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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인간론 (강종수)

논문신학성경 강종수............... 조회 수 2426 추천 수 0 2009.11.18 00: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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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인간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모든 학문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존재 기원을 알기 전에는 인생관이 부정확한 관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지구촌에 대칭해서 평가해볼 그 어떠한 존재도 없다는 것이 인간 실존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과학적 관찰로서 사람의 영혼과 인생의 의의를 다 캐낼 수 없으며 종교의 다양한 철학으로도 알 길이 없습니다.

결국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이간의 기원적인 것을 탐구한 문헌이나 고고학적 근거와 광범위한 역사적 삶의 정황을 펼쳐서 객관성을 가질 수 있는 인간 본연의 모습에 근사치를 찾아봐야 할 것입니다.

철학의 존재론적인 합리적 변명보다 우리가 가진 영성(靈性)과 역사 속에 진행해온 행적들, 일반 문화와 종교 그리고 가치관의 흐름 속에 계속적으로 유지되고 보유하고 있는 질문들, 이를테면 생명에 관하여 또는 사후에 대한 관찰 방식 등에서 인간의 존귀함에 대한 사고의 깊이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밥 먹고 살다가 죽을 것이라는 철학 없는 대답이 전부라면 삶의 다른 분야에도 그렇게 이성 없이 산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인간은 짐승과 달라서 성숙함과 진보하기 위한 사유의 철학이 있고 그 노력은 인간의 문화적 사명을 다하는데 필수적인 정신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어찌해야 참다운 인간의 실존을 알게 되고 구원에 이를 것인가를 찾고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1. 죄인인 인간

죄와 죄인은 그 시작의 역사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죄는 인간보다 앞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지구촌에 죄가 먼저 있었고 그 다음 인간이 만들어진 후 하나님이 금하신 동산 중앙의 실과를 사단이 먹도록 유혹할 때 그 실과를 먹음으로 무죄하던 인간은 죄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의 역사적 사실을 불신하는 자들은 이런 원죄(原罪)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보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죄에서 구원받아야 할 인간의 실존에 대한 심각한 고민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죄인이 된 후에 문화 속에서 많은 죄스러운 역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원죄는 부정할지라도 지구촌에 일어난 인간의 죄된 문화를 변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1)원죄와 죽음

성경이 말하는 죄인이란 도덕적으로 혹은 사회적 죄를 짓고 양심으로 죄인 됨을 아는 그런 윤리의식의 바탕에서 죄인 됨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죄인 됨은 사람이 죽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증거합니다. 인간이 죽는 것을 과학적으로는 단지 세포가 파괴되고 노화되어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설명하겠지만 성경은 보다 죽음의 근원이 죄라고 합니다. 매우 도덕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우리 인격 속에 죄가 함께 존립하고 있다는 것은 불행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인생 역사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반드시 죄와 타락의 근원이 있었듯이 사망의 근본 원인은 사람의 속에 죄가 내재하여 알게 모르게 인간의 삶 깊은 곳에서 영적으로 파괴하고 있다가 종래에는 육체의 사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인생이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이요 사람이 죽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이단교주도 있지만 결국 그도 죽었고 또 사람은 누구나 죽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인생은 원죄인(原罪人)이라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죽음은 죄 때문에 가져오는 결과이므로 우리는 그 죄의 원인을 해결할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많은 종교 그리고 교육에서 인간의 인격과 도덕적 성숙을 통해 죄를 없이하려하나 불가능합니다.


2)원죄와 자범죄의 관계

 

일반 사회적으로 도덕이나 성문법인 규범 내지는 종교법들은 대개 인간을 위하고자 하는 규례들로 남을 해롭게 하지 않고 공동 생활의 유익을 도모하고자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도록 규범을 만들지만 인간사는 전쟁사라 할 만큼 많은 전쟁과 형용조차 하기 어려운 숱한 범죄들이 지구촌의 역사에 편만해 있습니다.


