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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지사와 은혜

누가복음 조용기 목사............... 조회 수 2073 추천 수 0 2009.11.30 13:5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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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5:11~24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7. 12. 23. 주일설교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당연지사와 은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깨닫지 못할 때는 모든 것이 당연지사인 것입니다. 크게 감동할 것도 없고 감사할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을 때는 부모의 돌보심을 받고 사는 것이 당연지사요 별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어머니 되셨으니 나의 일용할 양식을 돌보고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있을 곳을 돌보는 것은 당연지사지 그것을 뭐 은혜로 생각하느냐. 그렇게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을 때는 천지와 만물이 그냥 그렇고 당연지사이고 감탄하고 감격할 일이 아닙니다. 아침에 해가 떠도 당연지사고 비가와도 당연지사고 날이 맑아도 당연지사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기이하게 지나가도 당연지사인 것입니다. 놀랄 일도 없고, 감탄할 일도 없고, 감사할 일도 없습니다. 은혜는 은혜를 잃어 버렸을 때 비로소 은혜의 귀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도로 찾았을 때 감격되고 감사하고 기쁘고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서해안 원유유출 사고로 태안해안국립공원 생태계가 제 모습을 찾기까지는 적어도 20년 이상 걸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바다 밑바닥에 사는 저서생물과 어패류 등의 생태계 파괴가 벌써 시작되어 어류 46종도 거의 사라진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환경부는 3년이 지나야 해조류, 갯지렁이와 바위에 붙어사는 생물이 복원되기 시작할 것이고 조개류는 5년 이상 지나야 회복 되고 적어도 10년은 지나야 모든 생물이 회복 단계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밖에 근해 어업에도 타격을 주어 고등어 3대 어장 중 하나인 태안 앞바다는 조업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쌓여 늘 풍부한 해산물을 얻을 수가 있었고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앞 다투어 바다로 갔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그저 자연이 주는 당연지사로 알았습니다. 이번에 가서 해안이 시커멓게 기름 끼로 물들고 돌들이 기름에 뒹굴어지고 새들이 죽고 해초가 기름에 뭉개지고 해조류들이 다 죽고 조개가 죽고 모든 것이 죽음으로 꽉 들어차 있을 때 '아! 맑은 바다, 아름다운 물결, 신선한 해산물을 주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니었구나!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잘 가꾸고 보존해야 우리가 누릴 수 있구나!'하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을 깨닫지 못할 때는 당연지사로 생각하지만 깨닫고 보면 당연지사가 아닙니다.

<본론>
1. 탕자의 비유

오늘 탕자의 비유를 보면 은혜를 모르는 아들에 관한 비유가 있습니다. 아버지 집에 살면서 의식주의 복된 삶을 당연지사로 생각하고 감사나 감격할 일이 없었습니다. 큰 농사를 짓는데 거대한 저택에 자기 독방을 가지고 있는 것 없는 것 다 소유하며 삽니다. 아침, 점심, 저녁때를 따라 먹고, 좋은 옷을 입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며 사는 것을 당연지사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우리에게 해줄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조금도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고 은혜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원망과 불평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권위 하에 살며 명령에 복종하며 사는 것에 대한 불평인 것입니다. '왜 내가 아버지 밑에서 아버지 명령을 받고 종처럼 살아야 되느냐!' 하루속히 아버지 슬하를 떠나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2절에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아버지를 떠난 삶
그러자 그는 그 재산을 다 청산해서 아버지의 권위를 떠나기 위해서 아버지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먼 나라로 갔습니다. 가까이 있으면 또 아버지의 간섭이 있을까 싶어서 아버지 손길이 미치지 못할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했습니다. 아버지의 세상으로 자유방임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삶이 당연지사라고 했습니다. 언제나 돈은 있고 언제나 마음대로 쓸 수 있고 방탕하게 살 수 있는 것은 당연지사로 생각하고 걱정하지 않고 허랑방탕하고 산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3절에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당연지사가 항상 계속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돈도 기근이 오고 환경적 기근과 궁핍도 다가온 것입니다. 아버지께 받은 재산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벌지 않고 퍼 쓰니 그 퍼 쓰는 재산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얼마 있지 아니하여 재산도 바닥이 나고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그곳에 기근이 와서 먹을 것, 입을 것, 있을 곳도 얻기가 힘들게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4절에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하게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잠언 23장 5절에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재물에 의지하면 재물은 언제고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 돈도 다 잃어버리고 이제는 기근이 와서 모든 사람이 굶주리더니 직장도 얻을 수가 없고 셋집에서는 방세를 올리고 안내면 나가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길거리에 주저앉게 되고 홈니스가 되고 비참하게 된 것입니다.

