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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4:8-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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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2003·03·21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 죄를 회개하는 마음,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를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임재하시고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 뵙게 되며 완전히 변화를 받게 됩니다. 큰 기쁨과 감격을 맛보게 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됩니다. 무거운 짐과 염려와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마음이 새로워집니다. 그리고 죄를 이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면 우리의 삶이 변화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도 있습니다. 믿음도 없이, 사모하는 마음도 없이, 죄를 버리지 않고 교만하게 나와서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형식이 거창하고 아름다워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배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예배는 아무 의미도 없는 헛된 것이 됩니다. 그런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전혀 바꾸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변화되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뵙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제사 후의 살인사건
가인과 아벨은 각각 제물을 준비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 제물은 기쁘게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사를 받아주시지 않는 것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분노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며, 회개하고 올바른 제사를 드려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사를 받아주시지 않고 아벨의 제사만 받아주신 것 때문에 아벨을 미워했습니다. "가인이 아벨에게 고하니라"는 말씀은 가인이 불평하고 분노하면서 아벨에 대한 미움을 나타냈다는 뜻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미워하고 핍박했습니다. 이 때 아벨은 슬퍼하고 놀라면서 자기가 믿음과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드린 것을 형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형님도 진정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것입니다." 얼마나 고맙고 진실된 충고입니까? 그러나 가인은 아벨의 진심 어린 충고를 듣고 더욱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자기 동생을 돌로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죄가 가져온 끔찍한 결과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죄가 급기야는 무고한 동생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무서운 모습으로 발전했던 것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끔찍한 살인사건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후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가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예배와 생활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예배와 생활은 연속되는 하나입니다. 믿음과 감사로 진정한 예배를 드린 사람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을 진실되게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여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까 하는 소원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죄를 싫어하여 멀리하게 되며 선한 생활을 힘쓰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지 못한 사람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믿음과 감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쉽게 죄를 지으면서 살게 됩니다. 믿음으로 제사를 드리지 못한 가인은 제사를 드린 후 동생을 살해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생명을 바치는 예배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를 드린 것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살아있는 예배, 진정한 예배를 위해서 죽은 순교자였습니다. 예배는 이렇게 생명을 바칠 만큼 중요합니다. 생명을 바쳐서 예배한 사람은 그만큼 하나님을 뜨겁게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을 때 멀리 동방에서 찾아온 박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험하고 먼 길을 찾아와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큰 감격과 기쁨을 누렸겠는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예배는 이렇게 하나님께 나의 생명까지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만나주십니다.
오늘 당신은 생명까지 드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십니까? 많은 성도들이 예배를 너무나도 가볍게 여깁니다. 친척 결혼식 때문에 예배를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친척 결혼식만큼도 소중하지 못하단 말입니까? 일이 바쁘다고 예배를 빠질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육신의 일만큼도 중요하지 못합니까? 예배를 생명보다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손해와 고난을 무릅쓰고 예배할 때 하나님을 더욱 잘 만날 수 있습니다.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생명까지 바쳐 예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죽음으로 끝인가?
아벨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린 것 때문에 죽었습니다. 얼마나 애석한 일입니까? 그러나 아벨은 그렇게 죽고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벨은 죽었지만 죽지 않았고 하나님 앞에서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한 번 죽으면 그만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 죽는다고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자살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은 영원한 존재입니다. 그 육신은 죽지만 그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장차 새롭게 변화된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사람은 한 번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이 세상에서의 것만으로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어머님은 지금 내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고생만 하시다가 인생을 마치셨습니다. 만일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았던 것만으로 끝난다면 이 얼마나 불행하고 억울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친 후 맞이하게 되는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는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기쁨의 나라입니다. 믿음을 지킨 성도는 그 나라에서 더 큰 상급을 받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살고 호강을 했다 해도 그 나라의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호강 한 번 못해보고 고생만 하며 주의 일에 힘쓰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 불행한 일이겠습니까? 그것은 오히려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자가 아니라면 그런 축복을 누릴 수 없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아벨이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는 최초의 순교자라는 영광된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늘나라에서 완전한 은총과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아벨은 정말 복된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누리며 살았는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영원한 그 나라를 위해서 준비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여 암매장을 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가인을 불러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죄인을 찾으십니다. 그것은 벌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가인이 자기의 무서운 죄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것을 촉구하시는 물음이었습니다. 이것은 가인에게 기회였습니다. 죄를 용서받고 회복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뻔뻔한 거짓말로 대답했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나님께서 다 아시는데도 죄를 숨기는 자는 결코 죄를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죄는 숨긴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합니다. 정직하고 겸손하게 회개하면 용서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끝까지 감추고 변명하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오늘 나는 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으라고 나에게 촉구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죄를 내어놓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는 얼마든지 사유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서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결코 죄를 감추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다 내어놓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주십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나 뻔뻔스럽고 가증한 모습입니까? 죄를 감추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이처럼 뻔뻔스럽고 가증한 일입니다.
