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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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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ening To God, Joyce Huggett, 김광석 역, "하나님의 음성듣기" (서울 서로사랑, 2008) pp. 285-300
기도 생활을 추구하던 초창기에 나는 '당신이 할 수 없는 방식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대로 기도하라' 는 금언을 들은 적이 있다. 환언하면 개인적으로 당신에게 와닿는 방식을 따라 기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기도 스타일을 모방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이와 같은 충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는 자에게 너무나 소중하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듣는 기도의 종류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들어 있다. 모든 요소가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이들에게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그분의 목적을 전하실 것이며, 다른 이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도 그분의 계획을 계시하실 것이다.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에서 그분은 동일한 사람에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시도록 해야만 하며,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주도권을 내어 드려야만 한다.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이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실 때에 그 신호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만 하면 된다.
이 책을 통해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이해하고 경험하는데 있어서 내가 성장한 방식들을 상세히 소개하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다 '이루지' 못했고 배워야할 것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비록 듣는 기도에 있어서 아직 배우는 학생에 불과하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듣는 기도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질문, '어떻게 하면 보다 더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에 답을 해보고자 한다.
당신의 배경을 알라
이 질문에 대해 내가 먼저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의 영적 배경을 평가하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말해, 나는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을 분리하는 데,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복음주의' (evangencal), '관상주의' (,ont,mphuve), '은사주의' (charsmauc)같은 인간이 만든 꼬리표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가능하면 이런 구분을 거부하려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 편리할 때도 있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이와 같은 단어를 사용코자 한다.
복음주의
지금, 당신이 복음주의자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길 더 갈망한다면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신의 배경으로 인해 당신이 이미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도구들이 있음에 감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대한 확실한 지식과 성경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이 책의 다른 곳에서 성경을 잘 알고 적용하는 사고가 듣는 기도에 있어서 절대적인 요소라는 것을 이미 입증한 바 있다. 참으로 성경은 모든 듣는 기도의 시금석이다.
복음주의 배경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그렇다 할지라도 능숙한 듣는 기도자들에게 필요한 모든 도구들에 정통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많은 경우에 그들은 모든 도구를 다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떤 복음주의자들은 오히려 언젠가 봤던 꿀벌과도 같다. 그 꿀벌은 연분홍 장미의 바깥 꽃잎에 앉아서는 중심부 주변을 맴돌았다. 그 녀석은 아마도 향기를 즐기기는 했겠지만 꽃가루가 몰려 있는 장미의 심장부는 관통하려 하지 않고 그냥 날아가 버렸다.
몇 시간 전에 담소를 나눈 복음주의자는 이 꿀벌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와 나는 같은 기독교 컨퍼런스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는 성경에 대해 더 많은 가르침을 요구했으며, 자신의 지성이 채워져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후에 그는 자신의 생활이 성적으로 문란하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음성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듣고자 한다면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두뇌 활동 이상의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만 한다. 그것은 살아 있는 반응, 즉 순종을 요구한다. 또한 그것은 지적, 감정적, 영적, 의지적 수준에서 하나님을 경청해야만 한다. 환언하면, 복음주의자들에게 주어진 도전은 자신의 지성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의지와 영으로 하나님께 주파수를 맞춰야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마음과 뜻과 생명을 다해 온전히 헌신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기 전에는 복음의 핵심을 놓치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의 많은 부분을 듣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보다 더 집중해서 듣기를 갈망하는 복음주의자에게는 마스터해야 할 다른 훈련들이 있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잠잠히 하는 경험이 별로 없다. 우리는 '잠잠하는' 법을 배워야만하며,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무언가를 성취하기 보다는 '존재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심지어는 우리가 기대하지 못한 방식으로, 즉 그분의 계시된 말씀인 성경뿐만 아니라 자연과 사람과 상상력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는 사실에 우리는 설득당할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연분홍빛 장미에 두 번째 꿀벌이 있었다. 이 녀석도 꽃의 중심부 주변을 맴돌다가 꽃잎 사이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자기주머니에 꽃가루를 한 움큼 집어넣고는 날아갔다. 복음주의자의 경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이처럼 생산적일 수 있다. 그는 이미 꽃에 제대로 착륙했다. 만일 그가 다른 이들의 통찰력을 소중히 여기고 이를 받아들이고, 연구할 뿐만 아니라 묵상하는 법을 배우고, 생각하는 것만큼 느낀다면 그는 듣는 기도에 관해 이전에 가능하다고 믿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관상주의
'어떻게 하면 보다 더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라는 동일한 질문을 하는 관상주의자도 자신이 영적으로 물려받은 유산의 부요함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는 고요함의 기술에 대한 교육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고요함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데 필수조건이다. 이에 대해 라디스라스올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간파하는 데 정통한 관상기도자는 분별력이 있어야만 한다. 부드러운 은혜의 움직임을 부드럽게 느끼는 능력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요소이다. 그것이 없다면 분별력에 온전함은 없다.' 관상기도자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강하게 느끼며 특히 성찬식과 공동체 안에서 더욱 그렇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표식(sisns)을 읽는 데 능숙하며, 자연과 어린아이의 얼굴에서 그분을 뵙고, 바람결에서 그분을 느낄 수 있다.
