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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후12: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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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6년 8월 13일 주일3부 설교 |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극복하는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중국의 유명한 복음전도자 이도슝 목사님의 체험담을 들어보면 마음이 굉장히 감격적입니다. 이도슝 목사님은 워치만 니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더욱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몸이 심히 약해 30세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의사가 말했으나 하나님께 치료를 해주시도록 많이 기도했으나 응답이 없다가 하룻밤에 신기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배를 타고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한가운데 쯤 가서 큰 바위에 걸려 더 이상 배가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꿈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배가 지나가게 해 주옵소서.” 그때 하나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바위를 옮겨버릴까, 물이 불어 지나가게 할까?” 그러자 그는 대답을 했습니다. ??물이 점점 불어 지나가게 하여 주옵소서.??순식간에 물이 불어올라 그 위를 유유히 지나갔습니다. 꿈을 깬 후에 그는 깨달았습니다. ‘아! 하나님이 내 폐병과 심장병을 고쳐 주실 수도 있으시고 폐병과 심장병을 그대로 두고 이를 극복하도록 은혜를 넘치게 주실 수도 있는데 둘 중에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고 하나님이 나에게 선택을 명하시는구나.’ 그는 엎드려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비록 내가 폐병에 걸리고 협심증이라는 심장병이 있지만 이를 극복하고 더 큰일을 할 수 있도록 많은 은혜를 주신다면 오히려 낫는 것보다 병을 택하겠습니다.” 그는 평생에 폐병과 심장병으로 고생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엄청나게 임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사역을 해서 69세까지 사시다가 천국에 가시게 된 것입니다.
[본론]
1. 인생의 장애물
하나님은 고난의 장애물을 옮겨주실 때도 있으시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극복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한국가정상담연구소에서 간행되는 「행복한 우리 집」8월 호에 요즘 청소년들의 실태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교육현장에서는 요즘 청소년들을 ‘스크린 세대’, ‘게임 세대’라고 합니다. 이들은 야외로 현장학습을 가거나 직접 운동하는 것 대신에 비디오나 게임으로 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직접 움직이기보다 대리 만족을 더 좋아하는 그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어느 학교에서는 조회 시간에 학생들이 애국가를 따라 부르지 못했습니다. 반주만 녹음된 테이프를 사용하다가 노랫말까지 녹음된 것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학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 비디오가 없을 때는 성도들이 다 찬송가를 들고 와서 찬송을 잘 불렀습니다. 또 많은 찬송과 곡을 외웠습니다. 요사이 성도들은 찬송가 곡을 외우지를 못해요. 교회 오면 전부 비디오에 비취니까 비디오를 바라보고 찬송을 불렀다가 나중에는 비디오가 없고 찬송가책이 없을 때 찬송을 부르라면 외우지 못하고 입만 들썩들썩하는 것입니다.
어느 고등학교에서는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청소를 시켰더니 빗자루를 들고 가만히 서 있어서 “야! 왜 가만히 있느냐? 바닥을 쓸어라.” 그렇게 하니까 그제서야 바닥을 쓸고 모인 쓰레기를 치우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쓰레기를 쓸어 담아야지!” 라고 했는데 그제야 쓸어 담고, “쓰레기통에 넣어!”라고 할 때까지 그냥 쳐다만 보고 있다가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라고 하니까 쓰레기통에 집어넣더라는 것입니다. 오인숙 선생님은 요즘 청소년들이 이처럼 나약해진 원인에 대해 이들이 유치원을 다니기 전부터 부모가 짜놓은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세대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과보호로 “너는 유치원에 가거라. 너는 태권도장에 가라. 너는 음악연습장에 가거라. 너는 미술공부해라.” 모든 것을 부모님이 스케쥴을 짜놓고 부모들이 결정을 하고 판단을 하고 시키는데 기계적으로 순종만 했기 때문에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고 나아갈 수 있는 기능을 상실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의 과보호로 자율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시간을 관리하는 법을 배울 기회도 없고, 자율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행동할 기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는 밖에 내어 놓으면 죽습니다. 자녀들도 과보호하면 인생의 패배자가 될 따름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스런 흐느낌에서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은혜를 힘입어 극복하는 삶을 살 때 강한 능력 있는 신앙이 됩니다. 장애물이 없는 삶이 아니라 장애물을 극복하는 삶이 강한 인격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란 장애물이 너무나 많습니다. 죄는 흉악한 장애물이지만 우리로 죄 없는 세상에 살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죄 없는 곳에 살게 해 주십시오. 내 주위에서 죄를 다 없애 주십시오.” 그런 기도를 해도 응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흉악한 죄가 많습니다. 살인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찜질방에 간 여인들을 잡아서 돈을 빼앗고 죽인 사건도 최근에 일어났지 않습니까? 강간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강도, 사기, 거짓, 배반 이러한 흉한 죄악들이 주위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죄악이 없는 세상에 살면 좋겠는데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죄 없는 세상에 살게 하지 아니하시고 죄가 있어도 이를 이기고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히12: 4에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한 것입니다.
죄 없는 세상이 아니라 죄 있는 세상에서 죄와 싸워서 이기고 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히 3:13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과 세속의 더러움이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마귀도 없고 유혹도 없고 세상 더러움도 없고 고통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러한 온실 같은 세상에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리 그런 세상을 달라고 기도해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주위에 마귀가 있고 유혹이 있고 세속의 더러움이 있는 곳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가운데 네가 이것을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라고 말씀하시지 이런 유혹이 없는 세상에 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갈 5:19~21에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런 일들이 너희 가운데 있는데 이것을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천국백성으로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없는 생활 속에 살라고 말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심신의 질병과 고통은 일평생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병이 안 오면 좋겠는데 한번 병이 들면 또 다른 병이 오고 그것을 이기고 나면 또 다른 병이 오는 것입니다. 병 없는 세상에 살면 좋겠는데 그런 세상이 없어요. 문명한 나라에서는 심적인 병이 더 많습니다.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병이 많지요. 미계한 나라에서는 육체적인 병이 많습니다. 인간이 사는 동안에 항상 병은 같이 있습니다. 병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오직 병을 이기고 우리가 살도록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전 5:17에 “일평생을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많은 근심과 질병과 분노가 그에게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 14:13에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항상 웃고 즐거워하는 것만이 있는 것 같지만 그 가운데도 근심이 있고 눈물이 있고 탄식이 함께 있는 세상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삶의 시련과 환난과 가난과 실패도 늘 곁에 있습니다. 시련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환난도 없고 가난도 없고 실패도 없으면 좋겠는데 언제나 인생에는 시련과 환난과 가난과 실패가 있어요. 어느 정권이 들어와도 대통령은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자기를 믿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정권이 지나갈 때까지 믿어보아도 역시 시련과 환난과 가난과 실패가 늘 사회가운데 있는 것을 우리는 느낍니다. 이제는 어떠한 사람이 나타나서 “나 좀 믿어 주세요. 내가 잘 만들어 줄 테니까…” 해도 “웃기는 소리하네. 늘 믿어봤자. 늘 속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항상 시련과 환난과 가난과 실패가 넘쳐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없는 세상에 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있는 세상에 살면서 그것을 이기고 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짓밟혀서 패배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욥 5: 7에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
전 2:23절에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인생을 평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 세상에 사는데 육체적인 죽음과 사별의 슬픔과 고통도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안 죽으면 좋지 않겠어요?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우리 가정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세상을 뜨시고 부모님들이 세상을 뜨시고 혹은 형제들이 세상을 뜨는 죽음을 체험하고 더구나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이 죽는 사별의 가슴 아픈 슬픔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왜 태어났냐? 죽음이 없고 사별이 없고 슬픔이 없는 세상에 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없어요. 우리는 육체적인 죽음과 사별의 슬픔과 고통이 함께 있으며 이를 극복하고 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라.
히 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했습니다.
시90:10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모든 것이 우리와 함께 있는데 우리보고 극복을 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라고 하는데 짊어지고 갈 힘이 없으면 그 짐에 눌릴 수밖에 없습니다. 죄 짐을 짊어지고 세상과 슬픔을 짊어지고 질병과 좌절과 가난과 고통을 짊어지고 죽음도 짊어지고 승리하고 살수가 있게 하기 위해서는 그 힘을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냐 죽음이냐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가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죽음이나 칼이 없는 세상에 살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느 곳에 가나 환난이 있고 곤고가 있고 적신이 있고 위험이 있고 위험이 있고 기근이 있고 칼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이기고 살게 해주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이길 수 있습니까?
2.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광야를 지날 때 그들이 원망과 불평을 하다가 불뱀이 달라 들었습니다. 불뱀이 와서 수많은 사람을 물어서 죽였습니다. 불뱀의 독이 올라서 그들은 감당하지 못하고 퉁퉁 부어서 죽었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모세에게 와서 부르짖으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한즉 “불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으라. 쳐다보는 사람마다 고침을 받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뱀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불뱀이 와서 물더라도 그 독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 모세가 불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아 높이 드니까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그 장대를 쳐다보니 불뱀을 이길 수 있는 은혜가 임하여서 독이 해소되었습니다. 이제는 불뱀이 득실거리도 겁나지 않습니다. 불뱀 속에 뒹굴어도 겁나지 않습니다. 불뱀이 온몸을 감고 올라와도 겁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물어도 그 독이 아무리 몸속에 들어와도 장대에 매달린 불뱀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은혜가 와서 독을 해소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불뱀이 없는 세상을 산 것이 아니라 불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뱀의 독을 이길 수 있는 삶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유명한 율법학자인 니고데모가 한번은 밤에 예수님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니고데모를 보고 이렇게 말씀했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에 인생들은 뱀에게 물렸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뱀에게 물리고 그 후손들이 다 뱀에게 물려서 뱀의 독이 올랐습니다. 죄의 독이 올랐습니다. 더러움과 세속의 독이 올랐습니다. 병의 독이 올랐습니다. 가난과 저주와 낭패와 실망과 고통에 독이 올랐습니다. 죽음의 독이 오르고 멸망의 독이 올랐습니다. 온 세상 사람은 마귀의 독에 올라서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독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종교를 믿기도 하고 수양과 도덕을 닦기도 하고 고행을 하기도 하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독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모두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저주를 받고 절망 중에 죽어갑니다. 어떻게 이 독에서 해소될 수 있습니까? “주여! 죄를 없애 주시옵소서. 마귀와 모든 더러움을 없애 주시옵소서. 세속을 없애 주시옵소서. 세속을 없애 주시고 병을 없애 주시고 저주를 없애 주시고 가난을 없애 주시옵소서. 사망과 음부를 없애 주시옵소서.” 아무리 기도해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세세 천천 늘 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이속에 살면서 우리가 극복을 해야 됩니다. 광야에 불뱀이 와글거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뱀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장대에 불뱀을 만들어 높이 달아서 쳐다보는 자마다 불뱀의 독에서 해소된 것처럼 예수님은 오셔서 이 세상에 마귀의 독을 해소하기 위해서 친히 마귀를 안고 십자가에 올라가서 못 박아 버려 마귀의 독을 해소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를 쳐다보면 마귀의 독에서 해소될 수 있는 힘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죄의 지위인 보혈의 은혜가 십자가를 통해서 넘쳐난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물어서 죄의 독이 꽉 들어차서 죄의 포로가 될지라도 예수님 십자가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면 보혈의 능력으로 용서와 의와 영광의 은혜가 쏟아져서 마귀의 죄악의 독을 다 해소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죄가 환영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고 의롭게 살고 승리롭게 살 수 있는 은혜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면 죄를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엡 1: 7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와 세속을 멸할 성령의 은혜도 십자가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와 세속에 물려서 온갖 더러운 일을 다 하는 독의 노예가 되었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성령이 와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모든 마귀를 멸하시고 마귀의 독인 더러움을 다 제하여 버리시고 거룩함으로 채워 주셔서 승리롭게 살 수 있는 힘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요일 3: 8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귀의 일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의지할 때 십자가를 통하여 넘쳐 나오는 성령의 능력의 은혜로써 마귀의 일이 멸해지고 마귀의 역사가 우리의 삶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심신의 병을 안 당할 수 없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면 심신의 병을 치료하는 은혜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바라보면 내 몸에 어떤 병이 들어와도 이를 이길 수 있는 은혜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병을 이기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시103: 3~ 4에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셨고 벧전 2:24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주와 가난을 정복한 은혜도 십자가를 통하여 넘쳐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저주와 가난, 낭패와 실망이 늘 다가오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는 가난을 이기고 저주를 이기고 낭패와 실망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갈 3:13~14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나무에 달리므로 우리 저주를 담당하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우리에게 오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주위에 저주가 득실거리고 가난과 실망, 고통이 있더라도 십자가를 바라보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아브라함의 축복이 우리에게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 죽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 죽지요. 그러나 십자가를 쳐다보면 사망을 극복하고 부활의 생명을 얻도록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 죽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 속에 십자가를 통해서 오시면 죽음을 이기고 부활이 우리에게 채워지므로 사망은 극복되고 우리는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 5: 1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선생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사망을 조롱했습니다. 다 죽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부활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죽음을 극복해 버리고 오히려 그를 통해서 천국의 영생의 집에 들어갈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히12: 2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한 것처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므로 거기에서 넘쳐 나오는 은혜가 죄를 극복하고 마귀와 세속을 극복하고 질병을 극복하고 저주를 극복하고 죽음을 극복하고 승리롭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죄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마귀와 유혹과 더러움이 없는 세상은 없어요. 병 없는 세상도 없고 가난과 저주와 절망이 없는 세상도 없고 죽음이 없는 세상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엉망 같은 재앙의 세상 속에 살지만 우리 가운데 갈보리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모든 독을 해소하는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마귀를 멸하고 독을 해소하는 은혜의 역사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셔라. 그러면 너희 배속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즉 뱀에 물린 모든 사람들이 독에서 해소되고 승리한 것처럼 마귀의 독이 올라 죽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라본즉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와서 모든 것을 극복하고 영원히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삶을 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운명과 환경이 거칠다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운명과 환경이 아무리 거칠어도 그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기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패배하도록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없으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다 죄와 세속과 마귀와 질병과 저주와 죽음의 노예요, 그들에게 짓밟혀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높이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시므로 그 은혜를 통하여 우리는 넉넉히 이기면서 생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바울이 체험과 극복하는 신앙
사도바울 선생은 이것을 체험했습니다.
