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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행1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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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
2002.10.31
한국 최초의 여의사는 누구일까요? 박에스더라는 분입니다.
1876년 정동부근에서 가난하게 사는 김씨의 딸 4형제 가운데 세째로 태어났답니다. 그가 열 살 때 쯤 되었을 때, 아펜젤러가 그곳에 땅과 집을 사서 정동교회와 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가난하던 터라 아펜젤러에게 고용이 되어 일하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아펜젤러의 소개로 이화학당에 입학하게 되었답니다. 당시 이화학당은 스크랜톤 부인에 의해서 막 문을 열었기 때문에 3명의 학생과 함께 배우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이곳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일생을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답니다. 그는 세례를 받고 다메섹 도상의 사울이 바울로 변했듯이 본래의 이름 김점동을 버리고 에스더라는 이름으로 주를 위해 살기로 헌신했다고 합니다. 1895년 2월 에스더는 리버티 공립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그녀의 남편은 농장일을 도우면서,아내의 학업을 도와습니다. 1896년 10월 1일에는 볼티모 여자의과대학(Woman's Medical College of Baltimore)에 입학하였고 마침내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때 나이는 겨우 24세를 넘은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남편인 박유산이 에스더의 졸업을 20여일 앞두고 뇌일혈로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주를 위해 살겠다고 결심하고 갔는데 뜻밖의 일을 당하였습니다. 그에게 미국은 살기 좋은 나라 떠나고 싶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일평생을 바치기로 약속했습니다. 고국에 돌아와 헌신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홀 부인을 도와 광혜여원의 건물을 신축하며, 한국 최초의 간호원 양성소를 개설하였습니다. 그녀는 주님을 위해 가난하고 병든 자를 위해 뜨겁게 일했습니다. 결국 환자를 돌보다 34세 젊은 나이로 폐침윤에 걸려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아펜 젤러 전기 작가인 그리피스(William E.Criffis)는 당시 감리교 의료기관에 일한 사람은 12명이었는데 그 중 5명이 이 땅을 위해 아까운 생명을 바쳤다고 했습니다. 그들 중 박에스더는 한국인 의사로 유일하게 순교자의 숭고한 대열에 끼이는 영광을 차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대마다 자신의 생명을 바쳐 주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시대를 변화시켰고, 자신의 생명을 바쳐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쳤고, 그 시대의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였고, 자신의 생명을 바쳐 하나님의 사랑과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주저없이 순교자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출세나 자신의 편안함과 안락함보다는 어렵고 힘든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주님을 위해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마지막에는 주를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놓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성경에 짧게 나오는 야고보가 그런 순교자 중 12사도로서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야고보의 생과 죽음을 통해 보여주시는 한 시대의 순교자의 신앙이란 어떤 모습인가를 교훈받고자 합니다.
1. 한 시대 순교자는 자아를 쳐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그 사람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 인정할 정도의 변화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속한 시대 속에서 신앙의 푯대가 됩니다. "그래 예수 믿으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해"라는 말을 듣습니다. 순교는 예수 믿는지 믿지 않는지 모를 정도의 신앙인이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분명한 사람, 가치관이 분명한 사람, 그리스도를 통해 삶이 변화된 사람이 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1절을 보십시오. 헤롯이 예수 믿는 사람들 중 죽일 대상 몇을 찾았습니다. 그 때 그의 눈에 바로 들어 온 사람이 누구입니까? 야고보입니다. "그래 야고보를 죽이면 내가 유대인에게 정치적 인기를 얻을 수 있겠구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헤롯이란 우리 나라 일제 시대 때 총독과 같은 명칭입니다. 헤롯 대왕(B.C.37-B.C.4)은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둘살 이하의 사내 아이들을 죽인 사람입니다. 두번째 헤롯은 세례요한을 죽인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여기 나오는 헤롯은 헤롯대왕의 손자인 아그립바 1세(Agrippa I, A.D.37-44)입니다. 그는 겉으로는 유대교 의식을 열심히 추종했고 종교적으로 애국자임을 자처한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니까 자신이 그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정치적으로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장기 집권을 보장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순교자들은 핍박자가 핍박의 대상으로 삼을 정도로 확실한 신앙을 소유한 자였습니다.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부활을 믿고 영원한 천국을 믿는 확고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음과도 바꿀 수 없는 분명한 복음적 가치관을 가지고 산 사람입니다. 확실하게 변화된 사람이었습니다.
본래 야고보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성경에 많은 기록이 없으므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사람인가를 충분히 짐작할 만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눅9:51이하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한 고독한 행진을 하시다가 잠시 쉬기 위해 사마리에에 들어 가기 위해 미리 사자를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주민들이 환영하지를 않습니다. 받아 주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을 괄세하는 것입니다. 이 때 야고보가 어떻게 합니까? 괄세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에 불벼락을 내려서 이 마을 사람들 모두를 다 해치워 버립시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별명을 어떻게 부쳐 주었습니까?
