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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살전 5: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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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644 |
2005. 11.13.
재림 지연의 문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현안은 예수의 재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도된 예수의 승천 기사는 그의 재림을 포함하고 있으며, 바나바를 비롯해서 몇몇 대표적인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사유재산의 포기도 역시 예수 재림에 대한 확신을 그 배경에 두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도 우리는 마지막 심판과 예수의 재림에 관한 설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생존해 있을 때 예수가 재림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 예상이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예수의 재림을 손꼽아 기다리던 사람들이 죽기 시작하고, 재림의 징조는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을 맞았던 것이죠. 이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데살로니카 교우들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이 편지를 쓰게 되었는데, 오늘 본문은 그 앞부분인 4장 13-18과 한 묶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13, 1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교우 여러분, 죽은 사람들에 관해서 여러분이 알아 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 가실 것을 믿습니다.” 여기서 ‘죽은 사람들’은 곧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다가 죽은 교우들을 가리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우들의 죽음과 예수 재림의 지연이라는 어려운 상황 앞에서 데살로니카 교인들은 매우 당혹스러워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절망하지 말라고 위로합니다. 그 이유는 재림이 일어나기 전에 죽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생명의 나라도 데려가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설명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수의 재림과 심판으로 인해서 참된 생명의 세계가 시작된다면 그 마지막 때가 이르기 전에 죽은 사람은 당연히 이 세계에 참여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요? 예를 들어 봅시다. 일제의 식민 시대에 살면서 조국의 해방을 기다리던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1945년 8월15일이 되기 전에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행방된 조국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권 국가의 국민이라는 그 특권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예수의 재림 이전에 죽은 사람들은 분명히 그 재림으로 인해서 시작하게 될 참된 생명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지금 그렇게 일찍 죽은 사람도 역시 예수의 재림 때 살아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주장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하느님의 나팔소리
바울은 4장15절에서 주님의 재림 때에는 죽은 사람이나 살아있는 사람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말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가 살아남아 있다 해도 우리는 이미 죽은 사람들보다 결코 먼저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이어서 묵시록의 표상을 빌려서 그 재림 순간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울리면 주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는데, 그때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먼저 살아나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올라가서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묘사는 어떤 사태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라기보다는 문학적 상징입니다. 주님의 재림으로 인해서 시작하게 될 참된 생명은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는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바울은 묵시록적 표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계몽주의 이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구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표현을 실제적인 것으로 납득시킬 수는 없습니다. 성서도 그것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재림 때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이런 묵시록적 묘사에서 중요한 점은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먼저 살아난 다음에야 비로소 산 사람이 그들과 함께 휴거, 즉 참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이 여기서 핵심입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을 완전히 다르게 보고 있지만 성서가 말하는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에서는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인정하시나요? 쉽지 않을 겁니다. 죽은 사람은 앞에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단풍을 볼 수도 없습니다. 살아있을 때 성취했던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사이에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틈이 놓여 있다는 말은 일단 옳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바꿔보십시오. 앞으로 100년 후로 돌아가 봅시다. 그때는 지금 죽어 있는 사람이나 살아있는 사람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1억년 후로 돌아가 보세요.
