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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있는 곳에 영생을

고린도후 이동원 목사............... 조회 수 2634 추천 수 0 2009.12.10 15:4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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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후5:1-10 
설교자 : 이동원 목사 
참고 : 지구촌 교회 
우리는 죽음 너머에 주님과 함께 사는 영생의 삶이 있다.
설교요약:
1.우리에게 영원한 집이 예비되어 있다.
2.우리는 내세를 사모해야 한다.
3.우리가 내세를 사모하는 이유는 거기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개역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언젠가 타임지에 “죽을 수 있는 권리”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낸시 쿠르덴이라는 32세의 여인이 7년 전에 교통 사고로 의식을 잃었는데, 그 후로 계속 초현대적인 기계의 도움을 받아서 식물 인간(植物人間)으로서 생명을 유지해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어머니였던 조이스 쿠르덴이 얼마 전에 “내 딸은 아마도 이 세상에서 이렇게 살게 되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 딸에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하면서 미국의 대법원에 정식으로 제소(提訴)를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에는 식물 인간이 되어 누워 있는 자들이 약 일만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 기사에서는 “이런 초현대적인 의료 기구들은 생명을 구하기 위한 기계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구하기보다는 죽음을 연장시키는 기계로서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이 제기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는 성도의 장례식을 집례할 때마다 자신을 향해서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곤 합니다. 저는 말씀을 전하다가 죽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혹 제가 설교하다가 갑자기 쓰러지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그것은 기도의 응답입니다. 죽기 전에 유언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참 다양합니다. 여기 아주 흥미로운 유언들이 몇 가지 있는데 들어 보시겠습니까? 어떤 영화 감독은 죽으면서 “내가 이제 죽는다. 레디 고우!”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떤 코메디언은 “내가 웃기려는 게 아니라 이번에는 진짜다”라고 말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학생들의 농담 중에 장의사가 죽으면서 “우리 집 매상은 이제 내가 올릴 차례다”라는 말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죽음, 그것의 위협은 사실 생명의 마지막 단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삶의 도처에서 죽음의 사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인생을 가리켜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이 죽음을 느끼면서 살아갔던 사람입니다. 그의 생애 가운데 얼마나 많은 죽음의 위기들이 있었는지요? 그는 항해 중에 여러 차례 파선의 경험을 하면서 죽음을 대면했습니다. 옥중에서,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씩이나 맞으면서, 여행 중에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을 겪으면서, 그가 고백한 대로 난치의 질병을 끌어안고 살면서 죽음의 위협을 느꼈던 것입니다. 본문인 고린도후서 5장에 들어가기 전에, 4장 12절에 보면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내가 사망에 처하는 이 고난을 받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생명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첫부분의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라는 고백은, 바울 사도가 생의 골짜기를 통해서 얼마나 구체적으로 죽음의 위협을 느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4장 16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바울은 살아가면서 시시각각으로 사망의 위협을 받았지만 낙심치 아니한다고 고백합니다.

신앙인들의 삶 속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자랑스러운 요소 중의 하나는 “죽음에 대면하는 용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아씨시의 성자 프란시스가 드린 기도를 한 구절씩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기도문을 내용으로 한 찬양이 있는데, 끝 부분에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라는  가사가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역(誤譯)입니다. 이 가사를 그대로 부르게 되면, 마치 자기를 던지는 희생적인 삶이 영생의 조건인 것처럼 이해하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원문에 보면 이 구절은 “우리가 죽음으로써 영원한 세계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이길 수 있고 또 마땅히 이겨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죽음을 이길 수 있을까요? 이 마지막 과에서는 죽음을 대면해서 승리의 고백을 했던 바울 사도의 예로 돌아가서 그 승리의 비결을 세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짐

본문 1절을 보십시오.“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이 구절에서 “장막집”은 우리의 육체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우리의 육체가 무너질 때 하늘에 우리를 위해서 영원한 집이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도 아다시피, 바울 사도가 이 세상에 있었을 때 가졌던 직업은 천막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누구보다도 이 천막에 대해서 아주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천막은 보잘것 없었을 것입니다. 천막집, 즉 장막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깁고 깁고 또 깁지만, 낡아지고 낡아지다가 마침내는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천막이었습니다.

