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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마21:23-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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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628 |
2005. 9.25.
권위에 대한 질문
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모든 경우가 똑같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고, 반대하던 사람들은 소위 ‘오피니언 리더’들이었습니다. 그게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훨씬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종교인들과 지식인들이 오히려 적대적으로 행동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이야기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이런 권한을 주었습니까?”(23절). 병행구인 마가복음(11:28)과 누가복음(20:2)에도 이와 거의 똑같은 질문이 보도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이 질문이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진 것 같습니다. 이 질문의 핵심은 설교할 수 있는 자격증을 어디서 땄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들의 질문은 매우 합리적입니다. 만약 어중이떠중이 할 것 없이 아무나 성전에서 가르친다면 청중들은 갈피를 잡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의 예배 시간에 아무나 설교하는 게 아니라 소위 목사라는 자격증을 딴 사람들만 설교하게 하는 것과 그 실정이 비슷합니다. 따라서 지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리고 마가복음이 첨부하고 있는 서기관들이 예수를 향해서 이렇게 질문하는 것 자체를 우리가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뭐가 어때! 내가 내 입 갖고 말할 자유도 없나?” 하는 식으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한발 물러서는 방식으로 이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요한은 누구에게서 권위를 받아 세례를 베풀었는지 대답해보시오. 그 대답을 듣고 나도 당신들의 질문에 대답하겠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의외의 질문을 다시 받고 당혹스러워했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고 어떤 대답이 유리한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권위가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요한을 믿지 않는 자신들의 태도가 문제이고, 그렇다고 요한의 권위를 무시하면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따르는 민중들에게 공격당할 게 걱정되었습니다. 대답이 궁색해진 그들은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마 실제로 모른다기보다는 말하기 곤란하다는 뜻이겠지요. 그러자 예수님도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유대교 지도자들 사이에 무슨 문제가 놓여 있기에 이렇듯 말장난처럼 보이는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도대체 유대교 지도자들이 생각하는 권위는 무엇일까요? 그들에게는 법과 전통이 곧 권위입니다. 법과 전통이 허락하는 것은 진리이고, 허락되지 않은 것은 거짓이거나, 아무리 좋게 보아도 아직 진리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법과 전통은 분명히 문명을 일으킨 인간의 아름다운 업적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사회의 질서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문명국가 치고 법과 전통을 수호하지 않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러나 법과 전통은 아무리 세련미로 치장했다고 하더라도 상대적인 가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이 대한민국의 법도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상대적인 가치입니다. 이 나라의 교육제도 역시 상대적인 질서에 불과합니다. 물론 교회 제도 역시 상대적입니다.
법과 전통이 본질적으로 상대적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것이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 왔을 때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가 사실은 비슷한 내용이기는 합니다. 어쨌든지 인간 사회를 지탱해주고 있는 법과 전통이 안고 있는 그 한계를 노출시킴으로써 보다 나은 질서로 변혁, 개혁되어야만 그 공동체, 그 사회, 그 체제가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자신들의 법과 전통을 상대화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예수님의 책망을(마 21:13) 그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날수록 그들은 더욱 더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합리적 논리를 찾아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것이 곧 “당신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시오?”였습니다. 그들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은 진리가 아니라 오직 법과 전통이라는 권위뿐이었습니다.
두 아들의 비유
유대교 지도자들의 질문을 비껴가신 예수님은 그 대신 비유의 말씀으로 그들의 실체를 폭로하셨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전하고 있지만, 마태복음은 그 사이에 ‘두 아들의 비유’를 끌어들였습니다. 이 비유는 네 복음서 중에서 여기 마태복음서에만 나오는데, 아마 마태 공동체에만 독자적으로 전승된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시켰습니다. 이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하더니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 똑같은 말을 들은 둘째 아들은 가겠다는 대답만 하고 실제로는 일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아주 간단한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아마 예수님의 권위를 트집 잡은 제사장들과 장로로 추정되는 이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둘 중에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은 누구이겠느냐?” 그들은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너무 뻔한 질문이고 대답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서 이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 중요합니다. 전혀 예상 밖의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31절).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는 말씀일까요? 예수님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그런 태도를 한 번 더 확인합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고 그를 믿지 않았다.”(32절).
이런 비유는 그렇게 논리적인 게 아닙니다.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누가 보더라도 썩 괜찮은 사람이고, 세리와 창녀들은 누가 보더라도 문제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세리와 창녀가 먼저 들어가고 있다는 게 말이 될까요? 말은 된다고 하더라도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이런 일은 거의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거나 그의 행동을 보면 화가 났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라즈니쉬는 <예수, 도를 말하다>에서 부처와 예수를 그렇게 구분해서 설명하더군요. 부처의 가르침은 너무 고상하기 때문에 민중이든 귀족이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 했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기존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허물어뜨리기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겁니다. 일리가 있는 설명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는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화를 북돋았을 것입니다.
