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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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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5:50-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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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
2002.10.30
미국의 한 때 유명한 설교자였고 목회자였던 아이언 사이드 박사가 어느날 마을길을 지나가다가 항상 열려 있는 어떤 상점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창문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이 집에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자세히 봤더니 창문 밖에다 다음과 같이 써 놓았더랍니다. '내부 수리중' 그 후 여러 날 동안 그 가게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내부 수리중' 이라는 팻말만 붙어 있었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인가 가게문이 활짝 열려서 들어가 봤더니 가게 안이 얼마나 멋지게 장식이 되었는지 모든 것이 새로웠습니다. 들어가는 손님들마다 아주 기분 좋게 물건을 사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내부 수리중인 것과 같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몸이 주님의 몸과 같이 영화롭게 변화되는 부활의 날까지 내부 수리중 팻말을 걸어 놓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 사람들로부터 가장 존경받고 있는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여러분, 빌리 그래함이 죽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거든 그 신문 기사를 믿지 마시오. 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주소를 옮긴 것뿐이오.'라고 말했습니다. 왜 죽음을 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또다른 시작으로 받아들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실낙원의 저자 밀턴은 '죽음은 영원한 하나님나라 궁전의 문을 여는 열쇠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성도님은 사람이 죽으면 예수님 재림 때 부활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부활할 것을 누누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기적하였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도둑질하였다가 거짓 소문을 내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환상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겠습니까? 예수님은 부활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이 부활을 증거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순교를 하였고 그 후에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이 부활을 증거하다가 순교했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위해 죽은 사람은 더러 있지만 거짓을 위해 이렇게 죽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부활을 확실히 목격했고 부활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은 후에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일까요? 우리나라 만해도 한해에 25만명이 죽습니다. 교통사고로만 하루에 26명이 죽는다고 합니다. 이들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일가요? 아닙니다. 심판으로 부활하든 상급으로 부활하든 다 부활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 5:29)"
그러면 우리가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어떤 일을 당하여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더욱 견고해져야 합니다.
5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라는 말은 부활을 말씀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고 우리의 부활이 확실하니 이렇게 살아라는 교훈입니다. 부활장인 15장의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고린도시는 타락의 도시입니다. 코린티아 조마이라는 말은 고린도 사람처럼 행한다는 말인데 매춘행위를 행하는 사람을 칭하는 말입니다. 교회내 파당문제가 있었습니다(1:11). 도덕적 타락(5; 6:9-20) 결혼, 음식, 예배, 부활에 대한 그릇된 사상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1세기 교회가 그렇듯 갖은 핍박과 고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부활을 믿는 신앙인으로 먼저 흔들리지 말고 부활신앙에 견고하게 서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어떤 문제를 당하면 신앙이 더 좋아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신앙이 더 나빠져 타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정한 친구를 어려울 때 알아 볼 수 있듯이 진정한 신앙인도 어려울 때 알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 지 못하는 지 알 수 있는 것은 시험을 볼 때입니다. 건물이 튼튼한지 튼튼하지 않은지 평소에는 잘 모르지만 폭풍이 불고 지진이 일어나면 알 수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을 통하여 신앙은 성장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모든 것이 잘 될 때도 흔들리지만 잘 안될 때도 흔들립니다. 가장 흔들리기 쉬울 때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죽음을 맞이할 때입니다. 니체같은 사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왜 예수 믿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냐고 질문하면 신앙적 회의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냐고 원망하며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51절에 보십시오. 잠자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시 살아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도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부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움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신앙이 흔들리고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부활신앙이 더 성숙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는 신앙의 인물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고난이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고난 가운데 신앙이 더욱 성숙하며 하나님 의지하고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어릴 때 부모를 떠난 사람입니다. 살인자로 몰려 왕궁에서 쫓겨난 사람입니다.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백성이 잘 따라 주지 않았고 여러 차례 위협을 당한 사람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형제들에게 인신 매매되어 다른 나라에서 종살이 한 사람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갖혀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얼마나 어려움을 많이 당했습니까?