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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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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살전4:13∼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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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7. 10. 21. 주일설교 |
<서론>
'죽음이 왜 두려운가?'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살아 있는 자는 반드시 죽습니다. 이것은 거역할 수 없는 우주의 법칙입니다. 주의 종은 교회에 오랫동안 목회하면 많은 죽음을 봅니다. 성도님들이 한 두 사람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늘보고 또 설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별로 큰 충격이 없이 장례식을 치룹니다. 천국 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평안한 마음으로 장례식을 치르는데 자기의 친 가족이 세상을 뜨게 되면 더 마음에 충격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작년에 아버님이 천국 가시고 금년에 어머님이 천국가시니까 '야! 죽음이 사실 우리 가족에도 다가오는 구나. 이제 내 차례가 되겠구나!" 죽음에 대한 막연한 생각이 아니라 굉장히 긴장이 된 적극적인 마음으로 죽음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죽음이 즐거운 체험은 결코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모두 죽고 싶지 않습니다. 꼭 죽어야만 하지만 그래도 좀 더 오래 살고 싶습니다. 왜 우리는 죽음이 두렵습니까? 왜 오래 오래 살고 싶어 합니까? 노인들이 손님이 다가오면 "'아이고 내가 늙었으니 이제는 죽어야지. 죽어야지.' 그것 거짓말입니다. 그 말은 '아이고 내가 더 오래 살고 싶다. 오래 살고 싶다.'하는 말인 것입니다.
<본론>
1. 죽음이 생존의 끝이요 그 이후는 전적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겁이 나는 이유가 죽음이 생존의 끝이요, 그 이후는 전적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낯선 나라에 빈손 들고 도착하면 모든 것이 생소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므로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경계선 저편은 전혀 모르는 세계입니다. 그러니 두렵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에는 가족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집이 있고, 살던 세상이 있는데 이것 다 잃어버리고 전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서 나간다는 것은 마음에 두려움이 오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갈 것인가? 이 대답에는 아무 음성이 없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말하기를 죽고 나면 무엇이 있겠는가.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누가 아는가! 그러므로 살아 있을 때야 좋지 죽으면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거기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우리 보이는 이 세상은 잠깐 사는 것입니다.
아침에 안개가 뜨다가 해가 뜨면 사라지는 것과 같은 것은 인생인 것입니다. 초롱인생이지요. 그러나 보이지 않는 저 죽음 건너편의 세상은 천국이든지 지옥이든지 영원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육체가 죽어도 영혼이 있을까? 영혼을 누가 봤느냐? 그런 질문을 합니다.
제가 블란서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 한집에 초청을 받아 갔는데 그 아들 한 사람은 불란서 에어 프랑스 조종사고 또 한 사람은 소아과 의사였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난 다음에 편안한 자리에 앉자 당장 그 소아과 의사가 나를 보고 하는 말이 "조 목사, 왜 그런 헛된 소리 하고 돌아다니느냐! 죽으면 영혼이 있다는 말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느냐? 영혼 봤느냐? 나는 의과 대학에서부터 시작해서 의사가 된 이후로 수많은 사람을 해부해 보았지만 영혼을 본적이 없다. 그런데 무슨 영혼 구원을 받으라고 하느냐?" 굉장히 제가 난처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잠시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성령님, 너무 터무니없는 질문을 하는데 어떻게 대답을 할까요?’ 번개같이 내 마음속에 지혜가 들어왔습니다. "내가 당신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로 보면 당신 최근에 약혼 했다면서요?" "네. 약혼했지요." "부인이 사랑스럽습니까?" "아, 사랑스럽지요."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무슨 거짓말을 내가 했소?" "사랑을 보여 주세요. 부인이 사랑스럽다는데 사랑이 내 눈에 안 보이는데 당신이 사랑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오?" "사랑? 사랑을 어떻게 보여줘요? 사랑은 안 보이는데 있지." "사랑이 안 보이는 것처럼 영혼은 안 보이는 거요. 안 보인다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 사랑이 안보여도 부인에 대한 사랑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머쓱하고 그냥 입만 닦아요. 그러자 에어 프랑스 조종사인 그 형이 하는 말이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내가 비행기를 조종해서 대서양을 건너고 태평양을 수없이 건너봤지만 천사하나 날라 가는 것 못 보았다." 그래서 "그것은 당신 눈이 육으로 속했기 때문에 안 보이는거요. 당신은 사시사철 비행기를 높이 공중에 띄워서 날라갈 때 바람을 봤습니까? 바람이 보입니까?" "바람이 안보이지." "그러면 바람 없지요?" "아 왜 바람이 없어? 바람은 있지. 그것 안보이지요. 바람이 없이는 비행기가 못 뜨잖아요. 눈에 안보여도 바람이 있기 때문에 그 큰 비행기를 띄워 올리잖아요. 바람도 못 보는 눈을 가지고 무슨 하나님이 보인다 안 보인다. 천사가 보인다. 안 보인다 말합니까? 당신 거듭나고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성령이 눈을 밝히면 하나님도 보이고 예수님도 보이고 성령님도 보이고 천사도 보이고 말씀도 보이고 다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정말로 육체가 죽어도 영혼이 있을 것인가? 이것은 육신적인 감각으로 영혼을 보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혼이 있다고 하면 있는 것입니다. 만드신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어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은 영혼이 있다고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거짓되데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되지 않습니다.
전도서 12장 7절에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죽으면 흙은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하나님께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바울은 말하기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우리 영혼이 없는데 집이 무슨 필요 하겠습니까?
