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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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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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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관상기도는 없을까?
관상기도의 종류
관상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말하는데 있지 않고, 우리에게 말씀하실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관상기도란 하나님께서 자기 내면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자유롭게 자신을 열어놓는 상태이며 마침내 하나님의 신비가 자신의 내면에 부딪혀 옴으로 직접적이고도 완전한 하나님의 인식 즉 하나님과 하나 되는 일치경험 상태이다. 이 상태는 이성적인 사고보다는 사랑에 의해 하나님의 임재를 가슴으로 느끼는 경험이요, 정감적인 경험이요, 직관적인 경험이요, 하나님의 은총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결코 인식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분의 기다림이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으로 먼저 나아가야 한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는 "자연"에서(중세, 성 프란시스), "성경"에서(종교 개혁자, 루터 칼빈), "영(영성가들)"에서이다. 특히 십자가의 요한은 그 장소를 "어둔 밤"이라 했다. 어둔 밤이란 감각이 닫혀진 영혼의 세계이다.
전통적 관상기도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식에 따라 기도의 유형이 다르다.
(1) 초대 교회부터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하나님의 실존인 성경과 평정한 마음이 직접 부딪힘으로 하나님의 실존과 만나고 응답하는 "거룩한 독서"가 있다.
(2) 동방교회에서 활발하게 실천하고 있는 "예수기도"가 있다.
(3) 상상력이나 이미지 등을 매개체로 하여 관상체험에 이르는 유념적(有念的, kataphatic way) 방법을 '이냐시오식 관상기도'라 한다. 이 기도는 상상력이나 이미지라는 준비단계를 통해서 얻어진 관상을 "습득적 관상기도(accquired contemplation)"라 한다. 이 기도를 "불완전 관상" 혹은 "능동적 관상"라고 한다.
(4) 할 수 있는 한 우리의 모든 지성이나 상상력이나 이미지 그리고 느낌이나 생각이 멈추고 전적으로 수동적인 상태에서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 관상체험에 이르는 무념적(無念的, apophatic way) 방법을 "주부적 관상기도(infused contemplation)" 혹은 "완전관상"이라 한다.
필자는 이 기도를 통상적으로 "관상기도" 혹은 "침묵기도"라 하며 이 기도를 지향한다.
(5) 위의 전통적인 관상기도 외에도 관상에 이르는 기도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개신교에서는 독특한 부르짖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기도가 있다. 나는 이 기도를 "한의 기도" 혹은 "부르짖는 기도"라 한다.
우리들은 가톨릭에서는 관상기도가 있고 개신교 안에서는 관상기도가 없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다 보면 우리만의 독특한 관상기도가 있다. 그것은 한의 기도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산에서 들에서 기도원에서 부르짖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한다. 그 결과로 방언, 통역, 예언, 병 고치는 은사, 축사 등의 은사를 받기도 한다. 다만 우리들은 이러한 일을 은사에만 치중하고 있는 경향이 있어 하나님과 하나 되는 또는 하나님 자신을 원함이 아니라 그 결과인 은사나 현상에 치중하고 있는 부분이 안타까운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면 그 분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은사를 받아서 자기가 행하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지 않는가 생각한다. 이것은 절대 잘못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그분이 치료하시고, 그분이 축사하시고, 그분이 예언하시는 것이다. 그분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나는 그분께 쓰임을 받고 있는 도구일 뿐이다.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자. 교회에서 기도원에서 산에서 기도를 시작하면 대부분 주여 삼창하고 통성으로 시작한다. 이것이 잘못된 것인가? 버릴 것인가? 아니다. 다만 주위의 환경에 영향을 받을 뿐이다. 부르짖는 기도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도이다.
우리는 관상기도와 관상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 관상기도와 관상은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왜냐하면 관상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하나 되는 상태이다. 이런 상태가 되는 데는 한 두 가지의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방법은 다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는 방법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불러 모실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지금도 모든 사람이 그분과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모든 방법으로 그분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 나아가는 방법을 기도라 하고 관상상태에 이르기 위한 기도를 관상기도로 한다면 부르짖는 한의 기도 역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기도이다.
한의 기도로 관상에 이르는 데도 그 과정이 있다고 본다. 처음에 부르짖는 기도를 통하여 마음이 집중되며 정화된다. 그 정도가 지나면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음 마져 줄어지게 되고 마침내 침묵상태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 관상의 은총을 누리기도 한다.
부르짖는 단계는 외적 정화의 단계이며 점점 침묵상태로 들어가는 것은 내적정화의 단계이다. 이 과정을 그치며 침묵상태에 머무를 때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내게 다가오시어 하나 되어 주신다. 이 처럼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어 놓아질 때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
실제 산에서 나무뿌리를 뽑으려는 자세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 가운데 관상에 이르기도 한다. 산에서 밤새워 기도하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통성으로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침묵 속으로 들어가고 마침내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자신이 관상의 신비에 들어가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신비하고 비밀스러워하는 것은 이해부족일 뿐이다. 이처럼 우리도 관상기도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할 뿐이다. 한국교회의 특징은 부르짖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로인하여 이상하게 생각하고 도 잘못 활용하거나 신비주의로 빠져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 개신교 안에서도 잘 개발하여 관상 그 이후의 삶에 대하여 인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르짖는 기도의 한계성이 있다 장소문제 환경문제 등이 곧 장애요인인데 꼭 큰소리로 부르짖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속으로 부르짖는 것이 더 크게 부르짖는지도 모른다. 기도하는 방법은 더 개선하고 개발해야 할 것이다. 침묵기도 수련이 되면 부르짖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더욱 쉬워지고 확실해진다.
