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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이웃

누가복음 조용기 목사............... 조회 수 1872 추천 수 0 2009.11.30 13: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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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0:25∼37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7. 11. 11. 주일설교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참된 이웃'이라는 제목으로 은혜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항상 이웃이 원하든 원치 않든 곁에 있습니다. 좋은 이웃이 있으면 복되고 나쁜 이웃이 있으면 굉장히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 친구 등이 모두 함께 사는 불가피한 이웃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겠습니까?

<본론>
1.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

누가복음 10장 25절로 27절에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러 왔습니다.
"주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율법사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으로 대답을 하셨습니다. "율법에 구원받는 도리를 어떻게 기록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율법사의 대답은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 "그러면 그대로 하라.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 그러나 율법사가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서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2. 강도 만난 자의 비유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은 높은 지대에 있고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한 70km 떨어진 저 밑 낮은 지대에 있는 것입니다. 여리고는 오아시스로서 농축산물이 풍부하고 여기에서 수확한 농축산물을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올라와서 팔아서 돈을 전대에 가득 채워서 여리고로 내려간 것입니다. 장사를 마치고 돈주머니를 몸에 간직하고 여리고로 내려가니 자연히 강도들이 매복해 있다가 습격해서 돈을 빼앗습니다. 예수님이 말씀드린 이 사람도 예루살렘에서 장사를 해서 돈을 잔뜩 돈주머니가 넣어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가 서로 돈을 빼앗으려고 하고 뺏기지 않으려고 하는 통에 싸움을 했습니다. 그러나 강도들이 무장을 하고 달라드는데 이길 수가 있습니까? 돈도 뺏기고 옷도 찢어지고 온통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거반 죽게 되어서 길거리에 던져 버리고 강도들은 떠났 습니다. 그는 피투성이 속에서 해는 쨍쨍 쬐이고 몸은 고통스럽고 죽게 되었는데 도와줄 사람이 없어 기다리다가 한 제사장이 곁을 지나간 것입니다. 제사장이라는 것은 유대인의 율법을 수호하는 자가 제사장인 것입니다. "제사장이여 제사장이여, 나를 도와주소서." 제사장이 와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그대로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왜냐, 율법의 역할은 꾸짖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이지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주의자는 이웃을 비난하고 벗기고 할퀴고 먹칠하고 짓밟는 것 뿐이지 율법주의자가 이웃을 돕지는 않습니다.

율법은 돕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심판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 제사장이 지나고 난 다음에 너무나 낙심한 이 강도만난 사람은 절망적으로 허덕이고 있는데 레위 사람이 총총걸음을 가지고 뒤를 따라 옵니다. 레위인은 의식을 행하는 자인 것입니다. 의식은 율법을 행하는 제사장을 도와서 여러 가지 형식과 예식을 집행합니다. 성막을 치고 성전 뜰에 여러 가지 기구를 정비하고 정돈하는 의식을 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의식을 행하는 자는 종교의 의식을 행할 뿐 내용이 없습니다. 내용은 자기들이 알바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성막만 치고 우리가 이곳에 번제단이나 물두멍이나 갖다 놓고 재단에 여러 가지 제기를 갖다가 준비하면 되었지 그 내용은 관심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내용인 의로움과 사랑과 믿음에는 무관심한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로마서 12장 15절로 16절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고 말씀했는데 전혀 무관심한 것입니다. 나는 의식만 집행하면 되었지 아무것도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맞아서 피투성이가 돼서 죽어가든 살든 그것은 자기 문제지 내 문제는 아니다. 나는 성전에서 의식만 집행하면 된다고 무관심하고 지나가 버리고 만 것 입니다. 이제는 영락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바랄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선한 사마리아인 한 사람이 근처에 오게 된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인들에게는 유대인들에게 개 취급받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율법과 종교의식이 없는 야만인 취급을 받던 사람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마리아 사람은 율법이 없고 의식이 없더라도 그 마음속에 사랑과 자비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율법주의자 같이 비평하지 아니하고 의식주의자 같이 무관심하지 않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서 이 사람을 바라보고 "무엇으로 치료합니까?" 