바울선생은 인간적으로도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박식했고 헬라철학을 잘 아는 분이었습니다. 당대에 놀라운 학식가요, 지식 있는 사람이요, 바리새교인이요, 명망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또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깨달았으니 교만해 질수가 있습니다. 오만해 질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울선생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었습니다. 사탄의 사자가 와서 그를 몹시 괴롭혔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든지 세 번 주님께 나가 기도했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세 번이라고 한 것은 시간을 내어서 혹은 한주일 혹은 한 달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세 번이나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이여, 이 육체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또 너무 답답해서 두 번째 시간을 내어서 금식을 하며 부르짖어 기도했으나 응답이 없었습니다. 세 번째 또 나가서 하나님께 몸부림치며 이 육체의 가시를 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했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약할 때 네가 강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육체의 가시를 제하는 것보다는 네가 약해서 내게 의지하면 내게 네게 은혜를 더할 수 있다.”고 주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성경 고후 12: 7~ 9에 있는 말씀 우리 다 같이 소리 내어 읽으십시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 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자식들을 길러보면 잘 압니다. 성공하고 잘나가는 자식은 감사하고 기쁘고 좋지요. 자랑스럽지요. 그러나 약하고 성공하지 못하고 패배한 자식은 아버지, 엄마에게 매달립니다. 아버지 허리를 잡고 매달리고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날 살려달라고 매달립니다. 그러면 잘나가는 자식은 감사하고 기뻐서 자랑스럽지만 못나고 약하고 의지하는 이 자식은 부모가 버릴 수가 없어서 있는 것 없는 것 다주고 끝까지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 자식이 없어야 되겠지만 있으면 부모님은 눈을 감을 때까지 그 자식을 위해서 온갖 것을 다주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왜, 약하니까. 부모 없이 살지 못하니까 부모가 그 자식을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약할 때 우리가 주님께 늘 부르짖어 기도하고 의지하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잘나간다고 해서 주님 필요하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고 혼자 나가면 주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게 만들어야 되겠고 주님께 의지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를 약하게 만들어야 의지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이 다가와서 우리가 마음이 약해지고 몸이 약해져서 고통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결사적으로 주님께 매달리지요. 주님이 그때를 사용해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은혜 속에 살기 위해서는 첫째로 극복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고 주님의 은혜의 말씀이 마음속에 거하도록 늘 묵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환경은 언제나 소용돌이 칩니다. 환경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해서는 별효과가 없습니다. 바람 불고 비가 내리고 춥고 눈보라치는 변화되지 않아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이것을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이기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더위도 이기고 추위도 이기고 눈보라도 이기고 비바람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없애달라고 하는 것보다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기는 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말씀을 주셔서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보배로운 말씀은 우리가 모든 원수와 환경을 이길 수 있는 무기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고 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이 마음속에 깊이 거하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시 1: 2~ 3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오직 야훼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율법의 말씀 즉, 성경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서 마음속에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용서의 말씀을, 불결에 대해서는 성령의 임재하심을 병은 치료의 말씀을, 가난과 낭패와 실망은 축복의 말씀을, 죽음은 부활의 말씀을… 해당되는 말씀들을 마음속에 묵상하고 말씀이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마음을 점령하고 있으면 그 말씀이 힘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죽든지 살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아무것도 안보이고 안 들리고 캄캄해도 말씀이 중심에 있으면 말씀이 은혜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119:92에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시23: 4~ 5을 늘 묵상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제가 살아가는 동안에 크고 작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수없이 지납니다. 그때는 눈앞에 캄캄합니다.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같이 계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말씀이 그것을 약속했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주님이 같이 계신 것을 알고 주님께 기도할 때 주님은 지팡이로 길을 만들어 주시고 막대기로 보호해 주시고 해를 받지 않고 나오도록 두려움을 해소해 주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안을 갖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일은 주님이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 나와 같이 계신 것을 알 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마음을 점령하면 어떠한 캄캄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우리는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말씀의 은혜가 마음을 점령해 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가운데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 제일 많이 알려진 사람 중 하나가 존 번연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다가 핍박을 받아 투옥 되었습니다. 활동적인 사람이 수감되어 감방에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답답하기가 그지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건져 주소서. 이 감옥에서 저를 꺼내 주소서.” 시간만 나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감옥생활이 지옥과 같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상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은혜가 족하다. 내 은혜가 족하다. 내 은혜가 족하다.” 세 번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번연은 ‘아, 내가 이렇게 감방에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내게 족한 은혜를 주시는구나. 이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이것을 깨닫자마자 마음이 밝아지고 편안해지더니만 그렇게 지옥 같은 감방이 내 안방처럼 보였습니다. 너무나 평안하고 좋았습니다. 사람 찾아올 사람 없고 찾아갈 사람도 없고 조용하게 앉아서 주님과 대화하고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주의 말씀이 마음속에 들어오기 전에는 감방이 지옥 같고 고통스러웠는데 주의 말씀이 마음속에 임하자마자 너무나 평안하고 행복하고 그 감방이 안방 같았습니다. 그는 감방에서 12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지만 날마다 주님과 깊은 기도의 교제를 나누며 말씀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해서 지은 책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천로역정」입니다. 그는 실제로 밖에 나가서 목회한 것보다도 12년 감옥살이에서 천로역정을 지음으로 온 세계를 뛰어넘어 전 세계에 이 책이 읽혀지고 수많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는 역사를 베풀어 준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스런 흐느낌에서 주 예수를 바라보고 그 은혜를 힘입어 고난을 극복하는 삶을 살 때 강하고 능력 있는 신앙인의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동화작가인 정채봉씨가 지은 글 중에서 이런 글이 있습니다. 콩 형제가 있었습니다. 이름이 콩가가 아니고 먹는 콩 말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이 콩 형제가 둘이가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데 콩 형이 “나는 들에 가서 살래.” 그러니까 동생이 “아니야. 나는 방안에서 살래.” 그래서 콩 형은 들에 나가서 햇빛을 받고 비바람을 맞으면서 큰 콩 나무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햇빛도 받지 않고 비도 맞지 않은 방안에서 고요히 자란 동생 콩은 콩나물이 되어서 노랗게 올라와서 반찬이 되고 만 것입니다. 똑같은 콩이지만 비바람을 맞고 햇빛을 비취고 풍랑을 만나면서 자라는 것은 나무가 되나 온실에서 자라는 것은 콩나물이 되어서 노랗게 되어서 밥상에 올라가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콩나무가 되고 콩나물이 되지 마십시오.
둘째로, 우리가 은혜로써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늘 간구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놓지 않고 도와주는 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나 홀로면 넘어지고 일어날 수 없으나 둘이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혼자 누우면 추우나 두 사람이 누우면 따뜻하잖아요. 삼겹실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하물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일체 중에 제 삼위인 성령이 우리를 돕는 자로 와계신 것입니다. 보혜사가 뭡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곁에 계신 분인 것입니다. 성령은 지금 이 자리에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신 것입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이 우리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우리가 항상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하고 감사하고 예배하면 성령이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종이 한 장은 손으로 뚫을 수 있지만 종이를 이 강단에 붙여놓고 손가락으로 뚫어 보십시오. 안 뚫립니다. 나 혼자는 망하겠거니와 성령이 같이 계시면 결코 망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놓지 아니하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와 더불어 같이 계시므로 초기적적인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롬 8:26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혼자 있는 사람이 아니요, 버림받은 사람도 아니요, 고아도 아니요 하나님의 영 성령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 성령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외롭지 않습니다. 혼자 있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계십니다. 성령이 나의 보혜사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면 우리는 은혜로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들은 주님을 순간순간마다 의지하고 주님에게 맡기는 믿음의 결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항상 믿음이 꽉 들어차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어려움이 다가올 때 그때 내가 환경을 바라볼 것이냐, 믿을 것이냐, 감각을 의지할 것이냐, 믿음을 의지할 것이냐, 느낌을 의지할 것이냐, 믿음을 의지할 것이냐. 결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순간순간마다 내가 죄가 다가오면 주님을 의지해서 의로써 이기고 질병이 다가오면 치료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질병을 이기고 고난이 다가오면 축복을 의지하고 고난을 이기고 죽음이 다가오면 부활의 믿음을 의지해서 이기는 순간순간마다 믿음의 결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다가지고 있지만 믿고 안 믿는 결단은 여러분이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환경을 따를 것이냐, 믿음을 따를 것이냐, 감각을 따를 것이냐, 믿음을 따를 것이냐, 느낌을 따를 것이냐, 믿음을 따를 것이냐는 내가 결단합니다.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갈 때 예수님을 바라보기로 결단했을 때는 베드로가 결정을 내린 믿음입니다. 그러나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바람과 파도를 보고 두려워하는 것도 베드로의 선택인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물에 빠진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을 순간순간마다 결단을 내리고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맡기고 믿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히10:38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서 살기 위해서는 믿음의 결단을 내리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는 불안이나 부정적인 생각이나 말을 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텅 비워 놓으면 온갖 두려운 영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빈 마음은 마귀의 공장입니다. 마음을 비워 놓으면 온갖 불안과 공포가 다 들어옵니다. “내가 죽겠지. 망하겠지. 패배하겠지. 불행이 다가오겠지. 절망이 다가오겠지.” 온갖 부정적인 것이 다 다가옵니다. 우리의 빈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으로 채워 놓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하는 마음속에 아버지와 아들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들어와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눈물을 흘리면서도 감사하고, 탄식하면서도 감사하고, 가슴을 치면서도 감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있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했는데 감사하는 말을 혀로써 자꾸 말하면 혀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노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때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들이는 전기코드인 것입니다. 감사가 있어야 하나님이 임하여 역사하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마귀를 끌어들이는 코드인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을 하면 그를 타고 마귀가 오고 감사와 찬양을 하면 그를 타고 하나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를 받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일에 감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살전 5:16~18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한 것처럼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하면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종교가로 유명한 기도의 사람이었던 로우 목사는 만족과 행복을 가장 빠르게 찾는 비결은 범사에 감사하는데 있다며 말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인생의 행복과 만족을 찾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에 대하여 무조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고 대답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고난 앞에서 불행이나 부정적인 생각이나 말을 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고난을 극복할 힘과 함께 축복의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망이나 불평이나 탄식을 말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부정적인 말을 하면 30배, 60배, 100배로 마귀를 끌어 들이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노리고 있는데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으면서 우리에게 들어올 통로를 찾습니다. 그 길이 뭡니까?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하고 그것이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원망해라. 불평해라. 탄식해라. 입술로 고백해라. 그 마귀의 말을 따라 그만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고 그것을 입으로 고백하면 마귀가 손바닥을 치고 왔다. 길이 열렸다. 밀물같이 밀고 들어가자. 그래서 들어와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괴로움이 꽉 들어차고 어두움이 꽉 들어차서 슬픔이 넘쳐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의 은총을 생각하고 감사 찬송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입술로 고백하면 하나님 앞에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이 저사람 봐라. 어둡고 캄캄한데 앉아있고 고통과 슬픔이 다가와도 우리에게 길을 열어 놓았다. 감사 찬송을 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생각과 말을 한다. 들어가서 도와주자. 하나님이 그 길을 통해서 오셔서 영원히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고난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죄 없는 세상, 마귀의 유혹과 시험과 더러움이 없는 세상, 병 없고, 가난 없고, 질병 없고, 고통 없고, 죽음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에 이런 모든 것은 다 이 세상의 티끌과 먼지처럼 꽉 들어찼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은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넘치게 주시고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주시고 성령을 통하여 은혜를 주시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통해서 은혜를 주시고 감사 찬양을 통해서 은혜를 주셔서 은혜로써 넉넉히 이기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죽음이냐 갈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조그만큼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넉넉히 이깁니다.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환난과 고통 없는 세상을 바라지 말고 그 가운데 언제나 십자가를 바라보고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는 밖에 내어 놓으면 죽지요. 자녀들도 과보호하면 패배자로 만들어 놓습니다. 고통스런 환경에서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은혜를 힘입어 극복하는 삶을 살 때 강하고 능력 있고 담대한 신앙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장애물이 없는 삶이 아니라 장애물을 극복하는 삶이 천국적 인격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십시오. 이를 통해서 여러분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 주셔서 은혜를 체험할 뿐 아니라 넉넉히 이기게 되고 그를 통해서 신앙이 쭉쭉 자라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시련과 환난이 없는 세계가 아니라 시험과 환난이 있을지라도 그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은혜를 받아서 이기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일에 우리가 넉넉히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시여 이기는 생활을 통해서 신앙이 자라고 경험이 자라고 능력 있는 성도가 되어서 수많은 사람을 빛으로 인도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일 시 : 2006년 8월 13일 주일3부 설교
제 목 : 극복하는 신앙
설 교 : 조 용 기 목사
말 씀 : 고후12: 7~ 9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극복하는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중국의 유명한 복음전도자 이도슝 목사님의 체험담을 들어보면 마음이 굉장히 감격적입니다. 이도슝 목사님은 워치만 니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더욱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몸이 심히 약해 30세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의사가 말했으나 하나님께 치료를 해주시도록 많이 기도했으나 응답이 없다가 하룻밤에 신기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배를 타고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한가운데 쯤 가서 큰 바위에 걸려 더 이상 배가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꿈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배가 지나가게 해 주옵소서.” 그때 하나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바위를 옮겨버릴까, 물이 불어 지나가게 할까?” 그러자 그는 대답을 했습니다. ??물이 점점 불어 지나가게 하여 주옵소서.??순식간에 물이 불어올라 그 위를 유유히 지나갔습니다. 꿈을 깬 후에 그는 깨달았습니다. ‘아! 하나님이 내 폐병과 심장병을 고쳐 주실 수도 있으시고 폐병과 심장병을 그대로 두고 이를 극복하도록 은혜를 넘치게 주실 수도 있는데 둘 중에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고 하나님이 나에게 선택을 명하시는구나.’ 그는 엎드려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비록 내가 폐병에 걸리고 협심증이라는 심장병이 있지만 이를 극복하고 더 큰일을 할 수 있도록 많은 은혜를 주신다면 오히려 낫는 것보다 병을 택하겠습니다.” 그는 평생에 폐병과 심장병으로 고생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엄청나게 임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사역을 해서 69세까지 사시다가 천국에 가시게 된 것입니다.
