고서 허리가 고부라져서 새우등처럼 고부라져서 머리가 나중에는 다리 사이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엘리야가 간절히 기도하면서 자기 사환을 보고 산꼭대기에 일곱 번이라도 올라가 보라. 일곱 번째 내려와서 손바닥만한 구름이 보입니다. 이제 큰 비의 소리가 들리니 왕에게 올라가서 빨리 식사하고 마차를 정비해서 일심으로 이스라엘로 들어가라고 말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대로 하늘에서 청천벽력이 나오면서 큰 비가 쏟아졌던 것입니다.
야고보서 5:17~18에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기도는 간절해야 됩니다. 왜 사람들이 우리를 비난해서 통성기도 하냐고 말합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지 왜 통성으로 기도하느냐. 성경을 알고나 해야 되는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것은 다른 사람 들으라고 미사여구를 사용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들으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부르짖어 기도하되 남이야 듣든지 말든지 상관할 것이 없이 외마디 소리로 부르짖더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할 때 불퇴전의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과부가 재판관에게 늘 와서 번거롭게 하고 괴롭게 했던 것입니다. 늘 와서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일주일, 이주일이 아닙니다.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늘 와서 번거롭게 하고 그것도 밤낮으로 와서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불퇴전의 기도인 것입니다. 한번 기도를 출발했으면 환경을 바라보고 뒤로 물러가고 상황이 좋지 않다고 기도를 포기하고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예 한번 기도했으면 죽자 살자 달라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좋은 사냥개는 짐승을 공격할 때 목을 한번 물으면 짐승이 죽든지 자기가 죽든지 안 놓습니다. 제가 자랄 때 우리 밑에 신손이라는 농군이 있었는데 그 집에서 똥개 한 마리를 키웠어요. 아주 밥도 못 얻어먹고 비실비실한 것인데 이 개를 데리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이 개가 누워있는 노루목을 물었습니다. 눈에 불을 켜고 밥도 못 먹고 비실비실한 강아지 같은 개가 노루목을 물고 매달리니까 노루가 달리고 뛰지 못해서 서 있으니까 이 농부가 가서 지팡이를 때려 가지고 노루를 잡았습니다. “신손집 개가 노루를 잡았다.”고 소문이 온 동리에 났어요. 그 개 값이 천정부지로 뛰었어요. 아예 개를 사겠다고 줄을 서서 오고 그 개 값이 올라가서 개 팔자가 상팔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 개가 노루목을 물고서 안 매달리고 놓아 버렸더라면 자기 팔자 고약하게 되고 말았겠지. 그런데 끝까지 매달리니까 노루를 잡아서 그렇게 몸값이 부풀어 오른 것을 본 적 있습니다.
누가복음18: 7에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밤낮 부르짖고 매달려서 하나님이 “번거러워서 견딜 수 없다. 아이구! 시끄러워 못살겠다. 아이 번거로워!” 그렇게 할 정도로 집요하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1: 8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찌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친구가 밤중에 왔는데 먹을 것이 없어 이웃집 부잣집에 가서 떡 세 덩어리만 달라고 밤중에 구하니까 “우리 다 잠자리에 들어왔으니 일어나서 줄 수가 없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아이, 떡 좀 주세요.”, “아이, 못주니까 다음날 오라”고. 이 사람이 대문을 두드리면서 막 부르짖습니다. “떡 좀 주세요. 떡! 떡! 떡! 떡!” 다른 무슨 복잡한 말 안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이웃의 친구여 옛정을 생각해서 밤중에 온 친구를 대접하기 위해서 구하오니 자비를 베푸사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셔서 나에게 떡 세 덩어리를 주시옵소서.” 그런 소리 안했습니다. 그냥 “떡, 떡, 떡, 떡…” 귀를 막고 있어도 자꾸 “떡! 떡!” 하니까 “내가 친구 때문에 주는 것이 아니라 시끄러워서 내가 떡을 주겠다.”고 하면서 일어나 떡 세 덩어리를 주었다는 말을 하시면서 주님께서 너희도 그렇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부탁할 정도니까 여러분 보통 부탁이 아니지요. 집요하게 불퇴전의 기도를 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최근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화제가 되고 있는 한국 축구선수 박지성의 발을 한번 보세요. 세계 속의 한국인 박지성은 평발의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무대에 도전해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는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 피나는 훈련과 연습이 있었다는 것을 상처투성이인 발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박지성의 발 보았지요? 발이 걸레에요. 얼마나 공을 집요하게 찼던지 그럴 정도로 연습벌레를 했기 때문에 오늘 박지성이 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루 19시간의 연습과 1년에 1,000여 켤레의 토스슈즈가 달아 지도록 발레 연습을 한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된 강수진의 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발 한번 보세요. 발레리나. 저게 발입니까? 약대발이지. 그가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발가락을 들고 춤을 추더니 발이 저모양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1986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최초 동양인 단원으로 입단하였고 1997년부터 수석 발레리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1998년에는 문화관광부에서 선정하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는가 하면, 1999년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인 ‘브누아 드 라 당스’의 최고 여성무용수로 선정되었고, 그해 대한민국 국보관광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또한 세계적인 우리 한국의 바이올리니스트 유시연씨의 손가락을 한번 보십시오. 수많은 연습으로 인해 손가락 끝에 아예 바이올린 줄이 손에 났습니다. 손보세요. 손에 이미 바이올린 줄이 났어요. 이들은 한국의 이름을 빛낸 세계적인 스포츠 문화 예술인들은 무엇보다 자신의 분야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한 맺힌 마음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전심전력으로 일했던 것입니다. 