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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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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이 글은 개신교에서는 직접적으로 표현되고 있지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 교리를 받으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가톨릭 교리에서는 정확히 분류하고 있으니 참고하면 책을 읽고 이해하는데 다소나마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여 정리한다. 항목은 그대로두고 성경은 개역개정으로 고쳤다. 교리적 오류(예: 연옥)는 삭제하였으며, 용어의 일부분은 성도가 읽기 쉽도록 고쳤다 - 수덕?신비신학정리(고려수도원), pp 201-213.
먼저 죄의 동기(動機)를 설명하기에 앞서 대죄(大罪)와 소죄(小罪)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죄의 개념과 종류
죄는 하나님의 계명(誡命)을 의식적(意識的)으로 어긴 결과이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不順從)이며, 이로 인하여 죄는 하나님을 모독(冒瀆)하게 된다. 죄는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더 좋아함으로써, 복종(服從)해야 할 불변(不變)의 계명을 유린(蹂躪)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1) 대 죄
하늘나라를 얻는 데 필요한 계명을, 우리의 부주의로 어겼을 때, 그 죄는 대죄가 된다. 대죄는 초자연적 생명을 이루는 생명의 은총(恩寵)을 영혼으로부터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제105항).
이러한 이유로 성 토마스는 대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즉 대죄는 창조된 어떤 재물(財物)에 무질서와 방종(放縱)을 통해 집착함으로써, 하나님과 일치하는 생명의 은총을 잃어버리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등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2) 소 죄
우리가 어긴 계명이 구원을 얻기 위해 꼭 필요하지 않거나 가벼웠을 때 소죄가 된다. 즉 계명 그 자체는 엄(嚴)하더라도, 우리의 부주의함과 완전한 동의 없이 계명을 위반했다면, 그것은 소죄로서 생명의 은총 상태를 박탈당하지는 않는다. 이 상태에서는, 구원에 이르고 신적 친교를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 하기 때문에, 영혼의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다시 지적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죄는 하나님께 불경(不敬)을 드리고 그분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I. 대죄
먼저 대죄를 올바르게 판단하려면
1)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대죄란 무엇이고,
2) 대죄 그 자체는 무엇이며,
3) 대죄의 불행한 결과들을 생각해야 한다.
만일 묵상기도를 통하여, 위와 같은 관찰(觀察)을 심화(深化)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대죄에 대한 철저한 혐오감(嫌惡感)을 갖게 될 것이다.
1.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대죄
대죄에 관한 몇 가지 개념을 갖기 위해, 성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죄를 징벌하시고 판결하시는가를 살펴보자.
1). 대죄를 징벌하시는 방법
(1) 타락한 천사들
천사들은 내적인 교만의 죄를 범했다. 그 결과, 천사들을 당신의 창조물로서 뿐만 아니라 양자(養子)로 사랑하시던 하나님은, 영원히 그들을 당신에게서 떼어놓았다. 이로써 하나님은 천사들의 모든 행복을 빼앗고 지옥(地獄)에 보내시면서, 그들의 배반을 벌(罰)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의로우시므로, 그들이 지은 죄 이상으로는 절대로 징벌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선하심으로 엄격하심을 자제하실 때도 자비로우시다. 그러나 대죄는 가증(可憎)스러운 것이므로 엄격하게 처벌되어야 한다.
(2) 인류의 원조(元祖)
이미 우리가 제52항-제66항에서 보았듯이, 인류의 원조들은 자연적(自然的)이고 자연외적(自然外的)인 ,그리고 초자연적(超自然的)인 모든 종류의 행복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원조들 역시 교만과 불순종의 대죄를 짓게 된다. 그리하여 원조들도 은총의 생명과 함께 관대하게 주어졌던 무상(無償)의 은총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지상낙원(地上樂園)에서 쫓겨나면서 거기에 따른 모든 불행을 감내(堪耐)하게 된다(제69항-제75항).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원조를 자식처럼 사랑했으므로, 그들에게 내적 친교(親交)를 허락하신다. 그래서 의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원조들의 후손에게까지 이처럼 엄하게 벌을 주신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들에게 대죄는 무서운 악이며, 우리가 아무리 미워해도 부족함이 없음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었다.