자기에게 특별한 약이 없는 것입니다. 여행하는 사람이 그 당시에는 기름과 포도주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기름은 햇빛이 쨍쨍 쪼이고 살갗이 타니까 살갗이 유하게 하기 위해서 기름을 바르고 포도주는 마시기도 하고 상처 입는데 부어서 병균을 살균하기도 한 것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갖고 있는 것으로 치료를 했습니다. 기름으로 상처를 부드럽게 하고 포도주로 소독하고 그리고 긴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두루마기를 찢었습니다. 붕대를 만들어서 아픈데 감아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집에 데리고 가서 그를 돌보아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참 이웃이냐?" 이 율법사가 하는 말이 "자비를 베푼 사람이니 이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 그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

이 말씀속에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굉장히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강도 만난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강도를 만났습니다. 원수 마귀를 만나서 마귀가 그들의 영혼을 죽이고 삶을 도적질하고 미래를 훔쳐간 것입니다. 아담의 자손들은 모두 마귀에게 강도 만나 영혼도 삶의 복도 건강도 다 도적 만나고 만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있는 말씀대로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의로움을 도둑질해 가고, 거룩함을 도둑질해 가고, 건강도 도둑질해 가고, 물질적인 풍요와 축복도 도둑질해 가고, 영원한 생명도 도둑질해 가고 만 것 입니다. 우리는 강도만남 사람 으로써 귀한 것을 다 빼앗기고 옷도 벗김을 받고, 상처투성이가 된 것입니다. 피투성이가 된 것이 오늘날 우리의 인생들의 현실적인 삶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책과 절망에 허우적거리고 허무와 무의미에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음의 공포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도와줄 수 있습니까? 율법인 종교인 것입니까? 종교적인 율법을 가지고 우리를 도와줄 수 있습니까? 율법이라는 것은 꾸짖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율법 앞에 설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율법주의적인 남편과 같이 사는 부인은 집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항상 부인을 꾸짖고 흉보고 나무라고 할퀴고 짓밟는 남편에게 어떻게 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율법주의적인 아내하고 남편은 살수 없습니다. 항상 남과 비교하고 흉보고 멸시하고 비평하고 판단하니 그러한 아내하고 남편이 살아갈 수 있습니까? 율법주의적인 부모가 자식을 자꾸 쥐어박고 못났다고 비평하고 평론하고 판단하고 억압하니 그 자식들이 가출을 하지 집에 견딜 수가 있습니까? 율법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심판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항상 꾸짖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옷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으며 이 세상에 허물지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율법은 모든 먼지를 다 털어내고 모든 허물을 다 들어내고 벗기고 흉보고 심판하고 판단하고 할퀴고 짓밟는 것이 율법의 역할인 것입니다. 율법주의적인 종교 앞에서 여러분과 내가 살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3장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육체는 죄를 짓고 살았기 때문에 율법이 오면 죄만 들춰내므로 도저히 율법에 설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4천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다 어겼으니 시편은 말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율법 하에서 의로운 사람은 한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율법을 아무 허물없이 다 지켜낼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 지켜나가도 한 가지만 잘못하면 죄인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율법적 종교는 우리를 도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피투성이가 되있으면서 율법을 따라 의로운 행위를 가지고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만 결국엔 죄인으로 낙착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식이나 예식을 행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의식주의적인 종교, 예식 주의적인 종교가 우리를 도와줄 수 있을까요? 유대인의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기독교인의 세례가 구원을 주는가요? 세례 받았으니 구원받았다고 하는 이 어리석은 말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저의 평생에 잊을 수 없는 것은 20대에 징병검사를 하러 간 것입니다. 20대가 아니지요. 19살 때.. 징병검사를 갔습니다. 