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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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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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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자신의 생각, 특히 호기심이나 본능적인 지식욕에서 비롯되는 생각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그대와 어둠 사이에서 어떤 생각이 불쑥 솟아올라 참견하며 그대에게 무엇을 찾고 있느냐, 무엇을 바라느냐고 묻거든, 그대가 바라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라고 대답하십시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분이요, 찾는 것도 그분이다.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 그(생각)가 반드시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하고물을 터인즉. 그분은 그대를 만들고 그대를 구원하고 은총으로 그대를 사랑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이라고 대답하십시오. 그리고 그에게 "너는 그분에 대해 털끝만큼도 아는 것이 없다 "고 말하십시오. 이어
"그러니 물러서라." 이르고 나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위해 그를 짓밟고 넘어가십시오. 설령 그같은 생각들이 거룩해 보이고 그대가 하나님을 찾는 데 도움 될 것처럼 생각되더라도 그렇게 하십시오. 그가 하나님의 친절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놀랍고 멋진 생각들을 그대의 마음속에 불어넣는가 하면 하나님의 감미로움과 사랑, 은총과 자비를 일깨워 줄 공산도 아주 큽니다. 하지만 그대가 하나님께만 향할 뿐이라면 그는 더이상 묻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갈수록 심하게 수다를 떨며,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도록 끈질기게 달라붙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그대에게 보여줄 터인즉, 그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그대가 자기에게 귀를 기울이도록 만드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한 걸음더 나아가서 그대의 지난날 생활을 들여다보게 만들고, 그 시절의 사악한 참상을 생각함에 따라 그대의 마음이 멀리 벗어나서 지난날 노상 드나들던 그 소굴로 되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그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새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붕괴되고 맙니다. 이유가 무엇이냐고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대가 자유로이 그 생각에 귀를 기울이기로 동의했고, 그 생각에 응답했으며, 그 생각을 받아들였고, 그 생각이 제멋대로 굴러가도록 방치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물론 그 생각은 선익하고 성스러웠고 실로 필요한 것이었으니,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남녀를 불문하고 자신의 사악한 참상과 우리 주님의 수난,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위대하신 선과 진가를 주제로 하는 지극히 매혹적인 수많은 묵상들을 토대로 하지 않는 한 관상을 실현하기란 기대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숙련된 일꾼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가로놓인 무지의 구름을 꿰뚫고자 할진대 그런 생각을 중단하고 멀찍이 밀어내어 망각의 구름 속에 깊숙하게 파묻어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하나님이 그대를 이 일로 부르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고 그대 자신도 응답을 해드릴 작정이라면 겸허한 사랑으로 그대의 마음을 하나님께 들어 올리십시오. 그리고 그대를 창조하셨고, 구원하셨고, 은혜로이 이 생활로 불러주신 하나님만을 착실히 생각하십시오. 그분에 대한 그 밖의 생각은 일체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그대의 열망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오로지 하나님만을 향한, 꾸밈없는 의향이면 충분합니다.
만일 그대가 이 의향을 쉽게 기억하기 위해 한마디로 요약하고자한다면 짤막한 낱말을 택하되 가급적이면 한 음절로 된 낱말을 택하십시오. 낱말은 짧을수록 그만큼 더 성령의 역사(役事)를 닮아서 좋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나 '사랑‘ 같은 낱말 말입니다. 그대가 좋아하는 낱말을 선택하되, 한 음절로 된 것이라면 다른 낱말을 택해도 됩니다. 그리고 택한 낱말을 마음속에 단단히 간직해서 무슨일이 있더라도 거기에 늘 머물게 하십시오. 그것은 평화시나 전쟁시나 마찬가지로 그대의 방패와 창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대는 이 낱말로 그대 위에서 맴도는 구름과 어둠을 공략하게 됩니다. 그대는 이 낱말로 온갖 생각을 망각의 구름 아래로 내리누르게 됩니다. 자주 그렇듯이 만일 그대가 지금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경우, 이 낱말 하나가 충분한 답변이 됩니다. 그리고 만일 그대가 이어서 바로 이 낱말의 의미를 학문적으로 생각하고 분석하려 들거든, 그대 자신에게 이 낱말을 조각이나 부스러기가 아닌 통째로 간직하려 한다고 말해주십시오. 그대가
그 점을 확실히 하면 그 생각은 틀림없이 물러갑니다. 이유가 무엇이냐고요? 이유는 그 생각이 앞서 이야기한 유익한 묵상들을 먹이삼아 자라나지 못하도록 그대가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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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부정적 접근법 (「무지의 구름」 7장 참조)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는 벗이여 어쩌면 이제 그대는 이 책에서 가르치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법, 내가 때때로 부정적 접근법이라 이름 붙이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부정적 접근법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신학자는 십자가의 성 요한입니다. 그는 독자들에게 부정적 접근법의 표어를 끊임없이 되새기게 만듭니다 -아무것도‥‥아무것도‥‥아무것도. 다시 말해서 하나님 말고는 아무것도.