3. 깨달음과 은혜
호구지책의 어려움과 고통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직장을 구하러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길거리를 방황하다가 겨우 얻은 것이 어떤 농부의 부자 농부의 돼지우리에 돼지 치는 직업을 갖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돼지 치는 직업이 제일 낮은 직업인 것입니다. 그것은 도시 안에 있지 않고 저 변두리에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5절에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돼지를 치면서도 배고프고 춥고 괴로움이 말로다 할 수 없었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나누어 먹으려고 하다가 돼지에게 물리고 짓밟혔습니다. 배가 너무나 고팠습니다. 너무나 추웠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니까 어찌할 수 없이 아버지 집에 살던 옛날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경험하지 않습니까? 우리 자녀들이 해외에 가서 잘 살 때는 부모에게 1년에 전화 한번 할까 말까 한 것인 것입니다. 그러나 전화가 자주 오면 큰 탈난 줄 아십시오. 열흘이 넘지 않고 "아버지, 어머님 잘 계십니까? 행복하십니까? 기체후만강 하시옵니까?" 그러면 '고장 났구나..' 비로소 부모를 생각하고 부모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은 그만큼 자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우니까 부모의 슬하 밑에 살던 그 옛날의 축복이 기억나는 것입니다. 당연지사가 아닌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탕자도 누가복음 15장 16절로 17절에 보면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주려 죽게 되자 의식주의 생활이 당연지사가 아니라 아버지의 크신 은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매일같이 자고, 깨고, 일어나고, 마시고 사는 것은 당연지사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니에요. 자기가 굶주려 죽게 되어보니 그것이 당연지사가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의 특별하신 배려와 사랑과 돌보심의 따뜻한 손길이요, 큰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에게 당연지사란 하나도 없었습니다.

4.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탕자
은혜만이 그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은혜 없이는 못산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이아들에게는 큰 깨달음인 것입니다. 그가 신발을 신지 못하고 등에 옷이 다 벗겨지고 손이 터지고 배가 굶주려지고 얼굴이 뼈만 남게 되고 앙상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인생을 사는 것이 당연지사가 아니라 모든 것이 은혜구나 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자고, 깨는 것이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이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 아버지의 은혜 아니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은혜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은혜를 찾아서 돌아가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이제는 아버지를 당연지사의 아버지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은혜를 베푸는 주인으로 섬기고 자기의 아들이 된 것은 당연지사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품꾼으로 복종하는 삶을 갖겠다고 마음에 결심했습니다. 큰 변화가 왔습니다. 당연지사일 때는 아버지가 나를 돌보는 것 당연한 것 아니에요? 나는 아버지 아들이니 상속을 받는 것 당연한일 아니에요. 그랬다가 고난을 당하고 보니 아버지가 크게 보입니다. 위대하게 보입니다. 아버지가 아버지보다도 위대한 주인으로 보입니다. 자기는 너무나 비천한 품꾼으로 보입니다. 종도 훌륭합니다. 종보다 더 못한 날일 품꾼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태도에 변화가 왔습니다. 은혜를 모를 때는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고 교만했지만 은혜를 깨닫고 난 다음 자기가 얼마나 무력하고 보잘 것 없고 빈손 들고 비천한 것을 깨닫고 알게 되고 은혜 베푸는 아버지가 얼마나 위대하고 훌륭하고 자상스러운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8절로 19절에 보면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 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그가 아버지 집에서 나올 때는 당연지사로 당당하게 아버지 재산 정리해서 어깨에 걸머지고 힘찬 발걸음으로 나와서 먼 나라에서 허랑방탕하고 살 때는 당연지사로 생각했는데 기근이 오고 돈이 떨어지고 박대를 당하고 버림을 당하고 배가 고파 죽게 되니까 아버지의 재산이 보통 재산이 아닙니다. 당연지사가 아니지요. 아버지가 재산준 것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아버지의 좋은 주택에 사는 것 엄청난 은혜지 당연지사가 아닌 것 알았고 당당하던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부끄럽고 못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로 사는 것이지 은혜 없이는 못사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당연지사는 없고 모든 것이 은혜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누가복음 15장 20절로 21절에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아버지께서는 말했습니다.

