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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겔37: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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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726 |
2006. 6.4.
에스겔의 환상과 이스라엘
에스겔은 남 유대의 멸망과 포로시기에 살던 제사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기록한 에스겔서는 신구약성서 전체를 통해서 가장 독특한 문학 형태를 보여줍니다. 소위 묵시문학이라는 형태의 이런 텍스트는 극단적인 상징을 통해서 그 당시의 현실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흡사 초현실주의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 상징의 표면적인 것에 머물지 말고 그것이 가리키려고 하는 실체 안으로 뚫고 들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에스겔서 읽기는 조금 고단한 작업입니다.
에스겔은 야훼의 기운이 자신을 들판 한 가운데로 끌어냈다는 말로 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흡사 천사의 손에 잡혀 공중 부양하듯이 에스겔은 들판을 두루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 들 바닥에는 마른 뼈들이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꽃과 숲, 귀여운 사슴을 비롯한 여러 동물과 식물들이 생명의 풍요로움을 나타내고 있어야 할 들판이 죽음의 골짜기로 변해 있었습니다. 야훼는 에스겔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 날 것 같으냐?” 에스겔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주 야훼여, 당신께서 아시옵니다.” 그 뒤로 야훼와 에스겔의 대화가 계속됩니다. 야훼는 마른 뼈들에게 당신의 말을 전하라고 에스겔에게 명령하십니다. “마른 뼈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뼈들에게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 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4-6)
에스겔이 야훼의 명령을 그대로 전하자 뼈들이 움직이면서 서로 붙은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힘줄이 이어졌고, 살이 붙었으며, 가죽이 씌어졌습니다. 이제 이 뼈들은 완전히 사람 모양을 갖추게 되었지만 아직 숨을 쉬는 건 아니었다. 여기서 야훼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두 번째 단계의 명령을 내리십니다. “주 야훼가 말한다. 숨아, 사방에서 불어 와서 이 죽은 자들을 스쳐 살아나게 하여라.”(9절) 에스겔에 야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숨에게 말을 전하자 숨이 불어와 이 시체와 같았던 것들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위의 내용은 신기한 마술처럼 보입니다. 사람이 죽어 여기저기 흩어졌던 뼈들이 서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소리가 나고, 힘줄과 살이 붙어서 사람의 꼴을 갖추더니 급기야 생명의 숨이 그들에게 들어가서 실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것은 실제의 사건이 아니라 묵시문학적 상상력입니다. 이 이야기가 전하려는 원래의 메시지는 따로 있습니다. 오늘 본문 11-14절이 그것을 설명합니다.
에스겔은 야훼 하나님에게서 이 마른 뼈 상징에 관해서 설명을 듣습니다. 마른 뼈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나라를 잃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 왔습니다. 고국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운명도 마른 뼈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의 삶은 이미 무덤에 장사된 것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그들을 무덤에서 끌어내서 고국으로 돌려보낸다는 약속으로 이런 환상을 에스겔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결론인 14절 말씀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의 기운을 불어 넣어 살려 내어 너희로 하여금 고국에 가서 살게 하리라. 그제야 너희는 나 야훼가 한번 선언한 것을 그대로 이루고야 만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야훼가 하는 말이다.”