(3) 외아들 예수님
성부께서는 인간이 영원한 멸망에 빠지도록 버려두지 않으셨다. 정의와 자비의 정당성을 동시에 조화시키기 위하여, 당신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하여 외아들 예수님으로 하여금 인류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시고, 인간들을 대신하여 대죄를 속죄(贖罪)하고 보상(補償)하도록 하셨다. 성부께서는 이 구원사업을 위해 당신 외아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셨던가?
성부께서는 외아들이신 예수님께 33년 동안의 고통과 모욕을 참게 하셨고, 예루살렘의 법정과 지방 총독의 법원에 서게 하셨다. 그리고 외아들에게 갈보리와 감람산에서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고통의 가시관을 씌우셨다. 만일 우리가 대죄에 대하여 알고 싶다면, 외아들이신 구세주(救世主)의, 구유에서부터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겸손 ․ 순종 ․ 가난과 노동의 실천적인 숨은 삶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도적(使徒的) 삶에서, 외아들 예수님은 박해와 중상모략(中傷謀略)의 희생자였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고통의 삶에서 친구들과 원수들로부터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고문(拷問)을 받아야 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고통받는 사람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솔직하게 우리 죄의 결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외아들 예수님은, "우리의 악행(惡行) 때문에 상처 입으시고,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셧습니다". 이 때 비로소 우리는 대죄가 바로 가장 큰 악이라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대죄를 단죄하시는가?
성서는 우리에게 대죄를 가장 추악(醜惡)하고 가장 범죄적인 것으로 소개한다.
① 대죄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不順從)이며, 그분의 계명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우리는 인류의 원조들을 통해 보았듯이 대죄는 정의(正義)에 따라 엄격하게 징벌된다는 사실이다.(창 2:17; 3:11~19) 특히 하나님께 속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분께 대한 불순종을 반항(反抗)과 거역(拒逆)으로 여겼다.(렘 2:4~8)
② 대죄는 모든 은인(恩人)들 가운데서 가장 각별한 분께 대한 배은망덕이며, 아버지들 가운데서 가장 사랑하시는 아버지께 대한 불효이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사 1:2).(가톨릭 참조 :자식이라 기르고 키웠더니, 도리어 나에게 반항하는구나)
③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의 배우자(配偶者)로서 우리에게 변치 않는 충실성을 요구하시기에, 대죄는 충실성의 결핍이며 일종의 불륜(不倫)이다.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렘 3:1)(가톨릭 참조: 너는 수많은 정부(情夫)와 놀아났다)
④ 대죄는 우리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계명을 공공연하게 거스르는 행위이므로 의(義)롭지 못한 것이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가톨릭 참조: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자입니다. 법을 어기는 것이 곧 죄입니다)
2. 대죄 그 자체는 무엇인가?
대죄는 모든 악의 결과이기 때문에 큰 악이며, 정확히 말해 존재하는 유일한 악이다.
1).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대죄는 하나님께 대한 불경죄(不敬罪)이다. 대죄는 우리 존재의 첫 근원(根源)이고 최종 목표인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이다.
(1) 하나님께서는 우리 존재의 첫 근원이시고 창조주이시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소유와 존재 그 자체를 그분께 드려야 한다. 그리고 전능한 통치자이신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대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뜻을 더 따르고,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좋아하는 등, 하나님께 불순종하였다. 거기에 더하여 창조받은 우리는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거스려 반항하였다.
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반항이, 무한히 선하시고 지혜로우신 스승에 대해서는 더욱 심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과 당신 영광에 필요한 것이 있더라도,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잘 알고 있듯이 약하고, 깨어지기 쉽고, 잘못을 범하기 쉬운 그만큼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반항은 더욱 심각하였다. 하나님의 계명보다 대죄를 더 좋아하였던 것이다.