5. 은혜를 아는 자에게 더하시는 은혜
누가복음 15장 22절로 24절에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은혜를 아는 아들에게 하나님은 비로소 더 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탕자가 아버지를 버리고 나갈 때 아버지는 마음에 크게 섭섭하게 여기고 마음에 상처를 입었으나 자기 몫을 주었습니다. 탕자가 깨닫고 깨어져서 이제는 종으로써 품꾼으로써 하나로 보아달라고 겸손해져서 왔을 때 은혜를 알 때 하나님은 구하지도 않았는데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은혜를 모르고 모든 것을 당연지사로 생각하고 해도 당연지사요, 달도 당연지사요, 자연현상도 당연지사로 준 것이요, 생명도 당연지사로 알고 있다가 내가 병들고 가난하고 직장을 잃어 빈 손들어 비천하게 되고 고통스러울 때 그때 생각해 보면 건강도 당연지사가 아니요,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자는 것도 당연지사가 아니요, 배불리 먹고 마시는 것도 당연지사가 아니요, 직장에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당연지사가 아니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닫는 자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당연지사로 생각하는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니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있는 자에게는 더 주고 없는 자에게는 있는 것조차 빼앗아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고 감사하면 더 주고 은혜를 은혜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당연지사로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하지 아니하면 있는 것조차 기근이 들어 다 빼앗기고 만다는 것을 이 성경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모를 주시고, 형제를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수많은 시험과 환난을 통해서 지금까지 살아있게 한 것이 당연지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돌보아 주셔서 지금까지 산 것입니다. 이것을 당연지사로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가 매일매일 생활에 감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원망과 불평을 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큰 사고와 고통이 닥쳐서 모든 것이 궁핍하고 어려워지면 비로소 살아온 생활이 당연지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감사하고 찬미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비로소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혀라.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올 때 선물로 은혜의 옷, 구원의 옷을 입혀 주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옷이 뭡니까? 용서와 의의 영광스러운 옷인 것입니다.
그리고 가락지를 끼워라.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가락지라는 것은 유대인의 사회에서 친자식으로 낳으면 그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는 것입니다. 그 가락지에 어머니와 아버지와 형제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아들은 집을 나갈 때 가락지를 뽑아서 던졌습니다. 나는 이 집안 식구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깨닫고 돌아오니까 도로 아들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여 하나님을 떠났지만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자녀가 된 증거로써 가락지를 끼워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가락지를 우리에게 끼워 주어서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신발을 신겨라. 옛날에 종은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을 벗고 다닙니다. 아들은 신발을 신습니다. 밭에서 일할 때 아들도 일하고 종도 같이 일하는데 누가 아들인지 알려면 발을 보면 아는 것입니다. 신발을 신지 않은 자는 종이고 신발을 신고 일하는 자는 아들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신발을 예비해 준 것입니다.