이 사회의 악이요 인간 존엄을 헤치는 죄악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성경에 기록된 내용에서 죄의 정체성과 그 시작을 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3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다 지으신 후 여섯째 날 마지막에 사람을 지으시고 6일간 지으신 모든 것은 아름답고 풍요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지으신 후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이 잘 순종하고 하나님의 법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만물을 잘 다스리고 살 것인가를 시험하셨습니다. 그 시험의 내용으로서는 절대로 시험을 왜 하셨느냐고 반문할 어려운 사항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인류 시조 아담으로서는 하나님을 친아버지 같이 여겼을 것이고 당연히 아버지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이 특별히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고 또 에덴동산에는 여러 과실들이 풍족한 관계로 배가 고파서 유혹 받을 본능적인 시험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도록 마귀가 뱀 속에서 말하면서 유혹했습니다. 인간은 그 시험에서 마귀를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의 행위 언약을 지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이 첫 시험의 언약을 주시기는 아담에게 말씀하셨고 그 때 아내 하와는 아직 지음을 받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산 중앙에 있는 실과를 먹으면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아담이 아내에게 전해주었을 것으로 봅니다. 어떻게 전해들었는지 잘 모르지만 사단의 직접적인 시험을 받기는 아내 하와가 듣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직접 들은 자 아담을 상대하지 않고 전해들은 아내 하와에게 접근한 사단의 선택에 대해 궁금한 점을 발견합니다.

 

아무래도 하나님이 직접 들려주신 아담보다는 남편으로부터 듣고 기억하는 아내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데 의식과 의지가 약할 것으로 판단했는지 모릅니다.
창세기 3장 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여기에서 또 한번의 아쉬운 점은 하와가 이미 시험을 받았고 그 시험을 남편에게까지 전염시킬 때 아담이 그 실과의 출처를 물어봐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의문 없이 아내를 믿고 그냥 먹었던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14절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죄를 짓기는 같은 결과입니다. 단지 먼저 여자가 사단의 꾀임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며 남편은 아내의 시험을 받아 같이 죄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단은 직접으로 혹은 간접으로 죄를 번식시키고 전염시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죄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으로 정의되고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마귀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 죄라고 정의됩니다. 우리는 이 태초의 죄를 신학적인 표현으로 원죄(原罪)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원죄의 씨로 인하여 그 죄성이 개인적으로 사회적 죄를 지을 때는 이를 자범죄 혹은 본죄(本罪)라 합니다.


동시에 이 원죄는 최초 인간 하와와 아담이 지은 죄이지만  원죄는 모든 그 후손, 즉 인생으로 태어난 일반 사람들은 원죄를 안고 출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쉽게 인정하기 어렵지만 성경은 우리가 그와 같은 죄를 지은 사람처럼 되어 첫 사람 아담과 함께 죽음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로마서 5장 14절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러므로 우리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첫 아담이 인류의 대표가 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 시험을 받아 결국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어 원죄를 짓게 되고 우리는 자연히 그 아담 후손으로 원죄인(原罪人)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3)사단의 정체

 

성경에 하나님이 천사를 지으신 시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영물들을 지으셨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유추하건대 사람을 지으시기 전에 지으셨고, 보이는 물질 세계를 지으시기 전에 보이지 않으나 영물인 천사들을 지으셨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성경에는 천사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그 천사들의 무리를 이끄는 천사장도 나오는데,

 

 미가엘


하늘 군대 천사장으로 하나님 백성들의 전쟁을 도우는 천사사장입니다.
유다서 1장 9절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세상 끝 날에 이 세상을 지배할 세계적 지도자가 나올 것인데 그가 곧 적그리스도입니다. 그가 세상에 인정받을 만큼의 큰 힘을 갖게 되는데 그 속에 내재하는 능력은 마귀의 것입니다. 하늘에서 미가엘 군대와 싸우다 패배하고 땅에 떨어져 내려와 적그리스도의 가슴 속에 들어가서 마지막 세상 통치를 하다가 지옥으로 떨어질 사단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7절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 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요한계시록 12장 12절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찐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 갔음이라 하더라'
다니엘서 10장 13절 '그런데 바사국 군이 이십일 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국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군장 중 하나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 주므로'

 

 가브리엘


소식을 알려주는 천사장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이 사실을 천사가 목동들에게 먼저 알려주었는데 그가 가브리엘 천사였습니다.
누가복음 1장 19절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그 가브리엘 천사의 임무는 지금도 계속되지만 말세가 되면 사람이 전도를 다 하지 못해도 그 천사가 공중을 날아다니면서 온 세상에 복음을 단번에 전해주는 것으로 복음 전파는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전도의 힘은 우리들의 한계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고 그 다음 불가능하게 보이는 전도의 임무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이루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 6절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다니엘 8장 16절)

