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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일3: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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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718 |
2006. 4.30.
영지주의적 세계관
우리는 신구약성서를 읽을 때마다 곤혹스러움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어련히 좋은 말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만 접하면 아무런 어려움이 눈에 뜨이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장벽을 만나는 일이 많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를 들어볼까요? 요한일서 기자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현을 여러 번 했습니다. 1절 말씀을 보세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그 큰 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 뒤로 2절에도 그런 표현이 나오고 10절에서는 악마의 자식이라는 표현과 대칭적으로 나옵니다. “옳은 일을 하지 않거나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께로부터 난 자가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식은 분명히 구별됩니다.” 오늘 본문 전체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저는 설교의 제목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잡았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도대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게 무슨 뜻인가요? 우리는 이런 표현을 이미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너무나 쉽게 사용합니다. 그렇지만 막상 따지고 들면 답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간단하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들처럼 자식을 낳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사람처럼 생기셔서 자기와 똑같이 생긴 우리를 자식으로 낳았다는 뜻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현은 분명히 비유이지 실제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일치시키기는 좀 어려움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배타적인 성격이 강한데 비해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그런 관계를 훨씬 초월하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이 아니라 믿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모두가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정확하게 묘사한 것으로 보기 힘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은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앞서 읽은 10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자녀는 악마의 자녀와 구별된다고까지 합니다. 도대체 이게 말이 될까요? 누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누가 악마의 자녀입니까? 만약 하나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가 구별된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성서의 기본적인 진술은 모순에 빠집니다. 하나님이 창조했는데도 불구하고 악마의 자녀가 생겼다면 그건 곧 하나님의 책임이니까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하나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를 구별했다는 사실은 성서 기자가 영지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는 헬라 문화권에 영지주의가 보편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에 성서 기자들도 직간접적으로 그런 영향을 받았습니다.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라는 요한복음의 진술도 역시 영지주의에 영향 받은 흔적입니다. 영지주의는 기본적으로 이원론적인 세계관입니다. 선과 악, 성과 속, 빛과 어둠, 영혼과 물질 등등, 이렇게 이 세상을 대립적인 힘의 충돌로 보려는 세계관입니다.
비록 신약성서 기자들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게 성서의 권위를 근본적으로 손상시키지는 않습니다. 오늘 성서를 읽는 사람들은 그것을 잘 구분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성서기자들은 영지주의적 세계관을 전하려는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구분해낼 수만 있으면 이건 큰 문제가 아닙니다.
죄의 현실
지금 요한일서 기자는 영지주의적 개념을 통해서 정작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핵심은 인간 삶을 지배하고 있는 죄의 현실입니다. 요한일서 기자는 지금 교회를 분열시킬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을 훼손시키는 악한 힘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 악한 힘들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세속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에 영합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죄를 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로 말한다면 일종의 ‘구원파’에 속한 이들로서 그들은 자신들이 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죄는 영혼과 관계없는 육체가 짓는 것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구원받은 이들은 죄를 짓는다고 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2천 년 전 영지주의적 해석이 오늘도 우리를 그대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남을 나쁘게 만드는 행위, 파렴치한 행위만을 죄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만 않는다면, 또는 밖으로 드러나지만 않는다면 무슨 생각을 하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여깁니다. 이런 게 곧 영지주의적 죄 이해입니다. 예컨대 오늘 ‘과소비’가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오히려 경제학자들은 내수 소비가 위축되었기 때문에 경제가 발전하지 않는다고 분석하면서, 소비를 현대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가치로 부각시킵니다. 제가 보기에 생산과 소비 중심의 현대적인 삶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이 현상은 죄의 현실을 심각하게 여기지 못하는 일종의 영지주의적 세계관입니다.
요즘 석유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습니다. 사회학자들은 중국의 기름 소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고 합니다만, 그게 옳은 지적이든 아니든 소비를 기초로 해서 작동되는 사회에서는 이런 일들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편리하게 사는 것에만 관심을 쏟기 때문에 기름을 과하게 소비하는 것에 관해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즉 그들은 그런 소비는 우리의 육체의 속성을 따르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만 합니다. 철저하게 이원론적인 생각이지요.
