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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1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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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621 |
2005. 9.18.
이스라엘의 불평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서 많은 사건들을 경험했습니다. 민족 전체의 생존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운 시절이었으니까 지금 우리에게는 사소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매우 심각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십계명과 율법, 불기둥과 구름기둥, 금송아지, 놋뱀, 식수, 모세의 권위에 도전한 아론과 미리암, 성막, 크고 작은 전쟁 등등. 그중의 하나가 바로 ‘만나’ 사건입니다. 민수기 11장4절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보도되어 있습니다. 간혹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이라고도 하긴 하지만 핵심은 역시 만나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던 시기에 왜 이런 문제가 불거지게 되었을까요?
민수기도 그렇지만 여기 출애굽기에서도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거리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는 게 이 설화의 단초입니다. 오늘 본문은 출애굽 이후 한 달 반이 지났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출애굽 당시에 비축했던 먹거리들이 이제 바닥 날 때쯤 된 게 아닐까요? 그들은 아마 광야에서 먹거리를 구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약간의 들짐승을 잡는다거나, 또는 광야에서 거주하는 유목민들에게서 조금씩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지 모르죠. 그러나 그런 정도로 수십만 명의 먹는 문제를 계속해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왜 이런 먹을 것에 대한 준비도 없이 광야로 나왔을까요? 그들이 그렇게 대책 없이 무조건 나온 것은 아닙니다. 원래 이 미디안 광야를 통과하는 데는 장정 걸음으로 보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부녀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웬만하면 한 달 정도면 그들이 목적지로 삼은 가나안 언저리까지는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예상이 빗나간 겁니다. 한 달 반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진척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앞으로도 40년을 이 광야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모세를 따라서 출애굽에 나설 사람들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을까요? 모세까지 포함해서 그들은 그들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 것도 모르고 이렇게 엑서더스의 대장정에 나섰다가 그 초장부터 큰 시련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게 바로 우리 인생길이 아닐까요?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 달만 고생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결국 40년의 세월이 걸렸던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런 길을 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땅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드림’을 안고 시작했지만 매우 혹독한 현실을 만난 이스라엘처럼 우리의 현실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 현실 속에서 아무도 야무진 꿈만 먹고 살지는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이렇게 투덜거렸습니다.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야훼의 손에 맞아 죽느니만 못하다. 너희는 거기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우리를 이 광야로 데리고 나와 모조리 굶겨 죽일 작정이냐?”(3절). 민수기 11장 4절에서도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를 먹지 못하고 허구한 날 만나만 먹고는 살지 못살겠다고 불평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 있습니다. 어느 쪽을 근거로 삼는다고 하더라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는 문제로 인해서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그들의 이런 불평은 그 문제가 해결된 후로도 계속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본문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이 없어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하면 좀 곤란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투덜거리고 불평을 쏟아냈다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그게 잘했다는 말은 아니지만 사람은 늘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도 늘 그런 불평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한국의 경제수준이 전세계 150 개 이상의 나라 중에서 상위에 속합니다. 지금 경제가 좋지 않다고 불평들이 많긴 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잘 살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광야에서 실제로 생존의 위기를 절감하고 투덜거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반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린 아들 딸들이 굶고 있다면 누구인들 불평하지 않겠는가 말입니다.
만나의 실체
백성들의 불평을 들은 모세와 아론은 아마 마음이 상했을 겁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그 약속에 의지해서 함께 광야로 나온 마당에 어려움이 생겼다고 해서 툭하면 자신들을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마음이 갈 리가 없습니다. 그들 사이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을 겁니다.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을지 모르죠. 아니면 다른 종족과 전쟁을 벌여서라도 먹을거리를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없었을까요? 아마 그들 중에서 실제로 이집트로 돌아간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성서는 물론 이런 것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일어난 모든 사실들을 그대로 전하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개입을 전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현실로 닥친 문제를 해결해야 할 매우 절박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모세에게도 이런 문제를 해결할만한 무슨 뾰족한 방도가 있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이럴 때 하나님을 향해서 도움을 구합니다. 이런 모세의 간구에 대한 야훼 하나님의 응답이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먹을 것을 내려 줄 터이니, 백성들은 날마다 나가서 하루 먹을 것만 거두어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않은지 시험해 보리라.”(4절). 이 말씀은 곧 만나를 내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치고 있는 그 광야에 매일 아침마다 만나가 깔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자기 식구가 먹을 만큼만 거두어들여야 했습니다. 욕심을 내서 더 많이 거두어들이면 그것은 곧 상했습니다. 여섯째 날에 두 배를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는 건 일주일에 하루씩 모든 노동을 멈추어야 한다는 안식일 규정과 연관됩니다.