그날 제가 부흥회 하는데 미국 사람 통역을 했기 때문에 오전에 징병검사를 받아야 될 것을 오후에 말미를 받아서 징병검사를 갔는데 나를 돌보던 의사 선생님이 군위관 대위였는데 굉장히 화를 내면서 네가 무슨 특권이 있기에 오전에 받아야 될 사람이 오후에 왔느냐고 그래서 "죄송하다구.. 나는 오늘 선교사의 통역을 맡았기 때문에 오전에 부흥회가 있어서 통역한다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호통을 치면서 "통역, 웃기는 소리하네. 너만 예수 믿느냐? 나는 세례 받은 교인이란 말이야." 그러더니만 포켓에서 담배를 끄집어내서 불을 착착 켜서 빨아 당기면서 "나는 미션스쿨을 나온 사람이야. 나는 세례 받았어. 자네 세례 받았냐?" "예, 저도 세례 받았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이런 자기 일을 위해서 국가의 법을 어기는 법이 어디 있느냐." "내가 미리 말미를 얻었는데요." 그러니까 나를 호통을 치고 야단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속으로 '예수 믿고 세례 받은 사람이 왜 저렇게 무섭냐! 이해와 동정이 없이 온전히 율법적이고 정죄하고 판단만 하느냐.' 내 마음속에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례가 구원을 준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겠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그 사람은 구원 받았다고 생각 안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얼굴을 붉히고 화를 내고 성을 내면서 또 세례 받았다고 말을 하면서 담배를 내어서 푹 연기를 품으면서 자기는 세례 받은 사람이라고 하니 그 믿음과 행위가 따르지 않는 불일치한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의식적인 종교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인 것입니다. 아 나는 세례 받았어. 나는 교회에 등록했어. 그러므로 나는 구원 받았어. 웃기는 소리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회개하고 깨어지고 마음속에 예수님을 구주로 진실로 영접하고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세례 받고 교회에 적을 두고 왔다 갔다 해도 구원과는 거리가 먼 것 입니다. 주여 주여 하는 사람마다 천당에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뜻대로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천당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세례 받으므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세례도 받고 교적도 내고 하는 것이지 구원도 받지 않았으면서 세례 받고 교적 낸다고 천당 간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 앞에서 죄인이요, 의식이나 예식 앞에서 무관심을 당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할 자는 누구인가. 누가 선한 사마리아인입니까? 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쓰고 우리 가까이 왔습니다. 피투성이 된 우리들을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와서 우리를 불쌍히 보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보실 때 율법적인 눈으로 판단하고 비평하고 보신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보실 때 무관심하게 보지 않습니다. 형식적인 의식적인 종교만 집행하는 레위인 같이 무관심하게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고 동정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셨으면 왜 우리의 죄와 불의와 죄악과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올라가서 몸을 찢고 피를 흘리기까지 자신을 내어 주신 것입니까? 예수님이 여러분과 나 때문에 고난당하시고 여러분과 나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이 동기가 아니면 그런 희생을 할리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로 우리를 평론하고 비평만 한다면 십자가는 절대로 안 걸머 집니다. 의식주의자로 무관심하게 의식만 집행한다면 우리에게 무관심하고 절대로 우리 위해서 십자가를 걸머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자기의 몸을 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흘리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면서도 이를 참고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영원히 도말하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분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주가 생긴 이후로 역사가 생긴 이후로 우리를 사랑하여 구원하러 오신 선한 사마리아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어떻게 하신 것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우리의 죽은 영혼을 눈뜨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버림받은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멸망 받을 처소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존귀해도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와서 우리 눈을 밝혀 주지 아니하면 우리는 사람으로 존귀하게 태어났지만 깨닫지 못하므로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모릅니다. 멸망 받을 것을 모릅니다. 지옥과 천국이 있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한 사마리아인인 예수님이 오셔서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심으로 우리가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로 부를 수도 없고 성령이 오셔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령이 역사해야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를 사람들이 누구라 하느냐. 