 

  사단


그리고 한 천사장이 하나님께 대적하다가 버림받아 이 세상을 사망으로 지배하고 종말에 지옥의 불구덩이에 들어갈 마귀가 되어버린 천사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수하에 있던 천사들도 대장과 함께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단이 된 천사장은 단수로 표기되며 한 놈입니다. 그 아래 부하 격인 귀신들은 복수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사단(   , satan)은 '대적자' 라는 뜻이니 하나님께 대적한다는 뜻이요, 마귀(魔鬼)라 할 때에는 인간에 대하여 유혹(誘惑)하는 자라는 뜻이고 귀신들, 악령들 등의 이름은 그 부하들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혹 사람들이 사용하는 사단의 별칭 루시퍼(Lucifer)라는 이름은 성경에 없습니다. 영어성경 번역에서 나온 말입니다. 히브리어 원어로 그 사단의 본래 이름은 없으나 별칭으로 그 본래 타락하기 전의 이름이 밝은 새벽별이라고 하는 계명성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헬렐(lleyhe)이란 단어입니다. 사단은 본래 아름다운 존재였음을 반영해주는 낱말입니다.

이사야 14장 12절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여기 계명성은 직접적으로는 바벨론 왕을 뜻하는 말씀인데 바벨론 왕은 교만함으로 인하여 멸망 받게 될 것을 예언하신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표현에서 사단의 출처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원인을 유추하게 됩니다. 아름답고 존귀하고 영광스런 자리에서 교만하여 떨어져나간 사단처럼 바벨론 왕이 버림을 받게 될 것을 예언한 뜻에서 우리는 한 천사장이 사단이 되기 전에 매우 영화로웠던 것을 짐작합니다.

 

성경에 이 죄의 정체인 사단(마귀)은 여러 가지 다른 명칭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 세상을 사망으로 역사하는 '공중권세 잡은 자'라고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2절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요한계시록 12장 9절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공중 권세 잡은 자, 온 천하를 꾀는 자라는 뜻은 세속주의의 신이라는 말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영광의 주변에 있다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버림을 받고 영광스러운 그 자리에서 떨어져 이 세속의 자리로 추락했다는 말입니다.


사단의 지구 출현은 창세기 3장에서 원죄를 짓게 할 때부터 사람과 죄와 관계를 이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는 세속화의 거듭되는 속된 문화로 하나님의 영광보다 마귀적인 타락 문화에 익숙하다가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영영 잃어버렸습니다.

많은 세속의 역사 속에 인생은 이제 창조주가 기억이 나지 않게 되자 우리는 하나님이 없다라고 하고 오히려 공중권세 잡은 사단의 영향권 아래서 배운 세속적 가치관으로 참된 신을 반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 그 본래 하나님을 경외하던 영이 되살아나면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기원을 알게 되고 삶의 방식을 새롭게 찾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세상에 재림하시면 먼저 그 사단을 잡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활동을 막으실 것이며 마지막으로 우리가 천국을 입성하게 되는 날에 사단을 잡아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져 넣으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2절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옛 뱀은 곧 원죄를 짓게 하던 창세기 3장의 그 뱀 속에 말하던 마귀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지구촌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봅니다. 사람이 무엇을 잘못하기 전부터 죄의 정체인 사단이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첫 아담이 영감적으로 알고 있었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시험을 받을 때 죄의 정체를 만나 놀라거나 시험자를 의심하는 바가 없는 것을 보면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단은 영적으로 사악한 성격을 가진 존재로서 사람에게 여러 가지로 세속에 빠지게 하며 사람 스스로가 마귀를 닮아서 하나님을 대적하게도 하는 정신을 주며 마귀 자신은 하나님처럼 어느 정도의 기적을 인간에게 주는 존재입니다. 그의 최종 목적은 인간을 사망케 하려는 것입니다.
인생은 마귀에게 반항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결국 마귀의 의지를 따르게 되었고 용꿈 꾸면 복되다고까지 하며 마귀에게 구속되어버렸습니다.


