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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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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서는 그대에게 더 이상의 묘안은 거론하지 않으려 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대가 은총을 받아 이미 제시된 것들을 실천하기만 해도, 그대는 이내 내가 그대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 이상을 오히려 내게 가르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내가 그대를 가르치고 있지만, 사실인즉 나 자신도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쪼록 그대는 그대 자신에게 하는 것 못지않게 내게도 도움을 주기 바랍니다.
간곡히 당부하거니와 그대가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열심히 그리고 신속하게 이 일에 꾸준히 매진하십시오. 그대가 이런 기교들을 터득할 때까지 이겨내야 할 고난은 무엇이든 더없이 겸손하게 견디도록 하십시오. (편자 주 : 원문에는 “실상 이 수련은 그대에게 연옥과 흡사합니다.”가 있습니다.) 고통이 지나가고 하나님으로부터 전수받은 기술들이 그분의 은총에 힘입어 습관으로 굳어질 때 그대는 정녕 죄를 말끔하게 씻어낼뿐아니라 죄가 유발하는 고통 또한 말끔히 사라지고 없을 것입니다. 물론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죄는 원죄가 아니라 그대가 지난날에 고의로 범했던 죄들을 의미합니다. 원죄의 고통스런 열매들은 제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도 죽는 날까지 그대와 함께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고의로 범한 죄들에 비하면 아픔이 한결 덜합니다. 그럼에도 그대가 이겨내야 하는 것은 여전히 많습니다. 원죄는 날이면 날마다 뻔뻔스럽고 사악한 충동들을 새롭게 부채질할 것이며, 따라서 그대는 날마다 그것들을 쳐부수되 분별이라는 날카로운 양날 칼로 재빨리 결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식으로 할 때 우리는 현세에는 진정한 안전이나 참된 휴식이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움츠러들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설령 항상 성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당황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내가 지금껏 이야기한 방식대로 -아니면 혹시 그대가 더 훌륭하게 해낼 수만 있다면 그대 나름의 방식에 따라-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어 지난날의 죄가 낳은 고통스런 열매들을 모조리 없애버린다면 틀림없이 원죄의 고통스런 결과들이나 원죄가 계속해서 창출해 내는 사악한 유혹들도 그대를 그다지 짜증나게 만들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2. 끈기에 관한 몇 가지 가르침 (「무지의 구름」 33장 참조)
사랑하는 벗이여, 때로는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대는 사랑의 기도를 하며 하나님을 껴안고자 애쓰지만, 그대의 작은 집(기억하려니와 그대의 정신)은 작은 자매들이 끊임없이 재잘거리며 왔다갔다하는 소란으로 잠잠할 틈이 없습니다. 이럴 때는 그대 혹은 그대의 의지가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됩니다. "저는 손을 들었습니다. 제가 할 수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저 자신을 하나님 손에 맡길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는 그대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셔서 그대를 껴안아 주실 것입니다. 한번 실행에 옮겨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그대에게 간곡히 부탁하거니와 절대로 하던 기도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날마다 다시 시작하십시오. 위로를 구하지 마십시오. 아무것도 되받으리라는 기대를 할 수 없을 때 사랑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거듭거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바로 그때에 그대는 위로를 충분히 누릴 것입니다. 위로가 오거든 누리되 그것을 찾거나 거기에 매달리지 마십시오. 선물 자체가 아니라 선물을 주시는 분을 찾으십시오.
실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문제가 따르도록 허락하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대체로 기도가 쉽고 즐겁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밀월 기간이라고도 합니다. 만사가 그저 기쁘기만 할 뿐 아니라 우리는 스스로 완벽한 사랑을, 아니면 최소한 이승에서 누릴 수 있는 한 완벽한 사랑을 누린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밀월이 끝나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좋다. 나는 빛과 감미로움으로 너를 나에게 이끌어 왔다. 너는 나의 감미로움을 맛보고 알았다. 하지만 너는 내 선물들 때문에 나에게 끌릴 위험도 있다. 나는 네가 오직 나만을 위해 나를 사랑해 주기 바란다. 그래서 때로 네가 지금 첫 기도 중에 체험한 사랑의 감미로움을 거두어들임으로써 네가 오로지 나만을 위해 나를 찾을 수 있게 하려고 한다. 자, 어디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아라."
사랑하는 벗이여 , 하나님께서는 물러가시는 듯 보이겠지만 부디 하나님께서 전에 없이 가까이에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 아버지의 뜻을 완전하게 실현하면서 천상의 아버지와 전에 없이 가까이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부르짖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께서는 정녕 그렇게 느끼셨지만 그분이 알고 계신 바는 그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계속 읽어 나가십시오.
33. 예수의 참된 겸손
사랑하는 벗이여,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 아버지께 부르짖은 말씀을 기억합니까? 그분은 목청을 높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 15:34) 하고 외치셨습니다. 이것은 대체 무슨 말입니까? 억측을 불러들일 만한 말씀 아닐까요? 예수께서 절망에 빠지신 걸까요? 그분의 아버지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당신 아들을 저버리셨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저버린 것처럼 보이도록 잠자코 계실까요? 예수께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나는 이 사건을 깊이 들여다보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물음들을파헤쳐 보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이제부터 그대와 함께 나누고자 하는 것은 정말로 흥미진진한 어떤 것, 마가복음의 이 대목을 이따금씩 읽어서는 드러나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해서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외치셨다고 마가가 한 말은 그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기록한다든가 그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끼셨음을 이야기하려는 것만은 아닙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말씀이 시편 22편 1절을 인용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또한 신약성서에서 구약성서의 어떤 구절을 인용할 경우, 우리가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반드시 구약성서로 돌아가서 그 구절이 들어 있는 전후 대목을 읽어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약성서 저자가 어떤 구절을 짤막하게 인용할 때는 독자들이 그 전후 구절을 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원칙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여기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곧 마가가 실제로 우리에게 하고 있는 말은,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시편 22편을 기도로 바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마가는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토로하신 말씀(1절)을 전함과 동시에 그분께서는 시편 22편의 말씀을 온전히 기도하고 음미하여 삶으로 실천하셨음을 우리가 깨닫기 바라십니다.
34. 예수와 시편 22편
이는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벗이여, 지금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을 당하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계셨는지를 전해 듣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품고 계셨던 심정·감정·생각·느낌들을 알고자 한다면 시편 22편을 읽으면 됩니다. 자, 이제 그렇게 하십시오. 예수와 함께 시편 22편을 봉독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그러고 나서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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