② 우리는 어릴 때부터 기독교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하나님께 대한 반항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과 대죄의 간교함에 대해 구체적이고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다. 그러기에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잘 아는 그만큼 그분께 대한 반항은 더욱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③ 왜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배반할까? 우리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야만적인 수준으로 낮추고 있다. 우리를 망하게 하는 천한 쾌락을 위한 어리석은 교만으로, 하나님께만 속하는 그분의 영광을 차지하려 한다. 그 결과 우리는 욕심과 지나가는 하찮은 이득을 위해 영원한 행복을 희생시킨다.
(2) 하나님은 우리가 지향하는 궁극 목적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당신을 위해서였다. 하나님보다 더 큰 분은 없으시기에, 우리는 하나님 밖에서 참된 행복도 완덕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우리가, 그분께 되돌아가는 것은 필연적이고 당연한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被造物)이며 그분은 우리의 주인이시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찬양하며 그분께 영광을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함으로써 완덕에 이르며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전부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생각 ․ 소망 ․ 행위 등이 하나님께로 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대죄를 통하여 생긴 세속적인 행복에 만족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선다. 우리는 피조물을 좋아하고 이기적인 만족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함으로써 그분께 모욕(侮辱)을 드린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집착하는 피조물보다 피조물에서 얻는 쾌락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쾌락은 명백한 불의(不義)가 된다.
이 피조물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권위(權威)와 우리가 마련해 드려야 하는 외적인 영광을 빼앗으려 한다. 이러한 행위는 우리 마음의 성전(聖殿) 안에, 즉 하나님 곁에 우상(偶像)을 세우는 일종의 우상숭배가 된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힘 있는 말에 의하면,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렘 2:13). (가톨릭 참조: 나의 백성은 두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생수가 솟는 샘인 나를 버리고 갈라져 새기만 하여, 물이 괴지 않는 웅덩이를 팠다)
(3) 하나님은 아버지 같은 사랑으로(제94항) 우리를 염려해 주시고, 당신의 자녀인 우리를 양자(養子)로 삼으셨다. 값진 보석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당신의 생명과 비슷한 생명으로 살도록 초자연적 조직체(組織體)를 우리에게 주셨다 그리고 우리 안에 초자연적 생명이 커나갈 수 있도록 도움의 은총으로 우리를 채워 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대죄를 통하여 우리 아버지이시고 은인(가톨릭에서 사용함)이신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더 나아가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을 악용한다. 이렇듯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마저 남용(濫用)하고, 우리에게 은혜를 가득 채우시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모독(冒瀆)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수많은 은혜를 보상(補償)해야 할 책임이 있고, 징벌 받아 마땅한 배은망덕(背恩忘德)을 인정해야 한다.
2).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편에서 볼 때, 대죄는 엄격하게 말해 당신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같다.
① 결과적으로 대죄는 구세주(救世主)의 죽음과 고통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벧전 2:21). (가톨릭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계 1:5) (가톨릭 참조: ‥‥당신의 피로써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위와 같은 사상이 우리 마음에 감명을 주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구세주의 비통한 수난(受難)을 다음과 같이 묵상해야 한다.
나는 때때로 30데나리온도 안 되는 것을 위해 한번의 입맞춤으로 스승을 배반한 것이 아닌가? 나의 존재는 예수님이 결박당하시고 사형 선고를 받게 된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때 나는 군중과 함께 외치기 위해 그 곳에 있었다.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십자가에 못 박으소서"(요 18:40; 19:6). (가톨릭 참조: 그자는 안됩니다. 바라바를 놓아주시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나는 군사들과 함께 나의 방종(放縱)으로 그분을 채찍질하기 위해, 교만과 쾌락의 내적 죄로 그분께 가시관을 씌우기 위해, 그리고 그분의 어깨 위에 무거운 십자가를 지워 주고 못 박기 위해 거기에 있었다.'