성지(聖地)를 방문해 보면, 1세기의 유대인들처럼 지금도 텐트를 짊어지고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거주지를 옮기고 있는 일단의 무리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주 낡아빠진 천막집,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집입니다. 이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꿈이 있다면, 이제 이 유랑의 삶을 끝내고 견고한 돌집에서 살아 보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갖고 바울의 말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개역 한글성경에는 장막집이나 영원한 집이나 똑같이 집이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전혀 다른 단어가 쓰였습니다. 장막집은 문자 그대로 “텐트(tent)”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집에서의 집이라는 단어는 “빌딩(building)”이라는 의미입니다. 텐트와 빌딩의 차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낡은 장막집 같은 우리의 육체,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이 육체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운동도 하고 보약도 먹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장막집이 낡아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장막집은 무너집니다. 또 무너져야 합니다. 이 사실을 빨리 인지할  때, 우리는 거기에 맞는 근본적인 대책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무너지게 될 장막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세에 대한 확신입니다. 바울의 고백도 이 내세에 대한 확신에 근거한 것입니다.“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질 때,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영원한 집이 나를 위해서 예비되어 있다는 그 사실을 나는 안다”여기에서 “안다”라는 단어는 확신에 대한 최고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확신을 표현할 때 “믿습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아내를 향해서 이렇게 고백한다고 해 봅시다.“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줄로 확실히 믿는다오”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믿어지지 않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소”라고 말한다면, 앞의 경우보다 목소리의 톤은 낮을지 모르지만 훨씬 더 강한 확신을 표현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나는 알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위해 그 영원한 집을 준비하셨다는 사실을”이 땅에서 나의 삶이 다할 때, 구원받은 내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이 하늘에 예비되어 있음을 안다는 고백입니다. 주께서 이 땅을 떠나가시기 직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약속하신 그대로 우리 주님은 나를 위해서 그 영원한 집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확신, 그 확신 때문에  비록 내 육체가 무너져 가는 것을 보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내게 주어진 삶의 길을 달려가며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2.내세를 사모함

본문 2절을 보십시오.“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개역 한글성경에는 “오는”이라는 단어가 작은 글씨로 씌어 있습니다. 그 단어만 특별히 작은 것은, 그것이 성경 사본에 확실하게 기록된 말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저는 사본에 “오는”이라는 단어보다는 “하늘로부터 예비된”이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C.S.루이스의 『악마의 편지』라는 유명한 책에 보면, 사단이 부하들에게 자신의 전략을 설명하는 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내세를 인정하게 하라. 그러나 그것을 믿고 사모하지는 못하게 하라”내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단순히 인정하는 것과 그 내세를 믿고 사모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내세를 참으로 사모한다면, 그 내세를 준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거룩한 삶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동기는 바로 내세를 사모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하늘에 나를 위해 예비된 영원한 집이 있으니까 이 땅의 삶에 너무 연연하지 말아야지. 그리고 부끄럽지 않게 정직하게 살아야지”이 땅에서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갈등과 고뇌는, 천국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혹은 천국을 사모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읽어 보십시오. 믿음으로 살아갔던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 그들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며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갔던 그들의 삶의 승리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이 한번 신앙을 향한 발걸음을 내디딘 이후에 다시 옛 삶을 향해서 돌이키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소위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도 욕심꾸러기들이 많습니다. 부정과 부패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가진 신앙의 내면에 내세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참으로 내세를 믿고 내세를 사모한다면, 그들의 삶은 지금과는 다를 것입니다. 조금 큰 집에서 살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그보다 훨씬 더 좋은 집이 예비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검검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내세를 사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내세가 이 세상보다 더 좋고 더 아름다운 나라이기 때문입니까? 물론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우리의 사랑하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우리는 주님을 영접했을 때, 주님이 내 안에 계신다 혹은 성령이 내 안에 계신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육체적으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은 아닙니다. 6절 말씀도 그 의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열망 중의 하나는, 2,000년 전 제자들과 함께 거니시며 말씀하시며 위로하시던 그 주님과 함께 있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면 당연히 그런 열망을 갖게 됩니다. 바울이 “그렇다. 아직은 주님과 따로 거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6절 말씀에 이어 8절에서는 어떻게 고백하는지 보십시오.“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거기에 가면 그분과 함께 거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원한다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갑자기 사고로 세상을 떠난 어떤 부인의 집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그 부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제게 아주 인상깊었습니다.“목사님, 제 남편이 세상을 떠나간 후 천국이 가깝게 느껴져요. 천국이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희미하고 추상적인 의미로 밖에 다가오지 않았었는데, 사랑하는 남편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천국이 너무 가깝게 느껴져요”사랑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곳이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천국이 천국인 이유는, 내  찬송의 주제요 내 소원이요 내 믿음이요 내 사랑이신 주님이 거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세를 사모하는 열정, 그곳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하는 열망, 그것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너머의 세상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3.심판 날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도록 준비함

