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고전15:29-34 |
---|---|
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2002.8.30설교
이주일과 대천덕
지난 주에 유명 코미디언 이주일씨가 62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못생긴 외모 때문에 40세 때까지 무명의 설움을 겪었으나, 그 후부터는 '코미디'의 황제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인기를 누리며 승승장구했습니다. 한 때는 정치에 입문하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코미디 잘 배우고 갑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정치판을 떠났습니다. 그는 생전에 국민들에게 많은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지만 남모르게 선한 일도 많이 했다고 합니다. 폐암으로 투병하던 말기에는 금연운동으로 큰 활약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빈소에는 유명 정치인들과 연예인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습니다.
지난 8월 6일에는 또 다른 유명 인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대천덕 신부입니다(본명 R.A.Torrey). 대신부는 1918년 1월19일 중국 산둥성 지난(濟南)에서 중국 선교사 토레이 2세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미국의 데이비슨대와 베이징 옌징대를 거쳐 프린스턴,하버드 등 7개 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그가 한국에 온 것은 57년이었습니다. 현 성공회대 전신인 성미가엘 신학원을 재건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습니다. 한국에서 그는 대천덕, 그의 부인 그레이스 제인 토레이 여사는 현재인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는 65년 강원도 태백의 산골짜기로 들어갔는데, 그것이 예수원이라는 공동체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대천덕 신부는 생전에 “한 번도 외부에 돈을 달라고 요청한 적 없었고, 돈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말한 적 없었는데 하나님은 항상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셨다. 우리와 함께 일할 사람도 끊임없이 보내주셨다”고 간증했었습니다
예수원의 기본 일과는 하루 세 차례의 예배와 노동을 주축으로 이뤄져왔습니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그는 평소 아침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6시부터는 예수원 식구들과 공동예배를 드린 뒤 토스트로 아침 식사를 하고 사무실에서 설교 준비와 편지쓰기, 글정리 등의 일을 했습니다. 예수원의 정해진 일과를 마치고 나면 9시부터 10시까지 개인 중보기도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의 기도 파일에는 항상 사람들의 사진과 기도 제목으로 가득했습니다. 예수원내 그의 침실은 겨우 두 사람이 들어가 누우면 그만일 정도로 초라했지만 매년 1000통 이상의 상담편지를 받았고, 1만명 이상의 사람이 그를 보기 위해 예수원을 찾았습니다. 대신부는 5월19일 예수원 창립 37주년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중 넘어지면서 의자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뇌출혈로 쓰러졌습니다. 두 차례 뇌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8월 6일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그는 한국교회의 영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죽음 그 다음
최근에 이렇게 유명한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남긴 여운은 많이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그것은 내세와 부활의 문제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사람은 신자나 불신자나 마지막 심판 때 다 부활하게 됩니다. 믿은 자는 생명의 부활로, 불신자는 심판의 부활로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내세와 부활이 없고 이 세상의 삶이 전부라면 우리가 믿음으로 살려고 애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선하고 순결하게 살 필요도 없을 것이고, 전도와 선교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저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살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 세상뿐이라면 사람은 허무주의나 쾌락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사는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며, 그 후에는 생명의 부활이, 또는 심판의 부활이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결코 허무주의 빠지거나 쾌락을 위해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결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으며, 그 복음을 듣고 믿은 모든 사람들의 믿음도 헛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으며, 우리의 구원이 확실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죽은 믿음의 형제들에 대해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는 모든 것들, 주님을 위해 수고한 모든 것들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셔서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사람들은 모두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부활이 분명하다는 사실이 현재 어떤 결과들로 나타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죽은 자들을 위한 세례를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지금까지 겪어온 모든 고난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는 지금도 복음을 위해 기꺼이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절제하며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살겠습니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맘껏 쾌락을 즐기며 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이 세 가지를 하나씩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죽은 자들을 위한 세례
이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입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례에는 반드시 본인의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이 어떻게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고린도 교회에는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 받는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40여 개 이상의 설명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합시다.
'죽은 자'를 곧 임종하게 될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분명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세례를 받지 못한 채 임종하게 될 때, 임종을 앞둔 그 사람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갖게 되며 평안한 가운데 임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를 임종에 처한 자로 보고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성도가 죽어가면서 믿지 않는 그의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예수 믿고 세례 받으라고 부탁했을 때, 그 부탁을 받은 자들이 믿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를 받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죽은 몸으로 보아서, 죽을 몸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죽을 몸, 즉 다시 살아나지 못할 몸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례 예비자들이 세례를 받기 전에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죽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등록되고 세례의 유익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이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대신 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봅니다.