[본론]
1. 인생의 장애물
하나님은 고난의 장애물을 옮겨주실 때도 있으시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극복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한국가정상담연구소에서 간행되는 「행복한 우리 집」8월 호에 요즘 청소년들의 실태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교육현장에서는 요즘 청소년들을 ‘스크린 세대’, ‘게임 세대’라고 합니다. 이들은 야외로 현장학습을 가거나 직접 운동하는 것 대신에 비디오나 게임으로 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직접 움직이기보다 대리 만족을 더 좋아하는 그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어느 학교에서는 조회 시간에 학생들이 애국가를 따라 부르지 못했습니다. 반주만 녹음된 테이프를 사용하다가 노랫말까지 녹음된 것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학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 비디오가 없을 때는 성도들이 다 찬송가를 들고 와서 찬송을 잘 불렀습니다. 또 많은 찬송과 곡을 외웠습니다. 요사이 성도들은 찬송가 곡을 외우지를 못해요. 교회 오면 전부 비디오에 비취니까 비디오를 바라보고 찬송을 불렀다가 나중에는 비디오가 없고 찬송가책이 없을 때 찬송을 부르라면 외우지 못하고 입만 들썩들썩하는 것입니다.
어느 고등학교에서는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청소를 시켰더니 빗자루를 들고 가만히 서 있어서 “야! 왜 가만히 있느냐? 바닥을 쓸어라.” 그렇게 하니까 그제서야 바닥을 쓸고 모인 쓰레기를 치우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쓰레기를 쓸어 담아야지!” 라고 했는데 그제야 쓸어 담고, “쓰레기통에 넣어!”라고 할 때까지 그냥 쳐다만 보고 있다가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라고 하니까 쓰레기통에 집어넣더라는 것입니다. 오인숙 선생님은 요즘 청소년들이 이처럼 나약해진 원인에 대해 이들이 유치원을 다니기 전부터 부모가 짜놓은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세대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과보호로 “너는 유치원에 가거라. 너는 태권도장에 가라. 너는 음악연습장에 가거라. 너는 미술공부해라.” 모든 것을 부모님이 스케쥴을 짜놓고 부모들이 결정을 하고 판단을 하고 시키는데 기계적으로 순종만 했기 때문에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고 나아갈 수 있는 기능을 상실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의 과보호로 자율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시간을 관리하는 법을 배울 기회도 없고, 자율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행동할 기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는 밖에 내어 놓으면 죽습니다. 자녀들도 과보호하면 인생의 패배자가 될 따름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스런 흐느낌에서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은혜를 힘입어 극복하는 삶을 살 때 강한 능력 있는 신앙이 됩니다. 장애물이 없는 삶이 아니라 장애물을 극복하는 삶이 강한 인격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란 장애물이 너무나 많습니다. 죄는 흉악한 장애물이지만 우리로 죄 없는 세상에 살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죄 없는 곳에 살게 해 주십시오. 내 주위에서 죄를 다 없애 주십시오.” 그런 기도를 해도 응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흉악한 죄가 많습니다. 살인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찜질방에 간 여인들을 잡아서 돈을 빼앗고 죽인 사건도 최근에 일어났지 않습니까? 강간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강도, 사기, 거짓, 배반 이러한 흉한 죄악들이 주위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죄악이 없는 세상에 살면 좋겠는데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죄 없는 세상에 살게 하지 아니하시고 죄가 있어도 이를 이기고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히12: 4에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한 것입니다.
죄 없는 세상이 아니라 죄 있는 세상에서 죄와 싸워서 이기고 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히 3:13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과 세속의 더러움이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마귀도 없고 유혹도 없고 세상 더러움도 없고 고통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러한 온실 같은 세상에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리 그런 세상을 달라고 기도해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주위에 마귀가 있고 유혹이 있고 세속의 더러움이 있는 곳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가운데 네가 이것을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라고 말씀하시지 이런 유혹이 없는 세상에 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갈 5:19~21에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런 일들이 너희 가운데 있는데 이것을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천국백성으로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없는 생활 속에 살라고 말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심신의 질병과 고통은 일평생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병이 안 오면 좋겠는데 한번 병이 들면 또 다른 병이 오고 그것을 이기고 나면 또 다른 병이 오는 것입니다. 병 없는 세상에 살면 좋겠는데 그런 세상이 없어요. 문명한 나라에서는 심적인 병이 더 많습니다.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병이 많지요. 미계한 나라에서는 육체적인 병이 많습니다. 인간이 사는 동안에 항상 병은 같이 있습니다. 병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오직 병을 이기고 우리가 살도록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전 5:17에 “일평생을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많은 근심과 질병과 분노가 그에게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 14:13에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항상 웃고 즐거워하는 것만이 있는 것 같지만 그 가운데도 근심이 있고 눈물이 있고 탄식이 함께 있는 세상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삶의 시련과 환난과 가난과 실패도 늘 곁에 있습니다. 시련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환난도 없고 가난도 없고 실패도 없으면 좋겠는데 언제나 인생에는 시련과 환난과 가난과 실패가 있어요. 어느 정권이 들어와도 대통령은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자기를 믿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정권이 지나갈 때까지 믿어보아도 역시 시련과 환난과 가난과 실패가 늘 사회가운데 있는 것을 우리는 느낍니다. 이제는 어떠한 사람이 나타나서 “나 좀 믿어 주세요. 내가 잘 만들어 줄 테니까…” 해도 “웃기는 소리하네. 늘 믿어봤자. 늘 속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항상 시련과 환난과 가난과 실패가 넘쳐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없는 세상에 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있는 세상에 살면서 그것을 이기고 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짓밟혀서 패배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욥 5: 7에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
전 2:23절에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인생을 평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 세상에 사는데 육체적인 죽음과 사별의 슬픔과 고통도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안 죽으면 좋지 않겠어요?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우리 가정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세상을 뜨시고 부모님들이 세상을 뜨시고 혹은 형제들이 세상을 뜨는 죽음을 체험하고 더구나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이 죽는 사별의 가슴 아픈 슬픔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왜 태어났냐? 죽음이 없고 사별이 없고 슬픔이 없는 세상에 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없어요. 우리는 육체적인 죽음과 사별의 슬픔과 고통이 함께 있으며 이를 극복하고 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라.
히 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했습니다.
시90:10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모든 것이 우리와 함께 있는데 우리보고 극복을 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라고 하는데 짊어지고 갈 힘이 없으면 그 짐에 눌릴 수밖에 없습니다. 죄 짐을 짊어지고 세상과 슬픔을 짊어지고 질병과 좌절과 가난과 고통을 짊어지고 죽음도 짊어지고 승리하고 살수가 있게 하기 위해서는 그 힘을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냐 죽음이냐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가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죽음이나 칼이 없는 세상에 살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느 곳에 가나 환난이 있고 곤고가 있고 적신이 있고 위험이 있고 위험이 있고 기근이 있고 칼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이기고 살게 해주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이길 수 있습니까?
2.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광야를 지날 때 그들이 원망과 불평을 하다가 불뱀이 달라 들었습니다. 불뱀이 와서 수많은 사람을 물어서 죽였습니다. 불뱀의 독이 올라서 그들은 감당하지 못하고 퉁퉁 부어서 죽었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모세에게 와서 부르짖으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한즉 “불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으라. 쳐다보는 사람마다 고침을 받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뱀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불뱀이 와서 물더라도 그 독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 모세가 불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아 높이 드니까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그 장대를 쳐다보니 불뱀을 이길 수 있는 은혜가 임하여서 독이 해소되었습니다. 이제는 불뱀이 득실거리도 겁나지 않습니다. 불뱀 속에 뒹굴어도 겁나지 않습니다. 불뱀이 온몸을 감고 올라와도 겁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물어도 그 독이 아무리 몸속에 들어와도 장대에 매달린 불뱀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은혜가 와서 독을 해소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불뱀이 없는 세상을 산 것이 아니라 불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뱀의 독을 이길 수 있는 삶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유명한 율법학자인 니고데모가 한번은 밤에 예수님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니고데모를 보고 이렇게 말씀했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에 인생들은 뱀에게 물렸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뱀에게 물리고 그 후손들이 다 뱀에게 물려서 뱀의 독이 올랐습니다. 죄의 독이 올랐습니다. 더러움과 세속의 독이 올랐습니다. 병의 독이 올랐습니다. 가난과 저주와 낭패와 실망과 고통에 독이 올랐습니다. 죽음의 독이 오르고 멸망의 독이 올랐습니다. 온 세상 사람은 마귀의 독에 올라서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독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종교를 믿기도 하고 수양과 도덕을 닦기도 하고 고행을 하기도 하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독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모두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저주를 받고 절망 중에 죽어갑니다. 어떻게 이 독에서 해소될 수 있습니까? “주여! 죄를 없애 주시옵소서. 마귀와 모든 더러움을 없애 주시옵소서. 세속을 없애 주시옵소서. 세속을 없애 주시고 병을 없애 주시고 저주를 없애 주시고 가난을 없애 주시옵소서. 사망과 음부를 없애 주시옵소서.” 아무리 기도해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세세 천천 늘 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이속에 살면서 우리가 극복을 해야 됩니다. 광야에 불뱀이 와글거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뱀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장대에 불뱀을 만들어 높이 달아서 쳐다보는 자마다 불뱀의 독에서 해소된 것처럼 예수님은 오셔서 이 세상에 마귀의 독을 해소하기 위해서 친히 마귀를 안고 십자가에 올라가서 못 박아 버려 마귀의 독을 해소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를 쳐다보면 마귀의 독에서 해소될 수 있는 힘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죄의 지위인 보혈의 은혜가 십자가를 통해서 넘쳐난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물어서 죄의 독이 꽉 들어차서 죄의 포로가 될지라도 예수님 십자가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면 보혈의 능력으로 용서와 의와 영광의 은혜가 쏟아져서 마귀의 죄악의 독을 다 해소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죄가 환영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고 의롭게 살고 승리롭게 살 수 있는 은혜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면 죄를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엡 1: 7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와 세속을 멸할 성령의 은혜도 십자가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와 세속에 물려서 온갖 더러운 일을 다 하는 독의 노예가 되었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성령이 와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모든 마귀를 멸하시고 마귀의 독인 더러움을 다 제하여 버리시고 거룩함으로 채워 주셔서 승리롭게 살 수 있는 힘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요일 3: 8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귀의 일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의지할 때 십자가를 통하여 넘쳐 나오는 성령의 능력의 은혜로써 마귀의 일이 멸해지고 마귀의 역사가 우리의 삶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심신의 병을 안 당할 수 없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면 심신의 병을 치료하는 은혜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바라보면 내 몸에 어떤 병이 들어와도 이를 이길 수 있는 은혜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병을 이기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시103: 3~ 4에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셨고 벧전 2:24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주와 가난을 정복한 은혜도 십자가를 통하여 넘쳐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저주와 가난, 낭패와 실망이 늘 다가오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는 가난을 이기고 저주를 이기고 낭패와 실망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갈 3:13~14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나무에 달리므로 우리 저주를 담당하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우리에게 오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주위에 저주가 득실거리고 가난과 실망, 고통이 있더라도 십자가를 바라보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아브라함의 축복이 우리에게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 죽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 죽지요. 그러나 십자가를 쳐다보면 사망을 극복하고 부활의 생명을 얻도록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 죽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 속에 십자가를 통해서 오시면 죽음을 이기고 부활이 우리에게 채워지므로 사망은 극복되고 우리는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 5: 1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선생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사망을 조롱했습니다. 다 죽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부활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죽음을 극복해 버리고 오히려 그를 통해서 천국의 영생의 집에 들어갈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히12: 2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한 것처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므로 거기에서 넘쳐 나오는 은혜가 죄를 극복하고 마귀와 세속을 극복하고 질병을 극복하고 저주를 극복하고 죽음을 극복하고 승리롭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죄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마귀와 유혹과 더러움이 없는 세상은 없어요. 병 없는 세상도 없고 가난과 저주와 절망이 없는 세상도 없고 죽음이 없는 세상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엉망 같은 재앙의 세상 속에 살지만 우리 가운데 갈보리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모든 독을 해소하는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마귀를 멸하고 독을 해소하는 은혜의 역사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셔라. 그러면 너희 배속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즉 뱀에 물린 모든 사람들이 독에서 해소되고 승리한 것처럼 마귀의 독이 올라 죽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라본즉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와서 모든 것을 극복하고 영원히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삶을 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운명과 환경이 거칠다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운명과 환경이 아무리 거칠어도 그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기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패배하도록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없으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다 죄와 세속과 마귀와 질병과 저주와 죽음의 노예요, 그들에게 짓밟혀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높이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시므로 그 은혜를 통하여 우리는 넉넉히 이기면서 생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바울이 체험과 극복하는 신앙
사도바울 선생은 이것을 체험했습니다.