막3:17 보아너게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지어 줍니다. 좋게 말하면 열정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성격이 불같은 것입니다. 성급하고 충동적인 것입니다. 욕심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좌우를 차지하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존재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제 예수님을 위해 존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출세 욕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을 전부로 알고 산 사람입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욕심을 체우기에 급급한 사람입니다. 남이 잘 되는 꼴을 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배고픈 것은 참도 배아픈 것은 못참는 사람이었습니다. 경쟁에서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입니다.
사람마다 다 자기의 기질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게 되면 변하게 된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교하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그러나 변화되어야 합니다.
서양의학의 아버지라고 말하는 히포크라테스가 인간의 기질을 네가지로 분류하였습니다. 그것이 꼭맞는 것은 아니지만 참고는 됩니다. 다혈질, 담즘질, 우울질, 점액질입니다. 네 가지 기질을 살펴보면 이런 것입니다.
(1)담즘질의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 같은 사람입니다. 담이 큽니다. 간이 크다는 말입니다. 의지가 강합니다. 독립적입니다. 철저히 계획을 세워 일을 합니다. 용의 주도합니다. 집요합니다. 시작하면 꼭 끝을 보는 사람입니다. 스토커 같은 형질입니다. 성공지향적이고 사역 지향적입니다. 자신의 뜻이 관철되어야 합니다. 목사가 자신의 의견을 들어 주지 않으면 고집이 세다고 합니다. 그런데 단점은 잔인합니다. 화를 내어도 꼭 뒤끝이 있습니다. 한 번 마음 먹으면 끝까지 보복합니다. 독제자들 가운데 많이 있다고 합니다. 자기 주장이 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인기를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
(2)다혈질의 사람이 있습니다.
베드로같은 사람입니다. 갈릴리 호수같은 사람입니다. 종잡을 수 없는 성격입니다. 생기가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합니다. 낙천적 쉽게 마음 들어냅니다. 놀음을 하여도 돈을 다 잃어 버리는 기질입니다. 자기 마음 드러내지 않고는 못 견딥니다. 친구가 많습니다. 단점은 비실제적입니다. 조직적 아니다. 돈키호테형입니다. 화를 잘냅니다. 화를 내고나서 근방 잊어버립니다. 뒤끝이 없다고 합니다. 공부 잘 못합니다. 얼렁 뚱땅합니다. 구석구석까지 공부하지 않습니다. 명문대학은 이 기질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합니다. 머리가 좋은 경우는 이등 정도는 한다고 합니다. 자기 훈련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끝을 못본다고 합니다. 벌려만 놓고 수습을 못합니다.
(3)우울질 기질이 있습니다. 감성이 풍부합니다. 예민합니다. 천재가 많습니다. 철학자, 예술가 많습니다. 이상 주의자이고 완벽주의 자입니다. 찬양 인도자로 세우면 조금만 틀려도 못참습니다. 집요합니다. 골똘이 생각합니다. 사과 떨어지면 다혈질은 주워 먹기에 바쁜데 우울질은 왜 떨어지는가를 생각합니다. 사람을 잘 사귀지 못합니다. 한번 사귀면 끝까지 갑니다. 성실합니다. 어떤 것 결정하면 끝까지합니다. 무모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천재형이 많습니다. 숨어 있는 잠재 능력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점은 우유부단하고, 남의 이야기에 민감하고, 말에 신경을 쓰고, 비관적이어 사람의 단점을 많이 본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안된다고 하고 늘 소망이 없는 말만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온화한 것 같지만 속은 불평과 원망과 한숨 좌절이 가득해 차 있다는 것입니다.
(4)점액질의 기질이 있습니다.
도마같은 사람 조용 냉정 소심합니다. 실제적입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 잘 들습니다. 성실합니다. 욕하면서 참석합니다. 불평불만이 떠나지 않습니다. 교회를 떠날 것 같지만 안 떠납니다. 성실하면서 실제적이라는 것입니다. 단점으로는 의욕적이지 못합니다. 말이 많고 남이 안되는 꼴 보면서 희열을 느낍니다. 찬물을 끼얻기 좋아하고 분위기 썰렁하게 만들면서 희열느낀다는 것입니다. 비관적이기보다는 비판적입니다. 댓가를 치르지 않고 말로만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어떤 사람같습니까? 담즘질과 다혈질이 섞인 사람같습니다. 그런데 그가 변합니다. 주님 닮아 가는 사람이 됩니다. 그의 기질을 주님 앞에 처 복종시켜 단점을 제거하고 장점으로 주를 위해 바친 사람입니다. 순교자란 내 모습 그대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기질이든지 나를 쳐 복족시키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성질은 하나님도 못고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령님께서 고쳐쓰시길 원하십니다.
디엘 무디는 성질을 못고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것이 죄라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것부터 십자가가 시작됩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1)요일3:4-"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요일 3:4)"
죄는 불법입니다. 내법을 지키는 것이 곧 불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 자신의 주장, 자신의 성격, 자신의 습관, 자신의 기질을 고집합니다.