마귀는 인간의 의지로는 상대하여 이길 수 없는 영물의 무서운 존재이며 그 어떤 자라도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접신자들이 병마를 쫓는다거나 생활 형통을 위해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들은 사실 알고 보면 마귀의 술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작은 귀신들을 쫓아내고 그보다 더 큰 귀신을 데리고 와서 잠시 편한 듯이 안주하게 하는 술책인데 그것을 모르고 인간은 귀신들의 놀음에 속고 있습니다.

 

이 영적 세계의 난처한 인간의 실존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마음 속에 성령을 충만히 갖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마귀를 대적할 때만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 속에서 나타나는 죄란 무서운 힘을 가진 마귀란 놈이 행사하는 의지입니다. 마귀는 영적 존재이므로 사람이 볼 수 없어 더욱 그의 유혹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마귀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사람을 시험하고 멸망시키기는 것이 그의 목적입니다. 지금까지 만들어 놓은 인간의 죄된 문화 속에서 마귀는 예사롭게 다방면으로 사람을 타락하게 하며 사람들은 이런 처지를 감각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비밀을 알지 못하고 인간은 자신만의 책임으로만 알고 지금까지 도덕적으로 의(義)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과연 시대는 변하였고 정신 문화가 발전했지만 인간이 저지르는 죄에 대하여는 특별한 방도가 없음을 봅니다. 죄의 정체 마귀를 이길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교육과 수도의 생활로도 불가능합니다. 죄의 정체인 마귀의 출처가 하나님의 손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를 이길 길은 하나님의 방편 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방도를 들어야 하고 찾아서 적용해야 합니다.


2. 인간의 실존

 

인간의 존재는 어떻게 조직되어 있고 그 실체는 어떤 것일까요? 아직도 인간은 실존적 그 가치에 대한 바른 확신이 없습니다. 지구촌의 모든 과학 문명은 인간을 향한 목적적 삶을 지향해 왔고 현재도 계속적으로 사람이 어떻게 삶을 영위해야 하는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인간의 기원을 알 수 없고 존재의 가치에 대한 바른 판단이 없습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다소 그 영감적 차이가 있어서 인간의 실존 문제를 논함에 몇 가지 거론되는 설(說)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간 기원적 존재의 이해는 성경을 근거로 할 때만이 가장 사실적이고 빠른 시간에 인간 그 실체의 본질적인 요소에 접근 할 수 있습니다.


1)영육(靈肉)의 존재

 

(1) 3분설

 

먼저 성경에서는 인간의 존재를 말할 때 영혼의 존재를 특이하게 말해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요소로서 인간의 존엄한 인격적 가치를 함께 증거할 수 있는 기초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과 그리고 육체의 조직 속에 또 하나의 정신을 더하여 3분설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인간을 영과 혼과 육체의 조직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플라톤의 인격 3분설에 의존한 학설로 육신과 함께 인간의 정신을 2분화하여 영과 혼 그리고 육체로 인간의 존재를 3분설로 보는 것입니다.


이 학설의 대표적인 성경 구절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을 3가지로 표현하고 있지만,
히브리서 4장 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는 말씀에서는 4가지로 표현해줍니다.


이와 같은 표현들을 인간의 구조에 대한 적절한 성구라 봐야 하는지는 본문에 대한 성경 해석 문제가 주석학적으로 먼저 선결되어야 합니다. 본래 이 구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인간의 실체를 말하기보다 온갖 정신과 인간의 인격 전부를 뜻하고자 하는 표현입니다.

문제는 이 3분설로 토대로 성경을 이해하는 성도의 정신 세계를 교묘하게 오해시키는 자들이 있어서 혼란을 야기시킵니다. 이성적으로 성경을 읽고 듣고 찬송하는 것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극단적인 판단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인간의 의지로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 활동하게 될 때 잘 하는 것으로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신령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평가할 때 너무 영적이니 혼적이니 하면서 분리하면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집니다. 혼적인 생각은 일반적인 인간적 생각이라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단정해버리면 일상의 이성적인 신앙 활동이 모두 무효가 됩니다. 그것은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우리 사람의 정신 활동이란 하나님의 성령이 친히 역사하실 경우도 있고 단순히 성령의 감화로 변화 받은 이성의 활동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후자가 현실 생활에 많이 적용되는 바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5절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여기 말씀에서도 보듯이 영으로도 마음으로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영적인 것과 일반 정신적인 것을 대조하여 영지주의자처럼 신령성에만 치중하면 곤란합니다. 주로 이단들이 그렇게들 주장하며 자신들만이 바른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 편협된 주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영 + 혼 + 육