도대체 이 만나 사건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만나는 그렇게 특별한 현상이 아닙니다. 이런 일들은 지금도 시나이 반도 내륙 지방에서 흔하게 일어난다고 합니다. 연지벌레에게서 나오는 분비물이 나뭇잎에 맺혔다가 땅에 떨어진 다음에 기온이 내려가는 밤중에 단단하게 굳습니다. 사람들은 아침에 그걸 모아서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알맹이들은 낮은 온도에서 녹기 때문에 해가 뜨면 얼마 있지 않아서 사라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만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해서 특별하게 일으키신 초자연적 사건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만나 사건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성서는 왜 이런 사건을 하나님이 일으키신 특별한 은총인 것처럼 보도하고 있을까요?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서가 아주 일반적인 현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통로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자기를 알리십니다. 흡사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똑같이 햇볕과 비를 받을 수 있듯이 하나님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뜻을 알리십니다. 만약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자기를 알리신다면 그건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정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만 특별대우 받는 걸 좋아하겠지만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실 수도 없습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시나이 반도 내륙에 살던 모든 사람이 아침마다 먹을 수 있는 자연 현상이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십니다.
그런데 왜 똑같은 만나를 먹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인식했고, 다른 민족들을 그렇게 인식하지 못했을까요? 여기에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별한 역할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삶과 그 역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고 해석하고 인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홍해가 갈라진 사건을 놓고 하나님이 자기들을 도와준 사건으로 인식했습니다. 화산 폭발을 보고 하나님이 자기들을 인도하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생각했습니다.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들이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한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이 만나 사건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출애굽 이후 한 달 반이 흘렀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출애굽 당시에 비축했던 먹을거리가 거의 바닥이 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초조했을는지는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까딱하다가는 광야에서 완전히 민족 전체가 몰살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빠졌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그런 방식으로 몰살당한 민족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비등한 여론 앞에서 모세와 아론은 깊은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 출애굽을 주도한 모세로서는 진퇴양난에 빠진 셈입니다. 이집트로 돌아갈 수도 없고, 양식은 바닥났습니다. 그는 생존의 절대 위기를 직감했습니다. 그는 기도 중에서 만나가 생각났습니다. 성서가 보도하고 있진 않지만 모세가 광야에서 목동으로 지내던 40년 동안 이 만나를 맛본 경험이 없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 이거라도 먹고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 이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먹거리다. 대략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이제 모세는 만나를 준비하신 분이 바로 야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렸습니다.
일상의 영성이 바로 이것입니다. 혹은 역사적 역성이라는 게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이 구체적인 역사에 개입하고 있는 하나님의 힘을, 그 은총을 여실하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성서 기자들이며, 예언자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만나를 먹고 광야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그들 중에서도 이미 만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이 자신들의 생존을 지키신다는 그 은총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모세는 그걸 인식했습니다.
야훼 하나님 인식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핵심은 결국 만나가 아니라는 게 분명합니다. 만나를 통해서 인식하게 된 하나님이 그 핵심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녁에는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신 분이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그리고 아침이 되면 야훼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6,7절). 12절에서는 이와 비슷한 내용이 야훼의 입을 통해서 모세에게 전달됩니다. “너는 그들에게 ‘해거름에 고기를 먹고 아침에 떡을 실컷 먹고 나서야 너희는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고 일러주어라.” 6절의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와 12절의 ‘야훼가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는 똑같은 내용입니다. 이 만나 사건을 통해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신 분이 야훼이시며, 그 야훼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만나 사건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돈독해지고, 그들의 하나님 인식이 심화했을까요? 여기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뒤로도 그들은 어려움을 만나기만 하면 늘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모세를 원망했다는 것은 곧 그들이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자신들을 특별하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도 여전히 신앙적 심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곧 이 만나 사건이 그들에게 그렇게 확실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최소한의 생존이 보장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약간의 위로를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몇 가지 특별한 사건을 경험하는 것으로 가능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말하지만 그런 증거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이 말은 거꾸로 이 세상 모든 게 곧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아주 놀라운 일을 보고도 거기서 아무런 생명의 깊이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일상적인 일을 보면서도 놀라운 생명의 신비를 발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만나는 필요 없습니다. 아니 우리의 주변은 늘 만나로 가득합니다. 중요한 건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영적인 감수성이 열려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변의 모든 것이 영적인 만나가 되어 야훼가 곧 하나님임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불평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서 많은 사건들을 경험했습니다. 민족 전체의 생존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운 시절이었으니까 지금 우리에게는 사소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매우 심각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십계명과 율법, 불기둥과 구름기둥, 금송아지, 놋뱀, 식수, 모세의 권위에 도전한 아론과 미리암, 성막, 크고 작은 전쟁 등등. 그중의 하나가 바로 ‘만나’ 사건입니다. 민수기 11장4절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보도되어 있습니다. 간혹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이라고도 하긴 하지만 핵심은 역시 만나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던 시기에 왜 이런 문제가 불거지게 되었을까요?