예레미야라고 말합니다. 엘리야라고 말합니다. 요한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할 때 주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하고 하느냐?"고 할 때 베드로는 서슴치 않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것은 네 혈육이 아니요. 네 지혜와 총명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알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으로써는 예수를 구주로 알 수도 없고 고백할 수도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성령을 보내 주셔야 우리가 깨달아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선한사마리아인인 예수님은 우리를 긍휼히 보시고 우리 곁에 찾아 오셔서 성령의 기름을 부어서 영혼을 깨우쳐 주시고 그리고 비로소 예수님이 구주 되시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몸찢고 피흘려 죄를 대속하시고 모든 불의와 추악을 씻으시고 질병을 대속하시고 저주를 짊어지시고 사망과 음부를 대신 멸하여 주신 영원한 구주요,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에게 와서 택한 사람을 만들어 주시고 왕같은 제사장으로 만들어 주시고 거룩한 나라로 만들어 주시고 그 소유한 백성으로 만들어 주시는 자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면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모르는데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깨달아 알아야만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인 것을 알고 그 십자가의 고통이 우리를 위해서 대속의 고통을 당한 줄 알고 우리는 죄에서 자유를 얻고 마귀와 세속에서 해방을 얻고 질병과 저주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고 사망과 음부를 이기고 영생복락을 얻은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셔서 성령으로 우리를 깨우치고 그 보혈로 씻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포도주를 부었다는데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기름으로 유하게 하시고 포도주를 부어 해독한 사마리아인처럼 예수님은 성령으로 우리 마음을 유하게 해서 깨닫게 하시고 보혈로 우리를 씻어서 정결하여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시고 마귀의 권세에서 건져 내어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 나라로 옮겨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예수님은 사랑의 붕대로써 우리를 감아 주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 자기 옷을 찢어 붕대를 만들어서 상처에 감아 주듯이 예수님은 그 사랑으로 우리를 껴안고 이해하고 동정하고 인내하면서 우리를 붕대로 감아 주시고 그리고 은혜의 짐승에 태워 주막집인 교회로 데리고 가서 천당 주막집에서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이외에 우리를 이 강도만난 처지에서 건져줄 자는 천하에 없습니다. 율법종교가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의식과 형식 종교가 우리를 구원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현대판 사마리아인인 예수님께서 율법이 아니요, 의식과 형식이 아닌 자비와 사랑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늘날 손을 활짝 내밀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죄로써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 불의와 추악으로 무거운 짐진 자, 버림 받아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 고통 중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겠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짐을 대신 짊어 주셨기 때문에 쉬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짐은 예수님이 다 짊어졌습니다. 오늘 십자가를 바라 보십시오. 나의 죄가 일생 지을죄가 십자가에서 청산된 것입니다. 나를 잡고 있는 마귀와 세상이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다 청산되어 버리고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이 해방시켜 준 것입니다. 나의 질병도 고통도 주님이 십자가에 걸머지고 가셨고 나의 저주와 절망도 주님이 십자가에 걸머지고 가셨고 나의 죽음도 무덤도 지옥도 주님 십자가에서 청산해 버리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문제의 해답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소망이 되시고 우리의 임금이 되시고 우리의 영광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찾아 오셔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분이요, 예수님 이외에 아무도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고 끌어 안아 줄자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전 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 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이제 새로운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직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누구요? 나는 용서받은 의인의 신분을 가졌습니다. 또 당신은 누구요? 