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들은 그 고난에서 신앙이 더 떨어진 것이 아니라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여 신앙이 더 성숙해졌고 신앙 안에서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았습니다. 욥을 보십시오. 동방의 최고 부자였습니다.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루 아침에 그 모든 소유물은 없어졌습니다. 어느날 졸지에 폭풍으로 7남 3녀 다 죽었습니다. 자신도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이 때 욥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 1:21-22)"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만 의지하는 성숙한 신앙으로 발전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6:25)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6)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 6:27)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 6:28)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29)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30)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1)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2)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 6:34)"
2.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부활할 것을 확신을 가지면 주의 일에 힘쓸 수 밖에 없습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고 하는 책을 쓴 모리 교수는 운동세포가 파괴되어 가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들은 모두 다 죽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네. 만일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사람들은 금방 딴 사람이 될 걸세.'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이 죽음 후에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인생의 방향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세계의 유명한 수학자요, 과학자요, 철학자였든 파스칼은 팡세에서 "천국! 이것은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도박이다! 그냥 우리가 포기해버리기에는 너무나 어마어마한 이것은 도박이다." 파스칼은 수학자이니까 계산을 했을 것입니다. "천국이 없어도, 천국을 믿고 살았든 나에게 별로 손해볼 것은 사실은 없다. 그러나 천국이 정말 존재했다면, 준비만 했었으면 갈 수 있었든 천국, 그런데 그 천국을 내가 놓쳐버렸다면 이것은 큰일이다. 이것은 놓쳐버리기에는, 이것은 그대로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어마 어마한 도박이다."
사람들은 흔히 죽음을 인생의 끝이라고 말합니다. "죽으면 다 끝났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는 아니가 세상에 나오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모태의 삶은 끝이지만 새로운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끝이지만 또다른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벌레가 고치가 되고 고치가 다시 나비로 태어나는 것처럼 우리 인생을 죽음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죽음에 관한 최대의 연구가는 하바드대의 정신의학자였던 엘리자베스 퀴버라스라는 학자라고 합니다. 그분의 팀들은 소위 죽음에 가까운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연구했습니다. 죽었다가 극적으로 살아난 사람들, 죽음의 상태를 체험한 사람들의 의식 세계를 집중적으로 연구했습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모두다 긴 터널을 통과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부류의 사람은 아주 끔찍한 고통을 경험했고 한 부류의 사람은 환한 빛의 세계를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빛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은 다시는 돌아오고싶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죽음 후에 부활이 있습니다. 죽음 후에 천국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확신하면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 죽음으로 끝나는 일에 억메이지 않고 죽음 후에 부활로 이어지는 세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의 일입니다.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한다고 주의 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힘쓰고 애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긴 싸움을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부활을 확신한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어려움이 있을 때 어떤 자세로 살아갑니까? 그분이 죽음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고 기록한 디모데후서 4장을 보십시오. 6절 이하는 보십시오. 같이 일어 보겠습니다. 주님의 일을 적당히 하는 것과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것은 다릅니다. 힘써 일하는 것은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일만을 이루고 죽어야 한다는 사명감 말입니다. 이 일을 위해 주님께서 나를 이 땅에 태어났게 했다고 생각하면서 일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해도 사명감을 가지고, 사업을 해도, 공부를 해도, 자녀를 양육해도, 부모를 섬겨도, 기도를 해도, 전도를 해도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주의 일을 합니다.
모든 일의 일꾼은 세 종류입니다. 첫째는 자신을 위하여 일하는 자, 둘째는 일을 위하여 일하는 자, 셋째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자입니다. 사명자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다 보면 그것이 자신을 위한 일이 되고 일이 잘 되어 지게 되어 있습니다.
서울 합정동에 가면 한국기독교선교기념관이 있습니다. 이땅을 '복음의 땅끝'으로 알고 찾아왔다가 숨진 10개국 395명의 선교사들이 묻힌 곳입니다. 양화진에 자리한 기념관은 지금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은혜 보답의 차원에서 이곳에 외국인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안락한 삶을 마다하고 한국을 찾아온 벽안의 선교사들. 그들은 부활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죽음을 초월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풍상에 씻겨 흔적을 알아보기 힘든 빛바랜 묘비명들이 적혀 있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A. K. 젠슨). "나에게는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해도 그 모두를 한국을 위해 바치리라"(R. 캔드릭). A. R. 아펜젤러 선교사의 묘비명엔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언젠가 이 땅을 떠날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사명이 무엇입니까? 힘쓰고 애써서 이루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사명자 바울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그 주변에서 떠날 때 그의 자세를 보십시오. 원망합니까? 주의 일에 더욱 힘씁니다. 17절을 읽어 보십시오. 골로새서 1장 28-29절을 보십시오.