바울선생은 인간적으로도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박식했고 헬라철학을 잘 아는 분이었습니다. 당대에 놀라운 학식가요, 지식 있는 사람이요, 바리새교인이요, 명망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또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깨달았으니 교만해 질수가 있습니다. 오만해 질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울선생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었습니다. 사탄의 사자가 와서 그를 몹시 괴롭혔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든지 세 번 주님께 나가 기도했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세 번이라고 한 것은 시간을 내어서 혹은 한주일 혹은 한 달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세 번이나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이여, 이 육체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또 너무 답답해서 두 번째 시간을 내어서 금식을 하며 부르짖어 기도했으나 응답이 없었습니다. 세 번째 또 나가서 하나님께 몸부림치며 이 육체의 가시를 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했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약할 때 네가 강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육체의 가시를 제하는 것보다는 네가 약해서 내게 의지하면 내게 네게 은혜를 더할 수 있다.”고 주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성경 고후 12: 7~ 9에 있는 말씀 우리 다 같이 소리 내어 읽으십시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 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자식들을 길러보면 잘 압니다. 성공하고 잘나가는 자식은 감사하고 기쁘고 좋지요. 자랑스럽지요. 그러나 약하고 성공하지 못하고 패배한 자식은 아버지, 엄마에게 매달립니다. 아버지 허리를 잡고 매달리고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날 살려달라고 매달립니다. 그러면 잘나가는 자식은 감사하고 기뻐서 자랑스럽지만 못나고 약하고 의지하는 이 자식은 부모가 버릴 수가 없어서 있는 것 없는 것 다주고 끝까지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 자식이 없어야 되겠지만 있으면 부모님은 눈을 감을 때까지 그 자식을 위해서 온갖 것을 다주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왜, 약하니까. 부모 없이 살지 못하니까 부모가 그 자식을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약할 때 우리가 주님께 늘 부르짖어 기도하고 의지하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잘나간다고 해서 주님 필요하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고 혼자 나가면 주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게 만들어야 되겠고 주님께 의지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를 약하게 만들어야 의지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이 다가와서 우리가 마음이 약해지고 몸이 약해져서 고통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결사적으로 주님께 매달리지요. 주님이 그때를 사용해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은혜 속에 살기 위해서는 첫째로 극복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고 주님의 은혜의 말씀이 마음속에 거하도록 늘 묵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환경은 언제나 소용돌이 칩니다. 환경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해서는 별효과가 없습니다. 바람 불고 비가 내리고 춥고 눈보라치는 변화되지 않아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이것을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이기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더위도 이기고 추위도 이기고 눈보라도 이기고 비바람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없애달라고 하는 것보다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기는 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말씀을 주셔서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보배로운 말씀은 우리가 모든 원수와 환경을 이길 수 있는 무기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고 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이 마음속에 깊이 거하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시 1: 2~ 3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오직 야훼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율법의 말씀 즉, 성경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서 마음속에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용서의 말씀을, 불결에 대해서는 성령의 임재하심을 병은 치료의 말씀을, 가난과 낭패와 실망은 축복의 말씀을, 죽음은 부활의 말씀을… 해당되는 말씀들을 마음속에 묵상하고 말씀이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마음을 점령하고 있으면 그 말씀이 힘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죽든지 살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아무것도 안보이고 안 들리고 캄캄해도 말씀이 중심에 있으면 말씀이 은혜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119:92에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시23: 4~ 5을 늘 묵상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제가 살아가는 동안에 크고 작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수없이 지납니다. 그때는 눈앞에 캄캄합니다.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같이 계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말씀이 그것을 약속했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주님이 같이 계신 것을 알고 주님께 기도할 때 주님은 지팡이로 길을 만들어 주시고 막대기로 보호해 주시고 해를 받지 않고 나오도록 두려움을 해소해 주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안을 갖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일은 주님이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 나와 같이 계신 것을 알 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마음을 점령하면 어떠한 캄캄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우리는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말씀의 은혜가 마음을 점령해 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가운데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 제일 많이 알려진 사람 중 하나가 존 번연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다가 핍박을 받아 투옥 되었습니다. 활동적인 사람이 수감되어 감방에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답답하기가 그지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건져 주소서. 이 감옥에서 저를 꺼내 주소서.” 시간만 나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감옥생활이 지옥과 같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상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은혜가 족하다. 내 은혜가 족하다. 내 은혜가 족하다.” 세 번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번연은 ‘아, 내가 이렇게 감방에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내게 족한 은혜를 주시는구나. 이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이것을 깨닫자마자 마음이 밝아지고 편안해지더니만 그렇게 지옥 같은 감방이 내 안방처럼 보였습니다. 너무나 평안하고 좋았습니다. 사람 찾아올 사람 없고 찾아갈 사람도 없고 조용하게 앉아서 주님과 대화하고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주의 말씀이 마음속에 들어오기 전에는 감방이 지옥 같고 고통스러웠는데 주의 말씀이 마음속에 임하자마자 너무나 평안하고 행복하고 그 감방이 안방 같았습니다. 그는 감방에서 12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지만 날마다 주님과 깊은 기도의 교제를 나누며 말씀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해서 지은 책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천로역정」입니다. 그는 실제로 밖에 나가서 목회한 것보다도 12년 감옥살이에서 천로역정을 지음으로 온 세계를 뛰어넘어 전 세계에 이 책이 읽혀지고 수많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는 역사를 베풀어 준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스런 흐느낌에서 주 예수를 바라보고 그 은혜를 힘입어 고난을 극복하는 삶을 살 때 강하고 능력 있는 신앙인의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동화작가인 정채봉씨가 지은 글 중에서 이런 글이 있습니다. 콩 형제가 있었습니다. 이름이 콩가가 아니고 먹는 콩 말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이 콩 형제가 둘이가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데 콩 형이 “나는 들에 가서 살래.” 그러니까 동생이 “아니야. 나는 방안에서 살래.” 그래서 콩 형은 들에 나가서 햇빛을 받고 비바람을 맞으면서 큰 콩 나무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햇빛도 받지 않고 비도 맞지 않은 방안에서 고요히 자란 동생 콩은 콩나물이 되어서 노랗게 올라와서 반찬이 되고 만 것입니다. 똑같은 콩이지만 비바람을 맞고 햇빛을 비취고 풍랑을 만나면서 자라는 것은 나무가 되나 온실에서 자라는 것은 콩나물이 되어서 노랗게 되어서 밥상에 올라가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콩나무가 되고 콩나물이 되지 마십시오.
둘째로, 우리가 은혜로써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늘 간구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놓지 않고 도와주는 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나 홀로면 넘어지고 일어날 수 없으나 둘이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혼자 누우면 추우나 두 사람이 누우면 따뜻하잖아요. 삼겹실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하물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일체 중에 제 삼위인 성령이 우리를 돕는 자로 와계신 것입니다. 보혜사가 뭡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곁에 계신 분인 것입니다. 성령은 지금 이 자리에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신 것입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이 우리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우리가 항상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하고 감사하고 예배하면 성령이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종이 한 장은 손으로 뚫을 수 있지만 종이를 이 강단에 붙여놓고 손가락으로 뚫어 보십시오. 안 뚫립니다. 나 혼자는 망하겠거니와 성령이 같이 계시면 결코 망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놓지 아니하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와 더불어 같이 계시므로 초기적적인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롬 8:26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혼자 있는 사람이 아니요, 버림받은 사람도 아니요, 고아도 아니요 하나님의 영 성령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 성령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외롭지 않습니다. 혼자 있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계십니다. 성령이 나의 보혜사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면 우리는 은혜로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들은 주님을 순간순간마다 의지하고 주님에게 맡기는 믿음의 결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항상 믿음이 꽉 들어차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어려움이 다가올 때 그때 내가 환경을 바라볼 것이냐, 믿을 것이냐, 감각을 의지할 것이냐, 믿음을 의지할 것이냐, 느낌을 의지할 것이냐, 믿음을 의지할 것이냐. 결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순간순간마다 내가 죄가 다가오면 주님을 의지해서 의로써 이기고 질병이 다가오면 치료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질병을 이기고 고난이 다가오면 축복을 의지하고 고난을 이기고 죽음이 다가오면 부활의 믿음을 의지해서 이기는 순간순간마다 믿음의 결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다가지고 있지만 믿고 안 믿는 결단은 여러분이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환경을 따를 것이냐, 믿음을 따를 것이냐, 감각을 따를 것이냐, 믿음을 따를 것이냐, 느낌을 따를 것이냐, 믿음을 따를 것이냐는 내가 결단합니다.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갈 때 예수님을 바라보기로 결단했을 때는 베드로가 결정을 내린 믿음입니다. 그러나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바람과 파도를 보고 두려워하는 것도 베드로의 선택인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물에 빠진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을 순간순간마다 결단을 내리고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맡기고 믿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히10:38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서 살기 위해서는 믿음의 결단을 내리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는 불안이나 부정적인 생각이나 말을 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텅 비워 놓으면 온갖 두려운 영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빈 마음은 마귀의 공장입니다. 마음을 비워 놓으면 온갖 불안과 공포가 다 들어옵니다. “내가 죽겠지. 망하겠지. 패배하겠지. 불행이 다가오겠지. 절망이 다가오겠지.” 온갖 부정적인 것이 다 다가옵니다. 우리의 빈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으로 채워 놓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하는 마음속에 아버지와 아들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들어와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눈물을 흘리면서도 감사하고, 탄식하면서도 감사하고, 가슴을 치면서도 감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있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했는데 감사하는 말을 혀로써 자꾸 말하면 혀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노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때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들이는 전기코드인 것입니다. 감사가 있어야 하나님이 임하여 역사하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마귀를 끌어들이는 코드인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을 하면 그를 타고 마귀가 오고 감사와 찬양을 하면 그를 타고 하나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를 받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일에 감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살전 5:16~18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한 것처럼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하면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종교가로 유명한 기도의 사람이었던 로우 목사는 만족과 행복을 가장 빠르게 찾는 비결은 범사에 감사하는데 있다며 말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인생의 행복과 만족을 찾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에 대하여 무조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고 대답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고난 앞에서 불행이나 부정적인 생각이나 말을 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고난을 극복할 힘과 함께 축복의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망이나 불평이나 탄식을 말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부정적인 말을 하면 30배, 60배, 100배로 마귀를 끌어 들이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노리고 있는데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으면서 우리에게 들어올 통로를 찾습니다. 그 길이 뭡니까?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하고 그것이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원망해라. 불평해라. 탄식해라. 입술로 고백해라. 그 마귀의 말을 따라 그만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고 그것을 입으로 고백하면 마귀가 손바닥을 치고 왔다. 길이 열렸다. 밀물같이 밀고 들어가자. 그래서 들어와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괴로움이 꽉 들어차고 어두움이 꽉 들어차서 슬픔이 넘쳐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의 은총을 생각하고 감사 찬송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입술로 고백하면 하나님 앞에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이 저사람 봐라. 어둡고 캄캄한데 앉아있고 고통과 슬픔이 다가와도 우리에게 길을 열어 놓았다. 감사 찬송을 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생각과 말을 한다. 들어가서 도와주자. 하나님이 그 길을 통해서 오셔서 영원히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고난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죄 없는 세상, 마귀의 유혹과 시험과 더러움이 없는 세상, 병 없고, 가난 없고, 질병 없고, 고통 없고, 죽음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에 이런 모든 것은 다 이 세상의 티끌과 먼지처럼 꽉 들어찼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은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넘치게 주시고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주시고 성령을 통하여 은혜를 주시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통해서 은혜를 주시고 감사 찬양을 통해서 은혜를 주셔서 은혜로써 넉넉히 이기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죽음이냐 갈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조그만큼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넉넉히 이깁니다.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환난과 고통 없는 세상을 바라지 말고 그 가운데 언제나 십자가를 바라보고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는 밖에 내어 놓으면 죽지요. 자녀들도 과보호하면 패배자로 만들어 놓습니다. 고통스런 환경에서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은혜를 힘입어 극복하는 삶을 살 때 강하고 능력 있고 담대한 신앙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장애물이 없는 삶이 아니라 장애물을 극복하는 삶이 천국적 인격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십시오. 이를 통해서 여러분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 주셔서 은혜를 체험할 뿐 아니라 넉넉히 이기게 되고 그를 통해서 신앙이 쭉쭉 자라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시련과 환난이 없는 세계가 아니라 시험과 환난이 있을지라도 그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은혜를 받아서 이기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일에 우리가 넉넉히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시여 이기는 생활을 통해서 신앙이 자라고 경험이 자라고 능력 있는 성도가 되어서 수많은 사람을 빛으로 인도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극복하는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중국의 유명한 복음전도자 이도슝 목사님의 체험담을 들어보면 마음이 굉장히 감격적입니다. 이도슝 목사님은 워치만 니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더욱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몸이 심히 약해 30세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의사가 말했으나 하나님께 치료를 해주시도록 많이 기도했으나 응답이 없다가 하룻밤에 신기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배를 타고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한가운데 쯤 가서 큰 바위에 걸려 더 이상 배가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꿈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배가 지나가게 해 주옵소서.” 그때 하나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바위를 옮겨버릴까, 물이 불어 지나가게 할까?” 그러자 그는 대답을 했습니다. ??물이 점점 불어 지나가게 하여 주옵소서.??순식간에 물이 불어올라 그 위를 유유히 지나갔습니다. 꿈을 깬 후에 그는 깨달았습니다. ‘아! 하나님이 내 폐병과 심장병을 고쳐 주실 수도 있으시고 폐병과 심장병을 그대로 두고 이를 극복하도록 은혜를 넘치게 주실 수도 있는데 둘 중에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고 하나님이 나에게 선택을 명하시는구나.’ 그는 엎드려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비록 내가 폐병에 걸리고 협심증이라는 심장병이 있지만 이를 극복하고 더 큰일을 할 수 있도록 많은 은혜를 주신다면 오히려 낫는 것보다 병을 택하겠습니다.” 그는 평생에 폐병과 심장병으로 고생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엄청나게 임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사역을 해서 69세까지 사시다가 천국에 가시게 된 것입니다.