2)약4:17-"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약 4:17)"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는 것 죄-선한 것(13) 선을 행하는 것-하나님의 없는 계획, 주인과 종의 관계(물 가져다 달라 안먹겠다. 신경질 내면 그 사람 않씀) 하나님의 주인으로 안 삶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주인으로 살겠다고 하면 치유나 변화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쓰임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3)롬14:23- 믿음으로 좇지 않는 것은 죄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롬 14:23)
나를 쳐 복종시켜야 합니다. 순교를 꼭 죽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매일 매일 십자가 앞에서 나를 쳐 복종시키십시오. 그것이 오늘 우리 시대의 순교입니다.
2. 한 시대의 순교자는 자신의 가장 고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고귀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생명입니다. 생명보다 귀중한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아무리 귀중한 것이 있다고 하여도 호흡이 멈추면 본인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순교라는 것은 바로 인간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생명을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구원해 주신 주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바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모든 것을 가져야 속이 시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달라졌습니다. 생명을 주님께 드립니다.
과거 야고보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고귀한 것을 드릴 만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얼마나 자기 중심적이고 출세 지향적이었습니까?
그는 시골 어부출신입니다. 베드로와 동업자(눅5:10)였습니다. 그런데 집안이 쾌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세베대인데 마1:19-20절을 보면 그의 아버지가 삯군을 고용할 정도였습니다. 배의 선주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배의 선주 정도 되면 살만큼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치마바람에 센 여인이었습니다. 아주 야심가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마20:20,21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왕되면 좌의정 우의정은 우리 아들에게 달라고 많은 제자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로비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도 야심가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출세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막10:35절 이하를 보십시오. 이것이 단순히 어머니의 생각만은 아니었습니다. 야고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제자들이 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습니까? 41절 보십시오. 분이 여겼습니다.
그러던 그가 이제 변화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을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 충만하여 이제 목숨까지 주를 위해 내어 놓는 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가져야 속이 시원하던 사람이, 모든 사람보다 가장 으뜸이 되어야 기분좋게 잠을 잘 수 있던 사람이 이제 목숨까지 내어 놓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주를 따르는 것이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떻게 하든 주님을 이용하여 출세하기 위한 것이엇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 중심이었습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요청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였습니까?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막 10:38)"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는 자신있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때 주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3-45)"
순교자의 신앙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진정 영접하지 않았을 때는 자기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 살고 섬김을 받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이 땅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삶은 잠깐이고 영원한 천국이 있는 것을 확실히 믿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을 배만 채우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소원 내가 잘되는 것 내가 행복하는 것에 인생을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진정 순교자의 신앙을 갖게 되면 내 소원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나의 소원들어 주어라가 아닙니다. 왜 내 소원 들어 주지 않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내 안에 두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나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담대하게 죽음의 길로 갑니다. 나의 자존심이 상하고 나의 채면이 상하여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 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난다면 과감하게 주를 따르는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는 것은 누구의 소원입니까?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3)"
내 소원이 아닙니다.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순교자적 신앙을 갖지 못하면 교회를 다녀도 여전히 자기 중심적입니다. 나의 성격 나의 상처 남의 환경 붙들고 몸부림 치고 있습니다. 인정받기 위해 살아 갑니다. 누구로부터 무시되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꾸지람을 들으면 두고 두고 가슴에 새기고 복수의 기회만을 노립니다. 어린 아이처럼 스스로 상처를 받고 잘한다 잘한다 인정만 해 주기를 원합니다. 문제는 자신이 아직 변화되지 않아서인데 다른 사람으로부터 늘 상처를 받고 산다고 자신을 합리화하며 자신은 신앙이 좋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향한 열심과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다릅니다. 자기를 향한 열심은 욕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열정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향한 열심은 자기의 뜻에 합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배를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향한 열심 욕심은 자기가 주인입니다. 자기를 향한 욕심을 거룩성을 상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함을 이미 받은 자입니다. 자기를 향한 열심은 욕구 중심이고 과거 중심이고 늘 자기 연민에 빠지고 경험중심이고 현재에 머물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차고 자기 공로를 자랑하고 이웃과 비교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중심이고 미래 중심이고 하나님의 은혜 중심이고 말씀 중심이며 현재를 누리며 미래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은 은혜로 만족하고 이웃에게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것을 드리는데 관심을 갔습니다. 마지막에는 생명까지 드리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철학자로 유명한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의 불행은 "이기주의"에 있다고 말하며 불행의 원인이 되는 논리적 이기주의, 미학적 이기주의, 도덕적 이기주의를 말합니다. 논리적 이기주의는 자기의 판단은 언제나 옳다고 하는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 나의 이론은 항상 옳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미학적 이기주의란 자기 기분, 자기의 느낌, 자기의 감정을 절대화한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이기주의는 자기 자신이 모든 행동의 목적과 중심이 되고 자기에게 유익하면 다 선이고 자기에게 유익하지 않으면 다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영영 구제불능이고 불행에서 살다가 불행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폴 투르니에 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스위스의 유명한 심리학자요 의사입니다. 그는 인간의 삶을 3단계로 간단하게 설명했습니다
첫째가 아동기라고 하는 어린아이 시절이입니다. 이때는 소유를 열망하는 시기라고 합니다. 먹는 것, 가지는 것, 소유만이 행복의 기준입니다. 소유했을 때 웃고 자기 손에서 떠나갈 때 운다고 합니다.
