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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향한 부르심

고린도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764 추천 수 0 2009.12.15 23:5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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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후3:17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8713 
emoticon판넨베르크

우리는 자유를 모든 개인들이 자연적으로 준비해야할 기본적인 것으로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존 로크 이래로 근대의 자유사상이 언급되었으며, 또한 이런 이해의 뿌리는 스토아 자연법까지 소급됩니다. 로크는 1688년의 명예혁명 2년 후인 1690년에 정부 제도에 대한 아주 유명한 논문 두 편을 썼습니다. 여기서 그는 정치권력의 행사를 판단하는 기준의 토대가 모든 인간이 본성적으로 완전한 자유를 갖고 태어났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자기의 행동과 소유물과 자기의 인격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는 자유의 천부권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서구 사회는 지금까지 인간의 일반적 자유라는 사상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럽의 자유주의만이 아니라 스토아 자연법 유산과 기독교의 유산을 바라보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자유사상은 원시 기독교의 구원 신앙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방식으로 원시 기독교 저술가인 두 명의 위대한 신학자에게 해당됩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과 복음서 기자 요한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스토아의 자유법이나 현대 자유주의와는 전혀 다르게 자유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영이 있는 그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다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향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이 그를 구속하고 지배할 경우에만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경우에만 자유롭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를 충만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단지 최고 이성만이 아닙니다. 성령은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성령은 부활절 사신(使信)의 영으로서 모든 인류를 지향합니다. 그 영은 사랑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이 말은 모든 인간이 자유로운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의 영에 연결되어 있는 기독교인들만이 자유롭다는 의미처럼 들립니다. 요한이 그렇게 말합니다. 요한복음의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말하듯이 “자유롭게 태어난 사람”은 노예로 태어난 사람과 달리 실제로 자유롭다는 사실을 일종의 망상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왜 망상일까요?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이 자기 생명의 중심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급기야 그를 살해함으로써 죄인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죄를 행하는 자는 바로 죄의 노예입니다.”(요 8:34).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자신 안에 머물러서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에 정반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부자유합니다. 이런 부자유로 인해서 우리가 우리의 행위와 소유를, 그리고 우리의 고유한 인격을 마음대로 처리해버리는 일을 바꾸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없이 우리 자신을 다룰 때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해버리는 방식에 이미 길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려고 함으로써, 또한 우리가 우리의 고유한 의지를 우리 행동의 최고 기준으로 만들고, 그래서 거기서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함으로써,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그리고 하나님과의 연결에서 얻을 수 있는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그리스도는 자유를 필요로 하는 청중들이 실제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컨대 해방신학을 선포하는 신학자들은 인간이 자기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런 해방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인간이 해방되는 게 절대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의 참된 자유를 자신의 업적이나 노력, 혹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혁명을 통해서 이룩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자기 해방을 성취하라는 약속과 호소는 인간이 내면적으로 이미 자유롭다는 사실을, 따라서 단지 외적인 한계를 극복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이미 전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외적인 한계는 인간이 자기 자유를 철저하게 사용하기 어렵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자기를 완전히 성취시키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선천적으로는 쇠사슬에 매여 있습니다.” 이 말은 성서의 선포가 아닙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오히려 다음과 같이 진술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힘이 그 어떤 제한 없이 행사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역시 내면적으로 부자유합니다. 인간은 내적인 부자유로부터의 해방이 필요합니다. 이 자유롭지 못함은 하나님과의 분리에 근거하고 있으며, 완전한 자유를 스스로 성취할 수 있다는 망상과 아주 손쉽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내적인 부자유로부터의 해방은 요한복음의 그리스도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아들이 당신들을 자유롭게 하면, 당신들은 정말로 자유로워질 것입니다.”(요한복음 8:36).

이런 점에서는 바울과 요한은 완전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아들을 통해서만, 그리고 부활한 우리 주님으로부터 오신 성령을 통해서만 자유를 획득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통해서만 이런 자유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개개의 인간들이 근본적으로, 또한 실제로 늘 거듭해서 자기를 결정할 가능성과 의무가 있다는 사실은 논란의 여지없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 사신이 의미하는 바에 의하면 이로 인해서 곧 인간의 고유하고 참된 자유가 달성되는 것은 아직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선택과 결정의 자유는,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는 자유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자유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신의 자유를 자기 확대에만 소진하면서 종교적 주제를 모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과 요한이 언급하는 자유를 아무 말 없이 양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지 모든 각 사람들의 종교적 생활방식에 기초가 되는 선택의 자유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 자유가 획득된다고 생각한 원시 기독교의 입장은 결코 이론적인 가능성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근대의 인간 문화가 걸어온 길의 진면목을 가리킵니다. 자기의 행동과 소유와 인격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자유를 인간이 명실상부하게 확보할 수 있다면,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해방을 확보할 수 있다면 이런 기독교의 입장을 허물어뜨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최고로 발전된 민주사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생명과 관계된 것들을 얻을 가능성이 증가됨으로써 인간이 결정해야할 부분도 증가되었는데, 이 증가는 근대적 삶의 조급증에서 아주 현저한 현상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인간은 자기 삶의 고유한 내용을 빼앗깁니다. 이 문제는 대개의 인간들이 생명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포착하기 위한 수단을, 또한 그 생명을 한 측면만이 아니라 모든 측면으로 전개시키기 위한 적절한 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만 연관된 건 아닙니다. 자동차나 여행, 혹은 주택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시민의 자유 권리에 대한 형식적 성격을 비판하는 이들은 이런 관점만을 집중적으로 비판했습니다.