[본론]
1. 인생의 장애물
하나님은 고난의 장애물을 옮겨주실 때도 있으시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극복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한국가정상담연구소에서 간행되는 「행복한 우리 집」8월 호에 요즘 청소년들의 실태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교육현장에서는 요즘 청소년들을 ‘스크린 세대’, ‘게임 세대’라고 합니다. 이들은 야외로 현장학습을 가거나 직접 운동하는 것 대신에 비디오나 게임으로 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직접 움직이기보다 대리 만족을 더 좋아하는 그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어느 학교에서는 조회 시간에 학생들이 애국가를 따라 부르지 못했습니다. 반주만 녹음된 테이프를 사용하다가 노랫말까지 녹음된 것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학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 비디오가 없을 때는 성도들이 다 찬송가를 들고 와서 찬송을 잘 불렀습니다. 또 많은 찬송과 곡을 외웠습니다. 요사이 성도들은 찬송가 곡을 외우지를 못해요. 교회 오면 전부 비디오에 비취니까 비디오를 바라보고 찬송을 불렀다가 나중에는 비디오가 없고 찬송가책이 없을 때 찬송을 부르라면 외우지 못하고 입만 들썩들썩하는 것입니다.
어느 고등학교에서는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청소를 시켰더니 빗자루를 들고 가만히 서 있어서 “야! 왜 가만히 있느냐? 바닥을 쓸어라.” 그렇게 하니까 그제서야 바닥을 쓸고 모인 쓰레기를 치우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쓰레기를 쓸어 담아야지!” 라고 했는데 그제야 쓸어 담고, “쓰레기통에 넣어!”라고 할 때까지 그냥 쳐다만 보고 있다가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라고 하니까 쓰레기통에 집어넣더라는 것입니다. 오인숙 선생님은 요즘 청소년들이 이처럼 나약해진 원인에 대해 이들이 유치원을 다니기 전부터 부모가 짜놓은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세대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과보호로 “너는 유치원에 가거라. 너는 태권도장에 가라. 너는 음악연습장에 가거라. 너는 미술공부해라.” 모든 것을 부모님이 스케쥴을 짜놓고 부모들이 결정을 하고 판단을 하고 시키는데 기계적으로 순종만 했기 때문에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고 나아갈 수 있는 기능을 상실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의 과보호로 자율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시간을 관리하는 법을 배울 기회도 없고, 자율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행동할 기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는 밖에 내어 놓으면 죽습니다. 자녀들도 과보호하면 인생의 패배자가 될 따름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스런 흐느낌에서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은혜를 힘입어 극복하는 삶을 살 때 강한 능력 있는 신앙이 됩니다. 장애물이 없는 삶이 아니라 장애물을 극복하는 삶이 강한 인격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란 장애물이 너무나 많습니다. 죄는 흉악한 장애물이지만 우리로 죄 없는 세상에 살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죄 없는 곳에 살게 해 주십시오. 내 주위에서 죄를 다 없애 주십시오.” 그런 기도를 해도 응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흉악한 죄가 많습니다. 살인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찜질방에 간 여인들을 잡아서 돈을 빼앗고 죽인 사건도 최근에 일어났지 않습니까? 강간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강도, 사기, 거짓, 배반 이러한 흉한 죄악들이 주위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죄악이 없는 세상에 살면 좋겠는데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죄 없는 세상에 살게 하지 아니하시고 죄가 있어도 이를 이기고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히12: 4에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한 것입니다.
죄 없는 세상이 아니라 죄 있는 세상에서 죄와 싸워서 이기고 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히 3:13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과 세속의 더러움이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마귀도 없고 유혹도 없고 세상 더러움도 없고 고통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러한 온실 같은 세상에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리 그런 세상을 달라고 기도해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주위에 마귀가 있고 유혹이 있고 세속의 더러움이 있는 곳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가운데 네가 이것을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라고 말씀하시지 이런 유혹이 없는 세상에 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갈 5:19~21에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런 일들이 너희 가운데 있는데 이것을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천국백성으로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없는 생활 속에 살라고 말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심신의 질병과 고통은 일평생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병이 안 오면 좋겠는데 한번 병이 들면 또 다른 병이 오고 그것을 이기고 나면 또 다른 병이 오는 것입니다. 병 없는 세상에 살면 좋겠는데 그런 세상이 없어요. 문명한 나라에서는 심적인 병이 더 많습니다.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병이 많지요. 미계한 나라에서는 육체적인 병이 많습니다. 인간이 사는 동안에 항상 병은 같이 있습니다. 병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오직 병을 이기고 우리가 살도록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전 5:17에 “일평생을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많은 근심과 질병과 분노가 그에게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 14:13에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항상 웃고 즐거워하는 것만이 있는 것 같지만 그 가운데도 근심이 있고 눈물이 있고 탄식이 함께 있는 세상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삶의 시련과 환난과 가난과 실패도 늘 곁에 있습니다. 시련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환난도 없고 가난도 없고 실패도 없으면 좋겠는데 언제나 인생에는 시련과 환난과 가난과 실패가 있어요. 어느 정권이 들어와도 대통령은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자기를 믿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정권이 지나갈 때까지 믿어보아도 역시 시련과 환난과 가난과 실패가 늘 사회가운데 있는 것을 우리는 느낍니다. 이제는 어떠한 사람이 나타나서 “나 좀 믿어 주세요. 내가 잘 만들어 줄 테니까…” 해도 “웃기는 소리하네. 늘 믿어봤자. 늘 속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항상 시련과 환난과 가난과 실패가 넘쳐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없는 세상에 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있는 세상에 살면서 그것을 이기고 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짓밟혀서 패배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욥 5: 7에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
전 2:23절에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인생을 평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 세상에 사는데 육체적인 죽음과 사별의 슬픔과 고통도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안 죽으면 좋지 않겠어요?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우리 가정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세상을 뜨시고 부모님들이 세상을 뜨시고 혹은 형제들이 세상을 뜨는 죽음을 체험하고 더구나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이 죽는 사별의 가슴 아픈 슬픔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왜 태어났냐? 죽음이 없고 사별이 없고 슬픔이 없는 세상에 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없어요. 우리는 육체적인 죽음과 사별의 슬픔과 고통이 함께 있으며 이를 극복하고 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라.
히 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했습니다.
시90:10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모든 것이 우리와 함께 있는데 우리보고 극복을 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라고 하는데 짊어지고 갈 힘이 없으면 그 짐에 눌릴 수밖에 없습니다. 죄 짐을 짊어지고 세상과 슬픔을 짊어지고 질병과 좌절과 가난과 고통을 짊어지고 죽음도 짊어지고 승리하고 살수가 있게 하기 위해서는 그 힘을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냐 죽음이냐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가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죽음이나 칼이 없는 세상에 살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느 곳에 가나 환난이 있고 곤고가 있고 적신이 있고 위험이 있고 위험이 있고 기근이 있고 칼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이기고 살게 해주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이길 수 있습니까?
2.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광야를 지날 때 그들이 원망과 불평을 하다가 불뱀이 달라 들었습니다. 불뱀이 와서 수많은 사람을 물어서 죽였습니다. 불뱀의 독이 올라서 그들은 감당하지 못하고 퉁퉁 부어서 죽었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모세에게 와서 부르짖으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한즉 “불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으라. 쳐다보는 사람마다 고침을 받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뱀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불뱀이 와서 물더라도 그 독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 모세가 불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아 높이 드니까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그 장대를 쳐다보니 불뱀을 이길 수 있는 은혜가 임하여서 독이 해소되었습니다. 이제는 불뱀이 득실거리도 겁나지 않습니다. 불뱀 속에 뒹굴어도 겁나지 않습니다. 불뱀이 온몸을 감고 올라와도 겁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물어도 그 독이 아무리 몸속에 들어와도 장대에 매달린 불뱀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은혜가 와서 독을 해소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불뱀이 없는 세상을 산 것이 아니라 불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뱀의 독을 이길 수 있는 삶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유명한 율법학자인 니고데모가 한번은 밤에 예수님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니고데모를 보고 이렇게 말씀했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에 인생들은 뱀에게 물렸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뱀에게 물리고 그 후손들이 다 뱀에게 물려서 뱀의 독이 올랐습니다. 죄의 독이 올랐습니다. 더러움과 세속의 독이 올랐습니다. 병의 독이 올랐습니다. 가난과 저주와 낭패와 실망과 고통에 독이 올랐습니다. 죽음의 독이 오르고 멸망의 독이 올랐습니다. 온 세상 사람은 마귀의 독에 올라서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독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종교를 믿기도 하고 수양과 도덕을 닦기도 하고 고행을 하기도 하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독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모두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저주를 받고 절망 중에 죽어갑니다. 어떻게 이 독에서 해소될 수 있습니까? “주여! 죄를 없애 주시옵소서. 마귀와 모든 더러움을 없애 주시옵소서. 세속을 없애 주시옵소서. 세속을 없애 주시고 병을 없애 주시고 저주를 없애 주시고 가난을 없애 주시옵소서. 사망과 음부를 없애 주시옵소서.” 아무리 기도해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세세 천천 늘 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이속에 살면서 우리가 극복을 해야 됩니다. 광야에 불뱀이 와글거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뱀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장대에 불뱀을 만들어 높이 달아서 쳐다보는 자마다 불뱀의 독에서 해소된 것처럼 예수님은 오셔서 이 세상에 마귀의 독을 해소하기 위해서 친히 마귀를 안고 십자가에 올라가서 못 박아 버려 마귀의 독을 해소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를 쳐다보면 마귀의 독에서 해소될 수 있는 힘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죄의 지위인 보혈의 은혜가 십자가를 통해서 넘쳐난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물어서 죄의 독이 꽉 들어차서 죄의 포로가 될지라도 예수님 십자가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면 보혈의 능력으로 용서와 의와 영광의 은혜가 쏟아져서 마귀의 죄악의 독을 다 해소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죄가 환영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고 의롭게 살고 승리롭게 살 수 있는 은혜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면 죄를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엡 1: 7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와 세속을 멸할 성령의 은혜도 십자가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와 세속에 물려서 온갖 더러운 일을 다 하는 독의 노예가 되었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성령이 와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모든 마귀를 멸하시고 마귀의 독인 더러움을 다 제하여 버리시고 거룩함으로 채워 주셔서 승리롭게 살 수 있는 힘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요일 3: 8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귀의 일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의지할 때 십자가를 통하여 넘쳐 나오는 성령의 능력의 은혜로써 마귀의 일이 멸해지고 마귀의 역사가 우리의 삶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심신의 병을 안 당할 수 없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면 심신의 병을 치료하는 은혜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바라보면 내 몸에 어떤 병이 들어와도 이를 이길 수 있는 은혜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병을 이기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시103: 3~ 4에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셨고 벧전 2:24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주와 가난을 정복한 은혜도 십자가를 통하여 넘쳐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저주와 가난, 낭패와 실망이 늘 다가오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는 가난을 이기고 저주를 이기고 낭패와 실망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갈 3:13~14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나무에 달리므로 우리 저주를 담당하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우리에게 오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주위에 저주가 득실거리고 가난과 실망, 고통이 있더라도 십자가를 바라보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아브라함의 축복이 우리에게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 죽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 죽지요. 그러나 십자가를 쳐다보면 사망을 극복하고 부활의 생명을 얻도록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 죽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 속에 십자가를 통해서 오시면 죽음을 이기고 부활이 우리에게 채워지므로 사망은 극복되고 우리는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 5: 1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선생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사망을 조롱했습니다. 다 죽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부활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죽음을 극복해 버리고 오히려 그를 통해서 천국의 영생의 집에 들어갈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히12: 2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한 것처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므로 거기에서 넘쳐 나오는 은혜가 죄를 극복하고 마귀와 세속을 극복하고 질병을 극복하고 저주를 극복하고 죽음을 극복하고 승리롭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죄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마귀와 유혹과 더러움이 없는 세상은 없어요. 병 없는 세상도 없고 가난과 저주와 절망이 없는 세상도 없고 죽음이 없는 세상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엉망 같은 재앙의 세상 속에 살지만 우리 가운데 갈보리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모든 독을 해소하는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마귀를 멸하고 독을 해소하는 은혜의 역사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셔라. 그러면 너희 배속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즉 뱀에 물린 모든 사람들이 독에서 해소되고 승리한 것처럼 마귀의 독이 올라 죽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라본즉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와서 모든 것을 극복하고 영원히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삶을 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운명과 환경이 거칠다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운명과 환경이 아무리 거칠어도 그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기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패배하도록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없으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다 죄와 세속과 마귀와 질병과 저주와 죽음의 노예요, 그들에게 짓밟혀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높이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시므로 그 은혜를 통하여 우리는 넉넉히 이기면서 생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바울이 체험과 극복하는 신앙
사도바울 선생은 이것을 체험했습니다.