박노열 목사 <고려수도원>
관상기도의 종류
관상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말하는데 있지 않고, 우리에게 말씀하실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관상기도란 하나님께서 자기 내면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자유롭게 자신을 열어놓는 상태이며 마침내 하나님의 신비가 자신의 내면에 부딪혀 옴으로 직접적이고도 완전한 하나님의 인식 즉 하나님과 하나 되는 일치경험 상태이다. 이 상태는 이성적인 사고보다는 사랑에 의해 하나님의 임재를 가슴으로 느끼는 경험이요, 정감적인 경험이요, 직관적인 경험이요, 하나님의 은총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결코 인식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분의 기다림이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으로 먼저 나아가야 한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는 "자연"에서(중세, 성 프란시스), "성경"에서(종교 개혁자, 루터 칼빈), "영(영성가들)"에서이다. 특히 십자가의 요한은 그 장소를 "어둔 밤"이라 했다. 어둔 밤이란 감각이 닫혀진 영혼의 세계이다.
전통적 관상기도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식에 따라 기도의 유형이 다르다.
(1) 초대 교회부터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하나님의 실존인 성경과 평정한 마음이 직접 부딪힘으로 하나님의 실존과 만나고 응답하는 "거룩한 독서"가 있다.
(2) 동방교회에서 활발하게 실천하고 있는 "예수기도"가 있다.
(3) 상상력이나 이미지 등을 매개체로 하여 관상체험에 이르는 유념적(有念的, kataphatic way) 방법을 '이냐시오식 관상기도'라 한다. 이 기도는 상상력이나 이미지라는 준비단계를 통해서 얻어진 관상을 "습득적 관상기도(accquired contemplation)"라 한다. 이 기도를 "불완전 관상" 혹은 "능동적 관상"라고 한다.
(4) 할 수 있는 한 우리의 모든 지성이나 상상력이나 이미지 그리고 느낌이나 생각이 멈추고 전적으로 수동적인 상태에서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 관상체험에 이르는 무념적(無念的, apophatic way) 방법을 "주부적 관상기도(infused contemplation)" 혹은 "완전관상"이라 한다.
필자는 이 기도를 통상적으로 "관상기도" 혹은 "침묵기도"라 하며 이 기도를 지향한다.
(5) 위의 전통적인 관상기도 외에도 관상에 이르는 기도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개신교에서는 독특한 부르짖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기도가 있다. 나는 이 기도를 "한의 기도" 혹은 "부르짖는 기도"라 한다.
우리들은 가톨릭에서는 관상기도가 있고 개신교 안에서는 관상기도가 없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다 보면 우리만의 독특한 관상기도가 있다. 그것은 한의 기도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산에서 들에서 기도원에서 부르짖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한다. 그 결과로 방언, 통역, 예언, 병 고치는 은사, 축사 등의 은사를 받기도 한다. 다만 우리들은 이러한 일을 은사에만 치중하고 있는 경향이 있어 하나님과 하나 되는 또는 하나님 자신을 원함이 아니라 그 결과인 은사나 현상에 치중하고 있는 부분이 안타까운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면 그 분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은사를 받아서 자기가 행하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지 않는가 생각한다. 이것은 절대 잘못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그분이 치료하시고, 그분이 축사하시고, 그분이 예언하시는 것이다. 그분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나는 그분께 쓰임을 받고 있는 도구일 뿐이다.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자. 교회에서 기도원에서 산에서 기도를 시작하면 대부분 주여 삼창하고 통성으로 시작한다. 이것이 잘못된 것인가? 버릴 것인가? 아니다. 다만 주위의 환경에 영향을 받을 뿐이다. 부르짖는 기도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도이다.
우리는 관상기도와 관상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 관상기도와 관상은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왜냐하면 관상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하나 되는 상태이다. 이런 상태가 되는 데는 한 두 가지의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방법은 다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는 방법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불러 모실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지금도 모든 사람이 그분과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모든 방법으로 그분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 나아가는 방법을 기도라 하고 관상상태에 이르기 위한 기도를 관상기도로 한다면 부르짖는 한의 기도 역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기도이다.
한의 기도로 관상에 이르는 데도 그 과정이 있다고 본다. 처음에 부르짖는 기도를 통하여 마음이 집중되며 정화된다. 그 정도가 지나면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음 마져 줄어지게 되고 마침내 침묵상태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 관상의 은총을 누리기도 한다.
부르짖는 단계는 외적 정화의 단계이며 점점 침묵상태로 들어가는 것은 내적정화의 단계이다. 이 과정을 그치며 침묵상태에 머무를 때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내게 다가오시어 하나 되어 주신다. 이 처럼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어 놓아질 때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
실제 산에서 나무뿌리를 뽑으려는 자세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 가운데 관상에 이르기도 한다. 산에서 밤새워 기도하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통성으로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침묵 속으로 들어가고 마침내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자신이 관상의 신비에 들어가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신비하고 비밀스러워하는 것은 이해부족일 뿐이다. 이처럼 우리도 관상기도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할 뿐이다. 한국교회의 특징은 부르짖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로인하여 이상하게 생각하고 도 잘못 활용하거나 신비주의로 빠져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 개신교 안에서도 잘 개발하여 관상 그 이후의 삶에 대하여 인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르짖는 기도의 한계성이 있다 장소문제 환경문제 등이 곧 장애요인인데 꼭 큰소리로 부르짖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속으로 부르짖는 것이 더 크게 부르짖는지도 모른다. 기도하는 방법은 더 개선하고 개발해야 할 것이다. 침묵기도 수련이 되면 부르짖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더욱 쉬워지고 확실해진다.
박노열 목사 <고려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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