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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빌3:4b-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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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630 |
2005. 10.02.
할례파
성서에 등장하는 원시 기독교에 대해서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그 당시 교회가 별로 큰 다툼 없이 원만하게 운용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사도들이 직접 목회하고 있었으니까 누가 이러쿵저러쿵 시비 거는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것처럼 큰 착각도 없습니다. 진리는 늘 이런 논쟁을 통해서 밝혀지는 것이지 모든 걸 묻어두는 방식으로 밝혀지는 게 아닙니다. 사도들이 살아있던 바로 그 초기부터 기독교는 이런 신학적인 논쟁을 심각하게 벌이는 전통을 세웠습니다. 신앙의 토대에 관한한 그 당시 교회는 두루 뭉실 넘어가는 일이 없이, 서로 얼굴을 붉힐 정도로 싸웠습니다.
이런 투쟁에서 가장 독보적인 인물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27편의 신약성서 중에서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편이 넘는 사도 바울의 편지와 누가가 쓴 사도행전은 거의 이런 신학 논쟁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그 시대의 상황을 좀 더 정확하게 말씀드린다면 바울의 이런 신학 논쟁을 통해서 오늘의 기독교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바울의 신학 논쟁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기독교라는 이름 자체가 없었을 것이며, 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기독교가 단지 유대교의 아류로 떨어져 버렸을 개연성도 없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역시 이런 논쟁의 한 토막입니다. 본문 앞 단락인 3장2절에서 우리는 “개들을 조심하심시오. 악한들을 조심하십시오. 형식적인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조심하십시오.”라고 매우 격앙된 바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바울의 한 평생은 아마 이런 할례파와의 싸움으로 이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극단적인 투쟁으로 인해서 오늘 우리가 따르고 있는 기독교의 정체성이 확보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개 같은 놈들’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이 할례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우선 이들은 교회 밖에 있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할례는 새로 태어난 유대인 남자 아이가 태어난 지 8일 째 행하는, 요즘 말로 포경수술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표시가, 따라서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흔적이 바로 이 할례라고 주장했는데, 예수를 믿은 다음에도 그런 생각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그 당시에 교회 안에 많았습니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그 당시의 유대 기독교인들은 대부분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만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 할례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하는 바울의 가르침을 반대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아마 빌립보 교회에도 이런 할례당이 들어와서 신자들의 신앙을 흔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바울은 개 같은 놈들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할례 해석
할례당의 신앙이 무엇이기에 바울이 이렇게 격한 어조로 비판을 가하고 있을까요? 그들이 과연 그렇게 욕먹을 만하고, 그렇게 기독교 복음에 위험한가요? 바울은 그 율법과 할례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 걸까요? 바울에 의하면 이런 할례주의는 곧 ‘세속적인 것’을 자랑하는 태도입니다.(4b). 개역성서와 루터 성서는 ‘육체’를 신뢰하는 것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세속이 거룩과 대별되며, 육체가 영과 대별된다는 점에서 세속이나 육체는 비슷한 의미입니다.
할례를 중심으로 한 이 율법주의가 왜 세속적인 것인지 바울의 설명을 들어봅시다. 바울은 우선 자신이 과거에 얼마나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었는가 하는 문제를 소상하게 밝혔습니다. 자신은 할례당들이 주장하는 그런 자랑거리가 많다고 하면서, 이어서 5,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났으며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입니다. 나는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파 사람이며,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나는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바울의 이런 진술은 매우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그는 혈통, 신분, 노력, 업적이라는 점에서 가장 알짜배기 유대인이며, 율법주의자였습니다.
이런 율법은 그렇게 나쁜 게 아니라 상당한 정도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7절에서 이런 것들을 ‘나에게 유익했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달해보려는 가장 덕스럽고 본받을 만한 삶이 바로 이런 율법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삶도 역시 이런 율법의 범주에 해당됩니다. 교육을 통해서 교양을 쌓고, 사회 경쟁력을 제고하는 일이나, 교회당을 짓거나 교회를 성장시키는, 그리고 세련된 신앙인이 되는 모든 것들이 바로 율법처럼 나름으로 유익한 것들입니다. 이런 삶은 결코 부정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가 길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적인 가치는 늘 상대적인 범주 안에 머물러야 그 진가가 발휘되는 법인데, 그것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의 본질을 맛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큰 혼란을 겪습니다. 바울도 아마 과거에는 큰 혼란 가운데서 살았을 겁니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 바울은 과거에 조금 이롭다고 생각했던 율법과 할례 같은 종교적 형식들을 ‘쓰레기’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개역판은 그것을 ‘똥’이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생각을 바꾸게 되었는지 아무래도 바울의 설명을 통해서 좀 더 보충해야겠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바울은 할례와 율법을 사람의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선으로 기도하고, 공부하고, 착하게 살고, 십일조 하고, 예배드리고, 금식하고 등등,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보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노력으로 인간이 의로움을 얻을 수 없다는 게 바로 바울의 핵심 주장입니다. 9b절을 보십시오. “내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내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것입니다.”