여러분, 지금 저는 우리의 삶이라는 게 이처럼 허무하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신비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단지 죽음으로 인해서 모든 게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말은 곧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 완전히 파괴되는 게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의 재림할 때, 즉 생명이 완전히 그 실체를 드러내는 때에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똑같이 구름 타고 공중으로 올라가서 주님을 만나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우리는 성서의 이런 가르침을 실감 있게 받아들이기보다는 그저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우리는 이런 성서의 말씀을 실제적으로 깨닫지 못하는 걸까요? 믿음이 없기 때문인가요? 머리가 나쁘기 때문인가요? 그런 이유보다는 우리에게 세계와 생명에 대한 어떤 선입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더 정확한 대답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사물과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절대화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과 연결해서 설명한다면,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절대화합니다. 시간이 우리를 포함한 이 세상을 완전하게 지배하고 있다는 확신이 그것입니다. 이건 옳습니다. 어쩌면 시간이야말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는 가장 탁월한 수단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나이를 먹고 늙는다는 게 모두 시간 현상입니다. 죽는다는 것도 역시 시간의 능력입니다. 이게 바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물의 가장 확실한 질서입니다. 이런 시간에 의한 질서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사이의 틈이 절대화합니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은 그것으로 완전히 끝장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데살로니카 교인들도 역시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재림의 지연과 교우들의 죽음 앞에서 당황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시간 개념을 뛰어넘습니다. 그는 연대기적 의미의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로 세상을 해석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사춘기를 지나고, 청년이 되어, 애기 낳고 살다가 늙어 죽는다는 이런 크로노스가 아니라 참된 생명에 의한 시간을 의미하는 ‘카이로스’가 바로 바울이 말하는 시간입니다. 5장1,2절에서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교우 여러분, 그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중의 도둑같이 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그 때와 시기가 갑자기 시작된다는 사실을 해산의 진통과 비슷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아무런 차이가 없는 그런 결정적인 시간, 즉 카이로스가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오랜 경험으로 예측할 수 있는 크로노스는 결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간격을 메우지 못합니다. 이런 크로노스에서는, 물리학의 열역학 제1원리인가요, 불가역성처럼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기 때문에 그 차이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크로노스마저 지배하는 하나님의 고유한 시간인 카이로스에 의하면 그것이 극복됩니다. 그 하나님은 곧 창조의 하나님이며, 현재도 그 창조를 계속하시며 종말적으로 그것을 완성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시간이 있다는 말을 일상의 차원과 연결해서 조금 더 설명해야겠습니다. 재미있는 영화를 볼 때는 2시간이 흡사 10분처럼 흘러가는 것처럼 경험됩니다. 그렇지만 그 영화를 보기 위해서 기다리는 10분은 흡사 2시간처럼 경험됩니다. 같은 시간인데도 그 시간과 만나는 우리의 심리적인 상태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물론 하나님의 시간이 이와 똑같다는 말은 아니지만 서로 다른 시간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각성의 신앙
생명의 시간은 카이로스이기 때문에 크로노스가 지배하는 이 세상의 삶을 무시해도 좋다는 의미로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리 신앙이 출중해도 여전히 이 세상의 시간이라는 한계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먹어야 하고, 노동도 해야 하고, 사람들과의 구체적인 친교도 나누어야 합니다. 인간다운 사회를 위해서 때로는 투쟁해야 하고, 때로는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연대기적인 시간 안에서 최선을 다 기울여서 살아가지만 기독교인들은 또 하나의 다른 시간에 의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깨어 있읍시다.” 이어서 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대낮에 속한 사람이므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믿음과 사랑으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구원의 희망으로 투구를 씁시다.” 구원의 희망은 예수의 재림으로 인해서 완성하게 될 생명의 세계를 향한 희망입니다. 4절에서 8절 사이에서 바울은 이런 생명의 세계를 ‘빛’이라는 메타포로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이지 어둠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자는 사람들이 아니라 깨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정신을 차린다는 건 물론 생명의 세계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긴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에 대한 비유(마 25:1-13)와 맞닿아 있습니다. 지난 주일의 설교 본문이었습니다. 그 본문이 말하려는 핵심도 생명이 완성될 예수의 재림 앞에서 신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였습니다. 오늘 바울도 역시 신자들이 깨어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죽음과 삶이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될 그런 생명의 완성을 절실하게 새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생명이 곧 구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음과 삶을 넘어서
