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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고전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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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657 |
2006. 1.15.
고린토 교회
바울의 제2차 선교 여행은 주로 그리스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2천 년 전이라는 그 시대적 상황을 전제한다면 지중해 동북쪽에 위치한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그리스까지 여행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가 당한 고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문제만이 아니라 그리스의 문화적 특색으로 인한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탈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제논의 철학적 전통이 그대로 살아있는 곳에서 갈릴리 예수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들은 사상적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모든 종교나 철학이라도 일단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특성은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을 일단 듣기는 듣는다는 점에서 유대인들보다는 그리스인들이 훨씬 유연하기는 하지만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결국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 중에서 고린토는 약간 색깔이 달랐습니다. 고린토는 그리스가 로마의 침략과 맞서 싸운 마지막 보루였다고 합니다. 기원전 194년에 고린토가 주도적으로 아카야 동맹을 조직하고 로마에 대항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기원전 146년에 고린토는 로마에 의해서 파괴되었고, 100년 간 폐허로 남아 있다가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시이저에 의해서 재건되었습니다. 로마는 주로 노예 계층에서 새로 해방된 사람들을 이곳 고린토에 이주시켰고, 기원전 27년부터 이카야 지방의 수도로서 로마 총독의 거주지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고린토에 복음을 들고 들어간 때는 대략 기원후 50년경입니다. 이 당시에 고린토는 이미 옛날의 번영을 상당히 회복했습니다. 고린토가 번성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정학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는 호리병처럼 생겼습니다. 그 가운데 잘록한 곳에 고린토가 자리했습니다. 에게해와 지중해를 연결시킬 뿐만 아니라 남과 북을 이어주는 요충지였습니다. 이곳에 옛날 그리스 철학과 로마의 향략 문명이 함께 어우러져 꽃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도시에 바울은 일 년 반이나 머물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난 몇 년 후에 다시 고린토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지혜에 관한 질문
바울은 이 편지 앞부분에서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교회 분열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으로 글쓰기를 시작합니다. 고린토 교회는 여러 파로 분열되고 있었습니다. 바울파, 아폴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가 그것입니다.(1:12). 바울과 아폴로와 베드로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각각 특징이 있는 인물들입니다. 바울은 명실 공히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였으며, 따라서 유대인들의 율법을 멀리하는 입장에 섰습니다. 이에 반해서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로서 비교적 예루살렘 원시 공동체의 특징인 친율법적 특징을 보였습니다. 아폴로는 그 중간쯤 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특히 가르치는 일에 모범을 보였습니다. 고린토 교인들은 서로의 입장에서 따라서 이 세 지도자들을 추종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파까지 생겼을까요? 이들은 바울, 아폴로, 베드로파와 다르다는 뜻으로 자신들을 그렇게 불렀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파벌투쟁을 경고합니다. 이렇게 고린토 교회가 분열하게 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재주’로 전하는 데 있었다고 합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17b)
바울에 의하면 이런 말재주는 곧 인간의 지혜입니다. 1:18-31절에서 바울은 인간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사실을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볼까요? 20,2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니 이제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고 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또 이 세상의 이론가가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까?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절에서도 비슷한 의미로 이렇게 진술합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을 찾아 갔을 때 나는 유식한 말이나 지혜를 가지고 하느님의 그 심오한 진리를 전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왜 이 장면에서 그렇게 인간의 지혜를 어리석다고 말하고, 자신은 그것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고 말할까요? 더 근본적으로 바울이 말하는 지혜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1장 22절에서 유대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는다고 설명했습니다. 아주 정확한 묘사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인 기적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온 세상의 지혜를 찾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찾는 지혜는 헬라어 ‘소피아’입니다. 유럽인들이 철학을 philosophy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철학은 곧 지혜 사랑(philos)입니다. 철학자들은 인간의 궁극적인 지혜가 무엇인가를 찾는 사람들인데, 이런 전통은 단지 철학자들만이 아니라 생각할 줄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본질적으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아무도 지혜를 부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신구약성서도 이 지혜를 신앙의 중요한 요소로 간주합니다. 잠언과 전도서와 시편은 모두 지혜로운 삶에 대한 언급들입니다.
바울도 ‘지혜’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신약성서로 채택된 바울의 편지는 지혜로운 가르침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이어서 바울은 새로운 차원에서의 지혜를 말합니다. 6,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신앙생활이 성숙한 사람들에게는 지혜를 말합니다. 다만 그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나 이 세상에서 곧 멸망해 버릴 통치자들의 지혜와는 다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는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천지창조 이전부터 미리 마련하여 감추어 두셨던 지혜입니다.” 결국 바울은 지혜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지혜의 원천이 다르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말재주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심오한 지혜입니다.