'죽은 자들을 위하여'라는 말에서 '위하여'에 해당되는 헬라어 'υπερ'를 '∼ 의 위에서'로 해석하면, '죽은 자들의 위에서'가 됩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다는 말은 죽은 자들 위에서, 즉 무덤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됩니다.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믿는 신앙을 나타내기 위해서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서 세례를 받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석들 중에는 자연스럽지 못한 것과 성경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들도 많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은 고린도 교회에 성경에 맞지 않는 잘못된 관습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도 바울이 여기서 그것을 인용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잘못된 관습을 인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들이 그러한 관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부활을 믿기 때문이 아니냐고 반문한 것입니다. 사실 위 해석들 중에 어떤 것을 취한다 해도, 그러한 행위는 부활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세례의 의미
이 해석들 중에서 마지막의 것을 좀 더 자세히 생각해봅시다.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죽은 자들 위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뜻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세례를 설명하는 롬6:3-5에 부합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세례는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다시 산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실제로 이루어집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내가 그 분과 연합되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옛 사람도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나도 주님과 함께 새 사람으로 다시 산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옛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솔로몬 군도에서 피지족에게 선교했던 어떤 선교사는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 때 '킬링스톤'이라는 바위 옆에서 베풀었다고 합니다. 과거에 그곳에서는 매우 특별한 사형방법이 시행되었는데, 사람을 묶어서 그 바위에 머리를 짓이겨 죽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위에 흐르는 피를 닦지 못하게 했는데, 그것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을 그곳에 데리고 가서 세례를 베풀면서 "당신은 지금 죽는 거요. 지금 옛 사람이 완전히 죽는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세례는 이렇게 옛 사람이 완전히 죽고 새 사람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예수를 믿고 옛 사람이 완전히 죽었습니까?
바울이 당한 극심한 고난들
사도 바울은 부활이 있기 때문에 자신은 '날마다 죽는 삶을 사노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의 삶의 모습은 부활에 대한 확신과 소망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바울이 '때마다 무릅쓴 위험'은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만났던 수많은 시련과 고난들을 가리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사도 바울은 그가 복음을 위해서 이렇게 수고한 것을 '나의 자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수고한 것보다 더 값지고 자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알아주시고 기뻐하시며, 마지막 심판의 날, 우리가 부활할 때 큰 상으로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날마다 죽는 삶'을 기꺼이 감당했던 것입니다. '날마다 죽노라'는 말은 극도의 위험에 직면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또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바울이 투기장에 나가 맹수와 싸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에베소에서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 때문에 성난 무리들이 사람을 붙잡아 가지고 극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은 바로 맹수들과 죽을 때까지 싸우는 장소였습니다. 만일 바울이 그들에게 붙잡혔더라면 분명히 몰매를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에베소에서 성난 군중들은 맹수처럼 바울을 대적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을 당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이길 수 있었을까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산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사람들은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는 식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부활신앙이 없이는 도덕이나 윤리가 세워질 수 없습니다. 무슨 이유로 정직하라고 하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진실하고 착하게 살라고 하겠습니까? 부활이 없다면 사람들은 방탕과 쾌락에 빠져 살거나 허무주의에 빠져 인생을 비관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에 대한 믿음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타락과 방종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왜 이렇게 믿음으로 살기를 힘씁니까? 왜 많은 것을 참고 견디며 달려갑니까? 왜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절제하며 삽니까? 왜 시간과 물질과 수고를 바쳐 주님을 섬깁니까? 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기쁨으로 감당해 나갑니까?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이렇게 사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이 모든 것은 반드시 영광스러운 상급으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수고가 조금도 헛되지 않도록 다 갚아주실 것입니다.
속지 말라.
