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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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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8. 5. 18. 교회창립50주년감사예배설교 |
<서론>
오늘 저의 설교 제목은 '사랑과 행복 나누기'입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 받기 원하고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사랑받기 원치 않고 행복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되는지를 배우지를 못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사랑 받고 행복하게 되는 길을 찾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1. 우주에서 가장 불행한 사탄
먼저 우주에서 가장 불행한 자가 누구냐. 바로 사탄인 것입니다.
사탄은 끝없이 우리를 움켜쥐려 하는 탐심의 노예가 되어서 가져도 가져도 만족함이 없이 사로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탄은 하나님의 보좌까지 탐했었습니다. 호수에 피는 꽃 중에 하나가 수선화입니다. 수선화는 영어로 나르시스라고 말하는데 헬라신화에 보면은 그 당시에는 거울이 없을 때인데 한 청년이 너무나 자기가 잘나서 자기의 미모에 감동 되었는데 거울이 없기 때문에 호숫가에서 와서 늘 호수에 얼굴을 비춰보고 싱글벙글 웃고 행복했습니다. 너무 자기만족에 심취해서 호수를 들여다보다가 그만 빠져 죽었습니다. 그래서 꽃이 된 것이 수선화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랑, 자기 아름다움에 심취한 사람을 나르시스트라고 말합니다. 바로 사탄은 이 나르시즘에 빠진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만든 중에 가장 아름답게 만들었다 말입니다. 너무 아름답게 만들어 놓으니까 모든 천사들이 다 찬양을 하고 칭찬을 하니 자기 아름다움에 그만 홀딱 심취해 가지고서 '아 이처럼 아름다우면 내가 하나님이 되지 하나님의 피조물로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반역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14장 12절로 15절에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자기 아름다움에 심취해서 하나님이 되려다가 쫓겨나서 사탄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귀의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의 사상과 탐욕 그것으로 뭉쳐져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엄청나게 멋지게 만들어졌지요. 타락한 우리 후손들도 사람은 동물과 비교할 수 없지 않습니까? 처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이 충만한 자였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에덴에 들어와서 아담과 하와를 꾀기 시작한 것입니다. '야, 엄청나게 아름답구나. 꼭 하나님 같다. 이처럼 아름다운 존재가 왜 하나님 밑에 굽신 거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따라갈 필요가 있느냐. 너도 하나님처럼 된다. 하와야 선악과를 보아라.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더냐. 정말 이것만 먹으면 선악을 알기를 하나님처럼 하게 되고 하나님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으로 살아라' 자기가 타락한 그대로 자기 중심사상과 탐욕을 가지고 꾀했습니다. 여기에 넘어간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에게도 주워 먹게 하고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락해서 마귀의 성품을 얻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3장 4절로 5절에 보면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그래서 오늘날도 마귀는 언제나 우리에게 다가오면 나 중심으로 살게 하고 탐욕과 욕심으로써 모든 것을 취하려고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본성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으로 예수님을 유혹하려고 한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욕심과 탐심을 가지고 살도록 하려고 40주 40야 금식하고 굶주린 예수님께 찾아와서 꾀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을 변하여 떡덩이를 먹게 하라"
이것은 바로 물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너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배가 부르고 난 다음에 하나님을 섬기고 뭐하지 배고픈데 무슨 하나님을 섬기느냐. 물질부터 먼저 취하라." 그런데 예수님은 탐욕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아 중심으로 사로잡히지 않고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서고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니라" 마귀가 한 대 먹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명예욕으로 그를 유혹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높은 층탑 위에서 뛰어 내려라! 그리고 발이 돌이 부딪히지 아니하면 사람들이 너를 칭찬하고 명예를 주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했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단호하게 거부해 버린 것입니다. 탐욕과 명예욕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높은 산위에 올라가서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세상 부귀, 영화, 공명을 보여 주고서 이것을 취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마귀가 수단과 방법을 다 사용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는 통하지 않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중심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시고 탐심과 욕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았기 때문에 마귀가 자기와 같은 줄 알고 자아중심의 탐심과 욕심을 가지고 꾀했으나 통과되지 않았었습니다. 오늘 타락한 인간의 본심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탐심과 욕심인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9절로 30절에 타락한 인간의 본심을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이러니 이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설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자기의 수양과 도덕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천만 일어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관심사를 보면, 보통 10대에는 이성에 가장 큰 관심을 갖습니다. 20대는 성(性)에 대한 관심을 갖고, 30대에는 돈에 대한 관심을 갖고, 40대는 사업에 대한 관심을 갖고, 50대는 권력을 가지고 싶어 하고, 60대 이상은 건강에 가장 크게 관심을 갖고 건강하다면 온갖 보약을 다 먹고 온갖 약을 다 먹어서 밥보다 약을 많이 먹는 시대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육신의 삶과 욕심에 중심되어 있지 하나님께 있지 않는 것입니다.
