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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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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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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하나님은 육체와 영혼으로 섬김을 받으시며, 양족으로 보답하신다. 선악한 위안을 악과 구별하는 법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소리내어 기도하고 싶을 때마다 이를 삼가기 바란다거나, 영혼이 끓어오르는 신심으로 넘쳐날 때 늘상 하나님께 토로하듯이 "선하신 예수여!" "사랑
스러우신 예수여!" "감미로우신 예수여!" 등과 같은 적절하고 선익한 말을 토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대가 내 말을 그런 뜻으로 알아듣는 것을 금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나로 합치신 영과 육을 갈라놓도록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응당 그래야 하듯이 영과 육 동시에 함께 섬김을 받고자 하시며, 사람에게 내리시는 천상의 보상을 영혼과 마찬가지로 육신에게도 내리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보상을 미리 맛보여 주는 의미에서 그분은 때로 -그저 한두 번이 아니라 필경 자주, 당신이 원하실 매마다- 당신의 독실한 종인 그대의 육신을 지극히 놀라운 감미로움과 위안으로 불타오르게 하십니다. 이 모두가 우리 지성의 창문들을 통해서 외부로부터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내부로부터 풍성한 영적 기쁨과 참된 신심이 샘솟습니다. 이같은 위안과 감미로움은 결코 의심해서는 안 되며, 구태여 더 말할 필요도 없을 테지만 나는 이를 누리는 사람이 이것을 그런 식으로 취급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출처를 알 수 없이 외부로부터 갑자기 밀어닥치는 여타의 위로와 음성, 기쁨과 감미로움 일체는 부디 의심하십시오! 이들은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선하다면 선한 천사의 작용이요, 악하다면 악한 천사의 작용입니다. 만일 빗나간 지적 의구심들과 제어되지 않은 감정적 긴장들이 내가 제시한 그런 방법으로든 아니면 그대가 아는 더 나은 방법으로든 가라앉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악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압니까? 그것은 순결한 영 안에 깃들여 있는 사랑의 뜨거운 활동이 이같은 위안의 근원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그 영혼 안에서 직접 이루시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본인의 상상력이나 사람이 이승에서 습득할 수 있는 그릇된 생각들과는 전혀 무관하기 마련입니다.
나는 그대에게 이처럼 다른 위로와 음성과 감미로움에 관해서나, 그것이 선한가 악한가를 구분하는 방법에 관해서는 당분간 이야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것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다른 자리에서 수천 번에 걸쳐 내가 말하거나 글로 쓴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설명해 주고 있음을 그대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상관없는 것 아닙니까? 나는 앞으로도 그대가 바라는 일들 그대의 영이 느끼는 뜨거운 충동에 부응하는 일을 중단하지도 싫증내지도 않을 것인즉, 그대가 그것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음을 일찍이 내게 말했고 지금은 행동으로써 드러내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성의 창들을 통해 우리에게 도달하는 그런 음성과 감미로움에 관해서는, 그리고 또 어떤 것이 선하고 악하냐 하는 점을 두고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야기하는 이 맹목적이고 헌신적이며 열렬한 사랑을 끊임없이 토로해 나가십시오. 그러면 이런 것들은 저절로 아주 분명하게 밝혀질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런 것들이 처음으로 들이닥칠 때 -그대가 아직 거기에 익숙하지 못한 까닭으로- 완전한 경악까지는 아니더라도 얼마간 놀라게 된다면 그것은 그대에게 최소한 다음과 같은 기능을 하게 됩니다. 즉 그대는 이로써 마음이 견고하게 굳어질 테고, 그리하여 그대는 내면에서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놀라운 방식으로 승인을 받거나 외부에서 어떤 탁월한 지도자로부터 충고를 받거나 둘 중 하나를 통해 완벽하게 화인하지 않는 한 결코 이들을 완전히 신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소리내어 기도하고 싶을 때마다 이를 삼가기 바란다거나, 영혼이 끓어오르는 신심으로 넘쳐날 때 늘상 하나님께 토로하듯이 "선하신 예수여!" "사랑
