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
| 출처 : |
|---|
70. 우리가 본성적인 이해를 중단할 때 더 없이 혼연하게 영적지식에 도달할 수 있드시,
영적인 이해를 중단할 때 은총을 통해 가장 높으신 하나님 지식에 도달하게 된다.
이렇듯 아무 데도 아닌 데서 이 아무것도 아닌 일에 전속력으로 열심히 노력하되, 그대가 외부에서 육적으로 사물을 알아내고 쫓아다니는 그런 방식들은 한편으로 치워버리십시오. 내가 장담하거니와 이런 종류의 일은 그같은 방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대의 눈은 사물이 길다란지, 널찍한지, 작은지, 큰지, 둥근지, 네모난지, 알록달록한지 겉모습만으로 파악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대의 귀는 음향이나 소리로 이해하고, 그대의 코는 악취나 향기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그대의 혀는 신지, 단지, 잔지, 싱거운지, 쓴지, 상큼한지를, 촉감으로는 뜨거운지, 찬지, 딱딱한지 부드러운지, 무딘지, 날카로운지를 알아낼 따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영적인 일들은 이런 다양한 속성들을 하나도 지니고 있지 알습니다. 그러니 감각을 통해 얻어지는 외적인 지식 일체는 그냥 놓아두십시오. 객관적으로든 주관적으로든 절대로 감각을 도구 삼아 일하지는 마십시오. 내면을 들여다보는 영적인 관상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현상세계의 영상들이나 자기네 존재의 한가운데서 영적인 일들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거나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크게 오판한 것이며 사물의 자연 질서에 역행하고 있는 셈입니다. 왜냐하면 자연 질서는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외부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도록 되어 있는 것이지 그것으로 영적 사물에 대한 지식을 얻도록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말은 물론 감각들이 실제로 하고 있는 역할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한계를 인식함으로써 영적인 지식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일에 관해 듣거나 읽으면서도 우리의 이해력으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온전히 묘사할 수 없을 때, 바로 그 사실로써 그 일들이 육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 것임을 확신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면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일어나는데, 우리가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알고자 노력할 때가 그때입니다. 설령 사람이 일찍이 창조된 온갖 영적 사물들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통달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같은 이해력만으로는 창조되지 않은 영적 존재, 다름아닌 하나님을 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해력에 한계가 있는 이유를 인식하면 알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이해력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하나님 그분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성디오니시오는 "하나님을 아는 가장 신적인 지식은 무지(無知)를 통해 알려진 지식이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디오니시오의 저서들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내가 지금껏 이야기했거나 앞으로 하려는 내용을 그가 시종일관 명확하게 뒷받침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구태여 이 자리에서 그의 말이나 그 밖의 다른 권위자의 말을 인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때는 사람이 성서와 해박한 인용문으로 뒷받침하지 않고서는 독창적인 의견을 절대로 피력하지 않을 경우, 이를 겸손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권위자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본인의 독창력과 해박한 학식을 뽐내는 좋은 기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대에게는 이런 것이 필요치 않으며 따라서 나도 그런 식의 인용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들으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은 내가 하는 말을 듣도록 맡기고, 믿을 마음이 있는 사람은 내가 하는 말을 믿도록 맡깁시다. 우리로서는 다른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영적인 이해를 중단할 때 은총을 통해 가장 높으신 하나님 지식에 도달하게 된다.
이렇듯 아무 데도 아닌 데서 이 아무것도 아닌 일에 전속력으로 열심히 노력하되, 그대가 외부에서 육적으로 사물을 알아내고 쫓아다니는 그런 방식들은 한편으로 치워버리십시오. 내가 장담하거니와 이런 종류의 일은 그같은 방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대의 눈은 사물이 길다란지, 널찍한지, 작은지, 큰지, 둥근지, 네모난지, 알록달록한지 겉모습만으로 파악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대의 귀는 음향이나 소리로 이해하고, 그대의 코는 악취나 향기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그대의 혀는 신지, 단지, 잔지, 싱거운지, 쓴지, 상큼한지를, 촉감으로는 뜨거운지, 찬지, 딱딱한지 부드러운지, 무딘지, 날카로운지를 알아낼 따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영적인 일들은 이런 다양한 속성들을 하나도 지니고 있지 알습니다. 그러니 감각을 통해 얻어지는 외적인 지식 일체는 그냥 놓아두십시오. 객관적으로든 주관적으로든 절대로 감각을 도구 삼아 일하지는 마십시오. 내면을 들여다보는 영적인 관상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현상세계의 영상들이나 자기네 존재의 한가운데서 영적인 일들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거나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크게 오판한 것이며 사물의 자연 질서에 역행하고 있는 셈입니다. 왜냐하면 자연 질서는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외부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도록 되어 있는 것이지 그것으로 영적 사물에 대한 지식을 얻도록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말은 물론 감각들이 실제로 하고 있는 역할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한계를 인식함으로써 영적인 지식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일에 관해 듣거나 읽으면서도 우리의 이해력으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온전히 묘사할 수 없을 때, 바로 그 사실로써 그 일들이 육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 것임을 확신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면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일어나는데, 우리가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알고자 노력할 때가 그때입니다. 설령 사람이 일찍이 창조된 온갖 영적 사물들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통달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같은 이해력만으로는 창조되지 않은 영적 존재, 다름아닌 하나님을 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해력에 한계가 있는 이유를 인식하면 알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이해력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하나님 그분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성디오니시오는 "하나님을 아는 가장 신적인 지식은 무지(無知)를 통해 알려진 지식이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디오니시오의 저서들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내가 지금껏 이야기했거나 앞으로 하려는 내용을 그가 시종일관 명확하게 뒷받침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구태여 이 자리에서 그의 말이나 그 밖의 다른 권위자의 말을 인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때는 사람이 성서와 해박한 인용문으로 뒷받침하지 않고서는 독창적인 의견을 절대로 피력하지 않을 경우, 이를 겸손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권위자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본인의 독창력과 해박한 학식을 뽐내는 좋은 기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대에게는 이런 것이 필요치 않으며 따라서 나도 그런 식의 인용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들으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은 내가 하는 말을 듣도록 맡기고, 믿을 마음이 있는 사람은 내가 하는 말을 믿도록 맡깁시다. 우리로서는 다른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
|
혹 글을 퍼오실 때는 경로 (url)까지 함께 퍼와서 올려 주세요 |
|
자료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 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