2. 우주에서 가장 행복하신 하나님
그런데 그와 정반대로 우주에서 가장 행복하신 분은 누구시냐? 아버지와 아들,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끝없이 주시고 또 주심으로 그로인하여 만족하고 행복한 것입니다. 끝없이 취하고 손에 쥐므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햇빛을 주시고, 공기를 주시고, 물을 주시고, 식물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고, 행복을 주시고 무엇이든지 자꾸 주시므로 하나님은 행복을 느끼시는 분인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니 이시라고 말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절에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나중에는 우리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얼마나 아끼지 않습니까? 자녀가 상처를 입으면 부모의 마음이 아프고 자녀가 병이 들어 열이 나면 밤새도록 부모가 같이 앓고 잠을 못 자는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주와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립니다. 하나님의 분신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분신이신 독생자를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재물로 내놓으신 것입니다. 그냥 특사로 파견한 것이 아니라 가서 죽어서 재물이 되어서 인생을 죄에서 구출하고 부활하고 돌아오라고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로 17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온 세상은 서로 심판합니다. 전부다 나는 괜찮고 네가 잘못했다고 손가락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를 지적하여 심판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어찌하든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어서 죄인 대신에 십자가에 죽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일이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부귀나 영화를 추구한 적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느 곳에 가나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죄인은 용서하시고 귀신은 쫓아내시고 병든 자는 치료하시고 배고픈 자는 먹이시고 환난을 당한 자에게는 평안을 주시고 파도 이는 자에게는 평안을 잠잠하게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병든 자는 치료하시고 환난당한 자에게는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결과에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렸습니다. 주님은 담담하게 십자가를 거역하지 않고 걸머지고 올라가셔서 자기를 모욕하고 침뱉고 고함치고 손가락질하는 앞에서 조금도 협박하지 아니하시고 주님은 어린양 재물이 되어서 몸찢고 피를 흘려 우리 죄를 대속해 준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일생은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손발이 다 닳도록 섬긴 것입니다. 왜 우리가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깊이 사랑하고 기억하는 것입니까?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 하시면서 우리를 키워 주시기 때문에 어머니의 사랑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절절이 맺혀져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섬기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오늘날 세상에 수십억 명이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8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또한 이 세상을 떠날 때도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놓지 아니하고 우리를 붙들어 줄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주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해서 승천할 때도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놓지 아니하고 주님의 영인 주님의 분신인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요, 예수님의 영이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21절로 22절에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아버지는 예수님도 주시고 성령 보혜사도 우리에게 주사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놓지 않고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못하리니 천국은 너희 안에 있다고 말한 것은 성령이 바람과 같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므로 성령을 통해서 아버지가 오시고 예수님이 친히 와서 임재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고아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고아원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늘나라의 따뜻한 가정인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함께 계신 영화로운 장소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3. 사랑과 행복을 나누기 위하여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이 가치 있고 행복 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사랑과 행복을 나누기 위해서 사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강도 만난 사람의 비유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있는 것 다 빼앗기고 늘씬 얻어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길거리에 버려 놓았는데 한 제사장이 지나가면서 보고 쯧쯧 혀를 차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조심하지 어떻게 하다가 강도를 만나서 이 꼬락서니가 되었느냐. 나쁜 놈이구나." 그리고는 지나가 버린 것입니다. 제사장은 율법주의자인 것입니다. 오늘 율법주의자들은 도와 주려고는 하지 않고 비난하고 손가락질하고 꾸짖습니다. 너무나 많은 율법주의자가 세상에 많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살기가 어렵습니다. 오늘날 우리 대통령도 보면은 대통령 된지 불과 2달 20여일밖에 안되는데 지금 손가락질하고 야단이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시집 온지 석 달도 안 되었는데 아들 못 낳는다고 발길로 차고 머리칼을 당기고 구박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열 달이 되어야 아들을 낳지 석 달 만에 어떻게 아들을 낳습니까? 지금 대통령 데리고 와서 석 달 치도 안 되었는데 사업을 평가하지도 못한 처지에 아들 못 낳는다고 큰 사업을 잘 못한다고 온갖 비난을 하고 데모를 하고 어떤 사람이 대통령을 해먹겠습니까? 