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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바로 샘이다

요한복음 양현혜 교수............... 조회 수 1959 추천 수 0 2009.10.22 14: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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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4 :10~26 
설교자 : 양현혜 교수 
참고 : 2009.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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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네가 바로 샘이다.
[요한복음 4 : 10~26]
양현혜 교수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오늘 본문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이 생명수를 둘러싸고 대화하시는 유명한 장면입니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도 영원히 살게 하는 물인 생명수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습니다. 얼마 전 세간을 시끄럽게 했던 아가동산이라는 이단에서는 교주가 수돗물을 팻트 병에 담아 축복한 물을 생명수라고 해서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있었습니다. 영원히 살게 하는 물, 혹은 영생에 대한 인간의 갈망은 예나 지금이나 절절하여 종교적 사기꾼 혹은 의학적 사기꾼에게 쉽게 허를 찔리기가 쉽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영생하는 물이 쏟는 샘에 대해 우리 주님은 무엇이라 하시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견원지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하였고 사마리아 사람들도 그러한 유대인들을 증오했습니다. 이러한 갈등이 어느 정도였나 하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갈 때 사마리아를 거치게 되면 3일만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도, 유대인들은 부정탄 사마리아를 피해 일부러 먼 해안가로 돌아다녔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가시면서 사마리아를 거치게 되셨던 것입니다. 급해서 할 수 없이 통과한 것이었을까요. 요한복음 4장을 자세히 읽어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후반부에 주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권유를 따라 그 곳에서 이틀이나 더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경멸받던 사마리아인들에게 특별한 비중을 두시고 일부러 이 곳을 경유하는 여행경로를 택하셨던 것 같습니다.

때는 더운 여름날 오후였습니다. 주님은 마을 어귀의 우물가에서 물 뜨러 온 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사실 우물이라고 하는 장소는 옛부터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 서로 소통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여인과 예수님 사이에는 대화를 나누며 소통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서로 견원지간인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라는 민족적인 장벽이 있었습니다. 또한 여성과 남성이라는 장벽이 가로 놓여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민중에게 가르침을 주는 스승인 랍비와 죄인이라는 장벽이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사회적으로 모범이 되어야 하는 신분인 랍비는 길거리에서 여인과 대화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아내라 해도 인사를 나누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부인인 경우는 더 더욱 아는 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서 있는 이 여인은 그냥 평범한 여염집 아낙네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세 번 이상 결혼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여인은 이미 다섯 번 결혼했었고 지금은 결혼도 하지 않은 사람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동네 여인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나빠 뒷손가락질을 받던, 부정한 여인, 죄많은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녀가 뙤약볕이 내리쬐는 이 시간을 택해서 물을 뜨러 나온 것도 자신의 수치스러운 삶의 이야기가 입방아에 올려지는 것이 듣기 싫어서였습니다.

그런데 랍비와 부정한 여자라는 이 장벽보다 더 결정적인 장벽이 주님과 여인 사이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장벽이었습니다. 그 분은 물 자체를 지으신 창조주이시고 여인은 물이 없으면 죽고 마는 피조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주님과 여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이 많은 장벽, 그 어머 어마하게 높은 장벽을 일거에 무너트리셨습니다. 그것들을 무너트린 방법은 단 하나였습니다. 그녀의 수준에 맞춰 자신을 낮추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처지에 가장 잘 어울리게 몸을 낮추어 그녀가 가장 잘 알아들을 수 있게 말걸어 주십니다. “물을 달라고”고 말입니다.