이것에 대하여 올리에(Olier) 신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탐욕은 사랑을, 성냄은 온유함을, 초조함은 인내를, 교만은 겸손함을 못 박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악습을 통하여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괴롭히고, 교수형에 처하고, 죽여 버린다" 그러기에 우리는 잔인하게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박은 대죄를 진정으로 미워해야 한다.
② 현재 예수님은 더 이상 고통을 받지 않으시므로, 우리가 그분께 새로운 고문(拷問)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들의 잘못은 예수님께 계속해서 모욕(侮辱)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대죄를 지으면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무시하고, 그분께 우리가 드려야 할 순종과 감사와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에게 너그럽게 쏟으시는 예수님 피의 의미를 무익하게 한다. 이러한 배은망덕함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우리 자신에게 무거운 징벌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3. 대죄의 불행한 결과
하나님은 덕행에 대한 상(償)으로 행복을 마련하시고, 대죄의 징벌로는 고통이 따르는 벌을 마련하셔서, 상벌(賞罰)이 있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대죄의 결과를 보면서, 어느 정도 죄(罪)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다.
1). 이 세상에서 대죄의 무서운 결과를 바르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은총의 상태에 있는 영혼이 어떠한지를 회상(回想)해보아야 한다. 분명 이러한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참된 기쁨을 느끼며, 그분께서 주시는 은총 ․ 덕행 ․ 은사 등으로 영혼을 장식한 채, 성 삼위(聖三位) 안에 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혼이 하는 선행들은 도움의 은총에 의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행위들로 변화한다. 이러한 영혼은 하나님의 덕성(德性)과 용기에 동참하고, 그분의 자녀가 되는 거룩한 자유를 누리며, 특히 천상 행복의 감격을 미리 즐긴다. 이와 반대로 대죄는 우리 영혼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① 대죄는 우리 영혼으로부터 하나님을 쫓아낸다.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은 천상 행복의 예견(豫見)이기에, 그분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영벌(永罰)의 서곡(序曲)과 같다. 그래서 영혼의 샘이신 하나님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결국 모든 행복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② 대죄는 우리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과 비슷한 생명으로 살게 했던, 성화은총(聖化恩寵)을 잃어버리게 한다. 그러므로 대죄는 일종의 영적인 자살과 같다. 즉 대죄는 성화은총과 함께 우리를 동반하던 은사와 덕행의 영광스러운 안내자들을 잃어버리게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무한하신 자비로 대죄를 지은 영혼들에게 믿음과 희망의 덕을 남겨놓으셨다면, 이러한 덕목들은 더 이상 애덕의 도움 없이도, 구원론적(救援論的)인 회개와 속죄의 소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즉 천상 행복을 기다리면서, 믿음과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슬픈 상태를 보여 주고, 우리로 하여금 쓰라린 양심의 가책(呵責)을 느끼도록 한다.
③ 대죄는 우리가 많은 노력으로 쌓아놓은 과거의 모든 공로(功勞)를 잃어 버리게 한다. 그 공로를 되찾으려면 우리의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대죄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는 하늘나라를 위해 아무런 공로도 세울 수 없다. 이러한 현실은 초자연적 재산에 얼마나 큰 손실을 가져올 것인가!
④ 이제 우리는 죄인이 감내해야 할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인 속박(束縛)에 대하여 말하겠다. 우리는 대죄 때문에, 향유(享有)해야 할 자유와 은총을 잃어 버렸다. 그리고 사슬이 풀린 악한 욕망과, 피하기 어려운 재범(再犯)의 기회를 벗어나지 않는 습관들로 인하여 죄의 노예로 전락해 버렸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벧후 2:19) (가톨릭 참조: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영혼은 차츰 정신력이 약해지면서 도움의 은총이 줄어들게 되고, 낙담과 절망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만일 이때 하나님께서 넘치는 자비와 은총의 심연에까지 내려오지 않으신다면 그 영혼은 불행하게 되고 말 것이다.