경건주의
다시 질문합시다. 도대체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마음에 와 닿지 않을까요? 반면에 세리와 창녀들은 무슨 이유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의 기독교신자들이 이런 본문을 얼마나 진지하게 읽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 잘 믿고, 교회 열심히 다니는 사람보다는 홍등가에서 몸을 파는 여자들이나 술집의 작부들이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는 이 비유 앞에서 무언가 위기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는 성서를 수박겉핥기 식으로 읽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이 말씀은 사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비유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교회 다니더라도 잘난 척하지 말라는 말씀이겠지. 또는 우리는 영적으로 세리와 창녀와 같이 부끄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가르침이겠지. 이런 생각이 근본적으로 틀렸다고는 볼 수 없지만, 우리는 이 말씀에 좀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천한 사람들은 받아들였다는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인간에 대한 심층적, 혹은 영적인 인식이 먼저 필요합니다. 물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다시 질문해봅시다. 도대체 인간이 뭐기에, 하나님 나라가 뭐기에 세상의 천덕꾸러기들이 고상한 지도자들보다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는 말입니까?
제가 보기에 여기서 결정적인 요인은 자기를 비우는가 아닌가에 놓여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서 그 이외의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는 자신의 모든 업적, 인간의 모든 행위, 도덕적인 행위나 종교적인 행위를 포함한 그 어떤 업적도 무의미합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옆으로 제쳐 놓는 것 말고 하나님 나라에 소용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교회당을 건축하는 것이나 전도 왕이 되는 것도 별로 필요 없습니다. 이 말은 거꾸로도 유효합니다. 세리와 창녀 같이 살았던 사람의 나쁜 행위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볼 때 가치 있는 행위나, 또는 가치 없는 행동이나 그 어떤 행위도 작용하지 못합니다. 오직 한 가지만 필요합니다.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이제 하나님 나라가 그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런 설명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또는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다는 말인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그런 건 결코 아닙니다. 좀 구체적으로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는지요.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우리가 어떻게 누릴 수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성취할 때도 물론 기쁠 수 있겠지만 그런 것들은 늘 한정적입니다. 기쁨은 잠시이고, 즉시 우리는 더 많은 성적을 올려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히게 되겠지요.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평생 자기를 성취하는 일에 매달리고, 그것의 결과에 따라서 뒤숭숭하게 살아가는 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신치료를 받기도 하고, 기 수련이다, 단전호흡이다 하면서 자신 내면의 평정을 훈련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훈련이 효과가 있긴 하겠지만, 그것도 일시적이거나 부분적인 치료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성서는 기쁨과 평화가 그런 심리 치료로 가능한 세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조금 더 단순하고 역설적인 것을 제시합니다.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리와 창녀들은 사람들에게 내어놓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누가 옆에서 비우라 말라 하기 전에 그들은 이미 마음을 비우게 됩니다. 철저하게 무너져 버린 그 순간에 놀라운 평화와 기쁨이 그들을 사로잡습니다. 철저하게 망가진 삶에 전혀 새로운 차원의 기쁨과 희망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칭찬이나 위로가 아니라 존재의 깊이에서, 생명의 신비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알코올 중독자가 그렇지 않은 우리보다 먼저 그런 세계에 들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세리와 창녀들과 달리 지금 예수님의 권위를 문제 삼고 있는 대제사장들, 장로들, 서기관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 내세울 게 너무 많은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문제는 좀 더 세밀한 통찰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다거나 교만하다거나, 교권에 사로잡힌 못된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말로 매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여러 종류의 고상한 종교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요즘에도 일반화 되어 있는 그런 많은 종교 행위를 통해서 종교적 만족감을 얻는 것이 곧 ‘경건주의’입니다. 그것은 나름으로 가치가 있습니다. 세련된 예배와 기도와 성서읽기와 봉사는 귀한 가치들입니다. 그러나 그럴듯한 종교적 경건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빼앗게 되면 순간에 인간의 삶을 파괴합니다. 그것이 곧 경건주의의 함정입니다. 일단 여기에 빠지게 되면 흡사 개미구멍에 걸려든 개미처럼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경건생활을 하면서도 경건주의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모든 삶이 망가졌던 세리와 창녀들처럼 모든 자신의 업적, 꿈, 야망을 내려놓아야만 합니다.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그래야만 합니다. 그럴 때 생명의 영인 성령이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할 것입니다. 그게 곧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건입니다.