말재주에 속한 지혜는 그리스 사람들의 전매특권입니다. 그들의 웅변술, 그들의 수사학은 사람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재주 앞에서 바울은 무기력합니다. 그럴 수밖에 더 있습니까? 웅변가들, 변호사들은 평생 그런 말재주 기술을 쌓은 사람이지만 바울은 그런 것들을 모두 포기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고린토에서 그런 경험이 분명했던 것 같습니다.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실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 약하였고 두려워서 몹시 떨었습니다.” 과연 그가 고린토 사람들의 언변에 기가 죽었는지, 아니면 공연한 말싸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고린토 사람들이 즐겨하던 그런 말재주로 예수의 복음을 전한 게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지금 바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이 지혜의 한계는 무엇일까요? 바울이 말하는 지혜는 인간 인식의 출처를 인간 자신에게서 찾는 삶의 태도입니다. 가장 근원적인 앎이라 할 하나님에 대해서도 역시 인간학적 요청에 근거해서 찾으려는 태도입니다. 그런 태도가 곧 그리스 사람들의 ‘지혜 사랑’, 곧 철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만물의 보편적 근원을 물, 공기, 불, 원소 등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지혜는 매우 놀랍습니다. 상당한 부분에서 나름으로의 논리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도 이것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니까 말입니다. 이런 지혜가 우리게 부분적으로 필요하기는 하지만 바울에 의하면 인간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설교가 상당한 부분에서 이런 인간의 지혜에 치우쳐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많은 설교자들이 성서 텍스트를 해명하지 않고 청중들의 요구에 기독교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포퓰리즘’ 설교가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복 받는 비결이라든지, 성공의 지름길 같은 설교제목들이 유행입니다. 설교 내용도 거의 사회심리학이나 사회과학에 기울어져 있습니다. 조울증, 감성지수, 인간관계 개발에 관한 일반 도서들이 설교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습니다. 인간 심리를 치료하거나 대인관계 및 인생관을 교정하는 프로그램처럼 설교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설교자들은 이런 프로그램을 성서와 기독교 신학의 정보로 포장할 뿐입니다. 이런 설교는 곧 인간의 지혜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바울은 이런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말을 하거나 설교를 할 때에도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성령과 그의 능력만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만한 것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성령과 능력만을 나타내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령과 능력은 같은 의미입니다. 생명의 영인 성령은 곧 생명을 생명 되게 하는 능력입니다. 성령은 그런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대목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혜와 설득력을 거부하는 바울의 주장을 “무조건 믿으라.”는 말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언변도 필요합니다. 바울이 언변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과 능력만 나타내려고 했다는 말은 사람의 요청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집중했다는 의미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바꾼다면 인간의 인식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론에 중심을 두었다는 뜻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 초등학교 여자 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가 아버지의 뜻을 아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자기가 배고플 때 밥을 주던 분이 바로 아버지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천둥치는 날 밤 무서워 깼을 때 자기를 따뜻하게 안아주던 분이 바로 아버지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이런 방식으로 자기가 필요할 때 무언가 채워주는 분이 곧 아버지의 정체라고 생각하는 게 곧 인간의 지혜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아버지를 모두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뜻대로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한 달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의사인 아버지는 한 달 동안 아프가니스탄의 무의촌에 가서 의료 활동을 한 것입니다. 이 아이의 요구와 아버지의 의료 활동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실제로는 관계가 있지만 이 아이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 세계입니다. 그래도 아버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길은 자기의 요구가 아니라 아버지의 행위 자체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닐까요?
바울은 고린토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성령과 능력만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곧 예수 사건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지내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 특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곧 하나님의 성령이며 능력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알리는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그 십자가 사건이 곧 하나님의 성령이며 능력이라고 말입니다.
믿음의 토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는 바울의 말을 잘 새겨서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십자가만 생각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십자가가 만능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왜 하나님의 성령과 능력이 드러난 것인지에 대해서는 늘 새롭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십자가의 새로운 지평이 늘 해석되어야 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의 굳어진 체게, 도그마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열려야 합니다. 거기에 몰두하는 게 곧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게 정확하게 정리되었나요? 바울은 사람들의 요청에 부응하는 설교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무시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지혜는 핵기술과 배아줄기복제로, 복지사회와 민주사회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그런 것에 토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인간의 지혜는 절대적인 생명을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둡니다.(5절). 왜냐하면 이 세상은 곧 그 능력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며, 따라서 그 하나님에 의하지 않으면 결코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사람의 지혜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세워지기도 하고 허물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세상 학문은 그것에 충실해서 살아가겠지만,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이 곧 그 토대입니다.