그런데 여러분, 이 대목에서 우리는 결정적인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차이가 전혀 없는 예수의 재림이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이렇게 구체적인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의 재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일까요? 그 생명은 미래에만 속한 것이지 현재의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까요? 그 종말이 발생하기까지 우리는 막연하게 살아가야만 한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현재 살아있는 우리가 이미 재림의 주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가르칩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 수 있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지금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이미 넘어섰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연대기적인 의미에서는 아직 살아있는 게 분명하지만 카이로스의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죽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세례 받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그와 함께 다시 살았다는 사실을 고백했지요? 그것은 곧 재림 때 완성될 그런 생명의 세계에 미리 참여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삶이 무엇인지 궁금하시죠? 죽음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지요? 그렇습니다. 그것의 완전한 실체는 예수의 재림으로 인해서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고단한 세계 가운데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 종말을 미리 앞당겨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런 죽음의 힘들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그것이 극복된 세계를 앞당겨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재림 지연의 문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현안은 예수의 재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도된 예수의 승천 기사는 그의 재림을 포함하고 있으며, 바나바를 비롯해서 몇몇 대표적인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사유재산의 포기도 역시 예수 재림에 대한 확신을 그 배경에 두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도 우리는 마지막 심판과 예수의 재림에 관한 설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생존해 있을 때 예수가 재림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 예상이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예수의 재림을 손꼽아 기다리던 사람들이 죽기 시작하고, 재림의 징조는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을 맞았던 것이죠. 이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데살로니카 교우들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이 편지를 쓰게 되었는데, 오늘 본문은 그 앞부분인 4장 13-18과 한 묶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13, 1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교우 여러분, 죽은 사람들에 관해서 여러분이 알아 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 가실 것을 믿습니다.” 여기서 ‘죽은 사람들’은 곧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다가 죽은 교우들을 가리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우들의 죽음과 예수 재림의 지연이라는 어려운 상황 앞에서 데살로니카 교인들은 매우 당혹스러워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절망하지 말라고 위로합니다. 그 이유는 재림이 일어나기 전에 죽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생명의 나라도 데려가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설명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수의 재림과 심판으로 인해서 참된 생명의 세계가 시작된다면 그 마지막 때가 이르기 전에 죽은 사람은 당연히 이 세계에 참여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요? 예를 들어 봅시다. 일제의 식민 시대에 살면서 조국의 해방을 기다리던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1945년 8월15일이 되기 전에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행방된 조국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권 국가의 국민이라는 그 특권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예수의 재림 이전에 죽은 사람들은 분명히 그 재림으로 인해서 시작하게 될 참된 생명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지금 그렇게 일찍 죽은 사람도 역시 예수의 재림 때 살아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주장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하느님의 나팔소리
바울은 4장15절에서 주님의 재림 때에는 죽은 사람이나 살아있는 사람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말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가 살아남아 있다 해도 우리는 이미 죽은 사람들보다 결코 먼저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이어서 묵시록의 표상을 빌려서 그 재림 순간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울리면 주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는데, 그때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먼저 살아나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올라가서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묘사는 어떤 사태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라기보다는 문학적 상징입니다. 주님의 재림으로 인해서 시작하게 될 참된 생명은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는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바울은 묵시록적 표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계몽주의 이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구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표현을 실제적인 것으로 납득시킬 수는 없습니다. 성서도 그것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재림 때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이런 묵시록적 묘사에서 중요한 점은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먼저 살아난 다음에야 비로소 산 사람이 그들과 함께 휴거, 즉 참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이 여기서 핵심입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을 완전히 다르게 보고 있지만 성서가 말하는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에서는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인정하시나요? 쉽지 않을 겁니다. 죽은 사람은 앞에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단풍을 볼 수도 없습니다. 살아있을 때 성취했던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사이에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틈이 놓여 있다는 말은 일단 옳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바꿔보십시오. 앞으로 100년 후로 돌아가 봅시다. 그때는 지금 죽어 있는 사람이나 살아있는 사람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1억년 후로 돌아가 보세요.