옛날에 노대통령이 대통령 못해먹겠다고 하듯이 정말 대통령 못할 짓인 것입니다. 못해먹을 것이에요. 사람들이 이렇게 율법주의자가 되어서 자기만 다 옳고 남은 다 나쁘다고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자가 누가 있는 것입니까? 율법주의자는 비평, 비난, 판단, 정죄만 하고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에는 레위인이 총총 걸음으로 지나오더니만 보고는 고개를 흔들고 다른 길로 피해서 가버린 것입니다. 레위인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의식을 집행하는 사람입니다. 성전 장막을 치고 제단을 갖다 놓고 재물을 준비하는 돕는 자인 것입니다. 의식주의자인 것입니다. 이 의식주의자들은 내가 주일날 교회 나오고 세례 받고 십일조 드리고 성찬 받고 예배 드렸으면 되었지 그 다음 교회 밖에 사람이 굶어 죽든지 병들어 죽든지 배가 터져 죽든지 맞아 죽든지 내가 알 것 무엇이냐. 그것 다 나는 관심 없다. 무관심주의자인 것입니다. 의식주의자는 자기중심이요, 무관심주의자인 것입니다. 대게 이 세상 사람들은 율법주의자로 남을 비평하기를 좋아하고 그 다음에는 무관심주의자고 나와는 관계없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지금 미얀마에 사이클론이 불어서 10만 명이 죽었는데 "그것은 미얀마에서 일어난 일이지 우리에게 무슨 관계가 있느냐?" 우리는 선한 사람을 통해서 지금부터 구호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웃에 무관심한 사람은 "미얀마 정부가 어떻게 했기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도록 내버려 놓았나." 또는 "우리나라와 가까이 있지 않으니 무관심하고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중국에 지진이 일어나서 10만명이 죽었습니다. "그것은 중국에 일어난 일이니 우리나라에 일어난 것이 아니니까 내가 관심 가질 것 무엇이냐. 중국 사람들 원래 욕심이 맞고 티베트를 침략 하더니만 고소하다. 잘 얻어맞았다." 율법주의자나 의식주의자들은 비난 아니면 무관심주의자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피투성이 된 사람이 있는데 한 사마리아인이 지나옵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에게 개로 취급받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종교를 갖고 있지도 아니하고 제사장도 아니고 레위인도 아닌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 당나귀를 타고 지나가다가 이 상황을 보고 말에서 내려서 이 사람에게 가만히 보니까 절단이거든 기름을 부어서 상처 입은 곳을 윤하게 하시고 그 다음 포도주를 부어서 해독을 하고 그 다음에 자기 긴 옷을 찢어 가지고서 붕대로 감아 가지고서 말에 태워서 주막집에 들어가서 돌보아 주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 나는 아무것도 없는데 사마리아인인데 무슨 관계냐. 내가 뭐 있어야 도와주지."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사마리아인은 가난하고 현재 우리가 보면 거지와 같은데도 불구하고 있는 것으로 자기가 여행할 때 필요한 기름병과 포도주와 그 다음 큰 흰 두루마기 같은 옷을 입은 옷과 이것이 있기 때문에 있는 포도주를 붓고 있는 기름을 바르고 있는 옷을 찢어서 붕대로 만들어 감아주고 여관에 데려와서 그를 돌보아 주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마리아인이야 말로 가장 삶의 보람과 행복을 느낀 분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 헨리의 작품 중「크리스마스 선물」은 너무나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한 가난한 부부가 있었는데 굉장히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하고 사랑했어요. 그런데 크리스마스는 다가오고 선물은 사줘야 되겠는데 너무나 가난해서 살돈이 없어요. 그래서 남편은 부조 대대로 이어 받아온 시계가 있어요. 그 시계를 몰래 전당포에서 팔고 돈을 가지고서 그 아내가 머리채가 좋아서 철렁철렁 하고 저기 핀을 하나 꽂아줬으면 얼마나 좋겠나 싶어서 핀을 샀어요. 딱 감춰놓고 있는데 아내는 크리스마스 때 남편에게 선물을 드려야 되겠는데 돈이 없으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돈이 나올데가 없어 가발상에 가서 머리를 잘라 팔았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싹둑 잘라 팔아 버리고 머리에 수건을 이렇게 쓰고 스카프를 쓰고 왔습니다. 그들이 크리스마스 올 때가지 가만히 보니까 남편은 시계를 안본다 말입니다. '이상하다. 시계를 왜 안보나?' 부인은 항상 스카프를 자나 깨나 스카프를 쓰고 있다 말입니다. 그래서 '스카프를 쓰고 있는가 보구나.'했는데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주는데 남편이 "여보 그 아름다운 머리에 이 빗을 꽂아 보십시오." 아내가 펑펑 웁니다. 그러면서 아내가 "여보, 당신 시계 줄이 하도 낡아서 마음이 아팠는데 이 시계 줄을 쓰십시오." 시계 줄을 받더니 남편이 눈물을 펑펑 흘립니다. 머리칼도 없고 시계도 없습니다. 둘이가 얼싸안고 비록 머리칼은 없고 시계는 없을지라도 사랑을 확인해서 너무나 기뻐하고 행복해서 정말 머리카락이 있을 때나 시계가 있을 때보다 더 행복했다는 소설로써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줄 때에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행복하신 하나님이냐. 하나님은 아들을 주시고 아들과 성령을 주시고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부어 주시고 성령은 자기 존재를 우리에게 던져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행복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우리가 행복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면서 살 수 있는 삶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눈에 안 보이는데 어떻게 섬기냐고 말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신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5절로 40절 이하를 우리가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보세요. 주님을 다른데서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곁에 있는 가난하고 헐벗고 병들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예수 이름으로 돌보아 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돌보아 주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에 주님 심판대 앞에 다 설 것인데 주님은 우리보고 말할 것입니다. "오냐. 네가 내 배고플 때 먹여 주었구나. 내 헐벗을 때 입혀 주었구나. 내 아플 때 와서 돌보아 주고 감옥에 있을 때 와서 위로해 주고 내가 외로울 때 돌봐 주었구나. 고맙다. 내가 너에게 이제 갚아 주마." "주님 언제 그랬습니까? 나는 주님 본적이 없는데요." "아니야. 네 이웃에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을 도와준 것이 바로 나를 위해서 한 것이다." 여러분 이 사실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 철야기도하고 금식기도하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내 이웃에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내 바로 이웃에 예수님이 있는 것입니다.