고린토 교회
바울의 제2차 선교 여행은 주로 그리스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2천 년 전이라는 그 시대적 상황을 전제한다면 지중해 동북쪽에 위치한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그리스까지 여행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가 당한 고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문제만이 아니라 그리스의 문화적 특색으로 인한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탈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제논의 철학적 전통이 그대로 살아있는 곳에서 갈릴리 예수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들은 사상적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모든 종교나 철학이라도 일단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특성은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을 일단 듣기는 듣는다는 점에서 유대인들보다는 그리스인들이 훨씬 유연하기는 하지만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결국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 중에서 고린토는 약간 색깔이 달랐습니다. 고린토는 그리스가 로마의 침략과 맞서 싸운 마지막 보루였다고 합니다. 기원전 194년에 고린토가 주도적으로 아카야 동맹을 조직하고 로마에 대항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기원전 146년에 고린토는 로마에 의해서 파괴되었고, 100년 간 폐허로 남아 있다가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시이저에 의해서 재건되었습니다. 로마는 주로 노예 계층에서 새로 해방된 사람들을 이곳 고린토에 이주시켰고, 기원전 27년부터 이카야 지방의 수도로서 로마 총독의 거주지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고린토에 복음을 들고 들어간 때는 대략 기원후 50년경입니다. 이 당시에 고린토는 이미 옛날의 번영을 상당히 회복했습니다. 고린토가 번성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정학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는 호리병처럼 생겼습니다. 그 가운데 잘록한 곳에 고린토가 자리했습니다. 에게해와 지중해를 연결시킬 뿐만 아니라 남과 북을 이어주는 요충지였습니다. 이곳에 옛날 그리스 철학과 로마의 향략 문명이 함께 어우러져 꽃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도시에 바울은 일 년 반이나 머물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난 몇 년 후에 다시 고린토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지혜에 관한 질문
바울은 이 편지 앞부분에서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교회 분열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으로 글쓰기를 시작합니다. 고린토 교회는 여러 파로 분열되고 있었습니다. 바울파, 아폴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가 그것입니다.(1:12). 바울과 아폴로와 베드로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각각 특징이 있는 인물들입니다. 바울은 명실 공히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였으며, 따라서 유대인들의 율법을 멀리하는 입장에 섰습니다. 이에 반해서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로서 비교적 예루살렘 원시 공동체의 특징인 친율법적 특징을 보였습니다. 아폴로는 그 중간쯤 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특히 가르치는 일에 모범을 보였습니다. 고린토 교인들은 서로의 입장에서 따라서 이 세 지도자들을 추종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파까지 생겼을까요? 이들은 바울, 아폴로, 베드로파와 다르다는 뜻으로 자신들을 그렇게 불렀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파벌투쟁을 경고합니다. 이렇게 고린토 교회가 분열하게 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재주’로 전하는 데 있었다고 합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17b)
바울에 의하면 이런 말재주는 곧 인간의 지혜입니다. 1:18-31절에서 바울은 인간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사실을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볼까요? 20,2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니 이제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고 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또 이 세상의 이론가가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까?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절에서도 비슷한 의미로 이렇게 진술합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을 찾아 갔을 때 나는 유식한 말이나 지혜를 가지고 하느님의 그 심오한 진리를 전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왜 이 장면에서 그렇게 인간의 지혜를 어리석다고 말하고, 자신은 그것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고 말할까요? 더 근본적으로 바울이 말하는 지혜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1장 22절에서 유대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는다고 설명했습니다. 아주 정확한 묘사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인 기적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온 세상의 지혜를 찾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찾는 지혜는 헬라어 ‘소피아’입니다. 유럽인들이 철학을 philosophy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철학은 곧 지혜 사랑(philos)입니다. 철학자들은 인간의 궁극적인 지혜가 무엇인가를 찾는 사람들인데, 이런 전통은 단지 철학자들만이 아니라 생각할 줄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본질적으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아무도 지혜를 부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신구약성서도 이 지혜를 신앙의 중요한 요소로 간주합니다. 잠언과 전도서와 시편은 모두 지혜로운 삶에 대한 언급들입니다.
바울도 ‘지혜’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신약성서로 채택된 바울의 편지는 지혜로운 가르침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이어서 바울은 새로운 차원에서의 지혜를 말합니다. 6,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신앙생활이 성숙한 사람들에게는 지혜를 말합니다. 다만 그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나 이 세상에서 곧 멸망해 버릴 통치자들의 지혜와는 다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는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천지창조 이전부터 미리 마련하여 감추어 두셨던 지혜입니다.” 결국 바울은 지혜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지혜의 원천이 다르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말재주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심오한 지혜입니다.