여러분, 지금 저는 우리의 삶이라는 게 이처럼 허무하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신비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단지 죽음으로 인해서 모든 게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말은 곧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 완전히 파괴되는 게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의 재림할 때, 즉 생명이 완전히 그 실체를 드러내는 때에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똑같이 구름 타고 공중으로 올라가서 주님을 만나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우리는 성서의 이런 가르침을 실감 있게 받아들이기보다는 그저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우리는 이런 성서의 말씀을 실제적으로 깨닫지 못하는 걸까요? 믿음이 없기 때문인가요? 머리가 나쁘기 때문인가요? 그런 이유보다는 우리에게 세계와 생명에 대한 어떤 선입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더 정확한 대답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사물과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절대화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과 연결해서 설명한다면,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절대화합니다. 시간이 우리를 포함한 이 세상을 완전하게 지배하고 있다는 확신이 그것입니다. 이건 옳습니다. 어쩌면 시간이야말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는 가장 탁월한 수단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나이를 먹고 늙는다는 게 모두 시간 현상입니다. 죽는다는 것도 역시 시간의 능력입니다. 이게 바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물의 가장 확실한 질서입니다. 이런 시간에 의한 질서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사이의 틈이 절대화합니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은 그것으로 완전히 끝장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데살로니카 교인들도 역시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재림의 지연과 교우들의 죽음 앞에서 당황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시간 개념을 뛰어넘습니다. 그는 연대기적 의미의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로 세상을 해석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사춘기를 지나고, 청년이 되어, 애기 낳고 살다가 늙어 죽는다는 이런 크로노스가 아니라 참된 생명에 의한 시간을 의미하는 ‘카이로스’가 바로 바울이 말하는 시간입니다. 5장1,2절에서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교우 여러분, 그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중의 도둑같이 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그 때와 시기가 갑자기 시작된다는 사실을 해산의 진통과 비슷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아무런 차이가 없는 그런 결정적인 시간, 즉 카이로스가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오랜 경험으로 예측할 수 있는 크로노스는 결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간격을 메우지 못합니다. 이런 크로노스에서는, 물리학의 열역학 제1원리인가요, 불가역성처럼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기 때문에 그 차이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크로노스마저 지배하는 하나님의 고유한 시간인 카이로스에 의하면 그것이 극복됩니다. 그 하나님은 곧 창조의 하나님이며, 현재도 그 창조를 계속하시며 종말적으로 그것을 완성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시간이 있다는 말을 일상의 차원과 연결해서 조금 더 설명해야겠습니다. 재미있는 영화를 볼 때는 2시간이 흡사 10분처럼 흘러가는 것처럼 경험됩니다. 그렇지만 그 영화를 보기 위해서 기다리는 10분은 흡사 2시간처럼 경험됩니다. 같은 시간인데도 그 시간과 만나는 우리의 심리적인 상태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물론 하나님의 시간이 이와 똑같다는 말은 아니지만 서로 다른 시간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각성의 신앙
생명의 시간은 카이로스이기 때문에 크로노스가 지배하는 이 세상의 삶을 무시해도 좋다는 의미로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리 신앙이 출중해도 여전히 이 세상의 시간이라는 한계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먹어야 하고, 노동도 해야 하고, 사람들과의 구체적인 친교도 나누어야 합니다. 인간다운 사회를 위해서 때로는 투쟁해야 하고, 때로는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연대기적인 시간 안에서 최선을 다 기울여서 살아가지만 기독교인들은 또 하나의 다른 시간에 의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깨어 있읍시다.” 이어서 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대낮에 속한 사람이므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믿음과 사랑으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구원의 희망으로 투구를 씁시다.” 구원의 희망은 예수의 재림으로 인해서 완성하게 될 생명의 세계를 향한 희망입니다. 4절에서 8절 사이에서 바울은 이런 생명의 세계를 ‘빛’이라는 메타포로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이지 어둠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자는 사람들이 아니라 깨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정신을 차린다는 건 물론 생명의 세계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긴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에 대한 비유(마 25:1-13)와 맞닿아 있습니다. 지난 주일의 설교 본문이었습니다. 그 본문이 말하려는 핵심도 생명이 완성될 예수의 재림 앞에서 신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였습니다. 오늘 바울도 역시 신자들이 깨어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죽음과 삶이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될 그런 생명의 완성을 절실하게 새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생명이 곧 구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음과 삶을 넘어서
그런데 여러분, 이 대목에서 우리는 결정적인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차이가 전혀 없는 예수의 재림이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이렇게 구체적인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의 재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일까요? 그 생명은 미래에만 속한 것이지 현재의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까요? 그 종말이 발생하기까지 우리는 막연하게 살아가야만 한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현재 살아있는 우리가 이미 재림의 주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가르칩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 수 있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지금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이미 넘어섰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연대기적인 의미에서는 아직 살아있는 게 분명하지만 카이로스의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죽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세례 받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그와 함께 다시 살았다는 사실을 고백했지요? 그것은 곧 재림 때 완성될 그런 생명의 세계에 미리 참여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삶이 무엇인지 궁금하시죠? 죽음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지요? 그렇습니다. 그것의 완전한 실체는 예수의 재림으로 인해서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고단한 세계 가운데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 종말을 미리 앞당겨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런 죽음의 힘들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그것이 극복된 세계를 앞당겨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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