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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귀한 세가지 금은 황금, 소금, 지금 이라고 한다. 나도 좋아하는 세가지 금이 있다. 현금, 지금, 입금 이다 ㅋㅋㅋ(햇볕같은이야기 사역 후원 클릭!) |
이동원목회컬럼 - 새로움의 영성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낡아짐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
낡아지기에 낡아가는 모든 것들은 운명적으로 새로움을 갈구한다.
그러나 존재하는 모든것들은 낡아짐을 새롭게 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것이 존재의 한계인 것이다.
그래서 새로움을 갈망하고 새로움을 추구하지만
결국 낡은 것의 궤적을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을 살아간다.
그것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새해를 맞이하지만 달라짐의 희망이 없이 새해를 맞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일하게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말씀하신 분이 계신다.
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역사 속에 지금까지 그렇게 말씀하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이 있다.
그가 그렇게 선언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곧 창조자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만드신 이가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 분의 새롭게 함은 낡은 것의 개혁 이상의 ‘창조적인 새롭게 함’이시다.
그래서 그는 또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선언하신다.
이것이 바로 새해의 복음이요, 새로움의 영성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참으로 만나는 모든 이들을 만남의 순간에 본질적으로 새롭게 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계속해서 새롭게 하신다.
이 새로움은 겉 사람의 새로움이 아닌 질적인 속 사람의 ‘새로움’(kaine) 곧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다.
만약 어떤 이들이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고도
새로움을 경험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 유일한 원인은
그분과의 지속적인 만남(encounter)을 거부하기 때문일 것이다.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라는 말씀은
본래 불신자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주어진 말씀이 아닌,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었다.
우리는 성도이면서도 주님을 우리 마음 문 밖에 세워 둘 가능성이 상존한다.
그 분은 오늘도 자신의 친 백성이 된 자들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그들을 만나고 싶어 하신다.
아니 날마다 만나고 싶어 하신다.
날마다 그 분의 얼굴을 뵈옵는 일이 없이 그 분을 닮아간 성자(saint)는 아무도 없다.
역사 속에 성자로 불리운 모든 성도들의 최우선 순위는 그분과의 만남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그 분을 만나는 조용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새로움의 영성으로 새 날을 맞기 위해서이다.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2009.1.1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낡아짐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
낡아지기에 낡아가는 모든 것들은 운명적으로 새로움을 갈구한다.
그러나 존재하는 모든것들은 낡아짐을 새롭게 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것이 존재의 한계인 것이다.
그래서 새로움을 갈망하고 새로움을 추구하지만
결국 낡은 것의 궤적을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을 살아간다.
그것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새해를 맞이하지만 달라짐의 희망이 없이 새해를 맞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일하게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말씀하신 분이 계신다.
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역사 속에 지금까지 그렇게 말씀하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이 있다.
그가 그렇게 선언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곧 창조자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만드신 이가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 분의 새롭게 함은 낡은 것의 개혁 이상의 ‘창조적인 새롭게 함’이시다.
그래서 그는 또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선언하신다.
이것이 바로 새해의 복음이요, 새로움의 영성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참으로 만나는 모든 이들을 만남의 순간에 본질적으로 새롭게 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계속해서 새롭게 하신다.
이 새로움은 겉 사람의 새로움이 아닌 질적인 속 사람의 ‘새로움’(kaine) 곧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다.
만약 어떤 이들이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고도
새로움을 경험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 유일한 원인은
그분과의 지속적인 만남(encounter)을 거부하기 때문일 것이다.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라는 말씀은
본래 불신자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주어진 말씀이 아닌,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었다.
우리는 성도이면서도 주님을 우리 마음 문 밖에 세워 둘 가능성이 상존한다.
그 분은 오늘도 자신의 친 백성이 된 자들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그들을 만나고 싶어 하신다.
아니 날마다 만나고 싶어 하신다.
날마다 그 분의 얼굴을 뵈옵는 일이 없이 그 분을 닮아간 성자(saint)는 아무도 없다.
역사 속에 성자로 불리운 모든 성도들의 최우선 순위는 그분과의 만남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그 분을 만나는 조용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새로움의 영성으로 새 날을 맞기 위해서이다.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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