육체의 집을 떠나면 영혼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 예비해 놓았고
거기에 들어간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는 죽어도 영혼이 있는 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내과의사 모리스 롤링즈 박사는 죽었다가 살아난 많은 환자들을 병상에서 인터뷰한 것을 모아 「죽음의 문 너머」라는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죽음의 경계선을 넘어갔다 온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죽음이 임박하여 의식이 흐려져도 방안 전체의 모습이 보이고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때 자신은 육체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몸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 순간 육체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평화로운 기분을 느끼고 무언가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간다고 말합니다. 그곳에서 빛의 천사, 사랑이 넘치는 누군가에게 이끌려 황금 빌딩, 수정같이 맑은 도로, 아름다운 동산과 같은 곳을 방문하고 거룩한 존재 앞에 서는 경험을 한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환자들은 알 수 없는 흑암의 존재들에게 끌려 불구덩이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만났다고 돌아왔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그가 생전에 했던 모든 일들과 말들이 천사들과 심판자 앞에서 낱낱이 드러나는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 의사 선생이 수많은 환자가 죽었다가 임상적으로 죽었는데 기이하게 살아난 사람들의 간증을 모아서 지은 책인 것입니다. 죽음 이후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고 난 다음에 반드시 심판이 있는 것을 성경 밖의 의사선생이 체험한 사실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천국과 지옥이 있을 것인가? 여러분 이 세상에 살 때도 천국과 지옥이 있는데요. 우리가 예수 믿고 성령 충만 하여 마음이 한없이 기쁠 때 천국이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즐거움으로 천국인 것입니다. 모두다 그리스도를 믿고 가족이 사랑하면 가정이 천국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미움, 원한, 분노, 질투, 시기가 꽉 들어차고 고통과 괴로움이 있으면 사는 자체가 지옥이요, 견딜 수가 없기 때문에 자살까지 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속에 벌써 천국과 지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에 천국과 지옥이 없을 턱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에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9장 47절로 49절에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하나님을 반역하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산 사람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고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하는 것을 당하는 그 말할 수 없는 지옥으로 간다고 밝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899년 복음 선교사이던 무디에게 죽음이 임박했습니다. 그 해 12월 22일 그의 아들은 무디가 방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대지가 물러간다. 내 눈앞에 하늘이 열려 있다." 아들은 급히 아버지 방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들을 본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꿈이 아니다. 아들아, 정말 아름답단다. 정말 황홀하구나! 이것이 죽음이라면 무엇이 두려움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니 나는 가야만 한다." 그리고 잠시 의식을 잃었습니다. 의사는 다급히 응급조치를 했고 응급치료를 받고 난 다음 깨어난 무디는 이 세상 바깥에 갔다 왔다며 그 내용을 증거 했습니다. "나는 천국의 문 앞에 갔는데 그 곳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멋지고 아름다운 곳이며 애들도 만났다"라고 말하면서 먼저 간 자녀들의 이름을 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무디는 "무엇으로도 나를 더 이상 잡아둘 수 없다. 마차가 방 안에 와 있다." 그렇게 말하며 밝은 천국을 향해 평안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런 증거를 통해서 우리는 죽음 이후 천국과 지옥 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이치요 죽고 난 다음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의 기준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분은 영생이 있고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분은 영생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가 천당행이냐, 지옥행이냐 라는 것을 결정짓는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 이외에는 사후의 세계를 모르잖아요.
가보고 온 사람의 말이 참말이지 가보지도 않고 큰소리 하는 사람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2.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 이외에는 사후의 세계를 모른다.
철학적인 논리로 죽음을 설명해도 그것은 궤변입니다. 철학자들은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자연 현상이다. 어린아이가 태어나고 소년기를 지나 청년, 장녀, 노년 죽는 것이 자연의 현상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한 철학적인 궤변을 말합니다만 그것은 심리 조종술에 불과한 것입니다. 죽음의 철학자 노자는 하루 집에 덕석을 깔아 놓고 북을 가지고 둥 둥 둥 둥 때리면서 허허 너털웃음을 지으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 노자님 무슨 좋은 일 있습니까?" "좋은 일 있지." "무슨 좋은 일 입니까?" "내 마누라가 죽었다네. 자연법칙을 쫓아서 생노병사의 과정을 잘 지냈으니 얼마나 좋은 날인가? 그러니까 죽는 것은 자연법칙을 순응하는 것이니 기뻐하고 즐거워 해야 된다." 그것 궤변입니다. 죽는데 좋아할 것 없습니다. 죽는 당사자는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종교적인 어떤 해설도 증명할 수 없어요. 어떤 종교에서는 말하기를 사람의 실체는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말해서 물로 있다가 얼음이 된다고 해서 형체는 달라졌지만 물이 사라진 것이 아니고 물이 또 끌어서 수증기가 되어서 구름을 떠오른다고 해서 형체가 달라졌다고 해서 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로 있다가 얼음으로 있다가 구름으로 달라지고 형체는 달라져도 물자체가 있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은 사나 죽으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 그런 말을 해서 여러분 사람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나요? 솔직히 말해서 죽었다가 돌아와서 이야기를 하고 그렇지 못하면 안 죽어 봐서 모르겠다. 그런 것이 정직하고 좋지 무슨 자연법칙을 순응했으니 즐거워하자. 영혼은 변치 않는데 물이 얼음이 되었다가 얼음이 구름이 되는 것과 같이 변화무쌍한 형태가 다가오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 소리 쓸데 없습니다. 예수님같이 솔직하게 십자가에 만인이 보는 앞에 죽어서 무덤에 들어갔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는 그 분이 참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로 43절에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 된 대로 주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것 어떻게 증명하느냐. 예수님의 부활은 너무나 명명백백하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제자들이 어떻게 하나 없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까? 예수님이 잡혀가는 것 보고도 겁이 다 나서 도망친 제자들이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모두다 목숨을 버리고 피를 흘렸습니다. 무엇이 그 겁쟁이들로 하여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렇게 용감하게 만들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는 것도 눈으로 직접 보았고 부활도 직접보고 변화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그들 앞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장사지내고 무덤에 들어갔는데 그분이 사흘 만에 부활해서 40일 동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그들이 모인데 나타나셔서 함께 식사도 하시고 가르치시고 축복도 하시고 그렇게 하니까 아무리 안 믿을래야 안 믿을 도리가 없지요. 너무나 기가 막힌 일인 것입니다. 죽는 것을 분명히 눈으로 보았는데 분명히 눈앞에 살아나서 옆구리에 창자국을 보여 주시고 손등에 못자국을 보여 주시고 의심 가거든 만져 보라고 하시고 그런데 안 믿을 사람이 누가 있어요? 거기에서 깨달은 것은 '야! 사람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살아나는 구나. 대표적인 인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가 무덤에 들어갔다가 살아나는 것 보니 우리도 예수 안에서 죽었다가 살아나겠구나. 예수님 말씀하신 대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참말이구나. 그러면 죽음은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두려워할 것이 못되는 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죽음을 전혀 개의치 않게 된 확실한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제자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서 순교를 당할 때 거부하지 않고 피를 흘린 것입니다. 죽는 것이 영광이었습니다. 사망아 너희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아무리 죽여 봐라.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고 나는 살아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우리 눈앞에서 죽어서 장사지낸 분이 하루 이틀도 아닌 사흘 동안 무덤에 있다가 살아나서 함께 동행하면은 안 믿을 사람 누가 있어요. 그래야 정직하지요.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과 삶에 대한 증거를 가장 정직하게 하신 분인 것입니다. 철학자의 궤변도 아니고, 종교가의 설득도 아닌 것입니다. 체험적으로 예수님은 인간의 죽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이 있는 것도 사실인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선생은 차라리 이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하고 바라는 바는 육신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라고 간절히 소원했던 것입니다. 하늘에서 온 자 외에는 하늘의 일을 모른다고 예수님 말씀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3절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여러분 천국도 갔다와 본 사람이 알지 안 갔다 온 사람이 어떻게 압니까?