위와 같이 인간의 구조를 3 부분으로 이해하는 학설입니다. 각각 기능을 설명할 때,

 영 : 히브리어로는 루아흐(j'Wr, ruach)이고 헬라어로는 프뉴마(      )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 관계를 가지는 곳으로 보통 성경에는 성령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인간 됨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하는 인격의 본질입니다.
예레미야 10장 14절 '사람마다 우준하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여기 '생기'란 단어는 루아흐로 사람에게 주신 영을 말합니다. 우상에는 그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영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스가랴 12장 1절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셨는데 곧 루아흐, 곧 영을 지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욥기 12장 10절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생물들에게는 혼으로 인생에게는 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혼은 히브리어 네페쉬(vp,n,)이며 영은 루아흐(j'Wr)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래 구절에는 인생의 혼과 짐승의 혼을 같은 단어 루아흐(j'Wr)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짐승에게도 사람의 영혼과 같은 영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짐승은 죽어 없어지고 사람의 영혼은 위로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뜻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3:21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동물에게는 영이 존재한다는 뜻아 아니고 다만 생명의 본능적 기능으로서 동물 나름대로의 감정 좌소가 있음을 뜻합니다. 성경에 죽은 동물의 영이 돌아온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혼 : 히브리어 네페쉬 (vp,n,)이며 헬라어는 푸쉬케(yuchv)입니다.
동물에게도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창세기 2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다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생기는 네페쉬((vp,n,)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헬라어 푸쉬케(yuchv)로 보통 3분설자들이 혼이라 번역하기 원하는 단어입니다.
혼이라 번역하는 네페쉬가 때로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이나 자신을 뜻할 때도 사용하셨고 혹은 사람의 시체를 말 할 때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 51장 14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로 맹세하시되 내가 진실로 사람을 황충같이 네게 가득히 하리니 그들이 너를 향하여 소리를 높이리라 하시도다'
'자기'라는 단어가 네페쉬로 사용되었습니다.

레위기 22장 4절 '아론의 자손 중 문둥 환자나 유출병이 있는 자는 정하기 전에는 성물을 먹지 말 것이요 시체로 부정하게 된 자나 설정한 자나'
'시체'라는 단어가 네페쉬로 사용되었습니다. 대체로 혼은 인간의 정신적 면을 고려할 때 사용되어지는 낱말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영감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이미 그 혼의 상태가 영적 활동으로 하나님께는 영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질은 하나이나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는 인간적 사고에 머물지만 그것이 성령으로 중생함을 받게 되고 성령의 인도를 얻게 될 때는 하나님의 영으로 사유하고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조직적으로는 하나님이 본래 흙으로 빚으시고 당신의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셔서 사람을 완성하신 바 기원적으로 인간은 2가지 요소로 창조되었습니다.


원죄를 지은 후 인간의 영은 하나님을 떠나 사단의 영감에 감염되고 훈련되어 육체와 함께 영적 사유가 죽게 되었습니다. 단지 우리가 인격 전체를 논하려 할 때 3가지의 본질로 조직된 것처럼 오해하는 것뿐이며 영적으로 정신의 가치를 높일 것을 권면하려 할 때 생기는 한 질적 요소를 두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가진 일반적인 정신의 세계를 이원화해서 영과 혼을 구분 짓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3분설은 대개 신비주의자 혹은 철학가들의 관념에 충실한 사상입니다. 영감주의에 너무 심취하면 사람의 일상적 정서와 생각과 종교적 감정마저 무가치한 것으로 비하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이단 시비에 연루된 자들은 대체로 3분설자들입니다.