소비중심의 삶이 인간의 영혼을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하는지에 대해서는 제가 이 자리에서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단적으로 소비에 중독된 풍요로운 이 시대의 삶이 점점 밋밋해져간다는 사실은, 당연한 결과로 현대인들이 여흥만 추구하고 있는 사실은 바로 그것에 대한 반증입니다. 저는 옛날에 비해서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죄의 현실은 훨씬 은밀하다는 점만은 짚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통찰이 없으면 성서 텍스트는 우리에게 죽은 문자로 남기 때문입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세계의 축제인 월드컵이 독일에서 열립니다. 수십억의 사람들을 몇 주일간 환호의 도가니로 몰고 갈 이 월드컵 때 사용되는 축구공은 인도와 파키스탄 같은 나라의 어린아이들이 만든 것입니다. 물론 노동력의 착취입니다. 초국가 기업들이 생산해내고 있는 상품과 엔터테인먼트는 기본적으로 그 밑에 죄를 깔고 있습니다. 한 마리의 육우를 키우기 위해서 소비되는 곡식은 제삼세계 결식아동들의 생존에 필요한 먹을거리이기도 합니다. 저는 인간 문명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것이 끌고나가는 죄의 그림자를 눈여겨보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우리 스스로 죄를 생산하는 거대한 조직의 일원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영지주의자들과 격렬하게 투쟁했습니다. 인간은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와 일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육체가 병들면 영혼도 병들고, 영혼이 병들면 육체도 역시 병든다고 보았습니다. 육체의 죄는 곧 영혼의 죄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언제나 죄를 짓는 자는 악마에게 속해 있습니다. 사실 죄는 처음부터 악마의 짓입니다.”(8절)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현실을 얼마나 절실하게 생각했으면, 창조자 하나님이라는 신앙에 모순을 일으킬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렇게 악의 독립적인 근원을 주장했겠습니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죄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마 여러분 중에서는 이렇게 질문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죄가 그렇게 엄중하다면, 그리고 내가 거역할 수 없는 악마의 힘이 있다고 한다면 아예 죄를 짓지 않을 생각을 포기하는 게 속편한 거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일리 있는 주장입니다. 이런 염려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세속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해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수도원으로 도피하든지 그와 비슷한 공동체 운동으로 헌신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건 실제적인 대안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광야나 수도원이 아니라 시장 바닥에서 살아나야 합니다. 예수님도 주로 길거리와 시장에서 사람들을 만나셨지 그런 구체적인 삶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죄의 현실이 지배하는 이 세상 안에서 살아야 하지만, 우리에게는 죄를 분간할 능력도, 그것을 극복할 능력도 없다는 게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빠져 있는 딜레마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결코 죄와 악을 궁극적인 승리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힘을 잃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 죄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건 아닙니다. 죄는 훨씬 근원적인 악마의 능력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이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악을 이기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이 세상에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5,6a) 이어서 9절 말씀도 보십시오. “구구든지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자기 안에 하느님의 본성을 지녔으므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이기 때문에 도대체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요한일서 기자는 이 문제를 매우 단정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읽는 우리는 무조건 아멘으로 대답하기에는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없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이런 선언은 우리를 부담스럽게 만듭니다. 물론 우리가 어느 정도 노력하면 남에게 나쁜 일은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남에게 구체적으로 나쁜 일을 행하는 것만을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건 단지 일반적인 윤리에 속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적극적으로 옳은 일을 하지 않거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까지를 포함해서 죄라고 말합니다. 이런 기준에 따른다면 어느 누구도 죄인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기자는 1:10절에서 이렇게 분명하게 언급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을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이기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중에 죄를 짓습니다. 성서는 이 사실을 정확하게 뚫어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성서는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쪽으로는 죄인이라고 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두 주장은 모순이 아니라 서로 다른 현실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것은 우리의 실제적인 모습이고,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실제로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죄가 없다고 인정한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모른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우리도 정확하게 모르면 곤란합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죄가 없다고 인정하신다는 사실은 곧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느님의 그 큰 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에 감격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곧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분의 자녀가 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려고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이 억지로 시켜서가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 대하여 이러 희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순결하게 합니다.” 이게 곧 하나님의 자녀에게 나타나는 삶의 증거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소비와 소유와 자기 확대에 머물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그렇게 투쟁하듯 살아갑니다.