2). 불행하게도 죄인이 끝까지 은총을 거부한다면 그에게는 온갖 참혹함과 지옥이 있을 뿐이다.
(1) 이러한 관점에서 죄인이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은 바로 지옥의 형벌이다. 그러기 때문에 은총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죄인을 구하게 한다. 죄 중에서 죽기를 바라거나, 의식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를 바라거나, 마음가짐을 바꾸려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서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영혼은 세상에 살면서 자신의 근심과 쾌락에 열중하느라 스스로의 상태가 얼마나 참혹한지를 볼 겨를이 없다.
그러나 지금 근심이나 쾌락에 몰두하지 않는 영혼은 끊임없이 지긋지긋한 현실 앞에 서게 된다. 그래서 영혼은 자기 본성의 밑바닥에서 자신의 마음과 정신적인 갈망을 통해, 자기 존재의 뿌리인 하나님께 억제할 수 없이 마음이 이끌림을 느낀다. 그리하여 우리는 행복과 완덕의 유일한 원천이시며,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신 성부를 통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구원자(救援者)를 얻게 된다.
그런가하면 한편으로는 억제할 수 없는 힘인 대죄로 인하여 구원자로부터 사정없이 밀려나고 있음을 느낀다.
죽음은 영혼을 꼼짝하지 못하게 고정시켜 버린다. 왜냐하면 죽는 순간 영혼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그로 인하여 영혼에게는 더 이상의 행복도 완덕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영혼은 자기 죄에 얽매어 비천하게 되고 자기 자신의 품위(品位)를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 즉 "저주는 나에게서 물러가라".
(2) 대죄는 영혼에게 지옥의 형벌보다 더 무서운 감각적인 징벌을 덧붙인다. 나아가 영혼과 공범이었던 육체는 그 형벌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이미 비난받은 영혼을 고문(拷問)하는 영원한 절망은, 그 육체 안에 누구도 해소시킬 수없는 갈증과 강렬한 열정을 일으킨다. 물론 이 열기(熱氣)는 실제적일 것이다. 이 열기는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속된 열광과는 다르지만, 이 징벌의 열기는 우리의 감각과 육체를 벌하기 위한 하나님 정의(正義)의 도구(道具)이다.
이렇듯 영혼들이 대죄를 지었을 때 처벌당하는 것은 정당하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쓴 것으로 벌을 받는다"(지혜 11:17. 가톨릭에만 있음). 이로써 악인은 창조된 피조물을 무질서한 방법으로 즐겼기에, 피조물들 안에서 고통의 도구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에 의해 지도되고 점화된 이 징벌의 열기는, 영혼들이 즐겼던 악한 쾌락이 강렬했던 것만큼 그들을 고문(拷問)할 것이다.
(3) 이처럼 영혼에게는 두 가지, 즉 지옥과 감각의 징벌에 대한 고통은 영원히 끝이 없을 것이며, 바로 거기에 악인들의 징벌은 절정에 이를 것이다. 아주 작은 고통이라도 그 징벌은 지속적(持續的)이기 때문에 매우 견디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무수한 세기가 지난 후에도 징벌은 다시 시작될 것이며,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격심한 이 고통에 대하여 영혼은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대죄는 어떤 방법으로든 처벌되어야 할 가증(可憎)스럽고 유일한 악이며 참된 악이다. 그러므로 단 한번의 대죄로 영혼이 더러워지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 이러한 대죄를 잘 피하기 위해서는 소죄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II. 고의적인 소죄
완덕(完德)의 관점에서 볼 때, 자신의 확실한 동의(同意)나 고의적(故意的)인 의도로 짓는 죄와, 얼떨결에 짓는 가벼운 잘못사이에는 분명히 큰 차이가 있다.