즉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최소한의 사람들만이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들을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다고 말입니다. 시민적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가들이 생각하듯이 이런 이유로 인해서 자신들을 위한 선택의 자유는 공허한 형식이 됩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한 답변은 복지 사회를 달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인간의 생명에 대한 질문은, 그리고 고유한 생명의 내용에 대한 질문은 이런 방식으로 제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키기도 했습니다. 삶의 많은 가능성은 생명을 갖가지로 달성해보려는 욕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가장 중요한 것을 소진시키게 됩니다. 밖에서 발생되는 조급증과 내적인 불안은 우리로 하여금 고유한 것과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이런 것을 실제로 포착하기 위해서는 아마 많은 부분에서 다른 것들을 포기해야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 번에 모든 것을 다 실행하거나 소유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 경우에 좀 더 심원한 차원에서는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머물 수 있고, 따라서 우리 자신과 일치를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생명에 고유한 내용을, 따라서 그 단일성과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고수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정체성을 향한 부르심은 오늘날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아주 많은 사람들이 외형적으로 잘 살지만 자기 자신과는 하나가 되지 못한 상태에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정치적 자유 개념에서 실망할 때 강력한 반작용을 일으킵니다. 정치적 자유가 인간의 휴머니티를 성취시킨다고 선포되고 사람들이 그것을 믿도록 학습된다면 약속된 결과가 달성되지 못할 경우에 선택의 가능성과 자기를 전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확대된다고 하더라도 속았다는 느낌과 정치 체제에 대한 증오가 생산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 체제는 이런 자유가 근본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유는 자기의 행위와 자기의 소유와 자기의 인격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자유뿐이라고 여길 경우에 오히려 그 자유가 달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일상에 묶여 있는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정치 체제와 정치 행위에도 역시 해당됩니다. 자유와 휴머니티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고수해야만 한다면 자유사상은 분명히 훨씬 심원한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일이 요한과 바울에게서 발생했습니다. 여기서 자유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유지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됨으로써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일치함으로써 초대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의 재물과 권세에 내면적으로 의존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내면적인 비(非)의존성으로 인해서 급기야 순교까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은 ‘기독교인의 자유’를 재발견함으로써 근대적 자유 역사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크롬웰과 밀턴 시대인 17세기에 일어난 영국 혁명은 바로 이런 기독교인의 자유를 세계화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헤겔도 역시 하나님과의 연결을, 절대와의 단일성을 근대적 자유사상에 대한 고유한 토대로 생각했습니다. 결국 근대의 자유 파토스에서 자유라는 말이 인간 운명의 총괄 개념으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 파토스는 이런 종교적 뿌리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자기 소유를 마음대로 처리하고 선택할 수 있는 단순한 자유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정치가 기독교적인 책임감에서 형성되고 추구되는 곳에서는 자유의 심원한 의미가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친교에 토대하고 있는 인간의 자기 정체성으로 자리를 잡게 되며, 또한 정치적 논의와 실천으로 작용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아니면 최소한 이를 통해서 망상과 실망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망상과 실망은 자기 처리 능력과 자기실현이라는 의미에서 자유 권리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유를 단지 소비하는 자유로 평가 절하하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자유가 우선적으로 성서의 하나님과,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의 활동과 진지하게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신약성서의 자유 이해와는 정반대의 자리로 떨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참된 자유와 그리스도 영의 연결이 정치적 행위 공간까지 진지하게 수용된다고 기대할 수 있을까요? 바울과 요한에 의하면 그리스도만이 자유에 관여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독일 사회에서 인간의 정치적 동맹은 기독교인들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분명히 자유가 정치적 사유와 실천의 준거라고 한다면, 여기서 자유는 보다 일반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할까요?