말재주에 속한 지혜는 그리스 사람들의 전매특권입니다. 그들의 웅변술, 그들의 수사학은 사람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재주 앞에서 바울은 무기력합니다. 그럴 수밖에 더 있습니까? 웅변가들, 변호사들은 평생 그런 말재주 기술을 쌓은 사람이지만 바울은 그런 것들을 모두 포기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고린토에서 그런 경험이 분명했던 것 같습니다.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실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 약하였고 두려워서 몹시 떨었습니다.” 과연 그가 고린토 사람들의 언변에 기가 죽었는지, 아니면 공연한 말싸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고린토 사람들이 즐겨하던 그런 말재주로 예수의 복음을 전한 게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지금 바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이 지혜의 한계는 무엇일까요? 바울이 말하는 지혜는 인간 인식의 출처를 인간 자신에게서 찾는 삶의 태도입니다. 가장 근원적인 앎이라 할 하나님에 대해서도 역시 인간학적 요청에 근거해서 찾으려는 태도입니다. 그런 태도가 곧 그리스 사람들의 ‘지혜 사랑’, 곧 철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만물의 보편적 근원을 물, 공기, 불, 원소 등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지혜는 매우 놀랍습니다. 상당한 부분에서 나름으로의 논리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도 이것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니까 말입니다. 이런 지혜가 우리게 부분적으로 필요하기는 하지만 바울에 의하면 인간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설교가 상당한 부분에서 이런 인간의 지혜에 치우쳐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많은 설교자들이 성서 텍스트를 해명하지 않고 청중들의 요구에 기독교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포퓰리즘’ 설교가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복 받는 비결이라든지, 성공의 지름길 같은 설교제목들이 유행입니다. 설교 내용도 거의 사회심리학이나 사회과학에 기울어져 있습니다. 조울증, 감성지수, 인간관계 개발에 관한 일반 도서들이 설교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습니다. 인간 심리를 치료하거나 대인관계 및 인생관을 교정하는 프로그램처럼 설교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설교자들은 이런 프로그램을 성서와 기독교 신학의 정보로 포장할 뿐입니다. 이런 설교는 곧 인간의 지혜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바울은 이런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말을 하거나 설교를 할 때에도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성령과 그의 능력만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만한 것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성령과 능력만을 나타내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령과 능력은 같은 의미입니다. 생명의 영인 성령은 곧 생명을 생명 되게 하는 능력입니다. 성령은 그런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대목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혜와 설득력을 거부하는 바울의 주장을 “무조건 믿으라.”는 말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언변도 필요합니다. 바울이 언변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과 능력만 나타내려고 했다는 말은 사람의 요청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집중했다는 의미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바꾼다면 인간의 인식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론에 중심을 두었다는 뜻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 초등학교 여자 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가 아버지의 뜻을 아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자기가 배고플 때 밥을 주던 분이 바로 아버지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천둥치는 날 밤 무서워 깼을 때 자기를 따뜻하게 안아주던 분이 바로 아버지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이런 방식으로 자기가 필요할 때 무언가 채워주는 분이 곧 아버지의 정체라고 생각하는 게 곧 인간의 지혜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아버지를 모두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뜻대로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한 달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의사인 아버지는 한 달 동안 아프가니스탄의 무의촌에 가서 의료 활동을 한 것입니다. 이 아이의 요구와 아버지의 의료 활동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실제로는 관계가 있지만 이 아이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 세계입니다. 그래도 아버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길은 자기의 요구가 아니라 아버지의 행위 자체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닐까요?
바울은 고린토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성령과 능력만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곧 예수 사건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지내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 특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곧 하나님의 성령이며 능력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알리는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그 십자가 사건이 곧 하나님의 성령이며 능력이라고 말입니다.
믿음의 토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는 바울의 말을 잘 새겨서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십자가만 생각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십자가가 만능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왜 하나님의 성령과 능력이 드러난 것인지에 대해서는 늘 새롭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십자가의 새로운 지평이 늘 해석되어야 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의 굳어진 체게, 도그마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열려야 합니다. 거기에 몰두하는 게 곧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게 정확하게 정리되었나요? 바울은 사람들의 요청에 부응하는 설교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무시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지혜는 핵기술과 배아줄기복제로, 복지사회와 민주사회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그런 것에 토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인간의 지혜는 절대적인 생명을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둡니다.(5절). 왜냐하면 이 세상은 곧 그 능력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며, 따라서 그 하나님에 의하지 않으면 결코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사람의 지혜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세워지기도 하고 허물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세상 학문은 그것에 충실해서 살아가겠지만,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이 곧 그 토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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