권위에 대한 질문
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모든 경우가 똑같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고, 반대하던 사람들은 소위 ‘오피니언 리더’들이었습니다. 그게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훨씬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종교인들과 지식인들이 오히려 적대적으로 행동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이야기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이런 권한을 주었습니까?”(23절). 병행구인 마가복음(11:28)과 누가복음(20:2)에도 이와 거의 똑같은 질문이 보도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이 질문이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진 것 같습니다. 이 질문의 핵심은 설교할 수 있는 자격증을 어디서 땄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들의 질문은 매우 합리적입니다. 만약 어중이떠중이 할 것 없이 아무나 성전에서 가르친다면 청중들은 갈피를 잡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의 예배 시간에 아무나 설교하는 게 아니라 소위 목사라는 자격증을 딴 사람들만 설교하게 하는 것과 그 실정이 비슷합니다. 따라서 지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리고 마가복음이 첨부하고 있는 서기관들이 예수를 향해서 이렇게 질문하는 것 자체를 우리가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뭐가 어때! 내가 내 입 갖고 말할 자유도 없나?” 하는 식으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한발 물러서는 방식으로 이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요한은 누구에게서 권위를 받아 세례를 베풀었는지 대답해보시오. 그 대답을 듣고 나도 당신들의 질문에 대답하겠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의외의 질문을 다시 받고 당혹스러워했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고 어떤 대답이 유리한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권위가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요한을 믿지 않는 자신들의 태도가 문제이고, 그렇다고 요한의 권위를 무시하면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따르는 민중들에게 공격당할 게 걱정되었습니다. 대답이 궁색해진 그들은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마 실제로 모른다기보다는 말하기 곤란하다는 뜻이겠지요. 그러자 예수님도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유대교 지도자들 사이에 무슨 문제가 놓여 있기에 이렇듯 말장난처럼 보이는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도대체 유대교 지도자들이 생각하는 권위는 무엇일까요? 그들에게는 법과 전통이 곧 권위입니다. 법과 전통이 허락하는 것은 진리이고, 허락되지 않은 것은 거짓이거나, 아무리 좋게 보아도 아직 진리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법과 전통은 분명히 문명을 일으킨 인간의 아름다운 업적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사회의 질서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문명국가 치고 법과 전통을 수호하지 않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러나 법과 전통은 아무리 세련미로 치장했다고 하더라도 상대적인 가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이 대한민국의 법도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상대적인 가치입니다. 이 나라의 교육제도 역시 상대적인 질서에 불과합니다. 물론 교회 제도 역시 상대적입니다.
법과 전통이 본질적으로 상대적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것이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 왔을 때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가 사실은 비슷한 내용이기는 합니다. 어쨌든지 인간 사회를 지탱해주고 있는 법과 전통이 안고 있는 그 한계를 노출시킴으로써 보다 나은 질서로 변혁, 개혁되어야만 그 공동체, 그 사회, 그 체제가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자신들의 법과 전통을 상대화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예수님의 책망을(마 21:13) 그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날수록 그들은 더욱 더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합리적 논리를 찾아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것이 곧 “당신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시오?”였습니다. 그들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은 진리가 아니라 오직 법과 전통이라는 권위뿐이었습니다.
두 아들의 비유
유대교 지도자들의 질문을 비껴가신 예수님은 그 대신 비유의 말씀으로 그들의 실체를 폭로하셨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전하고 있지만, 마태복음은 그 사이에 ‘두 아들의 비유’를 끌어들였습니다. 이 비유는 네 복음서 중에서 여기 마태복음서에만 나오는데, 아마 마태 공동체에만 독자적으로 전승된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시켰습니다. 이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하더니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 똑같은 말을 들은 둘째 아들은 가겠다는 대답만 하고 실제로는 일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아주 간단한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아마 예수님의 권위를 트집 잡은 제사장들과 장로로 추정되는 이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둘 중에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은 누구이겠느냐?” 그들은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너무 뻔한 질문이고 대답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서 이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 중요합니다. 전혀 예상 밖의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31절).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는 말씀일까요? 예수님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그런 태도를 한 번 더 확인합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고 그를 믿지 않았다.”(32절).
이런 비유는 그렇게 논리적인 게 아닙니다.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누가 보더라도 썩 괜찮은 사람이고, 세리와 창녀들은 누가 보더라도 문제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세리와 창녀가 먼저 들어가고 있다는 게 말이 될까요? 말은 된다고 하더라도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이런 일은 거의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거나 그의 행동을 보면 화가 났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라즈니쉬는 <예수, 도를 말하다>에서 부처와 예수를 그렇게 구분해서 설명하더군요. 부처의 가르침은 너무 고상하기 때문에 민중이든 귀족이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 했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기존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허물어뜨리기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겁니다. 일리가 있는 설명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는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화를 북돋았을 것입니다.
