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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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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대가 어떤 식으로 시작해야 할지를 내게 묻는다면,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호의에 대고 당신 친히 그대에게 말해주십사 기도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솔직히 그대는 내가 그대를 가르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놀랄 일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영혼이든 당신 친히 선택하신 영혼 안에서, 그 영혼의 공적과는 상관없이 의도적으로 이루시는 그분 혼자만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성인이든 천사든 이를 갈망하고자 하는 생각마저 불가능하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내 생각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비교적 당신에게 심한 누를 끼친 적이 한 번도 없는 이들이나 마찬가지로 평생을 죄인으로 살아온 이들 안에서도 이런 일을 흔연히 그리고 빈번하게 -어쩌면 실제로는 훨씬 더 자주- 해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이렇게 하실 때 우리는 그분이 지극히 자비로우시고 전능하신 분이요, 당신이 원하는 일을, 당신이 원하는 곳에서, 당신이 원하는 시간에 행하시는 분임을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이를 흔연(欣然 썩 기쁘거나 반가움 : 편자 주)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영혼한테는 이런 은총을 베풀지도, 시작하지도 않으십니다. 죄가 있든 없든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지 않고서는 이 은총을 누릴 수 있는 영혼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무죄하다고 해서 주어진다거나 죄 때문에 유보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내가 '빼앗기다.'라고 하지 않고 '유보되다.'라고 말한 점에 유의하십시오. 진리에 가까이가면 갈수록 그만큼 더 오류를 경계해야 합니다. 내 말의 의미가 명확하지만 만일 그대가 지금 당장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거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실 때까지 한편으로 밀쳐두십시오. 그렇다고해서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교만을 조심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선물을 모독하고, 죄인들의 기운을 북돋습니다. 만일 그대가 진실로 겸손하다면 그대는 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관상생활을 공로와 상관없이 무상으로 베풀고 계신다는 사실을 감지할 것입니다. 관상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은 그런 것이어서 일단 선사받으면 영혼이 이를 실천할 수 있고 또 스스로가 실천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대체가 불가능한 것이 이것입니다. 관상의 능력은 관상 그 자체와 하나이며 따라서 자신이 관상을 할 수 있다고 느끼는 사람만이 관상이 가능한 법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 누구도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이같은 사전 작업이 없으면 영혼은 말하자면 죽은 것이며, 따라서 관상을 바라거나 갈망할 수 없게 됩니다. 그대가 그것을 바라고 갈망한다면 이미 그것을 수중에 넣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그대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의지나 갈망이 아니라 그대가 전혀 모르고 있는 사이에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을 바라고 갈망하도록 부추기는 어떤 것입니다. 만일 그대가 이 정도 이상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더라도 아무쪼록 걱정하지 말고 더욱더 매진하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꾸준히 진보하게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 어떤 것이 그대를 제 뜻대로 다루고 이끌도록 맡기십시오. 그것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하고, 그대는 순순히 따르기만 하십시오. 그대가 원한다면 지켜보기는 하되 가만히 놓아두십시오. 그대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듯이 간섭하지 마십시오. 그랬다가는 자칫하면 일을 온통 망쳐놓을 염려가 있습니다. 그대는 나무가 되고, 그것이 목수가 되게 하십시오. 그대는 집이 되고. 그것이 집주인이 되게 하십시오. 그대는 기꺼이 소경이 되고 왜나 어떻게를 알고 싶은 욕구를 모조리 버리십시오. 아는 것은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될 공산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모르는 그 무엇이 그대를 다정하게 이끌고 있다는 느낌, 이 내적 충동 속에서 하나님보다 못한 어떤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그대의 갈망이점진적이면서도 시종일관 그분께로 향한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만일 그대가 지금 이같은 상태에 있다면 그대의 의지와 갈망을 직접 움직이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확신해도 좋습니다. 그대는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니 이제는 악마가 그대가까이 다가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교활한 악마라 할지라도 어쩌다가 한 번씩, 그것도 멀찍이서 사람의 의지를 자극해 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정당한 이유가 없으면 제아무리 선한 천사라할지라도 그대 의지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그대는 내가 여기에서 기술한 내용만을 가지고서도 (물론 체험이 따르면 훨씬 더 선명해질 테지만) '도움'이 개입하지 않아도 직접 관상에 도달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온갖 선익한 도움은 관상에 종속되는 반면에, 관상은 그같은 조력에 전혀 구애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도움이 관상으로 이끌어 주지도 못합니다.
52. 관상의 방식 (「무지의 구름」 34장 참조)
사랑하는 벗이여, 관상의 방식은 많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관상기도의 은총에, 사랑으로 하나님과 합일하는 은총에 접근하는 방법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실제로는 관상의 방식이 전혀 없는 셈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사랑으로 하나가 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사랑의 은총으로 껴안아 주시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상의 선물입니다. 사랑의 합일은 물론 사랑 탐색의 초보과정까지도 하나님이, 오로지 하나님만이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관상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저런 방식들을 활용하는 것이 좋다 나쁘다를 두고 부질없이 공허하고 무익한 논쟁은 하지 맙시다. 이런저런 방식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에 접근하는 데 도움이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대 자신이 결정을 내리고 마음을 평안히 갖도록 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대로 마음 편히 결정하도록 놓아두십시오. 관심을 쏟을 데는 오로지 이것뿐입니다. 그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습니까? 이것은 답하기가 간단한 질문입니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이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자신이 이 사랑의 탐색 기도에 부르심을 받은 것인지 아닌지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대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는 장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한다는 것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이 같은 열망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며, 이는 하나님께서 그대를 사랑하시고 그대를 사랑으로 부르신다는 확실한 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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