가인의 대답은 이처럼 죄를 감추고자 하는 뻔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의 최소한의 책임과 도리를 외면하는 대답을 했습니다. 형이 아우를 지켜주지 않으면 누가 지켜준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우리의 형제, 이웃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당신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오늘 아무개 성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가장이나 총무 또는 가까운 성도에게 물어봅니다. "아무개 성도가 보이지 않는데 무슨 일 있습니까?" "그 사람 이제 그만 물어보세요. 부담되네요. 내가 뭐 그 사람 책임지는 사람입니까?" 혹시 이렇게 대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형제에 대해서 최소한의 관심을 가지고 있기를 기대하십니다. 요즘 계속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있는 그 성도를 누가 관심 가져야 하겠습니까? 가장 가까운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인처럼 대답하지 마시십시오. 형제에 대해서 늘 관심을 가지고 돌보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책임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가인이 받은 벌
하나님께서는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린 의인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회개하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가인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선고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인자 가인을 사형에 처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이 받은 벌이 무엇입니까? 11-1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제 가인이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은총을 거두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허무하고 곤고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가인이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범죄한 인생은 이 세상에서 참된 안식과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 죄의 문제를 해결받은 성도에게는 이 방황이 끝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가인이 받은 벌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낯을 뵙지 못하게 된 것이었습니다(14절).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과 두려움과 문제는 하나님을 떠난 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낯을 뵙게 됩니다. 우리가 예배시간에 설교를 듣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낯을 뵙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낯을 뵙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살고 있다해도, 우리의 모든 일이 다 잘되고 있다 해도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낯을 뵐 수 없도록 쫓겨난 것입니다. 예배에 참석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많거나 바쁜 것은 절대로 축복이 아닙니다. 결혼식이나 기타 행사 때문에 예배에 참석할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쫓겨난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끝없는 두려움
가인은 자기를 만나는 사람이 자기를 죽일 것이라고 말합니다(14절). 이 말씀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당시에 가인을 죽일 사람이 있었을까요? 아마도 아담은 가인과 아벨 외에도 많은 자식을 낳았을 것입니다. 5장을 보면 당시 사람들의 수명은 보통 900년 이상이었습니다. 그들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합친 것만큼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은 앞으로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문제가 어렵지 않게 설명됩니다.
가인은 죄를 용서받지 못한 상태에서 불안에 시달리며 쫓겨다녀야 했습니다. 가인은 죄를 용서받지 못한 채 그에게 선고된 형벌을 지고 평생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는 좇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불안하고 두려워서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한 모든 사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창살이 없는 감옥에 가두셨습니다.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어디를 가든지 그곳이 감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들의 운명입니다. 그것은 돈이나 명예나 권력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감옥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와 사망의 감옥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양심의 자유와 평안이 있습니다. 이제는 가난한 것이나 병든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당신에게는 이러한 자유와 평안이 있습니까? 만일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참 평안과 자유를 잃어버렸다면 주님 앞에 내어놓고 해결을 받으십시오.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안식과 평안과 자유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
두려워하는 가인에게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셨습니다(15절). 이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였습니다. 이 표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리 죄인이라 해도 그를 사사로이 죽이거나 보복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주신 표는 앞으로 죄인들에게 주실 구원의 표를 예표합니다. 그 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어떤 죄인도 그리스도께로 오면 그 보혈로 깨끗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은 성도는 더 이상 심판을 받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어린양의 피로 구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심판이 없습니다.