야훼의 기운
만약 에스겔서가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 해방만을 언급하는 문서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별로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인 상황을 담고 있긴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야훼 하나님의 통치, 그의 구원행위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의미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구약성서를 읽으면서 늘 그 차이를 예민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치, 문화, 예술은 우리에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 에스겔의 환상 이야기에서 야훼의 기운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마른 뼈와 똑같은 신세로 전락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훼께서 당신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면 무덤 같은 바벨론을 벗어나서 고국인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야훼의 영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좀 더 리얼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에스겔은 앞에서 바른 뼈에 대한 환상을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창세기 2장의 창조설화와 연관됩니다. 야훼 하나님이 진흙으로 사람을 만든 다음에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2:7)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람의 형체를 가졌지만 아직 숨 쉬지 못하던 송장을 사방에서 불어온 숨이 살렸다고 합니다. 창세기의 입김, 에스겔의 숨은 모두 히브리어로 ‘루아흐’의 번역입니다. 루아흐, 곧 야훼의 영이 모든 생명을 가능하게 하고, 소생시키는 근원이라는 게 구약성서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여러분들은 야훼의 기운, 혹은 야훼의 영이라는 말이 별로 손에 잡히지 않을 겁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는 것을 어떻게 우리가 믿을 수 있을까요? 만약 우리의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만 현실이며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영으로 번역되는 루아흐는 재미있게도 바람으로도 번역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람을 곧 생명의 원천으로 본 것입니다. 따뜻한 바람은 초목에 새순을 돋게 하고 꽃을 피우며, 차가운 바람은 초목을 시들게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숨이 끊기고 살아있을 때는 숨이 붙어있습니다. 이런 걸 보면 바람과 영은 비슷합니다. 성서기자들은 이렇게 인간의 생명과 초목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그 근원이 보이지 않는 루아흐, 즉 야훼의 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그 야훼의 기운도 역시 이런 영입니다. 이 영에 의해서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인격적인 영
위의 설명을 들은 여러분은 영이 곧 생명 원리라는 생각이 들지 모르겠군요. 진화의 원리나 유전자의 원리, 또는 기(氣) 말입니다. 오늘 본문 9절은 그런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너 사람아,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숨아 사방에서 불어 와서 이 죽은 자들을 스쳐 살아나게 하여라.” 차력사들이 자신들의 실력을 실행하기 전에 기를 모아들이는 장면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성서가 증언하는 야훼의 영은 단순히 자연적인 생명의 원리나 동양에서 말하는 기가 아니라 인격입니다. 14b절을 보십시오. “그제야 너희는 나 야훼가 한번 선언한 것을 그대로 이루고야 만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 야훼 하나님은 어떤 분위기와 조건만 맞으면 저절로 작동되는 원리가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서 이 세계와 역사를 이끌어가는 인격체라는 말씀입니다.
거의 무덤 속에 들어가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에서 에스겔은 바로 인격적인 영으로 활동하시는 야훼 하나님에게 희망을 걸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야훼 하나님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어 자신의 선언과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가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걸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은 메시아가 아니라 저주받은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선언한 것을 그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이 십자가로 죽은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예상을 뒤엎고 자신의 의지로 생명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야훼 하나님은 이런 점에서 바로 우리의 참된 희망입니다.
오늘 현대인의 삶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보십니까? 2천5백 년 전 에스겔이 살던 시대처럼 들판에 마른 뼈들이 뒹굴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라크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팔레스타인 분쟁도 역시 한숨 돌릴 날이 별로 없습니다. 가난한 나라와 가난한 사람들이 그 가난을 벗어날 길은 아주 요원해 보입니다. 우리의 남북분단 체제는 아직 요지부동입니다. 지역구도가 얼마나 심각한지 우리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여실하게 보았습니다. 조금 잘 살아보겠다는 생각으로 새만금 갯벌을 파괴하고, 조금 빠른 기차를 타겠다고 천성산을 비롯하여 많은 산과 들의 숨통을 조였습니다.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은 곧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존층이 완전히 파괴되고, 지구의 사막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며, 인간성이 말살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야훼 하나님은 “한번 선언한 것을 그대로 이루고야 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영이십니다. 생명을 창조하시고 유지하고 완성하시는 영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어 마른 뼈에게 숨을 허락하시는 능력이십니다. 그분은 포로의 삶에서 자유의 삶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 우리를 이끌어내시는 그런 생명의 영이십니다. 우리는 에스겔과 함께 그런 하나님에게 모든 희망을 걸어둔 사람들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전할 사명
야훼 하나님이 마른 뼈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희망하는 우리는 단지 그런 일이 일어날 때까지 무조건 기다리기만 하면 될까요? 궁극적으로는 생명의 영만이 생명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훼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준 사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라고 구체적으로 두 번에 걸쳐서 명령하셨습니다. 한번은 3b절에 기록되어 있는 “이 뼈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이며, 다른 한번은 9a절의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입니다. 뼈는 물질이고, 숨은 영입니다. 생명은 이런 물질과 영이 신비한 방식으로 결합된 것입니다. 뼈가 제 모습을 갖추도록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그 뼈에 전하고, 그 모습에 들어가서 그것들이 살아나게 하라고 숨에게 전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에게 뼈와 숨에게 말을 걸 수 있는 그런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우리가 어떻게 그들에게 야훼의 명령을 전한단 말인가요?