바울선생은 인간적으로도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박식했고 헬라철학을 잘 아는 분이었습니다. 당대에 놀라운 학식가요, 지식 있는 사람이요, 바리새교인이요, 명망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또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깨달았으니 교만해 질수가 있습니다. 오만해 질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울선생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었습니다. 사탄의 사자가 와서 그를 몹시 괴롭혔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든지 세 번 주님께 나가 기도했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세 번이라고 한 것은 시간을 내어서 혹은 한주일 혹은 한 달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세 번이나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이여, 이 육체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또 너무 답답해서 두 번째 시간을 내어서 금식을 하며 부르짖어 기도했으나 응답이 없었습니다. 세 번째 또 나가서 하나님께 몸부림치며 이 육체의 가시를 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했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약할 때 네가 강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육체의 가시를 제하는 것보다는 네가 약해서 내게 의지하면 내게 네게 은혜를 더할 수 있다.”고 주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성경 고후 12: 7~ 9에 있는 말씀 우리 다 같이 소리 내어 읽으십시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 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자식들을 길러보면 잘 압니다. 성공하고 잘나가는 자식은 감사하고 기쁘고 좋지요. 자랑스럽지요. 그러나 약하고 성공하지 못하고 패배한 자식은 아버지, 엄마에게 매달립니다. 아버지 허리를 잡고 매달리고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날 살려달라고 매달립니다. 그러면 잘나가는 자식은 감사하고 기뻐서 자랑스럽지만 못나고 약하고 의지하는 이 자식은 부모가 버릴 수가 없어서 있는 것 없는 것 다주고 끝까지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 자식이 없어야 되겠지만 있으면 부모님은 눈을 감을 때까지 그 자식을 위해서 온갖 것을 다주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왜, 약하니까. 부모 없이 살지 못하니까 부모가 그 자식을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약할 때 우리가 주님께 늘 부르짖어 기도하고 의지하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잘나간다고 해서 주님 필요하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고 혼자 나가면 주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게 만들어야 되겠고 주님께 의지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를 약하게 만들어야 의지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이 다가와서 우리가 마음이 약해지고 몸이 약해져서 고통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결사적으로 주님께 매달리지요. 주님이 그때를 사용해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은혜 속에 살기 위해서는 첫째로 극복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고 주님의 은혜의 말씀이 마음속에 거하도록 늘 묵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환경은 언제나 소용돌이 칩니다. 환경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해서는 별효과가 없습니다. 바람 불고 비가 내리고 춥고 눈보라치는 변화되지 않아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이것을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이기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더위도 이기고 추위도 이기고 눈보라도 이기고 비바람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없애달라고 하는 것보다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기는 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말씀을 주셔서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보배로운 말씀은 우리가 모든 원수와 환경을 이길 수 있는 무기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고 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이 마음속에 깊이 거하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시 1: 2~ 3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오직 야훼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율법의 말씀 즉, 성경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서 마음속에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용서의 말씀을, 불결에 대해서는 성령의 임재하심을 병은 치료의 말씀을, 가난과 낭패와 실망은 축복의 말씀을, 죽음은 부활의 말씀을… 해당되는 말씀들을 마음속에 묵상하고 말씀이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마음을 점령하고 있으면 그 말씀이 힘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죽든지 살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아무것도 안보이고 안 들리고 캄캄해도 말씀이 중심에 있으면 말씀이 은혜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119:92에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시23: 4~ 5을 늘 묵상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제가 살아가는 동안에 크고 작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수없이 지납니다. 그때는 눈앞에 캄캄합니다.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같이 계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말씀이 그것을 약속했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주님이 같이 계신 것을 알고 주님께 기도할 때 주님은 지팡이로 길을 만들어 주시고 막대기로 보호해 주시고 해를 받지 않고 나오도록 두려움을 해소해 주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안을 갖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일은 주님이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 나와 같이 계신 것을 알 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마음을 점령하면 어떠한 캄캄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우리는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말씀의 은혜가 마음을 점령해 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가운데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 제일 많이 알려진 사람 중 하나가 존 번연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다가 핍박을 받아 투옥 되었습니다. 활동적인 사람이 수감되어 감방에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답답하기가 그지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건져 주소서. 이 감옥에서 저를 꺼내 주소서.” 시간만 나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감옥생활이 지옥과 같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상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은혜가 족하다. 내 은혜가 족하다. 내 은혜가 족하다.” 세 번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번연은 ‘아, 내가 이렇게 감방에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내게 족한 은혜를 주시는구나. 이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이것을 깨닫자마자 마음이 밝아지고 편안해지더니만 그렇게 지옥 같은 감방이 내 안방처럼 보였습니다. 너무나 평안하고 좋았습니다. 사람 찾아올 사람 없고 찾아갈 사람도 없고 조용하게 앉아서 주님과 대화하고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주의 말씀이 마음속에 들어오기 전에는 감방이 지옥 같고 고통스러웠는데 주의 말씀이 마음속에 임하자마자 너무나 평안하고 행복하고 그 감방이 안방 같았습니다. 그는 감방에서 12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지만 날마다 주님과 깊은 기도의 교제를 나누며 말씀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해서 지은 책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천로역정」입니다. 그는 실제로 밖에 나가서 목회한 것보다도 12년 감옥살이에서 천로역정을 지음으로 온 세계를 뛰어넘어 전 세계에 이 책이 읽혀지고 수많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는 역사를 베풀어 준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스런 흐느낌에서 주 예수를 바라보고 그 은혜를 힘입어 고난을 극복하는 삶을 살 때 강하고 능력 있는 신앙인의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동화작가인 정채봉씨가 지은 글 중에서 이런 글이 있습니다. 콩 형제가 있었습니다. 이름이 콩가가 아니고 먹는 콩 말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이 콩 형제가 둘이가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데 콩 형이 “나는 들에 가서 살래.” 그러니까 동생이 “아니야. 나는 방안에서 살래.” 그래서 콩 형은 들에 나가서 햇빛을 받고 비바람을 맞으면서 큰 콩 나무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햇빛도 받지 않고 비도 맞지 않은 방안에서 고요히 자란 동생 콩은 콩나물이 되어서 노랗게 올라와서 반찬이 되고 만 것입니다. 똑같은 콩이지만 비바람을 맞고 햇빛을 비취고 풍랑을 만나면서 자라는 것은 나무가 되나 온실에서 자라는 것은 콩나물이 되어서 노랗게 되어서 밥상에 올라가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콩나무가 되고 콩나물이 되지 마십시오.
둘째로, 우리가 은혜로써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늘 간구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놓지 않고 도와주는 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나 홀로면 넘어지고 일어날 수 없으나 둘이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혼자 누우면 추우나 두 사람이 누우면 따뜻하잖아요. 삼겹실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하물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일체 중에 제 삼위인 성령이 우리를 돕는 자로 와계신 것입니다. 보혜사가 뭡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곁에 계신 분인 것입니다. 성령은 지금 이 자리에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신 것입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이 우리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우리가 항상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하고 감사하고 예배하면 성령이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종이 한 장은 손으로 뚫을 수 있지만 종이를 이 강단에 붙여놓고 손가락으로 뚫어 보십시오. 안 뚫립니다. 나 혼자는 망하겠거니와 성령이 같이 계시면 결코 망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놓지 아니하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와 더불어 같이 계시므로 초기적적인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롬 8:26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혼자 있는 사람이 아니요, 버림받은 사람도 아니요, 고아도 아니요 하나님의 영 성령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 성령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외롭지 않습니다. 혼자 있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계십니다. 성령이 나의 보혜사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면 우리는 은혜로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들은 주님을 순간순간마다 의지하고 주님에게 맡기는 믿음의 결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항상 믿음이 꽉 들어차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어려움이 다가올 때 그때 내가 환경을 바라볼 것이냐, 믿을 것이냐, 감각을 의지할 것이냐, 믿음을 의지할 것이냐, 느낌을 의지할 것이냐, 믿음을 의지할 것이냐. 결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순간순간마다 내가 죄가 다가오면 주님을 의지해서 의로써 이기고 질병이 다가오면 치료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질병을 이기고 고난이 다가오면 축복을 의지하고 고난을 이기고 죽음이 다가오면 부활의 믿음을 의지해서 이기는 순간순간마다 믿음의 결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다가지고 있지만 믿고 안 믿는 결단은 여러분이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환경을 따를 것이냐, 믿음을 따를 것이냐, 감각을 따를 것이냐, 믿음을 따를 것이냐, 느낌을 따를 것이냐, 믿음을 따를 것이냐는 내가 결단합니다.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갈 때 예수님을 바라보기로 결단했을 때는 베드로가 결정을 내린 믿음입니다. 그러나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바람과 파도를 보고 두려워하는 것도 베드로의 선택인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물에 빠진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을 순간순간마다 결단을 내리고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맡기고 믿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히10:38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서 살기 위해서는 믿음의 결단을 내리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는 불안이나 부정적인 생각이나 말을 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텅 비워 놓으면 온갖 두려운 영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빈 마음은 마귀의 공장입니다. 마음을 비워 놓으면 온갖 불안과 공포가 다 들어옵니다. “내가 죽겠지. 망하겠지. 패배하겠지. 불행이 다가오겠지. 절망이 다가오겠지.” 온갖 부정적인 것이 다 다가옵니다. 우리의 빈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으로 채워 놓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하는 마음속에 아버지와 아들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들어와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눈물을 흘리면서도 감사하고, 탄식하면서도 감사하고, 가슴을 치면서도 감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있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했는데 감사하는 말을 혀로써 자꾸 말하면 혀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노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때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들이는 전기코드인 것입니다. 감사가 있어야 하나님이 임하여 역사하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마귀를 끌어들이는 코드인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을 하면 그를 타고 마귀가 오고 감사와 찬양을 하면 그를 타고 하나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를 받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일에 감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살전 5:16~18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한 것처럼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하면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종교가로 유명한 기도의 사람이었던 로우 목사는 만족과 행복을 가장 빠르게 찾는 비결은 범사에 감사하는데 있다며 말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인생의 행복과 만족을 찾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에 대하여 무조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고 대답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고난 앞에서 불행이나 부정적인 생각이나 말을 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고난을 극복할 힘과 함께 축복의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망이나 불평이나 탄식을 말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부정적인 말을 하면 30배, 60배, 100배로 마귀를 끌어 들이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노리고 있는데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으면서 우리에게 들어올 통로를 찾습니다. 그 길이 뭡니까?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하고 그것이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원망해라. 불평해라. 탄식해라. 입술로 고백해라. 그 마귀의 말을 따라 그만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고 그것을 입으로 고백하면 마귀가 손바닥을 치고 왔다. 길이 열렸다. 밀물같이 밀고 들어가자. 그래서 들어와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괴로움이 꽉 들어차고 어두움이 꽉 들어차서 슬픔이 넘쳐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의 은총을 생각하고 감사 찬송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입술로 고백하면 하나님 앞에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이 저사람 봐라. 어둡고 캄캄한데 앉아있고 고통과 슬픔이 다가와도 우리에게 길을 열어 놓았다. 감사 찬송을 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생각과 말을 한다. 들어가서 도와주자. 하나님이 그 길을 통해서 오셔서 영원히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고난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죄 없는 세상, 마귀의 유혹과 시험과 더러움이 없는 세상, 병 없고, 가난 없고, 질병 없고, 고통 없고, 죽음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에 이런 모든 것은 다 이 세상의 티끌과 먼지처럼 꽉 들어찼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은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넘치게 주시고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주시고 성령을 통하여 은혜를 주시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통해서 은혜를 주시고 감사 찬양을 통해서 은혜를 주셔서 은혜로써 넉넉히 이기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죽음이냐 갈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조그만큼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넉넉히 이깁니다.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환난과 고통 없는 세상을 바라지 말고 그 가운데 언제나 십자가를 바라보고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는 밖에 내어 놓으면 죽지요. 자녀들도 과보호하면 패배자로 만들어 놓습니다. 고통스런 환경에서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은혜를 힘입어 극복하는 삶을 살 때 강하고 능력 있고 담대한 신앙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장애물이 없는 삶이 아니라 장애물을 극복하는 삶이 천국적 인격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십시오. 이를 통해서 여러분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 주셔서 은혜를 체험할 뿐 아니라 넉넉히 이기게 되고 그를 통해서 신앙이 쭉쭉 자라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시련과 환난이 없는 세계가 아니라 시험과 환난이 있을지라도 그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은혜를 받아서 이기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일에 우리가 넉넉히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시여 이기는 생활을 통해서 신앙이 자라고 경험이 자라고 능력 있는 성도가 되어서 수많은 사람을 빛으로 인도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일 시 : 2006년 8월 13일 주일3부 설교
제 목 : 극복하는 신앙
설 교 : 조 용 기 목사
말 씀 : 고후12: 7~ 9
-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극복하는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중국의 유명한 복음전도자 이도슝 목사님의 체험담을 들어보면 마음이 굉장히 감격적입니다. 이도슝 목사님은 워치만 니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더욱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몸이 심히 약해 30세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의사가 말했으나 하나님께 치료를 해주시도록 많이 기도했으나 응답이 없다가 하룻밤에 신기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배를 타고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한가운데 쯤 가서 큰 바위에 걸려 더 이상 배가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꿈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배가 지나가게 해 주옵소서.” 그때 하나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바위를 옮겨버릴까, 물이 불어 지나가게 할까?” 그러자 그는 대답을 했습니다. ??물이 점점 불어 지나가게 하여 주옵소서.??순식간에 물이 불어올라 그 위를 유유히 지나갔습니다. 꿈을 깬 후에 그는 깨달았습니다. ‘아! 하나님이 내 폐병과 심장병을 고쳐 주실 수도 있으시고 폐병과 심장병을 그대로 두고 이를 극복하도록 은혜를 넘치게 주실 수도 있는데 둘 중에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고 하나님이 나에게 선택을 명하시는구나.’ 그는 엎드려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비록 내가 폐병에 걸리고 협심증이라는 심장병이 있지만 이를 극복하고 더 큰일을 할 수 있도록 많은 은혜를 주신다면 오히려 낫는 것보다 병을 택하겠습니다.” 그는 평생에 폐병과 심장병으로 고생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엄청나게 임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사역을 해서 69세까지 사시다가 천국에 가시게 된 것입니다.