예배를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예배가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게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죄를 내어놓고 회개함으로 참된 자유와 안식을 얻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영원한 나라를 위해 준비하는 삶을 사십시오. 하나님 앞에 후회와 부끄러움이 없이 서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 죄를 회개하는 마음,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를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임재하시고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 뵙게 되며 완전히 변화를 받게 됩니다. 큰 기쁨과 감격을 맛보게 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됩니다. 무거운 짐과 염려와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마음이 새로워집니다. 그리고 죄를 이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면 우리의 삶이 변화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도 있습니다. 믿음도 없이, 사모하는 마음도 없이, 죄를 버리지 않고 교만하게 나와서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형식이 거창하고 아름다워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배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예배는 아무 의미도 없는 헛된 것이 됩니다. 그런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전혀 바꾸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변화되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뵙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제사 후의 살인사건
가인과 아벨은 각각 제물을 준비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 제물은 기쁘게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사를 받아주시지 않는 것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분노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며, 회개하고 올바른 제사를 드려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사를 받아주시지 않고 아벨의 제사만 받아주신 것 때문에 아벨을 미워했습니다. "가인이 아벨에게 고하니라"는 말씀은 가인이 불평하고 분노하면서 아벨에 대한 미움을 나타냈다는 뜻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미워하고 핍박했습니다. 이 때 아벨은 슬퍼하고 놀라면서 자기가 믿음과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드린 것을 형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형님도 진정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것입니다." 얼마나 고맙고 진실된 충고입니까? 그러나 가인은 아벨의 진심 어린 충고를 듣고 더욱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자기 동생을 돌로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죄가 가져온 끔찍한 결과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죄가 급기야는 무고한 동생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무서운 모습으로 발전했던 것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끔찍한 살인사건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후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가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예배와 생활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예배와 생활은 연속되는 하나입니다. 믿음과 감사로 진정한 예배를 드린 사람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을 진실되게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여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까 하는 소원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죄를 싫어하여 멀리하게 되며 선한 생활을 힘쓰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지 못한 사람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믿음과 감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쉽게 죄를 지으면서 살게 됩니다. 믿음으로 제사를 드리지 못한 가인은 제사를 드린 후 동생을 살해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생명을 바치는 예배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를 드린 것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살아있는 예배, 진정한 예배를 위해서 죽은 순교자였습니다. 예배는 이렇게 생명을 바칠 만큼 중요합니다. 생명을 바쳐서 예배한 사람은 그만큼 하나님을 뜨겁게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을 때 멀리 동방에서 찾아온 박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험하고 먼 길을 찾아와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큰 감격과 기쁨을 누렸겠는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예배는 이렇게 하나님께 나의 생명까지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만나주십니다.
오늘 당신은 생명까지 드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십니까? 많은 성도들이 예배를 너무나도 가볍게 여깁니다. 친척 결혼식 때문에 예배를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친척 결혼식만큼도 소중하지 못하단 말입니까? 일이 바쁘다고 예배를 빠질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육신의 일만큼도 중요하지 못합니까? 예배를 생명보다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손해와 고난을 무릅쓰고 예배할 때 하나님을 더욱 잘 만날 수 있습니다.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생명까지 바쳐 예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죽음으로 끝인가?
아벨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린 것 때문에 죽었습니다. 얼마나 애석한 일입니까? 그러나 아벨은 그렇게 죽고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벨은 죽었지만 죽지 않았고 하나님 앞에서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한 번 죽으면 그만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 죽는다고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자살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은 영원한 존재입니다. 그 육신은 죽지만 그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장차 새롭게 변화된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사람은 한 번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이 세상에서의 것만으로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어머님은 지금 내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고생만 하시다가 인생을 마치셨습니다. 만일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았던 것만으로 끝난다면 이 얼마나 불행하고 억울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친 후 맞이하게 되는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는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기쁨의 나라입니다. 믿음을 지킨 성도는 그 나라에서 더 큰 상급을 받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살고 호강을 했다 해도 그 나라의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호강 한 번 못해보고 고생만 하며 주의 일에 힘쓰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 불행한 일이겠습니까? 그것은 오히려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자가 아니라면 그런 축복을 누릴 수 없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아벨이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는 최초의 순교자라는 영광된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늘나라에서 완전한 은총과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아벨은 정말 복된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누리며 살았는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영원한 그 나라를 위해서 준비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여 암매장을 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가인을 불러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죄인을 찾으십니다. 그것은 벌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가인이 자기의 무서운 죄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것을 촉구하시는 물음이었습니다. 이것은 가인에게 기회였습니다. 죄를 용서받고 회복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뻔뻔한 거짓말로 대답했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나님께서 다 아시는데도 죄를 숨기는 자는 결코 죄를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죄는 숨긴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합니다. 정직하고 겸손하게 회개하면 용서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끝까지 감추고 변명하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오늘 나는 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으라고 나에게 촉구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죄를 내어놓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는 얼마든지 사유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서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결코 죄를 감추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다 내어놓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주십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나 뻔뻔스럽고 가증한 모습입니까? 죄를 감추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이처럼 뻔뻔스럽고 가증한 일입니다.