두번째는 청년기가 있습니다. 이때는 경험의 열망하는 시기라고 합니다. 많은 지식을 경험하고 많은 세계를 경험하고 많은 것을 체험하려고 듭니다. 그래서 경험의 열망이 있어서 경험할 수 있을 때 그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경험하지 못할 때에 불행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세 번째는 인격의 열망기라고 합니다. 장년기가 되면 이제는 행복이 소유에 있는 것도 아니고 체험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질없는 것임을 안다고 합니다. '베푸는 것만이 남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유하는 행복이 아니라 주는 행복이 참 행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순교자는 목숨까지 줌으로 행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3. 한 시대의 순교자의 신앙은 죽음으로 더 많은 일을 하는 신앙입니다.
야고보의 순교 사건은 짧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순교한 후 초대 교회는 이제 사도를 다시 뽑지 않습니다. 이제 신앙의 표준이 달라졌습니다. 그래 예수 믿으면 저렇게 되는 거야 그후 12 사도 중 야고보의 동생 요한 만 제외해 놓고 모두 야고보가 갔던 길순교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죽으면 죽음으로 끝나는 사람이 있고 죽으면 죽음으로 살아 있을 때 보다 더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순교자의 삶이 그렇습니다. 순교의 씨를 뿌리면 그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열매가 풍성하게 열리는 것입니다. 칼빈은 죽었습니다. 루터는 죽었습니다. 쯔빙글리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었다고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죽었지만 그들의 교훈과 그들의 삶은 지금도 세계 곧곧에서 많은 영향력을 주며 사람을 변화시키고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겨우 나 하나 신앙으로 끝마치는 생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사람의 자아 형성을 보면 우리가 어떤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인가를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자아 형성을 8단계로 나누는 사람이 있습니다.
1)주관적인 나(1년)-나를 통해 상대방을 이해하는 시기입니다. 이 때는 나 밖에 모릅니다.
2)언어적인 나(3살까지)-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간하는 시기라고 합니다. 상대방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언어를 구사합니다. "싫어 안되 내껏야" 등과 같이 단어 하나로 자기를 표현하는 시기입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아직 언어적인 나 수준입니다.
3)이야기 적인 나(6살까지)-자기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자기의 스토리로 만들어 냅니다. 이 때는 자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거짓말을 많이 합니다. 개념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의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어른 이 되어 뻥을 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야기적이 s나 수준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철야 한번 해놓고 철야가 몸에 배여있다고 말합니다. 철야를 하지 않는 사람 속을 모르겠다고 합니다. 자기 이야기로 상대를 정죄하고 비판합니다. 자기 자식에게도 뻥을 칩니다.
4)구성적인 나(초등학교 시절)-나와 다른 대상이 항상 반대 극을 행해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는 부모를 따랐는데 부모와 자신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구성하기 시작합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가 사탕을 사주면 무조건 좋았는데 이제는 아닙니다. 서론 본론을 만들어 갑니다.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지만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갑니다. 부모님과 관계하여 환경과 관계하여 이야기를 구성해 갑니다.
5)독립적인 나(사춘기)-부모님과 관계없는 이야기. 부모와 관계없는 스토리를 만들어 갑니다. 부모 보다 hot를 좋아 합니다. 그러나 엄마가 좋아하면 싫어 합니다. 자기의 모습에 대해 만족해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나쁘게 대상을 좋게 생각합니다.
6)관계적인 나-나도 좋고 너도 좋고, 당신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 살면 더 좋은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7)생산적인 나-내 안에 너를 너 안에 나를 경험한다고 합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 생산 당신이 나를 위해 생산한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위해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하고, 섬김과 봉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8)역사적인 나-아버지 아들이 아버지가 되는 순간 맞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버지라는 신분을 놓기 싫어 아버지를 아들 자리로 놓아 두면 실패, 아버지의 권세를 아들이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되면 자신은 할아버지가 되어 산 조상의 자리 역사적인 자리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남기는 사람들,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이야기 믿음의 가계를 남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목숨을 버려야 할 정도의 핍박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신앙을 수호하기 어려운 유혹들이 있습니다. 이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순교자적 삶을 살기 이해서는
1. 자아를 쳐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자신의 가장 고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3. 죽음을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죽음 이후에 더 많은 일을 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한 시대의 순교자/행12:1-3/김필곤 목사
한국 최초의 여의사는 누구일까요? 박에스더라는 분입니다.