나는 거룩하고 성령 받은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당신은 누구요? 치료받고 건강한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당신은 누구요? 나는 축복받고 승리한 사람의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또 누구요? 부활, 영생, 천국 가담한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새로운 신분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화상이 뚜렷합니다. 우리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자기의 모습을 마음속에 언제나 간직하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지위는 뭐냐고 하면은 예수 때문에 나는 택한 사람의 직위를 얻고 왕 같은 제사장의 지위를 얻고 거룩한 나라의 지위를 얻고 소유된 백성의 지위를 얻었습니다. 여러분과 나는 정체성이 분명합니다. 정체불명의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는 정체불명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밤에 사람이 와서 여러분 대문을 두드릴 때 문을 열고 나가면 정체불명의 사람이 서있으면 가슴이 섬찟 하고 두렵습니다. 누군지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예수 믿는 사람이 정체불명의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누군지를 모릅니다. 그냥 왔다 갔다하는 기독교인인줄 알고 있지 자기가 누군지 정체성이 불확실한 것입니다. 자기가 누군지 확실히 알아야 자기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될지 알고 마귀를 대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자기 새로운 신분과 자기의 확실한 자화상과 자기의 지위를 얻어서 새사람이 된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옛사람이 아닙니다.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옛날에 패배하던 사람이 아니라 승리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귀의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자기를 알면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모르면 항상 혼돈 가운데 빠져서 허우적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 거듭나고 자기의 정체성을 확립한 놀라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4. 우리가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할 차례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예수님이 좋은 이웃이 되어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은 즉 우리 차례는 우리도 좋은 이웃이 되어야 될 차례가 온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고난 당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은 것을 봅니다. 우리가 멀리 안가더라도 바로 내 이웃의 형제와 내 동포들이 온갖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마태복음 25장 35절로 36절에 예수님께서 마지막 심판할 때에 심판을 하기 위해서 양의 무리와 염소의 무리를 갈라놓고 양의 무리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언제 우리가 예수님이 목마른 것을 보았으며 배고픈 것을 보았으며 외로운 나그네 된 것을 보았으며 헐벗은 것을 보았으며 병든 것을 보았으며 옥에 갇힌 것을 보았나이까? 그러니까 이 지극히 적은 이웃 한 사람이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서 좋은 이웃이 되어서 배고픈 사람을 먹여 주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고 나그네 된 사람을 영접해 주고 병든 사람을 치료해 주고 옥에 갇힌 사람을 돌보아 준 것이 예수 이름으로 했을 때는 예수님을 대접한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은 절실히 필요한데 예수님을 대접한다고 해서 환상 중에 예수님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이웃을 예수님처럼 대접하면 예수님을 대접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한 부부가 기도하는 중에 주님이 '오늘 내가 너를 찾아 가겠으니 나를 대접할 준비를 하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고 집안 청소를 다하고 좋은 음식을 준비해서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잔뜩 준비하고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예수님이 안나타나더 랍니다. 그런데 밤이 좀 으슥 해서야 문을 두드려서 가보니까 눈이 오고 추운 겨울인데 고아 한 사람이 벌벌 떨고 서있더랍니다. 그래서 불쌍한 마음이 생겨서 "오라는 예수님은 안 오고 고아만 왔구나. 이리로 들어오너라." 그래서 목욕을 씻겨 주고 옷을 입혀 주고 밥을 먹여서 내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예수님이 안 오십니다. 이제 12시쯤 되어서 '아이고 예수님이 안 오시는가 보다. 우리 자자' 그런데 또 문을 두드리더랍니다. 보니까 한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눈을 피하지 못하고 밤에 얼어서 동사할 지경이 되어서 온몸이 새빨갛게 되어서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립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또 그분을 영접해서 목욕을 시켜주고 따뜻한 옷을 입혀주고 음식을 먹이고 집안에 침대에서 재워서 내어 보내줬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 이튿날 그 부부가 기도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오신다고 해놓구난 다음에 안오시니 우리를 속였지 않습니까? 