제인 애덤스는 척추병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에게 굉장한 재산을 물려받은 귀한 여성인 것입니다. 그가 의사의 권고로 휴양을 하기 위하여 유럽을 여행하다가 런던의 빈민가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너무나 행복하고 부유하게 살았기 때문에 세상에 그렇게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빈민촌이 있는 것은 몰랐습니다. '야. 이런 세상도 있고, 이런 사람들도 있고, 이를 도와주는 사람도 있구나. 내가 인생을 헛살았구나. 내가 가서 우리 아버지의 재산을 다 정리해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빈민들을 위해서 살아야 되겠구나.' 그렇게 결심하고 미국으로 돌아와 빈민들을 위해 탁아소, 가출 소녀들을 위한 숙소를 만들었고,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당시 미국 내에 200만 명에 달하는 아동 노동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악관 아동회의를 창설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1931년, 71세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 가치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꼽추인데 꼽추로서 아무리 부귀영화 공명을 누리고 산들 그게 무슨 큰 영광이 되며 모든 사람들의 박수를 받을 것입니까? 그러나 비록 몸은 꼽추이지만 부모의 재산 받은 것 가지고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위해서 일생을 내어 던졌기 때문에 71세에 노벨 평화상을 타고 길이 역사에 이름이 남는 귀한 여성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누고 사랑하고 도와주는 것이 일생을 참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을 섬기는 삶이란 주린 자를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를 위해 마시게 하며 헐벗었을 때 옷을 입히고 병든 자를 돌보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뭐라고 말합니까?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오늘날 돈이 많고 부자고 권력 있는 사람치고 행복한 사람 보았습니까? '아, 나는 부귀, 영화, 공명만 있으면 행복하겠다.' 부귀, 영화, 공명이 있는 사람들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탐욕만 가지고 살기 때문에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나누어야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을 나누어 주고 사랑을 나누어 줘야 행복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주라 그리하면 돌려줄 것이요 그냥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후히 되어 눌러 흔들어 넘치게 해서 돌려주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법칙인 것입니다. 대로 주면 말로 받습니다. 대로 주고면 홉으로 받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슬퍼하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고 나누지 않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아, 나는 사랑을 실천하고 나눌 수 있는 재물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여러분 없는 것 중에서 자기 있는 것으로 나누라는 것이지 빵 두 쪽 있으면 한쪽을 나누어 먹는 것이 나누는 것입니다. 옷 두벌 있으면 한 벌 나누어 입는 것입니다. 신 두 켤레 있으면 한 켤레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나누어 준다는 것이 오래오래 기억나는 것은 저는 소련에 스트라스브르크를 선교여행 했을 때 우리 집사람하고 같이 했는데 거기에 우리를 안내하던 부인 한 사람이 소련이 막 공산주의에서 해방되고 난 다음 신발이 없어서 뒤축이 무너진 신발을 신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사람이 자기가 신던 신발을 그 부인에게 주니까 그 신발을 받아서 얼마나 좋아하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지 몰라요. 그 다음에 우리 집에 와보니까 우리 집사람 신장에 신발이 넘쳐나요. 하나님이 얼마나 돌려 줬던지... 내게 있는 것으로 나누라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나누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신던 신발도 없는 사람에게는 귀한 보배인 것입니다. 우리가 나누는 백성이 될 때 하나님께 복을 받지 자꾸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하면은 있는 것도 없이 다 빼앗기고 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복 받기를 원해서 복을 주시옵소서 하지 말고 나가서 실제로 복을 실천해야 되는 것입니다. 줘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로 8절에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착한 일을 행한 사람에게 더 축복을 주는 것은 더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해도 복을 안주면 안하지 않겠어요? 그러므로 주면 돌려주시고 넘치게 해주시는 것은 더욱 많은 착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의 성격을 담지 말고 하나님의 성격을 닮아야 되는 것입니다.
제2차 대전 중 많은 필리핀 병사들이 일본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는데 형편없는 식사와 생활환경 때문에 필리핀 병사들이 수없이 죽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병원도 없고 의사도 없고 약물도 없어서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심한 상처를 입은 비둘기 한 마리가 철조망을 건너서 포로수용소에 떨어졌습니다. 필리핀 병사들이 모여서 이 비둘기 한 마리를 서로 끌어안고 쓰다듬어 주고 치료해 주고 먹이를 주었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비둘기는 건강을 회복해서 훨훨 창공을 날라 갔습니다만 그 후에 기적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파리 목숨처럼 죽어가던 필리핀 병사들이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웃음을 발견하고 건강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왜냐, 전에는 일본인에 대한 미움과 원한에 사무쳐서 병들어 죽었는데 비둘기를 사랑하다가 사랑의 샘이 터진 것입니다. 비둘기 치료하다가 사랑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그들이 원한을 품은 것을 다 잃어버리고 사랑으로 마음을 채워주자 병든 자들이 죽지 아니하고 건강을 회복하고 해방을 얻게 되었다는 기록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어 비둘기를 보살피기 시작한 그 마음이 나중에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려서 포로들의 사망률이 60%나 줄어들었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힘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신체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랑 때문에 인생이 달라집니다. 사랑 때문에 생명이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남의 죄를 들춰내고 할퀴고 소금을 치고 짓밟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엄청난 미움인 것입니다. 사랑은 상처를 덮어주고 돌봐주고 치료해 주는 것입니다. 허다한 허물을 덮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류가 구원을 얻었듯이 사랑을 심으면 사랑의 열매와 행복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사 하나님의 사랑과 행복을 나누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통해야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이웃을 사랑하고 행복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또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특권이요 영광인 것입니다. 대통령의 특사가 된 것도 영광스러운데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서 사랑을 나누고 행복을 나눌 수 있는 우리가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큰 부자가 되고 능력이 있어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나보다 못한 사람 많으니까 잘난 사람만 자꾸 쳐다보고 살지 말고 나보다 못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보다 못한 사람을 위해서 나의 것을 나누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요, 가치요,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이 땅에서 내가 가장 가치 있고 행복된 삶을 사는 것은 사랑과 행복나누기 운동인 것입니다. 저는 50년의 사역을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 가운데 마치고 내 사랑하는 영적 아들인 제자 이영훈 목사에게 강단을 맡기고 난 다음에 사랑과 행복나누기에 일선에 서서 여러분의 인도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사랑과 행복을 나눠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행복을.. 이 땅에 슬픔과 고통 속에 눈물 흘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있지 않을 때까지 사랑과 행복 나누는 운동에 우리가 나가면 진실로 하나님의 사업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과 행복 나누는 일에 사자가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사탄은 자기만 알고 탐욕으로 움켜쥐기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있는 것을 다 내어 놓아주신 하나님이시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서 사랑과 행복을 나누어 주므로 우리도 사랑받고 행복해 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저의 설교 제목은 '사랑과 행복 나누기'입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 받기 원하고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사랑받기 원치 않고 행복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되는지를 배우지를 못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사랑 받고 행복하게 되는 길을 찾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1. 우주에서 가장 불행한 사탄
먼저 우주에서 가장 불행한 자가 누구냐. 바로 사탄인 것입니다.