서울에 안 갔다온 사람이 남대문 기둥이 한아름 되더라고 고집을 부리더라고 하는데 남대문에 기둥이 어디 있어요? 안 가봤다 온 사람이 큰 소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하신 말씀이 하늘에서 내려온 자 이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하늘에서 내려 왔으므로 하늘의 일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천국에 갔다 온 사람의 증언을 뚜렷이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천국에 갔다 왔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2절로 4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바울이 여기에 강조한 것은 자기가 천국 올라간 체험이 몸으로 올라갔는지 영혼이 몸에서 빠져 올라갔는지 분별할 수 없을 만큼 뚜렷하고 확실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과 영생은 분별할 수 없이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인도의 선지사 선더싱이 쓴 책에 보면은 자기가 입신해서 하늘에 올라가 보니까 많은 사람이 죽어서 천당에 올라왔는데 자기가 죽어서 올라온 줄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생과 저생이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에 죽어서 온 것이 아니라 한숨 잠을 자고 깨어났는데 내가 죽기는 뭘 죽었어? 그렇게 혼돈하더라는 것은 선더씬이 그 책에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침상에 드러누워서 깊이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는데 죽은 줄을 모릅니다. 그만큼 뚜렷하지요. 바울선생이 친히 말했으니까. 내가 셋째 하늘에 올라갔는데 몸으로 올라갔는데 몸 밖에서 올라갔는지 모른다고 두 번이나 번복해서 말했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낙원에 가서 보니까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다. 이 세상에 속한 삼차원의 말로써는 사차원의 영광스러운 천국을 표현할 수 없다. 그러니 말 다했지 뭐. 얼마나 좋잖아요. 말못해. 말 못하니까 뭐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단 그 말인 것입니다. 성경에 천국에 대한 여러가지 표현을 했지만 그것다 비유지 엄청나게 좋기 때문에 도저히 말로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는 곳이 그런 곳인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요한 역시 증거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 1절로 3절에 그가 밧모 섬에 유배 갔을 때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천국은 이 땅과 분명히 거리를 둔 곳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보니까 하늘에 열린 문이 있으면서 올라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이 자리가 천국이 아니라 우리는 이것을 떠나서 다른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바울도 셋째 하늘로 끌려 올라갔다고 말하고 요한도 하늘에 열린 문이 있어 하나님이 이리로 올라오라고 하매 그리로 올라갔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이 죄악이 꽉 들어차고 죽음과 멸망이 꽉 들어찬 이 세상에서 떠나가는 것입니다. 육체의 장막 집 벗어 버리고 지구의 중력을 벗어 버리고 성령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성령이 없기 때문에 못 올라가요. 여러분 예수 믿고 난 다음 성령이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성령의 은총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사도요한도 성령으로 감동되어서 하늘에 올라간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우리가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여러분이 제게 이렇게 물어보면 내가 어떻게 대답할까요? "목사님 내가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겠어요? 제일먼저 죽으면 예수님이 데리러 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아직 여러분 천당에 안 들어가고 여기 있는 것은 예수님이 여러분 거처를 단장하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거처가 단장 되면은 데리러 오시는 것입니다.
요번에 어머님이 천국 가실 때 내가 병상 머리맡에 앉아 가지고 어머니 손을 잡고 하는 말이 "어머니 두려워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데리러 오십니다. 아무도 어머니를 천당으로 모시지 못하지만 예수님이 데리러 오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머리를 끄덕끄덕 하시고 웃으시고 참 행복하다. 나는 고통스럽지만 참 행복하다. 나는 천국 간다." 거듭거듭 그 말씀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데리러 오기 때문에 우리는 근심할 필요가 없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 갈까요? 미국으로 데려갑니까? 오스트리아로 데려 갑니까? 아프리카로 데려 갑니까? 낙원으로 데려간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당할 때 우편 강도, 좌편 강도가 있었는데 그중 강도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42절로 43절에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강도는 세상에 나가서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습니다. 못 박혀 죽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살아온 생활은 험악한 강도생활이었습니다. 죄인 중에 죄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이름만 부르니까 주님께서 오늘날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천당은 예수님의 공로로 가는 것이지 우리 공로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공로는 머리칼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인 것입니다.' 크고 작은 죄는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 받고 주님의 이름을 진실로 부르고 의지하면 주님께서 낙원으로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신앙이 지극히 영광스럽고 아름답고 거룩한 것은 인간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예 중에 나사로가 간곳이 바로 그곳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 22절에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음부에 내려갔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부자로 살고 거지로 사는 것 세상에서는 차별이 뚜렸 하잖아요. 그러나 부자 속에는 술만 꽉 들어차고 나사로 속에는 하나님이 거하셨습니다. 사람이 살면 70이요, 강건하면 80, 80이상 사는 사람은 보너스로 사는 사람이고 100년 안에 다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귀, 영화, 공명, 물질이고 지고 안고 못갑니다. 세상에 살아있을 동안에 좋은 일에 다 써야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온라인으로 붙여놓아야 돼요. 재산을 자식에게 많이 남겨 놓으면 자식이 방탕하게 되고 재산을 혼자 다 가지고 있다가 죽으면 아깝게 국가에 환수돼요. 살아있을 동안에 좋은 일을 많이하고 하나님 나라에 바치고 선한 일을 많이 하면 온라인을 통해서 하늘나라 내 계좌로 직접 들어가는 것이니 얼마나 좋습니까? 하늘나라의 영광은 우리가 표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는 세상에서 잠시 동안 부자로 살았으나 음부에 들어가서 너무나 뜨거워서 나사로를 보내어 혀를 서늘하게 물 한 방울만 내려 달라고 합니다. 한바가지도 아닙니다. 한 컵도 아닙니다. 한 방울의 물이라도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했으나 거부당했습니다.