본문 10절을 보십시오.“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여기에서 심판대라는 단어는 정죄나 형벌의 개념이 별로 들어 있지 않습니다. 더 정확한 의미로는 “심판관 앞에”라는 말이 나을 것입니다. 옛날에 희랍 사람들은 이 심판대라는 단어를 “베마”라고 불렀습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한 종목의 경기가 끝난 후에 선수들은 심판관 앞에 섭니다. 그때 선수들은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치른 경기에 대한 평가를 받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즉,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잘 달렸든 못 달렸든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그 신앙의 깊이나 열정의 정도, 혹은 헌신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그날의 평가도 다양할 것입니다. 삶의 여정을 모두 마치고 사랑하는 주님 앞에 서는 날,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되겠습니까? 부끄럼 없이 설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앙인다운 삶을 살지 못했다면, 주님 앞에 서는 일이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제 큰아들 황이가 제게 이런 말을 합니다.“아빠, 이번 학기는 전과목 다 <수>인 것 같아요”그러니까 옆에서 둘째가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 『아빠,  나는 <미>가 하나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합니다. 그 후 성적표를 받는 날이 점점 가까워지자, 제 두 아들의  태도가 판이하게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성적표를 가져오는 그날이 가까워 올수록  큰아들은 얼굴에서 광채를 발하기 시작하는데, 상대적으로 둘째 아들은 안절부절  못합니다. 저는 이들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한 교훈을 배웠습니다.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그 때를 준비한 사람, 그에게 죽음이란 안식이고 위대한 결산이며 놀라운 승리의 절정입니다.

“주님, 최선을 다했습니다”이 말을 할 수 있는 인생은 얼마나 귀한 인생인지요

우리는 아씨시의 성자 프란시스의 기도의 메시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기(傳記) 작가가 프란시스의 최후에 대해 적은 내용을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프란시스의 마지막이 가까웠을 때, 그의 친구였던 의사 조바니가 그를 방문합니다. 프란시스는 이 친구 의사를 벤데나떼라는 애칭으로 불렀다고 합니다.“친구 벤데나떼여,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 것 같소?”벤데나떼는 그를 안심시키려고 이렇게 대답합니다.『형제여,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병은 곧 물러갈 것입니다.』이에 프란시스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내게 진실을 말해 주시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소쩍새가 아니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만이 나의 소원이라오. 나는 성령의 은혜로, 살든지 죽든지 어느 것에나 만족할 만큼 하나님과 일치하고 있다고 생각하오”『형제여, 그렇다면 내가 말하리이다. 의학상으로 볼 때에 형제의 병은 불치의 병이오. 금년 초가을까지 살 수 있을 것 같소.』몇 달 안 남은 것입니다. 전기 작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말을 들은 가련한 프란시스는 하나님을 향하듯 두 손을 치켜들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쁜 표정으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오라. 오, 나의 잠의 죽음이여, 나의 잠의 죽음이여> 그는 육체의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죽음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육체의 죽음에 의해서 당신은 찬송을 받으소서. 이 땅에서 한번 삶을 누린 자라면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 죄 중에 죽는 자는 재앙이로다. 그러나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며 세상을 떠나는 이, 그는 행복한 자가 아닌가?>”

죽음의 날이 드디어 그를 찾아왔습니다. 태양은 서산 마루에 마지막 석양을 물들였습니다. 주위는 적막하고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프란시스는 조용히 시편 142편에 자신의 곡조를 붙여서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프란시스는 완전히 실명(失明)한 상태입니다. 전기 작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아니 볼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는 마지막 한번 더 보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의 영혼은 단 한 분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조용히 움직이면서 계속 이렇게 고백하고 있었다. <내 주여, 나의 전부여, 내 주여, 나의 사랑이여> 프란시스는 회개한 지 20년이 되던 해인 1226년 10월 3일 토요일 저녁에 찬송하면서 죽어 갔다. 그때 그의 나이 마흔다섯이었다”

당신은 주님을 향해 출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오늘 하루 당신의 삶은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날을 준비하는 삶입니까?“아버지 하나님, 우리들의 하루하루의 삶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결산하는 준비를 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날 수많은 후회와 부끄럼 속에서 떠나는 인생이 되지 않기를 원하나이다”이 기도가 당신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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