사탄은 끝없이 우리를 움켜쥐려 하는 탐심의 노예가 되어서 가져도 가져도 만족함이 없이 사로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탄은 하나님의 보좌까지 탐했었습니다. 호수에 피는 꽃 중에 하나가 수선화입니다. 수선화는 영어로 나르시스라고 말하는데 헬라신화에 보면은 그 당시에는 거울이 없을 때인데 한 청년이 너무나 자기가 잘나서 자기의 미모에 감동 되었는데 거울이 없기 때문에 호숫가에서 와서 늘 호수에 얼굴을 비춰보고 싱글벙글 웃고 행복했습니다. 너무 자기만족에 심취해서 호수를 들여다보다가 그만 빠져 죽었습니다. 그래서 꽃이 된 것이 수선화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랑, 자기 아름다움에 심취한 사람을 나르시스트라고 말합니다. 바로 사탄은 이 나르시즘에 빠진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만든 중에 가장 아름답게 만들었다 말입니다. 너무 아름답게 만들어 놓으니까 모든 천사들이 다 찬양을 하고 칭찬을 하니 자기 아름다움에 그만 홀딱 심취해 가지고서 '아 이처럼 아름다우면 내가 하나님이 되지 하나님의 피조물로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반역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14장 12절로 15절에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자기 아름다움에 심취해서 하나님이 되려다가 쫓겨나서 사탄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귀의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의 사상과 탐욕 그것으로 뭉쳐져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엄청나게 멋지게 만들어졌지요. 타락한 우리 후손들도 사람은 동물과 비교할 수 없지 않습니까? 처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이 충만한 자였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에덴에 들어와서 아담과 하와를 꾀기 시작한 것입니다. '야, 엄청나게 아름답구나. 꼭 하나님 같다. 이처럼 아름다운 존재가 왜 하나님 밑에 굽신 거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따라갈 필요가 있느냐. 너도 하나님처럼 된다. 하와야 선악과를 보아라.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더냐. 정말 이것만 먹으면 선악을 알기를 하나님처럼 하게 되고 하나님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으로 살아라' 자기가 타락한 그대로 자기 중심사상과 탐욕을 가지고 꾀했습니다. 여기에 넘어간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에게도 주워 먹게 하고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락해서 마귀의 성품을 얻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3장 4절로 5절에 보면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그래서 오늘날도 마귀는 언제나 우리에게 다가오면 나 중심으로 살게 하고 탐욕과 욕심으로써 모든 것을 취하려고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본성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으로 예수님을 유혹하려고 한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욕심과 탐심을 가지고 살도록 하려고 40주 40야 금식하고 굶주린 예수님께 찾아와서 꾀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을 변하여 떡덩이를 먹게 하라"
이것은 바로 물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너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배가 부르고 난 다음에 하나님을 섬기고 뭐하지 배고픈데 무슨 하나님을 섬기느냐. 물질부터 먼저 취하라." 그런데 예수님은 탐욕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아 중심으로 사로잡히지 않고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서고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니라" 마귀가 한 대 먹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명예욕으로 그를 유혹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높은 층탑 위에서 뛰어 내려라! 그리고 발이 돌이 부딪히지 아니하면 사람들이 너를 칭찬하고 명예를 주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했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단호하게 거부해 버린 것입니다. 탐욕과 명예욕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높은 산위에 올라가서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세상 부귀, 영화, 공명을 보여 주고서 이것을 취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마귀가 수단과 방법을 다 사용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는 통하지 않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중심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시고 탐심과 욕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았기 때문에 마귀가 자기와 같은 줄 알고 자아중심의 탐심과 욕심을 가지고 꾀했으나 통과되지 않았었습니다. 오늘 타락한 인간의 본심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탐심과 욕심인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9절로 30절에 타락한 인간의 본심을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이러니 이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설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자기의 수양과 도덕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천만 일어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관심사를 보면, 보통 10대에는 이성에 가장 큰 관심을 갖습니다. 20대는 성(性)에 대한 관심을 갖고, 30대에는 돈에 대한 관심을 갖고, 40대는 사업에 대한 관심을 갖고, 50대는 권력을 가지고 싶어 하고, 60대 이상은 건강에 가장 크게 관심을 갖고 건강하다면 온갖 보약을 다 먹고 온갖 약을 다 먹어서 밥보다 약을 많이 먹는 시대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육신의 삶과 욕심에 중심되어 있지 하나님께 있지 않는 것입니다.