경건주의
다시 질문합시다. 도대체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마음에 와 닿지 않을까요? 반면에 세리와 창녀들은 무슨 이유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의 기독교신자들이 이런 본문을 얼마나 진지하게 읽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 잘 믿고, 교회 열심히 다니는 사람보다는 홍등가에서 몸을 파는 여자들이나 술집의 작부들이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는 이 비유 앞에서 무언가 위기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는 성서를 수박겉핥기 식으로 읽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이 말씀은 사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비유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교회 다니더라도 잘난 척하지 말라는 말씀이겠지. 또는 우리는 영적으로 세리와 창녀와 같이 부끄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가르침이겠지. 이런 생각이 근본적으로 틀렸다고는 볼 수 없지만, 우리는 이 말씀에 좀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천한 사람들은 받아들였다는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인간에 대한 심층적, 혹은 영적인 인식이 먼저 필요합니다. 물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다시 질문해봅시다. 도대체 인간이 뭐기에, 하나님 나라가 뭐기에 세상의 천덕꾸러기들이 고상한 지도자들보다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는 말입니까?
제가 보기에 여기서 결정적인 요인은 자기를 비우는가 아닌가에 놓여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서 그 이외의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는 자신의 모든 업적, 인간의 모든 행위, 도덕적인 행위나 종교적인 행위를 포함한 그 어떤 업적도 무의미합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옆으로 제쳐 놓는 것 말고 하나님 나라에 소용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교회당을 건축하는 것이나 전도 왕이 되는 것도 별로 필요 없습니다. 이 말은 거꾸로도 유효합니다. 세리와 창녀 같이 살았던 사람의 나쁜 행위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볼 때 가치 있는 행위나, 또는 가치 없는 행동이나 그 어떤 행위도 작용하지 못합니다. 오직 한 가지만 필요합니다.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이제 하나님 나라가 그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런 설명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또는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다는 말인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그런 건 결코 아닙니다. 좀 구체적으로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는지요.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우리가 어떻게 누릴 수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성취할 때도 물론 기쁠 수 있겠지만 그런 것들은 늘 한정적입니다. 기쁨은 잠시이고, 즉시 우리는 더 많은 성적을 올려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히게 되겠지요.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평생 자기를 성취하는 일에 매달리고, 그것의 결과에 따라서 뒤숭숭하게 살아가는 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신치료를 받기도 하고, 기 수련이다, 단전호흡이다 하면서 자신 내면의 평정을 훈련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훈련이 효과가 있긴 하겠지만, 그것도 일시적이거나 부분적인 치료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성서는 기쁨과 평화가 그런 심리 치료로 가능한 세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조금 더 단순하고 역설적인 것을 제시합니다.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리와 창녀들은 사람들에게 내어놓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누가 옆에서 비우라 말라 하기 전에 그들은 이미 마음을 비우게 됩니다. 철저하게 무너져 버린 그 순간에 놀라운 평화와 기쁨이 그들을 사로잡습니다. 철저하게 망가진 삶에 전혀 새로운 차원의 기쁨과 희망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칭찬이나 위로가 아니라 존재의 깊이에서, 생명의 신비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알코올 중독자가 그렇지 않은 우리보다 먼저 그런 세계에 들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세리와 창녀들과 달리 지금 예수님의 권위를 문제 삼고 있는 대제사장들, 장로들, 서기관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 내세울 게 너무 많은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문제는 좀 더 세밀한 통찰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다거나 교만하다거나, 교권에 사로잡힌 못된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말로 매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여러 종류의 고상한 종교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요즘에도 일반화 되어 있는 그런 많은 종교 행위를 통해서 종교적 만족감을 얻는 것이 곧 ‘경건주의’입니다. 그것은 나름으로 가치가 있습니다. 세련된 예배와 기도와 성서읽기와 봉사는 귀한 가치들입니다. 그러나 그럴듯한 종교적 경건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빼앗게 되면 순간에 인간의 삶을 파괴합니다. 그것이 곧 경건주의의 함정입니다. 일단 여기에 빠지게 되면 흡사 개미구멍에 걸려든 개미처럼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경건생활을 하면서도 경건주의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모든 삶이 망가졌던 세리와 창녀들처럼 모든 자신의 업적, 꿈, 야망을 내려놓아야만 합니다.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그래야만 합니다. 그럴 때 생명의 영인 성령이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할 것입니다. 그게 곧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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