여기서 야훼의 명령을 전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알린다는 의미입니다. 학생들이 선생님의 심부름을 할 경우에도 사실을 그 선생님의 뜻이 중요한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늘 이것을 우리가 받은 최선의 사명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부활이 궁극적인 생명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향해서 그 사실을 전할 사명이 주어졌다는 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전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생명의 현실들이 각성될 수 있도록 이 세상을 흔들어 깨우는 일도 필요합니다. 뼈들에게 말을 한다는 건 그들에게 생명의 영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위해서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보다 근원적이고 심층적인 생명의 세계를 세상에 알리고, 필요한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더 우선적인 일은 우리 자신이 마른 뼈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보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걸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만이 그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풍성한 생명의 리얼리티를 내면세계에 확보하고 있는지 아니면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처럼 죽어 있는지는 자기 자신이 가장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의 기준이 없는 건 아닙니다. 야훼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의 삶은 신비로운 기쁨과 평화로 가득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존재의 용기도 생기고, 타인과의 진정한 코이노니아를 나눌 수 있는 영성이 확보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승천 이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이 임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령은 바로 야훼의 영이며, 동시에 예수의 영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봅시다. 그 영으로 우리의 영혼이 가득한가요? 그렇지 못하다면 이제 우리는 에스겔을 통한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마른 뼈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뼈들에게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 좋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4-6)
에스겔의 환상과 이스라엘
에스겔은 남 유대의 멸망과 포로시기에 살던 제사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기록한 에스겔서는 신구약성서 전체를 통해서 가장 독특한 문학 형태를 보여줍니다. 소위 묵시문학이라는 형태의 이런 텍스트는 극단적인 상징을 통해서 그 당시의 현실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흡사 초현실주의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 상징의 표면적인 것에 머물지 말고 그것이 가리키려고 하는 실체 안으로 뚫고 들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에스겔서 읽기는 조금 고단한 작업입니다.
에스겔은 야훼의 기운이 자신을 들판 한 가운데로 끌어냈다는 말로 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흡사 천사의 손에 잡혀 공중 부양하듯이 에스겔은 들판을 두루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 들 바닥에는 마른 뼈들이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꽃과 숲, 귀여운 사슴을 비롯한 여러 동물과 식물들이 생명의 풍요로움을 나타내고 있어야 할 들판이 죽음의 골짜기로 변해 있었습니다. 야훼는 에스겔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 날 것 같으냐?” 에스겔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주 야훼여, 당신께서 아시옵니다.” 그 뒤로 야훼와 에스겔의 대화가 계속됩니다. 야훼는 마른 뼈들에게 당신의 말을 전하라고 에스겔에게 명령하십니다. “마른 뼈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뼈들에게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 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4-6)
에스겔이 야훼의 명령을 그대로 전하자 뼈들이 움직이면서 서로 붙은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힘줄이 이어졌고, 살이 붙었으며, 가죽이 씌어졌습니다. 이제 이 뼈들은 완전히 사람 모양을 갖추게 되었지만 아직 숨을 쉬는 건 아니었다. 여기서 야훼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두 번째 단계의 명령을 내리십니다. “주 야훼가 말한다. 숨아, 사방에서 불어 와서 이 죽은 자들을 스쳐 살아나게 하여라.”(9절) 에스겔에 야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숨에게 말을 전하자 숨이 불어와 이 시체와 같았던 것들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위의 내용은 신기한 마술처럼 보입니다. 사람이 죽어 여기저기 흩어졌던 뼈들이 서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소리가 나고, 힘줄과 살이 붙어서 사람의 꼴을 갖추더니 급기야 생명의 숨이 그들에게 들어가서 실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것은 실제의 사건이 아니라 묵시문학적 상상력입니다. 이 이야기가 전하려는 원래의 메시지는 따로 있습니다. 오늘 본문 11-14절이 그것을 설명합니다.
