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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동네 길을 어제처럼 발한테 맡기고 걷다가 하수도 공사 중인 구멍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그는 투덜거렸다.
"재수가 더럽게 없는 날이군. 일년 째 눈감고 다녀도 아무 일 없더니..."
그는 발명품 전시회장에 가서 중얼거렸다.
"아하, 내가 발명하려고 했던 것이 벌써 나왔구나. 복사기도 그랬었지. 아이디어는 내가 먼저였었는데 말이야."
그의 방에는 가구들이 진을 치고 있다. 그는 그것들에 갇혀서 어깨 한번, 허리 한번 마음껏 펴지도 못한다.
텔레비전이 부르면 텔레비전한테 달려가고 전축이 부르면 전축 앞으로 대령하고.
그는 날마다 결심한다.
'오늘은 그냥 이대로... 그러나 내일부터는!'
'오늘 하루만... 그러나 내일부터는!'
'내일 두고 보자!'
친구를 모함한다.
교회에 가서 빈다.
친구를 다시 모함한다.
교회에 가서 다시 빈다.
이번에는 교회에 가서 빌거리를 만들기 위해
친구를 모함한다.
그는 남의 화제에는 절대 궁하지 않다.
유명 여배우의 간통사건, 상대의 신상명세와 자주 드나들던 호텔 이름과 방 호수.
유명 가수의 키와 몸무게, 가슴둘레며 좋아하는 음식, 키우고 있는 개의 이름.
유명 선수의 타율과 홈런, 도루 기록, 잘 부르는 노래곡명, 승용차의 이름, 번호.
그가 모르는 것은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그는 우연히 코메디 극을 보았다.
자기 생각이라곤 일푼어치도 없이 그저 로봇처럼 움직이다가 하수구에 빠지는 배우를 보고 그는 배를 잡고 웃었다.
'저런 녀석도 사람이라니!'
정채봉<멀리가는 향기/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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