민수기도 그렇지만 여기 출애굽기에서도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거리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는 게 이 설화의 단초입니다. 오늘 본문은 출애굽 이후 한 달 반이 지났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출애굽 당시에 비축했던 먹거리들이 이제 바닥 날 때쯤 된 게 아닐까요? 그들은 아마 광야에서 먹거리를 구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약간의 들짐승을 잡는다거나, 또는 광야에서 거주하는 유목민들에게서 조금씩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지 모르죠. 그러나 그런 정도로 수십만 명의 먹는 문제를 계속해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왜 이런 먹을 것에 대한 준비도 없이 광야로 나왔을까요? 그들이 그렇게 대책 없이 무조건 나온 것은 아닙니다. 원래 이 미디안 광야를 통과하는 데는 장정 걸음으로 보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부녀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웬만하면 한 달 정도면 그들이 목적지로 삼은 가나안 언저리까지는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예상이 빗나간 겁니다. 한 달 반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진척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앞으로도 40년을 이 광야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모세를 따라서 출애굽에 나설 사람들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을까요? 모세까지 포함해서 그들은 그들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 것도 모르고 이렇게 엑서더스의 대장정에 나섰다가 그 초장부터 큰 시련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게 바로 우리 인생길이 아닐까요?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 달만 고생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결국 40년의 세월이 걸렸던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런 길을 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땅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드림’을 안고 시작했지만 매우 혹독한 현실을 만난 이스라엘처럼 우리의 현실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 현실 속에서 아무도 야무진 꿈만 먹고 살지는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이렇게 투덜거렸습니다.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야훼의 손에 맞아 죽느니만 못하다. 너희는 거기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우리를 이 광야로 데리고 나와 모조리 굶겨 죽일 작정이냐?”(3절). 민수기 11장 4절에서도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를 먹지 못하고 허구한 날 만나만 먹고는 살지 못살겠다고 불평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 있습니다. 어느 쪽을 근거로 삼는다고 하더라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는 문제로 인해서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그들의 이런 불평은 그 문제가 해결된 후로도 계속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본문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이 없어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하면 좀 곤란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투덜거리고 불평을 쏟아냈다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그게 잘했다는 말은 아니지만 사람은 늘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도 늘 그런 불평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한국의 경제수준이 전세계 150 개 이상의 나라 중에서 상위에 속합니다. 지금 경제가 좋지 않다고 불평들이 많긴 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잘 살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광야에서 실제로 생존의 위기를 절감하고 투덜거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반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린 아들 딸들이 굶고 있다면 누구인들 불평하지 않겠는가 말입니다.
만나의 실체
백성들의 불평을 들은 모세와 아론은 아마 마음이 상했을 겁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그 약속에 의지해서 함께 광야로 나온 마당에 어려움이 생겼다고 해서 툭하면 자신들을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마음이 갈 리가 없습니다. 그들 사이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을 겁니다.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을지 모르죠. 아니면 다른 종족과 전쟁을 벌여서라도 먹을거리를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없었을까요? 아마 그들 중에서 실제로 이집트로 돌아간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성서는 물론 이런 것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일어난 모든 사실들을 그대로 전하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개입을 전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현실로 닥친 문제를 해결해야 할 매우 절박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모세에게도 이런 문제를 해결할만한 무슨 뾰족한 방도가 있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이럴 때 하나님을 향해서 도움을 구합니다. 이런 모세의 간구에 대한 야훼 하나님의 응답이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먹을 것을 내려 줄 터이니, 백성들은 날마다 나가서 하루 먹을 것만 거두어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않은지 시험해 보리라.”(4절). 이 말씀은 곧 만나를 내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치고 있는 그 광야에 매일 아침마다 만나가 깔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자기 식구가 먹을 만큼만 거두어들여야 했습니다. 욕심을 내서 더 많이 거두어들이면 그것은 곧 상했습니다. 여섯째 날에 두 배를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는 건 일주일에 하루씩 모든 노동을 멈추어야 한다는 안식일 규정과 연관됩니다.