요한3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삼중축복이라는 신발을 예비해 주신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자에게 이렇게 인생을 풍부하게 살도록 신발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 그 아들에게 원치도 않았는데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빼빼한 병든 송아지가 아니라 살찐 송아지를 잡은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자에게는 살진 송아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우리에게 살지 송아지와 같이 의로움과 평강과 희락을 넘치게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안셀름 그린이 쓴 "다시 찾은 마음의 평안"이라는 책에는 그림자로부터 도망치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의 그림자를 몹시 못마땅해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계속 자신을 졸졸 쫓아따라 다니는 그림자가 미워서 "물러가라! 물러가!" 그리고 돌아보면 또 따라 옵니다. 그래서 그림자로부터 피하려고 뛰니까 순식간에 발뒤꿈치에 그림자는 따라옵니다. "요놈의 자식 못따라 오게 내가 죽도록 뛰어야 되겠다."고 숨이 턱에 닿도록 뛰고 심장이 입으로 튀어 나올 정도로 뛰다가 거꾸러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깨어나지 못하고 죽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뛰어 달아나던 그 옆에 큰 나무숲이 우거져 있는데 어느 순간이고 나무숲으로 들어갔으면 그림자는 사라졌을 것인데 왜 나무숲에 들어가지 않고 땅땅거리는 태양빛 아래서 뛰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큰 은혜를 비취고 있는데 그 십자가 그늘 밑에 들어가지 않고 나의 힘으로 나의 수단으로 나의 지혜로 나의 총명으로 나의 노력으로 살겠다고 뛰어갑니다. 더 열심히 더 열심히 더 열심히 더 일찍 일어나고 더 늦게 누우며 더 애쓰고 더 힘써서 살아야지. 그러다가 지치고 피곤하고 좌절과 절망에 들려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내 뒤에 따라오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 그늘 밑에 피할 곳이 있습니다. 십자가 그늘 밑에 들어오면 그림자가 사라질 것인데 세상의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의 그림자를 뒤에 걸머지고 뛴 것은 십자가 밑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은혜 속에 들어오면 은혜가 우리를 구출해 주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못사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은혜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할 수 있다. 내 힘에 의지하고 나를 자랑 삼을 때는 은혜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아~ 내 주먹을 믿고 산다. 내 능력을 믿고 산다. 내 학력을 믿고 산다. 나의 능력으로 산다. 자기를 의지할 때 은혜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6. 십자가의 은혜 (내 힘으로 못사는 것을 깨달을 때 은혜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여 절대로 내 힘으로 죄를 청산할 수 없어 마음에 죄책과 정죄감 으로 고통을 당할 때 아무리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고 애써도 못하고 죄로 고통당할 때 그때 나는 죄를 이길 수가 없고 죄를 털어 버릴 수 없구나. 나의 죄를 용서해줄 분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밖에 없구나. 그래서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와 의의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값을 지불하고 죄를 용서 받으려고 하니 안 되는데 그런데 십자가 밑에서 은혜로 용서와 의를 얻게 된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죄를 깨닫고 자기 힘으로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알고 십자가 밑에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깨끗하지 못할 때 아무리 씻으려고 해도 세상과 마귀가 들러붙어서 음란하고 방탕하고 술 취하고 세속적으로 살고 거짓말하고 사기치고 아무리 씻으려고 해도 안 될 때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애를 써도 안 되고 힘을 써도 안 되고 노력해도 안 됩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럴 때 십자가 밑에 나오면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비로소 자기 힘으로 의롭고 거룩하게 못산다는 것을 깨달아야 예수님께 나와서 성령으로 체험 받고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배가 고픈 것을 알아야 밥을 찾지 내가 목이 마른 것을 알아야 물을 찾지, 내가 옷을 벗은 줄 알면 옷을 찾는 것과 같이 자기가 얼마나 무력하고 무능한 것을 알아야 주님께 나와서 성령의 은혜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1절에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이 오시면 씻어 주시고 거룩하고 의롭다 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병이 들어서 온갖 약을 다 먹고 온갖 병원에 다가고 온갖 의사들의 치료를 다 받아도 안 나으니까 이제는 약도 소용없다. 