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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마가복음 조용기 목사............... 조회 수 1728 추천 수 0 2009.12.14 16:4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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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5:12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8. 3. 23. 부활주일설교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더불어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는 제목으로 은혜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와서 고소할 때 빌라도가 난처했습니다. 그 아내가 밤에 꿈을 꾸었는데 꿈에 예수님 때문에 애를 많이 썼다고 저 의인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쪽지를 보내 왔습니다. 그러니 이 발라도가 아내의 쪽지를 받고 지금 예수님을 심판해야 되는데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요. 아무리 심문해 봐도 실제로 예수님께는 죄가 발견되지 아니하고 저들이 시기와 질투로 예수를 넘겨준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군중들에게 심판을 맡기기로 하고 그는 군중들에게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와서 고소할 때 빌라도가 군중 앞에 서서 한 말이 바로 그 말인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우리가 이 말을 무심히 듣고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동일한 질문을 지구상 모든 사람에게 던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너희는 예수를 어떻게 하려느냐?" 오늘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묻는 질문도 그 질문인 것입니다. "너희는 예수를 어떻게 하려느냐?"
이 땅에 살 동안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 우리의 영원한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을 무심하게 지나칠 수가 없습니까?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삶의 기록이 보통 사람과 같지 않기 때문에 무관심하게 넘어갈 수가 없는 분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본론>
1. 예수님에 대한 성경적 예언
첫째로, 예수님에 대한 성경적인 예언 때문에 우리는 무관심하게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아버지를 가진 남자의 후손인데 성경에는 여인의 후손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관심을 안 기울일 수 없습니다. 너나, 나나 다 같이 아버지의 자식이면 별도리 없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다 같은 사람은 사람인데 여자의 후손 즉, 아버지가 없이 태어난 분이라는 것은 관심을 안 기울일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세기에 이미 여자의 후손이 와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겠다. 십자가에 고통당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을 안 기울이려고 해도 그런 분이 오셨으니 그 분을 우리가 믿을까 믿지 말까 결정을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7장 14절에는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것도 우리가 관심밖에 둘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을 정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바이오 테크닉을 통해서 유전자 조작을 해서 그런 일이 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실제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가 결혼하지 않고 스스로 잉태했다고 하니 이 문제를 우리가 소홀이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여느 시골마을에 처녀가 잉태해도 할 말이 있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 성경에 처녀가 잉태했다고 말하는데 우리가 할 말을 안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을 것이냐, 안 믿을 것이냐. 인정할 것이냐, 인정 안할 것이냐. 반드시 대답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실상은 이사야 9장 6절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나라를 다스리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정말 우리는 난처한 처지에 처했습니다. 빌라도가 어찌하려 하는 것처럼 우리도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이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 어린 아기와 그 아들의 어깨에는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가 매어졌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기묘한 역사를 하는 Wonderful한 분이라. 모사라. 그는 온갖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는 어드바이스를 주는 카운슬러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어린 아기가 전능한 하나님이란 이름을 가지고 나오신 것입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라고 이름을 가지고 나오신 것입니다. 평강의 왕이라. 가는 곳마다 평화를 가져오는 왕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람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를 믿어야 되겠습니까? 안 믿어야 되겠습니까? 참이라고 해야 되겠습니까? 