얼떨결에 짓는 잘못들
성인들도 가끔 의지의 나약함과 경솔함으로 인해, 한 순간의 잘못에 이끌려 가벼운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애덕을 거스르는 말이나 남을 판단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가끔 죄를 범하기도 한다. 이러한 죄들로 인해 열심한 영혼들은 죄의 쓰라림과 함께 슬퍼하며 후회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죄들은 완덕에 이르는 데 큰 장애(障碍)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나약함을 잘 아시는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쉽게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 "그분은 우리의 우상(偶像)을 잘 알고 계신다". 이러한 행위들은 우리의 나약함으로 인한 잘못이므로, 의식적(意識的)이고 항구적인 겸손과 회개를 통하여 즉시 보상(補償)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죄들에 대하여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실망하지 말고 그 잘못의 횟수를 줄이는 일이다.
① 우리는 죄를 경계(警戒)함으로써 그 잘못들을 줄일 수 있다. 즉 죄의 원인에까지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그 잘못들을 없앨 수 있다. 죄에서 이탈하려는 열의나 노력도 중요하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은총에 더욱 의지하도록 해야 한다. 특히 우리는 소죄에 관한 모든 애착(愛着)을 버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지적하듯이, "만일 우리 마음이 소죄에 얽매여 있다면, 신심(信心)의 감미로움뿐 아니라 신심 그 자체를 오래지 않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② 그렇지만 우리는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화를 내는 것 때문에 자신에게 화를 내고, 슬퍼하는 것 때문에 슬퍼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은 자신의 불완전함 때문에 불안해 하고 당황해 하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잘못을 마치 다른 사람의 잘못을 쳐다보듯 너그럽게 바라보아야 한다. 실패와 죄를 미워하되, 자신의 초라함과 연약함을 잘 인식하는 태연한 마음이어야 한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침착하고 굳은 의지를 가지고 우리의 모든 잘못들을 반성하면서 더욱 큰 사랑과 성실성을 통해 우리의 의무를 완성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고의적(故意的)인 의도(意圖)가 있는 소죄는 영적 진보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므로, 조심스럽게 이 죄와 싸워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이 소죄를 이해하기 위해 그 죄의 악의(惡意)와 결과를 살펴보자.
1. 고의적인 소죄의 악의(惡意)
고의적인 죄는 윤리적인 악이다. 그러기에 이 죄는 사실상 대죄 다음가는 큰 악이다. 물론 이 소죄는 구원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지는 않으나, 우리의 발걸음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늦추게 하고, 소중한 시간을 잃게 하며, 특히 하나님께 대한 불경(不敬)이 된다. 이 소죄는 자신의 악의와 관계된다.
1). 소죄는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不順從)이다. 비록 가벼운 사건이지만, 심사숙고한 후에 실천한 잘못이기 때문에, 믿음의 눈으로 볼 때는 진정 가증(可憎)스러운 행위이다. 소죄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존엄(尊嚴)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1) 따라서 소죄는 하나님께 대한 모욕(侮辱)이며 불의(不義)한 행위이다. 우리는 저울 한 쪽에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다른 편에는 우리의 쾌락과 허영과 변덕을 올려놓고 저울질하면서, 뻔뻔스럽게도 하나님보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려한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얼마나 큰 모욕인가! 이처럼 우리의 참된 의지를 꺾어가면서까지, 오류(誤謬)와 변덕에 빠진다면 얼마나 큰 불행이겠는가.
성녀 예수의 데레사는, 미리 생각하며 고의적으로 짓는 사람의 죄는 다음과 같을 것이라고 말한다. "'주님, 저의 이 행동이 당신께는 불쾌하시지만 저는 이것을 하고야 말겠습니다. 또 당신이 보고 계시는 것도, 싫어하시는 것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당신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제 멋대로 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짓는 죄가 어찌 가볍다고 하겠습니까? 그 허물이 비록 가벼운 것이라 하더라도 그 죄는 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이와 같이 잘못된 생각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킨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전적으로 순종함으로써 그분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창조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거부하면서, 가벼운 문제들마저 그분 영광의 몫을 손상시키고 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즉 마리아처럼 우리는 모든 행위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원한다고 선포하는 대신, 이러저러한 이유를 핑계로 그분을 찬양하는 것을 실질적으로 거부한다.