 

 육 : 히브리어는 바사르(rc;B, basar)이고 헬라는 살커스(savrx, sarx)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하나님이 흙으로 빚어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2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3장 19절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 2분설

 

영혼 + 육

성경적으로 인간의 조직에 있어서 그 질적 요소로는 2분설이 합당한 이론입니다. 인간은 육(흙)과 영(혼)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성경은 영과 혼을 번갈아 가며 육과 함께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여기 영혼이라 번역한 원어는 3분설자가 말하는 인간의 정신, 혼을 뜻하는 헬라어 푸쉬케(    )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결국 여기 사용된 혼은 영과 다름없는 인간의 본질적 요소인 그 영이기 때문에 국역은 영혼이라 잘 번역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9절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여기에 '영혼'의 원어는 역시 푸쉬케로 기록되었고 결국 인간의 영을 말하는 프뉴마와 동의어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여기 '영혼'으로 번역된 원어는 프뉴마입니다. 그러므로 국역에는 영혼이란 말로서 영과 혼을 함께 번역해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0절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예수님의 영혼도 원어는 프뉴마로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은 이처럼 인간의 본질이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졌다는 표현을 영 혹은 혼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는 2분설이 성경적이라 봅니다. 물론 두 가지의 학설은 신학자들이 모두 수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분설이 정통적으로 바른 견해입니다.

 

여기서 2분화, 3분화의 두 견해가 성립된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영적 존재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본 것입니다. 인간이 지음을 받을 때는 3분화 된 존재가 아니었는데 원죄로 인해 타락한 후 3분화 된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 성질을 가진 것뿐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새로운 영혼의 상태와 그 의지, 그리고 본성에서 성화(聖化)되어 가는 중인 인격적 갈등에서 우리는 인간적인 정신을 혼이라 일컫지만 결코 인간의 조직이 3가지 구조로 지음 받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두 요소로 만드셨고 그 후 타락한 인간의 정신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이성의 합리주의로 이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비신앙인으로 소위 본성 자체로만 살 때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로 영적이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음으로 삶의 목표와 형식이 바뀐 사람에게 순간 순간마다 삶의 정신이 영적이야 혼적이냐를 따지는 것은 쓸데없이 혼란을 가져올 뿐입니다.


2)살았으나 죽은 존재

 

죄인된 인간은 사실상 육신이 살아 있으나 죽은 존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성경에서 생명과 사망에 관한 표현은 단순히 육체적인 것을 뜻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영혼의 상태로 사는 인간은 살았으나 이미 꺾어진 꽃나무처럼 죽은 상태로 보는 것입니다.
즉 사형선고를 받은 자의 기다림처럼 삶의 그 마지막은 멸망이 정해진 상태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인생은 살아 있으나 죽은 존재와 다름없다는 말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여기 '허물'은 탈선을 뜻하고 죄는 과녁을 벗어났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법을 탈선하여 옳지 않은 상태라는 뜻입니다. 고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라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죽었다는 사실은 영생에 관한 감각이 없어졌고 그 기능을 잃은 상태로서 사후의 세계에 대한 사유가 옳지 못하며 대책도 없으며 지상 문화의 삶에 대한 거룩함도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고로 방황하는 영혼의 존재는 끝내 죄로 죽고 말 것이며 살았으나 죽은 자처럼 세상의 짧은 삶에도 진정한 행복이 없고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불안과 불행의 연속으로 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5장 25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어 영적으로 살아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예수 믿어 중생함을 받아서 영이 살았으므로 성도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순간에  부활의 몸을 입어 영생하게 될 것입니다.


3)내세를 갈망하는 인간의 종교심

 

비록 하나님을 떠나 있는 보통 사람들의 정신이라도 그 영혼의 본질적인 성격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입김을 받은 바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동물과 달리 영원을 사모하는 정신이 있고 또한 사후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영의 성질 때문입니다.


전도서 3장 11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우리는 그러한 영원을 사모하는 정신 때문에 종교가 생기고 구원을 얻고자 하는 줄 믿습니다. 죄인이라도 기질은 영생의 사고가 있어서 완전하지는 않으나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영원히 살고자 하는 것은 결국 영생을 바라는 심정입니다. 다만 그 방법을 스스로 알 수 없을 뿐이지 사람은 영원하고 싶은 간절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영이 존재하여 영혼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의지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때 택자이면 반응할 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영성의 기능을 성령께서 살리시면 그제야 잊고 살던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놀라운 회생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중생(重生)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마지막 심판을 하실 때는 불신자도 부활을 하여 영원히 살게 되는 날이 옵니다. 그러나 성도는 생명의 부활로 변할 것이며 불신자는 심판의 부활로 서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하나님이 부르시면 영혼이 육에서 빠져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영과 육이 분리가 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런데 혹 하나님이 그 영혼을 도로 불어넣으시면 육신이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물론 죽은 지 며칠씩 지나도 상관없습니다.