스러우신 예수여!" "감미로우신 예수여!" 등과 같은 적절하고 선익한 말을 토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대가 내 말을 그런 뜻으로 알아듣는 것을 금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나로 합치신 영과 육을 갈라놓도록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응당 그래야 하듯이 영과 육 동시에 함께 섬김을 받고자 하시며, 사람에게 내리시는 천상의 보상을 영혼과 마찬가지로 육신에게도 내리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보상을 미리 맛보여 주는 의미에서 그분은 때로 -그저 한두 번이 아니라 필경 자주, 당신이 원하실 매마다- 당신의 독실한 종인 그대의 육신을 지극히 놀라운 감미로움과 위안으로 불타오르게 하십니다. 이 모두가 우리 지성의 창문들을 통해서 외부로부터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내부로부터 풍성한 영적 기쁨과 참된 신심이 샘솟습니다. 이같은 위안과 감미로움은 결코 의심해서는 안 되며, 구태여 더 말할 필요도 없을 테지만 나는 이를 누리는 사람이 이것을 그런 식으로 취급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출처를 알 수 없이 외부로부터 갑자기 밀어닥치는 여타의 위로와 음성, 기쁨과 감미로움 일체는 부디 의심하십시오! 이들은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선하다면 선한 천사의 작용이요, 악하다면 악한 천사의 작용입니다. 만일 빗나간 지적 의구심들과 제어되지 않은 감정적 긴장들이 내가 제시한 그런 방법으로든 아니면 그대가 아는 더 나은 방법으로든 가라앉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악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압니까? 그것은 순결한 영 안에 깃들여 있는 사랑의 뜨거운 활동이 이같은 위안의 근원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그 영혼 안에서 직접 이루시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본인의 상상력이나 사람이 이승에서 습득할 수 있는 그릇된 생각들과는 전혀 무관하기 마련입니다.
나는 그대에게 이처럼 다른 위로와 음성과 감미로움에 관해서나, 그것이 선한가 악한가를 구분하는 방법에 관해서는 당분간 이야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것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다른 자리에서 수천 번에 걸쳐 내가 말하거나 글로 쓴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설명해 주고 있음을 그대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상관없는 것 아닙니까? 나는 앞으로도 그대가 바라는 일들 그대의 영이 느끼는 뜨거운 충동에 부응하는 일을 중단하지도 싫증내지도 않을 것인즉, 그대가 그것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음을 일찍이 내게 말했고 지금은 행동으로써 드러내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성의 창들을 통해 우리에게 도달하는 그런 음성과 감미로움에 관해서는, 그리고 또 어떤 것이 선하고 악하냐 하는 점을 두고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야기하는 이 맹목적이고 헌신적이며 열렬한 사랑을 끊임없이 토로해 나가십시오. 그러면 이런 것들은 저절로 아주 분명하게 밝혀질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런 것들이 처음으로 들이닥칠 때 -그대가 아직 거기에 익숙하지 못한 까닭으로- 완전한 경악까지는 아니더라도 얼마간 놀라게 된다면 그것은 그대에게 최소한 다음과 같은 기능을 하게 됩니다. 즉 그대는 이로써 마음이 견고하게 굳어질 테고, 그리하여 그대는 내면에서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놀라운 방식으로 승인을 받거나 외부에서 어떤 탁월한 지도자로부터 충고를 받거나 둘 중 하나를 통해 완벽하게 화인하지 않는 한 결코 이들을 완전히 신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62. 사랑의 탐색에서 감정이 차지하는 위치 (「무지의 구름」 47, 48장 참조)
사랑하는 벗이여, 우리는 영적 존재도 육체적 존재도 아닌, 양자가 결합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사랑의 탐색이 영적 요소 못지않게 육체적 요소들도 포함한다는 말에 결코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들은 사실 육체 쪽에서 나옵니다. 감정들은 그 자체로 보면 의심스럽지만 성숙한 분별력으로 균형을 이를 때는 사랑의 탐색에 중요한 몫을 하는, 진실로 인간적인 활력들이 됩니다.