의사도 소용없다. 나는 나을 수가 없다. 죽게 되었다. 그러면 어디를 갑니까? 오산리 기도원으로 갑니다. 왜, 그때야 하나님의 도우심을 찾는 것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나 쓸데 있는 것입니다. 건강한데 무슨 의원이 필요한 것입니까? 병이 드니까 의원이 필요한 거지요. 못 나으니까 고통스러우니까 주님을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때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나니”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잘살 때는 하나님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 뭐 의지하나. 나 잘 먹고 잘사는데... 내가 열심히 일해서 잘 투자해서 사업 잘해서 잘사는데 무슨 하나님께 감사를 하느냐. 잘될 때 그런 큰소리 합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천당에 들어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듭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부자일지 몰라도 참으로 불행한 사람인 것은 재물을 의지하고 부를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가난해야 나를 부하게 해주신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기 전 부자 안 된 것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예수 믿기 전에 부자고 부족한 것이 없으면 여러분께서는 하나님을 비웃고 교회 나오는 사람을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귀와 영화가 며칠 갑니까? 얼마 안 있어 바람같이 사라지고 말고 결국에는 죽음의 요단강 건너갈 때 빈 손들고 건너가고 영원한 지옥 불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내가 못살 때 잘 살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가난해져야 부요케 해주시는 주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옥 간다는 것을 알 때 천국으로 보내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할 수 없이 지옥 가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는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나이를 먹고 이제는 죽을 날이 가까이 오는데 꿈에 지옥을 보았다든지 갔다가 지옥의 환상을 보았다든지 마음속에 죄책으로 몸부림치게 되면 지옥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자기 힘으로 지옥에 안 가려고 발버둥쳐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때 지옥에서 건져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우리가 가는 저편에 거처가 있는 것을 알면 마음이 평안하잖아요.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가면서 저 건너편에 거처가 있는 것을 모릅니다. 버림받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광야 같은 죽음의 저 건너편으로 밀려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안하고 절망적인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거처가 예비 되어 있고 천사들이 우리를 영접하고 환영할 것을 알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터널을 지날 때 안심하고 평안하게 죽음의 터널을 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역사상 많은 크리스챤 화가들이 돌아온 탕자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그림이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인 것입니다. 수채화로 그린 이 그림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 장면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신발이 다 헤어져 왼쪽 신발은 아예 신을 수 없어 벗겨져 있고, 오른쪽 신발은 다 닳아서 밑창이 없이 구멍이 나서 발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신분을 상징하는 겉옷은 없고 남루한 속옷 한쪽을 걸치고 있습니다. 머리카락은 마치 죄수나 범죄자처럼 깎아버렸습니다. 그런 그가 마치 왕처럼 보이는 아버지의 가슴에 왼쪽 귀를 대고 안겨 있습니다. 빛나는 황금 팔찌로 팔을 장식한 아버지는 냄새나는 아들을 따뜻이 감싸 안고 마냥 행복해 합니다. 하나님은 이아들을 탕자나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잃은 아들이 돌아왔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보기에 너무나 더러운 아들입니다. 머리는 산발이 되고 온몸은 상처투성이고 돼지 똥냄새가 나고 옷은 반 벗었고 신발은 거의 벗었고 몸은 남루하기 짝이 없습니다. 누가 봐도 아버지와 같이 저명하고 부자고 훌륭하고 아름다운 장식을 한 그분이 그를 끌어안을 수 없습니다. 