가인의 대답은 이처럼 죄를 감추고자 하는 뻔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의 최소한의 책임과 도리를 외면하는 대답을 했습니다. 형이 아우를 지켜주지 않으면 누가 지켜준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우리의 형제, 이웃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당신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오늘 아무개 성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가장이나 총무 또는 가까운 성도에게 물어봅니다. "아무개 성도가 보이지 않는데 무슨 일 있습니까?" "그 사람 이제 그만 물어보세요. 부담되네요. 내가 뭐 그 사람 책임지는 사람입니까?" 혹시 이렇게 대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형제에 대해서 최소한의 관심을 가지고 있기를 기대하십니다. 요즘 계속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있는 그 성도를 누가 관심 가져야 하겠습니까? 가장 가까운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인처럼 대답하지 마시십시오. 형제에 대해서 늘 관심을 가지고 돌보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책임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가인이 받은 벌
하나님께서는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린 의인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회개하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가인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선고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인자 가인을 사형에 처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이 받은 벌이 무엇입니까? 11-1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제 가인이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은총을 거두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허무하고 곤고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가인이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범죄한 인생은 이 세상에서 참된 안식과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 죄의 문제를 해결받은 성도에게는 이 방황이 끝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가인이 받은 벌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낯을 뵙지 못하게 된 것이었습니다(14절).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과 두려움과 문제는 하나님을 떠난 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낯을 뵙게 됩니다. 우리가 예배시간에 설교를 듣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낯을 뵙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낯을 뵙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살고 있다해도, 우리의 모든 일이 다 잘되고 있다 해도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낯을 뵐 수 없도록 쫓겨난 것입니다. 예배에 참석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많거나 바쁜 것은 절대로 축복이 아닙니다. 결혼식이나 기타 행사 때문에 예배에 참석할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쫓겨난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끝없는 두려움
가인은 자기를 만나는 사람이 자기를 죽일 것이라고 말합니다(14절). 이 말씀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당시에 가인을 죽일 사람이 있었을까요? 아마도 아담은 가인과 아벨 외에도 많은 자식을 낳았을 것입니다. 5장을 보면 당시 사람들의 수명은 보통 900년 이상이었습니다. 그들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합친 것만큼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은 앞으로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문제가 어렵지 않게 설명됩니다.
가인은 죄를 용서받지 못한 상태에서 불안에 시달리며 쫓겨다녀야 했습니다. 가인은 죄를 용서받지 못한 채 그에게 선고된 형벌을 지고 평생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는 좇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불안하고 두려워서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한 모든 사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창살이 없는 감옥에 가두셨습니다.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어디를 가든지 그곳이 감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들의 운명입니다. 그것은 돈이나 명예나 권력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감옥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와 사망의 감옥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양심의 자유와 평안이 있습니다. 이제는 가난한 것이나 병든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당신에게는 이러한 자유와 평안이 있습니까? 만일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참 평안과 자유를 잃어버렸다면 주님 앞에 내어놓고 해결을 받으십시오.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안식과 평안과 자유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
두려워하는 가인에게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셨습니다(15절). 이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였습니다. 이 표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리 죄인이라 해도 그를 사사로이 죽이거나 보복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주신 표는 앞으로 죄인들에게 주실 구원의 표를 예표합니다. 그 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어떤 죄인도 그리스도께로 오면 그 보혈로 깨끗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은 성도는 더 이상 심판을 받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어린양의 피로 구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심판이 없습니다.
예배를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예배가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게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죄를 내어놓고 회개함으로 참된 자유와 안식을 얻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영원한 나라를 위해 준비하는 삶을 사십시오. 하나님 앞에 후회와 부끄러움이 없이 서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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