구설수에 오르는 것이 싫어서 사람을 피해 뜨거운 뙤약볕에 물길러 나온 그녀였지만, 그러나 실은 그녀에게도 도저히 끊어버릴 수 없는 인간에 대한 그리움, 소통에 대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모두가 잠든 밤이 아닌 정오의 우물가를 찾은 것입니다. 사람이 무서운 그래도 역시 사람이 그리운 이 여인 앞에, 주님은 남루하고 피곤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낮추며 말 걸으십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늘 높은 보좌에서 거룩한 영광과 위엄에 쌓여 여인에게 말 걸으셨다면 여인은 어땠을까요. 찬란한 광휘에 둘러싸인 예수님이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했다면 여인은 어땠을까요. 매우 놀라고 두려워 달아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자꾸 하나님이 말 걸어오신다면 나중에는 짜증을 내며 화를 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그런데 그런 고상한 사랑을 상대하기에는 제 삶이 너무 심란하거든요. 그러니 제발 다른 사람 찾아보세요. 한가하고 우아한 사람 찾아보세요. 저는 지금 그런 정신적인 사랑,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는 그런 감상적인 동정, 참 지긋지긋하걸랑요. 저는 지금 물 한 바가지가 절박한 사람이에요”라고 화를 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여인의 고단한 삶의 현장으로 육신이 되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여인의 매일 매일의 노동의 현장, 그 땀내나는 심란하고 구질구질한 곳으로 몸을 낮춰 오셨습니다. 마셔도 마셔도 또 목마른 현장, 그래서 정오의 뙤약볕에 물을 길으러 오지 않으면 안 되는 노역의 현장으로 오셨습니다. 그렇다고 이 여인의 삶에 물을 그렇게 애써 길러 마시면서까지 꼭 살아 있어야 할 어떤 필연적인 가치나 의미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실패와 절망의 연속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보람도 의미도 가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도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목숨처럼 질긴 것도 없다고, 오늘도 왜 사는지 모르는 채 또 목이 말라 물을 길으러 나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마리아 여인의 고단한 삶의 현장은 마치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스의 노역을 생각하게 합니다. 시지프스는 눈을 뜨면 돌을 산꼭대기를 향해 굴려 올렸습니다. 그러나 돌은 언제나 산의 정상에 다다르지 못 합니다. 노역에 지친 시지프스가 돌의 무게를 이길 힘이 떨어지면 제 무게를 이기지 못 한 돌은 다시 눈깜짝 사이에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집니다. 시지프시는 터덜터덜 산 아래로 걸어 내려옵니다. 그리고 다시 그 돌을 산꼭대기를 향해 힘들게 굴려 올립니다. 돌이 다시 굴러 떨어집니다. 그는 다시 이것을 끌어 올리지만, 돌은 매번 다시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시지프시는 왜 정상을 향해 돌을 굴려 올려야 하는지 그 이유도 알지 못 합니다. 다만 그는 이 의미도 가치도 목적도 알지 못 하는 일을 끝없이 해야만 했습니다. 그 무의미한 노역이 끝나는 때는 오직 그가 죽을 때였던 것입니다. 여인의 고단한 삶의 현장도 바로 시지프스의 돌과 같이 아무 의미도 없이 끝없이 반복되는 노역의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여인이 이러한 삶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해 보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노역을 보상해 주고도 남을 만한 삶의 의미를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매일 물을 힘들게 길어 먹고도 살아야만 할 충분한 이유가 되어 줄 삶의 가치를 보람을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영혼의 갈증을 풀어 줄 사람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자신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과 삶을 나눌 사람을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이 사람과 함께 라면, 이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까짓 노역쯤이야 할 사람을 찾고 싶었습니다. 나날의 힘든 노동을 끝내고 밥상을 마주하며 하루를 마감할 행복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아, 행복이 이런 것이구나’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여인이 왜 남편이 여섯이나 되었겠습니까.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성이 자기를 실현하고 삶의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일은 남편을 통해서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과 함께 라면 나의 영혼의 갈증이 풀어 질거야, 이번만은 틀림없을 거야, 이번만은 정말 확실히’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한 세월이었습니다. 다섯 남편과 그리고 남편이 아닌 사람과 지금 살고 있는 그녀의 내면 역시 오랜 가뭄에 터져버린 거북이 등가죽과 같이 황폐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충족되지 못한 동경과 실망으로 가득한 가슴을 안고 그녀는 우물가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목마름을 풀어줄 한 바가지의 물을 구하면서, 또한 자신의 영혼의 갈증을 풀어줄 생수를 갈망하면서 말입니다.

주님은 쓸쓸하고 공허한 눈을 가진 그러나 그 안에는 간절한 간구가 담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십니다. 그리고 그 안의 아픔을 보십니다. 그리고 말 걸어 주십니다. 여인은 자신을 겁주지 않으면서도 자신에게 매우 익숙한 언어로 말 걸어오시는 주님 앞에서, 비로소 경계를 풀고 사람을 기피하는 자신의 수치심에서 해방되어 말문을 엽니다. 대화의 빗장이 열린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가 그리도 갈망했던 인간적인 소통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주님께서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한 것은 단순히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실은 여인의 말문을 트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후반부에서 본 것같이 주님은 결국 여인에게서 물을 못 얻어 드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는 일로 이미 배불러 더 이상 먹고 마실 필요가 없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말문을 트신 주님은 여인이 지금까지 세상에서 받아 왔던 온갖 상처의 한풀이 분풀이를 다 받아 주셨습니다. ‘유대인이라고 우리를 멸시할 때는 언제고 이제 목마르니까 나에게 물을 달라고. 흥, 뻔뻔스럽기도 하지, 그렇게 잘났으면 끝까지 의연하게 참아 보시지’. 여인은 그 동안 소외받고 천대받았던 온갖 분풀이를 다 해대면서 예수님께 패악을 부립니다. 그래도 주님은 화내지 않으셨습니다. ‘감히’ 하시며 얼굴이 벌게지지도 않으셨고, 이 발칙한 것에게 당장 버릇을 고쳐 주어야 한다면서 야단치지도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그녀의 분풀이 한 풀이를 다 들어 줄 작정으로 그녀의 구질구질한 삶에 일부러 개입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도 처음에는 가벼운 재미로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어 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아픈 사연이 굽이굽이 펼쳐질라치면, 그 쓰라린 질곡에 말려들까봐, 아차, 하고 뒷걸음질을 치며 피해가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녀의 가슴 아픈 개인사에 일부러 개입하셨습니다.