낙심될 때 많았겠지요. 좌절될 때 많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퇴전의 결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열정적으로 노력해서 세계적인 스포츠맨도 되고 예술가도 되고 음악가도 된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일도 그런데 하나님께 나가서 기도하는 사람이 집중적이고 열정적이고 불퇴전의 마음을 가지고 저들처럼 밀고 나가면 응답 못 받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얼마나 우리들이 기도를 희미하게 하고 맥 빠진 기도를 하고 정열이 없는 집중하지 않은 낙심천만한 기도를 하기 때문에 응답을 못 받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생활도 기도를 하더라도 한 맺힌 마음으로 열정적인 소원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전심전력을 다해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결단적인 믿음의 기도
넷째로, 결단적인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흔들리거나 우유부단한 믿음은 힘이 없습니다. 야고보서 1: 6~ 8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1997년 12월 미국 라이프지에는 세계 역사에 공헌한 100명을 선정하는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로 토마스 에디슨을 꼽았습니다. 그는 전구를 발명할 때 1년 넘게 하루에 4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수천 번의 실험 끝에 전구발명에 성공했던 것입니다. 그는 발명한 축전기 역시 5만 번 이상의 실험 끝에 만들어낸 것입니다. 에디슨은 한번 발명하기로 작심한 것은 수없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꼭 이루었던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믿기로 결단했으면 번복하거나 뒤돌아보지 말고 끝까지 밀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실패하면 또 일어나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고 괴로움을 당해도 또 일어나고 계속해서 목표를 향하여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밀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토마스 카알라일은 말하기를 “결정하지 아니한 사람은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다닌다. 그는 가장 편한 길에서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이와 반대로 결정한 사람은 가장 험한 길도 뚫고 나간다. 그리고 자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한번 결심하고 번복하거나 뒤돌아보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9:62의 말씀을 통해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고, 히브리서 10:38에도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번 출발했으면 끝장을 보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그 길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응답을 뚜렷이 바라보고 믿음의 선언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응답이 온다. 바라봄의 법칙으로 내가 구하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하나님 뜻에서는 이미 이루어졌다!” 그래서 늘 기도할 때 응답이 이미 온 것을 바라보고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은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이미 나음을 얻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미 나은 사람이다. 성경에 나음을 얻었다고 하니까 나는 이미 나음을 입은 사람이라고 자꾸 선언하는 것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는 나음을 얻었다. 저는 제게 몸에 병이 와서 괴로울 때 하루에 천 번 이상씩 계속해서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는 나음을 입었다. 저는 채찍에 맞음으로 너는 나음을 입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는 나음을 입었다.” 계속해서 입으로 시인한 적이 있고 그 시인한 결과로 병을 이기고 승리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한두 번 선언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혀가 닳도록 계속해서 믿음의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선언이 위대한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태산을 옮기라고 말하고도 의심하지 않고 그 믿음의 선언을 계속할 수 있으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결론]
응답받기 위한 기도는 전쟁입니다. 기도를 방해하는 마귀를 이겨야 하고 우리의 믿음의 진실성을 시험해 보시는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해야만 합니다. 일반적인 교제의 기도나 감사와 찬미의 기도나 중보의 기도보다 문제해결의 기도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것입니다. 응답받는 기도에는 우연이나 설마가 없습니다. 오직 이기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과 도전이 필요할 따름인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지만 그 기도는 목표가 분명해야 되고 마음속에 확실한 응답에 대한 꿈이 있어야 되고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되고 집요한 간청이 있어야 되고 불퇴전의 결심이 있어야 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하늘나라를 향해서 폭풍우처럼 돌진해 들어가면 모든 안개구름 걷어지고 하나님의 광명한 응답이 해와 달과 별처럼 여러분 생활 속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은 이미 하늘에서 우리가 기도할 것을 알고 계시고 응답해 주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입을 넓게 열고 나가면 하나님이 채워 주시기로 약속하셨으니 아버지 하나님 그러므로 우리가 목표 없는 기도하지 말게 도와주시옵소서. 모두다 목표를 분명히 가지고 꿈을 분명히 가지고 확실한 믿음으로 열정으로 집중적으로 지구적으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기도를 통해서 위대한 역사들이 일어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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