오시란 주님은 안오고 고아만 오고, 나그네만 왔다 갔습니다." 그러자 그날 저녁에 자는데 부부에게 또 예수님이 나타나서 '내가 너희 집에 가서 대접을 잘 받았느니라.' "언제 오셨습니까? 언제 우리가 대접했습니까?" "내가 고아의 모습으로 찾아갔고 그 다음 나그네의 모습으로 찾아갔는데 너희들이 고아를 잘 대접하고 나그네를 잘 대접했는데 그게 바로 나를 대접한 것이란다."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오늘날도 한 가지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고아의 모습으로 여러분 이웃에 있습니다. 나그네의 모습으로 여러분 이웃에 있는 것입니다. 굶주린 자로써 여러분 이웃에 있습니다. 병든 자로써 여러분 이웃에 있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힌 자로써 여러분 이웃에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예수 이름으로 사랑을 베푸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실제 만나야 주님을 섬기겠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우리 선한 이웃이 될 수 있는 상대가 되고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주의자가 되어 비난하지 말고 의식주의자가 되어 무관심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는 언제나 욕 만합니다. 왜 거지가 되었냐, 게을러서 그렇게 되었지. 왜 직장이 없느냐. 3D직장은 안가지려고 했지. 왜 못났느냐. 잘난 세상에 열심만 했으면 잘날 수 있었는데 도움은 안 베풀고 자꾸 욕만 하는 것입니다. 비난하고 평론하고 비평하는 것이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느냐. 더 절망하게 하고 더 낙심하게 할뿐 도와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 나는 교회 나가서 세례도 받고 성찬도 떼고 십일조도 내고 열심히 교회 다니니 그로써 되었지 남이야 잘살든 못살든 고통을 당하든 관심할 것이 뭐냐." 의식주의 신자들은 무관심합니다. 마음에 의로움과 사랑과 진실함을 다 포기해 버리고 내용 없는 신앙으로 교회 왔다 갔다 하면 나만 구원받고 우리 가족만 구원 받았으면 되었지 세계야 어떻게 되든 망하든 흥하든 내가 무슨 상관이냐. 무관심주의 이것도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4절로 17절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받았지만 이 구원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기 위해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우리 구원받은 목적은 이웃을 돕기 위해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웃에게 전도하고 가르치고 귀신 쫓아내고 병고치고 먹을 것을 나누어 먹고 입을 것을 나누어 입고 평안하게 이웃을 도와주기 위해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았으면 그 구원을 이웃과 나누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만 구원받았으면 되고 나는 구원받았으니 이웃을 비난하고 공격하고 무관심하면 된다는 것은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보좌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몸을 찢어 주고 피를 흘려 마시게 해주셨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를 베풀었는데 우리는 나는 왜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자기가 가진 것으로 한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 가진 것은 기름한통, 포도주, 입고 있는 옷밖에 없었습니다. 부자도 아닙니다. 백만장자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있는 것 가지고서 있는 기름, 있는 포도주, 있는 옷을 찢어서 붕대를 만들어서 도와 준 것 입니다. 우리가 큰 부자가 되어야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백만장자가 되지 않더라도 내가 있는 것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빵조각이 있으면 그 빵조각을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입는 옷이 두벌 있으면 한 벌은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이 두 켤레 있으면 한 켤레 나눠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이웃을 도와주고 구제하는 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이유는 이웃과 나눌 수 있게 되기 위해서 복을 주는 것입니다. 나누는 사람에게 복을 주지 나누지 않는 사람에게 복을 주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벳세다 광야에 갔을 때 5천명의 사람, 남녀 합쳐 수 만명의 사람이 굶주렸을 때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해서 어린 소년이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나누었습니다. 어린 소년이 자기도 배고파 못견디겠는데 자기가 가진것으로 나눈 것입니다. 없는 것을 돈 주고 사온 것이 아닙니다. 보리떡 다섯 개, 가난하고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 보리떡 다섯 개와 조그마한 물고기 두 마리 자기 가진 것을 가지고 나누니까 나중에 자기에게 얼마 돌아왔습니까? 5천명과 부녀자 기만명이 다 먹고 12 바구니 남은 것이 그 소년에게 돌아오게 것입니다. 나누어 줄때 돌아오는 것입니다. 나누어 주지 않는데 왜 하나님이 도와주고 축복할 이유가 어디 있는 것입니까? 수전노, 욕심쟁이에게 왜 하나님이 축복을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주시는 자를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라. 그리해야 돌려줄 것이요. 곧 후히 되어 눌러 흔들어 넘치게 해서 안겨 주리라고 한 것입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참말입니다. 심어야 거두지 않습니까? 