아마 이 구절을 읽는 여러분은 이미 그 대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기독교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잖아. 역시 믿음이 최고야. 이런 생각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믿음 일원론도 아니고 믿음 만능주의는 더더욱 아닙니다. 이런 믿음 만능주의에 빠지게 되면 기독교 신앙은 우리 한국교회에서 볼 수 있듯이 다시 업적주의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바울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울은 지금 하나님에게 생각을 집중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간의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인간의 행위들은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하는 사람이나 잠들기 전에 1분 기도하는 사람이나 그 행위 자체는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무엇을 보실까요? 하나님을 향한 내면적인 태도입니다. 그가 정직하게 하나님에게 마음의 중심을 두고 있는지 아니면 형식적으로만 그렇게 하는지를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그가 비록 종교적인 행위를, 또는 모범적인 행위를 전혀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에게 마음의 중심을 놓고 있다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과 올바른 관계로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이 여러분에게 추상적으로 들릴 것 같아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바이올린을 배우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는 우선 악보를 정확하게 소리로 내기 위해서 운지법을 배워야 할 겁니다. 운지법이라는 건 앞에서 연주한 사람들이 가장 효과적으로 소리를 내기 위해 정해놓은 법칙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이 바이올린 연주자가 운지법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는 결코 음악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이올린 연주에서 중요한 건 음악 자체입니다. 아무리 완벽한 운지법으로 신기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음악 경험은 아닙니다. 좋은 소리를 내면 좋겠지만 그것과 음악 경험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연주자가 참된 음악가가 되려면 자기가 운지법 기술의 연마를 통해서 소리를 낸다기보다는 음악이 자기를 통해서 소리를 내는 경지에 올라야 할 것입니다.
적당한 예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바울은 지금 바이올린의 운지법이라 할 수 있는 율법의 차원으로부터 음악경험 자체라 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자기 노력으로부터 하나님의 은총으로 근본적인 ‘패러다임 쉬프트’가 그에게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이렇게 전혀 새로운 깨우침의 신앙을 그는 ‘높은 곳’에서 사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14). 원초적 음악의 소리를 들어야 참된 음악가가 되는 것처럼 바울은 신앙적인 차원에서 높은 곳에서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의 부르심’이라고 말하면 또 다시 여러분의 생각이 혼란스러워 질 겁니다.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무조건 ‘아멘’ 하겠지만, 생각이 조금이라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그 높은 곳이라는 게 무엇을 말하는가, 하고 궁금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걸 내가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 같은 사람도 아직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채 그쪽을 향해서 달려갈 뿐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마당에 내가 무슨 재주로 그 경지를 여러분들에게 간단히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의 영적 경지가 성서에 분명하게 진술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설교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냥 흉내는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옳게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면서 내가 이해하고 있는 수준에서 말해보겠습니다.
앞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시각으로 신앙 문제를 접근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시각에서는 인간의 노력이라 할 할례와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데 거의 무용지물이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믿을 때’(9) 하나님이 우리를 법적으로 바른 관계에 놓아 주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10, 11절에서 좀 더 풀어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이 두 구절에는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들이 잔뜩 들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야, 곧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셨나요? 고난, 죽음, 부활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을까요? 도대체 우리가 죽는다는 게 무엇이며, 다시 산다는 게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는 이런 심각한 주제 자체를 생각하려는 게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높은 곳에서의 부르심이라는 게 바로 이런 궁극적인 세계로부터의 ‘문 두드림’이라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눈을 뜬다는 것은 바로 이런 주제에 깊이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고 많은 예언자들에게 말씀하셨다는 성서의 표현도 사실은 이런 경험들을 의미합니다. 개인과 민족 전체의 삶, 그리고 죽음, 그리고 생존, 그리고 역사의 종말 속으로 끌어들이는 소리가 곧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이런 경험이 없으면 아무도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으며, 아무도 예술과 문학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이 그런 철학이나 예술과 별 차이가 없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삶과 죽음의 깊이, 역사의 신비에서 문제의식을 갖는다는 건 비슷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그 대답을 나사렛 예수 사건에서 발견하고 있다는 데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에게서 높은 곳에서의 부르심을 발견한 바울에게는 그 이전에 이롭다고 생각했던 할례와 율법 같은 종교적인 형식들이 배설물처럼 보였습니다. 궁극적인 생명 안으로 들어간 사람에게 그런 일은 당연합니다. 우리의 현재 상태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소리는 무엇인가요? 자기를 성취하라는 이 세상의 목소리인가요, 종교적인 세련미를 갖추라는 율법인가요,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전혀 새로운 관계를 발견한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높은 곳에서의 부르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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