거짓말이라고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뜻을 표하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사건에 부딪힌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은 인간의 대속물이 되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1절로 6절 우리가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야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런 예언을 가지고 태어나신 분을 우리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 태어나기 6백년 전에 이사야는 예수님 당하실 것을 소소난간이 설명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것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다고 한 대로 나사렛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목수의 양아들이 되어서 일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평생을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고 질고를 아는 사람이었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은 말하기를 바로 그가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고 채찍에 맞았으며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고난당했었으며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하고 관계를 짓습니다. 나는 모르겠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그분이 너 때문에 질고를 지고 고통을 당했으며 너 때문에 고통과 괴로움과 죽음의 고난을 당했다고 말하는데 여러분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이 사람을 뭐라고 합니까? 이 사람에 대해서 어찌하겠습니까? 믿겠습니까? 안 믿겠습니까? 버리겠습니까? 받아들이겠습니까? 결정을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립의 위치에 서기를 원치 않고 결정을 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 네가 어찌할 것이냐?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당해야 될 난처한 입장인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분주하고 고개를 돌려 버립니다. 그런다고 해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번 났으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고 난 다음에는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네가 이 예수에 대해서 살아있을 동안에 어떻게 결정을 했느냐? 반드시 질문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있을 동안에 우리가 대답을 안 하면 죽어서 주님 앞에 서서 대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평생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죽음의 저 건너편에서는 대답 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인생살이에 중요한 결정을 해야 될 것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선택해야 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예수를 어떻게 할 것이냐? 그는 비상하게 태어났고, 비상하게 살았고, 그 삶이 바로 내 때문에 오셨다고 하는데 내가 모른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2. 예수님의 사명선언
둘째로, 우리 예수님의 사명선언을 보아서 그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마태복음 3장 16절로 17절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큰일 났습니다. 하늘에서 뇌성 벽력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기뻐하는 자라고 했는데 우리는 이 사람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도 사랑하고 기뻐한다고 말해야 되겠습니까? 모른다고 말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랑하고 기뻐한다는데 우리가 모른다고 외면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보낸 사람인데 우리가 문전박대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환영하든지 문전박대하던지 우리가 결정을 내려야 될 것이지 중간일수는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 자신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요한복음 4장 25절로 26절에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수가성 우물가에서 죄 많은 여자가 물 길러 왔을 때 주님이 그와 대화를 하셨습니다. 나중에 대화에 궁지에 몰리니까 이 수가성 여인이 말하기를 "메시야라는 분이 오시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임이라." 그때 예수님이 "내가 바로 그 메시야"라고 말했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결정을 해야 되었습니다. 이를 거짓말쟁이로 인정할 것이냐. 정말 메시야로 받아들일 것이냐. 난처했습니다. 어떻게 하랴. 이 분이 나를 만나서 자기가 메시야라고 말하는데 내가 이 분을 메시야로 인정할 것이냐. 아니할 것이냐.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은 결정을 내려야 되었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나서 그의 생애가 완전히 변화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 재끼고 여섯째 오다가다가 만난 남자하고 살고 있는 탕녀였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난 다음 그는 순식간에 변화되어 사마리아성에 들어가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전도하는 뜨거운 전도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해서 우리 생애 문제가 크게 좌우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로 18절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라"
아버지와 아들은 동등입니다. 아버지가 누리는 것을 아들이 누릴 수 있습니다. 옛날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사진 한 장이 있지 않습니까? 케네디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장관들을 모아놓고 의논을 하는데 그 책상 밑에 아들 존이 들어가서 아버지 바지가랑이를 잡아당기는 사진이 나왔습니다. 누가 감히 한나라를 운영하는 대통령이 사무실에서 중대한 회의를 하는데 그 책상 밑에 들어가서 아버지의 바지가랑이를 잡아 당길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들은 할 수 있습니다. 왜, 아들과 아버지는 동등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사이는 세월이 이상히 되어서 강아지도 우리 아들이라 하고 딸이라고 하고 고양이도 우리 아들이고 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동등하지 않는데 어떻게 아들, 딸이 됩니까? 안되지요. 사람은 사람이고, 동물은 동물이니까 안되지요. 