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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귀한 세가지 금은 황금, 소금, 지금 이라고 한다. 나도 좋아하는 세가지 금이 있다. 현금, 지금, 입금 이다 ㅋㅋㅋ(햇볕같은이야기 사역 후원 클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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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예화 485. 이런 기도회라면 불참하겠소이다!
나는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의 서슬이 푸르렀던 1982년 가을 어느 날, 한국 민주화 운동의 메카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문익환 목사 석방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하였다가 기록으로 남겨 두어야 할 역사 현장을 목격하였습니다.
늦봄 문익환 목사(1918-1994)는 1976년 명동성당에서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구속된 이후 6 차례에 걸쳐 투옥-석방이 반복되었습니다. 1982년 문익환 목사 석방을 위한 기도회는 그의 3 번째 투옥 기간 중에 있었던 기도회였습니다.
그 기도회에는 당시 기라성같은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들과 신학생, 대학생 등 수 백명의 뜨거운 열기로 강당을 가득 메운 가운데 예배-통성 기도-시국선언문 낭독-문익환 목사를 즉시 석방하라는 구호 외침 등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마침내 마지막 “祝禱(축도)”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회자는 축도 순서는 특별히 며칠 전 미국에서 귀국하신 87세의 문익환 목사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1896-1985)께서 축도하여 주시겠다고 안내방송 하였습니다. 모두들 “오호, 그래요?” 하며 잠시 술렁였습니다.
당시 기도회 때,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내가 보니 문재린 목사는 연로하여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여서 두 청년의 부축을 받고 비칠거리며 강단으로 올라가더니 강대상을 붙잡고 잠시 자세를 바로 잡은 후 노인 특유의 느릿하고 착 가라앉은 허스키한 목소리였지만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앞으로 이런 기도회에 절대루 참석하지 않캈습네다. 나는 우리 익환이가 감옥에서 나오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익환이가 감옥에서 죽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사람입네다. 우리 익환이가 감옥에서 죽음으로 이 나라에 완전 민주화가 이루어져서 우리 익환이 이후에는 다시는 그 누구도 감옥에 가는 일이 없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입네다!
자, 이제 기도합세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우리 익환이와 여기 모인 모든 무리들 위에 영원히 함께하실찌어다. 아멘.”
문익환 목사는 그 기도회 덕분이었는지 1982. 12. 08일 형집행정지로 출옥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3 차례(1985년 5. 3인천 항쟁 사건, 1989년 북한 방문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 사건, 1991년 분신정국 때)에 걸친 투옥-출옥이 계속되었습니다. 문익환 목사는 민주화운동과 통일 문제를 위하여 헌신하다가 1994년 1월 18일 8시 20분 자택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향년 76로 별세하였습니다.
나는 1982년 가을 밤, “앞으로 이런 기도회에는 절대루 참석하지 않캈습네다!” 라고 하던 87세의 노인 문재린 목사의 그 말씀을 지금까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왜? 나는 그 때 우리나라 민주화 역사의 현장 한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의 서슬이 푸르렀던 1982년 가을 어느 날, 한국 민주화 운동의 메카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문익환 목사 석방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하였다가 기록으로 남겨 두어야 할 역사 현장을 목격하였습니다.
늦봄 문익환 목사(1918-1994)는 1976년 명동성당에서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구속된 이후 6 차례에 걸쳐 투옥-석방이 반복되었습니다. 1982년 문익환 목사 석방을 위한 기도회는 그의 3 번째 투옥 기간 중에 있었던 기도회였습니다.
그 기도회에는 당시 기라성같은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들과 신학생, 대학생 등 수 백명의 뜨거운 열기로 강당을 가득 메운 가운데 예배-통성 기도-시국선언문 낭독-문익환 목사를 즉시 석방하라는 구호 외침 등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마침내 마지막 “祝禱(축도)”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회자는 축도 순서는 특별히 며칠 전 미국에서 귀국하신 87세의 문익환 목사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1896-1985)께서 축도하여 주시겠다고 안내방송 하였습니다. 모두들 “오호, 그래요?” 하며 잠시 술렁였습니다.
당시 기도회 때,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내가 보니 문재린 목사는 연로하여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여서 두 청년의 부축을 받고 비칠거리며 강단으로 올라가더니 강대상을 붙잡고 잠시 자세를 바로 잡은 후 노인 특유의 느릿하고 착 가라앉은 허스키한 목소리였지만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앞으로 이런 기도회에 절대루 참석하지 않캈습네다. 나는 우리 익환이가 감옥에서 나오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익환이가 감옥에서 죽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사람입네다. 우리 익환이가 감옥에서 죽음으로 이 나라에 완전 민주화가 이루어져서 우리 익환이 이후에는 다시는 그 누구도 감옥에 가는 일이 없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입네다!
자, 이제 기도합세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우리 익환이와 여기 모인 모든 무리들 위에 영원히 함께하실찌어다. 아멘.”
문익환 목사는 그 기도회 덕분이었는지 1982. 12. 08일 형집행정지로 출옥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3 차례(1985년 5. 3인천 항쟁 사건, 1989년 북한 방문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 사건, 1991년 분신정국 때)에 걸친 투옥-출옥이 계속되었습니다. 문익환 목사는 민주화운동과 통일 문제를 위하여 헌신하다가 1994년 1월 18일 8시 20분 자택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향년 76로 별세하였습니다.
나는 1982년 가을 밤, “앞으로 이런 기도회에는 절대루 참석하지 않캈습네다!” 라고 하던 87세의 노인 문재린 목사의 그 말씀을 지금까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왜? 나는 그 때 우리나라 민주화 역사의 현장 한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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