 

성경에 그런 실례가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났어도 영혼을 다시 부르시니 살아났습니다(요한복음 11장). 본래 영혼은 하나님의 숨이요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시므로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주장하십니다(인명재천,人命在天).
때문에 사람이 죽어 흙으로 돌아갈지라도 예수께서 다시 오시고 마지막 심판 때가 되면 지구촌에 왔던 모든 사람은 부활을 입게 되고 영원한 곳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영혼과 육신이 서로 분리된 죽음의 사람이 그 때는 다시 합쳐져서 본래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혼을 다시 육체에 넣으신 결과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목숨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죽을 지경이라도 하나님의 뜻이 계시면 죽지 않고 아무리 살려고 해도 뜻이 없으면 죽음을 받습니다. 이것은 운명론적인 사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과 역사하심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내세를 갈망하는 인간의 정신은 결국 많은 종교를 창안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종교의 역사와 함께 합니다.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죄에서 해방되고(속죄) 구원 혹은 영생을 얻고자 함에 기인합니다. 이런 속죄와 영원을 사모하는 구원의 영적 생각 때문에 생겨나게 된 여러 종교들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1)미개인의 종교

 

천체, 나무, 동식물, 무생물 등 자연을 섬기는 종교입니다. 스피노자(1632-1677, 화란 합리주의 철학자)는 "인간이 행복하려면 신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자연을 아는 것과 같고 자연의 법대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자연 숭배를 언제부터 해 왔을까요? 성경에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에덴동산 중앙의 실과를 먹으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후 갑자기 불안해졌습니다.

공포 속에 그들은 동산 나무 사이로 피신하게 되었는데 이는 곧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자연을 신으로-구원의 방편으로 삼으려는 의도라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0절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벗었으므로 두려워'한 것은 범죄하므로 이제 부끄러워졌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두려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벌을 무서워하여 자연을 의지하고 숨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15절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그러나 마지막 때가 되면 인생이 의지하고 신처럼 섬기려는 자연들도 모두 파괴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의지할 바는 자연이 아닙니다. 가시적으로 보이는 과학적 산물에 영혼의 불안을 의탁하는 어리석은 사고가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것보다 강하게 작용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잘못된 판단이며 그것은 사단의 조종입니다. 자연은 파괴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29절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2)인간을 신격화하는 종교들

 

카톨릭의 교황 신성화, 여러 이단들의 교주, 석가나 마호멭 등 인간을 신격화하여 그 교주를 신처럼 모시는 종교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란 죄와 허물로 죽은 영적 상태이기 때문에 전혀 신성시 할 대상이 아님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인생은 태어나면서 범죄한 아담 후손으로 죄를 안고 태어나며 거짓된 마귀의 정신을 받아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존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살리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1-2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교황무오설은 근본적으로 성경을 무시하는 억지 주장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면 누구나 불의한 존재이며 아무라도 무흠할 수가 없습니다. 교황도 평범한 한 부모에게서 나온 인간이기에 그도 실수 할 수 있고 죄를 의도적으로 지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교회 역사에 보면 교황무오설의 허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중세카톨릭의 암흑시대만 보아도 우리는 교황의 잘못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천주교는 교황무오설을 계속 주장합니다. 마리아가 영원한 처녀라든가 마리아가 승천했다는 것 등 인간을 신성시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사이비종교에서 교주가 신성시되는 것과 마리아가 찬양을 받는 것은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찬양과 기도는 하나님이 받으실 경배이지 사람이 받을 수 없습니다. 이단에게 매료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성경적인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됨과 그 한계를 알았다면 아무라도 사람을 신처럼 믿을 생각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존경스러운 스승이라도 신성시(神聖視)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에 위험하고 긍휼이 필요한 존재일 뿐입니다. 다만 스승된 자는 일반인보다 좀더 성숙한 인격과 도리를 가지고 가르치는 자의 덕을 쌓아야 할 것이며 스스로 성찰하는 시간이 많아야 합니다. 지도자와 피지도자의 관계에 인격적 차이는 있을지라도 절대시할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권위주의라는 말과 신성시한다는 말은 차이가 있습니다. 권위는 있어도 신성시는 할 수 없습니다.