그러나 다 같은 사람이라도 부모, 자식 간의 관계와 부모와 이웃 간의 관계는 다른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동등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항상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은 것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유일한 야훼 한 분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그 하나님이 내 친아버지요 나는 그의 보내신 아들이라고 말하니까 네가 어찌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동등하게 취하느냐? 도저히 유대인들이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나는 하나님 속에 있고 하나님은 내 안에 있고 하나님과 나는 하나고 하나님은 내 아버지고, 나는 하나님과 동등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결사적으로 죽이려고 달라 들었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분을 보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동등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했습니다. 장님의 눈을 뜨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절름발이와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파도를 잠잠케 하고,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고 12바구니 남게 하고, 죽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상여를 중지시키고 관에서 일으켜서 살려내고, 나사로가 무덤에 들어 간지 나흘 만에 썩은 냄새가 나는데도 불러내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난 다음에 내가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말하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니 이분에 대해서 어떻게 결정해야 되겠습니까?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에 대한 열매가 있는데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요사이 소위 이단사설들은 말만 떠벌렸지 행동이 없는 것을 보고 우리는 거짓말인 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통일이 아닙니다. 이분은 살아있을 때 말하기를 "내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다."고 말했었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죽었다가 살아난다고 말하고 죽은 이단들이 있는데 죽고 난 다음 안살아 났어요. 예수님도 죽었다가 살아나지 않았었으면 천하가 아는 사건인데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날로써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 17절로 19절 우리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아예 공공연하게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제자들이 눈이 시퍼렇게 보고 귀가 쫑긋하고 듣는 앞에서 내가 삼일 만에 살아난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한대로 대제사장, 바리새교인, 사두개교인, 로마 사람들에게 잡혀서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무덤에 들어갔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었습니다. 이분에 대해서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주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내 때문에 우리 때문에 그랬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33절로 34절에도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공공연하게 주님께서 살아나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우리가 모른 체하고 고개를 돌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적어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두고 보자. 죽고 난 다음에 무덤에서 과연 살아나는지 두고 보자고는 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3.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증언
셋째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증언이 있고 증거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직접 본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는다고 말한 것을 들었고 직접 그 들 앞에서 예수님이 잡히는 것을 보고 다 도망을 쳤고 십자가에 예수님이 못 박혀 매달려 있는 것을 그들 눈으로 똑똑히 보고 좌절하고 절망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을 로마에서 구원해 줄줄 믿었는데 그 꿈이 다 사라지고 제자들은 낙담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해 나타나셨으니까 그들이 쉽게 믿을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이 죽는 것을 분명히 보았는데 환영을 보고서 예수님이 살아났다고 주장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살아나서 거듭거듭 만나고 손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게 하시고 같이 식사하시고 그리고 식탁을 준비해서 대접해 주시고 그런 가운데 부인 할래야 부인할 수 없고 의심 할래야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오늘날 예수님을 꿈에 보았다. 환상을 보았다는 것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중요한 것은 제자들은 직접 예수님을 3년 반 동안 따라다니며 희망을 가지고 재산 다 버리고, 가족 다 버리고 청춘을 맡겨서 따라 왔는데 예수님이 저들을 떠나서 죽는 것을 눈으로 보았고 가장 절망과 좌절을 맛보았고 예수님이 죽은 것을 친히 본 그들에게 예수님이 직접 살아서 나타나셨으니 그들에게는 기막힌 충격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한사람도 남김없이 다 순교했습니다. 목숨을 바쳤다는 말인 것입니다. 집단 히스테리 같으면 히스테리이기 때문에 열두제자가 한사람도 빠짐없이 안살아난 예수를 살아났다고 해서 죽을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보고 체험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목숨을 내놓은 것입니다. 이것을 보게 될 때 그리스도가 살아났다는 증거는 너무나 뚜렷한 것입니다. 살아난 역사를 보면 예수님이 무덤에서 제일 먼저 보여진 것은 막달라 마리아였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9절에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자 제자들이 예수님 몸에 기름을 붓기 위해서 갔는데 이른 아침에 천사들을 와서 돌문을 옮겨놓고 예수님 부활하셨다고 말했는데 무덤에 들어가 보니 옷은 있고 예수님은 온데 간데 없었습니다. 