온 존재를 기울려 집중해 주시는 주님께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는 자신에게 필요했던 것이 단순히 물만이 아니었음을 곧 알아차립니다. 그녀는 묻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라고. 그녀는 자신이 ‘참 예배가 무엇인가’에 대해 목말라 하며, 실은 하나님을 만나기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렸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그녀는 이야기를 옮겨 ‘참 예배’에 대해 질문합니다. 여인의 정신적인 갈증에 대해 주님이 대답하십니다. 인자가 죽임을 당하고 부활한 후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인은 다시 한 차원 높은 질문을 합니다. 메시아에 대해 묻습니다. 우리의 동요하는 영혼이 닷을 내릴 수 있도록 우리 삶에 의미와 가치를 주고 그것을 실현해 낼 수 있는 힘을 주시는 존재는 어떤 분이십니까. 어떤 존재 안에서 우리는 영혼의 쉼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주님과 이렇게 우물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마리아여인과 오늘 여기 앉아 있는 우리는 어쩌면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역시 시지프스의 노역과 같이 무의미한 우리의 삶에 의미를 준다고 하는 것들을 차례차례로 해 보았습니다. 없으면 죽을 것같은 불타는 연애도 해 보았고 가슴 아픈 사랑도 해 보았습니다. 명예를 갈망하기도 했으며, 부를 탐닉해 보기도 했습니다. 업적을 이루기 위해, 공을 세우기 위해 앞뒤 돌아보지 않고 남을 짓밟으며 달려가기도 해 보았습니다.

이러한 우리 역시 삶에 의미를 부여해 준다는 남편들을 여섯씩 아니 혹은 그 이상으로 거느리고 있었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그 남편들은 우리 삶을 의미로 꽉 채워 주지 못 했습니다. 우리 역시 공허함과 실망감 속에서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마라아 여인처럼 ‘우리의 동요하는 영혼이 닷을 내릴 수 있도록 우리 삶에 의미와 가치를 주고 그것을 실현해 낼 수 있는 힘을 주시는 존재는 어떤 분이십니까. 어떤 존재 안에서 우리는 영혼의 쉼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주님께 애타게 물으면서 말입니다.