복음주의자가 하나님의 음성 들으려면 단순히 성경 읽기라는 편협함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처럼 관상주의자가 하나님의 음성 듣기 기술을 더 정교하게 만들려면 단순한 표식과 교회의 가르침에서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과 대화해야만 한다. 사막의 교부들과 기도의 교사들이 많은 지혜를 전수해 준 것이 사실이고, 오랜 세월에 걸쳐 그들이 전해 준 지혜를 무시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성경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기쁨이 되어야만 한다. 성경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자리 잡아야만 한다. 성경이 우리의 사고방식을 주장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모른다면 우리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죄를 범할 수 있다.
우리 관상주의자들에게는 또 다른 도전이 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전진하신다. 우리가 화석화된 예배에 집착하고, 전례 법규에서 떠나길 두려워하며, 설명할 수 없는 성령의 모든 감동을 의심한다면 하나님을 향한 문은 잠길 것이고 그분의 음성은 들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 관상주의자들은 예수님께서 '나는 존재했다' (I WAS)가 아니라 나는 지금 존재한다' (I AM)(요 28:5을 참고하라.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이 스스로 있는 자, 여호와'(I AM)임을 암시하고 계시다-역자주)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믿을 필요가 있다. 주님은 오늘날도 살아 계시고 활동하시며 초자연적으로 말씀하신다. 만일 우리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분의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은 마음과 생각의 귀가 먹은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항상 창조하시는 '새로운 것 을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복음주의 자가 예기치 않은 길을 탐험해야 하는 것처럼 관상주의자도 듣는 기도에 있어서 도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젠 열매 가득한 탐험의 삶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 도전은 말씀을 통해 성령의 바람의 모든 움직임을 연구하고, 재평가하고 분별하는 것이다.
은사주의
'어떻게 하면 보다 더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을 하는 은사주의자의 출발은 분명 유리하지만 약점도 심각하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며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신다는 사실을 우리 은사주의자들에게 설득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스스로 이런 사실을 보아왔으며 기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어 하며 말씀하시고 싶어 하는 모든 것에 열려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바로 이 열정이 우리에게 가장 큰 장애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자발성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역에 가장 큰 장애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실제로 하나님은 '입을 다물라!,' '들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입을 다무는 부분에서 탁월하지 못하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길 정말로 갈망하는 은사주의자는 관상주의자에게서 말을 하지 않고 박수를 치지 않고 잠시 찬양을 멈추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그리고 들으라. 고요함 속에서 모든 허식은 벗겨진다. 이런 고요함 속에서 진정한 사모함이 탄생하고, 필요하다면 그것은 열장적인 찬양으로 나중에 표현할 수 있다. 이런 고요함 속에서 호화로움을 사모하는 마음은 홀로 하나님을 알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버리길 갈망하는 깊은 마음으로 바뀐다.
관상주의자처럼 우리 은사주의자들은 예수님의 본을 받아 성경에 우리 자신을 적셔야만 한다. 우리는 사고력을 날카롭게 하여 이를 사용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하는 것은 우리 은사주의자의 책무이다.
복음주의나 관상주의와 마찬가지로 은사주의도 듣는 기도에 어떤 강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 은사가 온전해지려면 우리 대부분의 경우에 많은 노력을 경주해야만 한다.