온 몸이 더러워질 테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돌아오는 탕자를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기뻐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아들이 나갈 때는 은혜를 모르고 나갔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당연지사로 생각하고 나가다가 고난을 통해서 깨어져서 이제는 은혜를 알고 돌아온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 사는 것이 품꾼으로 살아도 얼마나 은혜인 것을 알고 은혜를 깨닫고 오는 아들은 아버지가 그 더러운 그대로 못난 그대로 병든 그대로 추악한 그대로 끌어안은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고 영광스럽고 존귀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까? 우리가 얼마나 더럽고 추하고 병들고 형편없는 냄새가 나는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알고 우리 힘으로 살수 없는 것을 알고 우리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줄 알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나오면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끌어안습니다. 천사들이 말합니다. "더럽습니다. 하나님 끌어안지 마십시오. 냄새가 고약합니다. 더럽습니다. 추한 사람입니다. 과거 경력이 나쁩니다. 저런 사람을 끌어안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합니다. "아니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찾았고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 은혜를 모를 때는 잃은 아들이요, 당연지사로 살 때는 죽은 아들인데 은혜를 깨달아 알고 은혜를 찾아 들어오는 자는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내가 빈 손 들고 벌거벗었을 때 돌봐주시고 입혀주시는 은혜가 감격적이고 감사하여 그 은혜가 행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행복합니다.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을 다 아버지께 맡기고 아버지의 품에 의지해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인생을 살아가면 아버지와 내가 한 팀이 되어서 아름다운 삶을 사니 얼마나 행복한 것입니까? 예수 믿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인 것입니다. 예수 믿고 사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인 것입니다. 예수 믿고 사는 것이 금새와 내세의 복락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없이 자기중심으로 당연지사로 사는 사람에게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애를 쓰고 힘을 쓰고 땀을 흘립니다. 그래도 그 속에 행복이 있나요? 여러분 이 세상에서 잘사는 사람 만나서 행복이 있냐고 물어 보십시오. 미국의 가장 큰 석유 재벌이었던 폴 게티는 억만장자였습니다만 그가 만연에 런던에 있을 때 기자들이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폴 케티 선생님 일생을 살면서 행복한 적이 있었습니까?" 성을 버럭 냈습니다. "행복이 어디 있어? 어디 인간이 행복이 있어?" 왜 마릴린 먼로가 온 세계 남성들의 박수갈채를 받는데 자살했습니까? 그는 한없는 사랑을 원했으나 한없는 사랑을 얻지 못해서 죽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중심으로 살고 모든 것을 당연지사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은혜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불행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배고픈 것을 아는 사람은 밥 한 숟가락도 벌벌 떨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6.25 사변 때 피난살이 하면서 얼마나 고생합니까? 나는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제가 우리 고모님 댁에 갔는데 우리 고모님 댁에 피난 온 아주머니 한분이 보퉁이를 메고서 와서 우리가 점심을 먹는데 밖에서 우두커니 보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 고모님이 이리 와서 같이 밥 좀 먹자고.. 그 자리에 앉아서 우리 고모님이 먹던 것 밥풀이 붙은 그 숟가락을 주더라구요. 내가 보니 "왜 저런 숟가락을 주느냐?" 그 숟가락을 받더니 얼마나 밥을 맛있게 떠 넣으면서 눈물을 줄줄줄 흘립니다. 나는 어릴 때니까 "왜 밥을 먹으면서 저렇게 우느냐?" 피난살이 괴로워서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먹던 숟가락 가지고서 밥 한술 뜨면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더라구요. 그가 피난오지 않고 집에 있을 때 밥 한 숟가락 먹으면서 그렇게 울 턱이 있겠습니까? 비로소 배가 고프고 외로워 보니 밥 한 숟가락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밥 한 숟가락이 그에게 행복을 갖다 준 것입니다. 전에는 밥은 당연지사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내 아내가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얼마나 감사하며 내 남편은 나에게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다. 얼마나 고마워요. 우리 자식은 잘났던 못났던 은혜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귀하잖아요. 