에스겔은 야훼 하나님에게서 이 마른 뼈 상징에 관해서 설명을 듣습니다. 마른 뼈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나라를 잃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 왔습니다. 고국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운명도 마른 뼈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의 삶은 이미 무덤에 장사된 것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그들을 무덤에서 끌어내서 고국으로 돌려보낸다는 약속으로 이런 환상을 에스겔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결론인 14절 말씀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의 기운을 불어 넣어 살려 내어 너희로 하여금 고국에 가서 살게 하리라. 그제야 너희는 나 야훼가 한번 선언한 것을 그대로 이루고야 만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야훼가 하는 말이다.”
야훼의 기운
만약 에스겔서가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 해방만을 언급하는 문서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별로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인 상황을 담고 있긴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야훼 하나님의 통치, 그의 구원행위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의미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구약성서를 읽으면서 늘 그 차이를 예민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치, 문화, 예술은 우리에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 에스겔의 환상 이야기에서 야훼의 기운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마른 뼈와 똑같은 신세로 전락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훼께서 당신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면 무덤 같은 바벨론을 벗어나서 고국인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야훼의 영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좀 더 리얼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에스겔은 앞에서 바른 뼈에 대한 환상을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창세기 2장의 창조설화와 연관됩니다. 야훼 하나님이 진흙으로 사람을 만든 다음에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2:7)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람의 형체를 가졌지만 아직 숨 쉬지 못하던 송장을 사방에서 불어온 숨이 살렸다고 합니다. 창세기의 입김, 에스겔의 숨은 모두 히브리어로 ‘루아흐’의 번역입니다. 루아흐, 곧 야훼의 영이 모든 생명을 가능하게 하고, 소생시키는 근원이라는 게 구약성서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여러분들은 야훼의 기운, 혹은 야훼의 영이라는 말이 별로 손에 잡히지 않을 겁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는 것을 어떻게 우리가 믿을 수 있을까요? 만약 우리의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만 현실이며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영으로 번역되는 루아흐는 재미있게도 바람으로도 번역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람을 곧 생명의 원천으로 본 것입니다. 따뜻한 바람은 초목에 새순을 돋게 하고 꽃을 피우며, 차가운 바람은 초목을 시들게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숨이 끊기고 살아있을 때는 숨이 붙어있습니다. 이런 걸 보면 바람과 영은 비슷합니다. 성서기자들은 이렇게 인간의 생명과 초목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그 근원이 보이지 않는 루아흐, 즉 야훼의 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그 야훼의 기운도 역시 이런 영입니다. 이 영에 의해서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인격적인 영
위의 설명을 들은 여러분은 영이 곧 생명 원리라는 생각이 들지 모르겠군요. 진화의 원리나 유전자의 원리, 또는 기(氣) 말입니다. 오늘 본문 9절은 그런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너 사람아,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숨아 사방에서 불어 와서 이 죽은 자들을 스쳐 살아나게 하여라.” 차력사들이 자신들의 실력을 실행하기 전에 기를 모아들이는 장면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성서가 증언하는 야훼의 영은 단순히 자연적인 생명의 원리나 동양에서 말하는 기가 아니라 인격입니다. 14b절을 보십시오. “그제야 너희는 나 야훼가 한번 선언한 것을 그대로 이루고야 만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 야훼 하나님은 어떤 분위기와 조건만 맞으면 저절로 작동되는 원리가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서 이 세계와 역사를 이끌어가는 인격체라는 말씀입니다.