3.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수고하는 것 중에는 헛된 것들이 있는 반면에 영원히 헛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고전 15:12-19) 이 땅에서 하는 모든 것은 허무한 것일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나 버리는 공허한 것일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된다고 말씀합니다.(17),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되고 만다고 말씀합니다(14,17). 모든 사람 가운데서 우리는 더욱 불쌍한 자가 된다(19)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음으로 내세가 있음으로 천국이 있음으로 주님을 위한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 살다가 죽는 죽음은 그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는 죽음일지라도 복있는 죽음이고 영광스러운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10:42)"
"(고전3:8)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갈6:9)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마 10:41)"
마태복음 25장 34절 이하를 보십시오.
우리가 교회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수고하는 모든 수고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면류관을 약속하고 있습니다.시험을 참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약1:12). 사명을 다 감당한 사람에게는 의의 면류관(딤후4:8), 믿음의 정조를 지킨 사람에게는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고전9:25), 순교자에게 순교자의 면류관(계2:10), 목자들에게 영광의 면류관(벧전5:4), 영혼을 구원하는 자에게 기쁨의 면류관(살전2:19,20), 영적인 승리자에게 자랑의 면류관(살전2:19)을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상급이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주는 댓가는 조그마한 것도 유치하지 않고 감사하다고 받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상급을 말하면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날에 우리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너무나 추상화시키고 관념화시키지 마십시오. 어린 아이처럼 믿음을 가지고 사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눈물 흘리며 고생하는 것 언젠가 우리의 눈물을 씻어 줄 날이 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4)"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1.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어떤 일을 당하여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더욱 견고해져야 합니다.
2.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3.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고린도전서15:50-58/김필곤 목사
미국의 한 때 유명한 설교자였고 목회자였던 아이언 사이드 박사가 어느날 마을길을 지나가다가 항상 열려 있는 어떤 상점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창문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이 집에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자세히 봤더니 창문 밖에다 다음과 같이 써 놓았더랍니다. '내부 수리중' 그 후 여러 날 동안 그 가게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내부 수리중' 이라는 팻말만 붙어 있었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인가 가게문이 활짝 열려서 들어가 봤더니 가게 안이 얼마나 멋지게 장식이 되었는지 모든 것이 새로웠습니다. 들어가는 손님들마다 아주 기분 좋게 물건을 사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내부 수리중인 것과 같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몸이 주님의 몸과 같이 영화롭게 변화되는 부활의 날까지 내부 수리중 팻말을 걸어 놓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 사람들로부터 가장 존경받고 있는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여러분, 빌리 그래함이 죽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거든 그 신문 기사를 믿지 마시오. 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주소를 옮긴 것뿐이오.'라고 말했습니다. 왜 죽음을 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또다른 시작으로 받아들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실낙원의 저자 밀턴은 '죽음은 영원한 하나님나라 궁전의 문을 여는 열쇠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성도님은 사람이 죽으면 예수님 재림 때 부활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부활할 것을 누누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기적하였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도둑질하였다가 거짓 소문을 내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환상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겠습니까? 예수님은 부활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이 부활을 증거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순교를 하였고 그 후에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이 부활을 증거하다가 순교했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위해 죽은 사람은 더러 있지만 거짓을 위해 이렇게 죽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부활을 확실히 목격했고 부활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은 후에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일까요? 우리나라 만해도 한해에 25만명이 죽습니다. 교통사고로만 하루에 26명이 죽는다고 합니다. 이들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일가요? 아닙니다. 심판으로 부활하든 상급으로 부활하든 다 부활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 5:29)"
그러면 우리가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어떤 일을 당하여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더욱 견고해져야 합니다.