내가 사는 초가삼간이라도 은혜로써 하늘을 가리고 비를 가리고 살 수 있다고 감사하면 얼마나 아름다워요. 은혜를 알고 감사하면 나도 행복해지거니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은혜를 아는 자에게는 주님이 더 은혜를 주시고 은혜를 모르고 감사하지 않는 자에게는 은혜를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옷을 주시고 가락지를 끼워 주시고 신발을 신기시고 살찐 송아지를 잡는 것은 은혜를 깨달아 알고 왔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 감사할지 모르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빈손 들고 벌거벗었을 때 돌봐주시고 입혀주시는 은혜가 감격적이고 고마운 것입니다. 내가 깨어지고 버림받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구원해 주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고 그 은혜가 행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는 것은 은혜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 못한 것입니다. 환경 때문에 그런 것 아닙니다. 좀 더 좋은 집이 있으면 좀 더 돈이 많으면 좀 더 좋은 차를 타면 좀 더 좋은 옷을 입으면 좀 더 좋은 남편이 있으면 좀 더 좋은 아내가 있으면 행복하겠다. 그것은 인생을 당연지사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고해벽촌에 혼자 던져서 말할 사람도 없고 돌볼 사람도 없는 고독한 곳에 혼자 맨발 벗고 살아 보십시오. 사람이 얼마나 그리운지.. 그렇게 되면 사납던 남편도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고 바가지 긁던 아내도 여기 있었으면 좋겠다. 자식이라도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고 다 떨어진 짚신 한짝이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다. 은혜를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자기의 환경에 감사할 줄 아는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지사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것 당연지사가 아닙니다. 왜, 북한에 가보니까 교회에서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교회에서 예배드릴 자유도 없습니다. 정부가 시키는 대로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의 하늘나라에 자유의 땅 위에 예배 드릴 수 있다는 것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많은 사람이 선거에 동참 안했지만은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 것입니까? 우리가 지도자를 뽑을 수 있다는 것 얼마나 우리에게 큰 은혜요 특권인 것입니까? 독재국가에 가면 지도자를 뽑을 권한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지도자가 일어나면 순종하고 따라갈 따름이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 잡수시고 차타고 건강하게 교회 참석한 것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 것입니까? 오늘도 병들어서 병상에 누워 있으며 심한 병에 걸려서 위독한 사람이 얼마나 많고 휠체어에 앉아서 스스로 차를 타고 올 수 없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얼마나 여러분은 자유롭게 걸을 수 있으니 감사합니까? 사지가 멀쩡하고 백체가 건강한 여러분 자신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저 앉아도 감사요 서도 감사요 앉아도 감사의 눈물이요 서도 감사의 눈물밖에 없는 것입니다. 감사해야 돼요.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 감사하고 입술에 불평이 없어야 돼요. 불평은 마귀의 역사인 것입니다. 불평이란 예수님 이름으로 내어 쫓아 버리고 은혜로써 구원을 주신 우리 하나님께 끝없는 감사를 하기 바랍니다. 오늘 집에 돌아가서 남편보고 "여보 당신 내 곁에 있어서 감사해요." 부인은 "당신 살아 있어서 감사해요. 건강해서 감사해요. 우리 조그마한 전셋집이라도 월세집이라도 들어가서 살 수 있으니 감사해요." 감사를 찾아 말씀하시고 감사하게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이 탕자처럼 아버지 집에 살 때 모든 삶이 당연지사로 알았습니다만 당연지사가 다 나를 떠나고 내가 빈손 들게 되고 헐벗고 고통스럽고 굶주리면 그것이 당연지사가 아니고 아버지가 돌보아 주신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되옵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너무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당연지사로 생각하고 원망 불평이 감사보다 앞섰습니다. 항상 비교인생을 살아서 남과 나를 비교하고 환경과 비교하며 자기 없는 것을 불평했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에게 주신 많은 것을 헤아려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생각하고 헤아려서 감사하고 감격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은혜를 주신 우리 아버지께 감사드리옵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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