나사로는 부자 집 대문 앞에서 거적대기를 깔고 개하고 같이 자고 깨고 얻어먹고 살았으나 그것은 지나간 과거요, 하늘나라의 영광 속에 낙원에 들어가서 살게 된 것입니다. 부자는 지금도 지옥에서 동동 구르고 나사로는 지금도 낙원에서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캘리포니아 길로이에서는 해마다 '갈릭페스티벌'이 열릴 정도로 마늘로 유명한 지방입니다. 마늘 페스티발을 열어서 유명한데 이제는 이보다 더 유명해진 아기가 생겼습니다. 엄마 로리는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는데 어느 해에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그 중 한 아기는 석 달 반 만에 숨지고 한 아기만 살아서 '샤논'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샤논도 건강이 좋지 못해 세 살이 조금 지났을 때 암 진단을 받았는데, 그것도 암 환자의 1 퍼센트밖에 안 걸린다는 생식 세포 암이었습니다. 샤논은 아기였지만 생명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어서 어른도 힘들어 하는 골수 채취 검사나 척추 수술 등을 잘 참아냈습니다. 성격 또한 명랑하고 쾌활하며 긍정적이어서 가족들에게 희망을 잃지 않게 했습니다. 그러나 5살이 되던 해에 샤논은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며 떠날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렸습니다. 가족들은 아기의 침대 주변에 모여서 기도하며 그녀에게 빛의 터널을 향해 가도록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제 다섯 살로 죽음을 앞에 둔 아기가 입을 열었습니다. 큰 소리로 "아, 빛이 너무 눈부셔요. 빛이 너무 눈부셔요" "천사들이 저렇게 소리 높여 노래 불러요." 걱정할 것 없어요. 무섭지 않아요. 그리고 세상을 떴습니다. 이것이 신문에 나고 방송에 나고 사람 입을 통해서 전달되고 그래서 그 동네 일대에는 마늘 페스티발 보다도 샤논 페스티발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이 어린 아기의 천국 가는 모습의 이야기가 퍼져 나갔던 것입니다. 5살 짜리 아기가 뭘 말합니까? 지어서 말할 수 없잖아요. 그런데 떠나기 전에 울고불고 하지도 않고 갑자기 큰 소리로 얼마나 빛이 찬란한지요. 빛이 보여요. 천사들의 노래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요. 그리고 난 다음 세상을 떴으니 그 부모들도 얼마나 위로를 받고 그 소리를 듣는 사람마다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습니까? 이 어린 아기도 새 예루살렘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우리의 집은 이스라엘이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천당에 있는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절로 7절에 보면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우리 자매님 여러분 언제 화장을 제일 화려하게 했습니까? 시집갈 때 였지요? 그때는 연지곤지 안 바른것 없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서 아름답게 단장을 합니다. 그러므로 신부가 가장 아름답지요. 표현을 할 수 없으니까 우리가 살 새 예루살렘은 신부가 신랑을 위해서 단장함같이 아름답다고 말한 것입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눈물, 근심, 탄식, 고난이 다 지나가고 기쁨과 소망과 사랑의 원천되시는 하나님이 같이 계시니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이긴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말하기를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이것이니 곧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여러분은 사망과 영원한 심판을 이겼습니다. 믿음 이외에는 이길 자가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해서 이기게 해주심으로 그 득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이깁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지옥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기는 자는 예수 믿는 자는 하나님의 이 영광스러운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고린도전서 15장 12절로 20절을 우리 다같이 소리내어 읽으십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시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시고 사람의 새로운 조상이 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표적으로 죽으셨다가 무덤에 들어가셨다 부활하심으로 사망과 음부를 다 이겨 놓았으므로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면 천국이 우리 앞에 확연인 것입니다. 내가 길이요 하늘나라 가면 내가 진리요. 거짓이 아니고 참 말하는 것이요,내가 생명이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길을 모시고 진리를 모시고 생명을모시고 살면 예수님 안에서 하늘나라가 우리의 것이 되고 하늘 문이 확 열려 있으며 밝히 그 길을 걸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첫째도 예수요, 둘째도 예수요, 셋째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여러분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보화가 무엇입니까? 마음속에 계신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돈도 떠나갑니다. 지위도 떠나갑니다. 명예도 떠나갑니다. 아름다운 우리 모습도 다 시들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떠나가지 않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붙잡으십시오. 예수님만 의지하십시오. 지상에서 천국까지 우리를 품에 품어 인도하여 주실 분은 예수님인 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사람이 한번 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너도 죽고 나도 죽고 다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큰 은총을 받고 약속을 얻었으므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이 죽으셨다가 살으신 것을 믿을 찐데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다가 올 것은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요 절망이 아니라 소망이요 슬픔이 아니라 기쁨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감사합니다. 이로써 우리가 마음에 위로를 받고 강하고 담대한 신앙을 가지고 천국을 향해서 매일같이 나가는 우리가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죽음이 왜 두려운가?'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살아 있는 자는 반드시 죽습니다. 이것은 거역할 수 없는 우주의 법칙입니다. 주의 종은 교회에 오랫동안 목회하면 많은 죽음을 봅니다. 성도님들이 한 두 사람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늘보고 또 설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별로 큰 충격이 없이 장례식을 치룹니다. 천국 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평안한 마음으로 장례식을 치르는데 자기의 친 가족이 세상을 뜨게 되면 더 마음에 충격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작년에 아버님이 천국 가시고 금년에 어머님이 천국가시니까 '야! 죽음이 사실 우리 가족에도 다가오는 구나. 이제 내 차례가 되겠구나!" 죽음에 대한 막연한 생각이 아니라 굉장히 긴장이 된 적극적인 마음으로 죽음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죽음이 즐거운 체험은 결코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모두 죽고 싶지 않습니다. 꼭 죽어야만 하지만 그래도 좀 더 오래 살고 싶습니다. 왜 우리는 죽음이 두렵습니까? 왜 오래 오래 살고 싶어 합니까? 노인들이 손님이 다가오면 "'아이고 내가 늙었으니 이제는 죽어야지. 죽어야지.' 그것 거짓말입니다. 그 말은 '아이고 내가 더 오래 살고 싶다. 오래 살고 싶다.'하는 말인 것입니다.