영지주의적 세계관
우리는 신구약성서를 읽을 때마다 곤혹스러움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어련히 좋은 말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만 접하면 아무런 어려움이 눈에 뜨이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장벽을 만나는 일이 많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를 들어볼까요? 요한일서 기자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현을 여러 번 했습니다. 1절 말씀을 보세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그 큰 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 뒤로 2절에도 그런 표현이 나오고 10절에서는 악마의 자식이라는 표현과 대칭적으로 나옵니다. “옳은 일을 하지 않거나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께로부터 난 자가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식은 분명히 구별됩니다.” 오늘 본문 전체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저는 설교의 제목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잡았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도대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게 무슨 뜻인가요? 우리는 이런 표현을 이미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너무나 쉽게 사용합니다. 그렇지만 막상 따지고 들면 답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간단하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들처럼 자식을 낳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사람처럼 생기셔서 자기와 똑같이 생긴 우리를 자식으로 낳았다는 뜻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현은 분명히 비유이지 실제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일치시키기는 좀 어려움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배타적인 성격이 강한데 비해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그런 관계를 훨씬 초월하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이 아니라 믿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모두가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정확하게 묘사한 것으로 보기 힘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은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앞서 읽은 10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자녀는 악마의 자녀와 구별된다고까지 합니다. 도대체 이게 말이 될까요? 누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누가 악마의 자녀입니까? 만약 하나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가 구별된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성서의 기본적인 진술은 모순에 빠집니다. 하나님이 창조했는데도 불구하고 악마의 자녀가 생겼다면 그건 곧 하나님의 책임이니까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하나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를 구별했다는 사실은 성서 기자가 영지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는 헬라 문화권에 영지주의가 보편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에 성서 기자들도 직간접적으로 그런 영향을 받았습니다.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라는 요한복음의 진술도 역시 영지주의에 영향 받은 흔적입니다. 영지주의는 기본적으로 이원론적인 세계관입니다. 선과 악, 성과 속, 빛과 어둠, 영혼과 물질 등등, 이렇게 이 세상을 대립적인 힘의 충돌로 보려는 세계관입니다.
비록 신약성서 기자들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게 성서의 권위를 근본적으로 손상시키지는 않습니다. 오늘 성서를 읽는 사람들은 그것을 잘 구분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성서기자들은 영지주의적 세계관을 전하려는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구분해낼 수만 있으면 이건 큰 문제가 아닙니다.
죄의 현실
지금 요한일서 기자는 영지주의적 개념을 통해서 정작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핵심은 인간 삶을 지배하고 있는 죄의 현실입니다. 요한일서 기자는 지금 교회를 분열시킬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을 훼손시키는 악한 힘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 악한 힘들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세속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에 영합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죄를 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로 말한다면 일종의 ‘구원파’에 속한 이들로서 그들은 자신들이 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죄는 영혼과 관계없는 육체가 짓는 것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구원받은 이들은 죄를 짓는다고 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2천 년 전 영지주의적 해석이 오늘도 우리를 그대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남을 나쁘게 만드는 행위, 파렴치한 행위만을 죄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만 않는다면, 또는 밖으로 드러나지만 않는다면 무슨 생각을 하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여깁니다. 이런 게 곧 영지주의적 죄 이해입니다. 예컨대 오늘 ‘과소비’가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오히려 경제학자들은 내수 소비가 위축되었기 때문에 경제가 발전하지 않는다고 분석하면서, 소비를 현대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가치로 부각시킵니다. 제가 보기에 생산과 소비 중심의 현대적인 삶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이 현상은 죄의 현실을 심각하게 여기지 못하는 일종의 영지주의적 세계관입니다.
요즘 석유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습니다. 사회학자들은 중국의 기름 소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고 합니다만, 그게 옳은 지적이든 아니든 소비를 기초로 해서 작동되는 사회에서는 이런 일들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편리하게 사는 것에만 관심을 쏟기 때문에 기름을 과하게 소비하는 것에 관해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즉 그들은 그런 소비는 우리의 육체의 속성을 따르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만 합니다. 철저하게 이원론적인 생각이지요.