물론 여기에는 모순이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하나님과 합일할 때는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사랑하시는 모든 것들과 합일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합일을 추구하는 기도, 곧 관상기도가 하나님보다 못한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둘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관상기도 그 자체는 은총을 구하는 기도나 슬픔을 표현하는 것, 또는 고통 받는 영혼들을 위한 탄원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교회의 가르침이나 성서 그리고 성인들의 삶은 물론, 심지어 성사들까지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 기도를 실현하기 위해 이 모든 것들에게 의존하고 나름대로 아주 중요한 시간과 장소에서 이들을 활용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관상적 차원에서는 기도가 이들 모두를 초월하여 하나님 말고는 아무것도‥‥아무것도‥‥아무것도‥‥추구하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것에 만족하는 것은 곧 하나님보다 못한 것에 만족하는 셈이 됩니다.
사랑하는 벗이여, 여기에서 한 가지 위대한 신비를 알려주겠습니다. 이것이 그대의 이해능력을 넘어설지는 몰라도 포용하는 그대의 품을 넘어서지는 못합니다. 그대는 사랑의 탐색에 필요한 하나님의 초대장,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은총을 이미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바를 깨달음으로써 하나님께로 인도됩니다. 그리고 관상적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머물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본성상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류의 기도가 교회에, 그리고 실로 온 세상에 지니는 가치에 대해 한마디하고 이 장을 끝마치겠습니다. 우리의 어려움이나 다른 이들의 어려움에 하나님의 자비를 간청하는 명쾌하고 외형적인 어떤 기도들보다도 훨씬 더 유익하고 효험이 큰 것이 바로 이 기도입니다
그대와 어둠 사이에서 어떤 생각이 불쑥 솟아올라 참견하며 그대에게 무엇을 찾고 있느냐, 무엇을 바라느냐고 묻거든, 그대가 바라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라고 대답하십시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분이요, 찾는 것도 그분이다.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 그(생각)가 반드시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하고물을 터인즉. 그분은 그대를 만들고 그대를 구원하고 은총으로 그대를 사랑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이라고 대답하십시오. 그리고 그에게 "너는 그분에 대해 털끝만큼도 아는 것이 없다 "고 말하십시오. 이어
"그러니 물러서라." 이르고 나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위해 그를 짓밟고 넘어가십시오. 설령 그같은 생각들이 거룩해 보이고 그대가 하나님을 찾는 데 도움 될 것처럼 생각되더라도 그렇게 하십시오. 그가 하나님의 친절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놀랍고 멋진 생각들을 그대의 마음속에 불어넣는가 하면 하나님의 감미로움과 사랑, 은총과 자비를 일깨워 줄 공산도 아주 큽니다. 하지만 그대가 하나님께만 향할 뿐이라면 그는 더이상 묻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갈수록 심하게 수다를 떨며,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도록 끈질기게 달라붙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그대에게 보여줄 터인즉, 그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그대가 자기에게 귀를 기울이도록 만드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한 걸음더 나아가서 그대의 지난날 생활을 들여다보게 만들고, 그 시절의 사악한 참상을 생각함에 따라 그대의 마음이 멀리 벗어나서 지난날 노상 드나들던 그 소굴로 되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그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새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붕괴되고 맙니다. 이유가 무엇이냐고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대가 자유로이 그 생각에 귀를 기울이기로 동의했고, 그 생각에 응답했으며, 그 생각을 받아들였고, 그 생각이 제멋대로 굴러가도록 방치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물론 그 생각은 선익하고 성스러웠고 실로 필요한 것이었으니,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남녀를 불문하고 자신의 사악한 참상과 우리 주님의 수난,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위대하신 선과 진가를 주제로 하는 지극히 매혹적인 수많은 묵상들을 토대로 하지 않는 한 관상을 실현하기란 기대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숙련된 일꾼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가로놓인 무지의 구름을 꿰뚫고자 할진대 그런 생각을 중단하고 멀찍이 밀어내어 망각의 구름 속에 깊숙하게 파묻어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하나님이 그대를 이 일로 부르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고 그대 자신도 응답을 해드릴 작정이라면 겸허한 사랑으로 그대의 마음을 하나님께 들어 올리십시오. 그리고 그대를 창조하셨고, 구원하셨고, 은혜로이 이 생활로 불러주신 하나님만을 착실히 생각하십시오. 그분에 대한 그 밖의 생각은 일체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그대의 열망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오로지 하나님만을 향한, 꾸밈없는 의향이면 충분합니다.