1876년 정동부근에서 가난하게 사는 김씨의 딸 4형제 가운데 세째로 태어났답니다. 그가 열 살 때 쯤 되었을 때, 아펜젤러가 그곳에 땅과 집을 사서 정동교회와 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가난하던 터라 아펜젤러에게 고용이 되어 일하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아펜젤러의 소개로 이화학당에 입학하게 되었답니다. 당시 이화학당은 스크랜톤 부인에 의해서 막 문을 열었기 때문에 3명의 학생과 함께 배우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이곳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일생을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답니다. 그는 세례를 받고 다메섹 도상의 사울이 바울로 변했듯이 본래의 이름 김점동을 버리고 에스더라는 이름으로 주를 위해 살기로 헌신했다고 합니다. 1895년 2월 에스더는 리버티 공립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그녀의 남편은 농장일을 도우면서,아내의 학업을 도와습니다. 1896년 10월 1일에는 볼티모 여자의과대학(Woman's Medical College of Baltimore)에 입학하였고 마침내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때 나이는 겨우 24세를 넘은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남편인 박유산이 에스더의 졸업을 20여일 앞두고 뇌일혈로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주를 위해 살겠다고 결심하고 갔는데 뜻밖의 일을 당하였습니다. 그에게 미국은 살기 좋은 나라 떠나고 싶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일평생을 바치기로 약속했습니다. 고국에 돌아와 헌신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홀 부인을 도와 광혜여원의 건물을 신축하며, 한국 최초의 간호원 양성소를 개설하였습니다. 그녀는 주님을 위해 가난하고 병든 자를 위해 뜨겁게 일했습니다. 결국 환자를 돌보다 34세 젊은 나이로 폐침윤에 걸려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아펜 젤러 전기 작가인 그리피스(William E.Criffis)는 당시 감리교 의료기관에 일한 사람은 12명이었는데 그 중 5명이 이 땅을 위해 아까운 생명을 바쳤다고 했습니다. 그들 중 박에스더는 한국인 의사로 유일하게 순교자의 숭고한 대열에 끼이는 영광을 차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대마다 자신의 생명을 바쳐 주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시대를 변화시켰고, 자신의 생명을 바쳐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쳤고, 그 시대의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였고, 자신의 생명을 바쳐 하나님의 사랑과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주저없이 순교자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출세나 자신의 편안함과 안락함보다는 어렵고 힘든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주님을 위해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마지막에는 주를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놓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성경에 짧게 나오는 야고보가 그런 순교자 중 12사도로서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야고보의 생과 죽음을 통해 보여주시는 한 시대의 순교자의 신앙이란 어떤 모습인가를 교훈받고자 합니다.
1. 한 시대 순교자는 자아를 쳐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그 사람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 인정할 정도의 변화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속한 시대 속에서 신앙의 푯대가 됩니다. "그래 예수 믿으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해"라는 말을 듣습니다. 순교는 예수 믿는지 믿지 않는지 모를 정도의 신앙인이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분명한 사람, 가치관이 분명한 사람, 그리스도를 통해 삶이 변화된 사람이 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1절을 보십시오. 헤롯이 예수 믿는 사람들 중 죽일 대상 몇을 찾았습니다. 그 때 그의 눈에 바로 들어 온 사람이 누구입니까? 야고보입니다. "그래 야고보를 죽이면 내가 유대인에게 정치적 인기를 얻을 수 있겠구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헤롯이란 우리 나라 일제 시대 때 총독과 같은 명칭입니다. 헤롯 대왕(B.C.37-B.C.4)은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둘살 이하의 사내 아이들을 죽인 사람입니다. 두번째 헤롯은 세례요한을 죽인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여기 나오는 헤롯은 헤롯대왕의 손자인 아그립바 1세(Agrippa I, A.D.37-44)입니다. 그는 겉으로는 유대교 의식을 열심히 추종했고 종교적으로 애국자임을 자처한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니까 자신이 그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정치적으로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장기 집권을 보장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순교자들은 핍박자가 핍박의 대상으로 삼을 정도로 확실한 신앙을 소유한 자였습니다.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부활을 믿고 영원한 천국을 믿는 확고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음과도 바꿀 수 없는 분명한 복음적 가치관을 가지고 산 사람입니다. 확실하게 변화된 사람이었습니다.
본래 야고보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성경에 많은 기록이 없으므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사람인가를 충분히 짐작할 만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눅9:51이하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한 고독한 행진을 하시다가 잠시 쉬기 위해 사마리에에 들어 가기 위해 미리 사자를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주민들이 환영하지를 않습니다. 받아 주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을 괄세하는 것입니다. 이 때 야고보가 어떻게 합니까? 괄세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에 불벼락을 내려서 이 마을 사람들 모두를 다 해치워 버립시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별명을 어떻게 부쳐 주었습니까?