<본론>
1. 죽음이 생존의 끝이요 그 이후는 전적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겁이 나는 이유가 죽음이 생존의 끝이요, 그 이후는 전적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낯선 나라에 빈손 들고 도착하면 모든 것이 생소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므로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경계선 저편은 전혀 모르는 세계입니다. 그러니 두렵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에는 가족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집이 있고, 살던 세상이 있는데 이것 다 잃어버리고 전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서 나간다는 것은 마음에 두려움이 오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갈 것인가? 이 대답에는 아무 음성이 없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말하기를 죽고 나면 무엇이 있겠는가.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누가 아는가! 그러므로 살아 있을 때야 좋지 죽으면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거기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우리 보이는 이 세상은 잠깐 사는 것입니다.
아침에 안개가 뜨다가 해가 뜨면 사라지는 것과 같은 것은 인생인 것입니다. 초롱인생이지요. 그러나 보이지 않는 저 죽음 건너편의 세상은 천국이든지 지옥이든지 영원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육체가 죽어도 영혼이 있을까? 영혼을 누가 봤느냐? 그런 질문을 합니다.
제가 블란서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 한집에 초청을 받아 갔는데 그 아들 한 사람은 불란서 에어 프랑스 조종사고 또 한 사람은 소아과 의사였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난 다음에 편안한 자리에 앉자 당장 그 소아과 의사가 나를 보고 하는 말이 "조 목사, 왜 그런 헛된 소리 하고 돌아다니느냐! 죽으면 영혼이 있다는 말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느냐? 영혼 봤느냐? 나는 의과 대학에서부터 시작해서 의사가 된 이후로 수많은 사람을 해부해 보았지만 영혼을 본적이 없다. 그런데 무슨 영혼 구원을 받으라고 하느냐?" 굉장히 제가 난처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잠시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성령님, 너무 터무니없는 질문을 하는데 어떻게 대답을 할까요?’ 번개같이 내 마음속에 지혜가 들어왔습니다. "내가 당신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로 보면 당신 최근에 약혼 했다면서요?" "네. 약혼했지요." "부인이 사랑스럽습니까?" "아, 사랑스럽지요."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무슨 거짓말을 내가 했소?" "사랑을 보여 주세요. 부인이 사랑스럽다는데 사랑이 내 눈에 안 보이는데 당신이 사랑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오?" "사랑? 사랑을 어떻게 보여줘요? 사랑은 안 보이는데 있지." "사랑이 안 보이는 것처럼 영혼은 안 보이는 거요. 안 보인다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 사랑이 안보여도 부인에 대한 사랑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머쓱하고 그냥 입만 닦아요. 그러자 에어 프랑스 조종사인 그 형이 하는 말이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내가 비행기를 조종해서 대서양을 건너고 태평양을 수없이 건너봤지만 천사하나 날라 가는 것 못 보았다." 그래서 "그것은 당신 눈이 육으로 속했기 때문에 안 보이는거요. 당신은 사시사철 비행기를 높이 공중에 띄워서 날라갈 때 바람을 봤습니까? 바람이 보입니까?" "바람이 안보이지." "그러면 바람 없지요?" "아 왜 바람이 없어? 바람은 있지. 그것 안보이지요. 바람이 없이는 비행기가 못 뜨잖아요. 눈에 안보여도 바람이 있기 때문에 그 큰 비행기를 띄워 올리잖아요. 바람도 못 보는 눈을 가지고 무슨 하나님이 보인다 안 보인다. 천사가 보인다. 안 보인다 말합니까? 당신 거듭나고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성령이 눈을 밝히면 하나님도 보이고 예수님도 보이고 성령님도 보이고 천사도 보이고 말씀도 보이고 다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정말로 육체가 죽어도 영혼이 있을 것인가? 이것은 육신적인 감각으로 영혼을 보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혼이 있다고 하면 있는 것입니다. 만드신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어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은 영혼이 있다고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거짓되데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되지 않습니다.
전도서 12장 7절에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죽으면 흙은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하나님께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바울은 말하기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우리 영혼이 없는데 집이 무슨 필요 하겠습니까?