사도 바울은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을 악한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33절).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34절).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 그런 자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활도, 하나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방탕과 죄악된 쾌락에 빠져 삽니다. 그리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런 세상 친구들과 어울려 죄악된 쾌락을 즐기는 것은 부활을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활을 믿는 성도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것은 어리석게 속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는 결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며 더욱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삶을 삽시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도록 합시다.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죽는 것 같은 삶을 살지라도 부활의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기뻐하며 감당합시다. 부활의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소망을 가지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이주일과 대천덕
지난 주에 유명 코미디언 이주일씨가 62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못생긴 외모 때문에 40세 때까지 무명의 설움을 겪었으나, 그 후부터는 '코미디'의 황제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인기를 누리며 승승장구했습니다. 한 때는 정치에 입문하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코미디 잘 배우고 갑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정치판을 떠났습니다. 그는 생전에 국민들에게 많은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지만 남모르게 선한 일도 많이 했다고 합니다. 폐암으로 투병하던 말기에는 금연운동으로 큰 활약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빈소에는 유명 정치인들과 연예인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습니다.
지난 8월 6일에는 또 다른 유명 인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대천덕 신부입니다(본명 R.A.Torrey). 대신부는 1918년 1월19일 중국 산둥성 지난(濟南)에서 중국 선교사 토레이 2세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미국의 데이비슨대와 베이징 옌징대를 거쳐 프린스턴,하버드 등 7개 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그가 한국에 온 것은 57년이었습니다. 현 성공회대 전신인 성미가엘 신학원을 재건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습니다. 한국에서 그는 대천덕, 그의 부인 그레이스 제인 토레이 여사는 현재인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는 65년 강원도 태백의 산골짜기로 들어갔는데, 그것이 예수원이라는 공동체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대천덕 신부는 생전에 “한 번도 외부에 돈을 달라고 요청한 적 없었고, 돈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말한 적 없었는데 하나님은 항상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셨다. 우리와 함께 일할 사람도 끊임없이 보내주셨다”고 간증했었습니다
예수원의 기본 일과는 하루 세 차례의 예배와 노동을 주축으로 이뤄져왔습니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그는 평소 아침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6시부터는 예수원 식구들과 공동예배를 드린 뒤 토스트로 아침 식사를 하고 사무실에서 설교 준비와 편지쓰기, 글정리 등의 일을 했습니다. 예수원의 정해진 일과를 마치고 나면 9시부터 10시까지 개인 중보기도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의 기도 파일에는 항상 사람들의 사진과 기도 제목으로 가득했습니다. 예수원내 그의 침실은 겨우 두 사람이 들어가 누우면 그만일 정도로 초라했지만 매년 1000통 이상의 상담편지를 받았고, 1만명 이상의 사람이 그를 보기 위해 예수원을 찾았습니다. 대신부는 5월19일 예수원 창립 37주년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중 넘어지면서 의자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뇌출혈로 쓰러졌습니다. 두 차례 뇌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8월 6일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그는 한국교회의 영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죽음 그 다음
최근에 이렇게 유명한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남긴 여운은 많이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그것은 내세와 부활의 문제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사람은 신자나 불신자나 마지막 심판 때 다 부활하게 됩니다. 믿은 자는 생명의 부활로, 불신자는 심판의 부활로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내세와 부활이 없고 이 세상의 삶이 전부라면 우리가 믿음으로 살려고 애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선하고 순결하게 살 필요도 없을 것이고, 전도와 선교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저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살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 세상뿐이라면 사람은 허무주의나 쾌락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사는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며, 그 후에는 생명의 부활이, 또는 심판의 부활이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결코 허무주의 빠지거나 쾌락을 위해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결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으며, 그 복음을 듣고 믿은 모든 사람들의 믿음도 헛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으며, 우리의 구원이 확실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죽은 믿음의 형제들에 대해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는 모든 것들, 주님을 위해 수고한 모든 것들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셔서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사람들은 모두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부활이 분명하다는 사실이 현재 어떤 결과들로 나타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죽은 자들을 위한 세례를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지금까지 겪어온 모든 고난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는 지금도 복음을 위해 기꺼이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절제하며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살겠습니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맘껏 쾌락을 즐기며 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이 세 가지를 하나씩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죽은 자들을 위한 세례
이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입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례에는 반드시 본인의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이 어떻게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고린도 교회에는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 받는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40여 개 이상의 설명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합시다.
'죽은 자'를 곧 임종하게 될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분명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세례를 받지 못한 채 임종하게 될 때, 임종을 앞둔 그 사람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갖게 되며 평안한 가운데 임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를 임종에 처한 자로 보고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성도가 죽어가면서 믿지 않는 그의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예수 믿고 세례 받으라고 부탁했을 때, 그 부탁을 받은 자들이 믿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를 받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죽은 몸으로 보아서, 죽을 몸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죽을 몸, 즉 다시 살아나지 못할 몸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례 예비자들이 세례를 받기 전에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죽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등록되고 세례의 유익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이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대신 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봅니다.