막3:17 보아너게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지어 줍니다. 좋게 말하면 열정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성격이 불같은 것입니다. 성급하고 충동적인 것입니다. 욕심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좌우를 차지하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존재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제 예수님을 위해 존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출세 욕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을 전부로 알고 산 사람입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욕심을 체우기에 급급한 사람입니다. 남이 잘 되는 꼴을 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배고픈 것은 참도 배아픈 것은 못참는 사람이었습니다. 경쟁에서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입니다.
사람마다 다 자기의 기질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게 되면 변하게 된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교하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그러나 변화되어야 합니다.
서양의학의 아버지라고 말하는 히포크라테스가 인간의 기질을 네가지로 분류하였습니다. 그것이 꼭맞는 것은 아니지만 참고는 됩니다. 다혈질, 담즘질, 우울질, 점액질입니다. 네 가지 기질을 살펴보면 이런 것입니다.
(1)담즘질의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 같은 사람입니다. 담이 큽니다. 간이 크다는 말입니다. 의지가 강합니다. 독립적입니다. 철저히 계획을 세워 일을 합니다. 용의 주도합니다. 집요합니다. 시작하면 꼭 끝을 보는 사람입니다. 스토커 같은 형질입니다. 성공지향적이고 사역 지향적입니다. 자신의 뜻이 관철되어야 합니다. 목사가 자신의 의견을 들어 주지 않으면 고집이 세다고 합니다. 그런데 단점은 잔인합니다. 화를 내어도 꼭 뒤끝이 있습니다. 한 번 마음 먹으면 끝까지 보복합니다. 독제자들 가운데 많이 있다고 합니다. 자기 주장이 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인기를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
(2)다혈질의 사람이 있습니다.
베드로같은 사람입니다. 갈릴리 호수같은 사람입니다. 종잡을 수 없는 성격입니다. 생기가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합니다. 낙천적 쉽게 마음 들어냅니다. 놀음을 하여도 돈을 다 잃어 버리는 기질입니다. 자기 마음 드러내지 않고는 못 견딥니다. 친구가 많습니다. 단점은 비실제적입니다. 조직적 아니다. 돈키호테형입니다. 화를 잘냅니다. 화를 내고나서 근방 잊어버립니다. 뒤끝이 없다고 합니다. 공부 잘 못합니다. 얼렁 뚱땅합니다. 구석구석까지 공부하지 않습니다. 명문대학은 이 기질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합니다. 머리가 좋은 경우는 이등 정도는 한다고 합니다. 자기 훈련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끝을 못본다고 합니다. 벌려만 놓고 수습을 못합니다.
(3)우울질 기질이 있습니다. 감성이 풍부합니다. 예민합니다. 천재가 많습니다. 철학자, 예술가 많습니다. 이상 주의자이고 완벽주의 자입니다. 찬양 인도자로 세우면 조금만 틀려도 못참습니다. 집요합니다. 골똘이 생각합니다. 사과 떨어지면 다혈질은 주워 먹기에 바쁜데 우울질은 왜 떨어지는가를 생각합니다. 사람을 잘 사귀지 못합니다. 한번 사귀면 끝까지 갑니다. 성실합니다. 어떤 것 결정하면 끝까지합니다. 무모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천재형이 많습니다. 숨어 있는 잠재 능력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점은 우유부단하고, 남의 이야기에 민감하고, 말에 신경을 쓰고, 비관적이어 사람의 단점을 많이 본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안된다고 하고 늘 소망이 없는 말만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온화한 것 같지만 속은 불평과 원망과 한숨 좌절이 가득해 차 있다는 것입니다.
(4)점액질의 기질이 있습니다.
도마같은 사람 조용 냉정 소심합니다. 실제적입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 잘 들습니다. 성실합니다. 욕하면서 참석합니다. 불평불만이 떠나지 않습니다. 교회를 떠날 것 같지만 안 떠납니다. 성실하면서 실제적이라는 것입니다. 단점으로는 의욕적이지 못합니다. 말이 많고 남이 안되는 꼴 보면서 희열을 느낍니다. 찬물을 끼얻기 좋아하고 분위기 썰렁하게 만들면서 희열느낀다는 것입니다. 비관적이기보다는 비판적입니다. 댓가를 치르지 않고 말로만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어떤 사람같습니까? 담즘질과 다혈질이 섞인 사람같습니다. 그런데 그가 변합니다. 주님 닮아 가는 사람이 됩니다. 그의 기질을 주님 앞에 처 복종시켜 단점을 제거하고 장점으로 주를 위해 바친 사람입니다. 순교자란 내 모습 그대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기질이든지 나를 쳐 복족시키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성질은 하나님도 못고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령님께서 고쳐쓰시길 원하십니다.
디엘 무디는 성질을 못고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것이 죄라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것부터 십자가가 시작됩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1)요일3:4-"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요일 3:4)"
죄는 불법입니다. 내법을 지키는 것이 곧 불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 자신의 주장, 자신의 성격, 자신의 습관, 자신의 기질을 고집합니다.