육체의 집을 떠나면 영혼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 예비해 놓았고
거기에 들어간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는 죽어도 영혼이 있는 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내과의사 모리스 롤링즈 박사는 죽었다가 살아난 많은 환자들을 병상에서 인터뷰한 것을 모아 「죽음의 문 너머」라는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죽음의 경계선을 넘어갔다 온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죽음이 임박하여 의식이 흐려져도 방안 전체의 모습이 보이고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때 자신은 육체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몸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 순간 육체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평화로운 기분을 느끼고 무언가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간다고 말합니다. 그곳에서 빛의 천사, 사랑이 넘치는 누군가에게 이끌려 황금 빌딩, 수정같이 맑은 도로, 아름다운 동산과 같은 곳을 방문하고 거룩한 존재 앞에 서는 경험을 한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환자들은 알 수 없는 흑암의 존재들에게 끌려 불구덩이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만났다고 돌아왔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그가 생전에 했던 모든 일들과 말들이 천사들과 심판자 앞에서 낱낱이 드러나는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 의사 선생이 수많은 환자가 죽었다가 임상적으로 죽었는데 기이하게 살아난 사람들의 간증을 모아서 지은 책인 것입니다. 죽음 이후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고 난 다음에 반드시 심판이 있는 것을 성경 밖의 의사선생이 체험한 사실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천국과 지옥이 있을 것인가? 여러분 이 세상에 살 때도 천국과 지옥이 있는데요. 우리가 예수 믿고 성령 충만 하여 마음이 한없이 기쁠 때 천국이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즐거움으로 천국인 것입니다. 모두다 그리스도를 믿고 가족이 사랑하면 가정이 천국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미움, 원한, 분노, 질투, 시기가 꽉 들어차고 고통과 괴로움이 있으면 사는 자체가 지옥이요, 견딜 수가 없기 때문에 자살까지 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속에 벌써 천국과 지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에 천국과 지옥이 없을 턱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에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9장 47절로 49절에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하나님을 반역하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산 사람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고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하는 것을 당하는 그 말할 수 없는 지옥으로 간다고 밝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899년 복음 선교사이던 무디에게 죽음이 임박했습니다. 그 해 12월 22일 그의 아들은 무디가 방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대지가 물러간다. 내 눈앞에 하늘이 열려 있다." 아들은 급히 아버지 방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들을 본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꿈이 아니다. 아들아, 정말 아름답단다. 정말 황홀하구나! 이것이 죽음이라면 무엇이 두려움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니 나는 가야만 한다." 그리고 잠시 의식을 잃었습니다. 의사는 다급히 응급조치를 했고 응급치료를 받고 난 다음 깨어난 무디는 이 세상 바깥에 갔다 왔다며 그 내용을 증거 했습니다. "나는 천국의 문 앞에 갔는데 그 곳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멋지고 아름다운 곳이며 애들도 만났다"라고 말하면서 먼저 간 자녀들의 이름을 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무디는 "무엇으로도 나를 더 이상 잡아둘 수 없다. 마차가 방 안에 와 있다." 그렇게 말하며 밝은 천국을 향해 평안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런 증거를 통해서 우리는 죽음 이후 천국과 지옥 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이치요 죽고 난 다음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의 기준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분은 영생이 있고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분은 영생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가 천당행이냐, 지옥행이냐 라는 것을 결정짓는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 이외에는 사후의 세계를 모르잖아요.
가보고 온 사람의 말이 참말이지 가보지도 않고 큰소리 하는 사람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2.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 이외에는 사후의 세계를 모른다.
철학적인 논리로 죽음을 설명해도 그것은 궤변입니다. 철학자들은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자연 현상이다. 어린아이가 태어나고 소년기를 지나 청년, 장녀, 노년 죽는 것이 자연의 현상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한 철학적인 궤변을 말합니다만 그것은 심리 조종술에 불과한 것입니다. 죽음의 철학자 노자는 하루 집에 덕석을 깔아 놓고 북을 가지고 둥 둥 둥 둥 때리면서 허허 너털웃음을 지으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 노자님 무슨 좋은 일 있습니까?" "좋은 일 있지." "무슨 좋은 일 입니까?" "내 마누라가 죽었다네. 자연법칙을 쫓아서 생노병사의 과정을 잘 지냈으니 얼마나 좋은 날인가? 그러니까 죽는 것은 자연법칙을 순응하는 것이니 기뻐하고 즐거워 해야 된다." 그것 궤변입니다. 죽는데 좋아할 것 없습니다. 죽는 당사자는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종교적인 어떤 해설도 증명할 수 없어요. 어떤 종교에서는 말하기를 사람의 실체는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말해서 물로 있다가 얼음이 된다고 해서 형체는 달라졌지만 물이 사라진 것이 아니고 물이 또 끌어서 수증기가 되어서 구름을 떠오른다고 해서 형체가 달라졌다고 해서 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로 있다가 얼음으로 있다가 구름으로 달라지고 형체는 달라져도 물자체가 있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은 사나 죽으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 그런 말을 해서 여러분 사람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나요? 솔직히 말해서 죽었다가 돌아와서 이야기를 하고 그렇지 못하면 안 죽어 봐서 모르겠다. 그런 것이 정직하고 좋지 무슨 자연법칙을 순응했으니 즐거워하자. 영혼은 변치 않는데 물이 얼음이 되었다가 얼음이 구름이 되는 것과 같이 변화무쌍한 형태가 다가오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 소리 쓸데 없습니다. 예수님같이 솔직하게 십자가에 만인이 보는 앞에 죽어서 무덤에 들어갔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는 그 분이 참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로 43절에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 된 대로 주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것 어떻게 증명하느냐. 예수님의 부활은 너무나 명명백백하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제자들이 어떻게 하나 없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까? 예수님이 잡혀가는 것 보고도 겁이 다 나서 도망친 제자들이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모두다 목숨을 버리고 피를 흘렸습니다. 무엇이 그 겁쟁이들로 하여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렇게 용감하게 만들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는 것도 눈으로 직접 보았고 부활도 직접보고 변화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그들 앞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장사지내고 무덤에 들어갔는데 그분이 사흘 만에 부활해서 40일 동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그들이 모인데 나타나셔서 함께 식사도 하시고 가르치시고 축복도 하시고 그렇게 하니까 아무리 안 믿을래야 안 믿을 도리가 없지요. 너무나 기가 막힌 일인 것입니다. 죽는 것을 분명히 눈으로 보았는데 분명히 눈앞에 살아나서 옆구리에 창자국을 보여 주시고 손등에 못자국을 보여 주시고 의심 가거든 만져 보라고 하시고 그런데 안 믿을 사람이 누가 있어요? 거기에서 깨달은 것은 '야! 사람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살아나는 구나. 대표적인 인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가 무덤에 들어갔다가 살아나는 것 보니 우리도 예수 안에서 죽었다가 살아나겠구나. 예수님 말씀하신 대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참말이구나. 그러면 죽음은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두려워할 것이 못되는 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죽음을 전혀 개의치 않게 된 확실한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제자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서 순교를 당할 때 거부하지 않고 피를 흘린 것입니다. 죽는 것이 영광이었습니다. 사망아 너희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아무리 죽여 봐라.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고 나는 살아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우리 눈앞에서 죽어서 장사지낸 분이 하루 이틀도 아닌 사흘 동안 무덤에 있다가 살아나서 함께 동행하면은 안 믿을 사람 누가 있어요. 그래야 정직하지요.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과 삶에 대한 증거를 가장 정직하게 하신 분인 것입니다. 철학자의 궤변도 아니고, 종교가의 설득도 아닌 것입니다. 체험적으로 예수님은 인간의 죽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이 있는 것도 사실인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선생은 차라리 이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하고 바라는 바는 육신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라고 간절히 소원했던 것입니다. 하늘에서 온 자 외에는 하늘의 일을 모른다고 예수님 말씀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3절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여러분 천국도 갔다와 본 사람이 알지 안 갔다 온 사람이 어떻게 압니까?