여제자들이 이것을 보고하기 위해서 뛰어 나갔는데 막달라 마리아는 혼자 앉아 울고 있는데 예수님이 뒤에 나타나서 "마리아여" 돌아보니 예수님이었었습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마리아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루살렘에서 낙심하고 좌절해서 이제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나 짓겠다고 시골로 내려가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 13절로 16절에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그들이 여관에 도착해서 날이 저물매 강제로 여관에 같이 머물자고 모시고 들어가서 여관의 식탁에서 저녁식사를 하려고 떡을 내놓는데 예수님이 떡을 들어 축사하는데 눈이 열리고 보니까 예수였었습니다. 예수님 인줄 알고 놀라니까 공기 중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도로 돌이켜서 예루살렘으로 헐레벌떡 뛰어온 것입니다. 오니까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에게 나타났다고 말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 33절로 34절에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고린도전서 15장 5절에도 게바에게 보이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나 같으면 게바에게 안보이겠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안나스와 가야바의 뜰에서 신문을 받고 채찍을 맞을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번 부인하고, 두 번 부인하고, 세 번째는 저주를 하고 맹세를 해서 가로되 나는 저를 도무지 모른다고 배반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난 다음 제일 먼저 제자들 중에 찾은 것이 이 베드로 시몬 즉 게바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얼마나 사랑이 큰 것을 볼 수 있잖아요. 당신을 가장 고통스러울 때 배반하고 보통 배반한 것이 아니라 저주하고 맹세하고 가로되 나는 저를 두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한 그 제자를 주님께서 제일 먼저 찾아가서 위로해 주었으니 기가 막힌 일인 것입니다. 아마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얼굴도 들지 못하고 꿇어 안지도, 주저앉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베드로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베드로가 나중에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바로 돌아가셨지만 나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사람이라 바로 죽을 자신이 없다. 자격이 없다. 나를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달라고 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바로 돌아가셨지만 베드로는 거꾸로 못 박혔다고 전설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한 주일이 지나고 난 다음 주일날 제자들이 모였는데 주님께서 열 제자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 38절로 43절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예수님이 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은 몸과 뼈를 가졌으나 부활의 몸을 가지고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 나중에 우리가 주님 강림하실 때는 부활의 몸을 얻는데 부활의 몸은 우리의 현재 몸과 같은 형태지만 그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번개같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그 몸인 것입니다. 죽지 않고 늙지 않고 더럽지 않은 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몸을 가지고 나타난 것입니다. 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부활의 몸을 가지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몸으로 먹으셨습니다. 잡수셨습니다. 잡수셨을 수도 있고 안 잡수실 수도 있고 우리 나중에 천당에 가면 먹어도 좋고, 안 먹어도 좋고, 마셔도 좋고 안 마셔도 좋은 것입니다. 그렇게 현실과 같은 환경같이 보이지만 현실을 초월한 위대한 삶을 우리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도마는 그때 다른데 나갔다가 돌아와서 하는 말이 웃기는 소리 하네. 정신 나간 여자들 말 듣고서 예수님이 살아났다고 주장을 하느냐. 너희들 다 잘못되어서 환영을 본 것이다. 나는 그가 오면은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고 못자국을 만져보고 믿겠다고 큰소리 하고 불신앙 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20장 26절로 28절에 보면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기절초풍을 했습니다. 도마가 그 말하고 난 다음에 여드레 지나고 난 다음 제자들하고 같이 있는데 예수님이 갑자가 나타나셨습니다. 문들이 다 닫혔는데 그냥 문을 뚫고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도마 앞에 서서 "내 손 못자국에 손을 넣고 보아라.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 봐라. 그리고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너무 황당하고 너무 놀라고 너무 죄송스럽고 기가 막혀서 아주 강아지가 놀래서 꼬리를 뱃속으로 집어넣는 것처럼 꿇어 앉아 가지고서 손을 비비고서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의 주인이시여."라고 말한 것입니다. "도마여 네가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이 있다. "도마는 그 체험을 하고 난 다음에 장장 수천리를 걸어서 팔레스타인에서 인도까지 와서 마드라스까지 와서 복음을 증거 하다가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저는 인도 마드라스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 도마의 순교지에 가 보았었습니다. 얼마나 주님에 대한 신념이 확실했는지 그는 먼 인도까지 와서 마드라스에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을 갈릴리 해변에서 만난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4절로 6절에 보면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지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갈릴리에 내려가서 이제 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계시지 않고 제자들은 어부생활을 떠난 지가 3년이나 되고 언제 예수님이 나타날지 언제 안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막연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가 베드로가 "나는 더 못견딘다. 