2)약4:17-"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약 4:17)"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는 것 죄-선한 것(13) 선을 행하는 것-하나님의 없는 계획, 주인과 종의 관계(물 가져다 달라 안먹겠다. 신경질 내면 그 사람 않씀) 하나님의 주인으로 안 삶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주인으로 살겠다고 하면 치유나 변화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쓰임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3)롬14:23- 믿음으로 좇지 않는 것은 죄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롬 14:23)
나를 쳐 복종시켜야 합니다. 순교를 꼭 죽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매일 매일 십자가 앞에서 나를 쳐 복종시키십시오. 그것이 오늘 우리 시대의 순교입니다.
2. 한 시대의 순교자는 자신의 가장 고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고귀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생명입니다. 생명보다 귀중한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아무리 귀중한 것이 있다고 하여도 호흡이 멈추면 본인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순교라는 것은 바로 인간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생명을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구원해 주신 주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바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모든 것을 가져야 속이 시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달라졌습니다. 생명을 주님께 드립니다.
과거 야고보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고귀한 것을 드릴 만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얼마나 자기 중심적이고 출세 지향적이었습니까?
그는 시골 어부출신입니다. 베드로와 동업자(눅5:10)였습니다. 그런데 집안이 쾌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세베대인데 마1:19-20절을 보면 그의 아버지가 삯군을 고용할 정도였습니다. 배의 선주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배의 선주 정도 되면 살만큼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치마바람에 센 여인이었습니다. 아주 야심가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마20:20,21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왕되면 좌의정 우의정은 우리 아들에게 달라고 많은 제자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로비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도 야심가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출세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막10:35절 이하를 보십시오. 이것이 단순히 어머니의 생각만은 아니었습니다. 야고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제자들이 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습니까? 41절 보십시오. 분이 여겼습니다.
그러던 그가 이제 변화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을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 충만하여 이제 목숨까지 주를 위해 내어 놓는 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가져야 속이 시원하던 사람이, 모든 사람보다 가장 으뜸이 되어야 기분좋게 잠을 잘 수 있던 사람이 이제 목숨까지 내어 놓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주를 따르는 것이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떻게 하든 주님을 이용하여 출세하기 위한 것이엇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 중심이었습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요청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였습니까?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막 10:38)"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는 자신있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때 주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3-45)"
순교자의 신앙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진정 영접하지 않았을 때는 자기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 살고 섬김을 받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이 땅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삶은 잠깐이고 영원한 천국이 있는 것을 확실히 믿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을 배만 채우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소원 내가 잘되는 것 내가 행복하는 것에 인생을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진정 순교자의 신앙을 갖게 되면 내 소원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나의 소원들어 주어라가 아닙니다. 왜 내 소원 들어 주지 않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내 안에 두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나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담대하게 죽음의 길로 갑니다. 나의 자존심이 상하고 나의 채면이 상하여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 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난다면 과감하게 주를 따르는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는 것은 누구의 소원입니까?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3)"
내 소원이 아닙니다.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순교자적 신앙을 갖지 못하면 교회를 다녀도 여전히 자기 중심적입니다. 나의 성격 나의 상처 남의 환경 붙들고 몸부림 치고 있습니다. 인정받기 위해 살아 갑니다. 누구로부터 무시되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꾸지람을 들으면 두고 두고 가슴에 새기고 복수의 기회만을 노립니다. 어린 아이처럼 스스로 상처를 받고 잘한다 잘한다 인정만 해 주기를 원합니다. 문제는 자신이 아직 변화되지 않아서인데 다른 사람으로부터 늘 상처를 받고 산다고 자신을 합리화하며 자신은 신앙이 좋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향한 열심과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다릅니다. 자기를 향한 열심은 욕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열정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향한 열심은 자기의 뜻에 합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배를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향한 열심 욕심은 자기가 주인입니다. 자기를 향한 욕심을 거룩성을 상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함을 이미 받은 자입니다. 자기를 향한 열심은 욕구 중심이고 과거 중심이고 늘 자기 연민에 빠지고 경험중심이고 현재에 머물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차고 자기 공로를 자랑하고 이웃과 비교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중심이고 미래 중심이고 하나님의 은혜 중심이고 말씀 중심이며 현재를 누리며 미래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은 은혜로 만족하고 이웃에게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것을 드리는데 관심을 갔습니다. 마지막에는 생명까지 드리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철학자로 유명한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의 불행은 "이기주의"에 있다고 말하며 불행의 원인이 되는 논리적 이기주의, 미학적 이기주의, 도덕적 이기주의를 말합니다. 논리적 이기주의는 자기의 판단은 언제나 옳다고 하는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 나의 이론은 항상 옳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미학적 이기주의란 자기 기분, 자기의 느낌, 자기의 감정을 절대화한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이기주의는 자기 자신이 모든 행동의 목적과 중심이 되고 자기에게 유익하면 다 선이고 자기에게 유익하지 않으면 다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영영 구제불능이고 불행에서 살다가 불행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폴 투르니에 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스위스의 유명한 심리학자요 의사입니다. 그는 인간의 삶을 3단계로 간단하게 설명했습니다
첫째가 아동기라고 하는 어린아이 시절이입니다. 이때는 소유를 열망하는 시기라고 합니다. 먹는 것, 가지는 것, 소유만이 행복의 기준입니다. 소유했을 때 웃고 자기 손에서 떠나갈 때 운다고 합니다.