5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라는 말은 부활을 말씀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고 우리의 부활이 확실하니 이렇게 살아라는 교훈입니다. 부활장인 15장의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고린도시는 타락의 도시입니다. 코린티아 조마이라는 말은 고린도 사람처럼 행한다는 말인데 매춘행위를 행하는 사람을 칭하는 말입니다. 교회내 파당문제가 있었습니다(1:11). 도덕적 타락(5; 6:9-20) 결혼, 음식, 예배, 부활에 대한 그릇된 사상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1세기 교회가 그렇듯 갖은 핍박과 고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부활을 믿는 신앙인으로 먼저 흔들리지 말고 부활신앙에 견고하게 서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어떤 문제를 당하면 신앙이 더 좋아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신앙이 더 나빠져 타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정한 친구를 어려울 때 알아 볼 수 있듯이 진정한 신앙인도 어려울 때 알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 지 못하는 지 알 수 있는 것은 시험을 볼 때입니다. 건물이 튼튼한지 튼튼하지 않은지 평소에는 잘 모르지만 폭풍이 불고 지진이 일어나면 알 수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을 통하여 신앙은 성장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모든 것이 잘 될 때도 흔들리지만 잘 안될 때도 흔들립니다. 가장 흔들리기 쉬울 때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죽음을 맞이할 때입니다. 니체같은 사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왜 예수 믿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냐고 질문하면 신앙적 회의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냐고 원망하며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51절에 보십시오. 잠자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시 살아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도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부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움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신앙이 흔들리고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부활신앙이 더 성숙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는 신앙의 인물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고난이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고난 가운데 신앙이 더욱 성숙하며 하나님 의지하고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어릴 때 부모를 떠난 사람입니다. 살인자로 몰려 왕궁에서 쫓겨난 사람입니다.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백성이 잘 따라 주지 않았고 여러 차례 위협을 당한 사람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형제들에게 인신 매매되어 다른 나라에서 종살이 한 사람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갖혀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얼마나 어려움을 많이 당했습니까?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들은 그 고난에서 신앙이 더 떨어진 것이 아니라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여 신앙이 더 성숙해졌고 신앙 안에서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았습니다. 욥을 보십시오. 동방의 최고 부자였습니다.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루 아침에 그 모든 소유물은 없어졌습니다. 어느날 졸지에 폭풍으로 7남 3녀 다 죽었습니다. 자신도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이 때 욥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 1:21-22)"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만 의지하는 성숙한 신앙으로 발전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6:25)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6)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 6:27)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 6:28)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29)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30)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1)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2)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 6:34)"
2.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부활할 것을 확신을 가지면 주의 일에 힘쓸 수 밖에 없습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고 하는 책을 쓴 모리 교수는 운동세포가 파괴되어 가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들은 모두 다 죽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네. 만일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사람들은 금방 딴 사람이 될 걸세.'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이 죽음 후에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인생의 방향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세계의 유명한 수학자요, 과학자요, 철학자였든 파스칼은 팡세에서 "천국! 이것은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도박이다! 그냥 우리가 포기해버리기에는 너무나 어마어마한 이것은 도박이다." 파스칼은 수학자이니까 계산을 했을 것입니다. "천국이 없어도, 천국을 믿고 살았든 나에게 별로 손해볼 것은 사실은 없다. 그러나 천국이 정말 존재했다면, 준비만 했었으면 갈 수 있었든 천국, 그런데 그 천국을 내가 놓쳐버렸다면 이것은 큰일이다. 이것은 놓쳐버리기에는, 이것은 그대로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어마 어마한 도박이다."