2. 우주에서 가장 행복하신 하나님
그런데 그와 정반대로 우주에서 가장 행복하신 분은 누구시냐? 아버지와 아들,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끝없이 주시고 또 주심으로 그로인하여 만족하고 행복한 것입니다. 끝없이 취하고 손에 쥐므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햇빛을 주시고, 공기를 주시고, 물을 주시고, 식물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고, 행복을 주시고 무엇이든지 자꾸 주시므로 하나님은 행복을 느끼시는 분인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니 이시라고 말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절에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나중에는 우리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얼마나 아끼지 않습니까? 자녀가 상처를 입으면 부모의 마음이 아프고 자녀가 병이 들어 열이 나면 밤새도록 부모가 같이 앓고 잠을 못 자는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주와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립니다. 하나님의 분신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분신이신 독생자를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재물로 내놓으신 것입니다. 그냥 특사로 파견한 것이 아니라 가서 죽어서 재물이 되어서 인생을 죄에서 구출하고 부활하고 돌아오라고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로 17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온 세상은 서로 심판합니다. 전부다 나는 괜찮고 네가 잘못했다고 손가락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를 지적하여 심판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어찌하든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어서 죄인 대신에 십자가에 죽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일이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부귀나 영화를 추구한 적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느 곳에 가나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죄인은 용서하시고 귀신은 쫓아내시고 병든 자는 치료하시고 배고픈 자는 먹이시고 환난을 당한 자에게는 평안을 주시고 파도 이는 자에게는 평안을 잠잠하게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병든 자는 치료하시고 환난당한 자에게는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결과에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렸습니다. 주님은 담담하게 십자가를 거역하지 않고 걸머지고 올라가셔서 자기를 모욕하고 침뱉고 고함치고 손가락질하는 앞에서 조금도 협박하지 아니하시고 주님은 어린양 재물이 되어서 몸찢고 피를 흘려 우리 죄를 대속해 준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일생은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손발이 다 닳도록 섬긴 것입니다. 왜 우리가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깊이 사랑하고 기억하는 것입니까?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 하시면서 우리를 키워 주시기 때문에 어머니의 사랑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절절이 맺혀져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섬기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오늘날 세상에 수십억 명이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8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또한 이 세상을 떠날 때도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놓지 아니하고 우리를 붙들어 줄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주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해서 승천할 때도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놓지 아니하고 주님의 영인 주님의 분신인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요, 예수님의 영이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21절로 22절에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아버지는 예수님도 주시고 성령 보혜사도 우리에게 주사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놓지 않고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못하리니 천국은 너희 안에 있다고 말한 것은 성령이 바람과 같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므로 성령을 통해서 아버지가 오시고 예수님이 친히 와서 임재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고아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고아원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늘나라의 따뜻한 가정인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함께 계신 영화로운 장소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3. 사랑과 행복을 나누기 위하여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이 가치 있고 행복 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사랑과 행복을 나누기 위해서 사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강도 만난 사람의 비유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있는 것 다 빼앗기고 늘씬 얻어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길거리에 버려 놓았는데 한 제사장이 지나가면서 보고 쯧쯧 혀를 차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조심하지 어떻게 하다가 강도를 만나서 이 꼬락서니가 되었느냐. 나쁜 놈이구나." 그리고는 지나가 버린 것입니다. 제사장은 율법주의자인 것입니다. 오늘 율법주의자들은 도와 주려고는 하지 않고 비난하고 손가락질하고 꾸짖습니다. 너무나 많은 율법주의자가 세상에 많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살기가 어렵습니다. 오늘날 우리 대통령도 보면은 대통령 된지 불과 2달 20여일밖에 안되는데 지금 손가락질하고 야단이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시집 온지 석 달도 안 되었는데 아들 못 낳는다고 발길로 차고 머리칼을 당기고 구박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열 달이 되어야 아들을 낳지 석 달 만에 어떻게 아들을 낳습니까? 지금 대통령 데리고 와서 석 달 치도 안 되었는데 사업을 평가하지도 못한 처지에 아들 못 낳는다고 큰 사업을 잘 못한다고 온갖 비난을 하고 데모를 하고 어떤 사람이 대통령을 해먹겠습니까? 