순전한 마음으로 '어떻게 하면 보다 더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을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가 보기에 갈 길은 분명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기술들을 인정하고 이에 대해 감사해야만 하며,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해야만 한다. 그런 뒤에 다른 전통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는 함정에 빠져 '저들이 잘못된 것을 어떻게 하면 입증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서 내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해야만 한다. 우리는 다른 전통에 속한 사람이 믿거나 지지하는 것에 모두 동의하길 기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주님이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그들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서 행하시는 모든 것을 수용하고 이를 소중하게 여기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 듣기 분야에 있어서 그들의 훈련법을 채택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는다는 당면 과제에 분명히 도움을 얻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지평에 다가오는 하나님에 관한 비전을 계속해서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J.B. 필립스의 말대로 그 때에 우리는 지금까지 살면서 알던 하나님이 너무나 작은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
듣는 기도를 하려는 사람이 자신의 배경을 통해 얻게 된 통찰력을 인정하고 또한 자신이 속한 교회가 부족한 부분을 인식할 때에 자기의 강점과 약점을 분별할 수 있는 것처럼 또한 자신의 성품을 인식함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능력을 증가시킬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 칼 융은 사람을 인성의 종류에 따라 외향적인 사람(Extrovert)과 내향적인 사람(Introvert)으로 분류했다. 어느 한 쪽이 다른 쪽보다 더 낫다거나 더 성숙하다는 것이 아니다. 융은 이 인성의 종류를 삶을 접근하는 방식에 따라 다시 4가지로 나누었다. 감각형(Sensation), 직관형(iNtuiOon), 사고형(Thinking), 감정형(Feeling)이 그것이다.
당신이 어느 그룹에 속하는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당신의 인성과 어울리는 방식으로 듣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외향적 사고형은 자연이나 상상력을 통해서보다는 성경을 공부하거나 주석을 읽거나 교리를 평가하고 신학적 입장들을 규명함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더 잘 들을 것 같다. 반대로 내향적 사고형은 성경을 묵상하거나 성경을 천천히 읽거나 경건한 독서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할 것이다. 어느 한 쪽이 다른 쪽보다 더 낫지 않다. 단지 서로가 다를 뿐이다.
마찬가지로 외향적이면서 매우 감각형인 사람은 축제 예배에 참석함으로써 하나님의 신선한 만지심을 구할지 모른다. 영적 춤이나 드라마 혹은 성경 찬양단에 참여하거나 이를 관람할 때에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 내향적이면서 감각형인 사람은 반대로 조용한 수녀원이나 고요한 관상 혹은 시골길 산책이나 기도를 위해 준비된 평화로운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찾을 것이다. 한 쪽이 다른 쪽보다 더 낫지 않다. 서로 다를 뿐이다. 외향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 밖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외향적인 사람은 관심을 바깥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향적인 사람은 자기 안의 세계에 관심을 돌림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의상 내향적인 사람은 내면세계에 보다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한 쪽이 다른 쪽보다 더 낫지 않다. 단지 서로 다를 뿐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도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대로 기도하고,' 듣는 훈련을 할 때에 우리 성품으로 인해 특별히 선호하는 방법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시작해서 이처럼 자기를 제한하는 한계를 넘어서 우리와 다른 인성 유형을 가진 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듣는 기도법을 탐구하는 것이다.
자, 이제 내가 의도하는 바를 설명하겠다.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다. 내가 나의 제한된 인성 타입을 따라 움직인다면 나는 침묵과 성경 묵상, 성경 완독법과 자연을 통해 하나님 묵상, 생생한 상상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나 자신을 제한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외향적인 사람과 결혼했고 결혼 초기에 우리는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의 가치를 배워야만 했다. 남편은 축제 형태의 예배와 지적인 토론과 드라마를 무척 좋아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왜 남편이 이런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지 그 이유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면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즉 하나님은 나에게 말씀하시되 내향적인 내가 기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외향적인 남편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나의 듣는 능력이 향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온전함을 느끼게 되었다. 동일한 예배에서 이제 나는 하나님의 임재의 고요함 가운데로 들어갈 수도 있고 탬버린을 가지고 그분을 찬양할 수도 있다.
당신의 주를 알라
우리의 배경과 우리 자신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우리 주님도 알아야만 한다. 예수님은 모든 종류의 인성 타입과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임재를 알리는 놀라운 방법을 가지고 계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나타나신 것을 생각해 보라. 첫 부활절 이른 아침에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 우리는 그녀의 목에 '관상주의자' 혹은 '내향적인 사람'이란 이름표를 걸어줄지 모른다. 마리아가 빈 무덤 입구에서 슬픔 가운데 울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나타나셨다. 주님은 그녀의 마음에 사모하던 귀한 선물을 그녀에게 주셨다. 그것은 그가 사모했던 주님을 오래 천천히 바라보고, 또한 주님이 부르신 사랑의 한 마디, 즉 그녀의 이름 '마리아'를 들어 들이킬 수 있는 기회였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을 생각해 보라. 아마 이 두 사람은 외향적인 사고형의 사람인 것 같다. 예수님이 슬픔에 빠진 두 사람에게 다가가시는 방법은 마리아를 만나실 때와 사뭇 달랐다. 주님은 그들의 감성이 아니라 지성에 호소하셨다. 주님은 성경을 강해하시고 그들의 이해의 눈을 여셨으며, 그들이 사고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책망하셨다. 여정이 끝나갈 무렵에 마침내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이해했다. 주님은 저들의 필요를 채우시기 위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셨다.