[본론]
1. 인생의 장애물
하나님은 고난의 장애물을 옮겨주실 때도 있으시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극복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한국가정상담연구소에서 간행되는 「행복한 우리 집」8월 호에 요즘 청소년들의 실태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교육현장에서는 요즘 청소년들을 ‘스크린 세대’, ‘게임 세대’라고 합니다. 이들은 야외로 현장학습을 가거나 직접 운동하는 것 대신에 비디오나 게임으로 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직접 움직이기보다 대리 만족을 더 좋아하는 그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어느 학교에서는 조회 시간에 학생들이 애국가를 따라 부르지 못했습니다. 반주만 녹음된 테이프를 사용하다가 노랫말까지 녹음된 것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학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 비디오가 없을 때는 성도들이 다 찬송가를 들고 와서 찬송을 잘 불렀습니다. 또 많은 찬송과 곡을 외웠습니다. 요사이 성도들은 찬송가 곡을 외우지를 못해요. 교회 오면 전부 비디오에 비취니까 비디오를 바라보고 찬송을 불렀다가 나중에는 비디오가 없고 찬송가책이 없을 때 찬송을 부르라면 외우지 못하고 입만 들썩들썩하는 것입니다.
어느 고등학교에서는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청소를 시켰더니 빗자루를 들고 가만히 서 있어서 “야! 왜 가만히 있느냐? 바닥을 쓸어라.” 그렇게 하니까 그제서야 바닥을 쓸고 모인 쓰레기를 치우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쓰레기를 쓸어 담아야지!” 라고 했는데 그제야 쓸어 담고, “쓰레기통에 넣어!”라고 할 때까지 그냥 쳐다만 보고 있다가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라고 하니까 쓰레기통에 집어넣더라는 것입니다. 오인숙 선생님은 요즘 청소년들이 이처럼 나약해진 원인에 대해 이들이 유치원을 다니기 전부터 부모가 짜놓은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세대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과보호로 “너는 유치원에 가거라. 너는 태권도장에 가라. 너는 음악연습장에 가거라. 너는 미술공부해라.” 모든 것을 부모님이 스케쥴을 짜놓고 부모들이 결정을 하고 판단을 하고 시키는데 기계적으로 순종만 했기 때문에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고 나아갈 수 있는 기능을 상실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의 과보호로 자율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시간을 관리하는 법을 배울 기회도 없고, 자율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행동할 기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는 밖에 내어 놓으면 죽습니다. 자녀들도 과보호하면 인생의 패배자가 될 따름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스런 흐느낌에서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은혜를 힘입어 극복하는 삶을 살 때 강한 능력 있는 신앙이 됩니다. 장애물이 없는 삶이 아니라 장애물을 극복하는 삶이 강한 인격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란 장애물이 너무나 많습니다. 죄는 흉악한 장애물이지만 우리로 죄 없는 세상에 살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죄 없는 곳에 살게 해 주십시오. 내 주위에서 죄를 다 없애 주십시오.” 그런 기도를 해도 응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흉악한 죄가 많습니다. 살인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찜질방에 간 여인들을 잡아서 돈을 빼앗고 죽인 사건도 최근에 일어났지 않습니까? 강간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강도, 사기, 거짓, 배반 이러한 흉한 죄악들이 주위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죄악이 없는 세상에 살면 좋겠는데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죄 없는 세상에 살게 하지 아니하시고 죄가 있어도 이를 이기고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히12: 4에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한 것입니다.
죄 없는 세상이 아니라 죄 있는 세상에서 죄와 싸워서 이기고 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히 3:13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과 세속의 더러움이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마귀도 없고 유혹도 없고 세상 더러움도 없고 고통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러한 온실 같은 세상에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리 그런 세상을 달라고 기도해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주위에 마귀가 있고 유혹이 있고 세속의 더러움이 있는 곳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가운데 네가 이것을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라고 말씀하시지 이런 유혹이 없는 세상에 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갈 5:19~21에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런 일들이 너희 가운데 있는데 이것을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천국백성으로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없는 생활 속에 살라고 말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심신의 질병과 고통은 일평생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병이 안 오면 좋겠는데 한번 병이 들면 또 다른 병이 오고 그것을 이기고 나면 또 다른 병이 오는 것입니다. 병 없는 세상에 살면 좋겠는데 그런 세상이 없어요. 문명한 나라에서는 심적인 병이 더 많습니다.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병이 많지요. 미계한 나라에서는 육체적인 병이 많습니다. 인간이 사는 동안에 항상 병은 같이 있습니다. 병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오직 병을 이기고 우리가 살도록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전 5:17에 “일평생을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많은 근심과 질병과 분노가 그에게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 14:13에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항상 웃고 즐거워하는 것만이 있는 것 같지만 그 가운데도 근심이 있고 눈물이 있고 탄식이 함께 있는 세상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삶의 시련과 환난과 가난과 실패도 늘 곁에 있습니다. 시련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환난도 없고 가난도 없고 실패도 없으면 좋겠는데 언제나 인생에는 시련과 환난과 가난과 실패가 있어요. 어느 정권이 들어와도 대통령은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자기를 믿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정권이 지나갈 때까지 믿어보아도 역시 시련과 환난과 가난과 실패가 늘 사회가운데 있는 것을 우리는 느낍니다. 이제는 어떠한 사람이 나타나서 “나 좀 믿어 주세요. 내가 잘 만들어 줄 테니까…” 해도 “웃기는 소리하네. 늘 믿어봤자. 늘 속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항상 시련과 환난과 가난과 실패가 넘쳐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없는 세상에 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있는 세상에 살면서 그것을 이기고 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짓밟혀서 패배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욥 5: 7에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
전 2:23절에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인생을 평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 세상에 사는데 육체적인 죽음과 사별의 슬픔과 고통도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안 죽으면 좋지 않겠어요?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우리 가정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세상을 뜨시고 부모님들이 세상을 뜨시고 혹은 형제들이 세상을 뜨는 죽음을 체험하고 더구나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이 죽는 사별의 가슴 아픈 슬픔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왜 태어났냐? 죽음이 없고 사별이 없고 슬픔이 없는 세상에 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없어요. 우리는 육체적인 죽음과 사별의 슬픔과 고통이 함께 있으며 이를 극복하고 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라.
히 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했습니다.
시90:10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모든 것이 우리와 함께 있는데 우리보고 극복을 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라고 하는데 짊어지고 갈 힘이 없으면 그 짐에 눌릴 수밖에 없습니다. 죄 짐을 짊어지고 세상과 슬픔을 짊어지고 질병과 좌절과 가난과 고통을 짊어지고 죽음도 짊어지고 승리하고 살수가 있게 하기 위해서는 그 힘을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냐 죽음이냐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가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죽음이나 칼이 없는 세상에 살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느 곳에 가나 환난이 있고 곤고가 있고 적신이 있고 위험이 있고 위험이 있고 기근이 있고 칼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이기고 살게 해주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이길 수 있습니까?
2.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광야를 지날 때 그들이 원망과 불평을 하다가 불뱀이 달라 들었습니다. 불뱀이 와서 수많은 사람을 물어서 죽였습니다. 불뱀의 독이 올라서 그들은 감당하지 못하고 퉁퉁 부어서 죽었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모세에게 와서 부르짖으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한즉 “불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으라. 쳐다보는 사람마다 고침을 받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뱀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불뱀이 와서 물더라도 그 독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 모세가 불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아 높이 드니까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그 장대를 쳐다보니 불뱀을 이길 수 있는 은혜가 임하여서 독이 해소되었습니다. 이제는 불뱀이 득실거리도 겁나지 않습니다. 불뱀 속에 뒹굴어도 겁나지 않습니다. 불뱀이 온몸을 감고 올라와도 겁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물어도 그 독이 아무리 몸속에 들어와도 장대에 매달린 불뱀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은혜가 와서 독을 해소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불뱀이 없는 세상을 산 것이 아니라 불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뱀의 독을 이길 수 있는 삶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유명한 율법학자인 니고데모가 한번은 밤에 예수님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니고데모를 보고 이렇게 말씀했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에 인생들은 뱀에게 물렸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뱀에게 물리고 그 후손들이 다 뱀에게 물려서 뱀의 독이 올랐습니다. 죄의 독이 올랐습니다. 더러움과 세속의 독이 올랐습니다. 병의 독이 올랐습니다. 가난과 저주와 낭패와 실망과 고통에 독이 올랐습니다. 죽음의 독이 오르고 멸망의 독이 올랐습니다. 온 세상 사람은 마귀의 독에 올라서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독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종교를 믿기도 하고 수양과 도덕을 닦기도 하고 고행을 하기도 하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독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모두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저주를 받고 절망 중에 죽어갑니다. 어떻게 이 독에서 해소될 수 있습니까? “주여! 죄를 없애 주시옵소서. 마귀와 모든 더러움을 없애 주시옵소서. 세속을 없애 주시옵소서. 세속을 없애 주시고 병을 없애 주시고 저주를 없애 주시고 가난을 없애 주시옵소서. 사망과 음부를 없애 주시옵소서.” 아무리 기도해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세세 천천 늘 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이속에 살면서 우리가 극복을 해야 됩니다. 광야에 불뱀이 와글거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뱀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장대에 불뱀을 만들어 높이 달아서 쳐다보는 자마다 불뱀의 독에서 해소된 것처럼 예수님은 오셔서 이 세상에 마귀의 독을 해소하기 위해서 친히 마귀를 안고 십자가에 올라가서 못 박아 버려 마귀의 독을 해소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를 쳐다보면 마귀의 독에서 해소될 수 있는 힘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죄의 지위인 보혈의 은혜가 십자가를 통해서 넘쳐난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물어서 죄의 독이 꽉 들어차서 죄의 포로가 될지라도 예수님 십자가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면 보혈의 능력으로 용서와 의와 영광의 은혜가 쏟아져서 마귀의 죄악의 독을 다 해소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죄가 환영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고 의롭게 살고 승리롭게 살 수 있는 은혜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면 죄를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엡 1: 7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와 세속을 멸할 성령의 은혜도 십자가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와 세속에 물려서 온갖 더러운 일을 다 하는 독의 노예가 되었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성령이 와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모든 마귀를 멸하시고 마귀의 독인 더러움을 다 제하여 버리시고 거룩함으로 채워 주셔서 승리롭게 살 수 있는 힘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요일 3: 8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귀의 일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의지할 때 십자가를 통하여 넘쳐 나오는 성령의 능력의 은혜로써 마귀의 일이 멸해지고 마귀의 역사가 우리의 삶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심신의 병을 안 당할 수 없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면 심신의 병을 치료하는 은혜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바라보면 내 몸에 어떤 병이 들어와도 이를 이길 수 있는 은혜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병을 이기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시103: 3~ 4에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셨고 벧전 2:24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주와 가난을 정복한 은혜도 십자가를 통하여 넘쳐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저주와 가난, 낭패와 실망이 늘 다가오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는 가난을 이기고 저주를 이기고 낭패와 실망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갈 3:13~14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나무에 달리므로 우리 저주를 담당하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우리에게 오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주위에 저주가 득실거리고 가난과 실망, 고통이 있더라도 십자가를 바라보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아브라함의 축복이 우리에게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 죽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 죽지요. 그러나 십자가를 쳐다보면 사망을 극복하고 부활의 생명을 얻도록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 죽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 속에 십자가를 통해서 오시면 죽음을 이기고 부활이 우리에게 채워지므로 사망은 극복되고 우리는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 5: 1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선생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사망을 조롱했습니다. 다 죽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부활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죽음을 극복해 버리고 오히려 그를 통해서 천국의 영생의 집에 들어갈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히12: 2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한 것처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므로 거기에서 넘쳐 나오는 은혜가 죄를 극복하고 마귀와 세속을 극복하고 질병을 극복하고 저주를 극복하고 죽음을 극복하고 승리롭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죄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마귀와 유혹과 더러움이 없는 세상은 없어요. 병 없는 세상도 없고 가난과 저주와 절망이 없는 세상도 없고 죽음이 없는 세상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엉망 같은 재앙의 세상 속에 살지만 우리 가운데 갈보리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모든 독을 해소하는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마귀를 멸하고 독을 해소하는 은혜의 역사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셔라. 그러면 너희 배속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즉 뱀에 물린 모든 사람들이 독에서 해소되고 승리한 것처럼 마귀의 독이 올라 죽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라본즉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와서 모든 것을 극복하고 영원히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삶을 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운명과 환경이 거칠다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운명과 환경이 아무리 거칠어도 그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기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패배하도록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없으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다 죄와 세속과 마귀와 질병과 저주와 죽음의 노예요, 그들에게 짓밟혀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높이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시므로 그 은혜를 통하여 우리는 넉넉히 이기면서 생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바울이 체험과 극복하는 신앙
사도바울 선생은 이것을 체험했습니다.