(3) 이러한 삶은 하나님께 대한 배은망덕(背恩忘德)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벗들이기 때문에 더 많은 은혜로 채워 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과 감사를 원하고 계심을 알면서도, 그분을 위해 작은 희생마저도 거절한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기는커녕 그분의 불쾌함마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우정(友情)은 분명히 식어질 것이다.
아낌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역시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며 당신께 돌아오기를 바라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가톨릭 참조: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한 부분만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 것들은 모두 자기가 갖는다. 또 하나님과 우정(友情)이 계속되기를 원하면서도, 갈라진 마음만을 그분께 드리고 우리의 보잘것 없는것을 가지고 그분과 흥정한다. 이러한 우리의 무례(無禮)함은, 하나님과의 우정을 경감(輕減)시킬 뿐이다.
2. 고의적인 소죄의 결과
이 세상에서 고의적(故意的)으로 자주 범하는 소죄는, 많은 은총을 빼앗아 우리의 열정을 점차 감소시키며 대죄를 짓는 데 영향을 끼친다.
(1) 소죄는 성화은총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마저 우리 영혼으로부터 빼앗아 버린다. 그리고 영혼이 소죄의 유혹에 저항했다 하더라도, 그 소죄는 성실성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영광마저 빼앗아 버린다. 이로 인하여 영혼은 끝없는 멸망을 얻게 되며, 이 세상보다 더 값진 보물을 잃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2) 소죄는 하나님께 온전히 자기 자신을 봉헌(奉獻)하려는 열정을 감소시킨다. 이러한 열정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높은 이상(理想)과 한결같은 노력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소죄의 습관은 다음 두 가지의 모습을 보여 준다.
① 소죄에 대한 애착만큼 우리의 이상(理想)을 감소시키는 것은 없다. 소죄는 먼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 무엇이든 참고 견디며 완덕의 정상을 겨냥하게 유도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금지된 작은 쾌락들을 향유하기 위해 먼 길을 가는 우리의 걸음을 고의적(故意的)으로 멈추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소죄는 그 영혼의 귀중한 시간들을 잃어 버리게 한다. 즉 높은 곳을 바라보면서도 곧 시들어 버릴 꽃을 꺾는 즐거움을 갖게 한다. 그로 인하여 영혼이 피로(疲勞)를 느낄 때, 하나님으로부터 불림을 받은 완덕의 정상(頂上)은 매우 가파르고 멀어 보인다.
그로 인해 소회는 우리에게 완덕의 목표를 높게 잡을 필요가 없으며, 스스로 보다 나은 셈을 통해 구원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예상했던 이상(理想)은 더 이상(以上) 마음을 사로잡지 않게 된다. 결국 우리는 자신 안에 일어나는 작은 쾌락, 감성적인 우정, 험담(險談)들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기 몫만을 취하게 된다.
② 이 때 완덕을 향한 우리의 숭고한 열정(熱情)은 무너진다. 그리고 겉으로는 우리가 완덕의 목표에 도달할 희망 속에서 경쾌한 걸음을 걷는 것같이 보이겠지만, 우리는 매일 조금씩 피로에 대한 무게를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완덕의 정상(頂上)에 등반(登攀)하기를 원하게 되었을 때, 소죄에 대한 우리의 애착은 영적 진보를 방해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땅에 매여 있는 새가 헛되게 도약(跳躍)을 시도하지만, 다시 땅으로 떨어져 상처를 입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영혼도 포기(抛棄)하지 않으려는 애착에 얽매여, 자신들이 시도(試圖)하는 헛된 노력에 상처를 받아 조금씩 소죄에 떨어진다. 물론 가끔씩은, 스스로 완덕에 대한 열정을 되찾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소죄의 끈이 우리를 잡아당겨 더 이상 수많은 끈을 끊어 버리려는 확고한 인내가 없기 때문에 좌절하고 만다. 즉 불안(不安)으로 변해 버린 사랑에 대한 실망만이 있을 뿐이다.