하나님과의 연결에서 자라나는 자유는 기독교인의 특별한 자유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자유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인간이, 새로운 아담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상(像)에 따라서 우리 모두는 새롭게 지음을 받은 게 틀림없습니다. 로마서에서 이르기를, 모든 피조물은 무상성의 멍에로부터 하나님 자녀의 자유로 해방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불빛에서 자유를 얻습니다(롬 8:21). 기독교인의 자유는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특수한 그 무엇이 아닙니다. 그 자유에 우주의 운명이, 특히 전 인류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일치라는 이러한 운명을 억지로 강요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더욱이 인간의 역사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실제적이거나 참된 것처럼 생각되는 구원을 성취해나가도록 강제한 시도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제적인 구원이, 즉 하나님과의 참된 연결이 그런 것으로 촉진되는 게 틀림없다는 주장은 공허합니다. 기독교 교회는 기독교의 역사에서 인간을 강제로 구원받게 하는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신앙의 강요는 자유와 일치될 수 없습니다.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구원은 자유 안에서만 획득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의 증오를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 얼마나 진지한가에 대한 징표입니다. 하나님 아들의 십자가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서라는 부르심을 방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한 결과입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도 이 시대를 향해서 이 부르심을 방기하면 안 됩니다. 그가 정치인일 때이든지, 그리고 정치를 기독교적인 책임감에서 수행할 때이든지 상관없이 언제나 이런 부르심을 제시해야만 합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과의 일치에서만 획득될 수 있는 참된 자유를 모색해야 하는데, 이것은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형식에 대한 정치적 결단을 통해서 끝나버리는 게 아니라 개방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에 바로 기독교가 바라보는 인간 존엄의 근본 가치에 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기독교적 의미는 우리 헌법을 최고의 기준으로 상승시키는데, 이는 정당합니다. 국가나 정치적 행위에 앞서 인간 존엄성의 신성불가침은 인간이 하나님의 궁극적 법정에 속해 있으며, 따라서 정치적 법정의 전체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사실의 다른 측면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미 도덕적 금지에 대한 구약의 하나님 법은 인간의 생명을 신성불가침으로 설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또한 하나님에게 속했기 때문입니다(창 9:6). 오늘에 이르기까지 상존하는 인간 존엄성의 신성불가침에 대해 우리가 확신하는 뿌리가 바로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인간의 인격적 존엄성입니다.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 이해하는 우리의 생각은 인간의 신성불가침에 대한 이런 사상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신성불가침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해석하고 있는 계명에는 바로 인간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기독교적인 뿌리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져야 할 자유에 대한 권리는 근대의 인권 전통을 확고히 했습니다. 사상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는 우리를 인간으로 규정해주는 자유 자체의 고유한 내용을 충분하게 형성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유들은 여기서 없어서는 안 될 조건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자유들은 인간의 고유한 운명에 공간을 확보해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자유는 주로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자유에 대한 민주주의의 법이 의미를 근본적인 의미를 확보하려면 그런 자유에 토대하고 있는 인간 운명에 대한 적극적인 지평이 구체적으로 거론되어야 합니다. 이 지평이 법조문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경우에 이 지평은 우리 헌법의 기본권을 해석할 수 있는 토대로 작동하지 못합니다. 이 헌법의 기독교적 배경이 우리 사회의 공적 의식에서 퇴색되지 않아야만 할 경우라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문제는 특히 가정과 교육 정치에서 논란이 되는 질문에 이르기까지 효력을 미칩니다. 당연히 국가와 종교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국가가 개인의 종교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은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과 혼동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종교 자유의 보장은 일종의 종교적 전제를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이 국가에 속한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 인간 존엄의 신성불가침 사상에 토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와 자연법, 기독교적 자유 이해와 스토아적, 혹은 자유주의자들의 자유 이해를 연결시켜주는 접점입니다. 그러나 이런 연결은 인권의 양식(樣式)이 전적으로 다른 의미를 충분하게 확보하지 못했거나, 혹은 의무적인 인간 형상의 내용을 상실한 게 틀림없는 경우에 해석을 필요로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유대인들의 예배 시에 낭독되는 모세 율법과 연관됩니다. 이 말씀은 인권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에도 유효합니다. 우리 헌법의 인권을 해석하고 있는 판사와 정치가들의 용모는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어떤 덮개로 가려져 있습니다. 모세의 얼굴이 덮개로 가려짐으로써 백성들은 법의 고유한 근거이며 보증인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하나님과 모세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인 출애굽기에서 인용하고 있듯이 그의 얼굴에서 덮개가 벗겨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서게 되면, 덮개는 우리의 마음에서 벗겨지게 될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자유에 대한 고유한 근거와 의미를 덮고 있던 그것이 말입니다. 즉 “주님의 영이 있는 곳, 바로 그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1979.10.14. 바이커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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