심지 않고 거두는 사람 보았습니까? 아무리 문전옥답이라도 심어야 추수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있는 것으로 심어야 되는 것입니다. 없는 것으로 심으라는 말은 안합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심을 때 우리가 거둘 수가 있는 축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주는 자 심는 자를 절대로 빈 손 들고 돌아가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게 말합니다. 왜 평양에 병원을 지으려고 하느냐. 대한민국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병을 안고 있는데 왜 평양에 지으려고 하느냐.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하나님의 사랑 속에 얼마나 일류 시설을 가진 병원이 많습니까? 훌륭한 병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어떻습니까? 우리 이웃에 있으면서 강도 만난 이웃인 것입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정말 주님께서 말한 것처럼 굶주리고 헐벗고 외롭고 병들고 고통스러운 이웃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북한에 있고 우리는 남한에 있으니 무관심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북한을 향해서 비난하고 공격하고만 있을 것입니까? 체제가 잘못되어서 그렇다. 정치를 잘못해서 그렇다. 게을러서 그렇다. 그런 것이 무슨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까? 비평과 평론이 조그마한 도움을 가져올 수 있습니까? 우리 관심 가질 것 무엇이냐. 우리만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면 되지. 그것은 레위인과 같이 형식주의자요, 의식주의자요, 내용이 없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이웃이 고통당하고 있는 이상 우리 편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죄짓고 병들고 고통당하고 있는 이상, 주님이 보좌에 앉아서 편안하지 않기 때문에 보좌를 버리고 육신을 쓰고 오신 것입니다. 사랑은 고통을 같이 감내하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에 무관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가 자식이 많더라도 잘사는 자식은 걱정이 안 되지만 못사는 자식에게는 항상 걱정하고 고통하는 것입니다. 왜,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을 함께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음에 가지면 우리가 북한 동포들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되고 그들이 고통을 함께 걸머 질 수 있는 마음에 자세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북한에 심장병원을 세우려고 합니다. 수많은 성인과 어린 아이들이 심장병으로 죽어가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서 한 150억 예산을 세우고 국가에서 한 50억 도와 주시고 한 200억을 가지고서 평양에 병원을 세우는데 여러분 150억이라는 것이 우리가 결심만 하면은 많은 돈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 75만 중에 5만 명만 성도가 2년 동안 각각 30만원만 작정하면 일 년에 15만원, 한 달에 약 1만3천원, 한 주일에 약 3300원 드리면 150억은 2년 동안에 실컷 되는 것입니다. 우리 병원은 2년 내에 완성하는데 2년 동안에 우리교회 5만명 만 2년 동안에 30만원을 작정해서 1년에 15만원 내고, 한 달에 1만3천원, 한 주일에 3300원 드리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응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이면 담배 한 갑 정도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해서 우리가 사랑을 베풀 때 하나님이 우리나라에 복을 주시고 우리 한국교회에 복을 주시고 우리의 동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힘을 합쳐서 사랑을 실천하는 좋은 이웃이 되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만 잘 먹고 잘 입고 잘살면 된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구촌에서 운명공동체가 되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배를 타고 있는 것입니다. 불가불 이 땅에 사는 사람은 태어나서 늙어서 다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양무리가 될지 염소의 떼가 될지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행위로 결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사랑 나누면 양무리가 되고 이기주의자가 되면 염소의 무리가 될 것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우리가 마음속에 받아 들이고 난 다음에 우리 속에 사랑을 갖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들어왔는데 왜 사랑을 나타내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진실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구주로 모셨으면 사랑의 사람들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웃의 짐을 나누어지는 것이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도록 노력하고 언제나 이웃을 위해서 선한 일에 심어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로 9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이라.
흩어 가난한 사람에게 주므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영광스럽게 되고 또 하나님이 30배, 60배, 100배로 갚아주는 것이니 일거양득이요, 얼마나 큰 축복인 것입니까?