옛날에 노대통령이 대통령 못해먹겠다고 하듯이 정말 대통령 못할 짓인 것입니다. 못해먹을 것이에요. 사람들이 이렇게 율법주의자가 되어서 자기만 다 옳고 남은 다 나쁘다고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자가 누가 있는 것입니까? 율법주의자는 비평, 비난, 판단, 정죄만 하고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에는 레위인이 총총 걸음으로 지나오더니만 보고는 고개를 흔들고 다른 길로 피해서 가버린 것입니다. 레위인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의식을 집행하는 사람입니다. 성전 장막을 치고 제단을 갖다 놓고 재물을 준비하는 돕는 자인 것입니다. 의식주의자인 것입니다. 이 의식주의자들은 내가 주일날 교회 나오고 세례 받고 십일조 드리고 성찬 받고 예배 드렸으면 되었지 그 다음 교회 밖에 사람이 굶어 죽든지 병들어 죽든지 배가 터져 죽든지 맞아 죽든지 내가 알 것 무엇이냐. 그것 다 나는 관심 없다. 무관심주의자인 것입니다. 의식주의자는 자기중심이요, 무관심주의자인 것입니다. 대게 이 세상 사람들은 율법주의자로 남을 비평하기를 좋아하고 그 다음에는 무관심주의자고 나와는 관계없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지금 미얀마에 사이클론이 불어서 10만 명이 죽었는데 "그것은 미얀마에서 일어난 일이지 우리에게 무슨 관계가 있느냐?" 우리는 선한 사람을 통해서 지금부터 구호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웃에 무관심한 사람은 "미얀마 정부가 어떻게 했기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도록 내버려 놓았나." 또는 "우리나라와 가까이 있지 않으니 무관심하고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중국에 지진이 일어나서 10만명이 죽었습니다. "그것은 중국에 일어난 일이니 우리나라에 일어난 것이 아니니까 내가 관심 가질 것 무엇이냐. 중국 사람들 원래 욕심이 맞고 티베트를 침략 하더니만 고소하다. 잘 얻어맞았다." 율법주의자나 의식주의자들은 비난 아니면 무관심주의자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피투성이 된 사람이 있는데 한 사마리아인이 지나옵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에게 개로 취급받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종교를 갖고 있지도 아니하고 제사장도 아니고 레위인도 아닌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 당나귀를 타고 지나가다가 이 상황을 보고 말에서 내려서 이 사람에게 가만히 보니까 절단이거든 기름을 부어서 상처 입은 곳을 윤하게 하시고 그 다음 포도주를 부어서 해독을 하고 그 다음에 자기 긴 옷을 찢어 가지고서 붕대로 감아 가지고서 말에 태워서 주막집에 들어가서 돌보아 주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 나는 아무것도 없는데 사마리아인인데 무슨 관계냐. 내가 뭐 있어야 도와주지."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사마리아인은 가난하고 현재 우리가 보면 거지와 같은데도 불구하고 있는 것으로 자기가 여행할 때 필요한 기름병과 포도주와 그 다음 큰 흰 두루마기 같은 옷을 입은 옷과 이것이 있기 때문에 있는 포도주를 붓고 있는 기름을 바르고 있는 옷을 찢어서 붕대로 만들어 감아주고 여관에 데려와서 그를 돌보아 주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마리아인이야 말로 가장 삶의 보람과 행복을 느낀 분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 헨리의 작품 중「크리스마스 선물」은 너무나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한 가난한 부부가 있었는데 굉장히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하고 사랑했어요. 그런데 크리스마스는 다가오고 선물은 사줘야 되겠는데 너무나 가난해서 살돈이 없어요. 그래서 남편은 부조 대대로 이어 받아온 시계가 있어요. 그 시계를 몰래 전당포에서 팔고 돈을 가지고서 그 아내가 머리채가 좋아서 철렁철렁 하고 저기 핀을 하나 꽂아줬으면 얼마나 좋겠나 싶어서 핀을 샀어요. 딱 감춰놓고 있는데 아내는 크리스마스 때 남편에게 선물을 드려야 되겠는데 돈이 없으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돈이 나올데가 없어 가발상에 가서 머리를 잘라 팔았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싹둑 잘라 팔아 버리고 머리에 수건을 이렇게 쓰고 스카프를 쓰고 왔습니다. 그들이 크리스마스 올 때가지 가만히 보니까 남편은 시계를 안본다 말입니다. '이상하다. 시계를 왜 안보나?' 부인은 항상 스카프를 자나 깨나 스카프를 쓰고 있다 말입니다. 그래서 '스카프를 쓰고 있는가 보구나.'했는데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주는데 남편이 "여보 그 아름다운 머리에 이 빗을 꽂아 보십시오." 아내가 펑펑 웁니다. 그러면서 아내가 "여보, 당신 시계 줄이 하도 낡아서 마음이 아팠는데 이 시계 줄을 쓰십시오." 시계 줄을 받더니 남편이 눈물을 펑펑 흘립니다. 머리칼도 없고 시계도 없습니다. 둘이가 얼싸안고 비록 머리칼은 없고 시계는 없을지라도 사랑을 확인해서 너무나 기뻐하고 행복해서 정말 머리카락이 있을 때나 시계가 있을 때보다 더 행복했다는 소설로써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줄 때에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행복하신 하나님이냐. 하나님은 아들을 주시고 아들과 성령을 주시고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부어 주시고 성령은 자기 존재를 우리에게 던져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행복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우리가 행복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면서 살 수 있는 삶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눈에 안 보이는데 어떻게 섬기냐고 말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신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5절로 40절 이하를 우리가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보세요. 주님을 다른데서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곁에 있는 가난하고 헐벗고 병들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예수 이름으로 돌보아 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돌보아 주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에 주님 심판대 앞에 다 설 것인데 주님은 우리보고 말할 것입니다. "오냐. 네가 내 배고플 때 먹여 주었구나. 내 헐벗을 때 입혀 주었구나. 내 아플 때 와서 돌보아 주고 감옥에 있을 때 와서 위로해 주고 내가 외로울 때 돌봐 주었구나. 고맙다. 내가 너에게 이제 갚아 주마." "주님 언제 그랬습니까? 나는 주님 본적이 없는데요." "아니야. 네 이웃에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을 도와준 것이 바로 나를 위해서 한 것이다." 여러분 이 사실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 철야기도하고 금식기도하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내 이웃에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내 바로 이웃에 예수님이 있는 것입니다.