외부에서 자극을 받아 생기는 홍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흥분은 선하고 유익할 수도 있고 반대로 사악할 수도 있지만, 아무튼 영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런 종류의 흥분이 신앙 행세를 하고 있는 경우를 수없이 봅니다. 이 같은 부류의 흥분을 유발하는 인기있는 매체가 텔레비전인 듯싶습니다. '성서를 두들기며 열광적으로 설교하는 광신적 설교사들이 촉발시키는 감정적 반응이나, 무대 효과와 전자악기들이 매스 미디어를 통해 자극하는 광적 흥분을 조심하십시오.
어느 일요일엔가 예배를 드리러 나가기 전에 머물고 있던 호텔에서 텔레비전을 틀었습니다. 마침 인기있는 설교사가 진행하는 종교 프로그램 시간이었습니다. 통상적 장치들을 모조리 동원했더군요. 대규모 합창단이 전자악기에 맞추어 목청을 높이고 있었고, 무대는 꽃들로 뒤덮혀 있었으며, 매력적인 여자들은 단정하면서도 값비싼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열광적인 설교사는 무대를 활보하면서 성서를 흔들어대고 있었습니다. 그 과장된 연기에 금방 말려들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설교사와 청중이 내뿜는 열기에 감정적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내 비판적 사고력은 그 사람이 토해 내는 끔찍스런 메시지를 간파해 냈습니다. 그 사람이 합창단과 성서말씀, 교회 예복 등등 갖가지 '인기있는' 종교적 장식품들을 동원하여 칭송하는 내용인즉, 돈과 재물이 모이는 일 자체가 하나님께 총애 받는 표지이고 자신의 목회에 기부금을 후하게 내면 훗날 돈과 재물을 풍성하게 얻어 누릴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는 벗이여, 이렇게 나는 순간적으로 외적인 형식에 빠져들었습니다. 물론 내 감정은 그렇게 응답했지만 정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같은 가짜 신앙에 많은 사람들이 빠져들었고 지금도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수많은 청중을 끌어 모았고, 더욱이 텔레비전까지 따라붙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 자신이나 그가 전하는 메시지에는 진실로 사랑의 탐색과 연관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감정이 지니는 진정한 가치와 쓸모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줍니다. 이 열매들은 내면에서, 하나님께서 어루만지시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것은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이것을 금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사람들은 육체를 그 정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갈 5:22-24)
사랑하는 벗이여, 우리는 영적 존재도 육체적 존재도 아닌, 양자가 결합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사랑의 탐색이 영적 요소 못지않게 육체적 요소들도 포함한다는 말에 결코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들은 사실 육체 쪽에서 나옵니다. 감정들은 그 자체로 보면 의심스럽지만 성숙한 분별력으로 균형을 이를 때는 사랑의 탐색에 중요한 몫을 하는, 진실로 인간적인 활력들이 됩니다.
외부에서 자극을 받아 생기는 홍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흥분은 선하고 유익할 수도 있고 반대로 사악할 수도 있지만, 아무튼 영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런 종류의 흥분이 신앙 행세를 하고 있는 경우를 수없이 봅니다. 이 같은 부류의 흥분을 유발하는 인기있는 매체가 텔레비전인 듯싶습니다. '성서를 두들기며 열광적으로 설교하는 광신적 설교사들이 촉발시키는 감정적 반응이나, 무대 효과와 전자악기들이 매스 미디어를 통해 자극하는 광적 흥분을 조심하십시오.