'죽은 자들을 위하여'라는 말에서 '위하여'에 해당되는 헬라어 'υπερ'를 '∼ 의 위에서'로 해석하면, '죽은 자들의 위에서'가 됩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다는 말은 죽은 자들 위에서, 즉 무덤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됩니다.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믿는 신앙을 나타내기 위해서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서 세례를 받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석들 중에는 자연스럽지 못한 것과 성경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들도 많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은 고린도 교회에 성경에 맞지 않는 잘못된 관습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도 바울이 여기서 그것을 인용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잘못된 관습을 인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들이 그러한 관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부활을 믿기 때문이 아니냐고 반문한 것입니다. 사실 위 해석들 중에 어떤 것을 취한다 해도, 그러한 행위는 부활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세례의 의미
이 해석들 중에서 마지막의 것을 좀 더 자세히 생각해봅시다.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죽은 자들 위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뜻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세례를 설명하는 롬6:3-5에 부합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세례는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다시 산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실제로 이루어집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내가 그 분과 연합되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옛 사람도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나도 주님과 함께 새 사람으로 다시 산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옛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솔로몬 군도에서 피지족에게 선교했던 어떤 선교사는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 때 '킬링스톤'이라는 바위 옆에서 베풀었다고 합니다. 과거에 그곳에서는 매우 특별한 사형방법이 시행되었는데, 사람을 묶어서 그 바위에 머리를 짓이겨 죽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위에 흐르는 피를 닦지 못하게 했는데, 그것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을 그곳에 데리고 가서 세례를 베풀면서 "당신은 지금 죽는 거요. 지금 옛 사람이 완전히 죽는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세례는 이렇게 옛 사람이 완전히 죽고 새 사람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예수를 믿고 옛 사람이 완전히 죽었습니까?
바울이 당한 극심한 고난들
사도 바울은 부활이 있기 때문에 자신은 '날마다 죽는 삶을 사노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의 삶의 모습은 부활에 대한 확신과 소망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바울이 '때마다 무릅쓴 위험'은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만났던 수많은 시련과 고난들을 가리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사도 바울은 그가 복음을 위해서 이렇게 수고한 것을 '나의 자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수고한 것보다 더 값지고 자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알아주시고 기뻐하시며, 마지막 심판의 날, 우리가 부활할 때 큰 상으로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날마다 죽는 삶'을 기꺼이 감당했던 것입니다. '날마다 죽노라'는 말은 극도의 위험에 직면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또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바울이 투기장에 나가 맹수와 싸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에베소에서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 때문에 성난 무리들이 사람을 붙잡아 가지고 극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은 바로 맹수들과 죽을 때까지 싸우는 장소였습니다. 만일 바울이 그들에게 붙잡혔더라면 분명히 몰매를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에베소에서 성난 군중들은 맹수처럼 바울을 대적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을 당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이길 수 있었을까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산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사람들은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는 식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부활신앙이 없이는 도덕이나 윤리가 세워질 수 없습니다. 무슨 이유로 정직하라고 하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진실하고 착하게 살라고 하겠습니까? 부활이 없다면 사람들은 방탕과 쾌락에 빠져 살거나 허무주의에 빠져 인생을 비관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에 대한 믿음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타락과 방종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왜 이렇게 믿음으로 살기를 힘씁니까? 왜 많은 것을 참고 견디며 달려갑니까? 왜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절제하며 삽니까? 왜 시간과 물질과 수고를 바쳐 주님을 섬깁니까? 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기쁨으로 감당해 나갑니까?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이렇게 사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이 모든 것은 반드시 영광스러운 상급으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수고가 조금도 헛되지 않도록 다 갚아주실 것입니다.
속지 말라.
사도 바울은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을 악한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33절).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34절).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 그런 자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활도, 하나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방탕과 죄악된 쾌락에 빠져 삽니다. 그리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런 세상 친구들과 어울려 죄악된 쾌락을 즐기는 것은 부활을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활을 믿는 성도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것은 어리석게 속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는 결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며 더욱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삶을 삽시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도록 합시다.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죽는 것 같은 삶을 살지라도 부활의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기뻐하며 감당합시다. 부활의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소망을 가지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