제인 애덤스는 척추병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에게 굉장한 재산을 물려받은 귀한 여성인 것입니다. 그가 의사의 권고로 휴양을 하기 위하여 유럽을 여행하다가 런던의 빈민가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너무나 행복하고 부유하게 살았기 때문에 세상에 그렇게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빈민촌이 있는 것은 몰랐습니다. '야. 이런 세상도 있고, 이런 사람들도 있고, 이를 도와주는 사람도 있구나. 내가 인생을 헛살았구나. 내가 가서 우리 아버지의 재산을 다 정리해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빈민들을 위해서 살아야 되겠구나.' 그렇게 결심하고 미국으로 돌아와 빈민들을 위해 탁아소, 가출 소녀들을 위한 숙소를 만들었고,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당시 미국 내에 200만 명에 달하는 아동 노동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악관 아동회의를 창설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1931년, 71세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 가치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꼽추인데 꼽추로서 아무리 부귀영화 공명을 누리고 산들 그게 무슨 큰 영광이 되며 모든 사람들의 박수를 받을 것입니까? 그러나 비록 몸은 꼽추이지만 부모의 재산 받은 것 가지고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위해서 일생을 내어 던졌기 때문에 71세에 노벨 평화상을 타고 길이 역사에 이름이 남는 귀한 여성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누고 사랑하고 도와주는 것이 일생을 참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을 섬기는 삶이란 주린 자를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를 위해 마시게 하며 헐벗었을 때 옷을 입히고 병든 자를 돌보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뭐라고 말합니까?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오늘날 돈이 많고 부자고 권력 있는 사람치고 행복한 사람 보았습니까? '아, 나는 부귀, 영화, 공명만 있으면 행복하겠다.' 부귀, 영화, 공명이 있는 사람들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탐욕만 가지고 살기 때문에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나누어야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을 나누어 주고 사랑을 나누어 줘야 행복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주라 그리하면 돌려줄 것이요 그냥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후히 되어 눌러 흔들어 넘치게 해서 돌려주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법칙인 것입니다. 대로 주면 말로 받습니다. 대로 주고면 홉으로 받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슬퍼하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고 나누지 않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아, 나는 사랑을 실천하고 나눌 수 있는 재물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여러분 없는 것 중에서 자기 있는 것으로 나누라는 것이지 빵 두 쪽 있으면 한쪽을 나누어 먹는 것이 나누는 것입니다. 옷 두벌 있으면 한 벌 나누어 입는 것입니다. 신 두 켤레 있으면 한 켤레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나누어 준다는 것이 오래오래 기억나는 것은 저는 소련에 스트라스브르크를 선교여행 했을 때 우리 집사람하고 같이 했는데 거기에 우리를 안내하던 부인 한 사람이 소련이 막 공산주의에서 해방되고 난 다음 신발이 없어서 뒤축이 무너진 신발을 신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사람이 자기가 신던 신발을 그 부인에게 주니까 그 신발을 받아서 얼마나 좋아하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지 몰라요. 그 다음에 우리 집에 와보니까 우리 집사람 신장에 신발이 넘쳐나요. 하나님이 얼마나 돌려 줬던지... 내게 있는 것으로 나누라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나누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신던 신발도 없는 사람에게는 귀한 보배인 것입니다. 우리가 나누는 백성이 될 때 하나님께 복을 받지 자꾸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하면은 있는 것도 없이 다 빼앗기고 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복 받기를 원해서 복을 주시옵소서 하지 말고 나가서 실제로 복을 실천해야 되는 것입니다. 줘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로 8절에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착한 일을 행한 사람에게 더 축복을 주는 것은 더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해도 복을 안주면 안하지 않겠어요? 그러므로 주면 돌려주시고 넘치게 해주시는 것은 더욱 많은 착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의 성격을 담지 말고 하나님의 성격을 닮아야 되는 것입니다.
제2차 대전 중 많은 필리핀 병사들이 일본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는데 형편없는 식사와 생활환경 때문에 필리핀 병사들이 수없이 죽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병원도 없고 의사도 없고 약물도 없어서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심한 상처를 입은 비둘기 한 마리가 철조망을 건너서 포로수용소에 떨어졌습니다. 필리핀 병사들이 모여서 이 비둘기 한 마리를 서로 끌어안고 쓰다듬어 주고 치료해 주고 먹이를 주었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비둘기는 건강을 회복해서 훨훨 창공을 날라 갔습니다만 그 후에 기적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파리 목숨처럼 죽어가던 필리핀 병사들이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웃음을 발견하고 건강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왜냐, 전에는 일본인에 대한 미움과 원한에 사무쳐서 병들어 죽었는데 비둘기를 사랑하다가 사랑의 샘이 터진 것입니다. 비둘기 치료하다가 사랑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그들이 원한을 품은 것을 다 잃어버리고 사랑으로 마음을 채워주자 병든 자들이 죽지 아니하고 건강을 회복하고 해방을 얻게 되었다는 기록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어 비둘기를 보살피기 시작한 그 마음이 나중에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려서 포로들의 사망률이 60%나 줄어들었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힘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신체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랑 때문에 인생이 달라집니다. 사랑 때문에 생명이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남의 죄를 들춰내고 할퀴고 소금을 치고 짓밟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엄청난 미움인 것입니다. 사랑은 상처를 덮어주고 돌봐주고 치료해 주는 것입니다. 허다한 허물을 덮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류가 구원을 얻었듯이 사랑을 심으면 사랑의 열매와 행복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사 하나님의 사랑과 행복을 나누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통해야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이웃을 사랑하고 행복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또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특권이요 영광인 것입니다. 대통령의 특사가 된 것도 영광스러운데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서 사랑을 나누고 행복을 나눌 수 있는 우리가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큰 부자가 되고 능력이 있어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나보다 못한 사람 많으니까 잘난 사람만 자꾸 쳐다보고 살지 말고 나보다 못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보다 못한 사람을 위해서 나의 것을 나누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요, 가치요,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이 땅에서 내가 가장 가치 있고 행복된 삶을 사는 것은 사랑과 행복나누기 운동인 것입니다. 저는 50년의 사역을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 가운데 마치고 내 사랑하는 영적 아들인 제자 이영훈 목사에게 강단을 맡기고 난 다음에 사랑과 행복나누기에 일선에 서서 여러분의 인도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사랑과 행복을 나눠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행복을.. 이 땅에 슬픔과 고통 속에 눈물 흘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있지 않을 때까지 사랑과 행복 나누는 운동에 우리가 나가면 진실로 하나님의 사업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과 행복 나누는 일에 사자가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사탄은 자기만 알고 탐욕으로 움켜쥐기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있는 것을 다 내어 놓아주신 하나님이시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서 사랑과 행복을 나누어 주므로 우리도 사랑받고 행복해 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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