어느 일요일엔가 예배를 드리러 나가기 전에 머물고 있던 호텔에서 텔레비전을 틀었습니다. 마침 인기있는 설교사가 진행하는 종교 프로그램 시간이었습니다. 통상적 장치들을 모조리 동원했더군요. 대규모 합창단이 전자악기에 맞추어 목청을 높이고 있었고, 무대는 꽃들로 뒤덮혀 있었으며, 매력적인 여자들은 단정하면서도 값비싼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열광적인 설교사는 무대를 활보하면서 성서를 흔들어대고 있었습니다. 그 과장된 연기에 금방 말려들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설교사와 청중이 내뿜는 열기에 감정적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내 비판적 사고력은 그 사람이 토해 내는 끔찍스런 메시지를 간파해 냈습니다. 그 사람이 합창단과 성서말씀, 교회 예복 등등 갖가지 '인기있는' 종교적 장식품들을 동원하여 칭송하는 내용인즉, 돈과 재물이 모이는 일 자체가 하나님께 총애 받는 표지이고 자신의 목회에 기부금을 후하게 내면 훗날 돈과 재물을 풍성하게 얻어 누릴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는 벗이여, 이렇게 나는 순간적으로 외적인 형식에 빠져들었습니다. 물론 내 감정은 그렇게 응답했지만 정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같은 가짜 신앙에 많은 사람들이 빠져들었고 지금도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수많은 청중을 끌어 모았고, 더욱이 텔레비전까지 따라붙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 자신이나 그가 전하는 메시지에는 진실로 사랑의 탐색과 연관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감정이 지니는 진정한 가치와 쓸모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줍니다. 이 열매들은 내면에서, 하나님께서 어루만지시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것은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이것을 금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사람들은 육체를 그 정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갈 5:22-24)
63. 방언에 대한 조언 (「무지의 구름」 48장 참조)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는 벗이여, 여기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은총의 선물에 대해 몇 마디 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다시피 이 선물은 바울 사도의 편지들에 언급된 것, 특히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2장에서 14장까지 나와 있는 것과 동일하다고 봅니다. 성령강림 일에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했던 말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방언의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신비로운 현상이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적어도 15개 지방에서 왔는데 (사도 2장) 저마다 사도들이 하는 말을 자기네 말로 알아들었습니다.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성령의 힘으로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이므로 아무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고전 14:2)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방언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누가 알겠습니까? 결국 여러분은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셈입니다." (고전 14:9) 그리고 이런 말도 합니다. "교회에서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방언으로 일만 마디의 말을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내 이성으로 다섯 마디의 말을 하고 싶습니다."(고전 14:19) 그런 다음에 그는 자기 편지를 읽는 사람들에게 교회에서는 두 사람, 혹은 많아야 세 사람까지만 방언을 말하게 하되, 해석해 주는 사람을 대동하고 한번에 한 사람씩 말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만일 해석해 주는 사람이 없을 경우 "교회 안에서는 그런 말을 쓰지 말고 혼자서 말하거나 하나님하고만 말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고전 14:27 이하)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는 벗이여, 여기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은총의 선물에 대해 몇 마디 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다시피 이 선물은 바울 사도의 편지들에 언급된 것, 특히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2장에서 14장까지 나와 있는 것과 동일하다고 봅니다. 성령강림 일에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했던 말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방언의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신비로운 현상이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적어도 15개 지방에서 왔는데 (사도 2장) 저마다 사도들이 하는 말을 자기네 말로 알아들었습니다.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성령의 힘으로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이므로 아무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고전 14:2)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방언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누가 알겠습니까? 결국 여러분은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셈입니다." (고전 14:9) 그리고 이런 말도 합니다. "교회에서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방언으로 일만 마디의 말을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내 이성으로 다섯 마디의 말을 하고 싶습니다."(고전 14:19) 그런 다음에 그는 자기 편지를 읽는 사람들에게 교회에서는 두 사람, 혹은 많아야 세 사람까지만 방언을 말하게 하되, 해석해 주는 사람을 대동하고 한번에 한 사람씩 말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만일 해석해 주는 사람이 없을 경우 "교회 안에서는 그런 말을 쓰지 말고 혼자서 말하거나 하나님하고만 말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고전 14:27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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