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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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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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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물질적으로는 어디도 아닌 곳이 영적으로는 모든 곳이다.
다른 사람이 그대의 힘과 생각 일체를 자신 안에 거두어들이고 거기서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말하더라도 -그 사람이 절대적으로 참되고 옳은 말을 하고 있을 테지만 - 나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을 것인즉, 이유는 내가 우려하는 점은 들은 이야기를 육적으로 잘못 해석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대는 결코 자신 안으로 움츠러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그대가 그대 자신 밖이나 위, 뒤나 옆 어디에 가 있는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그렇다면 도대체 나보고 어디에 있으라는 말인가, 당신 말대로라면 내가 있을 곳은 아무 데도 없지 않은가?' 하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내 말이 정확히 그 말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대가 '아무 데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육적으로 '아무 데로 없을 때 영적으로는 '어디에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대의 영이 육적인 것 어디에 매여 있는지를 일삼아서 살피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그대의 몸이 가 있는 곳에 그대가 있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그대가 마음을 주는 어떤 것이 자리하고 있는 바로 그곳에 그대 또한 영적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대의 타고난 마음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까닭에 먹이,로 삼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더라도, 바로 그 아무것도 아닌 일을 계속 해나가되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해나가도록 하십시오. 아무쪼록 포기하지 말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열정적으로 매달리며, 세심한 의지와 열망으로 어떤 사람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얻도록 노력하십시오. 내가 진실로 말하거니와 나는 내가 있고 싶은 곳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고 무엇이나 내 것인 양 누릴 수 있는 위대한 세력자가 되기보다는, 육적으로 이 아무 데도 아닌 곳에 있으면서 아무것도 아닌 불투명한 것과 씨름하는 쪽을 훨씬 좋아할 것입니다.
이 '어디에나'와 '무엇이나'를 버리고 이 '아무 데도'와 '아무것도'를 취하도록 합시다. 그대가 설령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도대체 간파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전혀 마음을 쓰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나는 이것이 훨씬 더 나은 것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더없이 소중한 것이어서, 그에 관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가치는 충분합니다. 사람은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눈으로 보기보다 그냥 느끼는 쪽이 한결 좋운데, 이유는 이제서야 갓 주시하기 시작한 이들에게는 완전한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 까닭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실질적인 어둠 또는 물리적인 빛이 부재하는 상태라기보다 그것을 체험하는 영혼을 눈멀도록 만드는 저항할 수 없는 영적인 빛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일컫는 장본인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분명코 우리의 내면이 아닌 우리의 외면입니다. 우리의 내적 자아는 이를 가리켜 '모든 것'이라고 일컫는바, 이유는 그가 이것을 통해서 갖가지 개별적인 사물을 독자적으로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이 육적 또는 영적인 모든 만물의 비밀을 알아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대의 힘과 생각 일체를 자신 안에 거두어들이고 거기서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말하더라도 -그 사람이 절대적으로 참되고 옳은 말을 하고 있을 테지만 - 나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을 것인즉, 이유는 내가 우려하는 점은 들은 이야기를 육적으로 잘못 해석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대는 결코 자신 안으로 움츠러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그대가 그대 자신 밖이나 위, 뒤나 옆 어디에 가 있는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그렇다면 도대체 나보고 어디에 있으라는 말인가, 당신 말대로라면 내가 있을 곳은 아무 데도 없지 않은가?' 하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내 말이 정확히 그 말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대가 '아무 데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육적으로 '아무 데로 없을 때 영적으로는 '어디에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대의 영이 육적인 것 어디에 매여 있는지를 일삼아서 살피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그대의 몸이 가 있는 곳에 그대가 있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그대가 마음을 주는 어떤 것이 자리하고 있는 바로 그곳에 그대 또한 영적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대의 타고난 마음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까닭에 먹이,로 삼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더라도, 바로 그 아무것도 아닌 일을 계속 해나가되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해나가도록 하십시오. 아무쪼록 포기하지 말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열정적으로 매달리며, 세심한 의지와 열망으로 어떤 사람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얻도록 노력하십시오. 내가 진실로 말하거니와 나는 내가 있고 싶은 곳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고 무엇이나 내 것인 양 누릴 수 있는 위대한 세력자가 되기보다는, 육적으로 이 아무 데도 아닌 곳에 있으면서 아무것도 아닌 불투명한 것과 씨름하는 쪽을 훨씬 좋아할 것입니다.
이 '어디에나'와 '무엇이나'를 버리고 이 '아무 데도'와 '아무것도'를 취하도록 합시다. 그대가 설령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도대체 간파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전혀 마음을 쓰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나는 이것이 훨씬 더 나은 것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더없이 소중한 것이어서, 그에 관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가치는 충분합니다. 사람은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눈으로 보기보다 그냥 느끼는 쪽이 한결 좋운데, 이유는 이제서야 갓 주시하기 시작한 이들에게는 완전한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 까닭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실질적인 어둠 또는 물리적인 빛이 부재하는 상태라기보다 그것을 체험하는 영혼을 눈멀도록 만드는 저항할 수 없는 영적인 빛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일컫는 장본인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분명코 우리의 내면이 아닌 우리의 외면입니다. 우리의 내적 자아는 이를 가리켜 '모든 것'이라고 일컫는바, 이유는 그가 이것을 통해서 갖가지 개별적인 사물을 독자적으로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이 육적 또는 영적인 모든 만물의 비밀을 알아내기 때문입니다.