서울에 안 갔다온 사람이 남대문 기둥이 한아름 되더라고 고집을 부리더라고 하는데 남대문에 기둥이 어디 있어요? 안 가봤다 온 사람이 큰 소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하신 말씀이 하늘에서 내려온 자 이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하늘에서 내려 왔으므로 하늘의 일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천국에 갔다 온 사람의 증언을 뚜렷이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천국에 갔다 왔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2절로 4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바울이 여기에 강조한 것은 자기가 천국 올라간 체험이 몸으로 올라갔는지 영혼이 몸에서 빠져 올라갔는지 분별할 수 없을 만큼 뚜렷하고 확실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과 영생은 분별할 수 없이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인도의 선지사 선더싱이 쓴 책에 보면은 자기가 입신해서 하늘에 올라가 보니까 많은 사람이 죽어서 천당에 올라왔는데 자기가 죽어서 올라온 줄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생과 저생이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에 죽어서 온 것이 아니라 한숨 잠을 자고 깨어났는데 내가 죽기는 뭘 죽었어? 그렇게 혼돈하더라는 것은 선더씬이 그 책에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침상에 드러누워서 깊이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는데 죽은 줄을 모릅니다. 그만큼 뚜렷하지요. 바울선생이 친히 말했으니까. 내가 셋째 하늘에 올라갔는데 몸으로 올라갔는데 몸 밖에서 올라갔는지 모른다고 두 번이나 번복해서 말했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낙원에 가서 보니까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다. 이 세상에 속한 삼차원의 말로써는 사차원의 영광스러운 천국을 표현할 수 없다. 그러니 말 다했지 뭐. 얼마나 좋잖아요. 말못해. 말 못하니까 뭐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단 그 말인 것입니다. 성경에 천국에 대한 여러가지 표현을 했지만 그것다 비유지 엄청나게 좋기 때문에 도저히 말로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는 곳이 그런 곳인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요한 역시 증거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 1절로 3절에 그가 밧모 섬에 유배 갔을 때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천국은 이 땅과 분명히 거리를 둔 곳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보니까 하늘에 열린 문이 있으면서 올라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이 자리가 천국이 아니라 우리는 이것을 떠나서 다른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바울도 셋째 하늘로 끌려 올라갔다고 말하고 요한도 하늘에 열린 문이 있어 하나님이 이리로 올라오라고 하매 그리로 올라갔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이 죄악이 꽉 들어차고 죽음과 멸망이 꽉 들어찬 이 세상에서 떠나가는 것입니다. 육체의 장막 집 벗어 버리고 지구의 중력을 벗어 버리고 성령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성령이 없기 때문에 못 올라가요. 여러분 예수 믿고 난 다음 성령이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성령의 은총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사도요한도 성령으로 감동되어서 하늘에 올라간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우리가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여러분이 제게 이렇게 물어보면 내가 어떻게 대답할까요? "목사님 내가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겠어요? 제일먼저 죽으면 예수님이 데리러 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아직 여러분 천당에 안 들어가고 여기 있는 것은 예수님이 여러분 거처를 단장하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거처가 단장 되면은 데리러 오시는 것입니다.
요번에 어머님이 천국 가실 때 내가 병상 머리맡에 앉아 가지고 어머니 손을 잡고 하는 말이 "어머니 두려워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데리러 오십니다. 아무도 어머니를 천당으로 모시지 못하지만 예수님이 데리러 오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머리를 끄덕끄덕 하시고 웃으시고 참 행복하다. 나는 고통스럽지만 참 행복하다. 나는 천국 간다." 거듭거듭 그 말씀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데리러 오기 때문에 우리는 근심할 필요가 없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 갈까요? 미국으로 데려갑니까? 오스트리아로 데려 갑니까? 아프리카로 데려 갑니까? 낙원으로 데려간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당할 때 우편 강도, 좌편 강도가 있었는데 그중 강도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42절로 43절에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강도는 세상에 나가서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습니다. 못 박혀 죽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살아온 생활은 험악한 강도생활이었습니다. 죄인 중에 죄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이름만 부르니까 주님께서 오늘날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천당은 예수님의 공로로 가는 것이지 우리 공로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공로는 머리칼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인 것입니다.' 크고 작은 죄는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 받고 주님의 이름을 진실로 부르고 의지하면 주님께서 낙원으로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신앙이 지극히 영광스럽고 아름답고 거룩한 것은 인간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예 중에 나사로가 간곳이 바로 그곳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 22절에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음부에 내려갔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부자로 살고 거지로 사는 것 세상에서는 차별이 뚜렸 하잖아요. 그러나 부자 속에는 술만 꽉 들어차고 나사로 속에는 하나님이 거하셨습니다. 사람이 살면 70이요, 강건하면 80, 80이상 사는 사람은 보너스로 사는 사람이고 100년 안에 다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귀, 영화, 공명, 물질이고 지고 안고 못갑니다. 세상에 살아있을 동안에 좋은 일에 다 써야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온라인으로 붙여놓아야 돼요. 재산을 자식에게 많이 남겨 놓으면 자식이 방탕하게 되고 재산을 혼자 다 가지고 있다가 죽으면 아깝게 국가에 환수돼요. 살아있을 동안에 좋은 일을 많이하고 하나님 나라에 바치고 선한 일을 많이 하면 온라인을 통해서 하늘나라 내 계좌로 직접 들어가는 것이니 얼마나 좋습니까? 하늘나라의 영광은 우리가 표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는 세상에서 잠시 동안 부자로 살았으나 음부에 들어가서 너무나 뜨거워서 나사로를 보내어 혀를 서늘하게 물 한 방울만 내려 달라고 합니다. 한바가지도 아닙니다. 한 컵도 아닙니다. 한 방울의 물이라도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했으나 거부당했습니다.