사람들은 흔히 죽음을 인생의 끝이라고 말합니다. "죽으면 다 끝났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는 아니가 세상에 나오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모태의 삶은 끝이지만 새로운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끝이지만 또다른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벌레가 고치가 되고 고치가 다시 나비로 태어나는 것처럼 우리 인생을 죽음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죽음에 관한 최대의 연구가는 하바드대의 정신의학자였던 엘리자베스 퀴버라스라는 학자라고 합니다. 그분의 팀들은 소위 죽음에 가까운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연구했습니다. 죽었다가 극적으로 살아난 사람들, 죽음의 상태를 체험한 사람들의 의식 세계를 집중적으로 연구했습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모두다 긴 터널을 통과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부류의 사람은 아주 끔찍한 고통을 경험했고 한 부류의 사람은 환한 빛의 세계를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빛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은 다시는 돌아오고싶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죽음 후에 부활이 있습니다. 죽음 후에 천국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확신하면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 죽음으로 끝나는 일에 억메이지 않고 죽음 후에 부활로 이어지는 세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의 일입니다.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한다고 주의 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힘쓰고 애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긴 싸움을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부활을 확신한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어려움이 있을 때 어떤 자세로 살아갑니까? 그분이 죽음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고 기록한 디모데후서 4장을 보십시오. 6절 이하는 보십시오. 같이 일어 보겠습니다. 주님의 일을 적당히 하는 것과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것은 다릅니다. 힘써 일하는 것은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일만을 이루고 죽어야 한다는 사명감 말입니다. 이 일을 위해 주님께서 나를 이 땅에 태어났게 했다고 생각하면서 일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해도 사명감을 가지고, 사업을 해도, 공부를 해도, 자녀를 양육해도, 부모를 섬겨도, 기도를 해도, 전도를 해도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주의 일을 합니다.
모든 일의 일꾼은 세 종류입니다. 첫째는 자신을 위하여 일하는 자, 둘째는 일을 위하여 일하는 자, 셋째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자입니다. 사명자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다 보면 그것이 자신을 위한 일이 되고 일이 잘 되어 지게 되어 있습니다.
서울 합정동에 가면 한국기독교선교기념관이 있습니다. 이땅을 '복음의 땅끝'으로 알고 찾아왔다가 숨진 10개국 395명의 선교사들이 묻힌 곳입니다. 양화진에 자리한 기념관은 지금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은혜 보답의 차원에서 이곳에 외국인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안락한 삶을 마다하고 한국을 찾아온 벽안의 선교사들. 그들은 부활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죽음을 초월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풍상에 씻겨 흔적을 알아보기 힘든 빛바랜 묘비명들이 적혀 있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A. K. 젠슨). "나에게는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해도 그 모두를 한국을 위해 바치리라"(R. 캔드릭). A. R. 아펜젤러 선교사의 묘비명엔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언젠가 이 땅을 떠날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사명이 무엇입니까? 힘쓰고 애써서 이루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사명자 바울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그 주변에서 떠날 때 그의 자세를 보십시오. 원망합니까? 주의 일에 더욱 힘씁니다. 17절을 읽어 보십시오. 골로새서 1장 28-29절을 보십시오.
3.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수고하는 것 중에는 헛된 것들이 있는 반면에 영원히 헛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고전 15:12-19) 이 땅에서 하는 모든 것은 허무한 것일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나 버리는 공허한 것일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된다고 말씀합니다.(17),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되고 만다고 말씀합니다(14,17). 모든 사람 가운데서 우리는 더욱 불쌍한 자가 된다(19)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음으로 내세가 있음으로 천국이 있음으로 주님을 위한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 살다가 죽는 죽음은 그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는 죽음일지라도 복있는 죽음이고 영광스러운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10:42)"
"(고전3:8)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갈6:9)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마 10:41)"
마태복음 25장 34절 이하를 보십시오.
우리가 교회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수고하는 모든 수고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면류관을 약속하고 있습니다.시험을 참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약1:12). 사명을 다 감당한 사람에게는 의의 면류관(딤후4:8), 믿음의 정조를 지킨 사람에게는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고전9:25), 순교자에게 순교자의 면류관(계2:10), 목자들에게 영광의 면류관(벧전5:4), 영혼을 구원하는 자에게 기쁨의 면류관(살전2:19,20), 영적인 승리자에게 자랑의 면류관(살전2:19)을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상급이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주는 댓가는 조그마한 것도 유치하지 않고 감사하다고 받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상급을 말하면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날에 우리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너무나 추상화시키고 관념화시키지 마십시오. 어린 아이처럼 믿음을 가지고 사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눈물 흘리며 고생하는 것 언젠가 우리의 눈물을 씻어 줄 날이 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4)"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1.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어떤 일을 당하여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더욱 견고해져야 합니다.
2.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3.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고린도전서15:50-58/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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