 

(3)윤리적 종교

 

대개 종교에는 일정한 규범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가 선해야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짐작은 어느 시대의 사람에게나 안고 있는 신에게의 부담감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고 단정합니다.
시편 14장 2-3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선한 것같아도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선치 않으며 도리어 악하게 보인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인간이 행한 일들이 얼마나 선한 것일까요? 물론 인간적으로는 덕행(德行)이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사람은 흉악한 범죄의 역사를 안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이라고 한 그 선지자는 위대한 인물임에도 자아를 부패한 인간으로 고백합니다. 그의 개인적인 무슨 범죄적 사실이 있어서 고한 말이 아닙니다.
동방의 의인이라고 했고 큰 부자로 자식들을 건전하게 키우고자 했으며 이웃에게 잘 하였던 욥이란 사람도 인생을 논하기를, 욥기 25장 5-6절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사람을 보실 때는 인간에게 의로움이란 하나도 없으며 예수 믿고 겸손하게 자신을 깊이 돌이켜 보게 될 때, 참으로 벌레같은 존재요, 그 삶의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얼마나 많은 죄악상이 드러나는지 우리는 속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어느 정도의 도덕과 선행이면 신의 분노가 풀어지고 구원의 혜택이 있으리라고 여깁니다. 일반적인 종교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는 무엇이 선(善)이며 악(惡)인지 그 척도가 없습니다.


시대마다 가치관이 달라지기 때문에 선악을 구분하기 어렵고 지역마다 풍속과 사회적 문화에 큰 차이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윤리주의적 구원관은 세계적이고 보편화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때문에 윤리주의 구원관은 사회의 도덕적 보편성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 얻을 윤리관을 정할 수 없습니다.

 

(4)물질만능, 과학만능주의

 

인간은 결국 물질과 과학만능주의로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하려 하는 아주 가당찮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0세기 말부터 해일처럼 일어난 물질주의의 거대한 유물주의적 사고와 가치관은 공산주의 뿐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에 빈부의 양극 현상을 만들어 내었고 국제사회도 부국의 힘이 어떤 원칙보다 현실적으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오늘의 첨단과학은 문화의 테크닉이지만 삶의 의미를 상실케 하는 부작용을 많이 낳았습니다. 너무 과학화를 지향하다가 인간미를 잃고 자연적인 정서가 매말라버린 것이 많습니다.
물질을 신으로 여기던 유물사관의 공산주의는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물질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참된 행복을 주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가정과 교육을 무시하고 돈만 벌겠다는 사람의 정신 속에는 물질주의라는 관념의 신이 들어앉아 있습니다. 그런 정신 가운데 과연 가족이나 개인의 영혼이 온전할까요?

 

(5)적그리스도를 신으로 믿을 때가 옵니다

 

온 세계는 말세가 되면 결국 적그리스도라는 세계적 정치자를 신으로 모시게 될 때 세상의 종말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그 세계 지도자인 적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통합되어 그를 위한 하나의 종교가 될 것입니다.
세상을 지배하던 공중에 있던 사단(마귀)이 직접 땅에 내려와 세상을 지배하게 되니 얼마나 지혜롭게 보이며 능력이 대단할지 짐작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그를 신이라 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30절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요한계시록 13장 8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그 때가 되면 사회적 구조가 그를 중심으로 통합되는 것이 유익하다고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정치, 경제, 종교는 그를 위해 이용되고 주도될 것입니다. 마침내 인간의 인본주의 역사가 최고조에 이를 것이나 주 예수께서 재림하시면서 그들과 불신자들을 심판하시게 될 것입니다. 왜냐면 적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삶의 문화는 죄로 충만할 것이며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에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내세를 갈망하는 인간의 종교심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진정한 구원에 대해서 논하고 그 구원의 체험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얼마나 그 구원의 객관적 가치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하고 기독교 구원의 그 본질적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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