여인에게 주님은 대답하십니다. “지금 너와 더불어 이야기하고 있는 바로 내가 그 존재”다 라고 말입니다.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다. 온 존재를 기울려 너의 음성을 듣고 있다. 나는 너를 단죄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그 안에 있는 너의 아픔을 먼저 보기 때문이다. 너는 너에게 아무런 조건이나 전제를 내걸지 않고 다만 나를 철저히 비워 너의 존재를 용납할 뿐이다. 나는 없이 있는 듯 그렇게 너와 늘 동행하며 내 모든 전지전능을 통해 너의 존재를 보호하는 자다. 너는 이러한 내 사랑으로 부족하냐.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나를 믿고 내가 주는 물을 마셔라”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물을 주겠다. 이것은 너의 영혼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물이다. 그것은 너를 해방시키고 자립시키는 생명의 물이다’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나는 네가 원래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고 있다. 이제 너를 너의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는 생명의 물을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알고 기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녀도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왜 그렇게 목말라 하는지, 또 무엇을 갈구하는지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단지 지독하게 팔자가 박복한 여인이라든지 혹은 바람기가 많은 여자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 자신도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대로 그렇고 그런 여자라고 스스로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여인을 총체적으로 아셨습니다. 그녀의 본 모습이 어떠한지를 기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살아가면서 자기의 본래 모습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세월 속에서 변해 버린 우리 앞에서 나의 참 모습을 기억해 주고 알아주는 분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구원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지금 그 분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사마리아 여인은 “내가 주는 물을 마셔라”. “그러면 이 물이 너 안에서 샘이 되고 그 샘에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물이 솟아 나와 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그 분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주님이 주시는 생수를 믿고 마시면 우리가 바로 샘이 된다는 것입니다. “네가 바로 샘이다. 너는 이제 물동이를 들고 너 밖으로 너를 살릴 물을 구걸하러 다니지 않아도 된다. 너는 그런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너 자신이 더할 나위없이 귀중한 샘이다. 바로 너 안에 내가 준 좋은 샘이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자립시키고 해방시킬 생명력을 얻기 위해 참으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렸습니다. 많은 것들에게 물동이를 들고 우리를 살리는 생명력을 달라고 구걸했습니다. 나에게 내가 살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도록 칭찬해 주세요. 내가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믿을 수 있게 격려해 주세요. 내 삶이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나를 사랑해 주세요.... 라고 얼마나 많이 구걸하며 다녔습니까. 그리고 우리에게 살아가는 보람과 힘을 줄 것이라고 여겨지는 그 세간의 칭찬과 평가가 사라질까봐 우리는 얼마나 남몰래 전전긍긍했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삶의 의미를 가지고 자립해서 살 수 있는 길을 오직 하나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 삶의 원천으로 하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생명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우리를 직결하여 우리가 바로 샘이 되는 길뿐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 37-38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목마른 자는 누구든지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서에 써 있는 것같이 그 사람 안에 생수가 강이 되어 흘러 나올 것이다”.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우리가 직결되었을 때 우리 안에 생명력이 강이 되어 흘러 나와 우리는 자립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이제 주님이 주신 물을 받아 마시고 스스로가 샘이 되었습니다. 매일의 일용할 물에 목을 메었던 사람이, 사람들이 무서워 사람을 피해 다녔던 그녀가, 이제 물바가지를 던져 놓고 사람들에게로 달려 갑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외치기 시작합니다. “나는 메시아를 만났고 그 분이 내 안에 생명의 샘을 터트려 주셨습니다. 나는 이제 목마르지 않습니다. 이제 삶의 의미를 찾아 방황할 필요가 없어졌어요. 떳떳하지 못 했던 나의 과거가 나를 더 이상 묶어 둘 수 없게 되었어요. 이제 보니 나를 손가락질하고 따돌렸던 당신들도 실은 목마른 사람들이었군요. 내 물을 먹어 보세요. 그리고 그 물맛이 좋으면 당신들도 샘을 선물로 받으세요”라고 하면서 자신의 샘물을 나누어 줄 수 있는 풍요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직결되어 자신이 샘이 된 이 여인은 이제 자립되고 해방된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직결시키지 않고, 우리 밖에서 우리를 자립시킬 힘, 우리를 해방시킬 힘, 우리의 삶의 의미를 주는 힘,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삶을 싱싱하게 살 수 있게 해 주는 힘을 구한다면 우리는 결코 그것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본디 그 안에 생명을 가지지 못 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생명이 없는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그들을 해방시키고 자립시키는 생명력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 또한 자기에게 필요한 생명력을 구해 다니느라고 제 코가 석자일 뿐입니다. 그런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그들을 살리고 해방시키는 생명력을 줄 여력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이 악해서 안 주는 것이 아니라 주고 싶어도 없어서 못 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주님은 인간이 하나님과 자기 밖에서 생명력을 구하는 것은 연목구어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자립시키고 해방시키는 생명력은 우리를 하나님과 직결시켜 우리 안에 샘이 터질 때만 얻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샘물이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더 이상 생명의 물을 구하러 동냥하러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자신의 우아함 안에 갇혀 자신만의 자족 안에 똬리를 틀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샘물이 시원한 생수를 뿜어 올리는 자기 멋에 도취된 채로 그 곁을 지나는 존재들에게 물 한 방울 나누어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다. 무릇 샘물의 존재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곁을 지나가는 모든 존재 하다못해, 새벽에 일어나 눈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나온 아기 토끼에게까지 목을 축이게 해 주는 데 있습니다. 샘이 되어 우리도 그리 살면 좋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과 직결시켜 스스로가 샘이 되라고 하십니다. 더 이상 자기 밖의 샘물을 찾아 방황하거나 구걸하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생명력으로 약동치는 물줄기를 시원하게 뿜어내며 싱싱하고 기쁘게 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시원한 생수를 세상에 나누며 세상을 섬기는 풍요로운 삶을 살라고 지금 우리에게 말걸어 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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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6 에배소서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엡2:1-10  김필곤 목사  2009-10-18 1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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