신중하게 생각한 후에 반응하기 보다는 상황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외향적인 사람 베드로를 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위해 기적을 베푸셨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한 후에 예수님은 엄청난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곳을 가리키셨다. 그것으로도 충분치 않아서 예수님은 침울한 베드로를 한 곳으로 데려가 그를 다시 세우시고 베드로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그의 주님을 부인한 행동이 용서되었음을 확신시키셨다.
서로 다른 인성 타입과 다른 필요를 지닌 서로 다른 사람들일지라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이는 그들이 그들에게 합당한 방식으로 살아 계신 주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살아 계신 주 예수님이 아직도 기록된 말씀을 통해, 사람들과 상황, 자연을 통해 그리고 오직 창조적인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다양한 방식으로 대화하길 갈망하신다는 확신이 더 깊이 든다. 나는 또한 오늘날 세상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창조주 하나님과 더 깊은 만남을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더 알게 되었다. 내 기도는 이렇다. 나는 내가 쓴 책의 내용이 다소나마 둘이 하나가 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즉 이 책을 통해 대화하시는 하나님과 듣는 기도를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랑 안에서 서로 만날 수 있는 가교가 되길 기도한다.
앞서 말한 대로 나의 경우에 금식, 기도 일기, 고요의 날과 피정, 성경 연구, 성경 묵상, 완독법과 자연 묵상 등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나의 능력이 자라가도록 공헌을 했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삶에서도 상당히 중요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도하고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기도하지 말라.'
젊은 엄마는 고요의 날을 사모하지만 그런 사치를 위해 자기의 책임을 저버릴 수는 없다. 5분간만이라도 침묵할 수 있다면 정말 축복이다. 비좁은 집에 사는 가족은 기도실을 바랄 수 없을 것이다. 도심 한 복판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작은 표식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언급한 듣는 기도 방법 모두를 수용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생의 서로 다른 단계에서 서로 다른 방법들이 도움이 되고 다른 방법들을 추구하도록 만들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충고는 '시도해 보라' 는 것이다. 어떤 것이 당신에게 잘 맞는지 알아보라. 어떤 특정한 방법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능력을 정교하게 해준다면 그것을 사용하라. 만일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죄책감이나 수치감을 느끼지 말고 그것을 한 곳에 치워 놓으라.
하나님을 위한 5분
그러나 훈련을 하라. 하나님의 음성을 진지하게 갈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여정을 떠난다. 그 여정은 놀라움으로 가득하며 일종의 모험이다. 이미 암시한 대로 그것은 또한 오르막이며 어려운 일이다. 훈련을 받으려면 한구석에 기도처로서 의자 하나라도 마련해야만 한다. 훈련을 받으면 우리는 기도와 삶의 허드렛일을 함께 직조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훈련을 받으면 금식하면서 고요의 날을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훈련을 받지 않으면 듣는 법을 배울 수 없다. 훈련과 듣는 법을 배우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듣길 갈망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말씀하시길 원하신다. 개인적으로 나의 경우에 이런 사실을 인식함으로 나는 자극을 받았다. 이 책을 쓰고 있는데 울리치 쉐이퍼의 저서 「into Your Light(주님의 빛으로)가 내 기도실에 꽃혀 있다. 이 책에는 잎사귀 뒷면을 찍은 사진이 실려 있는데 잎사귀에 생명을 전달해 주는 잎맥들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것이 보인다. 옆 쪽에는 한 시인이 같은 방식으로 자기의 인생을 살라는 하나님의 초청에 대한 반응을 기록했다.
저는 주님이 저의 가장 가느다란 혈관까지
흘러가시는 것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저의 심장의 피가 되어
제 인생의 모든 길을 따라 가길 원하시며
잎사귀와 제가 맺는 열매를 통해 보이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제 안에서 움직이시는 것을 두려워하여
간혹 이런 초대를 제가 철회코자 한다 할지라도
제 안에 퍼져 가시고
전진하시며, 관통하시고 흐르소서.
제 안에서 순환하셔서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소서.
왜나면 저는 압니다.
오직 주님의 성령만이 진짜 생명과
열매를 가져다주실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영적으로 충만하지만 결코 만족할 수 없고, 주님이 찾으신 바 되었지만 아직도 찾고 있고, 사랑이신 주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자로서 나도 이 기도를 읊조린다. 주 예수시여,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때까지 제 안에서 순환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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