나는 고기 잡으러 간다." 옛날 그물을 다시 깁고 옛날 배를 끄집어내어서 고기 잡으러 나갔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져 놓아도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아침 안개가 뿌옇게 해변을 가렸는데 어떤 분이 있어서 "얘들아 고기가 있느냐?" "없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니까 많이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러니 요한이 "주님이시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옷을 걸쳐 입고 물속에 뛰어 들어갔었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빚이 있으니까 그냥 예수님 만날 얼굴이 없거든. 벼룩이도 낯짝이 있다고 어떻게 예수님을 그냥 볼 수가 있습니까? 자기가 좀 고통을 당해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지. 그래서 찬 물속에 들어가서 헤엄을 치고 나왔습니다. 그것 보면 베드로가 마음이 순진하긴 순진한 분이에요. 잘 배반하기도 하고, 잘 회개하기도 하고 용서를 빌기도 하고 노하기도 잘하고 그는 당당하게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미안하고 죄송스러워서 어디 좀 고통이라도 당해서 동정을 받을까 싶어서 물속에 들어가서 헤엄치고 물을 쭈루룩 흘리면서 생쥐같이 되어서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미 불을 예비해 놓고 떡과 고기를 구워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제자들에게 떡을 주고 고기를 주면서 먹으라고 하니까 베드로가 받아서 먹을 수가 있어요? 모래알 같은데.. 주님만 쳐다보고 먹는 시늉만 하고 못 먹고 있으니까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사 "베드로야 가서 네가 잡은 고기를 좀 가져 오너라." "예~ 아이고 나 살았다." 그냥 뛰어가서 그냥 지금 잡은 물고기를 손에 쥐고 오니까 좀 마음이 살만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 제자들을 먹이게 하시고 난 다음에 베드로를 재생시킨 것입니다. 부활시킨 것입니다. "베드로야 이 모든 사람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 양을 쳐라." 또 잠시 후에 "베드로야 네가 이 모든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 사랑하나이다." "내 양을 먹이라." 세 번째 또 주님께서 "베드로야 네가 나를 이 모든 사람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겁이 덜컥 났습니다. 왜 옛날에도 사랑한다고 했다가 달아났으니까.. '아~ 또 내가 배반할 것을 미리 아시고 이렇게 물으시는구나.'하고 너무나 놀라고 자기가 자신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니 나는 몰라요. 나는 자신이 없어요. 지금 사랑한다 해놓고 언제 또 도망칠지 내가 알 수가 없으니까 나는 몰라요." 이게 베드로요. 이것이 바로 여러분과 내 형상인 것입니다. 우리도 입으로는 큰소리하면서 돌아서면 다른 말 하거든. 사람은 갈대와 같아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결정대로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베드로가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세 번째 말할 때는 말을 해놓고도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주님을 사랑한줄 주님이 아시지 나는 모릅니다." "네 양을 먹이라." 주님은 세 번 부인한 그에게 세 번 긍정적으로 말하게 하시고 다시 양을 먹이는 고난을 주셔서 베드로로 하여금 낙심하지 말고 다시 복권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큰 사랑을 가지고 우리를 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두번 넘어졌다고 발길로 차서 던져 버릴 주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끝까지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긍휼이 여기사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감격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들이 갈릴리 산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지상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6절로 20절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에게 제자들이 나오니까 갈릴리 산에서 최후의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감람산에서 베다니 부근에서 승천하셨습니다. 그 때 모든 예수님을 아는 사람을 다 불러 모았으니 한 5백여 명이 일시에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50절로 51절에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사도행전 1장 3절에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 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렇게 숱한 예수님의 살아계신 증거를 무시할 수 있습니까? 오늘 재판할 때라도 한 두 증인이 있으면 그 증인으로 말미암아 재판이 이기고 지는 것입니다. 여기 한 두 증인이 아닙니다. 정말로 수백 명의 증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직접 듣고 보고 만지고 함께 식사를 하고 체험한 것입니다. 이 예수에 대해서 우리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런 일을 듣고도 보고도 모른다고 말하겠습니까? 우리가 결정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군중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할까?" 여러분, 여러분의 예수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구주로 믿든지 안 믿든지 여러분의 결정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분의 영원의 문제가 걸린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고 모시고 예수님께 일생을 내어 놓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진 처형을 다 당했지요. 그 가운데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고 안드레는 십자가에 줄로 매달려 죽임을 당했는데, 그가 달린 십자가는 X자(字) 형이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목 베여 죽임을 당했고, 요한은 붙잡혀 끓는 기름 가마에 넣어졌지만 기적적으로 살아 나와 밧모섬으로 귀양 보냈습니다. 