바울선생은 인간적으로도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박식했고 헬라철학을 잘 아는 분이었습니다. 당대에 놀라운 학식가요, 지식 있는 사람이요, 바리새교인이요, 명망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또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깨달았으니 교만해 질수가 있습니다. 오만해 질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울선생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었습니다. 사탄의 사자가 와서 그를 몹시 괴롭혔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든지 세 번 주님께 나가 기도했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세 번이라고 한 것은 시간을 내어서 혹은 한주일 혹은 한 달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세 번이나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이여, 이 육체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또 너무 답답해서 두 번째 시간을 내어서 금식을 하며 부르짖어 기도했으나 응답이 없었습니다. 세 번째 또 나가서 하나님께 몸부림치며 이 육체의 가시를 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했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약할 때 네가 강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육체의 가시를 제하는 것보다는 네가 약해서 내게 의지하면 내게 네게 은혜를 더할 수 있다.”고 주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성경 고후 12: 7~ 9에 있는 말씀 우리 다 같이 소리 내어 읽으십시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 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자식들을 길러보면 잘 압니다. 성공하고 잘나가는 자식은 감사하고 기쁘고 좋지요. 자랑스럽지요. 그러나 약하고 성공하지 못하고 패배한 자식은 아버지, 엄마에게 매달립니다. 아버지 허리를 잡고 매달리고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날 살려달라고 매달립니다. 그러면 잘나가는 자식은 감사하고 기뻐서 자랑스럽지만 못나고 약하고 의지하는 이 자식은 부모가 버릴 수가 없어서 있는 것 없는 것 다주고 끝까지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 자식이 없어야 되겠지만 있으면 부모님은 눈을 감을 때까지 그 자식을 위해서 온갖 것을 다주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왜, 약하니까. 부모 없이 살지 못하니까 부모가 그 자식을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약할 때 우리가 주님께 늘 부르짖어 기도하고 의지하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잘나간다고 해서 주님 필요하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고 혼자 나가면 주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게 만들어야 되겠고 주님께 의지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를 약하게 만들어야 의지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이 다가와서 우리가 마음이 약해지고 몸이 약해져서 고통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결사적으로 주님께 매달리지요. 주님이 그때를 사용해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은혜 속에 살기 위해서는 첫째로 극복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고 주님의 은혜의 말씀이 마음속에 거하도록 늘 묵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환경은 언제나 소용돌이 칩니다. 환경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해서는 별효과가 없습니다. 바람 불고 비가 내리고 춥고 눈보라치는 변화되지 않아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이것을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이기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더위도 이기고 추위도 이기고 눈보라도 이기고 비바람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없애달라고 하는 것보다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기는 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말씀을 주셔서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보배로운 말씀은 우리가 모든 원수와 환경을 이길 수 있는 무기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고 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이 마음속에 깊이 거하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시 1: 2~ 3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오직 야훼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율법의 말씀 즉, 성경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서 마음속에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용서의 말씀을, 불결에 대해서는 성령의 임재하심을 병은 치료의 말씀을, 가난과 낭패와 실망은 축복의 말씀을, 죽음은 부활의 말씀을… 해당되는 말씀들을 마음속에 묵상하고 말씀이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마음을 점령하고 있으면 그 말씀이 힘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죽든지 살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아무것도 안보이고 안 들리고 캄캄해도 말씀이 중심에 있으면 말씀이 은혜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119:92에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시23: 4~ 5을 늘 묵상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제가 살아가는 동안에 크고 작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수없이 지납니다. 그때는 눈앞에 캄캄합니다.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같이 계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말씀이 그것을 약속했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주님이 같이 계신 것을 알고 주님께 기도할 때 주님은 지팡이로 길을 만들어 주시고 막대기로 보호해 주시고 해를 받지 않고 나오도록 두려움을 해소해 주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안을 갖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일은 주님이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 나와 같이 계신 것을 알 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마음을 점령하면 어떠한 캄캄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우리는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말씀의 은혜가 마음을 점령해 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가운데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 제일 많이 알려진 사람 중 하나가 존 번연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다가 핍박을 받아 투옥 되었습니다. 활동적인 사람이 수감되어 감방에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답답하기가 그지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건져 주소서. 이 감옥에서 저를 꺼내 주소서.” 시간만 나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감옥생활이 지옥과 같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상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은혜가 족하다. 내 은혜가 족하다. 내 은혜가 족하다.” 세 번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번연은 ‘아, 내가 이렇게 감방에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내게 족한 은혜를 주시는구나. 이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이것을 깨닫자마자 마음이 밝아지고 편안해지더니만 그렇게 지옥 같은 감방이 내 안방처럼 보였습니다. 너무나 평안하고 좋았습니다. 사람 찾아올 사람 없고 찾아갈 사람도 없고 조용하게 앉아서 주님과 대화하고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주의 말씀이 마음속에 들어오기 전에는 감방이 지옥 같고 고통스러웠는데 주의 말씀이 마음속에 임하자마자 너무나 평안하고 행복하고 그 감방이 안방 같았습니다. 그는 감방에서 12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지만 날마다 주님과 깊은 기도의 교제를 나누며 말씀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해서 지은 책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천로역정」입니다. 그는 실제로 밖에 나가서 목회한 것보다도 12년 감옥살이에서 천로역정을 지음으로 온 세계를 뛰어넘어 전 세계에 이 책이 읽혀지고 수많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는 역사를 베풀어 준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스런 흐느낌에서 주 예수를 바라보고 그 은혜를 힘입어 고난을 극복하는 삶을 살 때 강하고 능력 있는 신앙인의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동화작가인 정채봉씨가 지은 글 중에서 이런 글이 있습니다. 콩 형제가 있었습니다. 이름이 콩가가 아니고 먹는 콩 말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이 콩 형제가 둘이가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데 콩 형이 “나는 들에 가서 살래.” 그러니까 동생이 “아니야. 나는 방안에서 살래.” 그래서 콩 형은 들에 나가서 햇빛을 받고 비바람을 맞으면서 큰 콩 나무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햇빛도 받지 않고 비도 맞지 않은 방안에서 고요히 자란 동생 콩은 콩나물이 되어서 노랗게 올라와서 반찬이 되고 만 것입니다. 똑같은 콩이지만 비바람을 맞고 햇빛을 비취고 풍랑을 만나면서 자라는 것은 나무가 되나 온실에서 자라는 것은 콩나물이 되어서 노랗게 되어서 밥상에 올라가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콩나무가 되고 콩나물이 되지 마십시오.
둘째로, 우리가 은혜로써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늘 간구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놓지 않고 도와주는 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나 홀로면 넘어지고 일어날 수 없으나 둘이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혼자 누우면 추우나 두 사람이 누우면 따뜻하잖아요. 삼겹실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하물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일체 중에 제 삼위인 성령이 우리를 돕는 자로 와계신 것입니다. 보혜사가 뭡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곁에 계신 분인 것입니다. 성령은 지금 이 자리에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신 것입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이 우리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우리가 항상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하고 감사하고 예배하면 성령이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종이 한 장은 손으로 뚫을 수 있지만 종이를 이 강단에 붙여놓고 손가락으로 뚫어 보십시오. 안 뚫립니다. 나 혼자는 망하겠거니와 성령이 같이 계시면 결코 망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놓지 아니하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와 더불어 같이 계시므로 초기적적인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롬 8:26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혼자 있는 사람이 아니요, 버림받은 사람도 아니요, 고아도 아니요 하나님의 영 성령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 성령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외롭지 않습니다. 혼자 있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계십니다. 성령이 나의 보혜사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면 우리는 은혜로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들은 주님을 순간순간마다 의지하고 주님에게 맡기는 믿음의 결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항상 믿음이 꽉 들어차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어려움이 다가올 때 그때 내가 환경을 바라볼 것이냐, 믿을 것이냐, 감각을 의지할 것이냐, 믿음을 의지할 것이냐, 느낌을 의지할 것이냐, 믿음을 의지할 것이냐. 결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순간순간마다 내가 죄가 다가오면 주님을 의지해서 의로써 이기고 질병이 다가오면 치료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질병을 이기고 고난이 다가오면 축복을 의지하고 고난을 이기고 죽음이 다가오면 부활의 믿음을 의지해서 이기는 순간순간마다 믿음의 결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다가지고 있지만 믿고 안 믿는 결단은 여러분이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환경을 따를 것이냐, 믿음을 따를 것이냐, 감각을 따를 것이냐, 믿음을 따를 것이냐, 느낌을 따를 것이냐, 믿음을 따를 것이냐는 내가 결단합니다.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갈 때 예수님을 바라보기로 결단했을 때는 베드로가 결정을 내린 믿음입니다. 그러나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바람과 파도를 보고 두려워하는 것도 베드로의 선택인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물에 빠진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을 순간순간마다 결단을 내리고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맡기고 믿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히10:38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서 살기 위해서는 믿음의 결단을 내리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는 불안이나 부정적인 생각이나 말을 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텅 비워 놓으면 온갖 두려운 영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빈 마음은 마귀의 공장입니다. 마음을 비워 놓으면 온갖 불안과 공포가 다 들어옵니다. “내가 죽겠지. 망하겠지. 패배하겠지. 불행이 다가오겠지. 절망이 다가오겠지.” 온갖 부정적인 것이 다 다가옵니다. 우리의 빈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으로 채워 놓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하는 마음속에 아버지와 아들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들어와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눈물을 흘리면서도 감사하고, 탄식하면서도 감사하고, 가슴을 치면서도 감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있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했는데 감사하는 말을 혀로써 자꾸 말하면 혀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노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때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들이는 전기코드인 것입니다. 감사가 있어야 하나님이 임하여 역사하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마귀를 끌어들이는 코드인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을 하면 그를 타고 마귀가 오고 감사와 찬양을 하면 그를 타고 하나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를 받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일에 감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살전 5:16~18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한 것처럼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하면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종교가로 유명한 기도의 사람이었던 로우 목사는 만족과 행복을 가장 빠르게 찾는 비결은 범사에 감사하는데 있다며 말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인생의 행복과 만족을 찾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에 대하여 무조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고 대답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고난 앞에서 불행이나 부정적인 생각이나 말을 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고난을 극복할 힘과 함께 축복의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망이나 불평이나 탄식을 말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부정적인 말을 하면 30배, 60배, 100배로 마귀를 끌어 들이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노리고 있는데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으면서 우리에게 들어올 통로를 찾습니다. 그 길이 뭡니까?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하고 그것이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원망해라. 불평해라. 탄식해라. 입술로 고백해라. 그 마귀의 말을 따라 그만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고 그것을 입으로 고백하면 마귀가 손바닥을 치고 왔다. 길이 열렸다. 밀물같이 밀고 들어가자. 그래서 들어와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괴로움이 꽉 들어차고 어두움이 꽉 들어차서 슬픔이 넘쳐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의 은총을 생각하고 감사 찬송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입술로 고백하면 하나님 앞에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이 저사람 봐라. 어둡고 캄캄한데 앉아있고 고통과 슬픔이 다가와도 우리에게 길을 열어 놓았다. 감사 찬송을 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생각과 말을 한다. 들어가서 도와주자. 하나님이 그 길을 통해서 오셔서 영원히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고난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죄 없는 세상, 마귀의 유혹과 시험과 더러움이 없는 세상, 병 없고, 가난 없고, 질병 없고, 고통 없고, 죽음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에 이런 모든 것은 다 이 세상의 티끌과 먼지처럼 꽉 들어찼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은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넘치게 주시고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주시고 성령을 통하여 은혜를 주시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통해서 은혜를 주시고 감사 찬양을 통해서 은혜를 주셔서 은혜로써 넉넉히 이기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죽음이냐 갈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조그만큼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넉넉히 이깁니다.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환난과 고통 없는 세상을 바라지 말고 그 가운데 언제나 십자가를 바라보고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는 밖에 내어 놓으면 죽지요. 자녀들도 과보호하면 패배자로 만들어 놓습니다. 고통스런 환경에서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은혜를 힘입어 극복하는 삶을 살 때 강하고 능력 있고 담대한 신앙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장애물이 없는 삶이 아니라 장애물을 극복하는 삶이 천국적 인격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십시오. 이를 통해서 여러분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 주셔서 은혜를 체험할 뿐 아니라 넉넉히 이기게 되고 그를 통해서 신앙이 쭉쭉 자라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시련과 환난이 없는 세계가 아니라 시험과 환난이 있을지라도 그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은혜를 받아서 이기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일에 우리가 넉넉히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시여 이기는 생활을 통해서 신앙이 자라고 경험이 자라고 능력 있는 성도가 되어서 수많은 사람을 빛으로 인도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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