두번째는 청년기가 있습니다. 이때는 경험의 열망하는 시기라고 합니다. 많은 지식을 경험하고 많은 세계를 경험하고 많은 것을 체험하려고 듭니다. 그래서 경험의 열망이 있어서 경험할 수 있을 때 그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경험하지 못할 때에 불행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세 번째는 인격의 열망기라고 합니다. 장년기가 되면 이제는 행복이 소유에 있는 것도 아니고 체험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질없는 것임을 안다고 합니다. '베푸는 것만이 남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유하는 행복이 아니라 주는 행복이 참 행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순교자는 목숨까지 줌으로 행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3. 한 시대의 순교자의 신앙은 죽음으로 더 많은 일을 하는 신앙입니다.
야고보의 순교 사건은 짧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순교한 후 초대 교회는 이제 사도를 다시 뽑지 않습니다. 이제 신앙의 표준이 달라졌습니다. 그래 예수 믿으면 저렇게 되는 거야 그후 12 사도 중 야고보의 동생 요한 만 제외해 놓고 모두 야고보가 갔던 길순교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죽으면 죽음으로 끝나는 사람이 있고 죽으면 죽음으로 살아 있을 때 보다 더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순교자의 삶이 그렇습니다. 순교의 씨를 뿌리면 그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열매가 풍성하게 열리는 것입니다. 칼빈은 죽었습니다. 루터는 죽었습니다. 쯔빙글리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었다고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죽었지만 그들의 교훈과 그들의 삶은 지금도 세계 곧곧에서 많은 영향력을 주며 사람을 변화시키고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겨우 나 하나 신앙으로 끝마치는 생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사람의 자아 형성을 보면 우리가 어떤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인가를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자아 형성을 8단계로 나누는 사람이 있습니다.
1)주관적인 나(1년)-나를 통해 상대방을 이해하는 시기입니다. 이 때는 나 밖에 모릅니다.
2)언어적인 나(3살까지)-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간하는 시기라고 합니다. 상대방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언어를 구사합니다. "싫어 안되 내껏야" 등과 같이 단어 하나로 자기를 표현하는 시기입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아직 언어적인 나 수준입니다.
3)이야기 적인 나(6살까지)-자기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자기의 스토리로 만들어 냅니다. 이 때는 자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거짓말을 많이 합니다. 개념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의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어른 이 되어 뻥을 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야기적이 s나 수준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철야 한번 해놓고 철야가 몸에 배여있다고 말합니다. 철야를 하지 않는 사람 속을 모르겠다고 합니다. 자기 이야기로 상대를 정죄하고 비판합니다. 자기 자식에게도 뻥을 칩니다.
4)구성적인 나(초등학교 시절)-나와 다른 대상이 항상 반대 극을 행해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는 부모를 따랐는데 부모와 자신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구성하기 시작합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가 사탕을 사주면 무조건 좋았는데 이제는 아닙니다. 서론 본론을 만들어 갑니다.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지만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갑니다. 부모님과 관계하여 환경과 관계하여 이야기를 구성해 갑니다.
5)독립적인 나(사춘기)-부모님과 관계없는 이야기. 부모와 관계없는 스토리를 만들어 갑니다. 부모 보다 hot를 좋아 합니다. 그러나 엄마가 좋아하면 싫어 합니다. 자기의 모습에 대해 만족해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나쁘게 대상을 좋게 생각합니다.
6)관계적인 나-나도 좋고 너도 좋고, 당신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 살면 더 좋은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7)생산적인 나-내 안에 너를 너 안에 나를 경험한다고 합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 생산 당신이 나를 위해 생산한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위해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하고, 섬김과 봉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8)역사적인 나-아버지 아들이 아버지가 되는 순간 맞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버지라는 신분을 놓기 싫어 아버지를 아들 자리로 놓아 두면 실패, 아버지의 권세를 아들이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되면 자신은 할아버지가 되어 산 조상의 자리 역사적인 자리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남기는 사람들,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이야기 믿음의 가계를 남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목숨을 버려야 할 정도의 핍박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신앙을 수호하기 어려운 유혹들이 있습니다. 이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순교자적 삶을 살기 이해서는
1. 자아를 쳐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자신의 가장 고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3. 죽음을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죽음 이후에 더 많은 일을 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한 시대의 순교자/행12:1-3/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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