도대체 이 만나 사건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만나는 그렇게 특별한 현상이 아닙니다. 이런 일들은 지금도 시나이 반도 내륙 지방에서 흔하게 일어난다고 합니다. 연지벌레에게서 나오는 분비물이 나뭇잎에 맺혔다가 땅에 떨어진 다음에 기온이 내려가는 밤중에 단단하게 굳습니다. 사람들은 아침에 그걸 모아서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알맹이들은 낮은 온도에서 녹기 때문에 해가 뜨면 얼마 있지 않아서 사라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만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해서 특별하게 일으키신 초자연적 사건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만나 사건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성서는 왜 이런 사건을 하나님이 일으키신 특별한 은총인 것처럼 보도하고 있을까요?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서가 아주 일반적인 현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통로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자기를 알리십니다. 흡사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똑같이 햇볕과 비를 받을 수 있듯이 하나님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뜻을 알리십니다. 만약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자기를 알리신다면 그건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정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만 특별대우 받는 걸 좋아하겠지만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실 수도 없습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시나이 반도 내륙에 살던 모든 사람이 아침마다 먹을 수 있는 자연 현상이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십니다.
그런데 왜 똑같은 만나를 먹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인식했고, 다른 민족들을 그렇게 인식하지 못했을까요? 여기에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별한 역할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삶과 그 역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고 해석하고 인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홍해가 갈라진 사건을 놓고 하나님이 자기들을 도와준 사건으로 인식했습니다. 화산 폭발을 보고 하나님이 자기들을 인도하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생각했습니다.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들이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한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이 만나 사건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출애굽 이후 한 달 반이 흘렀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출애굽 당시에 비축했던 먹을거리가 거의 바닥이 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초조했을는지는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까딱하다가는 광야에서 완전히 민족 전체가 몰살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빠졌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그런 방식으로 몰살당한 민족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비등한 여론 앞에서 모세와 아론은 깊은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 출애굽을 주도한 모세로서는 진퇴양난에 빠진 셈입니다. 이집트로 돌아갈 수도 없고, 양식은 바닥났습니다. 그는 생존의 절대 위기를 직감했습니다. 그는 기도 중에서 만나가 생각났습니다. 성서가 보도하고 있진 않지만 모세가 광야에서 목동으로 지내던 40년 동안 이 만나를 맛본 경험이 없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 이거라도 먹고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 이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먹거리다. 대략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이제 모세는 만나를 준비하신 분이 바로 야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렸습니다.
일상의 영성이 바로 이것입니다. 혹은 역사적 역성이라는 게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이 구체적인 역사에 개입하고 있는 하나님의 힘을, 그 은총을 여실하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성서 기자들이며, 예언자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만나를 먹고 광야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그들 중에서도 이미 만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이 자신들의 생존을 지키신다는 그 은총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모세는 그걸 인식했습니다.
야훼 하나님 인식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핵심은 결국 만나가 아니라는 게 분명합니다. 만나를 통해서 인식하게 된 하나님이 그 핵심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녁에는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신 분이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그리고 아침이 되면 야훼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6,7절). 12절에서는 이와 비슷한 내용이 야훼의 입을 통해서 모세에게 전달됩니다. “너는 그들에게 ‘해거름에 고기를 먹고 아침에 떡을 실컷 먹고 나서야 너희는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고 일러주어라.” 6절의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와 12절의 ‘야훼가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는 똑같은 내용입니다. 이 만나 사건을 통해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신 분이 야훼이시며, 그 야훼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만나 사건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돈독해지고, 그들의 하나님 인식이 심화했을까요? 여기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뒤로도 그들은 어려움을 만나기만 하면 늘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모세를 원망했다는 것은 곧 그들이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자신들을 특별하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도 여전히 신앙적 심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곧 이 만나 사건이 그들에게 그렇게 확실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최소한의 생존이 보장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약간의 위로를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몇 가지 특별한 사건을 경험하는 것으로 가능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말하지만 그런 증거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이 말은 거꾸로 이 세상 모든 게 곧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아주 놀라운 일을 보고도 거기서 아무런 생명의 깊이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일상적인 일을 보면서도 놀라운 생명의 신비를 발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만나는 필요 없습니다. 아니 우리의 주변은 늘 만나로 가득합니다. 중요한 건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영적인 감수성이 열려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변의 모든 것이 영적인 만나가 되어 야훼가 곧 하나님임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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