<결론>
여러분! 신앙인의 가장 큰 덕목이 무엇인지 압니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를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 크리스천의 덕목의 제일이 사랑인 것입니다.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남편들이여 아내를 내 몸처럼 사랑하라. 아내들이여 남편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부모여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성도여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자연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만 사랑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도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세상은 사람만 세상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동물도 있고 식물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고 동물들을 사랑하고 식물들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곳에 구원의 아름다운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요사이 기독교에 대해서 비평이 많습니다. 교회는 많이 짓고 호화롭고 찬란하게 지으며 숫자는 많아도 사회에 영향력이 없고 지도력이 없다고 비평을 많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느 대학교에서 기독교 비평하는 평론회에 플랭 카드에 기독교라고 안하고 개독교라고 해놓은 것입니다. 그런 모욕적인 언사가 어디 있는 것입니까? 기독교가 아니고 개독교다. 왜 우리가 그런 모욕을 들어야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사랑실천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있는 것으로 적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랑을 실천해서 감화, 감동 시켰더라면 이런 비평을 받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나는 없어서 못한다. 여러분 사마리아인은 없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입니다. 현재 우리에게 비교해서는 거지와 한가지인 것입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기름 한통, 포도주 한통, 입은 옷밖에 없었습니댜. 그래도 그는 선을 베풀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비교하면 얼마나 많은 선을 베풀 수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먹다가 남은 음식 쓰레기만 하더라도 엄청난 양을 버리지 않습니까? 우리 이웃에 음식 쓰레기조차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겨울이 되어도 따뜻한 옷 한 벌 입지 못하고 동동 발을 구르면서 떠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병들고 치료받지 못하고 그대로 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고개를 돌려 버리고 내 문제가 아니니 모르겠다고 무관심한 의식주의자가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는 율법주의자가 되겠습니까? 문제는 율법주의도 비난할 것도 아니고 무관심한 의식주의자 될 것도 아니고 사람을 살리는데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너는 유대인이니까 안 돌보아 주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너는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상관없다. 죽어가니까 살려 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를 초월해서 예수 믿는 사람은 사랑을 베푸는 것이 우리의 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고 말했지 하나님이 대한민국만 사랑했다. 일본은 사랑하지 않는다. 중국은 사랑하지 않는다. 소련은 사랑하지 않는다 했습니까? 이 세상에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모든 인생들을 주님은 사랑하사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입니다. 누구든지라고 말한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나 좋은 사람이나 의롭다고 하는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누구든지 예수 믿어야 구원받고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사랑을 전하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사랑이 눈을 뜨게 하고 귀를 열리게 하고 마음 문을 열게 해서 왜 이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느냐고 묻게 될 것이요. 그것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전도가 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닫힌 문을 열고 모든 완악한 마음을 깨뜨리고 모든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취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다른 수단을 사용해서 인류를 구원 시키려고 했더라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율법으로써 사람을 책망하고 꾸짖고 때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장엄한 건물을 지어서 우리에게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사람으로 보내셔서 십자가에 몸을 찢고 피를 흘리고 늘어져 있습니다. 저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2천년전에 예수님께서 힘없이 못박혀서 늘어져 있습니다. 그분이 힘없는 분입니까? 무능한 분입니까? 하늘과 땅을 지은 창조주인 것입니다. 그의 손에 의해서 하늘과 땅이 다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그가 왜 못에 박혀 저렇게 늘어져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사랑 때문에 고통당하고 사랑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이 고통 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을 걸머지고 대신 괴로움을 당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번에 우리 교회에서 행하는 평양 심장병원은 북한을 사랑하는 우리 교회의 정성이 담긴 것입니다. 우리가 수 천번 수 만번 사랑 한다 해도 그것은 헛소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증명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수없이 말해도 그 아들을 주지 아니했으면 우리가 그것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북한을 사랑하고 북한 동포들을 주께로 인도하기를 원한다고 우리가 말하는 증거로써 심장병원을 세우고 그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을 전하는 우리 교회가 되고 여러분이 되고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는 늘 예수님을 자랑하고 찬양하지만 그리스도의 성품인 사랑을 전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비난하고 공격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교회당은 아름답게 짓고 교회 수는 많지만 사랑의 손길은 점점 식어져 가고 있으니 한국 교회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지 않습니까?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는 율법주의자가 되고 의식주의자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수많은 강도만난 사람이 주위에 넘어져 있건만 무관심하고 지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원하오니 우리 아버지여 우리 교회만이라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교회인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성도만이라도 있는 것으로 불한당 만나고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주는 사마리아인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우리를 감동하사 우리에게 평양에 심장병원을 세우라고 명령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이 명령을 쫓아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고 한사람도 빠짐없이 여기에 참여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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