거기서 그는 요한계시록을 쓰며 온갖 시련을 겪다가 죽어간 살아 있는 순교자였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에서 전도하다가 기둥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고, 바돌로매는 몸의 가죽을 벗기는 형벌 가운데 순교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전도하다가 창에 맞아 죽었고, 마태는 에티오피아에서 전도하다가 순교 당했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 죽임을 당했고, 맛디아는 예루살렘에서 돌팔매를 당하다가 목 베임을 당했고,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도하며 순교하였고, 누가는 헬라에서 감람나무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칼에 목이 떨어지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렇게 처참한 순교를 당하면서까지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증거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직접 목도했기 때문에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예수님 말씀하기를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으면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산다. 그러므로 죽음이 겁나지 않았기 때문에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전하고 타협하지 않고 순교를 당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예수를 구주로 모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이 예수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언젠가 석가모니 뼈가 발견되었다고 하여 인도를 비롯한 불교 국가에서는 한동안 떠들썩했습니다. 석가모니의 뼈들은 잘 진열되어 수백만 인도 사람들의 경의 속에 시가행진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뼈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한 선교사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옆에 있던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뼈가 하나라도 발견됐다는 뉴스가 보도되면, 저들과는 정 반대로 아마도 기독교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거야." 왜 그렇습니까? 기독교는 죽은 자를 믿는 것이 아니요 부활하시어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뼈가 나오면 우리는 절단강산이 납니다. 순복음교회도 문 닫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교회 오는 빨간 가방 다 납입하고 남선교회 여선교회 다 해산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살아난 예수님을 믿고 있지 죽은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른 종교지도자는 뼛조각만 발견해도 성스러운 뼛조각을 발견했다고 춤추고 야단법석을 하지만 우리는 제발 뼛조각을 발견하면 큰일 납니다. 안 발견해야지요. 또 발견할 수도 없고요. 예수님의 무덤은 비었습니다. 부활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살아있는 소망이요, 죽은 소망이 아닙니다.

<결론>
이와 같은 기록을 가지신 이 예수를 우리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냥 고개를 돌리고 지나칠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믿든지 반대하든지 태도를 결정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은 이 예수를 구주로 모시기로 결정한 분들이 와있기 때문에 정말 잘했고 다행인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이 예수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거나 반대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그들의 운명은 뚜렷한 것입니다. 천길만길 심판의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쳐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예수가 살아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 아버지도 인정하고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도 부인하는 자인 것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는 아버지가 있고 아들이 없는 자는 아버지도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 타락 이후에 인간은 죄의 노예요, 세상과 마귀의 종이요, 질병의 노예요, 저주의 종이요, 사망과 음부의 종이 되어 살았는데 이 굴레에서 우리를 벗기기 위해서 하나님 아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려 이 모든 빚을 청산하시고 굴레에서 해방시키시고 다 이루어서 삼일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은 예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자유와 해방을 줄 분은 예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압박과 설움에서 우리를 건져줄 자는 예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예수에 대해서 우리가 분명히 결정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나의 구주로 모셔 들이고 인정하면 여러분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되는 것입니다. 흑암에서 광명으로 옮기게 되는 것입니다. 육의 자녀에서 신령한 자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지옥 갈 사람이 천국 가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영원히 아름답게 변화되고 말 것인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빌라도는 군중들에게 "이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할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오늘날도 이 질문은 우리가 다 대답해야 됩니다. 특별한 기록을 가지고서 태어나신 분, 우리를 위해서 고난당하신 분, 확실히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 역사에 찬란하게 비춰진 이분을 사람들은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려야 되는데 우리들은 주님 믿기로 결정하고 구원받기로 결정한 것을 감사드립니다. 아직 이분에 대해서 긍정적인 결정과 결심을 하지 못한 사람을 도와주셔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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