만일 그대가 이 의향을 쉽게 기억하기 위해 한마디로 요약하고자한다면 짤막한 낱말을 택하되 가급적이면 한 음절로 된 낱말을 택하십시오. 낱말은 짧을수록 그만큼 더 성령의 역사(役事)를 닮아서 좋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나 '사랑‘ 같은 낱말 말입니다. 그대가 좋아하는 낱말을 선택하되, 한 음절로 된 것이라면 다른 낱말을 택해도 됩니다. 그리고 택한 낱말을 마음속에 단단히 간직해서 무슨일이 있더라도 거기에 늘 머물게 하십시오. 그것은 평화시나 전쟁시나 마찬가지로 그대의 방패와 창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대는 이 낱말로 그대 위에서 맴도는 구름과 어둠을 공략하게 됩니다. 그대는 이 낱말로 온갖 생각을 망각의 구름 아래로 내리누르게 됩니다. 자주 그렇듯이 만일 그대가 지금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경우, 이 낱말 하나가 충분한 답변이 됩니다. 그리고 만일 그대가 이어서 바로 이 낱말의 의미를 학문적으로 생각하고 분석하려 들거든, 그대 자신에게 이 낱말을 조각이나 부스러기가 아닌 통째로 간직하려 한다고 말해주십시오. 그대가
그 점을 확실히 하면 그 생각은 틀림없이 물러갑니다. 이유가 무엇이냐고요? 이유는 그 생각이 앞서 이야기한 유익한 묵상들을 먹이삼아 자라나지 못하도록 그대가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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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부정적 접근법 (「무지의 구름」 7장 참조)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는 벗이여 어쩌면 이제 그대는 이 책에서 가르치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법, 내가 때때로 부정적 접근법이라 이름 붙이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부정적 접근법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신학자는 십자가의 성 요한입니다. 그는 독자들에게 부정적 접근법의 표어를 끊임없이 되새기게 만듭니다 -아무것도‥‥아무것도‥‥아무것도. 다시 말해서 하나님 말고는 아무것도.
물론 여기에는 모순이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하나님과 합일할 때는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사랑하시는 모든 것들과 합일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합일을 추구하는 기도, 곧 관상기도가 하나님보다 못한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둘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관상기도 그 자체는 은총을 구하는 기도나 슬픔을 표현하는 것, 또는 고통 받는 영혼들을 위한 탄원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교회의 가르침이나 성서 그리고 성인들의 삶은 물론, 심지어 성사들까지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 기도를 실현하기 위해 이 모든 것들에게 의존하고 나름대로 아주 중요한 시간과 장소에서 이들을 활용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관상적 차원에서는 기도가 이들 모두를 초월하여 하나님 말고는 아무것도‥‥아무것도‥‥아무것도‥‥추구하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것에 만족하는 것은 곧 하나님보다 못한 것에 만족하는 셈이 됩니다.
사랑하는 벗이여, 여기에서 한 가지 위대한 신비를 알려주겠습니다. 이것이 그대의 이해능력을 넘어설지는 몰라도 포용하는 그대의 품을 넘어서지는 못합니다. 그대는 사랑의 탐색에 필요한 하나님의 초대장,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은총을 이미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바를 깨달음으로써 하나님께로 인도됩니다. 그리고 관상적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머물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본성상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류의 기도가 교회에, 그리고 실로 온 세상에 지니는 가치에 대해 한마디하고 이 장을 끝마치겠습니다. 우리의 어려움이나 다른 이들의 어려움에 하나님의 자비를 간청하는 명쾌하고 외형적인 어떤 기도들보다도 훨씬 더 유익하고 효험이 큰 것이 바로 이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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