소비중심의 삶이 인간의 영혼을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하는지에 대해서는 제가 이 자리에서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단적으로 소비에 중독된 풍요로운 이 시대의 삶이 점점 밋밋해져간다는 사실은, 당연한 결과로 현대인들이 여흥만 추구하고 있는 사실은 바로 그것에 대한 반증입니다. 저는 옛날에 비해서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죄의 현실은 훨씬 은밀하다는 점만은 짚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통찰이 없으면 성서 텍스트는 우리에게 죽은 문자로 남기 때문입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세계의 축제인 월드컵이 독일에서 열립니다. 수십억의 사람들을 몇 주일간 환호의 도가니로 몰고 갈 이 월드컵 때 사용되는 축구공은 인도와 파키스탄 같은 나라의 어린아이들이 만든 것입니다. 물론 노동력의 착취입니다. 초국가 기업들이 생산해내고 있는 상품과 엔터테인먼트는 기본적으로 그 밑에 죄를 깔고 있습니다. 한 마리의 육우를 키우기 위해서 소비되는 곡식은 제삼세계 결식아동들의 생존에 필요한 먹을거리이기도 합니다. 저는 인간 문명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것이 끌고나가는 죄의 그림자를 눈여겨보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우리 스스로 죄를 생산하는 거대한 조직의 일원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영지주의자들과 격렬하게 투쟁했습니다. 인간은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와 일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육체가 병들면 영혼도 병들고, 영혼이 병들면 육체도 역시 병든다고 보았습니다. 육체의 죄는 곧 영혼의 죄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언제나 죄를 짓는 자는 악마에게 속해 있습니다. 사실 죄는 처음부터 악마의 짓입니다.”(8절)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현실을 얼마나 절실하게 생각했으면, 창조자 하나님이라는 신앙에 모순을 일으킬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렇게 악의 독립적인 근원을 주장했겠습니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죄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마 여러분 중에서는 이렇게 질문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죄가 그렇게 엄중하다면, 그리고 내가 거역할 수 없는 악마의 힘이 있다고 한다면 아예 죄를 짓지 않을 생각을 포기하는 게 속편한 거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일리 있는 주장입니다. 이런 염려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세속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해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수도원으로 도피하든지 그와 비슷한 공동체 운동으로 헌신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건 실제적인 대안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광야나 수도원이 아니라 시장 바닥에서 살아나야 합니다. 예수님도 주로 길거리와 시장에서 사람들을 만나셨지 그런 구체적인 삶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죄의 현실이 지배하는 이 세상 안에서 살아야 하지만, 우리에게는 죄를 분간할 능력도, 그것을 극복할 능력도 없다는 게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빠져 있는 딜레마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결코 죄와 악을 궁극적인 승리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힘을 잃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 죄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건 아닙니다. 죄는 훨씬 근원적인 악마의 능력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이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악을 이기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이 세상에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5,6a) 이어서 9절 말씀도 보십시오. “구구든지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자기 안에 하느님의 본성을 지녔으므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이기 때문에 도대체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요한일서 기자는 이 문제를 매우 단정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읽는 우리는 무조건 아멘으로 대답하기에는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없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이런 선언은 우리를 부담스럽게 만듭니다. 물론 우리가 어느 정도 노력하면 남에게 나쁜 일은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남에게 구체적으로 나쁜 일을 행하는 것만을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건 단지 일반적인 윤리에 속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적극적으로 옳은 일을 하지 않거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까지를 포함해서 죄라고 말합니다. 이런 기준에 따른다면 어느 누구도 죄인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기자는 1:10절에서 이렇게 분명하게 언급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을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이기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중에 죄를 짓습니다. 성서는 이 사실을 정확하게 뚫어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성서는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쪽으로는 죄인이라고 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두 주장은 모순이 아니라 서로 다른 현실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것은 우리의 실제적인 모습이고,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실제로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죄가 없다고 인정한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모른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우리도 정확하게 모르면 곤란합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죄가 없다고 인정하신다는 사실은 곧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느님의 그 큰 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에 감격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곧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분의 자녀가 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려고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이 억지로 시켜서가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 대하여 이러 희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순결하게 합니다.” 이게 곧 하나님의 자녀에게 나타나는 삶의 증거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소비와 소유와 자기 확대에 머물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그렇게 투쟁하듯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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