(3) 영혼을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은, 우리를 조금씩 대죄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금지된 쾌락에 대한 우리의 성향은 증가하는 한편, 하나님의 은총(恩寵)은 감소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죄로 인한 우리의 모든 타협을 두려워 할 순간이 올 것이다.
① 이로써 우리에게는 악한 쾌락에 대한 성향이 증가한다. 그리고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적(敵)인 소죄에 동의하면 할수록, 더 많은 탐욕을 요구하게 된다.
그 결과 오늘의 나태(懶怠)는 우리에게 묵상기도 시간을 5분 줄이도록 하지만, 내일은 10분을 더 줄이도록 요구할 것이다. 즉 오늘의 어떤 쾌락은 작은 경솔함만을 요구하지만, 내일의 쾌락은 보다 큰 대담성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위험한 기질(氣質)을 어떻게 바르게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영혼들은 이런 정도의 잘못은 가벼운 소죄일 뿐이라고 안심한다.
이 얼마나 큰 불행한 일인가! 이와 같이 작은 잘못들은 조금씩 더 큰 잘못을 짓게 한다.
그래서 조심성 없이 되풀이되는 경솔함은 감각과 상상력을 보다 깊게 혼란시킨다. 이 말은 타버린 잿더미 속에 가려져 있는 불씨는 언젠가 화재(火災)의 온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은신처에서 희생물을 독살하려고 멈추어 있는 뱀과 같다.
소죄에 대한 위험은 우리에게 너무 노출되어 있기에 그 두려움이 적다 그로 인해 우리는 소죄의 위험과 친숙하게 되고, 마음의 보루(堡壘)인 울타리가 하나 둘씩 넘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맹렬한 공격의 순간이 오면, 소죄는 우리 마음 속에 침투하게 된다.
②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의 불충실에 비례하여 차츰 감소한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 결국 은총은 우리의 자세와 협력 정도에 따라 주어진다는 것이 섭리적(攝理的)인 법칙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성서에 나오는 말씀과 같은 뜻을 가진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13:12). (가톨릭 참조: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죄에 대한 애착으로 인해 은총(恩寵)을 거부하게 되고, 우리 마음 안에 일어나는 은총의 작용을 장애물로 여긴다. 이러한 행위로 인해 우리는 은총을 덜 받게 된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으로도 본성(本性)의 사악(邪惡)한 성향을 이기지 못한다면, 경감(輕減)된 은총과 힘으로 어떻게 죄에 저항할 수 있을 것인가?
ⓑ 게다가 그 영혼이 마음의 평정(平靜)과 용기가 부족했을 때, 선으로 인도하는 은총의 내적 작용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즉 마음 안에 일어나는 열정들의 소음 때문에 은총은 즉시 묻혀 버리고 말 것이다.
ⓒ 그러기에 은총은 희생을 통해 비로소 우리를 성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소죄들에 대한 집착으로 얻게 된 쾌락의 습성들은 우리로 하여금 희생에 많은 어려움을 느끼게 할 것이다.
우리는 랄르망(L. Lallemant) 신부와 함께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영혼의 파멸은 소죄를 많이 짓는 데서 옵니다. 그래서 소죄는 신적 빛과 영감, 은총과 내적 위로, 악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한 열성과 용기를 경감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그 결과 소죄로 인한 무분별 ․ 연약함 ․ 잦은 실패 ․ 습관 ․ 무감각함이 뒤따라 오고, 마침내 우리 안에 애착이 승리했기 때문에, 우리는 악에 대한 감각 없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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