거의 무덤 속에 들어가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에서 에스겔은 바로 인격적인 영으로 활동하시는 야훼 하나님에게 희망을 걸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야훼 하나님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어 자신의 선언과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가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걸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은 메시아가 아니라 저주받은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선언한 것을 그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이 십자가로 죽은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예상을 뒤엎고 자신의 의지로 생명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야훼 하나님은 이런 점에서 바로 우리의 참된 희망입니다.
오늘 현대인의 삶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보십니까? 2천5백 년 전 에스겔이 살던 시대처럼 들판에 마른 뼈들이 뒹굴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라크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팔레스타인 분쟁도 역시 한숨 돌릴 날이 별로 없습니다. 가난한 나라와 가난한 사람들이 그 가난을 벗어날 길은 아주 요원해 보입니다. 우리의 남북분단 체제는 아직 요지부동입니다. 지역구도가 얼마나 심각한지 우리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여실하게 보았습니다. 조금 잘 살아보겠다는 생각으로 새만금 갯벌을 파괴하고, 조금 빠른 기차를 타겠다고 천성산을 비롯하여 많은 산과 들의 숨통을 조였습니다.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은 곧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존층이 완전히 파괴되고, 지구의 사막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며, 인간성이 말살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야훼 하나님은 “한번 선언한 것을 그대로 이루고야 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영이십니다. 생명을 창조하시고 유지하고 완성하시는 영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어 마른 뼈에게 숨을 허락하시는 능력이십니다. 그분은 포로의 삶에서 자유의 삶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 우리를 이끌어내시는 그런 생명의 영이십니다. 우리는 에스겔과 함께 그런 하나님에게 모든 희망을 걸어둔 사람들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전할 사명
야훼 하나님이 마른 뼈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희망하는 우리는 단지 그런 일이 일어날 때까지 무조건 기다리기만 하면 될까요? 궁극적으로는 생명의 영만이 생명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훼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준 사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라고 구체적으로 두 번에 걸쳐서 명령하셨습니다. 한번은 3b절에 기록되어 있는 “이 뼈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이며, 다른 한번은 9a절의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입니다. 뼈는 물질이고, 숨은 영입니다. 생명은 이런 물질과 영이 신비한 방식으로 결합된 것입니다. 뼈가 제 모습을 갖추도록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그 뼈에 전하고, 그 모습에 들어가서 그것들이 살아나게 하라고 숨에게 전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에게 뼈와 숨에게 말을 걸 수 있는 그런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우리가 어떻게 그들에게 야훼의 명령을 전한단 말인가요?
여기서 야훼의 명령을 전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알린다는 의미입니다. 학생들이 선생님의 심부름을 할 경우에도 사실을 그 선생님의 뜻이 중요한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늘 이것을 우리가 받은 최선의 사명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부활이 궁극적인 생명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향해서 그 사실을 전할 사명이 주어졌다는 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전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생명의 현실들이 각성될 수 있도록 이 세상을 흔들어 깨우는 일도 필요합니다. 뼈들에게 말을 한다는 건 그들에게 생명의 영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위해서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보다 근원적이고 심층적인 생명의 세계를 세상에 알리고, 필요한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더 우선적인 일은 우리 자신이 마른 뼈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보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걸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만이 그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풍성한 생명의 리얼리티를 내면세계에 확보하고 있는지 아니면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처럼 죽어 있는지는 자기 자신이 가장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의 기준이 없는 건 아닙니다. 야훼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의 삶은 신비로운 기쁨과 평화로 가득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존재의 용기도 생기고, 타인과의 진정한 코이노니아를 나눌 수 있는 영성이 확보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승천 이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이 임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령은 바로 야훼의 영이며, 동시에 예수의 영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봅시다. 그 영으로 우리의 영혼이 가득한가요? 그렇지 못하다면 이제 우리는 에스겔을 통한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마른 뼈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뼈들에게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 좋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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