92.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 (「무지의 구름」 68장 참조)
사랑하는 벗이여, 하나님을 언제든지 대면할 수 있는 것. 이것은 사랑하는 하나님의 크신 축복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현존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공간을 가득 채우시되, 하나님께서 거기에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담고 계십니다. 사실 하나님에게서 도망치기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현존으로 모든 존재를 떠받치고 계십니다. 파트리치오가 바친 아름다운 기도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우리 바깥에, 우리 아래에, 우리 앞에, 우리 뒤에 우리 오른편과 왼편에 두루 존재하십니다.
사랑하는 벗이여, 하나님을 언제든지 대면할 수 있는 것. 이것은 사랑하는 하나님의 크신 축복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현존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공간을 가득 채우시되, 하나님께서 거기에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담고 계십니다. 사실 하나님에게서 도망치기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현존으로 모든 존재를 떠받치고 계십니다. 파트리치오가 바친 아름다운 기도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우리 바깥에, 우리 아래에, 우리 앞에, 우리 뒤에 우리 오른편과 왼편에 두루 존재하십니다.
93. 하나님의 현존(시편 139편)
말소리 내 혀끝에 채 오르기 전에,
주는 벌써 모든 것을 알고 계시나이다.
앞뒤로 이 몸을 감싸주시며,
내 위에 당신 손을 얹어주시나이다.
알으심이 너무나 놀랍고도 아득하와,
내 힘이 미치지 못하나이다.
당신의 얼을 떠나 어디로 가오리까.
당신 얼굴 피해 갈 곳 어디오리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주는 계시옵고,
지옥으로 내려가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
새벽의 날개를 이 몸이 친다 하여도,
저 바다의 먼 끝에 산다 하여도
거기에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손이 몸을 잡아주시리다.
"어둠이나마 나를 덮씌워서
빛인 듯 밤이 나를 휘감는다면" 할 때에도
어두움 그것마저 당신께는 어둡지 않아,
밤 또한 낮과 같이 환히 밝으며,
캄캄함도 당신께는 빛과 같으오리다. (시편 139,4-12)
사랑하는 벗이여, 이는 실로 저항할 수 없는 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실 뿐 아니라 우리가 당신에게서 도망쳐 어디로 달아나든 벌써 거기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가는 길마다 함께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에 몸을 내맡기는 것 우리 자신을 활짝 열고 사랑의 탐색 기도로 그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분별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어디로 갈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벗도, 동반자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제도, 자매도, 연인도 -우리가 바라는 어떤 존재라도- 다 되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들에게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지혜는 실로 놀랍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6절)
사랑하는 벗이여, 이제 그대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있는 곳과 우리가 가는 곳에 현존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더라도 상관없이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좋을 때나 궂을 때나, 넉넉할 때나 가난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기로 서약하는 아름다운 혼인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기도가 나온 것은 남편과 아내의 결합이라는 혼인성사가 하나님과 개개 영혼의 합일을 (또는 모든 영혼과의 합일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합일을) 나타내는 표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아름다운 아가서는 인간의 구애와 부부간의 사랑을 수사적 비유로 활용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결합은 너무나도 단단해서 설령 우리가 하나님을 저버리고 싶어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저버리지 못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기쁘거나 슬프거나, 행운을 잡거나 불운하거나 조건에 상관없이 사랑의 관상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합일하도록 꾀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좋은 몫을, 필요한 단 한 가지를 택하였고, 그 무엇도 이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말소리 내 혀끝에 채 오르기 전에,
주는 벌써 모든 것을 알고 계시나이다.
앞뒤로 이 몸을 감싸주시며,
내 위에 당신 손을 얹어주시나이다.
알으심이 너무나 놀랍고도 아득하와,
내 힘이 미치지 못하나이다.
당신의 얼을 떠나 어디로 가오리까.
당신 얼굴 피해 갈 곳 어디오리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주는 계시옵고,
지옥으로 내려가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
새벽의 날개를 이 몸이 친다 하여도,
저 바다의 먼 끝에 산다 하여도
거기에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손이 몸을 잡아주시리다.
"어둠이나마 나를 덮씌워서
빛인 듯 밤이 나를 휘감는다면" 할 때에도
어두움 그것마저 당신께는 어둡지 않아,
밤 또한 낮과 같이 환히 밝으며,
캄캄함도 당신께는 빛과 같으오리다. (시편 139,4-12)
사랑하는 벗이여, 이는 실로 저항할 수 없는 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실 뿐 아니라 우리가 당신에게서 도망쳐 어디로 달아나든 벌써 거기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가는 길마다 함께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에 몸을 내맡기는 것 우리 자신을 활짝 열고 사랑의 탐색 기도로 그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분별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어디로 갈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벗도, 동반자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제도, 자매도, 연인도 -우리가 바라는 어떤 존재라도- 다 되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들에게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지혜는 실로 놀랍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6절)
사랑하는 벗이여, 이제 그대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있는 곳과 우리가 가는 곳에 현존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더라도 상관없이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좋을 때나 궂을 때나, 넉넉할 때나 가난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기로 서약하는 아름다운 혼인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기도가 나온 것은 남편과 아내의 결합이라는 혼인성사가 하나님과 개개 영혼의 합일을 (또는 모든 영혼과의 합일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합일을) 나타내는 표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아름다운 아가서는 인간의 구애와 부부간의 사랑을 수사적 비유로 활용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결합은 너무나도 단단해서 설령 우리가 하나님을 저버리고 싶어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저버리지 못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기쁘거나 슬프거나, 행운을 잡거나 불운하거나 조건에 상관없이 사랑의 관상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합일하도록 꾀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좋은 몫을, 필요한 단 한 가지를 택하였고, 그 무엇도 이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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