나사로는 부자 집 대문 앞에서 거적대기를 깔고 개하고 같이 자고 깨고 얻어먹고 살았으나 그것은 지나간 과거요, 하늘나라의 영광 속에 낙원에 들어가서 살게 된 것입니다. 부자는 지금도 지옥에서 동동 구르고 나사로는 지금도 낙원에서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캘리포니아 길로이에서는 해마다 '갈릭페스티벌'이 열릴 정도로 마늘로 유명한 지방입니다. 마늘 페스티발을 열어서 유명한데 이제는 이보다 더 유명해진 아기가 생겼습니다. 엄마 로리는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는데 어느 해에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그 중 한 아기는 석 달 반 만에 숨지고 한 아기만 살아서 '샤논'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샤논도 건강이 좋지 못해 세 살이 조금 지났을 때 암 진단을 받았는데, 그것도 암 환자의 1 퍼센트밖에 안 걸린다는 생식 세포 암이었습니다. 샤논은 아기였지만 생명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어서 어른도 힘들어 하는 골수 채취 검사나 척추 수술 등을 잘 참아냈습니다. 성격 또한 명랑하고 쾌활하며 긍정적이어서 가족들에게 희망을 잃지 않게 했습니다. 그러나 5살이 되던 해에 샤논은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며 떠날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렸습니다. 가족들은 아기의 침대 주변에 모여서 기도하며 그녀에게 빛의 터널을 향해 가도록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제 다섯 살로 죽음을 앞에 둔 아기가 입을 열었습니다. 큰 소리로 "아, 빛이 너무 눈부셔요. 빛이 너무 눈부셔요" "천사들이 저렇게 소리 높여 노래 불러요." 걱정할 것 없어요. 무섭지 않아요. 그리고 세상을 떴습니다. 이것이 신문에 나고 방송에 나고 사람 입을 통해서 전달되고 그래서 그 동네 일대에는 마늘 페스티발 보다도 샤논 페스티발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이 어린 아기의 천국 가는 모습의 이야기가 퍼져 나갔던 것입니다. 5살 짜리 아기가 뭘 말합니까? 지어서 말할 수 없잖아요. 그런데 떠나기 전에 울고불고 하지도 않고 갑자기 큰 소리로 얼마나 빛이 찬란한지요. 빛이 보여요. 천사들의 노래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요. 그리고 난 다음 세상을 떴으니 그 부모들도 얼마나 위로를 받고 그 소리를 듣는 사람마다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습니까? 이 어린 아기도 새 예루살렘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우리의 집은 이스라엘이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천당에 있는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절로 7절에 보면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우리 자매님 여러분 언제 화장을 제일 화려하게 했습니까? 시집갈 때 였지요? 그때는 연지곤지 안 바른것 없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서 아름답게 단장을 합니다. 그러므로 신부가 가장 아름답지요. 표현을 할 수 없으니까 우리가 살 새 예루살렘은 신부가 신랑을 위해서 단장함같이 아름답다고 말한 것입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눈물, 근심, 탄식, 고난이 다 지나가고 기쁨과 소망과 사랑의 원천되시는 하나님이 같이 계시니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이긴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말하기를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이것이니 곧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여러분은 사망과 영원한 심판을 이겼습니다. 믿음 이외에는 이길 자가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해서 이기게 해주심으로 그 득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이깁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지옥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기는 자는 예수 믿는 자는 하나님의 이 영광스러운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고린도전서 15장 12절로 20절을 우리 다같이 소리내어 읽으십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시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시고 사람의 새로운 조상이 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표적으로 죽으셨다가 무덤에 들어가셨다 부활하심으로 사망과 음부를 다 이겨 놓았으므로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면 천국이 우리 앞에 확연인 것입니다. 내가 길이요 하늘나라 가면 내가 진리요. 거짓이 아니고 참 말하는 것이요,내가 생명이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길을 모시고 진리를 모시고 생명을모시고 살면 예수님 안에서 하늘나라가 우리의 것이 되고 하늘 문이 확 열려 있으며 밝히 그 길을 걸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첫째도 예수요, 둘째도 예수요, 셋째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여러분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보화가 무엇입니까? 마음속에 계신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돈도 떠나갑니다. 지위도 떠나갑니다. 명예도 떠나갑니다. 아름다운 우리 모습도 다 시들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떠나가지 않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붙잡으십시오. 예수님만 의지하십시오. 지상에서 천국까지 우리를 품에 품어 인도하여 주실 분은 예수님인 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사람이 한번 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너도 죽고 나도 죽고 다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큰 은총을 받고 약속을 얻었으므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이 죽으셨다가 살으신 것을 믿을 찐데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다가 올 것은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요 절망이 아니라 소망이요 슬픔이 아니라 기쁨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감사합니다. 이로써 우리가 마음에 위로를 받고 강하고 담대한 신앙을 가지고 천국을 향해서 매일같이 나가는 우리가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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